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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2

通達無我法者 2007. 1. 21. 16:49
 

그러면 붓다는 어떤 질문으로 그 외도를 이끌어 갔는지 살펴보자. ꡒ바차여, 그대가 알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은 심히 깊고, 알기 어렵고, 미묘하여, 지혜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 다른 사상을 따르는 이나 다른 실천 법을 닦는 이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다시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바차여, 만약 여기에 불이 타고 있다 할 때, 그대는 그것을 불이 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ꡓ


독자들은 아마도 이상스러운 질문을 한다고 여길지 모르나, 이런 데에도 현실을 직시해 가는 붓다의 사상적 자세가 보인다. 물론 바차는 알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바차가 아니더라도 이런 대답밖에는 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자 붓다의 이상한 질문은 다시 이어졌다. ꡒ바차여, 그러면 그 불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ꡓ


ꡒ그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ꡓ ꡒ옳은 말이다. 그런데 바차여, 그 불이 다 타고 꺼졌을 때, 그 불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려는가?ꡓ ꡒ대덕이시여, 그것은 적당한 물음이 아닙니다.


그 불은 나무가 있었으므로 탔던 것이요, 이제는 나무가 없어졌기에 꺼진 것입니다.ꡓ 이 이상스러운 문답으로 붓다는 열반을 설명해 갈 터전을 닦았던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순순히 이런 말씀으로 타일렀다.


ꡒ이 인생은 괴로움으로 차있다. 그리고 그것은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격정의 희롱하는 바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격정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격정이 없어지고 보면 불안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것도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훨훨 타오르던 불도 그 땔감이다 하고 나면 꺼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을 나는 열반이라 하는 것이다.ꡓ


이런 설명을 듣고 난 바차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로부터 일생을 통해 충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어쨌든 여기에 전개된 문답은 불교의 이상인 열반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더욱이 거기에 사용된 비유는 단순한 비유로만은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열반의 개념에 밀착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대저 열반이란 그원어(Pali, nibbana ; Skt.,nirvana)의 뜻을 캐어 볼 때 ꡐ불이 꺼진 상태ꡑ이기 때문이다.


이런 술어를 붓다는 어디로부터 가져왔던 것일까? 이런 문제를 캐기란 쉽지 않겠지만, 요컨대 그 출처는 붓다의 사상 자체에 있었던 것이라고나 해야 될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이나 아주 초기에 속하는 붓다의 설법 중에 ꡐ연소ꡑ라는 제목으로 전해지는 경이 있다. 유럽의 불교 학자들은 이것을 예수의 ꡐ산상 수훈ꡑ에 비교하여 ꡐ산상 설법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붓다가 전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바라나시의 교외에 있는 이시파타나 미가다야(鹿野苑)로부터 다시 마가다국의 우루베라 - 정각한 곳 - 로 돌아온 붓다는 거기서 많은 제자를 얻었다.


그 수효는 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 제자들을 이끌고 붓다는 다시 그 나라의 수도인 라자가하(王舍城)로 떠나갔던 것이지만, 그 출발에 즈음하여 그는 제자들과 함께 가야시사(象頭山)에 올라간 일이 있다.


산상에 올라서 바라보매, 추억 많은 땅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북쪽으로는 아득히 가야(伽耶)의 거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동쪽에서 흐르는 것은 네란자라 강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그것을 따라 멀리 남녘으로 눈을 옮기니 정각을 성취했던 고장이 보였다. 이 장한 조망을 발아래 놓고 붓다는 새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ꡒ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타고 있느니라. 활활 타오르고 있느니라. 먼저 이 사실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뜻인가? 비구들이여, 눈이 타고 있다. 마음도 타고 있다. 모두 그 대상을 향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것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는 것이랴. 탐욕의 불꽃에 의해 타고. 노여움의 불꽃에 의해 타고, 어리석음의 불꽃에 의해 타고 있느니라.ꡓ


그것은 붓다의 새로운 설명 방식이었다. 이제까지 붓다는 고조된 욕망을 말하는 데 ꡐ갈애ꡑ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찬가지로 욕망의 고조된 상태를 나타내면서 ꡐ연소ꡑ라는 말을 썼던 것이다.


그 새로운 용어는 불교의 흐름을 따라 오래도록 큰 영향을 미쳤다. 후세의 불교인들이 흔히 ꡐ욕망의 불꽃ꡑ이라 했을 때, 그것도 이 계열에서 생겨난 용어로 보아야 하리라.


그리고 붓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 비유적인 표현을 따라 이야기한다면 결국 그 연소하는 욕망을 가라 앉혀야 한다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 완전히 꺼질 때, 거기에 나타나는 시원하고 편안한 경지, 그것이 열반임에 틀림없다.


열반이라는 술어는 이런 인생의 현실에 대한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이상의 경지를 뜻하는 말로서 생겨났던 것이리라. 열반이라는 말은 그 성립 과정에서 본다 해도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표현이다.


깊은 생각 없이 이를 대하면 천국이니 극락이니 지복(至福)이니 하는 말에 비겨 매우 매력이 없는 말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후세의 불교인 중에는 이것을 소극 무위의 경지라고 잘못 생각한다든지, 회신 멸지(灰身滅智 ; 육체적,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의 경계로 판단한다든지 하여 마침내는 열반으로써 죽음을 뜻하게까지 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가당치 않은 해석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눈을 돌이켜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해 놓은 글을 검토해 보자. 그것은 자푸카다카(閻浮車)라는 외도가 사리푸타를 찾아와서 벌인 문답이다.


그 사람은 낡은 주석에 의하면 사리푸타의 조카라고 되어 있거니와, 어쨌든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이인 듯해서, 잔푸카다카가 불교의 기본적인 개념에 관해 꼬치꼬치 물은 데 대하여 사리푸타는 하나하나 명쾌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 대답은 붓다의 설명 방식과는 약간 달라서 정의적, 주석 적인 점은 있으나, 역시 붓다의 수제자답게 참으로 명쾌하다고 하여야겠다.


그런 질문과 대답이 열 여섯 개의 경에 기록되어 그것들이 일련의 경군(經群;염부거상응)을 이루고 있거니와, 그 첫째경의 내용이 이 열반에 관한 문답이다. 흔히들 열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대체 무엇을 말함이냐는 것이 이외도의 질문 내용이었다.


ꡒ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면,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 한다.ꡓ


그러면 거기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이냐고 다시 질문을 받은 사리푸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ꡒ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즉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ꡓ


그리고 사리푸타는 ꡒ벗이여, 이것은 선한 길이다. 노력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ꡓ는 말을 덧붙였다. 참으로 명쾌한 주석이어서, 열반에 관한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여기에 딴 말을 덧붙인다는 것은 오직 그 개념을 애매 모호하게 만들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현대의 학자로서 한 가지만 거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현대의 학자로서 한 가지만 거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에 의해 현대인들은 어쩌면 열반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인간의 이상을 생각해 낸 것은 결코 불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이런 이상이 불교만의 주장이었다면, 우리는 도리어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그 관념을 검토해 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널리 세계의 온갖 사상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결코 불교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는 것이라 하겠다.


그 중에서도 언어 표현상 가장 비슷한 것은 스토아(Stoa)의 철인들이 인간의 이상적인 경지라고 생각한 ꡐ아파테이아(Apatheia)ꡑ의 관념이다. 그들도 또한 인간의 불행은 격정(pathos)에 의해 이성이 방해되고 영혼이 구속됨으로써 생긴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격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를 최고의 이상이라 여겨, 그것을 아파테이아라고 불렸다.


또 그리스의 에피쿠로스(Epikouros)가 ꡐ아타락티아(ataraktia)ꡑ라고 부른 경지도 그것에 가깝다. 그것은 어지러움이 극복된 내적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 저 쾌락주의자들이 그려 낸 인간의 최고 경지가 이런 것이었다는 것은 퍽 재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다시 근대에 와서 칸트(D ant)가 말한 ꡐ자유ꡑ의 개념 또한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그는 실천 이성(의지)이 자기 법칙을 따를 때 그것이 자율적 자유요, 이와 반대로 자연적 욕망에 지배될 때 그것은 방종의 타율이라고 했다.


그런 것에서 우리는 열반의 생각과 입장을 같이하는 사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다. 일찍이 붓다는 어떤 경([상응부 경전] 1:63 갈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은 갈애에 의해 인도되고

갈애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

갈애야말로

일체를 예속시키도다.


붓다가 열반을 말씀할 때, 결국은 이런 예속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공적 무위(空寂無爲)의 소극적인 경지라고 할 수 없다.


거기서 불이 꺼지듯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은 갈애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며,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일 뿐이다.


인간 자체가 여기에서 ꡒ소멸하여ꡓ 어딘가에 가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여기 이 땅에 있는 것이다.


그를 예속하던 갈애가 소멸됨으로써, 그는 완전한 자유와 안온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의 길, 평화의 길을. 그리고 그것이 열반이다





아함경 -사상-



16. 불방일(不放逸).


ꡒ비구들이여, 밤하늘에서 온갖 별들은 빛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달빛의 16분의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기에 달빛은 밤하늘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여겨진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여러 길이 있건만, 그것들은 모두 불방일로 근본을 삼는다. 그러기에 온갖 착한 법중에서 불방일이 최대가 되고 최상이 되느니라.


비구들이여, 또 가을 하늘에 한 점의 구름도 없을 때, 해는 하늘에 떠올라 일체의 어둠을 쓸어버리고 눈부시게 시방(十方 ; 동서 남북과 동북, 동남, 서북, 서남, 상, 하.)에 빛을 던지지 않느냐? 그러기에 가을 하늘에서 해는 가장 위대하다고 일컬어진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여러 가지 길이 있건만, 그것들은 모두 불방일로 근본을 삼는다. 그러므로 온갖 착한 법 중에서 불방일이 최대가 되고 최상이 되느니라.ꡓ


([相應部經典] 45:146月. 147日)


불방일(appamada)이라는 말은 아직 우리 말로서는 익숙해져 있지 못하다. 정진(viriya)이라고 하면 다 알지만, 그것과는 얼마쯤 뉘앙스가 다르다.


오래 된 경전의 말씀에도 ꡒ방일하게 놀았거늘ꡓ이라는 표현이 있거니와, 자기를 잊고 자제함이 없이 온갖 욕망에 이끌려 가는 것, 그것이 방일이다.


그러므로 불방일이란 그런 상태에 빠지는 일이 없는 자제와 집중과 지속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붓다가 설하신 대로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이미 내심의 어지러움이 없는 자유롭고 편안한 경지에 이르는 것, 그것이 붓다의 가르침이요, 또 붓다가 수범하신 길이려니와, 그것을 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곧은 길 설하심을 듣자온 바엔

그 길 가고 물러섬이 없어야 하리.

제가 저를 나날이 채찍질하여

궁극의 경지에 이를지로다.


제자들의 게(운문)를 모은 [장로게경]에도 이런 노래가 보인다. 앞에도 나온 바 있는 ꡐ소나ꡑ라는 비구가 읊은 것이 이것이다. 그는 극단적인 수행을 감행하여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실현되지 않아서 걱정과 의혹에 사로잡혔다.


그 때 붓다가 거문고 줄의 비유로 그를 타일렀기에, 그는 그 가르침에 의해 차츰 도를 즐길 수 있게 되어 마침내는 열반의 경계를 성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더 비참한 이야기는 [상응부 경전](4:23 구저가. 한역 동본, [잡아함경] 39:11 구저가)에 실려 있는 고티카(瞿低迦)의 경우리라. 그는 라자가하 근처에 있는 어느 바위굴에 있으면서 열심히 수행한 결과 몇 번인가 해탈의 심경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그런 경지는 지속되지 못하고 그때마다 원상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그런 일을 되풀이하기 여섯 번에 이르러 그는 마침내 칼을 들어 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경의 서술은 참으로 비통한 기분에 넘쳐 있어서, 오늘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족하다. 그러면 대체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퇴전(退轉)해야 하는 것일까? [법구경]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뿌리만 안 상하여 든든하다면

나무는 베어져도 다시 생기며,

애욕을 뿌리째 끊지 않으면

또 다시 되풀이해 고(苦)는 생기리.


나는 이제 고디카의 보기를 들었거니와, 그런 극단적인 경우를 들어서 이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아마도 그리 적당한 일은 아닐 터이다. 극단으로 달려서는 사태를 도리어 그르친다는 것이 원래 불교의 입장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문제를 더 정상적인 경우로 되돌려 놓고 생각할 때,후세의 불교인들이 ꡐ아비발치(avaivartika, avinivartanlya)ꡑ라고 이른 것이 그것이며, 또 ꡐ돈(頓)ꡑ이니 ꡐ점(漸)ꡑ이니 논한 것이 그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ꡐ아비발치ꡑ라고 하면 처음 듣는 말이라고 하실 분도 많이 있으려니와, 이를테면 신란(親鸞)이 한번 믿음을 일으켜서 염불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 사람은 열반이 약속된 이로서 불퇴(不退)의 자리에 드는 것이라고 한 그것이 바로 ꡐ아비발치ꡑ이다.


이것은 물론 범어의 음사요, 의역하면 ꡐ불퇴ꡑ 또는 ꡐ불퇴전ꡑ이 된다. 불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기까지 오면 절대로 타락할 염려가 없다는 경지, 그것이 아비발치요, 불퇴의 자리요, 불퇴전지(地)이다.


대체 그러면 사람은 어디까지 가야 다시는 전락의 가능성으로부터 모면되는 것일까? 후세의 불교인들은 이것을 놓고 저마다 논한 바 있었지만, 각설이 분분해서 하나의 정론이 나오지는 못했다.


이런 사실을 뒤집어 놓고 보면 불교인마다 얼마나 불퇴전의 경지를 열망하였던지를 알 수 있으며,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보아도 그런 경지란 발견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느 단계에 오르든 간에고디카처럼 누구나 전락의 가능성은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인가? 그 대답은 일단 ꡒ그렇다ꡓ고 할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 전락을 막는 오직 하나의 보장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불방일이다. 그러기에 붓다는 자주 말하였다.


ꡒ비구들이여, 불방일한 비구라면 팔정도를 배워 익히고, 팔정도를 잘 닦아 갈 것임에 틀림없다.ꡓ


불방일하기만 하면 그 비구는 반드시 팔정도를 익히고, 그것을 반복하여 닦는 중에 마침내는 열반에 도달하리라는 것이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ꡒ비구들이여, 온갖 착한 법은 모두 불방일을 근본으로 하고, 다 불방일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불방일을 모든 착한 법 중에서 최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ꡓ


그것은 다만 팔정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체의 선이 모두 이 불방일로 근본을 삼고 불방일에 의해 성립되고 있는 것이니까, 나는 온갖 선 중에서 불방일만이 최상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취지겠다.


그리하여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한 말씀은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밤하늘의 달과 가을 하늘의 해에 비유하여 힘을 주어 설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불방일을 중시하는 붓다의 입장을 이해한 이 마당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후대의 불교인들이 즐겨 쓴 말이거니와, 그들은 불교의 여러 가르침을 개괄하여 돈교(頓敎)와 점교(漸敎)로 구분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서 돈기(頓機)와 점기(漸機)의 설을 세우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근기(根機, 소질)는 갖가지이니까 가르침을 듣고 대번에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일에 걸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다음에야 겨우 깨닫는 사람도 있다.


그 전자를 돈기라 하고 후자를 점기라 하는데, 어느 쪽이 좋으냐 하면 물론 돈기가 뛰어나고 점기는 그만 못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또 가르침 자체에도 그런 구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같은 붓다의 가르침에도 속히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점차적으로 궁극의 경지를 향해 끌어올리는 것도 있다.


이 중에서 전자가 돈교, 후자가 점교인바, 여기서도 돈교가 뛰어난 가르침이고, 점교는 그만 못한 것이라는 것이 후세 불교인들의 일반적인 견해 였다.


물론 이런 구분은 대승 불교의 경전까지도 다 붓다가 친히 설한 것이라고 본 데서 나온 것이리라. 그러나 경전을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들어가는 우리로서는 진실한 붓다의 가르침이란 [아함경] 이외에는 없다고 보기에 이런 주장에 선뜻 동조하고 나서기가 어렵다.


그러면 붓다는 이중에서 어느 범주에 속했을까 하고 생각할 때, 아무래도 점교의 부류에 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불방일로 근본을 삼은 바에야 그것을 돈교 속에 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경 ([중부 경전] 107 산수가목건련경. 한역 동본, [중아함경] 144 산수목건련경)에 의하면, 붓다는 일찍이 사바티(舍衛城)의 교외인 이른바 동원 정사(東園精舍)에 있을 때, 한 수학자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이름은 못가라나(目健連)라고 하였다.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마하 못가라나(大目健連)와 구별키 위해 이 경에서는 ꡐ산수가 못가라나ꡐ라고 불렀다. 이 수학자가 붓다를 찾아와서 먼저 물은 것은 불교에도 순서를 좇아 배워야 할 길이 있느냐는 문제였다.


ꡒ대덕이시여, 제가 이 정사까지 오는데도 거쳐야 할 길이 있으며,또 저의 전문인 수학도 차례를 좇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존의 가르치심에도 또한 밟아야 하는 순서라는 것이 있습니까?ꡓ


그것은 학자다운 질문이라고 할 것이다. 붓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붓다가 설명한 것은 꽤 길거니와,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먼저 계(戒)를 지킬 것, 그리고 오근(눈,귀,코,혀,피부)을 제어 할 것, 다음에 또 정념(正念), 정지(正知)를 성취하여 지혜로써 번뇌를 누리고 온갖 집착과 불선을 떠나 점차 무상 안온의 경지인 열반에 들어갈 것.


그것은 명백히 점진적으로 도를 성취해 가라는 가르침이었다. 곁들여 말한다면 그 수학자가 이어서 물은 것은 그런 가르침에 의해 지도되는 제자들은 누구나 열반에 이르게 되느냐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붓다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ꡒ그것은 또 어째서 입니까? 엄연히 열반이 존재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으며, 또 세존께서 스승이 되어 계신데, 어떠한 이유로 이르는 사람이 있고,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붓다가 잘하는 반문이 시작되었다.


ꡒ그러면 벗이여, 그대에게 라자가하에 이르는 길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하자. 그대는 아마도 그들을 위해 자세히 길을 일러주리라.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사히 라자가하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을 헤매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어째서 그렇겠는가?ꡓ ꡒ대덕이시여, 저는 길을 가르쳐 줄 따름입니다. 그것을 제가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ꡓ


ꡒ벗이여, 그대의 말대로 열반은 엄연히 존재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으며, 내가 스승 노릇을 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제자 중에는 열반에 이르는 사람도 있고, 이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을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 주는 이에 불과한 것이다.ꡓ


아마도 이 마지막 말씀 같은 것은 좀 차갑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 놓고 보면, 여기에는 붓다의 진면목이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아가서 불교 자체의 본질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겠다.


ꡒ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 주는 이ꡓ라는 말씀을 뒤집어 놓고 볼 때, 붓다는 결코 전지 전능의 구제자가 아님이 명백하다. 또 신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중개자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을 고백하고 이 사람(붓다)만 예배하면 그것으로 구원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붓다의 진면목은 스스로 인생의 과제를 해결하고 정도를 실천하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너희도 이렇게 인식하고 이렇게 실천하여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라고 가르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붓다의 진면목은 도사(導師)인 점에 즉 지혜와 실천의 선구자요 안내자인 데에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결국 그 지혜와 실천에 대한 책임은 붓다가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 개개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눈을 떠서 존재의 진상을 보는 것은 그들 자신이어야 하며, 마음을 다해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도 그들 자신이어야 한다. 일찍이 붓다는 성구(聖句)를 외는 사람을 비판하여 ꡒ남의 소를 세는 것 같다.ꡓ고 한 적이 있다.


자기 자신이 지혜의 눈을 뜨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 대해 만년의 붓다는 자주 다음과 같이 설하여 제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ꡒ너희는 이에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며, 또 법(진리)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ꡓ


여기서 섬(dlpa)이라고 한 것은 강의 한가운데 또는 바다의 섬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모든 것이 유전(流轉)하는 한가운데에서 의지할 수 있는 곳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요지는 확고한 의지처란 자기자신과 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법에 의해 제어되는 자기, 그것밖에는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것에 대해 [법구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자기의 의지처는 자기뿐이니

저 밖에 또 무엇을 의지하리오.

자기가 잘 조어되는 때

얻기 힘든 의지처를 얻으리로다. (160)


불교란 본래가 이런 가르침이다. 이것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나타낸다면 붓다가 설하신 것은 결국 자기 형성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형성의 길에는 이것이면 그만이라는 따위의 한계는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자제와 집중과 지속을 가지고 일생 동안 걸어가야 하는 것뿐이다.


저 사라쌍수 밑에 누워 장차 크나큰 죽음(대반열반)에 들려던 붓다가 그 제자들에게 남기신 최후의 말씀은 [대반열반경] 속에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ꡒ그러면 비구들아, 나는 너희에게 이르리라. 모든 것은 변화하느니 라. 불방일하여 정진하도록 하라.ꡓ





17. 문답식.


ꡒ소나여, 어찌 생각하느냐? 색(물질)은 불변하는 것이겠느냐, 변화하는 것이겠느냐?ꡓ

ꡒ대덕이시여, 변화하는 것입니다.ꡓ

ꡒ만약 변화하는 것이라면, 괴로움이겠느냐, 즐거움이겠느냐?ꡓ

ꡒ대덕이시여, 괴로움입니다.ꡓ

ꡒ만약 변화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관찰하여 ꡐ이는 내 것이다. 이는 나다, 이는 나의 본질이다.ꡑ라고 할 수 있겠는가?ꡓ ꡒ대덕이시여, 그럴 수는 없습니다.ꡓ


([相應部經典] 22:49輪屢那. 漢譯同本, [雜阿含經] 1:30輪屢那) 상응부경전 륜루나 한역동본 잡아함경 륜루나


붓다는 매우 자주 문답으로 제자들을 이끌어 갔다. 그런 몇 가지 보기를 앞에서도 든 바가 있거니와, 나는 이 문제와 관련시켜 붓다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볼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문답에는 지혜의 스승으로 붓다의 면목이 참으로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 점에서 붓다와 예수 그리스도는 재미있는 대조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예수는 별로 문답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신념으로서 지니고 있는 것을 그대로 상대에게 쏟아 놓아 ꡒ저것이냐 이것이냐.ꡓ의 선택을 사람들에게 바리새인과의 문답 같은 것도 전하고는 있으나, 그런 때에도 예수는 역시 의연한 자세로 자기의 소신 그대로를 가지고 대답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에 비하여 붓다는 매우 자주 문답을 설법 방식으로 썼을 뿐 아니라, 그 문답도 대개의 경우는 꽤 긴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런 문답을 통해 붓다는 차차 상대를 인도하여 스스로 어떤 결론에 이르게 하곤 하였다.


앞에 나왔던 문답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가령 바차라는 외도가 열반에 관해 빗나간 질문을 했을 때, 붓다는 불을 비유로 들어 문답을 거듭하는 중에 어느덧 열반의 개념에까지 이끌어 들였던 것이다.


또 어떤 비구가 맹렬한 수도 생활을 계속하는데도 목적을 실현하지 못해서 비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붓다는 그를 찾아가서 거문고를 비유로 들어 문답을 시작했다.


재가 시절 거문고를 잘 뜯었다는 그 비구는 거문고와 관계되는 일에 대해 붓다가 묻는 것에 대답해 가다가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중도(中道)의 이념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문답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왜 그런지 소크라테스 생각이 들곤 한다. 하기야 붓다와 소크라테스를 나란히 세워 놓고 볼 때, 여러 가지면에서 아주 유사한 점이 발견되는 것 같다.


두 사람 다 믿는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생각하는 사람이었음이 확실하다. 유럽의 사상가들은 흔히 소크라테스를 ꡐ인류의 스승ꡑ이라고 하지만, 그런 칭호는 그대로 붓다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도 또한 가르치고 이해 시키고 신념을 생기게 하고, 또 실천을 하게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스승이었던 까닭에 소크라테스처럼 붓다도 그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으로 자주문답 방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그런 문답에 대해 우리는 몇 가지 실례를 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약간 특수한 문답을 보기로 들어 놓았다. 이 장(章)의 첫머리에 소개한 것이 그것이다.


이 문답의 상대는 앞서 거문고의 비유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소나이거니와, 붓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것은 그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상응부 경전]이나 한역의 [잡아함경]을 조사해 보면, 몇 십 회에 걸쳐 같은 양식의 문답이 붓다와 제자들 사이에서 되풀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붓다는 같은 문답 양식을 자주 제자들에게 적용시켰는데,그럼으로써 일종의 ꡐ교리 문답ꡑ이 성립되었던 것 같다.


그 문답식은 얼른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무상 - 고 - 무아로 연결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붓다는 어떤 때에는 설법에 곁들여 그 자리에 있는 비구에게 그것을 시험해 본 적도 있다.


또 어떤 때에는 이제부터 좌선하기 위해 산중으로 들어가려는 비구에게 그런 질문을 하여 대답을 하게 한 일도 있다.


그 제재(題材)는 때로 오온(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요소)이기도 했다. 즉 색(물질, 육체). 수(감각), 상(표상),해(의지), 식(의식)에 관한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육처(감각 기관)를 다루기도 했다. 즉 눈, 귀, 코, 혀, 몸, 마음과 그 대상에 관한 문제였다. 이런 것을 소재로 하여 이를테면 네 눈은 영원한 것이냐 무상한 것이냐고 물었으며, 또 네 눈의 대상은 영원한 것이냐 무상한 것이냐고 따졌던 것이다.


또 앞에 인용한 문답같이 네 색(육체)은 영원이냐 무상이냐라고 묻기도 했다. 그런 붓다의 질문에 대해 경이 전하는 한에서는 어느 비구나 다 거기에 알맞은 대답을 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물음에는 누구라도 그렇게 밖에는 대답할 수 없기도 했겠지만, 이 무상 - 고 - 무아로 연결되는 사고 방식은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적인 성격이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것을 고쳐 생각해 보면 붓다는 그 제자들이 이런 기본적인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문답을 통해 끊임없이 시험해 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후세의 불교인들이 주장한 ꡐ삼법인(三法印)ꡑ또는 ꡐ사법인ꡑ이다. 법인(dharma-uddana)이란 바른 법의 표라는 정도의 뜻이어서, 불교가 그 밖의 종교나 사상과는 다른 중요한 특징을 섭송(攝頌), 즉 짧은 운분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제 그것을 한역에 의해 표시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1)제행 무상(諸行無常)

2)제법 무아(諸法無我)

3)열반 적정(涅槃寂靜)


이것이 이른바 삼법인이다. 여기에 다시

4)일체 개고(一切皆苦)


를 추가해서 사법인이라고 일컫는 수도 있다. 후세에서 불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불교의 사상적 성격을 설명하는 경우, 흔히 이 삼법인이나 사법인을 들었다.


따라서 오늘날 불교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이에 대해 들은 바가 있을 터이며, 그렇게 유명해진 만큼 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으로 나타난 불교 파악은 아주 요령 있는 것이라고 할만하다.


먼저 제행 무상이란 불교가 내세우는 존재론이다. 물론 그 밑받침이 된 것은 앞에서 설명한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일체의 존재는 서로 어떤 의존 관계에 있으며, 그것들은 여러 조건의 결부에 의해 생겨났고,그 조건이 없어지는 데 따라 소멸한다는 것이 연기설인바,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이 제행 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제법 무아란 불교가 주장하는 인간론으로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제1명제인 무상관이다. 일체가 무상하다면 영원 불변하는 자아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ꡐ제행 무상ꡑ의 존재론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 또한 무상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 이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셋째 명제인 열반 적정은 불교가 이상적인 경지라고 여기는 열반을 가리킨다.


이것을 목적론 또는 행복론이라고 하여도 되리라. 그런데 이 삼법인에는 붓다가 그처럼 역설했던 고(苦)에 대한 주장이 빠져 있다. 즉 이 인생을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하는 소견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 개고의 명제를 세워, 이것을 삼법인에 추가하면 사법인이 되는 것이다. 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개념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후대의 불교인들에 의해 다른 종교에 대한 불교의 특징을 해명하고자 해서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붓다 자신은 불교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추측하건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앞의 문답에서 사용되었던 무상 - 고 - 무아의 계열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이제까지 별로 지적하는 학자가 없었던 듯하지만, 나는 목소리를 높여 이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이 무상 - 고 - 무아의 계열과 앞에서 설명한 사제의 체계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제의 체계란 붓다가 그 가르침의 뼈대가 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자주 제자들에게 역설한 바 있는 가르침이다.


사실이 또 그러해서 이것을 알고 이것만 실천한다면, 붓다의 제자로서 뜻한 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그 밖의 것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번거롭게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제법은 어디까지나 실천의 체계이므로, 적어도 그 표면에는 붓다의 존재론이나 인간론은 나타나 있지 않음이 사실이다. 그것들은 그 체계의 밑바닥에 깔려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 체계로서가 아니라 사상의 체계로 나타낸다면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가 되는바, 그것이 무상 - 고 - 무아의 사상 계열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 제1항목은 존제에 대한 해석이요, 제2항목은 인생을 해석한 결론이다.


그리고 셋째 것은 인간 해석에 대한 붓다의 주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후세 불교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주장은 이런 붓다의 사상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붓다가 제자들을 상대로 문답한 이 내용은 불교의 기본적 성격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붓다의 문답에 또 하나 재미있게 생각되는 것은 붓다가 이런 문답식을 자주 응용 문제의 형태로 비구들에게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어느 경([상응부 경전] 22:151아)은 이런 문답을 전해주고 있다. ꡒ비구들아, 무엇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무엇에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내가 있다는 생각)은 일어나겠느냐?ꡓ


현명한 독자는 곧 이해하실 줄 믿거니와, 이 질문은 무상 - 고 - 무아의 문답식을 거꾸로 하여 대답해야 될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저 문답식에서는 거침 없이 대답하던 비구들도 이 응용 문제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못했던 것 같다.


이 밖에도 비슷한 질문의 보기가 몇 가지 나와 있으나, 거기서도 그들은 대답이 막혀 붓다의 가르침을 청하기도 하였다.


ꡒ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우리 법의 근본이시며, 우리 법의 안목이십니다. 원컨대 우리를 위하여 그를 설하시옵소서.ꡓ


이것이 답변에 막힌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청할 때에 말하는 유형화된 표현이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그 청에 따라 해답을 설해 주었다.


ꡒ비구들아, 색(물질)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색에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색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은 일어나느니라. 또 수(감각)가있음으로 말미암아, 상(표상)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행(의지)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식(의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에 집착하고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은 일어난다고 알아야 되느니라.ꡓ


이렇게 설한 붓다는 다시 한 번 그 문답식으로 돌아가서 비구들에게 묻는 것이 상례였다.


ꡒ그러면 비구들아, 너희는 어찌 생각하느냐? 색은 영원하겠느냐,무상 하겠느냐?ꡓ

ꡒ대덕이시여, 무상하나이다.ꡓ


이리해서 앞에 인용한 것과 같은 문답식이 반복되어 갔다. 이 문답식이 되면 제자들은 막히는 일이 없이 아주 잘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 이 문답식을 평소에 배워 익히고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런 문답식 교육은 이 문제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ꡐ사제ꡑ 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잘 외고 있어서, 붓다가 물을 때에는 언제나 ꡒ이는 고(苦)이다.ꡓ , ꡒ이는 고의 발생이다.ꡓ , ꡒ이는 고의 멸진이다.ꡓ , ꡒ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ꡓ라고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이런 문답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로 주목한 학자가 없는 듯하다. 주의해서 잘 읽어 보면 지혜의 스승으로서의 붓다의 진면목은 이런 곳에 도리어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듯하다.




18. 착한 벗.


ꡒ비구들이여, 너희는 아침에 해가 뜨는 모양을 잘 알고 있으리라. 해가 나올 때가 되면 먼저 동쪽 하늘이 밝아지고, 그 다음에 빛이 눈부시게 발산되면서 해가 솟는다. 즉 동녘 하늘이 밝아짐은 해가 뜰 선구요 전조이다.


비구들이여, 그것과 마찬가지로 너희가 성스러운 팔정도를 일으키는 데도 그 선구가 있고 전조가 있나니, 그것은 착한 벗과 사귐이니라. 비구들이여, 그렇기에 착한 벗을 가지고 있는 비구라면, 그가 마침내 성스러운 팔정도를 배우고 익혀서 그 공을 쌓게 되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가 있느니라.ꡓ ([相應部經典] 45:49善友)


이 아함부 경전 중에는 이렇게 착한 벗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경이 여러 개가 보인다. 또 하나 들어 본다면, 붓다는 더 간명 솔직하게 이렇게 설한 적도 있다. 이것은 상응부 경전에 보이는 역시 ꡐ선우ꡑ라는 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ꡒ비구들이여, 여기에 한 법이 있나니, 성스러운 팔정도를 일으킴에 이로움이 많도다. 그 한 법이란 무엇인가? 그는 착한 벗이니라. 비구들이여, 착한 벗을 가진 비구는 성스러운 팔정도를 배우고 익혀서 그 공을 쌓게 될 것이 기대되느니라.ꡓ


나는 스스로 불민함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하여야 하겠다. 나는 이런 경들을 가볍게 읽어버리고 오랫동안 그 속에 숨어 있는 깊은 뜻에 생각이 못 미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 시세로의 [우정에 대해서]를 읽다가 갑자기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로부터 나는 ꡐ착한 벗ꡑ에 대해 말하는 이런 경전들의 뜻을 어느 정도라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세로(Cicero, Marcus Tullius, B.C. 106~43)는 로마의 철학자로서 기원 전2세기에서 기원 전1세기 사이에 생존했던 사람이다.


그의 조그마한 저서 [우정에 대해서]는 그리스나 로마에서의 아리따운 우정의 실례를 많이 들고, 또 우정에 최고의 찬사를 바친 책이다.


이를테면ꡒ벗은 눈앞에 있지 않을 때도 거기에 있으며, 가난해도 풍족하고,허약해도 건강하고, 또 한결 말로 나타내기 어렵거니와, 죽었다 해도 살아 있는 것과 같다.ꡓ는 따위의 표현이 그 전권을 채우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우정의 실례와 그것에 대한 찬사를 읽다가 뜻하지도 않은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나는 이제 ꡐ우정의 역사ꡑ라고 부르고자 한다.


우정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맡아 온 구실이라는 정도의 뜻이다. 대체 인류의 세계에서 우정이라는 덕목(德目)이 생겨난 것은 언제부터일까? 나는 우정에 대한 새 사실에 눈뜨기 이전에는 지금껏 그런 일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ꡒ벗의 슬픔에 나는 울고, 내 즐거움에 벗도 춤춘다.ꡓ


그것은 필시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일일 것이라고 무작정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류가 아직 부족 제도에 매여있던 시대에는 혈연에 의한 연결이 전부여서 우정이 생겨날 여지는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인류의 역사 속에서 큰 구실을 담당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우정이라는, 혈연과 관계 없는 인간적 결합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그것은 대개 기원 전6~5세기 무렵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플라톤(Platon, B.C. 427~347)이 그 [대화편]에서 화려한 말로우정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도 그때였으며, ꡒ한 명의 진정한 벗은 만 명의 친척보다 소중하다.ꡓ고 그리스 인 사이에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시세로가 그리스와 로마의 아리따운 우정에 대해 기록하여 그것에 최고의 찬사를 바친 것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세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그리스나 로마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와는 멀리 떨어진 극동에서도 저 공자가ꡒ벗이 있어 먼 데로부터 오니, 또한 즐겁지 않은가!ꡓ라는 말을 [논어]에 남긴 것도 역시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이제 붓다가 ꡐ착한 벗ꡑ에 대해 힘을 주어 비구들에게 설한 것도 역시 같은 세기에 일어났던 일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무엇인가 느끼는 바가 있어서 ꡐ착한 벗ꡑ에 관해 실린 경들을 다시 주의하여가며 읽어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거기에서는 이제껏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새로운 뜻이 뒤를 이어 끊임없이 샘솟아 나왔다.


이 ꡐ착한 벗ꡑ에 관계되는 경들에는 나로 볼 때 그런 추억이 엉켜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이 시기에 이르러 우정이라는 덕목이 갑자기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일까? 그 이유를 캐기란 나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몇 세기의 그리스나 로마나 인도나 중국에 새로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을 찾는다면, 그것이 바로 열쇠 노릇을 하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 국가 사이에 공통되는 새로운 현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도시 국가의 출현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이제 여기에서 고대의 도시 국가, 이를테면 그리스 인이 말하는 폴리스(polis)에 대해 자세히 논한다는 것은 이 책의 주제에서 멀어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극히 간략한 언급밖에는 시도할 겨를이 없거니와, 어쨌든 로마, 아테네, 라자가하 또는 사바티 같은 곳의 구조나 생활을 생각해 볼 때, 대략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도시들은 모두가 성벽으로 에워 싸여 있었고, 그 속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시민들은 물론 동일 부족만은 아니었다.


로마의 경우는 세 부족에 속하는 사람들이 한 곳에 살았고, 아테네로 말하면 네 부족이 모여서 그 폴리스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런 생활 무대에서는 부족 중심의 생활 대신 시민 사회의 생활이 새로 등장하는 것이 필연적인 추세였다.


이것은 역사가 자세히 말해 주고 있지만,여기에 이르러 혈연에서 말미암지 않은 인간의 정신적 결합이 비로소 인류의 역사에 크게 떠올랐던 것이라고 하겠다.


이제 눈을 돌려 붓다 시대의 인도를 자세히 살펴볼 때, 그 사회 구조는 고대의 로마나 그리스와 아주 유사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서도 새로이 몇 개의 고대 도시가 생겼는데, 그 중에서도 라자가하나 사바티같은 곳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을 자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도시들이야말로 붓다가 주로 활약한 무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붓다에게 귀의한 대부분의 신자도 이런 도시 사람들이었을 것이 쉽게 예상된다. 이런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생각해 보면, 붓다가 ꡐ착한 벗ꡑ의 가치를 이상하리만큼 역설한 까닭이 조금씩 이해되는 것이다.


불교 내부에서도 혈연 아닌 인간과 인간의 결합이 큰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붓다의 교단(敎團)이다.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붓다의 교단에서는 그 출신이나 혈통의 구별이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한경([증지부 경전] 8 : 19 파하라다. 한역 동본, [증일 아함경] 42 사수륜)은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붓다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ꡒ여러 강이 있어서 각기 강가, 야무나, 아치라바티, 사라부, 마히라고 불리거니와, 그것들이 한번 바다에 이르고 나면, 그 전의 이름은 없어지고 오직 대해라고만 일컬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크샤트리아, 브라만, 바이샤, 슈드라의 네 계급도 일단 법과 율을 따라 출가하고 나면 예전의 계급 대신 오직 사문이라고만 일컬어지느니라.ꡓ


불교의 교단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그들도 재가 시절에는 저마다 가문과 혈통이 있었을 것이지만, 일단 붓다의 교단에 들어온 이상에는 그런 사회적 신분 관계는 모두 불식되어 모든 사람이 평등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여러 강물이 바다에 이르고 나면 오직 ꡐ바다ꡑ로만 불리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붓다의 교단에는 계급도 없고 통솔자도 없고 또 통솔 받는 사람도 없었다. 주목해야 될 것은 그 속에서는 붓다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가르침은 붓다에 의해 깨달아지고, 붓다에 의해 설해진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 붓다가 나타나서 정각을 성취하지 않고, 법을 설하여 이 길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마침내 이 법을 모르고 또한 이 길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길은 붓다 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 법(진리)은 태고부터 있었고, 이 길은 영겁에 걸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발견하고 가르쳐 주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붓다 자신도 또한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의 하나이다. 그도 역시 서로 손을 잡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행의 한 사람인 것이다.


붓다는 이 사실을 명확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주 그 제자들에게 ꡒ너희는 나를 좋은 친구로 삼음으로써, 늙어야 할 몸이면서도 늙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병들어야 할 몸이면서도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죽어야 할 몸이면서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고뇌와 우수를 지닌 몸이면서도 고뇌와 우수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ꡓ고 설하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삼가(samgha)라고 불리는 불교 교단의 기본적 성격이 가장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 같다.


그것과 대조하기 위하여 이를 테면 기독교 교단의 구조를 생각해 보자. 거기에는 우선 그 교도들이 은총을 구하고 구제를 기원해야 하는 전능한 신이 있으며, 다음으로 그 신이 파견했다고 생각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교도들은 그런 절대적 권위 앞에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머리 숙이고 빌어야 할 어떤 대상도 없는 바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성원이 오직 법의 증지(證知)와 실천이라는 한 가닥의 길을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 선두에는 붓다가 선구자의 자격으로 서 있어서 ꡒ너희들도 오라.ꡓ고 손짓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리하여 그 뒤를 따르고 그 수범에 힘입어 오직 자기 형성의 길을 걸어가는 것, 이것이 불교요 승가(僧伽)인 것이다.


이런 불교 교단의 성격을 곰곰이 생각할 때, 붓다가 ꡐ좋은 벗ꡑ의 소중함을 역설한 까닭이 차차 이해되어 오는 것처럼 여겨진다.


거기에는 은총을 드리울 신도 없고, 믿고 의지할 중개자도 없거니와, 그 대신 손짓하고 부르는 붓다의 수범이 있고, 힘이 되어 주는 좋은 벗의 큰 격려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붓다 조차 좋은 벗의 하나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할 때, 불교의 진정한 면목을 파악한 것이 되는 줄 안다. 한 경([상응부 경전] 45 : 2반. 한역 동본, 27:15 선지식)에 의하면 아난다(阿難)는 붓다에게 이와 같이 물은 적이 있다.


ꡒ대덕이시여, 곰곰이 헤아려 보매,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절반에 해당한다 생각됩니다. 이런 소견은 어떻겠습니까?ꡓ


그도 또한 스승이 말씀하는 바를 늘 듣고 있었으므로, 벗의 소중함에 대해 꽤 많이 이해한 듯이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소견을 말하여 붓다의 판단을 구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렇게 말씀했다. ꡒ아난다여, 그것은 잘못이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해서는 않된다. 아난다여,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이니라.ꡓ


아마도 그것은 아난다로서는 뜻밖의 말씀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착한 벗의 뜻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것이 ꡐ이 길의 절반ꡑ에 해당한다고 하면 지나치지 않을까 주저하면서 이 질문을 했던 것이겠다.


그런데 붓다의 판단은 그것으로도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기야 붓다의 제자 중에도 같은 문제에 관해 그것은 ꡐ이 길의 전부ꡑ라고 해도 되겠느냐고 물은 사람도 있기는 있었다. 사리푸타의 경우가 그렇다.


ꡒ옳거니 사리푸타여, 옳거니 사리푸타여. 그 말이 옳으니라.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이니라.ꡓ


이것이 찬탄의 말씀과 함께 사리푸타에게 내린 붓다의 판단이었다. [상응부 경전] 45 : 3 ꡐ사리불ꡑ이라는 제목의 경이 전해 주는 이야기이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이 장(章)을 내 불민함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여야 했다.


나는 아직도 붓다의 ꡐ착한 벗ꡑ에 관한 사상의 뜻을 그 ꡐ절반ꡑ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도 또한 아난다나 사리푸타의 전례를 따라 한 가지 물음을 붓다 앞에 내놓고 싶다.


ꡒ대덕이시여, 삼가(교단)란 우정의 교단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아함경 -실천


19. 정사(精舍)


공양이 끝나자 빈비사라 왕은 속으로 생각했다. ꡐ세존께서 거처하실 곳으로는 어디가 알맞을까? 그곳은 도시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고, 왕래하는데 편리하여서 법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기가 쉬워야 하겠다.


그리고 낮에는 번거롭지 않고 밤에도 시끄럽지 않아서, 한가히 있으면서 명상하기에 적당한 곳이라야 한다ꡑ그렇게 생각하다가 왕은 저 베루바나(竹林園)가 그 조건에 들어맞음을 발견했다. 왕은 물병을 들어 세존의 손에 물을 부으면서 말했다.


ꡒ나는 세존을 비롯한 비구의 대중에게 베루바나를 기증하고 싶습니다. 원컨대 받아 주시옵소서.ꡓ


붓다는 잠자코 이를 받으셨다.


(南傳 [律藏] 大品1. 漢譯, [四分律] 32) 남전 율장 대품 한역 사분률


붓다와 그 제자들의 일상 생활을 될 수 있는 한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정사(精舍)에 대한 것을 약간 서술해 보고자 한다.


붓다와 그 제자들의 정사로서 맨 처음에 이룩된 것은 이른바 죽림정사이며, 그것을 기증한 사람은 마가다 국의 빈비사라 왕과 그 나라의 어느 부자였다. 빈비사라 왕과 붓다는 그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붓다가 라자가하 근처에서 수행하고 있던 무렵, 그 모습을 멀리서 본 왕은 붓다를 판다바 산 바위굴 속으로 찾아가서 벼슬하기를 권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 자자한 소문에 의하건대 그 수행자는 최고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붓다가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경은 그것을 이렇게 써놓았다.


ꡒ사문 고타마는 사캬족의 아들로 출가하여 이 서울 교외에 살고있다 한다. 명성이 매우 높아서, 세상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應供),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五覺者), 인천의 스승(人天師)이라 일컬어지며,


그 설하는 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고, 조리와 표현을 아울러 갖추었으며, 원만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가르친다 한다. 이런 성자를 뵙는 사람은 참으로 다행이다.ꡓ


왕은 이리하여 곧 붓다를 찾아가서 설법을 듣고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붓다와 그 제자들을 초청해서 정성껏 공양하기를 잊지않았다.


앞에 인용한 일절은 그 공양이 끝난 다음에 왕이 베루바나를 기증하겠다고 신청하는 장면을 서술한 글이다. 이렇게 왕이 기증한 땅에 라자가하의 부호가 집을 지어 바침으로써 불교 최초의 정사가 완성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그 일절을 인용한 것은 그것이 정사의 환경에 대한 기본적인 조건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된 까닭이다. 그것은 첫째로 도시의 교외, 즉 거리로부터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것이 적당하다고 되어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기 쉽게 하여 주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붓다나 제자들이 고요히 살면서 명상하는 데 어울리는 곳이라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절이 산중 깊숙이 들어가 있거나, 아니면 거리 속에 묻혀 있거나 한 오늘의 현실에서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것은 어쨌든 그런 장소란 그렇게 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심사 숙고한끝에 베루바나가 왕 자신의 뜻에 의해 선택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조성된 기원 정사의 위치를 잡는 데에 사바티의 부호 아나타핀디카(給孤獨), 즉 스다타(須達多)가 매우 애썼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로서 오늘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 사람은 당시 중인도의 여러 도시 사이를 대상(隊商)을 조직하여 내왕하면서 무역에 종사하고 있던 큰 상인이었다. 그는 마침 상업상의용무로 라자가하에 왔다가, 앞에 나온 그곳의 부호로부터 붓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곧 붓다를 찾아가 보았더니 아주 훌륭한 성자이었으므로, 내년의 우안거(雨安居)는 사바티에서 보내 주십소서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정사를 지을 필요가 생겨 그런 조건을 구비한 땅을 찾다가 보니, 제타(祇陀)라는 왕자가 갖고 있는 숲이 적당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왕자는 절대로 팔려고 들지 않았다.


ꡒ왕자님, 부디 그 숲을 저에게 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거기에 정사를 짓고자 합니다.ꡓ


ꡒ장자여, 그대가 황금을 그 위에 깔아 놓는다면 몰라도 그 토지는 넘겨 줄 수 없소.ꡓ


팔아라, 못 팔겠다 하여 옥신각신한 끝에 아나타핀다카는 마침내 법정에 호소했다. 그만큼 그는 그 땅이 탐났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재판을 담당한 대신의 판결이었다.


ꡒ왕자께서는 이미 값을 말씀하셨습니다. 황금을 그 위에 깔아 놓으라고 값을 부르신 이상 팔지 않을 수 없습니다.ꡓ


그것이 고대 인도의 상(商)도덕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나타핀디카는 황금을 수레로 싣고 와서 그것을 땅에 깔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번 실어 온 것으로는 모자랐으므로 계속해서 자꾸 황금을 날라왔다.


이것을 보고 있던 왕자는 경탄하고 감동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ꡒ장자여, 원컨대 나에게도 일부의 땅을 남겨 달라. 나도 기증하겠으니.ꡓ


이리하여 이 정사는 ꡐ제타(祇陀)왕자의 숲에 이룩된 아나타핀디카(給孤獨)의 정원에 있는 정사ꡑ, 즉 ꡐ기수급고독원 정사(祇樹給孤獨園精舍)ꡑ라 불리고, 줄여서 ꡐ기원 정사ꡑ라고 하게 되었다.


붓다가 전도에 종사한 45년 동안에 여러 사람으로부터 기증 받은 정사의 수효는 꽤 많았던 것 같으나,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이 기원정사이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지금까지 전해오는 경전은 모두 그것이 어디에서 설해졌는지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 기원 정사에서 설해졌다는 것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까닭이다. 그것을 한역대로 적어 보면 이렇게 된다.


ꡒ이같이 나는 듣자왔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정사에 계셨다.ꡓ 우리가 경전을 욀 때에 먼저 나오는 것은 이런 구절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이제 말한 바와 같이 제타 왕자의 숲을 사들인 경위가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를 이루고 있으므로, 그것이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조각이나 그림의 소재가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리고 셋째로는 아마 이 정사가 붓다 시대의 정사로서는 가장 시설이 완비되어 있어서 대표적인 건물이었던 모양이다. 그 터는 근년에 이르러 발굴되어 거의 지난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위치는 사바티의 남쪽 교외 대략1마일 남짓한 곳이다. 붓다나 비구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면 그 길을 걸어 사바티에 탁발하러 갔다.


겉옷을 오른 어깨에 걸치고 발은 왼손에 들어 위의를 갖추고 유유히 걸어가는 비구들의 모습이 아침 햇빛 아래 점점이 이어졌다. 오후가 되면 여러 사람들이 또 그 길을 거쳐, 이번에는 기원 정사 쪽으로 걸어 왔다.


법을 듣고자 성 안 사람도 왔고, 질문하기 위해 다른 종교의 학자도 왔다. 코사라 국의 왕인 파세나디도 곧잘 마차를 달려 찾아오곤 하였다.


한 경([상응부 경전] 3:13, 대식. 한역 동본, [잡아함경] 42:6천식)은 어느 날의 왕의 내방에 대해 이런 서술을 남겨 놓았다. 그 날 기원 정사에 나타난 파세나디 왕은 붓다와 마주 앉은 다음에도 몹시나 가쁜 숨을 내쉬었다.


물어 보았더니 이 왕은 평소부터 과식하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 날도 역시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나서 곧 정사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왕을 위해 게(偈)를설하여 타일렀다.


사람은 스스로 헤아리어서

양을 알아 음식을 들어야 하리.

그러면 괴로움도 훨씬 줄고

더디 늙어 수명도 보존하리라.


감동한 왕은 시중드는 아이를 시켜 그 게를 외게 하고, 그 후로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것을 낭송하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왕은 차차 음식의 양을 줄여 갔고, 비대하던 체구도 어느덧 날씬해졌으며 용모도 단정해졌다.


그리하여 어느 날 왕은 제 손으로 제 몸을 쓰다듬으면서ꡒ참으로 세존께서는 두 가지 이익을 나에게 주셨다. 진실로 나는 세존으로 말미암아 현세의 이익과 미래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ꡓ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비근한 가르침이거니와, 그러한 경의 서술이 도리어 그 정사에서 벌어졌던 하루하루의 생활을 생생하게 우리의 가슴에 전해 주는 것 같다.


그러면 비구들은 거기에서 어떤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가? 그것에 관해서는 계율 속에 세세한 규정이 전해 온다. 그들은 일어날 때나, 누울 때나, 앉을 때나, 걸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목욕할 때나, 항상 위의를 갖추어야 했다.


그렇기는 해도 탁발에서 돌아왔을 때라든지, 밥을 다 먹고 여럿이 모여 있을 때면, 그들도 그만 속세 사람들과 비슷한 대화를 즐기는 수도 없지 않았다. 몇 개의 경이 그런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이것 또한 기원 정사에서 일어난 일인데, 한 경([소부경전] 자설경3 :9)에 의하면, 어느 날 비구들이 모여 속세에 있을 때의 자랑을 서로 늘어 놓다가 붓다의 눈에 띄어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


ꡒ나는 집에 있을 때 코끼리를 참 잘 다루었지.ꡓ


ꡒ나는 집에 있을 때 말을 아주 잘 탔단 말야.ꡓ


이런 이야기가 되면 갑자기 눈이 빛나는 것이 인간이거니와 비구들이라고 하여 예외일 수는 없었다. 다시 어떤 사람은 수레 달리는 것을 자랑했고, 어떤 사람은 궁술이나 검술을 뽐냈으며, 또 어떤 사람은 글씨나 시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즐거운 화제에 열중한 나머지 몸이 정사 안에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떠들썩하고 있던 참에, 소리도 없이 붓다가 나타나서 훈계한 말씀은 이러했다.


ꡒ비구들아, 너희가 모여 있을 때에는 오직 두 가지 할 일이 있느니라. 법을 이야기하든지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ꡓ법에 대한 이야기와 성스러운 침묵, 이것들은 붓다가 자주 비구들이 지켜야 할 오직 두 가지의 의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출가하여 사문이 된 이상에는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자기 완성만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곁들여 말한다면 정사에서의 그들의 생활에는 성전을 독송해야 하는 의무조차 없었다.


신 앞에 예배의 의식을 올릴 필요도 없었다. 하물며 후세의 승려가 그 주요한 임무로 여기고 있는 불공을 드리느니 재를 올리느니 하는 따위의 일은 그들로서는 전혀 알지도 못했고 관계도 없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간명, 엄숙한 수해의 과정에서도 꼭 지켜야 하는 두 가지의 의식이 있었다. 그것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좀 자세히 기술해 보고자 한다. 그것에 의해 그들의 생활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20. 포살(布薩)


ꡒ대중이여, 들으시라. 오늘은 15일 포살일이니, 만약 대중에게 지장이 없다면 교단은 포살을 베풀고 계본(戒本)을 외리라.


무엇을 교단의 첫 행사라고 하는가? 여러 대덕이 몸의 청정함을 고백함이니, 나는 이제 계본을 읽으리라. 대중은 여기에서 잘 듣고, 잘 생각 할지어다.


만약 스스로 허물이 있음을 자각한 사람은 나서서 드러내라. 또 죄 없는 이는 잠자코 있을지니, 잠잠하면 여러 대덕의 청정함을 알리로다.


만약 누가 물을 때에는 마땅히 대답해야 하리니, 이같이 비구는 이 대중 속에서 세 번까지 질문 받을 것이며, 세 번 질문을 받고도 죄가 있으면서 고백하지 않는다면, 고의적인 망어죄(妄語罪)를 얻으리라.


고의적 망어는 도에 장애가 된다고 붓다께서는 설하셨나니, 그러므로 죄 있는 것을 기억하는 비구로 청정하기를 원하는 이는 그 죄를 드러내라. 드러내면 그는 안락함을 얻으리로다.ꡓ


([律藏] 大品2佈薩건度) 율장 대품 포살건도


원시 불교 교단의 생활상, 즉 붓다와 그 제자가 하루하루 어떤 생활을 했나 하는 점은 오늘의 사찰의 양상을 근거로 해서는 좀처럼 알아내기가 어려울 것임에 틀림없다.


거기서는 장례식이나 추선(追善 ;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불사.)의 의식이 거행되지는 않았다. 또 독경이나 불공이 올려지는 일도 없었다.


즉 그들의 생활은 사제자(司祭者)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수행자로서의 하루하루였기 때문이다. 붓다가 설하는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몸에 구현해 가는 일, 그것밖에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이란 없었던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그들은 곧 위의를 갖추고 거리나 마을로 갔다. 탁발을 위해서이다. 탁발(托鉢)이란 불교가 중국에 들어간 다음에 생겨난 말이지만 매우 재미있는 말이다.


탁(托)이란 손으로 받는다는 뜻으로 발(鉢)을 손에 들고 음식을 받는다는 것이니까, 탁발이란 걸식이요 밥을 비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 발우(鉢盂)에 음식을 넣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생존은 이 발우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지처럼 애걸 복걸하여가면서 음식을 얻는 것은 아니며 ꡒ만약 내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 발우에 음식을 넣어 주시오.ꡓ하는 것이 그 심정이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비구는 이 탁발에 비구로서의 생명을 걸고 있는 셈이 된다. 토겐(道元(1200~1253); 일본 조동종의 개조. 중국에 유학하여 여정(如淨)에게서 도를 배우다.


저서에 <<정법안장>> 등이 있다.)이[정법안장수문기]에서 의량(衣糧)의 두 가지 일은 소연(小緣)이긴 하지만, 행자(行者)의 대사이다. 라고 한 것도 그러한 뜻이라고 추측된다.


따라서 그것은 법식을 좇고 위의를 갖추어 엄숙한 태도로 행해져야 했다. 한 경([상응부 경전] 4:


18 단식. 한역 동본, [잡아함경] 39:15 걸식)에 의하면, 붓다도 어떤 날에는 깨끗이 씻은 발우를 그대로 가지고 돌아오시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붓다가 마가다 국의 시골, 판차사라(五葦)라는 마을에 계실 때의 일이었다.


그 날은 마침 젊은 남녀들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축제가 벌어지는 날이었다. 붓다는 그 아침에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탁발을 위해 그 마을을 찾아갔으나,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축제에 마음이가 있기 때문인지 아무도 붓다를 공양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경의 서술은 악마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게 되거니와, 그 돌아오는 길에 마라(악마)가 모습을 나타내어 붓다에게 말을 걸었다.


ꡒ사문이여, 음식을 얻었는가?ꡓ


ꡒ얻지 못했다.ꡓ


ꡒ그러면 다시 마을로 돌아가라. 이번에는 공양을 얻을 수 있도록 내가 해주겠다.ꡓ 그러나 붓다는 단호히 그것을 거부했다.


ꡒ음식은 비록 얻지 못했다 해도 보라, 우리는 즐겁게 사나니, 이를테면 저 광음천(光音天 ; 인도의 전설에 나오는 천상 세계의 하나. 이 세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음성이 없고, 말할 때에는 입에서 광명이 나와 언어를 대신한다고 한다.)모양기쁨을 음식 삼아 살아가리라.ꡓ


여기서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붓다의 내부에서 일어난 식욕의 유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붓다라고 해도 시장하면 먹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리라. 지금 다시 간다면 이미 선물의 교환도 끝났을 것이니까 공양을 얻을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붓다의 머리에 떠올랐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겠다. 하지만 탁발이란 그들에게 그런 것일 수는 없었다.


거기에는 의연(毅然)히 지켜야 할 법식이 있었고, 더 소중한 마음씨가 있어야 했다. 법에 의해 얻지 못하는 것과 법에서 말미암지 않고 얻는 것은 어느 쪽이 존귀한가? 그들로서는 말할 나위도 없이 법에 의하여 얻지 못하는 쪽이 훨씬 존귀하였다.


여기에 ꡒ기쁨을 음식 삼아 살아가리라.ꡓ고 한 구절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생활을 더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포살과 자자(自恣)라고 불리는 두 행사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교단에는 종교적인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구태여 의식에 가까운 것을 찾는다면, 그것이 포살과 자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행사는 그들의 생활이 무엇을 목표로 영위 되었나 하는 점을 참으로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선 포살이란 무엇인가? 포살이라는 말은 아마도 산스크리트의 ꡐ호사다(poshadha)ꡑ의 음사이리라. 팔리 어로 말한다면 ꡐ우포사타(uposatha)ꡑ가 될 것이다.


그것의 유래를 따지면 원레 외도(外道)즉 불교 이외의 종교에서 행해지고 있던 의식을 채택한 것으로 그 소식은[율장] 대품(大品)2 ꡐ포살건도ꡑ라는 대목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그것은 붓다가 라자가하 교외의 ꡐ깃자쿠타ꡑ라는 산에 있었을 때의 일인데, 앞에서 언급한 빈비사라 왕으로부터 붓다에게 한 제안이 들어왔다.


그 왕은 불교 교단의 성의 있는 보호자였거니와, 그때 라자가하 부근에 있는 외도의 교단에서는 반 달에 두 번씩 집회를 열어서 그 기회에 일반 신자들을 위해서도 설법을 베푸는바, 그것은 매우 좋은 행사인 것 같으니 불교 교단에서도 그와 같은 것을 시행해 봄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붓다가 그 제안을 그 자리에서 받아들인 결과, 불교 교단에서도 포살 행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그 기원은 훨씬 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 것 같다.


포살은 ꡐ우파바사타(upavasatha)ꡑ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본래 소마(soma ; 신에게 바치는 술)의 제사가 있는 전날에 행해지는 단식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마 인도 게르만 어족은 훨씬 예전부터 그런 행사를 가져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이 반 달에 두 번이라 함은 달(masa)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반 달(pakkha)을 단위로1일, 8일, 15일, 23일처럼 대체로1주일에 한 번 꼴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도 특유의 주일제여서, 외도가 그것을 이용하여 행사를 해 오던 것을 붓다도 빈비사라 왕의 제안으로 채택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게 하여 포살의 집회가 결정되었으나, 처음에는 단순한 집회에 그쳤다. 그러나 이윽고 그 집회에 참가했던 신도들로부터 새로운 제안이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법을 들을 수 있을까 하여 모인 것인데,비구들이 모두 ꡐ벙어리 산돼지ꡑ처럼 침묵하고 있다니 말이 되는가. 부디 모인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해 달라, 이런 요청이었다.


그것도 그렇겠다고 하여 포살일이면 대중을 위해 설법이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붓다 자신의 발기에 의해 계본(patimokkha)을 그 집회에서 외도록 결정하였다.


계본이란 계율의 항목만을 나열한 것이니, 그것을 해설하고 그 성립 과정을 서술한 것이 뒤에 이루어진 율장(律藏)이다.


말하자면 여기에 계율의 근본이 있다는 뜻에서 이것을 계본이라고 번역하게 되었거니와, 포살일에 그것을 낭송케 해서 반성과 참회의 기회로 삼고자 한 것은 그것에 의해 포살에 새 뜻이 부여되고 그것이 불교 특유의 것으로 승화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줄 안다.


그 양식 역시 그때 붓다의 손으로 정해진 것이어서, 그것은 대개 이렇게 진행 되었다. 반 달의 14일이나 15일, 해가 넘어가고 등불이 켜지면 비구들이 모여들고, 조금 후 장로가 일어나서 목청을 돋우어 먼저 계본의 서문을 읽어 갔다.


그 부분을 나는 첫머리에 인용해 놓았거니와, 그것은 ꡒ대중이여, 들으시라. 오늘은 15일 포살일이니ꡓ로 시작되는, 말하자면 개식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는 이제 계본을 읽겠으니 죄 있는 사람은 참회하라고 전제한 다음, 계본의 낭송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한 항목마다 세 번 되풀이되었다. 비구들은 그것을 자기 한 사람을 향해 묻는 것으로 알고 들어야 한다고 요구 받았다.


일 대 일로 묻는다면 가부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 마음으로 세 번 반복되는 계본을 들으라는 것이었다. 죄 있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참회하지 않을 때는 ꡐ고망어(故妄語)ꡑ의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도에 장애가 된다고 붓다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청정하기를 바라거든 그것을 고백하라. 고백하고 참회하면 마음의 편안을 되찾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서문의 대체적인 뜻이었다. 이 서문의 낭송이 끝나면, 계율의 하나하나의 항목을 세 번씩 했다.


그 항목의 수효는 현존하는 계본에 따르면 대략 250(부파에 따라 다름)개 정도가 되거니와, 붓다 재세시에는 더 적었을 것이고, 더구나 포살의 제도가 정해지던 당시에는 훨씬 적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계율은 처음부터 한꺼번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 무슨 사고가 있을 때마다 하나씩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요 부분, 이를테면 불사음(不邪淫), 불투도(不偸盜), 불망어(不妄語)같은 조목은 일찍부터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이를테면ꡒ어느 비구라도, 만약 마을이나 숲에서 주지 않은 걸 취했다면.... 그는 바라이(波羅夷 ; 승려로서 자격을 잃고 교단에서 추방되는 무거운 죄.)에 해당하니 함께 있지 못하리라.ꡓ하는 식으로 낭독했다.


그리고 몇 조목이 끝날 때마다 ꡒ이제 나는 여러 대덕들에게 묻노라. 이 점에 대해 청정한가? 다시 묻노라. 이 점에 대해 청정한가? 세 번째 묻노라. 이 점에 대해 청정한가?ꡓ라고 대답을 재촉했다.


이런 물음에 대해 모든 사람이 잠자코 있으면,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ꡒ이제 여러 대덕은 이 점에 대해 청정하시오. 그러기에 침묵하신다고, 나는 그렇게 알겠소.ꡓ 이런 식으로 낭독과 재촉이 자꾸 반복되는 중에 포살의 행사는 끝나곤 했다.


그 무렵쯤에는 밤도 깊어져서 천지의 적막이 그들의 주변을 감쌌다. 그것은 참으로 엄숙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으리라. 또 하나의 행사인 자자(自恣, pavarana)는 우안거(雨安居)의 마지막 포살일(15일)에 행해지는 더 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집회였다.


자자란 자진해서 자기의 죄를 지적해 달라고 동료 비구들에게 청하는 일이니,현장(玄獎622~664 ; 중국의 승려. 인도에 건너가 많은 경전을 가지고 와서 번역한 사람. 그의 여행기인 <대당 서역기>는 유명하다.)은 이것을 ꡐ수의(隨意)ꡑ라고 번역했다.


이것도 포살일의 행사라고 하여 ꡐ포살자자ꡑ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것 역시 붓다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며,그 인연은 [율장]의 대품4 ꡐ자자건도ꡑ에 의하면 이러했다고 한다.


그것은 붓다가 제타의 정사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마침 여름장마철이 되었으므로, 코사라의 어느 고장에서 많은 비구들이 함께 안거에 들어갔다.


안거(vassa)란 본디 ꡐ비ꡑ 또는 ꡐ장마철ꡑ의 뜻이니, 여름 장마철 석 달 동안은 비구들도 도저히 활동할 수 없으므로 정사나 동굴 같은 데서 외출하지 않은 채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을 이렇게 불렀다.


그것은 비가 많은 인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이거니와, 이제 코사라의 어느 고장에서 안거에 들어간 비구들은 그 석 달을 화목하고 분쟁이 없이 지내기 위하여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생활하기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경은 그것을ꡒ우리는 담화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으리라.ꡓ고 기록하고 있다. 문답을 하든지 남을 탓하든지 하는 것은 분쟁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무사히 우안거를 마친 비구들은 비가 개자 기원 정사로 붓다를 뵈러 왔다.


그런데 붓다는 그들로부터 그 동안의 생활에 대해 보고를 듣고 나서, 무엇인지 부자연스러운 것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의외도 중에는 ꡐ아계(啞戒)ꡑ라고 하여 무언의 행(行)을 닦는 것도 있었지만, 인간이 언어를 전혀 안 쓰면서 공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짐승이 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인간은 도리어 그 생각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서 붓다는 우안거를 맺음하는 행사로서 이 자자의 의식을 정했다고 한다. 그 의식은 대체로 이렇게 진행되었다.


그 날은 마침7월14일이나 15일에 해당하므로 해가 넘어가면 곧 보름달이 떴다. 그때는 나이든 비구나 새로 입교한 비구나, 모두 마당에 내려가서 쭈그리고 빙 둘러 앉았다. 그러면 한 비구가 일어나 개식 선언을 하였다.


ꡒ대중이여, 들으시라. 오늘은 자자가 있는 날, 만약 대중에게 이의가 없다면 교단은 자자를 베풀려 하오.ꡓ 이리하여 의식이 시작되면, 먼저 장로부터 시작하여 교대로 모든 비구가 다 합장한 손을 높이 쳐들면서 동료 비구들을 향해 간청하는 것이다.


내가 지난 안거에서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만약 여러분중에서 그런 일을 보았거나 들었거나 또는 의심을 품은 분이 계신다면,부디 나를 위해 그것을 말해 달라. 경전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ꡒ나는 교만에 대해 자자를 행하노니, 나에 대해 무엇을 보고 무엇인가 듣고 또는 나에게 의심을 지니신 분이 있다면, 대덕들이여, 나를 가엾이 여기어 그를 말씀해 주소서. 죄를 알면 그를 제거하오리다.ꡓ


그것을 비구마다 세 번 반복하여 장로부터 신입 부구까지 마쳤을 때, 자자의 의식이 끝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의식이 였지만, 매우 아리따운 광경이었던 것 같다.


한 경([상응부 경전] 8:7자자. 한역 동본, [아함경] 45:15, 자자)은 어느 해의 자자의 정경을 이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붓다가 사바티의 동쪽 교외인 미가라미타(鹿子母)의 정사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 해의7월15일, 안거가 끝나는 날 행해진 자자는 참으로 성대하고도 감동에 넘치는 것이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자,마당에 둘러 앉은 비구의 수효는 대략 오백 명은 되어 보였다.


그 중에는 붓다도 끼어 있었고, 또 수제자인 사리푸타의 모습도 보였다. 붓다도 교단의 일원이므로 자진해서 자자를 행하여야 했다.


아니 자자의 규칙에 의하면 윗사람부터 하게 되어 있으니까. 제일 먼저 자자를 해야 되는 이가 붓다 자신이었다.


ꡒ대덕들이여, 나는 이제 자자를 행하노니, 대덕들은 내 행위와 내 언어에서 무엇인가 비난할 만한 것을 보고 듣고 또는 미심쩍은 생각을 지니지 않았던가?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나를 가엾이 여겨 부디 지적해 주오.ꡓ


붓다가 합장한 손을 높이 쳐들고 비구들 앞에서 자자의 말씀을 외자,엄숙한 침묵이 장내를 뒤덮었다. 침묵은 그 청정을 긍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침묵만으로 대하기에는 너무나 감격이 벅찼던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오른 어깨에 걸치고 붓다 앞에 고개 숙여 엎드린 비구가 있었다. 그는 사리푸타였다.


ꡒ아니오니다, 세존이시여. 누구도 세존의 행위와 언어에서 비난할 점을 발견한 이는 없나이다.ꡓ


다음은 사리푸타의 차례였다. 그도 또한 합장한 손을 높이 쳐들면서 감동에 떨리는 목소리로 자자의 발언을 했다. 다시 한 번 엄숙한 침묵이 그의 청정을 증명해 주었다.


그때 이번에는 붓다가 일어나서 그의 언행에 찬사를 보냈다. 이렇게 하여 오백 명이나 되는 비구들이 차례차례 자자를 행했으나, 그 날 밤 누구 한 사람 비난의 말을 들어야 했던 사람은 없었다.


그때 반기사(婆耆沙)라는 비구가 감동에 찬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붓다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재가 시절 시 짓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였던 사람이거니와, 오늘 저녁도 자자의 정경을 목격하고 갑자기 시상이 가슴속에 떠오름을 억제하기 어려웠던 것이리라. 붓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ꡒ그럼 반기사여, 그것을 여기에서 발표하려무나.ꡓ


반기사가 그 날 밤 감동에 겨워 노래했던8구의 게는 이렇게 기록되어서 지금까지 전해온다.


보름이라 달 밝은데, 신(身), 구(口), 의(意)맑히려고

오백 넘는 비구들은 여기에 모였으니

번뇌의 올가미를 모두 다 벗어 던져

윤회를 반복 않는 성자들뿐이로다.

세존의 아들이요, 법의 씨 그들이매

당찮은 말 늘어놓는 사람이란 없어라.

갈애의 그 화살을 빼어 버린 우리가

아으, 세존 우러러서 예하여 뵈옵노라.


이런 데서 우리는 붓다와 그 제자들의 일상 생활, 즉 원시 불교 교단의 생생한 모습을 보게 된다.




21. 법좌(法座)


ꡒ세존이시여, 나는 크샤트리아(무사)출신의 왕이어서, 죽여야 될 사람은 죽이고, 재산을 몰수해야 될 사람은 몰수하고, 추방해야 될 사람은 추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재판에 임했을 때, 흔히 내이야기를 방해하는 이가 있습니다. 내가 재판에 임했을 때에는 내 이야기를 방해하든지 지장을 주든지 하여서는 않된다고 경고하건만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세존의 제자들을 보옵건대, 세존께서 몇 백이라는 대중을 상대로 법을 설하실 때, 세존의 제자들은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습니다. 언젠가 세존께서 수백 명의 제자들에게 법을 설하실 때, 한 비구가 기침 소리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비구가 무릎으로 그 비구를 건드리면서 말했습니다. ꡐ고요히 해. 소릴 내지 말아. 우리 스승께서 이제 법을 설하시니.ꡑ세존이시여, 그 모양을 보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ꡐ이는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도장(刀杖)을 쓰지 않는데도 대중이 이렇게 통제될 수 있다니!ꡑ세존이시여, 나는 이런 대중을 본 적이 없습니다.ꡓ


([中部經典] 89法莊嚴經. 漢譯同本, [中阿含經] 213法莊嚴經) 중부경전 법장엄경 한역동본 중아함경 법장엄경


붓다와 그 제자들의 일상 생활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 인용한 일절은 [중부 경전] 89 ꡐ법장엄경ꡑ에 나타나 있는 코사라 국왕 파세나디의 술회의 일부분이다.


어느 날 성 밖에 나가 아름다운 교외의 풍경을 즐기고 있던 이 왕은 갑자기 붓다를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붓다는 지금 메 다룬바라는 사캬족의 마을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달려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왕은 곧 마차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그 마을에 도착한 때는 모두 문들을 닫아 건 밤중이었다. 왕이 기침을 하면서 정사의 문을 두드렸더니, 붓다가 친히 나와 서문을 열어 주었다.


왕은 엎드려 그 발 밑에 절하면서 말했다. ꡒ세존이시여, 저는 코사라의 파세나디 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파세나디 입니다.ꡓ


붓다도 물론 반가워 하면서 뜻하지 않은 이 손님을 방으로 안내 했다. 이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것은 붓다가 전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다.


그 때 붓다의 나이는 아마도 37살이나 38살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경전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파세나디는 붓다와 동갑이었다고 하니까, 젊은 두 사람의 대면은 날카로운 문답으로 시종되었을 것이 예상된다.


ꡒ고타마여, 그대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처한단 말인가?ꡓ 아닌게 아니라 왕은 사뭇 힐문하는 어조로 나왔고, 붓다는 붓다대로


ꡒ이 세상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나요.ꡓ라고 하며 맞섰다. 그러나 파세나디는 자기와 동갑인 젊은이가 그런 성자라는 것을 좀처럼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저명한 사상가의 이름들을 열거하면서, 그들도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음을 들어 ꡒ고타마여, 그대는 나이도 어리고 출가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 않은가?ꡓ라고 반박했을 때, 붓다는 불과 뱀과 왕과 성자는 나이로 말미암아 경시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백 년을 내려온 불이나 오늘 난 불이나 무엇을 태우는 위력은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도(道)와 나이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도 어느덧 40년. 붓다에게 귀의하는 왕의 심정은 해가 거듭될수록 깊어졌거니와, 그 날 밤 왕은 그러한 마음을 붓다 앞에 털어놓고 그 이유를 몇 가지 들었다.


그것들은 모두가 왕 자신이 친히 듣고 본 이야기들 이었으므로, 붓다와 그 제자들의 생활을 엿보는 데는 더 없이 귀중한 자료가 되는 줄 안다. 이를 테면 그 중의 한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것은 다른 경에도 이름이 전해 오는 두 명의 목수, 이시다타와 푸라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두 사람은 궁중의 목수였다.


ꡒ나는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었고, 그들은 내 덕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들입니다만.....ꡓ 파세나디 왕은 눈을 껌벅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ꡒ그런데도 그들이 나에게 보이는 존경은 붓다를 존경하는 데 비긴다면 멀리 못 미친단 말씀입니다.ꡓ


그것은 불평이 아니라 왕에게는 그 쪽이 더 기쁜 듯하였다. 그는 그 증거로서 이런 보기를 들었다.


ꡒ언젠가 나는 전쟁에 나갔다가, 그들을 데리고 어느 조그만 민가에서 함께 잔 일이 있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밤 늦게까지 붓다의 법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잘 때가 되자 붓다가 계신 방향을 확인한 다음에 그 쪽으로 머리를 두고 나 있는 쪽으로 발을 뻗고 잤습니다.


ꡐ이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나에게 의지해 생계를 이어 가고있는데, 나를 존경하기보다는 세존을 훨씬 더 존경하는구나. 이것은 필시 그들이 세존으로부터 더 없이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ꡑ 세존이시여,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ꡓ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한 일절도 마찬가지로, 파세나디 왕이 자기가 세존을 더욱 존경하게 된 이유의 하나로서 그 날 밤 이야기한 내용이다.


코사라의 왕권은 당시의 인도에서 가장 강대했으며, 그것과 어깨를 겨룰 만한 나라는 오직 마가다 국이 있었을 뿐이다.


그 강국의 왕인 파세나디가 직접 재판하는 마당에서도 흔히 시끄럽게 굴어서 발언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 파세나디 왕은 그런 체험을 들어 붓다의 법좌(法座)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재판하는 자리의 광경을 설법하는 자리(法座)에 비긴다는 것은 애당초 온당치 못한 점도 없지는 않으려니와, 거기에는 체험과 견문이 뒷받침되어 있기에 도리어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겠다.


왕이 보았다는 것은 어느 날 붓다가 설법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것은 아마 사바티 남쪽인 기원 정사였던지, 아니면 그 동쪽 교외에 있는 미가라마타 정사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하튼 그 날도 역시 몇 백 명의 비구들이 모여들어 붓다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고요한 그 자리에서 어느 비구가 기침을 했다. 그랬더니 다른 비구가 무릎으로 그 비구를 건드리면서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하여 모든 청중들이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오직 긴장한 속에서 붓다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파세나디 왕은 참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고백이 또한 파세나디답게 소박하다. ꡒ참으로 희유한 일이었습니다. 도장(刀杖)을 안 쓰고도 대중이 이렇게 통제된다는 것은!ꡓ ꡐ도장ꡑ이란 칼과 곤장이다. 왕은 그것으로써 신하들을 단속하고 백성들을 통치한다.


그 생사 여탈의 힘, 그것이야말로 왕의 권세일시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무력으로도 침묵시킬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더구나 마음으로부터 복종케 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에 집권자들의 고민이 있다.


그런데 붓다의 법좌의 광경은 어떤가? 거기서는 무력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건만, 이렇게도 완전히 통제되어 있지않은가. 그것은 왕의 권력보다도 더한 것이 붓다에게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나는 세존 앞에 이와 같이 최고의 존경을 바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왕이 그 체험을 통해 고백한 내용이었다.


그런 감명의 토로를 경전 안에 남기고 있는 것은 물론 파세나디 왕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앞에도 등장한 비구 시인 반기사(婆嗜沙)가 이야기한 것은 이러했다. 그것은 기원 정사, 즉 제타의 정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 붓다의 법좌에 모인 비구는1,25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날 붓다의 설법은 열반, 즉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절대적 평화의 경지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비구들이 모두 마음을 기울여 듣고 있는 정경이 그날 또한 이시인의 시심을 자극했던 모양인지, 붓다의 설법이 끝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붓다 앞에 나아가서 홍조 띤 얼굴로 말했다.


ꡒ세존이시여, 저에게 떠오른 것이 있나이다. 선서(善逝 ; 붓다의 명칭의 하나)여, 제 마음에 시상이 떠올랐나 이다.ꡓ


ꡒ반기사야, 그것을 읊어 보려무나,ꡓ


이 비구 시인은 가끔 이런 짓을 했고, 또 그것을 동료 비구들도 좋아했던 모양이다. [상응부 경전] 제8에는 ꡐ반기사장로 상응ꡑ이라고해서,그가 이런 식으로 발표했던 시편이 열 두 권이나 되는 경 속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이 때에 읊은 것은 다음과 같은 시였다.


청정할손 티끌을 멀리 떠난

두려움 없는 열반을 설하시기에

이제 여기에 천도 넘는 비구들은

정각자(正覺者)에게 예하여 뵈옵노라.

정각자가 설하심은 티 없는 진리

그를 비구들은 귀기울여 듣도소라.

숱한 비구들에게 에워싸이어

아으, 정각자는 빛도 찬란하셔라.


세존께선 참으로 용상(龍象)이시며

이 세상 살아 계신 성자이셔라.


줄줄이 내리는 빗발처럼

제자들을 고루고루 적셔 주시다.


이 스승 뵈옵고자 그 한마음에

한낮의 정좌(日住)에서 달려 나와

제자의 한 사람인 반기사는

세존의 두 발에 머리 조아리놋다.


이것은 [상응부 경전] 8 ꡐ천이상ꡑ이라는 경에 보인다


 


22. 삼보(三寶)


ꡒ너희가 무인 광야를 가게 될 때는 여러 공포가 있을 것이며, 마음은 놀라고 머리카락은 곤두서리라. 그런 때는 마땅히 여래를 염하라.


여래는 응공(應供 ; 붓다를 일컫는 이름의 하나. 마땅히 중생의 공양을 받을 만 하다는 뜻.), 등정각(等正覺 ; 평등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 역시 붓다를 일컫는 이름.), 불(佛), 세존이시라고. 이리 염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


또 법을 염하라. 부처님의 바른 법은 현재에 능히 번뇌를 떠나게 하고, 때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통달 친근(通達親近)하여 자각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이리 염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


또 승(僧)을 염하라. 세존의 제자들은 잘 수행하고, 바로 수행하고, 세간의 복전(福田 ; 복의 원인. 붓다에게 귀의한다든지 그 교단에 귀의하면 복을 받게 되므로 이르는 말.)이라고. 이리 염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ꡓ


([雜阿含經] 35:11毘舍利賈客) 잡아함경 비사리고객


여기에서는 한역만이 있을 뿐, 팔리 삼장에는 없는 경을 다루어 보겠다. 그 개략만을 소개하면 이렇다.


밧지국의 서울 베사리(毘舍利)교외에 마루가다라는 못이 있고, 그 못가에 세워진 중각 강당에 붓다가 머물고 계시던 때의 일이다. 그곳은 큰 숲과 연해 있었기 때문에, 대림중각 정사(大林重閣精舍)라는 이름으로 자주 경전에도 나타나는 고장이다.


마침 그때 베사리에서는 많은 상인들이 타카시라(Takkasila)로 떠나기 위해서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일절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좀 설명해 두지 않으면 안 될 점이 있다.


베사리가 당시의 인도에서 가장 번영하는 도시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곳이 여러 나라 무역의 중계점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상인들이 가려고 했다는 타카시라는 멀리 인도의 북서부에 있던 도시이며, 거기서부터 당시의 교통로는 동남쪽으로 뻗어, 사바티, 베사리 그리고 라자가하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이른바 ꡐ장자ꡑ라고 불리는 대상인들은 대상(隊商)을 조직하여 그 길을 왕래하면서, 국제간의 무역으로 큰 이익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타카시라로 떠나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상인들도 그런 대상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일을 알아 두면, 그들이 붓다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게 되는 그 뜻이 잘 이해될 터이다. 그런데 여행 준비를 서둘던 상인들은 마침 붓다가 마하바나(大林)정사에 계심을 알자, 곧 거기로 붓다를 찾아가서 여러 가지 설법을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붓다와 그 제자들을 초대하여 정성껏 공양했다. 여기에 인용한 일절은 그 공양이 끝나고 나서 붓다가 그들을 위해 이야기한 가르침의 일부분이다.


ꡒ너희는 이제부터 무인 광야를 가게 될 터이니까, 여러 가지 공포를 맛보아야 하리라.ꡓ


그들이 지금 가려고 하는 길은 붓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장사하는 길이요 무역하는 길이었지만, 붓다에게는 그것이 그대로 전도의 길이었다.


라자가하 - 베사리 - 사바티 사이를 붓다는 몇 번이나 오고 갔던가. 도시를 팔리 어에서는 나가라(nagara)라고 한다.


이런 도시들은 성벽으로 에워 싸이고 인구가 조밀하며 물자도 풍부하여, 경에도 ꡒ밤낮 열 가지 소리가 들려 번창을 자랑하고 있었다.ꡓ고 기록되어 있다.


열 가지 소리란 코끼리소리, 말소리, 북소리, 장구소리, 비파 소리, 노래소리, 징소리, 동라소리, 그리고 떠들썩한 사람 소리라고 한다.


물론 현대의 대도시와 견주어 그 규모를 상상해서는 안 되겠지만, 고대 유럽의 아테네나 로마와 함께 인류 사회에 나타난 가장 초기에 속하는 도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그것들을 ꡐ인도적 폴리스ꡑ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인류 문화사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어야 할 현상의 하나라고 믿는 바이다.


그러나 그런 도시 생활은 인도 전역이 그만큼 개척되고 문명화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도시에서 한 걸음만 밖으로 나가면 인적도 없는 광야와 삼림이 깔려 있었다.


아니 더 상세히 설명한다면, 성문 바로 밖에는 니가마(시장)가 있어서 상품은 거기까지 운반되는 것이 고작 이었다.


이를테면 사바티 성 밖에는 생선을 파는 니가마가 있었고, 바라나시 성문 밖 십자로에서는 사슴 고기를 팔고 있었으며, 대개의 도시에서는 야채 장사들도 성문 밖에 점포를 벌이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이런 니가마에서 더 가면 여기저기 ꡐ마마ꡑ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어서 주위의 땅을 경작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또 적당한 정사도 그런 데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곳은 드넓은 지역에서 볼 때 아주 일부분에 그쳤고, 성 밖은 대개 태고로부터 사람의 손이 간 적이 없는 대자연 그대로의 상태였다. 그런 속을 지나 먼 지역으로 뻗은 통행로가 갖가지 공포와 위험을 수반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상(隊商)을 조직하고 충분한 경비 수단을 강구하지 않고는 결코 그런 길을 갈 수가 없었다. 붓다도 제자들과 함께 자주 여행을 해 보았으므로 그런 사정을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상인들을 상대로 그런 위험에 대처할 가르침을 설하였던 것이다.


ꡒ만약 그런 때에는 마땅히 여래를 마음속에서 염하라. 여래는 응공, 등정각, 불, 세존이시라고. 그렇게 염하면 너희의 공포가 사라지리라.


또 너희는 마땅히 붓다의 가르침을 염하라. 여래가 설하신 가르침은 현재에서 당장 효능이 있는 것,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 능히 안온하게 만들어 주는 것, 지혜 있는 사람이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만약 그렇게 염한다면 너희의 공포는 곧 사라지리라. 또 너희는 교단(僧伽)을 염하라. 여래의 교단은 잘 수도하는 사람들의 집단, 바르게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 그리고 이 세상에서 최상의 복전이라고. 만약 그렇게 염한다면 너희의 공포는 곧 사라지리라.ꡓ


그 때 붓다가 설한 말씀을 한역에 의거하여 더 쉬운 말로 옮겨 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그것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석천(帝釋天)의 설화를 말씀했다고 되어 있다.


그것은 아주 먼 옛날이거니와, 신들과 아수라(阿修羅)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근대 인드라(제석천)는 신들에게 이런 훈시를 주었다.


ꡒ너희는 싸움에 임하여 만약 공포로 머리가 쭈뼛할 때는 모두 내 깃발을 쳐다 보아라. 그렇게 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


그러나 만일에 내 깃발을 쳐다볼 수 없을 때에는 파자파디천(波자波提天)의 깃발을 쳐다보아라. 만약에 또 파자파디천의 깃발을 볼 수 없을 때에는 바루나천(婆樓那天)의 깃발을 쳐다보아라.


다시 그것도 볼 수 없을 때에는 이사나천(伊舍那天)의 깃발을 쳐다보아라. 그렇게 하면 너희는 그 공포를 떨쳐 버릴 수 있으리라.ꡓ


이것은 물론 바라문에 전하는 옛날 신화를 인용한 것이려니와, 그것으로 붓다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삼보 귀의의 정신이었다고 생각된다.


불, 법, 승의 삼보에 대해 귀의의 뜻을 표명하는 일, 즉 삼보 귀의 또는 삼귀의(tini saranagmanani)가 불교 교단의 의식으로서 채택된 것은 붓다가 설법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율장] 대품(大品)1 ꡐ대건도(大腱度)ꡑ는 출가한 비구나 재가 신자의 수계(受戒), 즉 불교 교단의 일원이 될 때의 의식에 관한 것을 기록한 문헌이다. 거기에 따르면 처음으로 붓다 앞에서 삼귀의의 고백을 한 것은 바라나시의 장자였다고 한다.


그것은 붓다가 그 도시의 교외에 있는 이시파다나 미가다야(鹿野苑)에서 첫 설법에 성공함으로써 다섯 비구를 제자로 삼은 직후의 일이었다.


그때 그 고장 장자의 아들인 야사(耶舍)라는 젊은이가 찾아와서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제자가 외었는바, 아들의 가출에 놀란 장자가 허둥지둥 달려와서 붓다를 만나본 결과, 그도 또한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 그 장자가 붓다 앞에서 표명한 말을 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ꡒ저는 이에 세존과 그 가르침과 그 비구중(衆)에 귀의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를 우바새(재가 신자)로서 받아 주시옵소서. 오늘부터 시작하여 이 목숨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나이다.ꡓ


이것이 처음으로 삼귀의를 표명한 우바새였다는 것이 이 경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런 고백이 수계(受戒), 즉 교단의 일원이 되는 주요한 의식으로 채택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때 붓다의 제자는 60명에 달했으므로,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ꡒ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ꡓ 그들을 각처에 보내 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도록 했다.


이것을 나는 ꡐ붓다의 전도 선언ꡑ이라고 부르거니와, 그리하여 파견된 비구들은 귀의하여 출가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겼을 경우,그들을 붓다 앞에 데리고 와서 그 허가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먼 고장에서 그 일 때문에 일일이 찾아와야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붓다는 심사 숙고한 끝에 비구들에게도 수계, 즉 출가를 허가하는 권한을 주었다.


ꡒ비구들이여, 나는 허락하노니, 너희는 각자 먼 고장에 있어서, 출가시키고 구족계(upasampada ; 불교 교단에 들어오는 허가)를 주라. 비구들이여,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주는 데는 이렇게 함이 좋도다.


먼저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윗옷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비구의 발 밑에 절한 다음 꿇어앉아서 합장하고 이렇게 말하게 하라. ꡐ불(佛)에 귀의하나이다.


법(法)에 귀의하나이다. 또다시 승에 귀의하나이다.ꡑ다시 불에 귀의하나이다. 다시 법에 귀의하나이다. 다시 승에 귀의하나이다. 또다시 불에 귀의하나이다. 또다시 법에 귀의하나이다. 또다시 승에 귀의하나이다.ꡑ


비구들이여, 이렇게 삼귀의를 세 번 부르는 것으로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줄 것을 허락하노라.ꡓ


불(佛)이니 세존(世尊)이니 여래(如來)니 하는 것은 교조인 붓다를 가리키는 말이다. 법(法)이란 물론 붓다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승(僧)이라 함은 승가(僧伽)즉 불교 교단을 뜻하며, 그 원어는 samgha이다.


이 불, 법, 승은 불교의 세 기둥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세 보배 즉 삼보라고 한다. 이것들에 귀의(sarana)한다는 것은 삼보를 오직 의지한다는 뜻이다. 아마도 불교에서 가장 종교적인 특색이 발휘된 것은 이 삼귀의에 있다고 해도 좋으리라고 믿는다.


전 세기 전방부터 점차 불교, 특히 원시 불교의 진상을 이해하기에 이른 유럽의 학자들은 자주 불교의 종교성에 대해 왈가 왈부하며 논쟁을 벌여 왔다.


기독교의 전통 속에서 살아 온 그들로서는 불교가 어째서 종교일 수 있는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으리라. 그들의 선입견에 의하면 종교란 신과 인간의 관계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그들 알에 나타난 불교는 아무래도 그런 기준에 맞지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신(神)이니 구제자니 하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어떻게 종교일 수 있는가? 그들이 당황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떤 학자는 ꡒ불교는 종교를 무시한다.ꡓ고 했고, 또 어떤 학자는 ꡒ불교는 기도 없는 도덕 체계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종교가 되었다.ꡓ고 말했다.


이런 그들의 단정은 이제 와서 돌이켜 볼 때 매우 재미있는 점이 없지 않다고 하겠다. 불교가 종교를 무시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처음에는 도덕 체계이던 것이 차츰 종교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런 생각은 결국 그들의 좁은 종교관의 틀 속에 어떻게 하든 불교까지도 욱여 넣으려고 한 데서 비롯된 견강 부회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기독교밖에는 알지 못하던 유럽의 학자들에게도 여러 종교에 관한 지식이 급속히 퍼졌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그들의 좁은 종교관으로는 도저히 처리되지 않는 종교도 적지않았다.


이제 검토되어야 할 것은 오히려 그들이 지니고 있던 종교관,그것이었다. 그러면 대체 종교란 무엇인가? 그들은 다시 한번 이 물음 앞에 서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시 미개 종교로부터 기독교와 불교에 이르는 모든 종교를 앞에 놓고, 거기에 공통되는 본질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찾아보았다. 그 결과 그들이 마지막에 가서 부딪친 것은 ꡐ성스러운 것ꡑ이라는 개념이었다.


즉 신의 유무가 종교의 성립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것이 추구될 때 종교가 성립한다는 의견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불교도 또한 훌륭히 종교 속에 넣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제데르블롬이 그의 저서 [신앙의 생성]에서 삼보를 가리키며 ꡒ붓다가 인생의 황야 속에서 존재의 불행과 고뇌로부터 멀리 떠난 오아시스를 발견한 일, 거기에 성스러운 것이 풍성한 내용을 지니고 속된 것과 대치되어 있는 것이다.ꡓ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그 보기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유럽의 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이 중대한 관심사일 수는 없는 문제이다. 그들이 불교를 종교의 범주 안에 넣든 넣지 않든, 불교는 몇 천 년에 걸쳐 종교 노릇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또 오늘의 우리에게도 훌륭한 종교임에 틀림없을 터이다. 그리고 불교인의 가장 엄숙한 종교적 심정은 붓다 재세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저 붓다와 그 가르침과 교단에 대해 진심에서 삼귀의를 부를 때처럼 잘 나타나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볼 때, 불교의 가장 종교적인 일면은 이 삼귀의에 있다고 해도 좋을 줄로 안다.




23. 이타행(利他行)


ꡒ고타마여, 우리는 바라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도 신에게 희생을 바치고 또 다른 사람들도 희생을 바치게 합니다.


고타마여,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다 함께 행복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타마여, 당신의 제자들은 가정을 나와 사문이 됨으로써 자기의 일신을 편안히 하고, 자기 일신의 괴로움을 없애려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오직 자기 한 몸의 행복만을 위해 도를 닦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출가의 소행이라 생각되는데, 그대는 어찌 여기십니까?ꡓ


([增支部經典] 3:60傷가邏. 漢譯同本, [中阿含經] 143傷가邏經) 증지부경전 상 라 한역동본 중아함경 상라경


그 또한 붓다가 기원 정사에 계셨을 때의 일이다. 상가라바라는 바라문이 찾아와서 질문을 했다.


바라문이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오랜 전통을 이어 오는 사제(司祭)들이므로, 새 사상가인 붓다와 그 제자들에 대해서 얼마쯤 적대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이 바라문이 붓다에게 내놓은 질문에도 힐난하는 듯한 어조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신 앞에 제사를 지내고 희생을 드림으로써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복이 될 수 있는 길을 닦는다.


그런데 붓다의 제자들이 출가하여 벌이는 행위를 보건대, 결국은 자기를 통제하고, 자기를 편안케 하고, 자기의 고통을 없애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것 같다.


그것은 결국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하는 길이 아닌가. 이것이 앞에 인용한 바라문의 질문 요지이다. 이렇게 말한 바라문의 마음속에는 많은 사람을 위한 행복의 길이 한 사람을 위하는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박혀 있다.


말하자면 붓다와 그 제자들의 종교를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고 규정해 버림으로써, 그런 태도를 비난하려는 뜻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바라문의 힐난하는 듯한 질문에 매우 큰 흥미를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붓다와 그 제자들의 수행 태도에 대한 이런 의문은 여기에서 낡은 맞수인 이 바라문에 의해 제기된 데 그치지 않고, 마침내는 불교 내부에서도 큰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논쟁이란 대승(Mahayana)이라고 자처하며 새로운 주장을 내세운 사람들과, 그들에 의해 소승(Hlnayana)이라고 비난 받으며 전통의 고수를 주장한 사람들 사이에 장기에 걸쳐서 행해진 이른바 ꡐ대승과 소승의 논쟁ꡑ이다.


그것은 후일에 이루어진 경전의 표현을 빌리자면 ꡐ상구 보리(上求菩提)ꡑ 즉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ꡐ하화 중생(下化衆生)ꡑ 곧 중생을 제도하는 것 중에서 전자를 자리(自利), 후자를 이타(利他)라 하여, 소승은자 리에만 급급하고 후자의 대의를 망각한 무리라고 비난한데서 비롯된 논쟁이었다.


이런 논쟁은 장기간에 걸쳐서 반복되었고, 중국을 통해 과거에 우리가 받아들였던 것은 다름 아닌 대승파의 불교 였기에, 소승이라고 하면 매우 저급한 가르침인 것처럼 착각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간에 지금 비슷한 내용의 질문이 바라문에 의해 붓다 앞에 제시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붓다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였던가? ꡒ바라문이여, 그러면 그것에 대해 나는 그대에게 물어 보고 싶다.


생각대로 대답하라.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것을 어찌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 여래가 나타나서 이와 같이 설한다고 하자.


ꡐ이것이 도이다. 이것이 실천이다. 나는 이 길을 가고 이 실천을 완성함으로써 번뇌가 소멸되고 해탈을 얻을 수 있었다.


너희도 이리와서 함께 이 길을 가고 이것을 실천함으로써 번뇌를 없애고 해탈을 얻도록 하라.ꡑ이와 같이 여래가 법을 설한 결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수행하여 해탈을 얻은 이가 수백, 수천, 수만에 이르렀다. 하면, 바라문이여,그대는 이것을 어떻다고 하겠는가?


이래도 여전히 출가하는 것은 한 사람을 위한 행복의 길이겠는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을 위한 행복의 길이겠는가?ꡓ


이렇게 질문 받고 보니, 마침내 바라문도 ꡒ고타마여, 그렇다면 출가의 행위도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ꡓ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옆에서 그 바라문에게 말을 건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붓다의 비서 격인 아난다(阿難)였다.


그는 바라문이 붓다의 반문을 받고 대번에 출가자의 태도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길임을 인정하고 만 것을 보고, 좀 우쭐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이렇게 바라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ꡒ바라문이여, 그러면 이 두 가지 길에서 당신은 어느 것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가?ꡓ


그 두 가지 길이란 물론 바라문들이 행하는 제사를 주로 하는 신앙과 붓다가 설한 출가 수행의 길이겠지만, 아난다로서는 이 기회에 그 바라문으로 하여금 불교의 우월성을 인정케 하려고 한 것이겠다.


그러나 바라문의 입장이 되고 보면, 그런 고백은 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는 다만 ꡒ고타마와 아난다 같은 이는 참으로 내가 존경하는 바요, 찬탄하는바요.ꡓ라고 말함으로써, 아난다의 추궁에서 몸을 사리려 들었다.


아난다는 거듭 ꡒ바라문이여, 나는 그대가 누구를 존경하고 누구를 찬탄하고 있는가 물은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두 길 중에서 그대가 어느 것을 우월하다고 생각하는지 그것을 물은 것이다.ꡓ라고 추궁했으나, 바라문은 여전히 그것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런 응대가 두 사람 사이에 세 번이나 되풀이되는 것을 보고, 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ꡒ바라문이여, 오늘 왕궁에서 회합이 있은 듯하거니와 무엇이 이야기 되었는가?ꡓ 화제가 바뀌어서 한숨을 돌린 바라문은 살아났다는 듯이 명랑한 태도로 대답했다.


ꡒ고타마여, 오늘의 회합에서는 신통의 문제가 화제에 올랐습니다. 옛날에는 사문은 적었어도 뛰어난 신통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문의 수효가 엄청나게 많으면서도 신통력을 가진 사람이 적다는 이야기였습니다.ꡓ


이리하여 좌석의 분위기가 약간 풀리자, 붓다는 그 신통력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통력이라는 말은 기적의 뜻이어서, 여느 사람으로서는 생각조차 못할 엄청난 능력을 발휘함을 이름이거니와, 그것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붓다는 말문을 열었다.


그 첫째는 신통 신변(神通神變), 둘째는 기설(記設)신변, 셋째는 교계(敎誡)신변. 그리고 붓다는 그 하나하나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것을 요약해 보면 이렇다.


먼저 신통 신변이란 문자 그대로 기적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공중을 간다든지, 물 위를 걷는다든지, 허공에 앉는다든지 하는 기술을 말한다. 그것들은 결국 ꡒ환상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ꡓ는 것이 설명을 듣고 난 바라문의 소감이었다.


다음으로 기설 신변이라 함은 예언을 이름이다. 이를테면 점을 쳐서 미래를 예언한다든지, 신의 계시에 따라 닥쳐 올 일을 말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런 일들도 역시 환상 같은 것이어서 그 당사자에게만 통할 뿐이라는 것이 바라문의 감상이었다.


마지막의 교계 신변이란 경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ꡒ너희는 이렇게 탐구하라. 이렇게는 탐구하지 말아라. 이렇게 사색하라. 이렇게는 사색하지 말아라. 이것을 끊어라. 그리고 이것을 체득하라.ꡓ는 식으로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은 구태여 신통이니 신변이니 할 필요도 없겠고, 붓다가 평소에 그 제자나 신자를 상대로 살아 온 생활이야말로 바로 그것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붓다는 그것을 이제 신변, 신통이라고 일컬어, 기적, 예언과 어느 쪽이 나은지를 바라문으로 하여금 판단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 바라문은 ꡒ아 고타마여, 나는 마지막 신변을 가장 위대하다고 봅니다.


세 가지 신통력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묘하고 희유한 것은 그것입니다.ꡓ라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그는 그 자리에서 삼귀의를 부르고 붓다에게 귀의했다는 것이 이 경의 결말이다.


지금까지 다루어 온 경들에 비길 때 이 경은 꽤 길어서 여기서는 다만 그 뼈대만을 소개한 데 지나지 않지만, 그 요점을 말하자면 대략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첫째 부분은 그 바라문의 힐난하는 듯한 질문과 그것에 대한 붓다의 대답이다. 둘째 부분은 아난다와 바라문 사이에 벌어진 문답이며, 셋째 부분은 붓다가 세 가지 신통력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그 바라문을 귀의 시킨 대목이다.


그리고 그 전체를 일관하는 주제는 결국 붓다의 가르침이 한 사람을 위하는 길인가, 아니면 여러 사람을 위하는 길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문제를 둘러싸고 후대에 불교 내부에서 이른바 ꡐ대승과 소승의 논쟁ꡑ이 벌어진 바 있다.


대승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마치 이 바라문처럼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에 전념하는 비구들의 태도를 자기만을 위하는 길이라 하여 비난하고, 이타행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물론 그들이라 해도 붓다 당신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지는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비위에 맞도록 경전을 숱하게 만들어 가는 동시에, 아라한트(arahant, pali ; arhat, SKt.)즉 아라한(阿羅漢)과 성문(聲聞 ; savaka), 연각(緣覺 ; pacceka - buddha)을 공격했던 것이다.


아라한이란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깨달은 성자이며, 성문이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하는 사람, 연각이란 붓다의 가르침에 의함이 없이 스스로 깨닫는 사람을 가리키는바, 그들은 자기의 해탈에만 전념할 뿐 다른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 대승 쪽의 주장이었다.


그러면 붓다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그것을 놓고 생각할 때 마땅히 상기해야 할 일은 저 보리수 밑에서 붓다가 설법을 결의하게 된 경위와, 아울러 미가다야에서 최초의 설법에 성공한 붓다가 마침내 제자들을 향해


ꡒ비구들이여,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ꡓ라고 말한 이른바 ꡐ전도 선언ꡑ이겠다.


그 전자에 대해서는 이미 제3장에서 그 미묘한 경위를 상세하게 서술해 놓았거니와, 그것은 결국 상구 보리의 길이 하화 중생의 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보리수 밑에서 정각을 성취하기까지의 붓다는 명백히 자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심신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단 문제의 해결에 성공하자, 붓다는 뜻하지 않았던 불안을 맛보아야 했다.


오직 자기 혼자 그 진리를 지니고 있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까닭이다.


이리하여 붓다는 마음의 한구석에서 ꡒ고생 끝에 가까스로 깨달은 것을 어째서 다른 사람들에게 설해야 하는가?ꡓ라고 중얼거리면서도 결국은 ꡒ나는 이제 감로(甘露)의 문을 여노라.ꡓ라고 선언하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겨우 설법할 결심을 하게 된 붓다는 마침내 전도를 위해서 제자들을 떠나 보내게 되자, 명확히 그 목표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에 두었고, 또 스스로도 45년에 걸친 긴 생애를 그것을 위해 바쳤던 것이다.


그 덕택으로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진리에 눈뜨고 바르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며, 그 여택은 멀리 오늘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그 바라문을 설득하여 그 길이 많은 사람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고 납득시킨 것도 그렇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거슬러 올라가, 어째서 그 바라문은 붓다의 길이 한 사람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느냐고 한다면, 거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음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붓다의 가르침에서는 자기의 개안, 자기의 해결, 자기의 확립이 항상 앞서는 까닭이다.


후세 대승파의 말을 빌리자면 상구 보리가 선행하는 것이다. 앞에 나온 ꡐ전도선언ꡑ에다가 덧붙인다면ꡒ비구들이여, 나는 인천(人天)세계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너희도 또한 인천 세계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전도하기 위해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ꡓ라는 논리가 되겠다.


즉 자기 자신이 선결 문제인 것이다. 자기가 자유를 얻지 못한 주제에 어떻게 남을 자유롭게 하여 줄 수 있으랴.


만약 진리에 눈뜨지도 못한 사람이 남의 손을 잡아 길을 인도하려고 든다면 둘이 다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것이 붓다의 논리였다.




24. 불해(不害)


사람의 생각은 어디로나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 그러기에 자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해서는 않된다.


([相應部經典] 3:8末利) 상응부경전 말리


ꡐ말리ꡑ라는 경의 제목부터 설명해 두고자 한다.


그것은 중국에서 번역 할 때 ꡐ마리카(Mallika)ꡑ라는 팔리 어의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어쩌면 일본에서 ꡐ말리(茉莉)ꡑ 또는 ꡐ말리화(茉莉花)ꡑ라고 일컫는 관상용의 작은 관목이 그것에 해당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혼자서 추측하고 있다.


이제 옆에 있는 사전을 펼쳐 보니, 말리화는 인도가 원산인 목서과의 상록수 관목이며, 잎은 타원형이고 여름 저녁에 백색 분형(盆形)의 향기 높은 다섯 개의 꽃이 핀다고 되어 있다.


어 쨌거나 여기서 ꡐ말리ꡑ라고 한 것은 코사라 국 파세나디 왕의 왕비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그 왕비가 이렇게 불린 까닭은, 그녀가 날마다 그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썼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한역에서는 승만이라고 하며, 일찍부터 열렬한 신자가 되었던 사람이어서 경전에도 자주 그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이 경의 서술은 사바티 왕궁의 높은 다락에 오른 파세나디 왕과 그 옆에 자리한 마리카 왕비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그 다락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장관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북쪽으로부터 동북쪽에 걸쳐 있는 눈에 뒤덮인 히말라야의 수많은 봉우리들이 아득한 원경으로 보였을 것이다. 또 서쪽으로부터 남쪽에 걸쳐서는 코사라의 평원이 끝없이 발 밑에 펼쳐졌으리라.


그런 대자연 앞에 서게 될 때, 사람이란 번거로운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서 무엇인가 엉뚱한 생각을 하기 쉬운 법이거니와, 그 날의 왕과 왕비의 대화에도 분명히 그런 점이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잠시 조망을 즐기고 있던 왕이 갑자기 생각한 것은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자기에게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경전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자세한 경위에 대해 별로 말하고 있지않으나, 왕의 생각은 대개 이런 경로를 더듬지 않았나 추측된다. 저 히말라야의 연봉은 참으로 장관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가령 너는 히말라야를 바라보면서 하루를 살겠느냐, 아니면 히말라야가 없는 곳에서 백 년을 살겠느냐고 할 때 어느 누가 전자를 택하겠는가. 아니 한 끼의 밥과도 안 바꾸려고 할지도 모른다.


또 눈앞에 펼쳐지는 이 코사라의 평원! 그것은 얼른 보기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자기가 이 나라의 왕이기 때문인지도 알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자기야말로 히말라야나 코사라 평원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러나 나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권세와 영화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그러기에 ꡐ나ꡑ라는 존재가 나에게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저 땀을 흘리며 일하는 농부나 상인들은 어떨까? 그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여야 한다. 그들은 자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을까? 자기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을까?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도 역시 자기를 더 없이 소중하게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런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느냐고 할 때, 역시 무엇보다도 자기의 몸이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왕은 마침내 옆에 있는 왕비를 바라보았다.


ꡒ중전, 그대에게는 자기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것, 더 사랑스러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오?ꡓ


뜻하지 않은 질문에 좀 놀랐지만, 마리카는 잠시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ꡒ대왕이시여, 저에게는 저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는 듯 생각됩니다. 대왕이시여, 대왕께서는 어떠십니까?ꡓ


ꡒ나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묻는 말이오.ꡓ


왕도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하여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 두 사람은 완전히 동의하였다.


이런 그들의 결론은 정당하다고 보아야 되겠다. 저 고대에 왕과 왕비의 대화가 이런 결론을 이끌어 냈다는 것은 매우 있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여야 될는지도 모른다.


이 결론은 현대의 우리에게까지 호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에고(ego ; 자아)의 진상이 있으며, 이 에고이즘(egoism ; 자아 중심)을 무시한 사상이란 결국 인간 관계의 원리로서는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왕과 왕비는 그들의 결론에 대해 약간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붓다가 평소에 그들에게 가르친 것과 차이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세나디 왕은 급히 마차를 달려 기원 정사로 붓다를 찾아갔다. 무엇인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붓다에게 묻는 것이 이 왕의 버릇이었다.


급히 달려온 왕이 이야기하는 것을 흥미 있게 듣고 난 붓다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들이 도달한 결론을 그대로 긍정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설해준 게가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한 일절의 운문이다.


그 내용은 그들의 결론을 일단 인정하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함을 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거니와, 구태여 해설을 붙이자면 대개 이런 뜻이 될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란 참으로 자유 자재한 것이어서 어디라도 달려갈 수가 있다. 여기 앉은 채 멀리 유럽이나 미국으로 날아갈 수도 있겠고, 달이니 금성이니 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백만 장자가 되기를 꿈꾸고, 제왕의 영화를 부러워하는 것도 다 생각의 작용이다. 그러나 생각이 어디로 달리든 간에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이란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가 이리저리 생각을 달리어 많은 재물과 제왕 같은 권력을 꿈꾸는 것도 결국은 자기라는 존재가 더 없이 소중한 까닭이다.


자기가 소중한 까닭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고, 더 큰 권력과 명예를 획득함으로써 자기를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그 왕이나 왕비보다도 더 명확하게 그 사실을 긍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생각해야 된다는 것을 그 게의 후반에서 설명하였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


어쩌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리라. 사실 누구라도 마음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매우 슬펐던 어떤 체험을 통해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의 심정을 공감해 줄 수 있다.


공감뿐이 아니라 함께 울 수도 있다. 이런 것은 다소간 누구에게나 있기에 동병 상련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제 파세나디 왕과 그 왕비가 자기처럼 소중한 것은 다시 없다고 생각한 데 대해, 붓다는 그것은 그렇다고 인정해 주고 나서 그런 생각을 남에게까지 확장 시키라고 충고했다.


이것은 사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원래 그런 능력이 있는 까닭이다. 그것을 나는 ꡐ이성의 법칙ꡑ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성(理性)이라는 말은 웬지 차가운 데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며 능히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이성의 그러한 점에 대해 혐오의 느낌조차 지니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성에 따르는 그 차가움이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이성 속에 무엇인가 우리를 떼밀어 버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우리의 일상 생활이란 애욕과 증오의 소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소용돌이를 떠나 제3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눈은 필연적으로 지성적인 맑음을 지닐 수밖에 없기에, 그 눈초리(이성)에서 받는 인상은 차가울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 생활이란 자타(自他)의 대립 속에 파묻혀 있는바, 그런 대립 속에서는 앞에서 말한 에고(自我)가 저마다 자기를 주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성은 그 대립을 떼밀어 젖히고 냉정히 자아를 바라보는 것이기에 그 눈초리는 차가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차갑다고 해서 반드시 나쁘다고는 하지 못하리라. 열에 들떠 있는 소용돌이 속에서 인류를 건지는 것이 있다면, 그건 차갑고 맑은 이성의 작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말하거니와, 불교는 어딘지 차가운 데가 있다. 붓다 그 분의 말씀을 놓고 보아도 그런 차가움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이 인생이란 결국 괴로움이다. 너희는 먼저 이 사실을 확고히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가르치는 붓다의 말씀에는 우리로 하여금 섬뜩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만약 그런 붓다의 말씀을 읽고도 아무렇지 않다면,그것은 그 사람이 글자의 표면만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또 붓다는 탐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마른 풀로 만든 횃불을 들고 바람이 불어 오는 방향으로 달리는 것과 같으며, 만약에 빨리 그 횃불을 던져 버리지 않는다면, 그 불은 그의 손과 그의 온몸을 태우고 말리라고.


적어도 진지하게 이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가슴이 섬뜩해 오지 않겠는가. 또 [법구경]의 한 게는 붓다의 가르침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ꡒ제가 악을 행하여 스스로 더러워지고, 제가 악을 떠나서 스스로 청정해진다. 저마다 스스로 청정해지고 부정해지나니, 사람은 남을 청정하게 하지는 못하리.ꡓ


인과 필연(因果必然), 응보 무정(應報無情)! 그 도리에 틀림은 없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차갑게 말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두루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도록 말을 꾸민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구원은 될 수 없는 것이겠다.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오직 전락의 길이 있을 뿐이다. 또는 가공(架空)에 취하고 환상을 뒤쫓는다면, 구제의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어떤 천국, 어떤 극락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자기만 의지하면 어떤 죄라도 소멸한다는 그런 계약을 남발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영생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붓다는 그런 환상과 오류와 비합리적인 것을 일체 부정하고 타파하였다.


그러고 나서 비정하리 만큼 냉철한 눈을 가지고 존재와 인간의 진상을 관찰하고 투시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참다운 구제의 길을 세웠다. 그런 뜻에서 보면 붓다가 간 길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 구제의 대업을 신에게 의탁하지도 않았고 기적에 맡기지도 않았다.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이성, 그것에 의해 구제의 길을 발견하고 확립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붓다가 왕에게 설한 게의 문구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붓다는 그 왕과 왕비가 말하는 에고를 그대로 인정하고 나서,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처럼 생각될지 모르나,불교를 가능케 하는 ꡐ이성의 법칙ꡑ의 하나가 그것을 통해 설명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붓다가 구사한 이성의 영위에는 주로 두 가지측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하나는 애욕과 증오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자기를 제3자의 처지에 서서 냉철하게 관찰하는 일이다. 무상, 고, 무아의 원리는 이런 작용 속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자타의 대립 속에 서 있는 자기를 떠나 그와 나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 내가 소중하듯이 그에게도 그가 소중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이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기 애(愛)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아마도 인간의 세계는 ꡒ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해 이리ꡓ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붓다는 우리의 세계가 그런 수라장이 안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저마다 이성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ꡒ그러기에 자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해서는 안된다.ꡓ


파세나디 왕에게 설해 준 게의 결구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고 보여진다. 즉 모든 사람이 서로 이해를 따라 아귀다툼하는 상태를 종식시키고, 이 세계를 진정한 평화의 고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ꡐ이성의 법칙ꡑ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아힘사(ahimsa)즉 불해(不害)의 덕목이 생겨나는 것이며, 자비의 덕목이 생겨나는 것이다. 왕에게 다른 사람을 해해서는 않된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아힘사(불해)의 덕목을 가리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아힘사는 ꡐ불해ꡑ라고 번역된다. 또는 ꡐ불살생(不殺生)ꡑ이니 ꡐ불상해(不傷害)ꡑ라고도 번역되는 수가 있다. 그 원어 역시 ꡒ해한다ꡓ 또는 ꡒ죽인다ꡓ의 뜻인 himsa에 a라는 부정사가 붙은 말이다.


그러기에 아마도 이 덕목을 어딘지 소극적인 것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전에 이 말로부터 그런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큰 오류임을 누구나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도리어 모든 덕목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불해임을 알게 될 줄 믿는다. 어째서 그런가 지금껏 누누이 말해 온 바와 같이 이 덕목은 자타의 입장을 이성에 의해 조화시킬 때 생겨난다.


내가 나에게 가장 소중하듯이 남들도 저마다 자기가 소중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 덕목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자기에게 가장 요망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을 드날리고도 싶으리라. 생활이 풍족했으면 하는 욕망도 있으리라. 또 자기와 가족의 건강도 당연히 바라리라. 그러나 그 어느 소원도 자기의 생존과는 바꾸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살고 싶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이요 가장 강렬한 소망이며, 죽고싶지 않다는 것이 인간 최대의 비원임이 분명하다. 이런 자기의 비원을 남에게까지 확장 시킨 것, 그것이 아힘사의 정신이다.


거기에서 사랑과 자비도 생겨나는 것이며, 평화와 번영도 그 위에 구축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 핵무기의 위험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도 이 이성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25. 자비(慈悲)


가르침의 도리를 잘 이해한 사람이자유의 경지에 이른 다음에 할 일은 이것이니, 유능, 솔직하고 그리고 단정할 것, 좋은 말을 하고 유화하고 거만하지 않을 것. 족한 것을 알고 과욕(寡慾)할 것, 잡스러운 일에 매이지 않고 간소하게 살아갈 것,


오근(五根;다섯 가지 감각기관.눈, 귀, 코, 혀, 피부.)이 청정하여 총명, 겸허할 것, 단월(檀越;시주. 즉 보시를 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탐심을 내지 말 것. 더러운 짓을 하여 식자의 비난을 사지 말라.


오직 이런 자비심을 닦을지니, 일체의 생명 모든 사람에게 행복과 평화와 은혜 있으라고. 비록 어떤 사람이거나 두려움에 떠는 범부거나, 깨달아서 두려움 없는 성자거나


키 큰 사람이거나, 그 몸이 비대한 사람이거나 중간쯤 되는 사람이거나, 작은 사람이거나, 말하기에도 부족한 사람이거나 눈에 보이는 사람이거나, 보이지 않는 사람이거나 멀리 있는 사람이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이거나


이미 태어난 사람이거나, 앞으로 태어날 사람이거나 일체의 생명 모든 사람에게 행복 있으라고. 서로 남을 속이지 말며 어디의 누구에게라도 경멸하는 생각을 지니지 말라.


분하다든지 또는 미웁다 하여 남이 고통에 빠질 것을 원하지 말라. 마치 어머니가 그 외아들을 자기 목숨을 걸어 지켜 가는 것처럼 일체의 생명 또는 사람에게 끝없는 자비심을 베풀라. 참으로 일체의 세간 위에 끝없는 존재 위에 그 마음을 베풀라. 높은 데 깊은 데


또 사방에 걸쳐 원한 없는 적의 없는 그 생각을 쏟아라. 설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나 깊은 잠에 빠져 있지 않는 한 힘을 다해 이 생각을 지니라. 이에 ꡐ성스러운 경지ꡑ라 함은 이것이니라.


([小部經典] 經集1:8慈經) 소부경전 경집 자경


매우 긴 인용이지만, 이것은 소부 경전에 속하는 [스타니파타(Suttanipata)]에 수록되어있는 ꡐ자경(Metta-sutta)ꡑ의 거의 전부에 해당한다(마지막의 한 게만을 뺀 것).


옛 주석에 의하면 설산 즉 히말라야산 기슭에서 저마다 따로 떨어져서 수도하고 있는 비구들이 자주 도깨비 같은 것 때문에 고생하다는 말을 들은 붓다가 그들을 위해 설한 것이 이 경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경은 흔히 자호주(慈護呪; Metta-paritta)라고도 불린 듯하다. 호주라고 하면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킬 염려가 있기에 말해 두는 것이지만, 그것을 결코 주문이나 주술적인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되겠다.


이성의 사람인 붓다에게는 그런 점이란 전혀 없었던 것이 사실이며, 대승 경전에 나타나는 주문이라든지, 심지어는 진언종(眞言宗)의 주장 같은 것은 붓다의 뜻에서 먼 것임을 명백히 해 두어야 하겠다.


붓다는 자주 제자들이나 재가 신자들에게 게(운문)를 주어서, 그것을 되풀이하여 외게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 시킨 일이 있었다.


앞에도 나왔거니와 코사라 국의 파세나디 왕이 과식으로 말미암아 몸이 비대해지고 숨이 차서 고생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사람이란 스스로 헤아리어서

양을 알아 음식을 먹어야 하리.

그러면 괴로움도 적을 것이며

더디 늙고 수명도 보존하리라.


라는 게를 주었던 것이었다. 왕은 시중드는 아이를 시켜 끼니 때마다 그 게를 부르게 하고 차차 음식의 양을 줄여 갔기 때문에 마침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게 자체에 어떤 주술적인 신비한 힘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자꾸 그 게를 들음으로써 마음이 각성 되어 드디어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고 보아야 하리라.


또 하나 보기를 들면, 붓다가 전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거니와, 라자가하(王舍城)의 젊은이들이 다투어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그 때문에 라자가하의 주민들 사이에 불안한 공기가 떠돌아, 탁발하는 붓다의 제자들은 가끔 원성을 들어야 했다. 사문고타마가 자기들의 자식을 뺏고 남편을 뺏는다는 불평이었다. 그런 비난으로 고민하는 재자들에게 붓다는 한 게를 설해 주었다.


여래는 법으로써 사람을 인도하거니

법에 오는 것을 시기함은 그 누구뇨.


그리하여 제자들은 원망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 게를 외면서 탁발했다. 그랬더니7일 뒤에는 잠잠해졌다고 한다. 이것 역시 그 게가 그 무슨 주술적인 구실을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게가 듣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법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킨 까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독거 생활을 하고 있는 수도승들에게 이 경의 게가 자호주(慈護呪)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것도 역시 그것이 어떤 주술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유령이나 도깨비를 물리쳤다는 것은 아니리라.


도리어 그 게를 밤낮 없이 욈으로써 일체의 생명과 모든 사람에 대한 자비심으로 가슴이 가득 찬 비구들은 이미 독거에서 오는 고독감이나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고, 히말라야의 황량한 위력 같은 것도 문제로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자비심이라는 것은 그럴 정도로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ꡐ자경ꡑ의 내용을 따라 약간 그 요점에 대해 해설을 시도해 보겠다. 먼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이 경의 전체적인 구성이다.


이 경은 말할 것도 없이 자비를 주제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은 우선 자기의 수행(修行)부터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무릇 붓다의 가르침이란 철두 철미 하나의 행(行)이라고 할 수 있다.


가르침이라고 하면 웬지 학문적인 느낌이 들고, 이해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붓다가 설한 가르침이란 어디까지나 진리에 의해 살아갈 것을 말씀한 것이지, 결코 공리 공론을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붓다가 영원이니 내생이니 하는 문제에 대해 대답하기를 거부한 것도 그것이 수행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음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른바 붓다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그것을 어떤 인식이라고 안다면 큰 오해를 범한 것이 된다. 그것은 인식을 넘어선 지행(知行)일치의 세계, 아니 지행 이전의 더 근본적인 하나의 체험이었던 것이니, 불교가 행(行)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도 다 그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불교인이란 먼저 그 가르침을 잘 이해해야 되겠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수행을 거듭하여 열반의 경지에 도달해야 된다. 열반이란 지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위대한 체험의 세계이다.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서는 일체의 언설과 지식이 소용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먼저 수행에 의해 열반, 즉 ꡐ자유의 세계ꡑ에 이를 것이 강조된 것이겠다.


그러나 여기서 자칫 오해가 생기기 쉽다. 열반에 도달하면 그것으로 만사가 끝난 듯 생각하는 착각이 그것이다. 과거에 위대했던 불교인 중에도 그런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어떤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해서 그 순간부터 계율을 무시하고 엉뚱한 행동을 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으레 ꡐ대승ꡑ을 내세웠지만, 대승,소승의 구별이 본래 무의미함을 우리는 앞에서 보았다.


어떤 명목에서건 비구가 자기의 청정한 행동을 포기한다는 것은 분명히 타락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태도는 자유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에 도리어 얽매여 버린 것이어서, 진정한 자유도 아니요 진정한 깨달음일 수도 없다.


그러기에 붓다는ꡒ자유의 경지에 이른 다음에 할 일은 이것이다.ꡓ라고 못박고 계시는 것이다.


이 ꡐ자경ꡑ에서 볼 때 이 한 행의 말씀은 이제부토 설하려 하는 주문에 대한 하나의 전제 구실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거니와, 이것은 이것대로 모든 불교인에게 큰 경종이 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 줄 안다.


자유의 경지 즉 열반에 이르렀을 때, 해야 할 일은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지금껏 갖은 애를 다 써서 자기를 단련한 것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 삶을 훌륭히 살아가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사회에 나와 훌륭한 사회인이 되고자 하는 소망 때문인 것과 같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 사람의 인생이 끝나 버린다면, 그때까지 받은 교육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열반의 경지를 대학 졸업에 비유한다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열반의 경지를 대학 졸업에 비유한다는 것은 적당하지가 못하다.


열반의 경지는 바라기만 하면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며,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보장되는 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반의 획득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거기에서 그쳐도 좋다는 이론은 나올 수 없다.


백만 명에 하나도 얻기 어려운 것을 얻었기에 그 사람에게는 더욱 해야 될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먼저 유능할 것이 요구된다. 깨달았다고 하여, 열반에 도달하였다고 하여, 그에게 그대로 어떤 방편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할 자격과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대로 구제의 실현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시 여러 가지 일을 배워야 한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있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런 것에 통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이끌어 가야 할지 그 방법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이점에서도 붓다는 훌륭한 수범을 끼쳐 놓았다. 이미 앞에서 말한바 있지만, 붓다는 자기가 체득한 진리를 그대로 설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체계화하고 몇 개의 조항으로 요약함으로써 누구나 알아 듣기 쉽도록 만들었다.


또 그는 상대의 질문에 따라 그때마다 거기에 알맞은 설명을 해줄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인들이 본받아야 할 ꡐ유능ꡑ이리라. 다음으로 요구되는 덕목은 솔직이다.


두 점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이라고 하거니와, 솔직처럼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 것도 드물 터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힘에 대해서는 저항하려는 본능을 가지고있지만, 이 솔직이라는 덕 앞에서는 아주 간단히 무릎을 꿇기 때문이다.


붓다는 어떤 경우에라도 책략을 쓴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진정을 그대로 쏟아 놓았다. 그가 위로는 왕공으로부터 밑으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의 귀의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솔직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말은 그의 수도 과정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붓다는 왕족 계급으로 태어났다. 비록 작은 나라이었을망정 그의 일생은 부귀가 약속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의 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가 필요하다고 느끼자, 서슴없이 그것을 단행하였다.


그것을 용기라고 하면 용기임에 틀림없겠으나, 그의 솔직한 성품이 발휘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낫겠다. 아니 솔직이야말로 더 없는 용기임에 틀림없다. 그는 출가하자 전통적 종교의 관습에 따라 고행에 전념했다.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그리고 열심히. 그러나 그것이 그릇된 방법임을 자각한 순간, 헌신짝을 벗어 던지듯이 그것과 결별하기를 주저치 않았다. 이것도 후세에서 생각하기에는 당연한 일인 듯 여겨지지만, 당시의 사정에서는 여간 큰 결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기실 옳고 그른 기준을 남에게 두고 살아간다. 그리하여 남이 칭찬하면 자기 행위가 옳은 것으로 알고, 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때에는 꺼림칙하게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정당하고 성스럽다고 여기고 있는 고행을 단호히 부정하고 나선다는 것은 여간해서 될 일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타락했다고 손가락질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그것을 단행하였다.


그것도 그의 솔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여기에서 붓다가 오로지 진리에만 기준을 두고 살아 왔음을 알게 되며, 솔직한 그의 태도도 거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솔직이란 진리에만 입각해서 행동하라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ꡐ소리ꡑ들이 있다. 남의 일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고 살아가며, 어떤 약삭빠른 사람들은 그런 ꡐ소리ꡑ들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고의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다름 아닌 위선이려니와, 자기나 남에게 솔직하지 못할 때에는 진리의 체독이란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단 열반에 이른 사람이라고 해도 이 덕목을 상실하는 경우, 그는 급전 직하 다시 범부의 경지로 떨어지고 말리라. 열반이란 마음의 상황이기에 마음이 바뀌면 상황도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붓다가 요구한 것은 단정해야 된다는 점이었다. 이미 열반의 경지를 얻은 성자에게 이것은 또 무슨 유치한 소리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단정하라는 것은 흔히 애들에게 부모나 선생이 훈계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붓다가 말씀한 단정도 그런 단정이며, 그 말에 다른 별 뜻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자에게까지 이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먼저 단정이라는 말의 뜻부터 따져 보자.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행동이 법도에 맞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일러 ꡐ단정ꡑ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바른 행위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다. 그렇다면 이 덕목이 어린이들에게 요구되는 까닭도 알 수 있거니와, 한편으로는 성자에게도 요구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명백하지 않겠는가.


바른 행위란 누구에게나 필요한 덕목이며, 성자 또한 인간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神)을 설정하고 들어간다면, 신이란 모든 미덕을 구비한절대자로 생각되므로, 신에게는 어떠한 과오도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러나 붓다는 그런 신의 관념을 배척하였다. 있는 것은 인간이며, 이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고 할 때, 인간으로서 이제는 과오가 절대로 없다는 경지가 있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붓다는 명백히 그런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붓다도 끝없이 정진을 계속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여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일 수는 절대로 없다.


더욱이 이제부터는 어떤 짓을 하든 관계없다는 그런 경지가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앞에 놓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후세 불교인들이 취했던 행동이다.


이른바 깨달았다는 사람 중에는 가끔 엉뚱한 짓을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런 행위까지도 그것이 보살행인 까닭이라느니, 대승이기 때문이라느니 하여 변호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붓다의 생애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붓다의 일생 중에 그 무슨 기행, 기언이 있었는가.


붓다가 저자에 나타나서 덩실덩실 춤을 춘 적이 있는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기방에 출입한 적이 있는가. 한시라도 수행을 그친 적이 있는가.


위의를 흐트러뜨리고 누군가와 농담이나 호언 장담을 주고받은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 분의 생애가 어느 비구보다도 진지하고 엄격한 그것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어느 유명한 중이 아니라, 붓다 그 분이어야 한다. 깨달았다고 해서 단정한 행위가 필요치 않다는 논리는 결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또 생각나는 것은 계율의 문제이다. 단정이란 결국 계율을 지키는 일이려니와, 지금의 불교계는 과연 어떤가? 승려가 아내를 얻고,술과 고기를 먹고, 재물을 탐하고…. 그러면서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언필칭 ꡐ대승ꡑ이라는 한 마디 말이다.


즉 그들은 상구 보리만 아는 소승과는 달리 하화 중생을 하고 있는 대승이기 때문에 방편상 그런 행위도 용인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리(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남을 교화한다는 말인가.


또 열반에 이른 성자라고 해도 자칫하다가는 범부의 경지로 전락하기 쉬운 법인데, 범부인 주제에 어찌 남을 구하는 방편으로 계율을 파괴해도 마음의 청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인가.


술을 마시고 색에 빠지는 것이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이 되고, 그러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필시 붓다 보다도 더한 성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기만에 누가 속는가. 세상 사람들은 그런 승려들을 볼 때, 비웃고 개탄하고 불교 자체까지도 의심하려고 든다. 그들이 어찌 그런 행위에 의해 교화되랴.


그러므로 이 단정이라는 덕목은 얼른 보기에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몸과 마음의 청정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불교의 안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불교는 이것을 위해 있는 것이며, 이것이 상실될 때 불교는 죽는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터이다.


다음에 요구되는 것은 좋은 말을 할 것, 유화할 것, 거만하지 말 것 따위의 덕목이다. 이 중에서 특히 거만은 깊이 경계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누구나 높은 경지에 이르고 나면 흔히 남을 내려다보기 쉬운 까닭이다. 이 점에서도 붓다는 영원한 본보기이다. 대중 앞에 나서서, ꡒ그 동안 나의 언어와 행동에 그 무슨 잘못은 없었던가?


만일 조금이라도 그런 것을 보고 들은 사람이 있다면 벗들이여, 나를 가엾이 알아 부디 지적해 달라.ꡓ고 자자(自恣)할 때의 붓다를 생각하라. 조그만 것을 이해했고 깨달았다고 해서 어찌 거만할 수 있겠는가. 또 ꡒ족한 것을 알고 과욕(寡慾)할 것ꡓ이 요구되고 있다.


옛날 용어로 말한다면 지족(知足)과 이양(易養)이다. 내가 어릴 적에 나의 부친은 ꡐ지족사ꡑ라는 절의 주지로 있었다. 나는 그 절의 이름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조금도 그럴 듯한 맛, 절다운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뜻밖에도 매우 중대한 덕목임을 깨닫게 된 것은 요즘에 들어서의 일이다. 지족을 주장하는 데는 동서의 차이가 없는 줄 아나, 역시 이것을 가장 강조하는 것은 불교인 것 같다.


지족이니 과욕이니 하는 것은 결국 최소한도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생활에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곧 탐심을 낸다는 말이 되는 까닭이다. 욕망이란 끝이 없으며, 말을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그런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불교이매, 한 벌의 옷과 한 끼의 밥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도인은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도의 유무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으로서 그 사람이 얼마나 과욕할 수 있는지를 보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도 잘못이 아니라고 자처한다.


서두라고도 할 덕목에 대한 설명이 좀 장황해진 느낌이 없지 않거니와, 이 경은 결국 자비행에 앞서 불교인으로서의 자기를 확립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겠다.


대승이 주장하는 말을 빌린다면, 먼저 상구 보리를 하여 진리를 확고히 파악하고 난 다음에 하화 중생을 실천하라고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붓다의 뜻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결코 자리(自利)가 이타(利他)보다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자리와 이타는 본래 경중을 따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정말 추호의 사심도 없는 자비행으로 남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확립이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경의 주장인줄 안다.


여기서 본론으로 들어가서 자비란 무엇인가. 그 본질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 경의 도처에 그것이 언급되어 있지만, 그에 앞서 나는 이 말 자체의 뜻을 파헤쳐 보고 싶다.


ꡐ자(慈)ꡑ라는 말을 팔리 어에서는 metta라고 한다. 산스크리트로는 maitrey라고 하며, 그 어원을 캐어 보면 mitra(벗)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된다.


그것이 팔리 어에서 mitta(벗)가 되고, 다시 추상화 되어 metts(우정)로 발전하여 그것이 ꡐ자(慈)ꡑ의 뜻을 지니기에 이른 것으로 추측 된다.


이런 어학적인 것을 장황히 늘어놓는 것은 물론 현학적인 취미 때문만은 아니다. 나도 그런 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바이지만, 어떤 기회에 그런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이 나에게 이 덕목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준 것뿐이다.


이리하여 재인식하게 된 ꡐ자ꡑ의 뜻을 말하기 위해 나는 그런 어학적인 면까지 언급하게 되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이 ꡐ자(慈)ꡑ라는 말은 ꡐ사랑ꡑ이라는 단어로 대치시켜도 무방하다. 현대 인들에게는 이쪽이 훨씬 신선하고 매력이 있으며, 이해에 도움이 될는지도 알 수 없겠다. 내가 이 책에 ꡐ지혜와 사랑의 말씀ꡑ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ꡐ자(慈)ꡑ를 ꡐ사랑ꡑ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기에 앞서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불교에서는 ꡐ사랑ꡑ의 쓰임새가 매우 다양할 뿐더러, 부정적인 뜻으로도 자주 쓰인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카마(kama)란 사랑이라는 뜻이지만, 그것은 감각적인 욕망을 가리키고, 주로 성적인 사랑을 말한다. 또 탄하(tanha)도 사랑을 뜻하는 말이나, 그것은 격렬한 욕망을 가리키는 데 쓰이여, 거기서부터 병적인 집착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사랑에 대해 붓다는 대개의 경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는 전장(前章)에서 파세나디 왕과 왕비가 이야기한 것,


즉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다고 한 그 ꡐ사랑ꡑ의 원어는 피야(piya)인바, 그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혈연, 친척에 연결되는 사랑이다.


그러기에 그것을 더 높은 차원으로 지양 시키라고 일렀을 때, 붓다는 명백히 그런 사랑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것이 되는 줄 안다.


다시 [법구경]의 애품(愛品 ; piyavagga)에서는 그런 사랑을 나타내는 낱말들, 즉piya, pema, rati, kama, tanha 따위를 나열하고 나서 그 하나하나에 대해


사랑에서 근심은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은 생기나니

사랑을 넘어선 사람에겐 근심 없도다.

어디에 간들 두려움 있으랴.


라고 설하고 있다. 이렇게 불교에는 사랑에 대해 부정적으로 설한 말이 많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국 사랑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지양 시키고자 했기 때문임을 간과한다면, 붓다의 참뜻을 오해한 것이 될 터이다.


붓다는 남녀의 사랑,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재물에 대한 사랑 따위를 근본에서부터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인간이 인간 노릇함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목석과 같아 지라고 요구하는 것이며, 인간성 자체를 말살하는 결과가 되고 말리라. 그러기에 붓다는 그런 것을 더 높은 사랑으로 지양하라고 가르치기 위해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 불순성을 부정했던 것이었다.


이것은 거듭거듭 주의할 필요가 있는 점인 줄 안다. 무릇 사랑이란 일종의 인력이다. 끌어당겨서 연결시키는 힘이다. 그러므로 이것 없이는 인간 관계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남녀가 서로 만나 한 가정을 이루고, 남과 손을 잡아 친구가 됨으로써 서로 돕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 사랑하고, 제 조국을 사랑하고 세계의 평화를 염원한다는 것, 이것들은 모두 사랑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란 그런 뜻에서 선악 이전(無記)생명의 본원적인 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원적인 것이면 본원적인 것일수록 그 작용은 분방하고 거칠기 마련이어서, 그 자연적인 양상은 반드시 더할 나위 없이 착하고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다.


남녀의 사랑이라면 동물에게도 유사한 것이 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은 조수에게도 있다. 가까운 것끼리 서로 끌고 맺어지는 것은 물리적 세계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이런 본원적인 사랑만이라면 그것을 반드시 인류 특유의 것이라고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겠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사랑의 이러한 본원적인 힘을 조정하고 지양 시키고 확대해 가야 한다.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덕이니 종교니 일컬어지는 것들은 항상 그런 노력을 하여 왔던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 중에서도 이런 사랑을 지양 시켜서 일체의 생명과 모든 사람에게까지 확대할 것을 가르친 것은 불교와 기독교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두 종교가 이런 전인류적인 사랑의 이념을 창조하기까지 이른 과정은 전혀 달랐다는 것을 나는 매우 흥미 있게 생각하는 바이다.


기독교에서의 사랑의 전인류적인 확대는 신의 사랑의 모방으로서 제시되었다. 이른바 ꡐ산상 수훈ꡑ의 일절은 이런 말을 전하고 있다.


ꡒ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ꡓ


여기에 기독교적 사랑의 기본 구조가 그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본능적인 사랑의 양상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고, 자기에게 가까운 이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자기자식을 사랑하고, 자기 형제를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자기에게 가까울수록 짙어지고 멀어짐에 따라 엷어진다.


원수에 대해서는 증오하는 것이 옳고, 적과는 맹렬하게 싸울수록 칭찬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는 ꡒ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라.ꡓ고 했다.


그것은 완전히 인간의 본능적인 사랑에 역행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가? 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신의 사랑을 모방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다.


ꡒ하느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치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이와 불의한 이에게 내리우시나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ꡓ


이렇게 기원함으로써 사람은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며, 능히 인간 본능의 사랑으로부터 비약하여 신적인 사랑으로 지양될 수 있다고 그들은 본다.


이리하여 그들은 인간 본능의 사랑을 에로스(eros)라고 일컫는 데 대해, 이런 신적인 사랑을 아가페(agape)라고 불러서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사랑의 전인류적 확대 과정은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이었다는 것에 그 특징이 있다.


그런 뜻에서 불교적인 사랑 즉 자비는 완전히 휴머니스틱(humanistic)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휴머니즘의 근본 정신은ꡒ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무엇이거나 나와 관계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homo sum ; humani nihil a me alienum puto).ꡓ고 한 데렌티우스(Terentius, ab. 195~59 B.C.)의 말 속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들 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붓다의 길은 자기에게 전념하고 자기의 깊은 내부를 향해 침잠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얼른 보기에 인간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듯 이도 보이리라.


그러나 매우 역설적인 말이긴 해도, 사람이란 자기의 내적 심층에 침잠했을 때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아, 그들도 또한 나처럼 인간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있구나! 이런 사실을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자기 침잠의 심층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몸의 진상을 투시하여 그 위에 눈물을 뿌릴 수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남의 처지에 대해서도 눈물을 뿌릴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동고 동비(同苦同悲)의 감정이라는 것도 이런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비의 샘이 끊임없이 샘솟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ꡐ자(慈 ; metta)ꡑ라는 말이 ꡐ우정ꡑ도 뜻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매우 의미 심장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생존 양상이란 천차 만별이다. 어떤 사람은 제왕으로서 만인 위에 군림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노예로서 일생을 매어 지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억만 장자가 되어 주지 육림에 파묻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일간 두옥도 없어서 거리를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인간성의 심층에 침잠하여 바라보면, 인간이란 똑같이 생로 병사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등에 걸머지고 언제 닥쳐올지도 모르는 죽음 앞에 벌벌 떨고 있는 가엾은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점에 눈뜰 때, 우리 앞에서는 제왕이니 노예니 가난뱅이니 부자니 하는 차별이 완전히 무의미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이란 본질적으로 평등하여 누구나 친구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이 동고 동비의 정으로 연결될 때, 거기에서 솟아나는 사랑(慈)의 샘이란 우정 그것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여기에서 ꡐ자ꡑ가 ꡐ비(悲)ꡑ라는 글자와 만나 ꡐ자비ꡑ라는 숙어를 이루는 것이 상례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ꡐ비ꡑ는 karuna의 역어 이어서 본디 ꡐ신음ꡑ을 뜻하는 말이다. 남이 괴로워서 신음하는 모양을 보면 누구나 가엾은 생각을 지니게 되거니와, 이 공감이 바로 ꡐ비ꡑ의 내용이다.


중국의 주석가는 ꡐ자비ꡑ의 뜻을 설명하여 ꡒ애련(愛憐)을 자라 하고 측창(側愴)을 비라 한다.ꡓ고 했고, 팔리 어 주석에서는 ꡒ자란 복선(福善)을 주려고 하는 마음이요, 비란 원고(怨苦)를 제거하려는 소원ꡓ이라고 했다.


어쨌든 ꡐ자ꡑ는 ꡐ비ꡑ와 결부됨으로써 그 적극면과 소극면을 구비하게 되는데, 내 사견으로 이 양면의 중량을 비교하자면, 그 비중은 오히려 ꡐ비ꡑ 쪽으로 기우는 듯이 생각된다.


생각건대 우리 인간의 생존 양상이란 슬픔으로 차 있다. 평화를 갈구 하면서도 불안에 떨어야 하고, 자유를 바라면서도 구속 속에서 허덕여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천명을 다하고자 원하면서 자주 죽음의 위협 앞에 떨기도 하고, 생을 충실히 살아가고자 하지만 게으름이 우리의 나날을 좀먹기도 한다.


이런 자기의 슬픈 양상을 깊이 통찰하고 우연히 고개를 들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 눈에 비치는 것은 역시 자기처럼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실에 눈뜰 때 저절로 우리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이 동고 동비의 감정이다.


ꡒ측창을 비라 한다.ꡓ는 말을 바로 이것을 이름이다. 그리고 이 슬픔의 감정이 이상한 힘을 발휘하여 우리 마음속에서 보편적인 사랑을 일깨우게 된다.


거기에 무엇인가 인간의 기미(機微)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옛 사람들이 인간을 가리켜 ꡐ비기(悲器)ꡑ라고 한 것도 이런 점을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낡은 경에 ꡒ삼세의 모든 세존은 대비(大悲)로 근본을 삼는다.ꡓ라고 한 것도 역시 같은 뜻이다. 이제 붓다는 이 ꡐ자경ꡑ에서ꡒ일체의 생명 모든 사람에게 행복이 있으라, 평화가 있으라, 은혜가 있으라.ꡓ고 외도록 설하셨다.


그 목소리도 나에게는 눈물에 젖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인간의 슬픔을 그 분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