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不二의 당처-3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15:12

 

 

한 손바닥으론 소리를 울리지 못한다

 

홀로 앉아 한 줄기 향을 피우고
객과 도적은 문 밖에 내버려 두라

<참고> 무착문희 선사는 앙산의 제자다. 벽암록 第35則에 의하면 무착선사가 어느 날 인적 드문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났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문수보살의 절에서 신세를 지며 문답을 나누게 되었다.
문수보살이 무착에게 물었다.

“여기 오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가?”
“남방에 있었습니다.”
“남방의 불법은 요즘 어떠한가?”
“말법시대의 비구가 계율을 받드는 정도입니다.”
“그 계율을 받드는 대중이 얼마나 되는가?”
“삼백 명에서 오백 명 정도 됩니다.”
이번에는 무착이 문수보살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떻습니까?”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네.”
“수행대중이 얼마나 되는지요?”
“앞도 삼삼[前三三], 뒤도 삼삼[後三三]일세.”

獨坐一爐香 金文 誦兩行 可憐車馬客 門外 任他忙
홀로 앉아 한 줄기 향을 피우고 금강경을 두어줄 외울지어다(=>靜). 가련하다! 수레와 말을 타고 밖을 도는 객(=>動)이여! 문 밖의 바쁜 일은 바쁜 대로 맡겨 둘 뿐이로다.

{說}家裏事 途中事 一道俱行 常在途中 而昧於家裏事 是可憐也 又獨 坐云云 寂照不二 體用如如 可憐云云 未了底人 坐在聲色裏 三德彼 岸 相去大遠 是可憐也 又翛然獨坐眼惺惺 任他客賊門外忙
집안 일과 길가 일을 한 길로 함께 행해야 하는데, 항상 길가에 만 있고 집안 일에 어두우면 가련한 것이다. 또 ‘독좌~’운운은 고요하고 비취는 것이 둘이 아니어서 체(體)와 용(用)이 여여(如如)한 것이요, ‘가련~’운운은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이 소리와 색 가운데 앉아서 삼덕(법신덕, 반야덕, 해탈덕)의 피안과 서로 거리가 너무 멀어 가련하다는 것이다. 또한, 홀연히 홀로 앉으면 법의 눈이 성성하니 객과 도적은 문 밖에서 바쁜 대로 내버려두어라.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俱
큰 비구 천이백오십인과 함께 함이여!

{說}主伴 交參 說聽 同會
부처님과 도반이 어울려 동참하고, 설법하고 듣는 대중이 함께 모이도다.

獨掌 不浪鳴
한 손바닥만으로는 소리가 울리지 않도다.

{說}師資合會 方成唱和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야 바야흐로 선창하고 화답함이 이루어진다.

巍巍堂堂 萬法中王 三十二相 百千種光 聖凡 瞻仰 外道歸降 莫謂慈容 難得見 不離祇園大道場
드높고 당당함이여! 만법 가운데 왕이로다. 서른 두 가지 길상이요, 백 천 가지 광명이로다. 성현과 범부가 우러르고 외도가 귀의하고 항복하도다. 자비로운 얼굴을 보기가 어렵다고 말하지 말라. 기원정사 대도량을 떠나신 적 없도다. (부처님은 지금도 생생히 우리가 만날 수 있다)

{說}依眞起化 化道方成 感畢遂隱 而眞常住 世云 佛生迦毗羅 成道摩 竭陀 說法波羅奈 入滅拘尸羅 蓋釋迦老子 於淨飯王宮 示現出生 十九 出家 三十 成道 住世四十九年 說法三百餘會 壽登八十 而示入滅 其示 滅以來 于今二千餘載 迹此觀之 世云佛有去來 可矣 據實而觀 來無所 來 月印千江 去無所去 空分諸刹 伊麽則雖云出世 未曾出世 雖云入滅 未曾入滅 所以 道 莫謂慈容 難得見 不離祇園大道場 要識慈容麽 擬議 思量千萬里 要識道場麽 觸目無非古道場
진여에 의지하여 교화를 일으키매 교화의 도가 바야흐로 성취되고 중생과의 감응이 마쳐 드디어 숨었으나(=>열반) 진여는 常住한다. 세인들이 말하기를 “부처님은 가비라에서 탄생하시고 마갈타에서 성도하여 바라나에서 설법하시고 구시라에서 입멸하셨다” 하나니, 석가노자가 시현으로 정반왕의 궁에서 태어나서 19세에 출가하고 30세에 성도하셔서 세상에 49년을 머무르시며 300여 회의 설법을 하시고 80세에 입멸을 보이시니, 그 입멸을 보이신 이래 지금까지 2000여년이 흘렀다. 이 자취를 관찰하건대 세간법으로 말하는 바 “부처님의 거래(去來)가 있다”라 하는 것도 옳겠지만, 진실에 의거해 관찰해 보면, 올 때도 온 바가 없는 것이 달이 천강(千江)에 비취는 것과 같고, 가되 간 바가 없는 것은 마치 허공을 모든 세계로 나누는 것과 같다. 이러한 즉, 비록 세상에 나왔다고는 하나 일찍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고, 비록 입멸했다고 하나 일찍이 입멸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자비로운 용모를 보기 어렵다고 말하지 말라. 기원정사 대도량을 떠나신 적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자비스런 용모를 알려고 하는가? 머리로 헤아린다면 천만리나 멀어진다. 대도량을 알려고 하는가? (지금) 눈 닿는 곳마다 (그 때의) 옛 도량 아님이 없다.



=== 선시 맛보기===

陶公醉石歸去來館[朱子]

予生千載後 尙友千載前 每尋高士傳 獨嘆淵明賢
나는 천년 뒤에 태어나 오히려 천년 전의 인물과 벗하면서
매양 덕 높은 선비를 찾는데 유독 도연명의 賢德을 찬탄하게 되네.

及此逢醉石 謂言公所眠 況復巖壑古 縹緲藏風煙
여기, 취석에 이르니 淵明 公이 醉氣에 잠을 청한 곳이라 말 들 하는데
바위며 골짜기가 옛스럽고, 넓고도 넓어서 바람과 노을을 감추었네.

仰看喬木陰 俯聽橫飛泉 景物自淸絶 優游可忘年
높은 나무그늘 우러르고, 허리 굽혀 橫으로 쏟아지는 물소리도 들으니,
풍경이 저절로 깨끗해져서 여유롭게 노닐며 남은 세월 잊고싶네.

結廬倚蒼峭 擧觴酹潺湲 臨風一長嘯 亂以歸來篇
푸른 산마루에 의지하여 움막을 짓고, 강신(降神)을 위해 술잔을 쫄쫄 따르며
바람을 맞이해 휘파람 길게 불고, 귀거래사 읽고서 禮를 마치네.

<보충설명>
1. 이 시는 주자가 도연명을 그리워하고 그 덕을 사모하며 지었기 때문에 옛 것의 푸근함이 배어있다. 도연명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전원생활을 즐겼다. 후세 사람들이 도연명을 기려 도연명이 은거했던 마을의 바위에 귀거래관(歸去來館), 취석 등의 刻字를 남겼는데 취석은 술을 즐겼던 도연명이 취중에 베개삼아 잠들었던 돌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仰看喬木陰: 우러러볼 만한 인품을 갖춘 어른의 그늘. 여기서는 도연명의 인품을 비유하여 찬탄 한 것.
3. 觴酹: 降神을 위해 술을 사방에 뿌리는 술잔.
4. 潺湲: 쫄쫄쫄 술을 따르는 모양과 소리.
5. 亂: 잔을 거두고 降神의 儀式을 마치는 것.

 

출처: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