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 2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21:28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

4. 대답에서 경계를 보지 못하고 종안(宗眼)도 없는 병통
생각컨대 우선 종사라면 삿됨과 바름을 분별해야 한다. 삿된지 바른지가 가름났으면, 이제는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또, 말을 할 때는 종지를 보는 안목을 겸하여 응수하는 기봉이 각각 서로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말 속에서 사사로움이 없다고는 하나 말을 빌려 그 속에서 정확한 뜻을 분별해야 한다.
조동(曹洞)은 동시에 북치고 노래하는 것으로 작용을 설명하였고, 임제(臨濟)는 자재하게 뒤바뀌는 것으로 본체를 설명하였다. 또한 분양 선소(冷陽善韶)*는 하늘 땅을 덮고 많은 흐름을 끊었다 하였으며, 위앙(爲仰)은 둥글고 모난 것이 가만히 계합한다 하였다.
그것은 마치 골짜기가 소리에 대답하고, 관문에서 부절〔符〕이 맞듯 하여 비록 법식에는 차별이 있었으나 원융하게 회통하는 데 있어서는 막힘이 없었던 것이다.
요즈음, 종사는 바탕을 잃고 학인은 배울 곳이 없어 너다 나다 하는 생각을 기봉으로 다투고 생멸을 얻을만한 그 무엇이라고 집착한다. 그럼 중생을 지도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겠으며 삿됨을 타파하는 지혜를 얻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방〔棒〕과 할〔喝〕을 어지럽게 써대면서 덕산〔德嶠〕과 임제〔臨濟〕를 참배했다고 자칭하며, 원상(圓相)을 서로 꺼내면서 “위산(爲山) 앙산(仰山)을 심오하게 통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답에서 이미 종지를 결판내지 못했는데 작용할 때 또 어떻게 요긴한 안목을 알겠는가. 여러 소인들을 속이고 성현을 기만하여, 곁에서 구경하는 사람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권세에서 죄보를 부른다.
그러므로 일숙각(一宿覺)이 말하기를 “무간지옥의 업보를 부르지 않으려거든 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아라” 하였던 것이다.
위와 같은 무리들은 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이니 그들은 단지 스승에게 받은 것을 탈취할 뿐 자기 견해라고는 도대체 없다. 붙들 만한 근본이 없어 업식(業識)이 망망하니 정말로 가련하다. 과보를 받아내기가 어렵겠구나.

5. 이사(理事)를 둘로 보고 청탁(淸濁)을 분간하지 못하는 병통
생각컨대 일반적으로 조사와 부처의 종지는 이치〔理〕와 현상〔事〕을 동시에 갖춘다. 현상은 이치를 의지해서 성립하고 이치는 현상을 빌려 밝혀지니, 이치와 현상은 눈과 발이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다.
가령 현상만 있고 이치가 없다면 막혀서 통하지 못하고, 이치만 있고 현상이 없으면 어지럽게 퍼져 돌아갈 곳이 없다. 그것이 둘이 되지 않게 하고 싶은가. 중요한 점은 원융이다.
조동(曹洞)의 가풍에서는 편정(偏正)과 명암(明暗)을 시설하고, 임제(臨濟)는 빈주(賓主)와 채용(體用)을 세운다.
이렇게 방편을 세우는 일은 서로 다르다. 맥락은 서로 통하며 다 받아들이니 까딱했다 하면 모두 모인다.
또 법계관(法界觀)에서도 이사(理事)를 빠짐없이 논하여 자성이 색(色)이니 공(空)이니 하는 것을 끊었다. 가 없는 성품 바다를 한 털끝 받아들이고 지극히 큰 수미산을 겨자씨 하나에 간직하기 때문이다.
이는 성인의 도량으로 그렇게 되게 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법 자체가 원래 그러한 것이며, 또 신통변화로 낸 것이 아니라 본래면목〔誕生〕을 미루어 부합한 것이다.
다른 데 붙어서 구하지 않고 모두 마음에서 지어내니 부처와 중생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뜻을 모르고 허망하게 논하면 더러움과 청정함을 분간하지 못하고 잘못된 것도 가려내지 못하여 자재한 데서 편(偏), 정(正)이 막히고 본래 그러한〔自然〕 데서 체용이 뒤섞이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를 ‘한 법도 밝히지 못하여 가는 티끌이 눈을 가렸다’ 하는 것이니 자기 병도 다 끊지 못하였는데 다른 사람의 병을 어떻게 치료하겠는가.
매우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니 실로 작은 일이 아니다.

6. 수행을 거치지 않고 고금의 말씀을 억측으로 단정하는 병통
생각컨대 총림에 들어와 참구하는 납자라면 반드시 선지식을 선택해야 하며, 다음으로 도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선지식은 길을 가리켜 주는 일이 중요하고 도반은 절차 탁마 해주는 일이 소중하다.
자기 자신만 깨치려 한다면 무엇으로 후학을 열어주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드날리고 중생을 이끌어 이롭게 하는 그 의도가 어디에 있겠는가. 저 옛 스님들을 보라. 산에 오르고 바다를 건너면서 생사를 피하지 않았다. 한두 번의 기연에 실날만큼이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결택하여 분명히 하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참과 거짓의 기준이 인간, 천상의 안목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뒤에야 종지를 높이 제창하고 진실한 가풍을 널리 폈는데, 옛 논의를 인용하여 따져 물고 아직 깨닫지 못한 공안을 지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수행을 않고 고금을 억측으로 단정한다면 검술을 배우지 않고 함부로 태아(太阿)의 보검으로 칼춤을 추며, 익숙하지 않으면서 망령되게 깊은 물을 건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손을 다치고 발이 빠지는 근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잘 선택하는 자라면 물에서 우유만을 가려내는 거위왕과 같으며, 잘 선택하지 못하는 자는 신령한 거북이가 발자욱을 지우려는 격이다.* 하물며 그 사이에 맞고 안 맞는 경계와 자재한 말에 있어서랴. 살아나왔는가 싶으면 되려 죽는 데로 가고, 살았다 하면 다시 치우친 곳에 가서 붙는다. 미친 마음을 부려 그 마음으로 뜻을 헤아리게 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만 가지로 교화를 펴는 방편을 갖춘 일자법문(一字法門)의 요점에 있어서랴. 이 점을 조심하지 않고 찾아오는 자들을 상대해서야 되겠는가.

*분양 선소 3구
l. 본래 면목에는 무엇 하나 妙體 아닌 것이 없다는 뜻으로 하늘 땅을 모두 덮는다〔亟 〕 고 함.
2. 온갖 경계를 단박에 쉰다는 뜻으로 뭇 흐름을 끊는다〔 斷衆流〕고 함.
3. 기민만 보고도 알아차리는 자재한 작용을 물결대로 따라 준다〔隨波 浪〕고 함.
* 거북이가 모래 위에서 발자욱을 지우려 할수록 점점 더 자국을 남긴다는 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