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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생명의 진(眞)소식 - 광덕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5. 7. 13:32
 

 

 

 

참생명의 진(眞)소식 - 광덕스님


예로부터 조사스님네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구해 주소서 하는데 누가 너를 구속(拘束)했더냐, 사람 사람마다 눈앞에 둥근 달이 뚜렷하다. 사람 사람마다 눈앞에 지혜(智慧)의 밝은 달이 가득해 지금 아무도 그대의  밝은 달을 빼앗아 간 적도 없고, 빼앗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구름이 가릴 수도 없어 너에게는 둥근 달이 그렇게 가득하다. 그리고 너의 발 밑에는 끝없는 향수(鄕愁)와 함께 청풍(淸風)이 불어닥치고 있다. 이 향기로운 청풍(淸風)을 누가 막을쏘냐. 너의 생명(生命), 너의 앞에 이와 같은 끝없는 지혜의 둥근달, 늘 끝없는 따뜻한 지혜와 자비(慈悲)의 위신력(威神力), 모든 것을 무한대(無限大)로 창조(創造)시킬 수 있는 절대(絶對) 권능(權能) 그것이 그냥 자기한테 안겨져 있다."


이것은 결국 반야(般若)의 눈에 의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내가 불자(佛子)라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다행스러우냐 하는 이 불자(佛子)라는 믿음은 이와 같이 해서 자기의 생명에 눈 뜬 자입니다. 벌떡이며 뛰고 있는 나의 심장이 필경 이러한 무한공덕장세계(無限功德場世界)의 표현(表現)이고, 내가 사는 이 국토(國土)가 악(惡)한 사람들이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오거나, 지옥(地獄)에 가기 위해서 임시(臨時) 여기와 있는 세계(世界)이거나, 어디 좋은데 가기 위해서 임시 수업(修業)하는 장소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내 땅, 이 국토(國土), 이 만남, 이 시간(時間), 이 순간(瞬間), 순간이 바로 끝없는 광명(光明)이 퍼지는 세계(世界)입니다.


모두가 이 땅에 살되 이 땅이 고난(苦難)의 세계(世界)가 아니다. 이 땅이야말로 참으로 진리(眞理)를 구현(具現)시키고 진리(眞理)로서 자기를 삼고, 진리(眞理)를 가지는 그 노래를, 진리를 가지는 그 기쁨을, 진리가 가지는 그 환희(歡喜)와, 진리가 가지는 그 용기(勇氣)와, 진리가 가지는 그 지혜(智慧)를 내어 써서 사는 세상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 출가수행(出家修行) 재가수행(在家修行)



형제(兄弟) 가운데 한 분이 저한테 와서 물었습니다. "출가수행(出家修行)이 옳은 수행(修行)입니까, 재가수행(在家修行)이 옳은 수행(修行)입니까." 그래서 "옳은 수행(修行), 참 수행(修行)이 라는 것은 차별(差別)할 수 없는 것이지마는 차별해서 말을 한다고 하면 재가수행(在家修行)이 진짜 수행(修行)이다. 출가수행은 쉽고 재가수행은 어렵다. 출가수행은 참으로 재가수행에서의 막히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갖고 하는 위험(危險)이 따른다. 출가수행은 물에 들어가서 땅을 짚고 헤엄치는 것이고 재가수행은 깊은데 들어가서 수영(水泳)을 배우는 것이다. 잘못하면 빠져 죽는다. 그런 위험(危險)이 따른다. 그러니까 그만큼 재가수행이 어렵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출가(出家)다 재가(在家)다 하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의 결정(決定)과 환경조건(環境條件)과 관계(關係)가 있습니다. 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반야(般若)의 눈에서 볼 것 같으면 사실(事實)인즉 처처(處處)가 어떠한 곳이던 자기의 진실생명(眞實生命)을 피우는 것입니다. 환경이 용이(容易)하고 안이(安易)하면 오히려 진실생명(眞實生命)을 내어 쓰는 것이 환경조건이라는 한계(限界)속에서 내어 쓰기 때문에 그만큼 수행력(修行力)이 부족(不足)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가수행은 그만큼 어려워서 다들 이 세상을 살면서 원(願)만 바꾸지 않고 살뿐입니다. 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事實)은 그 재가수행 가운데서 진실한 깨달음의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출가하신 스님네들만 하더라도 아주 환경이 좋은데서 수행을 해서는 수행력이 제대로 나오지 아니하고 오히려 재가수행과  같은 거친 환경 가운데 뛰어 나왔을 때, 이제까지 조용한 가운데 안전지대(安全地帶)에서 수행한 것이 참 힘이 약했구나 하는 생각이들어서 힘을 더 길러야 되겠다 하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진실한 수행이 거기 있다 이런 말을 저는 합니다. 그러나 사실인즉슨 이 깨달음이라는 그것이 장차 오는 것도 아니고, 바로 내가 내 생명(生命), 내 호흡(呼吸)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출가했다고 해서 출가에 막힘이 없고, 안일(安逸)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얻었다고 하는 생각에 빠지거나, 그런 일에서도 벗어나게 되지 않겠는가 합니다.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 이 몸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이 바로 진리광명(眞理光明)의 표현(表現)이며, 그 진리는 밖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내 생명에 있는 생명의 참 빛의 표현(表現)이다." 이런 입장(立場)을 참으로 알아서 우리가 보현행원(普賢行願)을 실천하고 우리가 참으로 경사(慶事)스럽고 기쁜 일에 대해서 끊임없는 자기 눈이 떠나지 아니하고 생명의 호흡대로 살아간다고 하면 재가·출가의 걸림 없이 수행은 나날이 성장(成長)할 것입니다. 보리(菩提)의 싹은 그와 같이 해서 완전히 자기표현(自己表現)을 할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우리는 본래 빛을 뿌리는 자



대개 우리들 불교 믿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우리 일상 생활(日常生活) 가운데서 경사(慶事)스럽고 기쁜 일을 만나야 찬탄(讚嘆)하고 찬양(讚揚)하는 소리가 나오지, 고통(苦痛)에 매인 사람이 무슨찬양(讚揚)이 나오고, 찬탄(讚嘆)이 나오고, 경사(慶事)스럽고, 기쁘다는 말이 나올까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반야의 눈으로 볼 때 바로 내가 부처님이고 불자인 까닭에 깨달음의 법문을 빼놓고 다른 게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참된 찬탄과 참된 경사스러움과 기쁨, 그것이 자기 생명에서부터 용솟음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보현행자의 서원 서분을 읽었습니다 마는 그것은 결국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 이것의 뿌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 그것은 삼계(三界) 고해(苦海)라고 합니다만 이 고해(苦海)라고 하는 것은 껍데기 현상 물질(物質)에 매인 것이고 그 매임이 없을 때, 내가 불자(佛子)다 하는 깨달음의 뿌리에 서 있을 때, 바로 이 삼계(三界) 전체(全體)가 진리광명(眞理光明)이 충만(充滿)한 세계(世界)인 것입니다. 이런 때 우리 한사람 한 사람들이 빛을 뿌리는 자, 빛을 행(行)하는 자(者), 광명(光明)으로 사는 자(者), 이 국토(國土)에 광명(光明)을 충만(充滿)시키는 자(者)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깊이 두고, 자기 가운데 흐르고 있는 진리광명(眞理光明)의 불씨에 이제까지 아! 허망(虛妄)한 데에 매달려 가지고, 꿈같은 인생(人生)에  매달려 가지고 내 몸뚱이를 거기에 몰아 넣어서 슬픔에 빠져 가지고 죽어 버릴까 하고 절망으로 몰아갔던 것이로구나!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했던 밑뿌리 자리에는 일찍이 생사를 초월(超越)한 밖에 있는데 그걸 몰랐구나, 이런 것을 알 것입니다. 반야(般若)에 이르러야 필경(畢竟)의 생명(生命)과 필경의 진리(眞理)가 자기(自己) 가운데서 살아 있다는 것을 봐서 어떠한 이론을 꾸며대는 것이 아니고 눈앞에 드러난 하나의 현실(現實)로써 진리(眞理)를 쓰게 되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갰습니다.




⊙ 휘둘린 생각 멀리 떠나서



般若心經(반야심경)에 보면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 이라는 문구(文句)가 나옵니다. 전도(顚倒)에서 벗어난다. 전도(顚 倒)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말하자면 구름이 검으니까 이 세상이 깜깜하구나, 구름이 무지개처럼 아름답고, 이 세상이 허망하구나! 이렇게 구름같이, 꿈같이, 매달려 살다가 구름이 흩어지고 보니까, 아니면 구름 밖의 푸른 하늘을 보니까, 거기서 영원불변(永遠不變)의 광명(光明)이 거기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휘둘린 생각에서 벗어나니까, 휘둘린 생각에서 매이지 아니하니까, 그 다음에는 참된 열반(涅槃)의 세계가 나온다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전도(顚倒)된 허망(虛妄)한 생각(生覺)을 다 떠나니까 열반(涅槃)을 얻는다,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것은 다들 아시다시피 모든 번뇌(煩惱)가 끊어진 상태(狀態), 말하자면 여기 장작이나, 아니면 종이나, 지푸라기 바짝 마른 것을 놓고 불을 지피니까 활활 탑니다. 타고 있는 것은 중생세계(衆生世界)입니다. 온갖 것이 합해져서 와글와글 돌아가며 변화(變化)해 갑니다. 이것이 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세계(人間世界), 범부세계(凡夫世界)죠, 이 중생세계(衆生世界)가 다 타 버려서 꺼진 상태(狀態), 그러니까 탈 것도 없고 불도 없고 타고난 재도 없어요, 그러면 무엇이 남았는가? 우리가 보고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다 없어요, 다 꺼진 상태, 없는 상태죠.


그냥 억지로 우리가 절대(絶對) 무한(無限)이다. 완전 구족(具足)한 세계다 라는 말을 씁니다 마는 부적절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 열반의 경계는 그 유한(有限)의 세계(世界), 유 . 무, 변화(變化)의 세계, 거짓 허망의 세계, 고통을 가져오는 세계, 마침내는 고통과 죽음을 가져오는 세계, 이러한 것이 완전히 없어진 무한 청정의 진리 국토 세계를 우리는 구경열반(究竟涅槃)이다라고 배웠습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불이타다가 훅 불어서 다 꺼진 상태입니다.

필경 이와 같이 해서 있다, 없다, 물질이다, 육체다, 세간의 고(苦)다, 악(惡)이다 하고 여기에 감정(感情)을 가지고 우리가 희망(希望)을 걸고, 거기다 애착(愛着)을 가지고 집착(執着)해서 매달려 있을 때는 범부세계(凡夫世界)가 구름과 같은 세계에 매달려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름의 세계의 허물을 벗어났을 때 진리의 청정세계(淸淨世界)가 나타나니 이것은 그야말로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고 절대(絶對)도 아니고 개념(槪念)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 열반(涅槃)이라고 했습니다. 열반(涅槃)이란 우리의 생각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이론이 지어낼 수있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論理)의 구조가 바뀐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말을 하자니까 열반(涅槃)이라고 하고 무한청정(無限淸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껍데기, 열반경계(涅槃境界)의 밖에 있는 이 변화세계(變化世界)에서 볼 것 같으면 공(空)이다, 무(無)다, 이렇게 말을 하지마는 변화세계(變化世界),  범부세계(凡夫世界)에 눈을 두지 아니하고 깨달음 자체 바로 일체(一切) 청정(淸淨)한 알맹이 자체(自體)에 들어와서 열반의 주체적(主體的) 입장에서 보면 유(有)다, 무(無)다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 열반사덕(涅槃四德)



열반사덕(涅槃四德)은 열반경(涅槃經)에 나오는 말씀인데,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을 말합니다. 상(常)이라는 것은 영원(永遠)하다는 것입니다. 보통 불교(佛敎)를 공부하면 모든 것은 허망(虛妄)하다.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알다시피 물질적(物質的)인 것, 감각적(感覺的)인것,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 여기에 매달려 있으니까 그것은 무상한 것이다. 자꾸 변하고 흘러가는 것이다, 그것을 붙잡아 봐야 안 된다고 하는 뜻에서 무상을 설명한 것입니다.


깨달음 자체 이 열반세계(涅槃世界)에 들어와서 보면 무상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개념화(槪念化)할 수 없는 것이고 개념 규정이 불가능한 것이지만 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相), 영원불변(永遠不變)의 상(相)입니다. 그 다음에 이 세상은 모두 고다. 범부세계, 우리가 물질에 매달리고 감각에 매달리고 있는 세계는 고(苦)입니다. 무엇이던지 필경엔 죽음으로 경계짓고 맙니다. 그렇지만 열반 자리 이런 주체적인 생명 자리, 우리 불광(佛光)의 표현(表現)에 의하면 마하반야(摩訶般若)에 의해서 완전히 드러내고 있는 바라밀(波羅蜜)의 세계, 내 생명, 국토 이것은 고가 아닙니다, 즐거울 낙자 락(樂)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세계가 허무니 공이니  무(無)니 하는 소리는 껍데기에서 본말이고, 주체적인 생명으로 살고 있는 나의 생명의 밑바닥에 흐르는 진리 그 자체 열반 자리는 그것이 아닙니다.  영원불변(永遠不變)한 것이고 끝없는 즐거움이 충만(充滿)한 것입니다. 다만 상이다. 낙이다라고 말은 하지마는 그것은 우리가 보통, 지금 우리가 감정(感情)으로 측량(測量)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 무아(無我)다, 모두가 물질적(物質的)인 것 인연(因緣)에 따라서 몇 가지 합해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어떤 것이 상호(相互)의존(依存) 관계(關係)를 떠난 것이 있느냐, 전부 합해 가지고 인연(因緣)의 결합(結合)에 의해서 몇 가지 요건(要件)을 충족(充足)하여 사람도 됐고, 물건도 생기고,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냐 그랬는데 반야(般若)의 눈에서 볼 것 같으면 그것은 화합(和合)이고 잠시 지나가는 그림자이고 이런걸 공(空)이다 그랬습니다. 무아(無我)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열반(涅槃)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무아(無我)가 아니라 아(我)입니다. 불교(佛敎)를 무아(無我)라고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는 무아(無我)의 의미(意味)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열반사덕(涅槃四德) 가운데 셋째가 아(我)입니다. 아(我)란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그 다음에 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입니다. 아무리 닦고 아무리 향기롭게 발라 보고 치장을 해봐도, 끊임없이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 흐르는 것이고 그렇게 실컷 먹여 주고 떠받들어 줘 봐도 마침내는 똥은 차라리만져도 송장은 못 만진다고 하는 그야말로 송장 되고 마는 것 아니냐, 그러니 부정(不淨)한 것이다. 그렇지만 참성품의 세계, 바라밀의 세계, 열반의 진수(眞髓)에 있어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무한청정(無限淸淨)이 끝없이 너울 치는 세계, 이것이 열반(涅槃)의 경계(境界)다, 열반(涅槃), 이 번뇌(煩惱)를 벗어난 바라밀(波羅蜜)의 진(眞)세계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사덕(四德)이 충만(充滿)한 것이다 라고 이렇게 열반경(涅槃經)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자리, 바라밀다(波羅蜜多)라는 자리가 어느 부처님의 세계이거나 따로 있는 세계가 아니고 우리들의 참생명 의 진(眞)소식이라고 할 때 비로소 깨달은 눈과 미혹의 눈의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깨달은 눈은 이와 같이 적극적(積極的)이고 긍정적(肯定的)인 측면(側面)으로 주체적(主體的)인 입장에서 낙관적(樂觀的)으로 세계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