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般若心經)·성법스님

반야심경 / 저자의 말

通達無我法者 2007. 12. 14. 10:34

고양시 용화사 성법스님

http://www.sejon.or.kr

저자의 말

 

철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
'너 자신을 알라’
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해하였다고 해서, 그의 사상까지 다 파악한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난해한 철학을 공부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려운 문제입니다 .
어쩌면 단지 ‘이해’
라는 말은 불교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불교는 철학의 난해함에 신앙적 믿음과 실천까지 요구하고 있는 엄연한 종교이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고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는 것이 다섯 살 먹은 어린이가 무산소 등정으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일 만큼 어렵다거나 또는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종교적 성취가 모두 그렇기는 하지만, 불교는 자신의 의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길 뿐 아니라 선각자先覺者
로서 안내자의 역할도 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세계 최고봉을 정복하려면 정상 밑 캠프까지 함께할 노련한 조력자가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
이산 선사는 ‘다음 생에는 좋은 스승 만나고....’
라고 발원할 정도로, 불교에서는 수행의 안내자인 훌륭한 스승 만나는 것을 큰 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불교는 불교라 자칭하기는 하지만 전혀 불교적이지 않은
줄기적 ‘사상’ 과 가지적 ‘주장’
을 가지고 안내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많아 무엇을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더욱 인터넷을 통한 의사표현의 일상화로 불과 수년 전에는 예측조차 할 수 없었던 검증 안 된 안내자와 정보의 혼재 속에 파묻힐 지경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종교의 경우에는 이 양적인 팽창과 정보의 과다가 종교의 질적 수준을 높였다는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오히려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감성이 자제와 냉정, 사려 깊음을 요구 하는 종교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
또한 어느 누구도 그 영향력의 선악을 떠나 인터넷을 통한 최첨단 정보 교환이 증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변에 난무하는, 불교의 바르지 못한 해석과 자료들이 저로
하여금 ‘반야심경’
의 해설을 통해 접근 가능한 불교의 핵심들을 설명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하였고, 이것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사실 ‘반야심경’
만큼 해설서가 많은 경전도 드물 것입니다. 현재 출간된 종류가 거의 100 종에 다다를 정도입니다. 어쩌면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이미 거의 다 해설이 되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다른 경전을 압도하는, 이토록 많은 해설서는 그 자체로
‘반야심경’
이 가장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준비하면서 가능한 한 모든 ‘반야심경’
해설서를 검토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해설서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여 제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물리학, 천문학, 뇌과학, 생명과학, 심리학, 동.서양철학과 우주론 등의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도록 해석을 하였습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많은 책을 읽는 다독가多讀家
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도 때로는 독자로서 저자에 대한 불만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논문도 아닌데 거의 대부분의 단어가 전문용어로 이루어진 경우가 그것입니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주기는커녕 저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또, 나는 이 정도 경지이고 이처럼 깊이 있게 들어가 있으니, 독자들은 일단 내 말에 의문을 갖기보다 이해하려는데 주력하라는 저자의 오만함이 보일 때는 불쾌감까지 느낄 때도 있습니다.
한술 더 떠 객관성과 논리를 상실하고, 저자 개인의 성향을 독자에게 강요하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책은 저는 아주 싫어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본 해설서의 내용이 비록 함량 미달이라 해도, 저로서는 독자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만은 인정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명저名著
들 만의 장점들을 흉내냈다거나, 그 장점의 일부라고 갖고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 책에서 불교 교리 이해의 기본적인 요소인 용어의 해석에 과감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
예를 들어 ‘무아’ 無我 ‘공아’空我
대체함이 어떤가라는 유례없는 제안이 그것입니다.
또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그 가치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였습니다.
원효와 의상의 불교는 말로만 찬탄하고, 혜능 등 중국 선사禪師
의 불교에 사상적으로 지나칠 정도로 의존한다는 지적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외람되게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국불교의 비불교적 요소와 그 구체적 사례에 대해서도 제 견해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 책은 한편으로는 자상한 ‘반야심경’
해설서가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불교에 대한 지독한 비판서로 비춰질지도 모릅니다.
다만 서두에 밝혔듯이, 최고봉이 보이는 산 중턱까지는 미끄러지지 않고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에는 충실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 베이스 캠프에서 지혜의 정상인 ‘반야’般若 에 오르는 길(道)
은 이제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본 졸저에 대한 따끔한 질책 진심으로 기다리겠습니다. 한국 최고의 수행도량과 수행하는 스님들이 거의 높은 산 중턱 늘상 구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어, 아귀다툼하듯 살아가는 세간 중생의 모습이 안 보여서 그럴는지는 몰라도, 번뇌 속에서 한탄하고 진리에 목말라 하는 순박한 중생들에게 고통의
눈물을 자비로 어루만지려는, 정법正法을 갈망하는 미래의 부처인 중생에게 법法 선우善友
같은 스승이 되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안타까움이 더욱 많은 분의 질책을 기다리게 합니다.
끝으로 ‘정’ 定 만을 강조하고 ‘혜’ 慧 소홀히 하여, 그 결과 ‘혜’ 慧 속에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의 근본조차 실종되어 있는 한국불교의 오늘이기에 ‘반야심경’
의 가치에 새삼 무게감을 느낌니다.
졸저의 출간에 도움을 주신 많은 보이지 않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진정 제가 감사해야 될 분은 이 책을 선택하고 관심과 질책을 주시는 독자 여러분임이 분명합니다.

불기 2550(2006)년 3월
無說說堂에서
저자 성 법

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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