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지와 환상의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환상의 세계 안에, ‘너와 내’가 있고, ‘옳고 그름’이 있으며,
마침내 ‘있고 없음’의 분별이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를 말할 수 있는가
깨달음이란,
인류의 오랜 환상을 떠나 삶의 실제(實際)와 만나는 것입니다.
무명(無明)의 어둠이 물러가고 세상을 투명하게,
자아의 점착을 떠나 바라볼 수 있게 될 때,
그때가 열반,
즉 자유와 불멸을 얻는 때입니다.
이 실제 앞에서는 일상적 언어와 관념이 경계와 예각을 잃고 미끄러집니다.
공간부터 살펴볼까요.
이 말에 다들 놀랍니다마는,
저는 그런 분들에게,
노장과 불교의 지혜를 따라 이렇게 묻습니다.
“그 구분은 사물의 성질 자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와 의견에 따른 것 아닐까요.
그 대신 맛이 있는지 없는지,
신선한지 아닌지는 지나치다싶게 섬세하게 구분합니다.”
구분되지 않기에 높다와 낮다, 크다와 작다ꮀ?
실제(實際)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화엄경>의 수수께끼 같은 언설,
선사들의 반복되는 역설이 비로소 이해될 것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없는 세계
시간은 인간에 의해 추상화된 것일 뿐,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시간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진정 살아있고, 살아가는 순간에는, 거기에는 시간이 끼어들지 않습니다.
살아있음의 현장을 떠나,
그 일체와 몰입의 순간을 떠나 마음이 콩밭으로 떠날 때 비로소 시간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랑이 식거나 또 내일 회의가 있거나,
오늘처럼 원고마감에 쫓길 때 말입니다.
<금강경>은 시간이 없다 하는데,
<화엄경>은 시간들이 서로 침투 융섭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시간은 상상된 관념인데,
구체적 경험 속에는 추상이 들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무량겁(無量劫)의 시간이 일념(一念)에 나타나고,
현재 속에 삼세(三世)가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없으므로,
그 자연적 귀결로 생사(生死)가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 즉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이 길은 그러나 붓다에게만 열린 길이 아니고, 모두에게 열려 있는 길입니다.
불교는 그래서 고타마 붓다 이전에 수많은 붓다가 있었고,
앞으로도 수많은 붓다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깨달음은 깨달음 가운데, 가장 높고 귀한 것입니다.
저는 이 불교적 깨달음이 동서양의 정신적 지혜의 전통에서 보편적 성질의 것이며,
그것의 획득은 오히려 일상의 공간에서 삶의 경험을 통해,
인간에 대한 성찰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산사의 수행자들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살아가는 모든 중생들의 얼굴이 바로 선지식의 광명을 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 수많은 여래 가운데 하나이니,
스스로 보살이고 여래라는 생각의 연금술, 그 믿음을 일으키십시오.
모두 평등한 금사자들
메난드로스 왕이 인간의 서로 다른 운명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나가세나 존자여, 어째서 사람들은 서로 평등하지 않을까요.
“대왕이시여, 어째서 수목은 똑같지 않습니까.
“그것은 종자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왕이시여,
불교는 이 차이를 산술적으로 평균화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화엄의 종장(宗匠), 법장(法藏)은 측천무후를 위해 화엄의 이치를 금사자(金獅子)로 비유해서 강설한 적이 있습니다.
거죽의 모습이 좀 다른 것은 다만 우연적 차이일 뿐이고,
실제 그 모두는 크고 작고가 나름대로 법계(法界)의 영광과 그 현란한 무도의 주인공들입니다.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 속 분별(分別)의 장애물을 치워야 하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외적 조건들에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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