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스님

[제6장] 형편 따라 정진하라

通達無我法者 2007. 5. 18. 16:29

 

 

 

 

 형편 따라 정진하라

 


  실로 우리의 일상생활은 혼침과 산란함의 연속이다.

  우리가 생활의 안정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에 목표를 향해 매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뒤흔들어버리는 갈팡질팡한 삶이 오래 계속되면 자기도 자기를 어떻게 할 수 없는 흐리멍텅한 상태에 빠져버리고 만다.  이것이 혼침이다.

  그런데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게 되면 산란한 마음이 차츰 안정이 되고, 마음이 안정되면 밝음이 샘솟아 혼침이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우리들 자신을 물이 든 항아리에 비유해보자. 이 육신이라는 항아리에 든 현재의 물은 탁하기 그지없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출렁이고 있다. 순간순간 오만 가지 번뇌망상에 스스로를 맡겨놓았으니 혼탁은 물론이요 출렁임이 거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참선을 시작하여 보라. 우선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망상과의 싸움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화두'라는 좋은 갑옷을 입고 끊임없이 '?'를 챙겨나가면 일어났던 번뇌망상의 출렁임은 차츰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출렁임이 사라지면 고요함 속에서 물이 맑아지고 밝아지게 되는 것이다.

  단, 이렇게 화두를 들 때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곧 번뇌가 일어나면 절대로 상대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무'자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고 있는데 어제 저녁에 만났던 사람에 대한 생각이 일어났다고 하자.

  "아, 그 사람에게 내가 실수를 했어."

  "그렇게 말하지 말고 이렇게 말할 걸..."

  "그래, 다음에 만날 때는 아주 부드러운 말로 다시 이야기해야지..."

  이렇게 어제 저녁 일을 생각하다보면 화두는 완전히 달아나버린다. 화두선이 아니라 망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화두로써 내 마음을 거두어 잡아야 한다.

 일어나는 생각들을 애써 없애려 하지 말고 오로지 "어째서 조주선사는 무'라고 하셨는가?" 하는 의문 속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오직 화두에만 마음을 두면 홀연히 일어났던 생각들이 저절로 사라져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어나는 생각들을 애써 없애려 하면 오히려 그 생각들에 사로잡혀버리고 만다. 거듭 강조하지만, 잡생각이 일어나려거든 모름지기 화두로만 돌아가라.

  '왜?', '어째서?'라는 이 의문부호 이상 가는 훌륭한 무기는 없다.


  옛날, 중국의 농촌 마을에 금실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부부에게는 애석하게도 자식이 없었다.

  '아들 하나 얻었으면 소원이 없으련만...'

  간절한 소망 덕분인지 그들 부부는 나이 사십이 넘어 아들을 얻게 되었다. 그 아들은 그렇게 귀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금덩어리보다 더 귀한 내 아들!"

  "금덩어리라니요? 옥보다도 더 귀하지요."

  이러한 대화를 나누던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금옥'이라 짓고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웠다.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안거나 업고 키웠으며, 심지어는 화장실을 갈 때에도 서로에게 업혀 준 다음 볼 일을 보았다.

  이렇게 애지중지 업고만 키운 아이의 다리는 완전히 '0'자가 되어 혼자 걸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해달라는대로 금방해주고 '오냐 오냐' 하고 키웠기 때문에 성질이 아주 이상해졌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들 부부에게는 아들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아들의 나이 7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바람도 쐴겸 아들을 등에 업고 집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동산으로 갔다. 그런데 등에 업혀 있던 아들이 아버지의 머리를 '쿡' 쥐어박으며 부르는 것이었다.

  "아버지!"

  "왜?"

  "저것 줘."

  "저것? 무엇말이냐?"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의 머리며 등을 닥치는대로 때리면서 발악을 하듯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저것 줘!"

  "저것이 무엇인데? 무엇인지 알아야지 줄 것이 아니냐?"

  "저것 줘, 빨리! 저것!"

  제 성질을 못이겨 발악을 하던 아들은 거품을 뿜으며 숨이 넘어가버렸다. 다급해진 아버지는 아들을 들쳐업고 10리 길을 단숨에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토록 애지중지 키웠던 아들은 이미 죽어 있었다.

  아버지는 기가 막혀 죽은 아들 옆에 멍하니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안고 통곡을 하다가 화살을 남편에게 돌렸다.

  "이놈의 영감, 내 자식 살려내라, 우리 금옥이 살려내!"

  고함을 지르고 남편을 때리며 울다가 지치면 잠이 들고, 깨어나면 또다시 남편에게 퍼붓고... 그러다가 아내가 문득 이렇게 말을 퍼붓는 것이었다.

  "이놈의 영감아! '저것 줘' 하거든 아무 것이나 집어주었으면 될텐데 묻기는 왜 자꾸 물었어? 돌멩이든 들꽃이든 덜렁 집어주었으면 금옥이가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 아니야!"

  순간, 정신이 빠진 듯 앉아있던 아버지의 머리에 한 생각이 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맞아. 금옥이가 도대체 무엇을 달라고 했지? 금옥이가 원했던 것이 도대체 무엇이지?'

  참으로 그들 부부와 금옥이의 인연은 특별한 것이었다. 아들을 잘못 키워 이상한 성격의 아이를 만들었고, 그 성격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생각보다는 자신들이 잘못하여 아들을 죽였다는 생각과 '저것 줘' 하였을 때 주지 못한 것이 후회될 뿐이었다.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금옥이가 무엇을 달라고 했던가?'

  '무엇을 달라고 했던가?'

  '도대체 무엇을?'

  '무엇을?'

  아버지는 이 의문에 깊이 빠져들었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그냥 앉은 채로 금옥이가 달라고 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였다. 그렇게 7일을 생각하다가, 옆에서 잠을 자고 있던 아내가 문득 발로 팍 차는 순간 그는 확철대오하였다.

  깨치고 보니 아들 금옥이가 달라고 한 것은 빈 주먹이었고, 깨치고 보니 아들 금옥이는 전생에 함께 도를 닦던 도반이었다.

  지난 생, 인물이 잘생긴 스님과 얼굴이 검고 험상궂게 생긴 스님이 깊은 산중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그때 젊은 보살이 그 스님들께 양식을 대주고 공양을 올리면서 이바지하였다.

  그런데 잘생긴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 인지상정인듯, 보살은 잘생긴 스님에게 마음을 더 많이 써주었다. 사과 두 개를 가져와도 빛이 좋고 모양이 반듯한 것은 잘생긴 스님에게 주고, 비딱하게 못생긴 것은 얼굴이 검은 스님에게 주었다.

  얼굴 잘생긴 스님에 대한 보살의 정성은 날로 더하였고, 마침내 잘생긴 스님도 마음이 보살에게로 기울어져 갔다. 자연 스님의 공부는 진척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잘생긴 스님과 보살은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고, 전생에 품은 연심이 씨앗이 되어 금생에서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생에 독신으로 산 때문인지 그들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한편, 얼굴이 검은 스님은 잘생긴 스님과 보살이 죽은 후에도 꾸준히 닦아 마침내 대오하였다. 그리고 깨달은 다음 제도할 중생을 관찰해보니 그들 부부와 가장 인연이 깊었다. 하지만 그냥 찾아가 도를 깨우치기에는 그들의 습속이 너무 깊어 있었다. 그들 부부가 아들에게 더할 나위없는 애착을 가지도록 한 다음 '저것 줘!' 하면서 죽어버린 것이다.

  지극한 의심. '무엇을 달라고 했던가?' 하는 간절한 의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 전생의 도반 금옥이는 죽어버렸고, 아버지는 금옥이에 대한 애착만큼이나 간절한 의심을 일으켜 마침내 도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도를 깨닫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간절한 의심이다. 화두에는 좋은 화두, 나쁜 화두가 따로 없다.

 초점은 의심이다. 간절히 의심을 일으켜 화두를 잡는 것이 최상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할 때 모든 문제는 저절로 사라진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삼매에 이르면 저절로 깨달음의 문이 열리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하는 것이다. 하루에 30분씩이라도 꾸준히 참선을 하게 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밝아지게 되어, 집중력이 높아지고 판단력이 빨라져서 생활 또한 보다 윤택하게 꾸려갈 수 있게 된다. 곧 참선할 때의 집중력이 생활에 그대로 응용되어 갖가지 좋은일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돌이켜보라.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인생인가?

  마음이 평온하고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것이 잘 사는 인생이다.

  참선을 하라. 참선은 우리에게 이것을 선사해준다. 잠깐이라도 좋다. 가부자를 틀고 앉아 화두를 잡고 참선을 하라. 하루 중 일부의 시간을 결코 손해보지 않을 자기를 돌아보는 공부, 주인공을 찾는 공부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보람된 일일 것이다.

  나아가 부처를 이루고자 하면 모름지기 마음을 모으고 정신을 차려서 화두를 잡아야 한다.

  "언제나 부지런히 간절하게 화두를 잡아라."

  이것 이외에는 참선하는 사람에게 따로 긴요한 말이 없다. 오직 화두에 집중하다보면 마음이 저절로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거기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지혜의 빛이다.

  이 지혜의 빛은 자신의 마음자리, 곧 자성심을 보게 하고, 자성을 보게 되면 천지와 내가 한 뿌리요 만물과 내가 한 몸이 된다. 그러한 때에 내가 하는 바는 모두가 신통묘용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 실체는 누구도 볼 수가 없다. 오직 요술인양, 그 실체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자비로써 인간과 천상의 큰 복밭이 되어 모든 중생을 제도해낼 수가 있다.

  인간과 천상의 큰 복밭!

  그 복밭에는 무엇이든 심기만 하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으며, 중생의 그릇에 따라 이로움을 주는 밭이다. 그 복밭을 이룰 때까지 우리 모두 고삐를 늦추지 말고 정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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