산암잡록(山艤雜錄)

28. 스스로 자초한 응보 / 장구육(張九六)과 방국진(方國珍)

通達無我法者 2008. 3. 5. 18:13
 

 

 

28. 스스로 자초한 응보 / 장구육(張九六)과 방국진(方國珍)


원 지정(元 至正) 병신년(1356)에 장사성(張士誠)이 소주(蘇州)성을 공략했을 때 그의 아우 구육(九六)이라는 자가 맨 먼저 입성하여 살 집을 물색하다가 승천사(承天寺)가 그윽하면서도 밝은 것을 보고서 내심 좋아하였다. 그곳을 궁실로 개조하고자 병사에게 법당의 불상을 부수도록 하였으나 병사들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그 누구도 감히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구육이 화가 나서 불상의 얼굴에 활을 쏘아 맞힌 뒤 다 부숴버리고 장사성을 맞이하여 그곳에 살았다. 그 이듬해 정유년(1357)이 되자 명나라의 많은 병사가 여구(呂口)의 황태(黃埭)를 공격하니 구육이 병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오른팔을 잘리고 죽었던 것이다.

무술년(1358) 방국진(方國珍)이 강절성(江浙省)의 분성참정(分省參政)이 되어 명주(明州)를 수비할 때였다. 그의 좌우사관(左右司官) 유인본(劉仁本)이 문학을 몹시 좋아하여 평소에 지은 문장과 시를 편집․간행할 때 성 중에 있는 사찰의 장경을 가져다가 이를 풀칠하여 표지를 만들고 경문을 지워 없앤 후 자기의 시와 문장을 베껴쓰니, 우리가 보기에도 뼈에 사무치게 마음 아팠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오(吳)의 원년(1359)에 군대가 명주를 점령하여 방국진이 조정에 항복하자 유인본이 충성하지 않는 죄를 논하여 그의 등을 채찍질하니 등이 터지고 창자가 드러난 채 결국 죽고 말았다.

구육은 하나의 용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죄복(罪福)의 응보를 알지 못한 자이니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유인본은 공자의 학문을 배우고서 차마 이러한 일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 공자의 말에 의하면, “신을 공경하되 신명이 앞에 있는 것처럼 하라”고 하였다. 더구나 우리 부처님은 삼계의 큰 성인이시다. 그런 까닭에 한 사람은 불상을 부수고 한 사람은 불경을 파손하였는데 발걸음을 돌리기도 전에 극형의 응보를 받았다. 이는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으로서, 실제로 스스로가 자초한 응보이지 우리 성인이 보복한 것은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