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천박한 소견으로 윗사람들의 어록을 펴내다
중모(仲謀)스님이 온주(溫州) 선암사(仙岩寺)에 주지할 무렵 천하는 바야흐로 태평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선승들이 찾아왔다. 나는 명 성원(明性元), 서 영중(瑞瑩中)스님과 함께 셋이서 선암사에 갔었다. 성원과 영중은 시자로 있었고 나는 이미 장각(藏閣) 소임을 맡은 뒤였다. 때마침 보름이 되어 스님께서 법상에 올라 설법하였다.
”한 번의 묵언으로 납승에게 대답하면 천둥이 우르렁대고 번갯불이 번쩍이고, 세 번 불러 그 뜻을 깨달으면 옥이 구르고 구슬이 돌며 칠팔십번 해주면 정신없이 떠받히고 부딪혀 사람을 막히게 한다.”
이어 주장자를 뽑아든 채 게송을 이었다.
어젯밤 서풍이 베갯머리에 불었을 때
끝없는 매미소리 나무숲이 시끄럽구나.
昨夜西風枕巖秋 無限蟬聲噪高樹
그 후 그의 어록을 편집하던 사람이 “애새쇄(礙塞殺)' 세 글자를 “능유기(能有幾)'라고 바꿔썼다. 이는 말로 표현하는 어려움을 모르고서 천박한 소견으로 선배들의 말을 쉽사리 고쳐 써버린 것으로서, 수료학(水潦鶴)으로 많은 부처님의 기어(機語)가 바뀐 일과 흡사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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