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17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1:14
 
 

 

 
 
 능엄경 강의 17   
 
○ 三開空不空如來藏示中道觀體分四
◆ 初約遮照以顯圓分四
▣ 初約雙遮以顯圓

而如來藏本妙圓心. 非心非空. 非地非水非風非火. 非眼非耳鼻舌身意. 非色非聲香味觸法. 非眼識界如是乃至非意識界. 非明無明明無明盡如是乃至非老非死非老死盡. 非苦非集非滅非道. 非智非得. 非檀那非尸羅非毗梨耶非?提非禪那非般剌若. 非波羅蜜多. 如是乃至非??阿竭此云如來非阿羅訶此云應供三耶三菩. 此云正?知非大涅槃. 非常非樂非我非淨. 以是俱非世出世法故.


○ 3. 공불공여래장을 열어 중도관의 실체를 넷으로 보이다.

◆ 1. 부정과 긍정의 편에서 원융한 이치를 넷으로 나타내다.
▣ 1. 쌍을 부정하는 편에서 원융한 이치를 나타내다.



여래장심은 본래 오묘하고 원만하고 상주하며, 이지러짐도 결손함도 없으며, 불생불멸하고 청정본연하여 원래 식심(識心)ㆍ완공(頑空)ㆍ지수화풍 등 칠대(七大)가 아니며, 역시 육근ㆍ육진ㆍ육식ㆍ십팔계인 삼과(三科)도 아니다. [이를 본다면 여래장이 세간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명(明)도 무명(無明)도 아니며, 명과 무명이 다함도 아니며, 이와같이 내지는 노사(老死)가 다함도 아니다. [이는 연각승의 유전환멸법(流轉還滅法)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고제(苦諦)ㆍ집제(集諦)도 아니며, 내지는 주관적으로 공한 지혜와 객관적인 공한 이치를 얻는 것도 아니다. [이는 이승성문이 닦는 세출세간의 사제양중인과(四諦兩重因果)와 주관적으로 공한 지혜와 객관적으로 공한 이치마저 아님을 알 수 있다.]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도 아니며, 내지는 반야바라밀다도 아니다. [이는 보살이 육바라밀로 열반피안에 당도하는 법도 아니다. 이를 관찰해 보면 출세간법도 아님이 분명하다.]

이와같이 내지는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세 호칭도 아니며, 대열반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덕(四德)도 아니다. [이를 보면 다시 출세간의 상상법(上上法)도 아니다.]

이처럼 세간법도 아니고, 출세간법도 아니며, 출세간 상상법도 아니다. 이 셋이 모두 여래장성 본질에선 부정된다. 그 때문에 이를 두고 공여래장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공여래장의 의미를 밝혔다. 문장 가운데 오음(五陰)이 없는 이유는 육근ㆍ육진에 색음(色陰)을 포섭하고 의식에서 수상행식 사음(四陰)을 포섭하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않았다.]

[要義] 여기서부터는 여래장성을 원융하게 지적하고 제시하였다. 이“여래장”이라는 하나의 단어엔 공여래장ㆍ불공여래장ㆍ공불공여래장이라는 세 의미가 있다. 이 셋으로써 수능엄 삼매의 전체 대용을 삼았다.

여래장성엔 생멸의 인연을 따르면서도 그 자체는 변치 않는[隨緣不變] 자체와 자체는 변치 않으나 생멸의 인연을 따르는 [不變隨緣]작용. 즉 이같은 체와 용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 둘의 측면에서 미혹과 깨달음의 인(因)을 삼고 이 인을 따라서 염정(染淨)의 차별적인 연(緣)을 이룬다.

여래장성이 미혹의 연을 따르면 육도범부의 번뇌염법이 일어나는데, 이는 물이 얼음을 이룸과 같고, 깨달음을 따르면 출세간 사성정법(四聖淨法)이 일어나는데, 이는 얼음이 다시 물이 된 것과 같다. 어름과 물이 외형은 다르긴 해도 그 본성은 동일한 하나의 습성이다.

때문에 여기서부터 세 경문의 문단에선 이 의미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는 우선 여래장성은 생멸의 인연을 따르면서도 변치않는 본체를 나타냈다. 왜냐하면 여래장성이 미혹과 깨달음이라는 두 인연을 따르면서 염정 두 모습을 나타내긴 하나 여래장심 자체는 그 어떤 인연의 모습에도 변치 않기 때문이다. 이는 습성이 물과 어름의 형태를 따르나 젖는 성질 자체는 변치않음과도 같다.

▣ 二約雙照以顯圓

卽如來藏元明心妙. 卽心卽空. 卽地卽水卽風卽火. 卽眼卽耳鼻舌身意. 卽色卽聲香味觸法. 卽眼識界如是乃至卽意識界. 卽明無明明無明盡如是乃至卽老卽死卽老死盡. 卽苦卽集卽滅卽道. 卽地卽得. 卽檀那卽尸羅卽毗梨耶卽?提卽禪那卽般剌若卽波羅蜜多. 如是乃至卽??阿竭卽阿羅訶三耶三苦. 卽大涅槃. 卽常卽樂卽我卽淨. 以是俱卽世出世故.

▣ 2. 쌍으로 긍정하는 편에서 원만함을 나타내다.


여래장심은 원래 스스로 밝고 원래 스스로 오묘하여, 마음에 상즉하고 공에 상즉하였으며, 지대에 상즉하고 수대에 상즉하였으며, 풍대에 상즉하고 화대에 상즉하였다.

안근에 상즉하고 이ㆍ비ㆍ설ㆍ신ㆍ의근까지 상즉하였으며, 색에 상즉하고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상즉하였으며, 안식계에 상즉하고 이와 같이 내지는 의식계까지 상즉하였다. 명과 무명ㆍ명과 무명이 다함까지도 상즉하고 이와 같이 내지는 노에 상즉하고 사에 상즉하였으며, 노ㆍ사가 다하는 데까지 상즉하였다.

고제에 상즉하고 집제에 상즉하고 멸제에 상즉하고 도제까지 상즉하였으며, 주관적으로 공한 지혜에 상즉하고 그 지혜로 객관의 공한 이치를 얻는 데까지도 상즉하였으며, 보시에 상즉하고 지계에 상즉하고 인욕에 상즉하고 정진에 상즉하고 선정에 상즉하고 반야에 상즉하고 바라밀다까지도 상즉하였다.

이와 같이 내지는 여래?응공?정변지에 상즉하고 대열반에 상즉하고 상에 상즉하고 락에 상즉하고 아에 상즉하고 정에까지 상즉하였다. 이처럼 세간ㆍ출세간법에 동시에 상즉하였기 때문에 불공여래장성이라고 한다.

[要義] 여기에서는 여래장성은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생멸의 인연을 따르는 묘용을 나타냈다.

여래장 자체는 비록 변치 않으나 묘용은 생멸의 인연을 따른다. 그러므로 중생의 마음을 따라 그들이 아는 범주만큼 호응하면서 업을 따라 현실로 발현한다.

그 때문에 세간ㆍ출세간 일체제법이 그 현상 차별상을 관찰하면 원래 망상의 모습이나 그 본성을 관찰하면 본래 진실한 여래장성이다.

그러므로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바로 여래장심이라는 점이다. 여래장성은 원래 스스로 밝고 미혹과 깨달음이 없이 본래 스스로 오묘하여, 번뇌의 모습도 아니며, 그렇다고 청정의 모습에 소속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세간의 칠대삼과(七大三科)의 법에 상즉하여 그 자리가 바로 출세간 연각ㆍ성문ㆍ보살법이며 그 즉시 바로 출세간 상상(上上)의 불과위(佛果位) 가운데 나타나는 삼호사덕법(三?四德法)이다.

이처럼 세법에 상즉하고 출세법에 상즉하고 출세상상법에 상즉하여 이 셋이 동시에 하나의 상즉 관계이다. 이를 두고 불공여래장이라고 한다.

[要義] 여기서는 여래장은 여실하게 공적하지 않은 의미를 밝혔다.

▣ 三約同時以顯妙
卽如來藏妙明心元. 離卽離非. 是卽非卽

▣ 3. 공ㆍ불공이 동시적인 편에서 오묘함을 나타내다.


여래장묘명심원(如來藏妙明心元)은 상즉 관계를 떠났고, 상즉 아닌 관계도 떠났으며, 상즉한 자리에서 상즉이 아니다.

[要義] 여기에서는 여래장성 전체와 대용을 원만하게 나타냈다. 여래장성은 생멸의 인연을 따르나 자체는 변치 않고, 자체는 변치 않은 상태에서 생멸의 인연을 따른다. 이처럼 자체와 그 작용이 둘이 아니고 고요와 관조[寂照]가 서로 융합하는 의미이다.

여래장성은 이미 일체 사물에 있지 않지만 또 일체사물과 상즉 관계를 이룬다. 내지는 상즉과 상즉 아닌 이 둘을 동시에 떠났다. 그러므로 상즉과 상즉 아님이 동시에 쌍으로 끊긴다.

이 때문에 여래장성은 묘명진심(妙明眞心)인 본원자리가 될 수 있다.

여래장은 상즉에 소속하질 않고, 또 상즉 아님에도 소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즉도 떠났고, 상즉 아님도 떠났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긍정과 부정이 원융하게 쌍으로 고요하기 때문이다.

상즉을 떠나지도 않았고, 또 상즉 아님을 떠나지도 않았으므로 “상즉이면서 바로 상즉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긍정과 부정을 원융하게 쌍으로 관조하는 의미 때문이다.

이처럼 쌍으로 고요하고 쌍으로 관조하기 때문에 긍정과 부정이 동시이면서 동시에 단절한 공불공여래장이라고 한다. 이는 여실하게 공한 자리에서 여실하게 공이 아닌 의미를 밝힌 것이다.

가령 단순하게 일체법이 상즉하지 않은 부정적인 측면만을 밝힌다면 공에만 치우치게 되고, 반대로 일체법에 상즉한 측면에서만 여래장을 밝힌다면 다시 유에 밝히게 된다.

또 상즉도 떠났고 상즉 아님도 떠난 측면에서만 여래장을 밝힌다면 유무이변(有無二邊)을 버리고 중도에 밝히게 되고, 다시 유무이변에 밝히게 한다.

모름지기 알아야 할 점은 전체가 부정되는 데서 동시에 긍정으로서 상즉이며, 전체가 상즉인 데서 상즉을 떠난 부정의 논리라는 점이다.

이는 떠났으되 떠난 것이 아니고, 떠나지 않았으나 떠났다는 논리다. 이거야 말로 양쪽을 절단하고 그 중간 마져 성립하지 않는다 하겠다. 이는 말을 떠나고 상대성이 단절한 원융미묘한 진심 자리이다.

이는 앞에서 말했던 상주진심성정명체(常住眞心性淨明體)에 해당하며, 이것이 “대불정수능엄왕”의 자체이면서 그 작용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선정이 삼지삼관(三止三觀)을 통섭하고, 사마타를 모두 해괄하여 일법계대총상법문(一法界大總相法門)이 된다.

이 선정은 자성진여에 본래 갖춘 삼매이므로 그 원만함을 묘(妙)라고 말하였다.

이 경전의 제목을 “대불정(大佛頂)”이라 한 것도 이를 가리킨 것이며,

“여래밀인수증(如來密因修證)”도 이를 증득함 이며, “제보살만행수(諸菩薩萬行修)”도 이를 닦음이며, 일체중생의 미혹도 이를 미혹함이며, 제3권에서 말한 신심을 일으킨다 함도 이를 확신함이며, 이 이후로 열고 이해함도 이를 이해함이며, 아난이 미혹함도 이를 미혹한 것이며, 부루나가 의심한 것도 이를 의심함이며, 여래의 나타냄도 이를 나타낸 것이며, 제6권 중반에서 “천왕화옥(天王華屋)”도 이를 비유함이며, 관음의 “이근원통(耳根圓通)”에서 정수행(正修行)과 조수행(助修行)을 밝힘도 이를 밝힘이며, 십류중생이 망상을 전환하여 성위(聖位)를 증득함도 이를 증득함이다.

이상 세 단원의 문장에서 처음 “본묘원심(本妙圓心)”은 자체를 말함이고, 그 다음 “원명심묘(圓明心妙)”는 그 작용을 말하였고, 여기에서 “묘명심원(妙明心元)은 체용을 합해서 말했다.

▣ 四結示離言

如何世間三有衆生及出世間聲聞緣覺以所知心測度如來無上菩提. 用世語言入佛知見. 譬如琴瑟??琵琶雖有妙音. 若無妙指終不能發. 汝與衆生亦復如是. 寶覺眞心各各圓滿. 如我按指海印發光. 汝暫擧心塵勞先起. 由不勤求無上覺道. 愛念小乘得少爲足

▣ 4. 결론짓고 말을 떠났음을 보이다.


여래장심은 분별심과 언어의 길이 단절하였고 미묘하여 의식으로 사고하거나 어어로 의론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세간의 욕계ㆍ색계ㆍ무색계 삼유(三有) 중생들과 출세간의 성문ㆍ연각 이승소성(二乘小聖)들은 각자 자기가 아는 만큼 경계와 그것을 아는 마음만으로 여래가 스스로 직접 증득한 무상보리의 마음과 증득한 경계를 헤아리려고 하는가.

하물며 분별식심로 세간 언어를 사용하며 “산하대지가 홀연히 일어남”과 “사대는 서로 용납하는가, 능탈하는가”의 문제를 질문하느냐.

이같은 허망한 견해를 고집하면서 부처님의 지견(佛知見)을 깨달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어찌 오류가 아니랴.

너희들의 몸은 비유하면 비파?피리의 악기와 같고, 너희들의 마음은 악기에 들어있는 음률과도 같다. 비록 그 음률이 있다 해도 악기를 켜는 솜씨가 없다면 끝내 그 소리는 일어나지 않음과 같다.

이는 여래장성을 갖추고 있다 해도 수능엄삼매가 없다면 끝내 깨닫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오묘한 선정이 없다면 너의 오묘한 마음을 끝내 깨달을 순 없다.

그 때문에 너희들과 일체중생들은 모두가 그 마음을 비유하면 그들 악기에 들어 있는 음률과 같다고 말한다.

이처럼 보각진심은 사람마다 본래 갖추고 원만하게 성취하여 전혀 부족함이 없으나 그러나 능엄삼매가 없으면 끝내 깨닫지를 못한다. 참으로 애석하고 담담한 일이다.

나는 이같은 오묘한 삼매를 증득하며 여래장심을 깨달았기 때문에 손가락을 한번 누루기만 하면 바로 해인삼매가 되어 대광명만 일어난다. 그러나 너희들은 오묘한 선정이 없으므로 너희들의 진실한 마음은 미혹하였다. 그러므로 잠시라도 마음이 움직였다 하면 번뇌진로가 바로 일어나 서로가 능탈하고 장애함을 이룬다. 이것은 악기를 타는 오묘한 솜씨가 없기 때문에 오묘한 음률이 일어나지 않듯 오묘한 삼매가 없으므로 오묘한 마음을 깨닫지 못한다.

너희들이 마음을 갖추고 있다곤 하나 전체와 그 대용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근기가 미약하고 의지가 나약하여 무상각도(無上覺道)를 부지런히 구하려 하질 않고, 단지 소승 유여열반(有餘涅槃)만을 탐애하여, 불법 가운데 약간의 분야를 얻고 바로 자족하기 때문이다.

[要義] 여기서는 법과 비유로써 모든 미혹한 중생을 책망하여 진실하게 수행하라고 경책하였다.

여래장성은 하나의 자체에 세가지 이름이 있다 하였다. 이는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이다. 수평도 아니고 수직도 아닌 것이 범천왕(梵天王)의 눈이 함께도 아니나 따로도 아니어서 ?의 형상을 닮음과 같다. 분별심과 언어의 길이 단절하고 미묘난사하기만 한 이것을 여래장심이라고 한다.

이상은 공불공여래장을 열어서 중도관체(中道觀體)를 삼았다. 첫 권부터서 여기까지 차례로 삼종여래장성을 열어 그것을 삼관(三觀)의 자체를 삼았다.

◆ 二示一心以顯頓悟頓得

富樓那言. 我與如來寶覺圓明眞妙淨心無二圓滿. 而我昔遭無始妄想久在輪?今得聖乘猶未究竟. 世尊諸妄一切圓滅獨妙眞常. 敢問如來一切衆生何因有妄. 自蔽妙明受此淪溺. 佛告富樓那. 汝雖除疑餘惑未盡. 吾以世間現前諸事今復問汝. 汝豈不聞室羅城中演若達多忽於晨朝以鏡照面. 愛鏡中頭眉目可見. 瞋責已頭不見面目. 以爲?魅無狀狂走. 於意云何. 此人何因無故狂走. 富樓那言. 是人心狂更無他故. 佛言. 妙覺明圓本圓明妙. 旣稱爲妄云何有因. 若有所因云何名妄. 自諸妄想展轉相因. 從迷積迷以歷塵劫. 雖佛發明猶不能返. 如是迷因因迷自有. 識迷無因妄無所依. 尙無有生欲何爲滅. 得菩提者如寤時人說夢中事. 心縱精明. 欲何因緣取夢中物. 況復無因本無所有. 如彼城中演若達多. 豈有因緣自怖頭走. 忽然狂歇頭非外得. 縱未歇狂亦何遺失. 富樓那. 妄性如是因何爲在. 汝但不隨分別世間業果衆生三種相續. 三緣斷故三因不生. 則汝心中演若達多狂性自歇. 歇卽菩提勝淨明心本周法界. 不從人得. 何籍?勞肯?修證. 譬如有人於自衣中繫如意珠. 不自覺知. 窮露他方. 乞食馳走. 雖實貧窮. 珠不曾失. 忽有智者指示其珠. 所願從心. 致大饒富. 方悟神珠非從外得

◆ 2. 일심을 보임으로써 단박 깨우치고 단박 얻음을 나타내다.


부루나 말하였다.

“저는 여래와 똑 같이 보각진심이 각각 원만하고 밝아 진실하고, 오묘하고, 청정한 마음에 두 모습 없이 원만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날부터 시작 없이 망상이 일어나 보작진심을 미혹함 때문에 오랫동안 간단없이 상속하는 윤회 속에 있었습니다.

지금 성스러운 법을 얻었다 해도 아직 최후의 경지까지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모든 망상이 일체다 소멸하여 오묘한 진여상주의 이치를 홀로 증득하였습니다. 감히 여래께 묻사옵니다. 일체 중생은 무엇으로 인해 망상이 일어나 오묘하게 밝은 마음을 스스로 가리우고 생사에 침몰하게 되었을 까요. [부루나는 앞을 이어서 다시 망상의 인연을 묻고 있는 이유는 망상을 소멸하여 진심을 구하고자 함 때문이다]

부처님은 부루나에게 고하셨다.

너는 비록 “차별상을 관찰하면 원래 허망한 보습이여서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 없다”는 말과 그러나 “본성을 관찰하면 원래 진실이여서 오직 오묘한 각명일 뿐이다”한 말을 듣고 만법이 일어나고 상속하는 데 대한 미혹과 지수화풍사대가 서로를 용납하는 데 따른 의심을 제거하긴 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의혹을 다 제거하지 못함 때문에 무명은 그 원인이 없음까지는 통달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 원인을 애써 찾아서 제거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알아야 할 것은 망상은 본래 원인이 없고, 역시 소멸할 것까지도 없다는 점이다.

네가 이 문제가 명료하질 않다면 나는 목전의 일로써 지금 다시 너에게 묻겠다. 네가 시험삼아 이 문제를 논변해 본다면 스스로 분명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왜 듣지도 못했더냐. 실라벌성에 연야달다라는 사람이 있었다. 오는 이른 새벽 어두울 때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고 자기의 얼굴의 사랑스런 얼굴이 보이질 않자 공포심을 일으키곤 그것을 귀신이라 여기고 아무 까닭없이 미친 듯이 도망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의 머리는 현재 그대로 있었는데 머리가 없다고 자책했겠느냐. 아니면 본게 귀신이 아니었는데 귀신이다고 말했겠느냐. 이는 무엇이 그 원인이며, 무엇을 근거해서 일어났겠느냐. 무엇 때문에 까닭 없이 미친 듯이 도망갔겠느냐.

부루나는 말하였다.

“이 사람은 마음이 전도되고 미쳤을 뿐입니다. 그 때문에 도망을 갔을지언정 다시 무슨 다른 원인이 있었겠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이 묘각원명한 마음은 부처와 중생이 동일하게 갖추고 있다. 그 자체는 본래 원만하고 그 작용도 본래 밝고 오묘하며, 청정본연하여 진심과 망심의 차별상이 본래 없다.

이미 허망한 망상이라고 지목했다면 어떻게 거기서 실제의 원인을 찾겠으며, 정말로 그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실인데 어떻게 허망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 원인을 추구한다면 원래 자기의 마음이며, 여기에서 모든 망상이 일어나 일어날수록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어 애초에 실체란 없었다. 살펴본다면 단지 최초일념이 혼미하여 미혹에서 다시 미혹이 쌓이면서 미진수 겁을 지난다. 때문에 망상습기가 깊게 쌓여 비록 부처님의 갖가지 말씀을 듣는다 해도 여전히 미혹 속에서 스스로를 돌이키지 못하고 거듭 망상의 실제 원인을 따로 찾고 있다.

그래서야 이같은 미혹의 원인은 자기 원래 마음을 미혹함임을 어떻게 알겠느냐.

이는 흡사 실제하는 원인이 있는 듯하지만 사실 본래 공적하다. 단지 미혹을 일으키는 원인이 본래 없음을 명료하게 체득한다면 너의 망상은 의지할 대상이 없으리라.

이를 따라서 알 수 있는 것은 무명망상을 일으키는 실제하는 원인은 따로의 모습으로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무엇을 두고 그 근본무명에서 파생되는 망상이라 하여 소멸할 수 있겠느냐.

때문에 보리를 증득한 자는 단지 망상의 근본은 원인이 없다는 점을 깨닫지 않은 자가 없다. 어떻게
원인 없는 원인을 사람들에게 실제하는 따로의 모습으로 보여 줄 수 있겠느냐.

잠에서 깬 사람이 꿈속의 일을 이야기 하는데 마음은 멀쩡하나 어떻게 꿈속에서 있었던 물건을 들어내어 상대에게 보여 줄 수 있겠느냐. 이는 이와도 같다.

그러나 꿈속에서 보았던 물건은 은은히 생각이 나면서 흡사 가질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갖질 못한다.

하물며 망상은 본래 원인 자체가 없고 원래 있지도 않은데, 그 원인을 말하려 한들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

원인 없는 망상은 실라벌성의 연야달다가 미친 것과 흡사하다. 그는 스스로 머리가 없다고 공포심을 일으키고 도망하였는데 거기에 무슨 원인이 있었겠느냐.

이는 다른 사람이 그에게 미치듯이 도망가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역시 그의 머리 속에 미친 마음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미친 마음만 그친다면 없던 머리를 외부에서 새삼 얻지 않았음을 알 것이며, 미친 마음이 쉬지 않는다 해도 역시 그의 머리는 여전히 원래 모습 그대로 있을 뿐이다. 무슨 일어버린 일이 있었으랴.

부루나야. 너의 망상과 연야달다의 미친 마음도 역시 이와 같아 본래 그 원인이 없다. 어떻게 망상의 실제 모습을 허망하게 찾아서 소멸시킬 처소가 따로 있겠느냐.

네가 망상의 원인을 찾는 이유는 진심을 구하려 함 때문인데, 그것은 단지 분별심을 쉬면 될 뿐, 다른 방법이 없다. 세간 업과와 중생들의 세 종류 상속함이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실제가 아닌 허망으로 있는 듯한 것처럼 망상의 실제 모습을 추구하면 이도 역시 따로의 원인이란 없다. 이를 알았다면 자연히 세계와 중생과 업과, 이 셋을 따르면서 그에 대한 분별을 일으키지 않게 되리라.

마음이 한번 쉬면 삼종상속으로 일어나는 인연이 이로부터 단박 끊기며, 삼종상속은 이로부터 그 원인이 없게 된다. 이것을 두고 네 마음 가운데 연야달다의 미친 성품이 스스로 쉼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이같이 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여래장보리진심이다.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자성은 본래 스스로 수승하고, 본래 스스로 청정하며, 본래 스스로 광명이며, 청정본연하고, 법계에 두루 보편함을 알리라.

이는 원래 스스로 있었던 진실한 마음이지, 다른 데서 빌려 온 것이 아니다.

이를 관찰해 본다면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인위적인 수행을 하여 증오하려 하겠느냐.

어떤 사람은 자기 옷 속에 여의주가 있는데도 스스로 혼미하여 모르고 타향에서 곤궁하게 걸식하느라 분주하였다.

그는 공궁하여 정말 빈궁한 것이 현실이긴 하였으나 여의주만은 아직 잃지 않았다. 홀연히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 그의 옷 속에 여의주가 있음을 알고 평생 소원이 모두 이루어져 크게 부자가 되었다. 그는 여기에 이르러서야 그 신령한 여의주는 자기의 옷 속에 원래 있었던 물건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도 역시 이와 같다.

이처럼 자기 집안의 보배는 본래 있었던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얻은게 아니다. [망상의 원인은 본래 없을 뿐만 아니라 깨달음 또한 망상을 떠나 따로 있지 않았음을 알겠다.]

[要義] 앞에서 이미 삼종여래장성을 열어 삼관의 자체를 삼긴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인위적인 수행과 증오에 소속하여 깨달음의 점차가 없질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부루나는 어떤 원인 때문에 망상이 있게 되었는가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망상은 원래 일어난 원인이 없음을 분명하게 밝혀 단박에 깨닫고 단막에 증득함을 나타내야만 천연묘성은 본래 스스로 원만이 성취되어 인위적으로 성취되지 않았음을 알게 하였다.

부루나의 “어떤 인연 때문에 망상이 있게 되었는가”란 이 질문은 문제의 핵심을 가장 철저하게 근원까지 꿰뚫었다고 할 수 있다. 수행하는 사람이 이 구절을 가지고 부지런히 참구한다면 교리 가운데 조사의 의미가 없다고 말하진 못할 것이다.

이상은 삼연(三緣)은 살생?도둑질?음행이며, 삼인(三因)은 발업윤생(發業潤生) 두 종류의 무명이다. 일심여래장성의 이치를 곧바로 지적하며 담박에 증득하는 이치를 나타내기를 끝냈다.

◆ 三示眞妄雙絶以顯妙分二

▣ 初當機執迷猶疑因緣自然


卽時阿難在大衆中頂禮佛足起立白佛. 世尊現說殺盜?業. 三緣斷故三因不生. 心中達多狂性自歇. 歇卽菩提不從人得. 斯則因緣皎然明白. 云何如來頓棄因緣. 我從因緣心得開悟. 世尊此義何獨我等年少有學聲聞. 其此曾中大目?連及舍利弗須菩提等. 從老梵志聞佛因緣. 發心開悟得成無漏. 今說菩提不從因緣. 則王舍城拘舍梨等所說自然成第一義. 惟垂大悲開發迷悶


◆ 3. 진망이 쌍으로 단절함을 나타내어 그 오묘함을 둘로 나타내다.

▣ 1. 아난이 미혹에 집착하여 인연과 자연을 의심하다.


즉시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일어나 부처님께 고하였다.

“여래께선 저희들에겐 인연을 주도로 배격하시더니 무엇 때문에 부루나에겐 다시 인연을 말씀하십니까. 앞에서는 인연 때문에 세계가 상속하고 인연 때문에 중생이 상속하고 인연 때문에 업과가 상속한다. 그러나 그 인연을 추구하면 본각에서 일으킨 망상이 허공이 되고 어둠이 되어 이 둘이 서로 의존관계로 요동쳐 그것이 세계가 일어난 인연이고 본각에서 일으킨 망상의 허물이 중생인연이 되고 살생?도적질?음행을 탐하는 것이 업과의 인연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 말씀하시길 너는 단지 마음을 쉬어 분별심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계ㆍ중생ㆍ업과. 이들 삼종상속이 일어난 연(緣)이 단박 끊기고 살생ㆍ도적질ㆍ음행 등이 셋의 업인(業因)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셨고 이 때문에 마음이 쉬면 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미친 마음을 쉬기만 하면 보리가 나타난다 하셨습니다. 이 같다면 인연을 말씀하심이 분명한데, 무엇 때문에 여래께선 인연을 말씀하시고 나더니 다시 그것을 단박 버리라고 하시는지요.

그리고 저희들은 이 인연을 따라서 마음이 열렸습니다.

저희들 연소한 유학(有學)만이 인연의 의미를 의지하여 도를 깨달았겠습니까.

이 법회 가운데 대목건련ㆍ사리불ㆍ수보리 등도 최초엔 늙은 바라문을 따라서 외도를 닦다가 도중에 부처님 제자인 파리 등을 만나 그에게 생멸사제인연(生滅四諦因緣)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고, 그 뒤에 부처님을 뵙고서 성스러운 무루의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미친 성품이 쉬면 바로 보리여서 이는 인연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왕사성에 있는 외도인 구사리 등이 말하는 일부터 수행하지 않아도 팔만겁 뒤엔 자연히 제일의제를 성취할 수 있다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여래이시여. 이 문제는 인연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자연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를 저희들이 알지 못하고 답답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래께선 대자비를 베푸사 미혹하여 답답함을 열어주소서.

[要義] 여기서 아난은 세 번의 부처님 말씀을 듣고 인연에 집착하였다. 최초엔 견정(見精)이 인연에 속함을 집착하였고, 두 번째는 만법이 인연에 속하는 데에 집착하였다.

즉 아난은 여래장성은 수행을 빌리지 않고 단박 증득한다는 말씀을 듣고 나서 인연에 대한 의심에 이어 자연까지 질문한 것이다. 여기서는 불생이 인위적인 수행을 의지하지 않음을 자연이라고 했으며 앞에서의 망견분별의 자연을 말한 것은 아니다.

▣ 二世尊曲借旁通卽事以顯眞心絶待分六
▲ 初總顯迷悟俱非
佛告阿難. 卽如城中演若達多狂性因緣若得滅除. 則不狂性自然而出. 因緣自然理窮於是


▣ 2. 세존이 자세하게 소통하여 현실에 나아가서 진심은 절대임을 여섯 분야로 나타내다.

▲ 1. 미오가 모두 아님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실라벌성 가운데 연야달다의 미친 인연이 제거되면 미치지 않은 성품이 자연이 드러난다. 때문에 너는 이를 집착하여 인연에 소속하지 않으면 바로 자연에 소속한다고 했다. 이 두 갈래 이치가 여기에서 다한다. 그러나 너는 이 문제는 끝까지 다 그렇지 않는 점은 전혀 몰랐구나.

연야달다의 머리가 본래 자연이라면 미쳤다거나 미치지 않았거나 자연 아님이 없다. 무슨 인연으로 거울에 비춰보고서야 비로서 머리가 없다고 공포심을 일으키고 미친 듯이 도망했겠느냐.

이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으므로 머리는 자연 아님이 분명해 진다.

▲ 二顯眞妄雙絶分二
◈ 初例眞絶分二
《初絶自然

阿難. 演若達多頭本自然. 本自其然無然非自. 何因緣故怖頭狂走


▲ 2. 진망이 쌍으로 단절하였음을 두 분야로 나타내다.

◈ 1. 예를 들어 인연과 자연이 진심엔 쌍으로 단절하였음을 두 분야로 보이다.
《 1. 진심엔 자연이 단절하였음을 보이다.

아난아. 연야달다의 머리가 본래 자연으로 있었다면 본래 항상 자연의 상태이므로 미치거나 미치지 않거나 자연 아님이 없어야만 한다. 어찌 거울에 비춘 인연 때문에 비로소 공포심을 일으키고 미친 듯이 도망가겠느냐.

《次絶因緣
若自然頭因緣故狂. 何不自然因緣故失. 本頭不失狂怖妄出. 曾無變易何籍因緣

《 2. 인연이 단절하였음을 보이다.


머리는 자연으로 있었는데 거울에 비춘 인연 때문에 머리가 없는 것에 홀연히 놀라 미친 듯이 도망을 했다면 그 인연은 실제가 아니다. 인연이 실제로 있다면 어떻게 자연으로 본래 있는 머리가 거울에 비춘 인연 때문에 정말로 잃을 일이 있겠느냐.

이미 비쳤을 때도 본래의 머리는 잃지 않았었는데 단지 공포와 미친 마음이 허망으로 나왔다면 원래 득실이 없는데 어떻게 거울 비추는 인연을 의지해서 잃고 얻음이 나왔으랴.

[要義] 미쳤을 때도 머리는 원래 잃지 않았고 미친 마음이 쉴 때도 머리는 새삼 있지를 않았다. 미친 마음이 일어나고 쉬는 데 상관없이 득실이 없었다. 어떻게 그 머리가 거울에 비춘 인연 때문에 있다가 없어졌겠는가.
◈ 二例妄絶分二

《初絶自然

本狂自然有狂怖未狂之際狂何所潛


◈2. 예를 들어 허망이 단절하였음을 둘로 보이다.

《 1. 자연이 단절하였음을 보이다.

미친 마음이 본래 자연으로 있다면 공포스럽고 미친 마음은 항상 본래 있어야만 하는데도 아직 미치지 않았을 즈음엔 그 미친 마음이 어느 곳에 잠복해 있더냐.

[要義] 이미 미친 마음이 처소가 없다면 미친 마음은 자연은 아님이 분명하다.

《次絶因緣
不狂自然. 頭本無妄何爲狂走

《 2. 인연이 단절하다.


미치지 않은 마음이 자연에서 나왔다면 그 머리는 원래 허망과 공포심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공포심을 일으키고 미친 듯이 도망을 갔겠느냐.

[要義] 미치지 않은 마음이 자연에서 나왔다면 머리는 본래 잃은 일이 없이 항상 미친 마음과 허망은 없어야 만 한다. 무엇 때문에 머리가 없다고 공포심을 일으켜 도망을 갔겠는가.

여기에 반드시 인연이 있다면 미치지 않은 마음까지도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알 수 있는 것은 머리만 인연과 자연에 소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친 마음까지도 인연과 자연에 소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묘각과 무명이 동시에 인연과 자연에 소속하질 않음을 알 수 있다.

▲ 三結妙絶言思
若悟本頭識知狂走. 因緣自然俱爲?論

▲ 3. 언어와 사고가 오묘하게 단절하였다고 결론짓다.


가령 본래의 머리는 자연도 아니고 인연도 아님을 깨달아 미친 마음까지도 인연도 자연도 아님을 안다면 네가 집착한 인연과 자연은 동시에 희론일 뿐 모두가 실제의 의미는 없으리라.

▲ 四遺妄緣
是故我言三緣斷故卽菩提心. 菩提心生生滅心滅. 此但生滅

▲ 4. 망상의 인연을 버리다.

자연과 인연이 동시에 희론이기 때문에 나는 말한다. 세 종류의 분별하는 인연이 단절하면 바로 보리심이라고. 그러나 이와 같다 해도 보리심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보리심이 일어나고 생멸심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이것도 역시 생멸심일 뿐 진정한 보리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 五觀智雙泯

滅生俱盡. 無功用道若有自然. 如是則明自然心生生滅心滅. 此亦生滅無生滅者名爲自然. 猶如世間諸相雜和成一體者名和合性. 非和合者稱本然性. 本然非然. 和合非合. 合然俱離

▲ 5. 관지(觀智)가 쌍으로 단절하다.


생멸심이 다할 뿐만 아니라 생멸심을 소멸했다는 마음까지도 동시에 소멸하여 제8지(第八地)에 이르면 장식(藏識)의 이름을 버리고 인위적인 수행없이 분별없는 마음으로 깨달음의 세계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나 역시 인위적인 조작없는 자연이 진심이라고 집착해선 안된다. 왜냐하면 자연이라는 마음이 일어나고 생멸심이 사라진다면 그 자연까지도 역시 또 하나의 생멸심일 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제일의제(第一義諦)로서 생멸이 없는 자리를 자연이라고 한다면 이는 세간 생멸하는 인연이라는 명칭을 대비해서 수립한 것이므로 진정한 무생무멸의 이치는 아니기 때문에 세간 사물은 모든 물건이 서로 뒤섞여 하나의 자체를 이루면 그것을 인연화합성이라한다. 그리곤 이와는 상반된 화합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여 본래 천연한 성질이라 한다. 이는 자연과 인연이 똑같이 상대적 의존관계를 이룬다. 이는 동시에 희론일 뿐 진실한 의미는 아니다.

본래 그러함과 본래 그러하지 않음과 화합과 화합 아닌, 즉 화합과 자연, 이 둘을 동시에 멀리 떠나야만 한다.

▲ 六泯同果海
離合俱非. 此句方名無戱

▲ 6. 단절하면 깨달음의 과보와 동일하다.


화합과 화합 아님을 쌍으로 단절함과 화합에 상즉하여 바로 자연임을 쌍으로 관조하는 것까지도 동시에 부정되어야만 한다.

이 같은 구절을 정구(正句), 또는 活句)하고 하며 진실하여 희론이 없는 법이라 할 수 있다.

[要義] “이(離)”는 화합과 자연을 쌍으로 부정하는 의미이며, “합(合)”은 화합과 자연을 쌍으로 긍정하는 의미이다. “동시에 부정된다 구비(俱非)”함은 긍정에서 바로 부정이고 부정에서 즉시 긍정을 밝힌 의미이다. 그 때문에 부정이 부정이 아니고 긍정이 긍정이 아니다.

◆ 四結責勤修以發行
菩提涅槃尙在遙遠. 非汝歷劫辛勤修證. 雖復憶持十方如來十二部經淸淨妙理如恒河沙祇益戱論. 汝雖談說因緣自然決定明了. 人間稱汝多聞第一. 以此積劫多聞熏習不能免離摩登伽難. 何須待我佛頂神呪摩登伽心?火頓歇得阿那含. 於我法中成精進林. 愛河乾枯令汝解脫. 是故阿難. 汝雖歷劫憶持如來秘密妙嚴. 不如一日修無漏業遠離世間憎愛二苦. 如摩登伽宿爲?女. 由神呪力銷其愛欲. 法中今名性比丘尼. 與羅?母耶輪陀羅同悟宿因. 知歷世因貧愛爲苦. 一念熏修無漏善故或得出纏. 或蒙授記. 如何自欺尙留觀聽

◆ 4. 결론을 짓고 발심 수행하라고 전하다.


긍정과 부정, 이 둘의 집착을 모두 떠나지 않는다면 보리열반의 과각(果覺)과는 오히려 요원하기만 하여, 네가 역겁토록 애써 정진하느라 고생한다 끝내 수행증득하지 못하리라.

나의 설법을 기억하는 것만 그러할 뿐 아니라, 다시 시방여래 십이부경(十二部經)의 청정하고 오묘한 이치를 항하사만큼 많이 기억한다 해도 진실하게 수행하지 않는다면 단지 희론을 더할 뿐, 끝내 실제적 효과라곤 없다.

네가 인연을 말하고 자연을 말하는 데 이르러선 이사(理事)에 결정코 명료하여 털끝만큼도 착오가 없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너를 나의 제자 가운데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말한다.

다문을 적겁토록 훈습하긴 하였으나 마등가의 난을 면하지는 못하였다. 알 수 있는 것은 진실한 수행이 없이 한갓 많이 듣기만 한다면 아무런 공덕이 없다는 점이 분명해 진다.

가령 듣기만 하고도 공덕이 있다면 마등가의 사술에 걸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내가 “대불정비밀신주”를 설함을 의지하고서야 마등가의 마음에 음욕의 불길이 쉬고 사술이 정도로 되돌아와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증득하고 나의 불법 가운데서 정진하는 대중이 되었겠느냐.

그것은 음욕의 마음이 마르고 애욕이 말랐기 때문에 생사관두에서 너를 해탈하게 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여래의 진실하게 수행하고 실제적으로 증오하는 선정 공부가 아니면 마등가의 난에서 어떻게 해탈할 수 있겠느냐. [비록 미친 마음을 쉰 곳이 보리라 해도, 즉 이치는 단박에 깨우쳤다 해도 현실에서는 점진적으로 습기를 제거해야만 한다. 본성과 수행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어느 한쪽도 폐지해선 안된다. 수행은 본성을 따라서 일어나 다시 본성을 닦음으로써 본성과 수행이 하나의 이치로 원융해야만 진실한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설사 이치적으로 크게 깨달았다 해도 이는 인지(因地)의 진심(眞心)을 밝혔을 뿐 구경성불의 과지(果地)는 아닌 것이다.]

한갓 듣기만 해선 진실한 수행이 아니므로 네가 역겁토록 시방 여래의 비밀한 문장구절을 기억하고 오묘한 이치를 정미하고 근엄하게 했다 해도 하루 동안만이라는 미친 마음을 쉬는 것만 못하다.

분별이 일어나지 않아 세 가지 인연이 단박 끊겨 세 가지 원인이 일어나지 않아야만 무루업을 진실하게 수행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만 생사진로에 누락하지 않고 세간에서 나와 다르면 증오하고 동일하면 탐애하는 두 종류 무명생을 받는 괴로움을 멀리 떠날 수 있다.

마등가는 전생부터 음녀였으나 나의 헤아릴 수 없는 신주력(神呪力) 때문에 음심과 애욕을 단멸하고 불법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이름을 성비구니(性比丘尼)라고 하여 라후라의 어머니인 야수다라와 함께 과거전생의 원인이 탐욕이 근본이 되어 현재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일념훈습으로부터 생멸사제무루선법(生滅四諦無漏善法)을 정미하게 닦아 그 때문에 혹은 제3과를 증득하여 번뇌의 속박을 벗어났고, 혹은 제4과를 증득하여 수기를 받기도 하였다.

나약한 여인들도 이 같은데 너는 어찌하여 당당한 장부로서 스스로를 기만하고 견문에 머물면서 세간의 인연과 자연이라는 희론으로써 여래의 말씀을 듣느냐.

[要義] 여기에서는 아난더러 수행하라고 권하였다.

이상은 삼종여래장성을 열어 삼관의 자체를 삼고 간절히 수행하라고 권하였다. 때문에 다음에서는 그 수행을 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