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스님

[제2장] 기꺼이 받아들일 때 업은 녹는다

通達無我法者 2007. 5. 18. 15:48

 

 

 

  기꺼이 받아들일 때 업은 녹는다.


  인과의 법칙 따라 업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 그렇다면 인간은 업과 윤회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가? 아니다.

  이 몸을 자동차에 비한다면 이 몸을 운전하는 운전수가 있다. 자동차를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운전수,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참 나'가 있는 것이다. 이 '참 나'를 바르게 끌고 '참 나'를 분명히 찾으면 윤회와 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동차가 달라져도 주인은 그대로이듯, 우리는 업을 따라 차종만 바꿀 뿐이다. 궂은 업을 지었으면 궂은 차를 타고, 좋은 업을 지었으면 좋은 차를 타기 마련이다. 그것도 잠시 동안을...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은 업은 돌아보지 않고 좋은 차만을 고집한다. '나라고 하여 궂은 차를 타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문제는 더욱 커진다. 기꺼이 받으면 업이 저절로 녹아내릴 수 있는데도 억지 탈바꿈을 추구하다가 더욱 궂은 업을 짓게 되고 만다.

  이렇게 하는 이상 자유와 행복은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의 길속에서 한없는 괴로움을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꺼이 받는 삶!

  바로 이 비결이 모든 업장을 소멸시키고, 업장이 소멸되면 고통의 삶은 기쁨의 삶으로 바뀐다. 그러나 교리적인 설명을 통해서보다는 있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해에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삶을 생각케 하고자 한다. 먼저 나의 어머니인 성호비구니의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성호비구니의 업보


  1940년대 전반기 우리 집안 43인이 모두 출가한 직후에 있었던 일이다. 출가 전부터 절에 가시기를 좋아하였고 절 살림살이 마련해주기를 좋아하였던 나의 어머니 성호비구니는 출가 후에도 절 살림살이 마련에 힘을 기울였다.

  그 당시에 머물렀던 대구 동화사 내원암은 거의 무너지다시피한 아주 가난한 절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가실 때마다 바가지와 작은 그릇, 단지 등 필요한 살림살이를 수시로 사서 날랐다.

  어느날 갖가지 살림살이를 소달구지에다 가득 싣고 내원암으로 올라가는데, 짐끈을 제대로 묶지 않아 실은 물건이 덜거덕 덜거덕 흔들리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수레를 세우고 수레바퀴 옆에 바짝 붙어서서 끈을 다시 묶었다.

  그런데 가만히 있던 소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나갔고,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어머니의 발등 위로 수레의 바퀴가 넘어간 것이었다.

 그 당시의 수레바퀴는 지금의 고무바퀴와는 달리 나무에다 쇠를 두른 아주 딱딱한 것이었다. 빈 수레라 하여도 무거운데, 거기다 짐을 실었으니 그 무게가 오죽하였으랴! 연한 두 발이 사정없이 바스러지는 순간, 어머니는 기절하여 대구 동산 병원에 실려가셨다.

  우리 가족들이 걱정을 하며 입원실을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혼자서 싱글싱글 웃고 계시는 것이었다.

  "어머니, 아프지 않으십니까?"

  "두 발등이 다 부서졌는데 안 아프면 되는가?"


  가히 백천겁이 지나더라도

  한번 지어 놓은 업은 없어지지 않나니

  인연이 닥쳐오면

  그 과보를 면할 수가 없느니라


  처녀시절 사서삼경을 모두 읽으신데다 말씀도 잘하시고 문장도 잘 하셨던 어머니는 아픈 중에도 이 게송을 읊으시면서 자꾸 빙그레 웃으시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가족들에게 어머니는 웃는 까닭을 말씀하셨다.

  "나는 발등을 다쳐 기절을 하는 바로 그 찰나에 닭 한 마리가 퍼덕퍼덕 날개를 치며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3년 전에 할아버지가 집에 오셔서 점심 진지상을 차리는데, 부엌 안으로 닭 한 마리가 들어와서 먹을 것을 찾아 왔다갔다하며 목을 넘실거리더구나. 그래서 닭을 쫓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부지깽이를 던졌는데, 그만 닭다리에 정통으로 맞아 다리 둘이 모두 부러져 나갔단다. 닭은 크게 소리내 울면서 두 다리가 간댕간댕한 상태로 황급히 밖으로 날아 나갔지..."

  기절하는 순간 닭이 달아나는 영상을 본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그때의 닭이 죽은 지금 저 소가 되어 악연을 갚는 것'임을 느꼈다는 것이다.

  "내가 그때 닭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린 것이 아니듯이 저 소도 일부러 내 발등을 부러뜨리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벌이 달려들자 피하기 위해 갑자기 수레를 끌었을 것이야. 평소 때였다면 소 모는 일꾼에게 그릇들이 움직이지 않게 끈을 좀 잘 조여달라고 하였을텐데, 과보를 받을 때가 되어서인지 이상하게 직접 끈을 조여매고 싶어졌거든! 이렇게 인과가 분명한 데가 어디 있느냐? 3년 전에 지어놓은 업을 이렇게 빨리 받았으니 그 전에 지은 죄업도 어지간히 갚아진 것 아니겠니. 나는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인지 한 달 남짓 병원에서 치료하자 바스러진 발등이 완전히 붙었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발이 아프다는 말씀은 한번도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