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圭峰]四 如來正說 於中 文二 一 正答所問 二 躡迹斷疑 初文 分二 一 擧摠標別 以牒問
네 번째는 여래의 바른 말씀이니 그 가운데에 문장이 둘이다. 첫째는 묻는 바에 대해 바로 답한 것이고 둘째는 앞의 질문의 자취를 밟아 의심을 끊어주는 것이다. 처음 글을 둘로 나누건대, 첫째는 총히 들어서 따로 표하여 덧붙여 묻는 것이다.
<보충설명1> 규봉 스님이 과표를 나누면서 총(摠)과 별(別)로 나누었는데, 총은 총체적인 것이고 별은 부분적으로 자세히 나눈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운하항복(云何降伏)이 총체적인 질문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총문(摠問)에 해당하고, 이것을 다시 나누어 운하득주(云何得住)와 운하수행(云何修行)으로 묻는 것이 별문(別問)에 해당됩니다. 나중에, 답하는 부분에서는 절사상(絶四相) 곧 네 가지 상을 끊는 것이 총답(摠答)이 되고, 이것을 다시 득주사심(得住四心)과 수행바라밀(修行波羅密)로 나누어 대답하신 것이 별답(別答)이 됩니다.
<보충설명2> 사심(四心)은 광대심(廣大心), 제일심(第一心), 상심(常心), 부전도심(不顚倒心)
大乘正宗分第三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길,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나니~,”
[六祖]前念淸淨 後念淸淨 名爲菩薩 念念不退 雖在塵勞 心常淸淨 名摩訶薩 又慈悲喜捨 種種方便 化導衆生 名爲菩薩 能化所化 心無取着 名摩訶薩 恭敬一切衆生 卽是降伏其心 處眞 名不變 契如 名不異 遇諸境界 心無變異 名曰眞如 亦云外不假曰眞 內不亂曰如 念念無差曰是
앞생각이 청정하고 그 뒷생각까지 청정한 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고, 생각생각에 퇴전함이 없어서 비록 진로(塵勞)중에 있더라도 마음이 항상 청정한 것을 마하살이라 이름한다. 또 자비(慈悲)와 희사(喜捨)의 가지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는 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고, 능히 교화하는 주체와 교화 되는바 대상에 마음의 취착이 없는 것을 마하살이라 이름하니, 일체 중생을 공경하는 것은 곧 그 마음을 항복 받았기 (降伏其心) 때문이다. 진리에 처한 것을 불변(不變)이라 이름하고 여여(如如)함에 계합한 것을 불이(不異)라 이름하니, 모든 경계를 만나되 마음에 변이(變異)가 없는 것을 이름하여 진여라 한다. 또한 밖에서 따로 빌리지 않은 것을 진(眞)이라 하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을 여(如)라 하고, 생각생각에 어긋남이 없는 것을 시(是)라 한다.
[圭峰]二 約別顯摠 以答問 此 以降伏 爲摠 住修 爲別也 謂住修之中 皆有降伏 經意在此 故 唯標降伏 有科此標云擧後攝初者 乃令經文 極不穩暢 理例顚倒 自古言敎 祗有以初攝後 未聞將後攝初 況詳經文 無別答降伏之處 卽知降伏 在住修中 住修 皆令離相 是答降伏問也 不別答者 此經 宗於離相 離相 正是降心 本意 欲明降心 因約住修 以顯住修降伏 本不相離 故 無着 十八住中 每住 皆有住修降伏
文中 二 一 答安住降心問 又四 一 廣大心
두 번째는 별(別)을 잡아서 총(摠)을 드러내 물음에 답한 것이니, 이는 ‘항복’으로써 총(摠)을 삼고 ‘수행에 머무름’(住修)으로써 별(別)을 삼은 것이다. 말하자면 주수(住修) 가운데 항복의 뜻이 있으니, 경전의 뜻이 여기에 있으므로 오직 항복만 표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과목쳐서 “뒤를 들어 처음을 포섭했다”고 언급하는데 경문으써는 극히 온당하지 않고 이치와 예(例)가 전도된 것이다. 예로부터 말로 가르침에 있어 처음으로써 뒤를 포섭할지언정 뒤로써 처음을 포섭한다고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하물며 경문(經文)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별도로 항복을 답한 곳이 없으니, 곧 항복이 주수(住修) 가운데 묻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수(住修)는 모두 상(相)을 여의게 하는 것이니 이는 항복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된다. 따로 답하지 않은 것은, 이 금강경의 종지(宗旨)가 상을 여읨에 있고 상을 여읨이 바로 마음을 항복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의) 근본 뜻은 마음을 항복 받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수(住修)를 잡아서 주수(住修)와 항복이 본래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무착의 18주(住) 중에도 각각의 주(住)마다 모두 주수(住修)와 항복(降伏)이 있는 것이다.
문장 중에 둘이니, 첫째는 마음을 항복 받는데 안주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또 넷이 있으니, 첫째는 광대심(廣大心)이다.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있는 바, 모든 중생의 무리인 난생과 태생과 습생과 화생과, 유색과 무색과, 유상과 무상과, 유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 것을
<보충설명> 불교에서는 중생을 분류할 때, 아홉 가지로 나누기 때문에 구류중생(九類衆生)이라고 합니다. 난생은 알로써 태어나는 중생, 태생은 인간처럼 태에 들었다가 태어나는 포유류, 습생은 곰팡이처럼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 화생은 곤충처럼 변화과정을 겪도록 태어나는 것, 유색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 무색은 영가와 같이 형태가 없는 것, 유상은 의식을 갖추고 있는 중생, 무상은 의식이 없는 중생, 유상도 무상도 아닌 것은 의식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중생을 말합니다. 그런데 선(禪)에서는 ‘九類衆生同法界 紫羅帳裏撤眞珠’ 즉, ‘구류중생이 한 법계에 같이 공존하고 있음이 마치 자줏빛 보자기 속에 진주를 모아 놓은 것과 같다.’라고 해서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참고> 얼마 전 숭산 스님의 49재에서 송담 스님이 ‘개는 양고기를 먹고 사람은 개고기를 먹는다’는 일종의 화두를 가지고 법문을 하셨습니다. 송담 스님은 숭산 스님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숭산 스님께 가서 ‘이제 양고기를 먹겠습니다’라고 하라”고 가르쳤답니다. 뒤에 숭산 스님이 이 말을 듣고 “거 좋다!”라고 답을 하셨답니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양고기를 양질의 고기로 여겼습니다. 반면에 개고기는 서민들이 먹는 값싼 고기로 여겨졌습니다. 개가 양고기를 먹고 사람이 개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귀하고 천한 것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들어 주어서 모두가 평등한 하나의 모습임을 알아차리도록 이끄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석굴암 주련에 걸려있는 원나라 고봉 스님의 오도송 마지막 구절인 ‘崑崙騎象鷺鷥牽’(곤륜산을 넘어 온 검은 피부의 사람들이 코끼리에 올라타니 하얀 백로가 받들어서 이끌어 준다)처럼 절대평등의 세계를 드러내주는 것과도 상통하는 말입니다. 송담 스님이 숭산 스님의 외국의 제자들에게 개고기와 양고기에 관해 화두를 던져준 것은 선사들의 염롱에 자주 등장하는 ‘양두구육’에서 그 출처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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