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론(眞如論)-2
진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다. 석가모니 부처와 마하비라가 모두 지식에 반대하는 혁명을 일으킨 것은 정말로 신기한 일치이다. 그들은 학식있는 학자와 브라만들과 판디트(pandit, 범학자, 현자)들에게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반대했다. 그것은 그들이 지식에 얽매여 있다는 점이다. 그대는 자신의 무지로 뒤덮여 있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대가 집안에 등불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암흑 세계와 같다. 그대는 자신이 좋아하는 빛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빛에 대한 지식은 그대 집안을 밝게 해주지 못한다. 그 집은 여전히 암흑 속에 있다. 그리고 지식이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착각을 일으키는 것밖에 없다. 그 착각 속에서 그대는 지식에 파묻혀 주위에 있는 어둠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어둠은 거기에 있다. 그대가 그것을 잊어버리든 안 잊어버리든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사실 어둠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좋다. 그것은 빛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빛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실제로 빛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마하비라나 석가모니 부처나 그들은 모두 브라만 학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그런 학자들에 의해서 책으로 편찬되었다.
마하비라에게는 열한 명의 친밀한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브라만 계급이며 위대한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는 다른 무식한 사람들의 무지와 다름이 없었다. 무지는 지식으로 자신을 장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식 속에 숨어 있어 잘 발견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빛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본성이며 존재인 것이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모든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대 존재의 중심이 바로 순수한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빛은 우선 발견되어져야 한다. 지식이나 경전, 혹은 현자로부터 나온 말을 배우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빛에 도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 빛은 바로 깨달음의 원천이지만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도 같은 경우였다.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은 브라만 계급이었고 부처의 진리를 전하는 데 큰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생각은 석가모니 부처의 말과 마구 뒤섞여 있었다. 그들의 생각은 지식이고 학식에서 나온 것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침묵에 빠져들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의 소식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존재에서 존재로 전해지는 것이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불운이 달마에게도 일어났다. 달마는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중국에서 가르침을 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 반경이 훨씬 컸다. 그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달마에게 흥미를 느꼈고, 그것은 모두 지식에 관한 흥미 때문이었다. 그들은 삶의 신비를 풀어 줄 황금 열쇠를 달마가 갖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의 모든 말들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진솔한 것이었다. 그에게 수천 명의 승려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달마의 말을 모으는 데 정신이 빠져서, 달마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던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이 어록들을 기록했다. 자연히 거기에는 실수가 생겨났고 많은 돌 중에서 다이아몬드는 몇 개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그 몇 안 되는 다이아몬드들을 찾기로 하자.
비록 달마처럼 같은 경험을 느껴보지 못했지만 그들 역시 그의 카리스마적인 존재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촛불에 덤벼드는 불나방처럼 중국 각지에서 달마의 발아래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물론 좋은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행의 끝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에게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계속 했다.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달마의 말이 자신의 선입견에 맞는지를 따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의 해석을 덧붙였고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와 색깔을 부여했다.
달마는 어떤 글도 직접 남기지 않았다. 이미 기록된 문자는 죽은 말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스승이 하는 말에는 온기가 있다. 거기에는 광채가 있고 스승의 현존이 들어 있다. 귀로 들을 수 있는 말은 문자로 기록된 것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똑같은 말일지라도 그것이 기록인 이상 하나의 시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승의 육성은 살아 숨쉰다. 문자 속에는 생명의 고동이 없다. 그래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깨달은 사람은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는 정말로 깨어 있어야 한다. 경전의 지식들을 끌어 모은 제자의 마음은 그 말의 아름다움을 파괴시킨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달마의 말을 정확하게 옮기지는 못했지만, 여기저기에 달마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말들을 적어 놓았다. 그들은 아마 실수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달마의 살아 있는 말을 내가 찾아내어 말할 때, 그것은 다시금 생명의 고동이 살아난다. 그래서 나의 주석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 전달된 말속에 다시 생명을 주어 부활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말들은 이 혼란스런 군더더기 속에서 벗어나서 다시 빛날 것이다.
어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처는 사람들이 미혹되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들이 끝없는 윤회의 강에 뛰어드는 행동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미혹되지 않았다면 누가 그들 앞에 항상 있는 것에 대해 물어보겠는가? 그들 중에 한 사람도 자신의 손과 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미혹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첫 번째로 이해해야 할 것은, 이 부분은 제자들의 마음에 의해서 왜곡되지 않고 순수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미혹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미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인격체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대가 누군지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을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그대를 미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한 순간만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라. 그대가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충격이다. 그것은 지금 그대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는 동일시가 완전히 흔들릴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알지 못하고 살아갈 수가 없다. 만약 그대가 알 수 없다면 그때 그대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것이다. 거기에 거짓이 생겨난다. 거기에 억지가 생겨난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미친 상황에서 멀리 도망칠 수 있다.
누구에게든지 물어 보라. 그가 누구인지 말이다. 그는 자신이 의사이거나 기술자 혹은 교수라고 말할 것이다. 혹은 자신은 기독교인이거나 힌두교도거나 불교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거짓된 동일시이다. 그대 자신 주위에 거짓의 얇은 보호막을 쳐 놓은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가 미쳤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대는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 생각에 수천 가지의 동일시를 만들어낸다. 그대는 누구의 남편이거나 누구의 아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의 그대 모습이 아니다. 그대가 날 때부터 남편으로 태어났는가? 날 때부터 의사나 기술자였는가? 그것들은 그대와 사회가 함께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그대의 공허함을 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공허감이 그대 속에 있다면, 그대는 미쳐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거짓된 동일시를 더욱 두텁게 만든다. 하나의 동일시 위에다 다른 것을 쌓고 또 쌓는다. 그들은 정치적인 모임에 가입하고, 종교의 구성원이 되며, 로터리클럽이나 라이온스 클럽의 일원이 된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만들어 갖다 붙인다. 그대가 미치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완전히 벌거벗은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그대 자신을 덮고 있는 모든 사회적인 옷을 벗어버린 채 말이다. 이것이 바로 미혹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 삶을 산다. 진정한 자기 모습보다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껍데기를 더 좋아한다. 그대 자신을 그저 지켜 보라.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미혹되었다.'는 정말로 중요하고 의미 깊은 말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삶이 불행하고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되는 이유이다.
달마가 사람들이 어둠 속에 빠져서 점점 더 깊은 미혹 속에서 방황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시각에서 한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없기에 갈수록 거짓된 동일시의 층을 두텁게 만든다. 그들의 사랑도 거짓이며, 그들의 인간관계도 거짓이다. 그들의 삶 전체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그들은 모든 일을 하지만 그것은 자기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한다. 하는 일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물어본다. 그들은 모든 것을 물어본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안다. 거기에는 선택의 문제가 없다.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옳다. 그대의 본성에서는 오직 옳고 바른 것만이 나온다. 장미 넝쿨에서는 장미꽃만이 피어난다.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과거에 나는 라이푸르(Raipur)에서 몇 달씩 머무르곤 했다. 다시 내방 건너편에서 늙은 수학 교수 한 사람이 살았다. 나는 창문을 통해 그를 쳐다보곤 했다. 그는 창가에 아름다운 꽃들을 갖다 놓고서는 매일 화분에 물을 주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가자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화분의 꽃들은 지는 법이 없었다. 항상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이었다. 나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그의 창가에 가까이 가서 그 꽃들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꽃은 진짜가 아니었다. 진짜처럼 만들어진 조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 꽃이 생화인 줄로만 알았다. 그가 매일 거기에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을 두드리고 그 노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 꽃들은 물을 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모릅니다. 내가 계속 물을 주기에 그 꽃들이 살아 있는 줄로 압니다."
그대가 만들어낸 동일시는 바로 이 조화와 같다. 그것은 그대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그것은 그대를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불행으로부터 그대의 삶을 해탈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그대의 지루한 삶을 환희의 세계로 이끌어가지 못한다.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불멸로 그대를 데려다 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미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