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9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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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9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3. 분별세품 ②
  [중유는] 당래 어떠한 취(趣)로 나아가고, 생기한 중유의 형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은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당래의 본유(本有)의 형상과 동일한데
  본유란 말하자면 죽는 찰나 이전에
  태어나는 찰나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다.
  此一業引故 如當本有形
  本有謂死前 居生刹那後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어떤 업이 당래(즉 미래) 나아가게 될[所趣] 취(趣)를 능히 인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업은 바로 능히 나아가는 것[能趣]인 중유도 초래한다. 따라서 이러한 중유가 그러한 '취'로 나아가게 될 때는 바로 나아가게 될 당래 본유(本有)의 형상과 같다.1)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한 마리의 개 등의 뱃속에 5취의 중유가 단박에 일
  
  
  
1) 그러나 중현에 의하면, 업에는 견인업(牽引業)과 원만업(圓滿業) 두 가지가 있는데, 중유와 생유는 동 일한 견인업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중유의 형상은 당래의 본유와 동일하다.(『현종론』 권제13, 한글대장경 200, p. 344) 즉 당래의 본유가 인간이면 중유도 역시 인간의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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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리하여 이미 지옥의 중유가 나타난 경우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어미개의 뱃속을 능히 태워버리지 않는 것인가?2)
  그들은 예컨대 잠시 '원(園)'에서 노니는 때가 있는 것처럼 지옥의 본유로 있을 때조차도 역시 항상 불에 타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중유로 있을 때에 그러할 것인가?3) 설혹 능히 [어미개의 뱃속을] 태운다고 인정할지라도, 그것(중유)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태워진다고] 감촉할 수 없으니, 중유의 몸은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 힐난한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비록 온갖 '취'의 중유가 한 뱃속에 있을지라도 서로 접촉하거나 타지 않으니, [각자의] 업에 의해 막혀 있기[遮, prtibandha 즉 繫縛] 때문이다.
  그리고 욕계에서의 중유의 수량(壽量)은 비록 오륙 세 된 어린아이와 같지만 근(根)은 명리(明利)하다. 그러나 보살의 중유는 성년일 때와 같아 형상과 수량이 두루 원만하며, 온갖 상호(相好 : 32상과 80종호)를 갖추었기 때문에, 중유로 머물면서 장차 모태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백 구지(俱, ko i : 千萬의 뜻)의 4대주(大洲) 등을 비춘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보살의 어머니는 꿈속에서 흰 코끼리가 우측 옆구리를 통해 들어오는 것을 보았던 것인가?
  보살은 오랫동안 방생의 취(趣)를 버렸기 때문에 이는 다만 길상스러운 상일 뿐 중유와 관계 있는 것은 아니니, 마치 흘률지왕(訖栗枳王)이 꿈속에서 열 가지 모습을 본 것과 같다.
  
  이를테면 큰 코끼리와 우물과 보릿가루와
  전단(栴檀)나무와 아름다운 동산과
  작은 코끼리와 두 마리의 원숭이와
  
  
  
2) 만약 중유의 형상이 당래 본유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한다면, 예컨대 어미개가 다섯 마리의 새끼를 배었 다가 어떤 사정에 의해 그것이 일시에 죽었을 경우 그 다섯 마리는 각기 업에 따라 각각의 '취'의 형상을 띤 중유가 될 것이고, 그리고 만약 그 중에 지옥취의 중유가 있다면 어미개의 뱃속을 태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난문.
3) 8대지옥에는 각각 거기에 딸린 네 곳의 부속 지옥이 있는데, 지옥에 딸린 정원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에 '원(園)'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본래의 지옥에서 받는 괴로움과는 다른 괴로움을 받기 때문에 대개 '증(增, utsada)'으로 번역되고 있다. 본론 권제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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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견의(廣堅衣)와 투쟁을 꿈에서 보았다.4)
  즉 이와 같은 꿈을 꾼 것은 다만 앞으로 닥쳐올 다른 어떤 일의 조짐을 나타내는 것일 뿐 본 것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온갖 중유는 모두 생문(生門 : 어머니의 陰門을 말함)을 통해 들어가는 것으로,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탯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쌍생아(雙生兒)는 앞의 아이가 적고 뒤의 아이가 큰 것이다.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법선현(法善現)에 의해 설해진 다음의 게송은 다시 어떻게 회통될 수 있는 것인가?6)
  흰 코끼리의 모습은 아주 단엄하여
  
  
  
4) 흘률지왕(구역은 柯枳王, K k )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시자로, 이러한 열 가지 꿈에 관한 이 야기는 『급고독장자녀득도인연경(給孤獨長者女得度因緣經)』 권하(대정장2, p. 852하)에 나온다. 다만 여기 서는 애민왕(哀愍王)이 이러한 꿈을 꾸고서 그것을 가섭불에게 고하자 이는 당래 석가불의 유법(遺法) 제자들 에 관한 조짐이라 하였다. (1) 큰 코끼리가 작은 창문으로 나오다가 몸은 빠져나왔지만 꼬리가 걸려 나오지 못한 꿈 : 석가불의 제자 중에는 출가하였음에도 세속의 애탐에 걸려 해탈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 (2) 목마른 자에게 우물이 뒤쫓아 왔음에도 물을 마시지 못한 꿈 : 정법을 듣고도 즐기지 않는 제자가 있다. (3) 한 되의 진주를 한 되의 보리와 바꾸는 꿈 : 부처님의 경론을 학습하지 않고 외전을 즐거이 익히는 제자가 있다. (4) 전단나무를 일반 나뭇조각과 바꾸는 꿈 : 부처님의 내전을 외전과 바꾸는 제자가 있다. (5) 꽃과 과실이 넘치 는 아름다운 정원이 도적들에 의해 훼손당하는 꿈 : 승단을 파괴하는 제자가 있다. (6) 작은 코끼리가 큰 코 끼리를 쫓아내는 꿈 : 지계(持戒)의 덕 있는 비구를 승단에서 쫓아내는 파계의 제자가 있다. (7) 몸에 똥칠을 한 원숭이로 인해 사람들이 도망가는 꿈 : 파계 비구가 비방하여 청정한 비구가 멀리 피하는 일이 있다. (8) 원숭이들이 한 원숭이에게 관정(灌頂)하는 꿈 : 파계 비구가 승단의 상수가 되는 일이 있다. (9) 넓고 질긴 천을 열여덟 명이 서로 당기는 꿈 : 이견(異見)을 주장하여 승단이 18부로 분열할 조짐. (10) 많은 사람이 모 여 서로 싸우고 죽는 꿈 : 부파들 사이에 서로 쟁론이 있을 조짐을 나타낸다. 이상 『구사론기』에 의함.
5) 범본과 구역에 의하면 쌍생아 즉 쌍둥이 중에서 '뒤에 태어난 자를 형이라 하고, 앞에 태어난 자를 동 생이라 한다'이다. 즉 중유가 생문을 통해 입태하였다면 쌍생아는 두 번에 걸쳐 수태된 결과일 것이고, 그럴 경우 먼저 태어나는 쪽은 뒤에 수태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동생이고, 뒤에 태어나는 쪽은 먼저 수태되었을 것 이기 때문에 형이다. 이는 당시의 상식을 반영한 논설이라 하겠다.
6) 법선현(dharma-subhuti), 구역에서는 달마수부후저(達磨須部吼底). 타라나타의 『인도불교사』에 의하 면 마명(馬鳴)의 이명(異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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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개의 어금니와 네 발을 갖추고서
  어머니 뱃속을 바로 알아 드러누웠으니
  마치 선인이 숲에 숨어드는 것과 같다.7)
  이를 반드시 회통할 필요는 없으니, 삼장(三藏)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온갖 풍송(諷誦, gatha, 즉 게송)의 말씀은 진실[實]을 넘어서기 때문이다.8) 그러나 만약 반드시 회통해야 한다면, 그는 보살의 어머니가 꿈에서 본 대로 게송을 지었을 것이므로 아무런 과실이 없을 것이다.
  색계에서의 중유의 형량(形量)은 두루 원만하니, 마치 본유에서와 같다. 또한 그곳에서의 중유는 의복과 함께 태어나는데, 참(慚)·괴(愧) 즉 내외에 대한 부끄러움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보살의 중유도 역시 의복을 구비하고 있으며, 선백(鮮白) 필추니(苾芻尼)도 [역시 그러하다]. 즉 그들은 본원력(本願力)에 의해 세세생생 저절로 의복을 구비하여 항상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때에 따라 다른 옷으로 바뀌어지기도 한다.9) 나아가 최후 반열반할 때에도 바로 이러한 의복으로써 시신을 감아서 화장하였다. 그러나 그 밖의 욕계에서의 중유는 의복을 갖지 않으니, 그들은 모두 증장(增長)의 참·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유와] 유사하다고 한 본유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사유(死有) 이전에, 생유(生有) 이후에 존재하는 온(蘊)이다. 즉 유정의 본질을 전체적으로 설하면 바로 5취온인데, 여기서는 [유정의 전후]
  
  
  
7) (白象相端嚴 具六牙四足 正知入母腹 寢如仙隱林.) 그러나 이러한 뜻으로는 앞의 난문의 논거가 될 수 없다. 앞의 난문자의 생각은 마야부인의 꿈에 보여진 코끼리가 다만 길상스러운 조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보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구역(舊譯)에서와 같이 번역해야 한다. "그의 몸을 여섯 개의 어금니와 네 발로 장식 흰 코끼리로 바꾸고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 누워 염(念)하였으니, 마치 숲 속에 깃든 선인과도 같았도다.(變身作白象 六牙四足飾 入母胎臥住 念如仙人林)"
8) 즉 법선현의 게송은 경(經)도 율(律)도 논(論)도 아닌 작자 임의대로 지어진 것(personal composition) 이라는 뜻.
9) 구역에서는 숙가라(叔柯羅, Sukr ). 즉 그녀는 승가에 가사(袈裟)를 보시하고 뛰어난 원력을 발하였기 때문이다. 이 인연설화는 『현우인연경(賢愚因緣經)』 권제4(대정장4, p. 373)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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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태의 차별을 네 가지로 분석하였으니, 첫 번째는 중유로서, 그 뜻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두 번째는 생유로서, 이를테면 온갖 취(趣)에서 결생(結生)하는 찰나의 존재[有]를 말한다. 세 번째는 본유로서, 태어나는 찰나를 제외하고서 그 이후부터 죽기 이전의 단계이다. 네 번째는 사유로서, 이를테면 [현세의] 최후찰나, 즉 중유 이전의 차례이다.
  그리고 유색의 유정은 이러한 4유를 전부 갖추고 있지만 무색의 유정 중에서는 중유를 제외한 세 가지만을 갖추고 있다.
  
  중유의 형량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제 그 밖의 다른 뜻에 대해서도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10)
  게송으로 말하겠다.
  
  [중유는] 동류(同類)와 청정한 천안에게 보이며
  
  
  
10) 본 단에서는 중유의 아홉 가지의 특징적인 면, 이를테면 안견(眼見,)·행질(行疾)·구근(具根)·무대( 無對)·불가전(不可轉)·소식(所食)·주시(住時)·결생(結生)·행상(行狀)에 대해 분별하고 있다. (1) 중유는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동류의 눈과 청정한 천안에게만 보여진다. (2) 중유는 업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기 때 문에 가장 빠른 업의 신통[業通]을 구족하고 있어 세존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취로 가는 것을 능히 막을 수 없다. (3) 일체의 중유는 본유의 형상과 같을 뿐더러 가장 승묘(勝妙)한 최초의 이숙이기 때문에 모두 5근 을 갖추고 있다. (4) 중유의 작용은 금강석 따위도 능히 차단 장애할 수 없기 때문에 무대(無對)이다. (5) 중 유는 생유와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일단 나아갈 계(界)·취(趣)가 결정되면 바꿀 수가 없다. 그 러나 『대비바사론』 권69(한글대장경120, p. 444)에서 비유자는 중유가전론(中有可轉論)을 주장하기도 한다. (6) 중유는 미세한 단식(段食)인 향을 먹고 살아간다. 즉 중유는 향(gandha)을 먹기(arva) 때문에, 혹은 찾아 가기 때문에 건달박(健達縛, gandharva,食香, 혹은 尋香)이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7) 중유는 생유를 추구 하기 때문에 오래 머무는 일이 없이 바로 결생하며, 만약 바로 생유의 연과 화합하지 못할 경우 유사한 다른 종류 중에 기생(寄生)하기도 한다. (8) 태생과 난생의 중유는 애욕이나 진에(瞋恚)를 일으켜 결생(結生)하며, 습생의 경우는 태어날 곳의 향내를 맡고 애염(愛染)하여, 화생의 경우는 멀리 떨어져 있는 생처를 관지(觀知) 애염(愛染)하여 그곳으로 가 생을 받는다. (9) 중유가 어떻게 5취로 나아가는가 하면, 천의 중유는 머리를 바 로세워 상승하여 나아가며, 인간·방생·아귀의 중유는 본유의 그것처럼 옆으로 나아가며, 지옥의 중유는 발 을 위로하고 머리를 아래로하여 거기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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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의 신통[業通]이 있어 빠르며, 근을 갖추고 있으며
  무대(無對)이며, [정해진 '취'를] 바꿀 수가 없으며
  향을 먹으며, 오래 머물지 않는다.
  同淨天眼見 業通疾具根
  無對不可轉 食香非久住
  
  또한 전도된 마음[倒心]으로 애욕의 경계로 나아가지만
  습생과 화생의 경우 향(香)과 처소에 염착(染著)하며
  천(天)의 중유는 머리를 위로하여 [올라가고], 세 가지는 옆으로 가며
  지옥은 머리를 아래로 하여 거기로 떨어진다.
  倒心趣欲境 濕化染香處
  天首上三橫 地獄頭歸下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중유의 몸은 같은 종류끼리만 서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지극히 청정한 천안을 닦아 획득한 자라면 역시 능히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태어날 적에 갖게 되는 온갖 눈[生得眼]으로는 능히 그것을 볼 수 없으니,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천취 중유의 안(眼)은 능히 5취의 중유를 모두 볼 수 있으며, 인간·아귀·방생·지옥의 중유는 각기 순서대로 네 가지와 세 가지와 두 가지와 한 가지를 보니, 이를테면 보다 위의 것을 제외한 자신과 그 아래 중유를 능히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일체의 신통 가운데 업의 신통[業通]이 가장 빠르다. 여기서 신통[通, ddhi]이란 허공을 마음대로 통과하여 가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신통이 업에 의해 획득되었기 때문에 '업의 신통' 즉 업통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통은 그 세력과 작용이 신속하기 때문에 '빠르다'고 일컬은 것이다. 즉 중유는 바로 이러한 가장 빠른 업의 신통을 갖추고 있어 위로는 모든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능히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중유는 업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체의 중유는 5근을 모두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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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본송에서 말한 무대의] '대'란 대애(對? : 연장을 지니는 공간적 점유성)를 말하는 것으로, 금강석 따위도 능히 이를 차단 장애할 수 없기 때문에 '무대'라고 이름하였다. 즉 일찍이 '붉게 타오르는 쇳덩어리를 쪼개어보니 그 속에 벌레가 살아 있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땅히 그러한 취(趣)로 나아가는 중유로서 이미 생기한 것이라면, 어떤 종류의 힘으로도 능히 그것을 바꿀 수가 없다. 이를테면 인간의 중유를 몰하여 다른 중유로 일어나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그 밖의 다른 종류의 중유로도 역시 그러하니, 그러한 '취'로 나아가는 중유로서 이미 생기한 것이라면 다만 마땅히 그곳으로 가야지 결정코 그 밖의 다른 곳으로는 가지 않는 것이다.11)
  욕계의 중유의 몸은 단식(段食 : 혹은 搏食, 분할되어 섭취되는 물질적 에너지)에 의해 자조(資助)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비록 단식에 의해 자조될지라도 그것(단식)은 아주 미세한 것이지 거친 것이 아니다.
  그 미세한 것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중유는 오로지 향기만을 먹는다.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건달박(健達縛, gandharva)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니, 온갖 자계(字界 : 즉 어근을 말함)에는 그 뜻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이 짧은 것은 설건도(設建途, akandhu)나 갈건도(?建途, karkandhu)의 경우처럼 생략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어도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12) 그리고 복이 적은 온갖 중유는 오로지 오향(惡香)만을 먹지만 복이 많
  
  
11) 즉 중유와 생유는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었기 때문에 당래 나아갈 취(趣)가 바꾸어질 수 없는 것이 다. 예컨대 방생의 중유는 방생으로 태어나는 것이지 결정코 지옥이나 인간·천으로는 태어나는 일이 없다.
12) 건달박의 온전한 말은 건달알박(健達?縛, gandha-arva, gandh rva)이나 '알(a)'을 생략하여 '건달박 '이라 한 것으로, arva의 어근 arv는 '간다'는 뜻과 '먹는다'는 뜻이 있다. 따라서 건달박은 건달(gandha) 즉 향을 '찾아간다[尋香]'와 향을 '먹는다[食香]'는 뜻이 되기 때문에, 식향 즉 '향을 먹는 것'을 중유의 다 른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건달박은 비록 단모음으로 발음되고 있지만, 설건도( akandhu) 나 갈건도(karkandhu, 대추나무) 역시 장모음( ak ndhu, kark ndhu)이 단모음으로 불려지는 것과 같은 경 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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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중유는 호향(好香)을 먹는다고 한다.
  이와 같은 중유는 얼마 동안 머무르게 되는 것인가?
  대덕(大德)은 다음과 같이 설하여 말하고 있다. "이것의 지속기간에는 정해진 한도가 없다. 즉 생(生)의 연(緣)과 아직 화합하지 않았다면 중유는 항상 존재할 것이니, 이것의 명근은 별도의 다른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 아니며, [또한 장차] 나아가게 될 취(趣)의 인간 등의 중동분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중유의 명근이 최후로 소멸할 때에 마땅히 사유를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13)
  설혹 고깃덩어리가 묘고산(妙高山, 수미산) 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여름에 우기가 되면 벌레 무더기로 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온갖 [벌레의] 중유는 점차로 이 때를 기다렸다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어디서부터인가 단박에 여기에 와 이르렀다고 설해야 할 것인가?14)
  비록 경이나 논에는 이에 대한 자세한 판석(判釋)이 존재하지 않지만 응당 마땅히 정리(正理)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그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와 같이 잡다한 종류의 생은 향·미에 탐착하여 수명이 짧아졌다. 그리고 그러한 온갖 유정은 이러한 향기를 냄새맡고서 [그것과 관계된 맛을 기억하여] 향·미에 탐착하였기 때문에 구시(俱時)에 [단박에 생겨나게 된 것이다]. 즉 그러한 온갖 유정은 명종할 때 [향·미에 대한] 갈애로 말미암아 일찍이 벌레의 몸을 성취할 업을 지각하였기에 [명종과] 동시에 여기서 미세한 곤충의 몸을 얻게 된 것이다. 혹은 다수의 유정이 있어 응당 마땅히 여기서 함께 태어나야 하지만 아직 다수의 연과 화합하지 않아 중유 중에 머물다가 이제 다수의 연을 만나 비로소 여기서 단박에 태어나게 된
  
  
  
13) 중유의 명근은 본유의 명근과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었기 때문에 본유로서 태어나기 전까지 항상 지 속해야 한다는 뜻. 만약 본유의 명근과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중유의 사유 혹은 생 유를 별도로 설정해야 하는 모순이 초래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대비바사론』 권제70(앞의 책, p. 452)에는 중유의 지속기간에 대해 이같이 정해진 기한이 없다는 대덕의 설 이외에도 세 가지 학설이 소개되고 있다. 설 마달다(設摩達多)는 7·7일, 즉 49일, 세우(世友)는 7일인데, 바사의 정설은 지극히 짧은 시간 지속하고서 결 생(結生)한다는 것이다.
14) 만약 중유가 머무는 기간의 한도가 없다고 한다면, 예컨대 파리나 모기처럼 여름에 일시에 생겨나는 벌레의 중유는 어째서 단박에 구생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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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다. 즉 응당 마땅히 구생해야 하는 것은 결정코 시간을 달리하지 않으니, 마치 능히 전륜왕을 초래하는 업은 요컨대 인간의 수명이 8만 세일 때, 혹은 그 이상일 때 비로소 단박에 여과(與果)하지 그 밖의 다른 때에 여과하지 않는 것처럼 이것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15) 그래서 세존께서는 '온갖 유정류의 업과 그 과보(이숙)의 차별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존자 세우(世友)는 말하기를, "이것(중유)이 가장 많이 머무는 기간은 7일 간이니, 만약 생연(生緣)과 아직 화합하지 않았다면 몇 번이고 죽고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16) 또한 유여사는 말하기를, "최대한 칠칠일(七七日,즉 49일) 지속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러한 중유의 몸은 짧은 시간 머문다. 즉 중유 중에서는 생유를 즐거이 희구하기 때문에 오래 머물지 않고 신속하게 가 생과 결합하는 것이다. 즉 그것이 생의 연과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경우, 결정코 이러한 처소에서 이러한 종류의 유정으로 마땅히 태어나야 한다면, 업의 힘이 바로 이러한 생연(즉 부모)으로 하여금 화합하게 한다. 그러나 만약 결정코 이러한 화합연에 탁생(託生)하지 않은 경우라면 그 밖의 다른 처소의 다른 종류의 유정에 기생(寄生)한다."
  즉 어떤 이는 설하기를, "[만약 결정된 유정의 종류로 태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유정을 바꾸어 유사한 종류의 생을 받는다. 이를테면 집소와 개와 곰[熊]과 말의 발정[欲]은 대개 순서에 따라 여름 가을 겨울 봄에 일어나지만 들소나 들개, 큰 곰[?], 나귀는 일정한 시기가 없다. 그러므로 앞의 네 가지의 중유가 만약 생연을 만나지 못하였을 경우라면 순서대로 [당래 본유의 종류를] 바꾸어 뒤의 네 가지와 동류로 태어나기도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중유는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생유의 중동분과 필시 다름이
  
  
  
15) 전륜왕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2(p.567)를 참조할 것. 전륜왕을 초래하는 업은 인간의 수명이 8만세 이 상일 때 비로소 그 결과를 낳는 것처럼 벌레의 업 또한 여름에 여과하여 구생하게 한다는 뜻.
16) 즉 중유의 최대한의 지속기간은 7일이지만, 7일전까지 생기의 인연을 얻지 못할 경우 단괴(斷壞)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만날 때까지 죽고 나고를 되풀이 한다.(『대비바사론』 권제70, 앞의 책, p. 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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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당래 본유의 종류를] 바꾸어 서로 유사한 종류의 생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17)
  이와 같은 중유는 태어날 곳[生處]에 이르기 위하여 먼저 전도된 마음[倒心]을 일으켜 원하는 경계[欲境]로 치닫게 한다. 이를테면 그것(중유)은 비록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고 있을지라도 업력에 의해 일어난 안근으로써 능히 태어날 곳의 부모가 교회(交會)하는 것을 보고 전도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 남자의 경우라면 어머니를 반연하여 남성의 애욕을 일으키고, 여자의 경우라면 아버지를 반연하여 여성의 애욕을 일으키며, 이와 반대되는 경우에도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을 반연하여 다 같이 진에(瞋恚)의 마음을 일으킨다.18) 그래서 『시설족론』에서는, "때로 건달박은 두 가지 마음 가운데 하나를 따라 현행하니, 이를테면 애욕이던지 혹은 진에이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다시 이러한 두 가지 전도된 마음을 일으킴에 따라 바로 자기의 몸이 사랑하는 이와 결합하였다고 여기고, 미워해야 할[所憎] 부정(不淨)이 배설되어 탯집에 이를 때 그것이 바로 자기의 존재라고 여기고 기뻐한다. 이에 [그러한 유정의] 오온이 중후(重厚)해 짐에 따라 중유가 바로 몰하고 생유가 일어나니, 이것을 일컬어 '이미 결생(結生)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입태된 중유가] 남자일 경우 탯집 내에 처하자마자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 의지하여 등을 향해 웅크리고 앉아있으며, 만약 여자일 경우 탯집 내에 처하자마자 어머니의 왼쪽 옆구리에 의지하여 배를 향해 머물러 있다.19) 그리고 만약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경우라면 어머니 탯집에 머물 때에 일
  
  
17) 이는 논주 세친의 평파(評破)이다. 즉 유부종의에 의하는 어떤 한 중유는 생유와 동일한 업에 의해 인 기되기 때문에 생유의 중동분과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함에도 어찌 서로 유사한 것으로 옮겨가 태어날 수 있 는가 하는 반문. 이에 대해 중현은 '기생하는 것의 동분만 다를 뿐이기 때문에 중유와 생유가 동일한 업에 의 해 인기된다는 사실을 어긴 것은 아니니, 비록 생의 연은 다를지라도 인기된 동분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한 설사 서로 유사한 종류에게로 옮겨가 생을 받는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들도 최소한 동류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과실이 없다고 하였다.(『현종론』 권제13, 한글대장경200, p. 349)
18) 즉 남자는 아버지에 대해, 여자는 어머니에 대해 진에의 마음을 일으킨다.
19) 중현에 의하면 이는 여성과 남성이 좌우의 일에 익숙하기 때문으로, 숙세의 자신의 분별력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우는 자기가 교회(交會)하였다고 하는 증상만(增上慢)으로 인해 등을 향해 웅크리고 앉아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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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나는 탐욕에 따라 상응하는 바대로 머문다. 즉 중유의 몸은 반드시 근(根)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욕계의] 중유로서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경우는 없다. 그래서 중유로 처해 있을 때에는 혹 어떤 경우에는 남자, 혹 어떤 경우에는 여자이기 때문에 어머니 탯집 속에 들어와서는 상응하는 바에 따라 머물지만 그 후 태아가 자라나면서 남자 등이 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업력에 의해 [생겨난] 정혈(精血)의 대종이 바로 근(根)의 소의가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업이 신근의 소의가 되는 대종을 별도로 낳으며, 그것은 정혈에 의지하여 머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20)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혈이 바로 신근의 소의가 된다. 이를테면 마치 종자가 멸하고서 싹이 생겨나는 이치처럼 전찰나의 무근(無根)의 대종(즉 정혈)은 중유와 함께 멸하고 후찰나의 유근(有根)의 대종이 무간에 속생하니,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속생의 첫 단계를 갈라람(?邏藍)이라 이름하는 것이다.21) [이 같은 해석은] 역시 또한 '부모의 부정(不淨)이 갈라람을 낳는다'거나 '비구에게 고하기를, 그대들은 오랜 시간[長夜] 혈적(血滴)을 집수(執受)하여 갈타사(?私)를 증가시킨다'고 한 경의 문구와도 잘 부합하는 것이다.22) [따라서 정혈의 대종이 바로 근의 소의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마치 버려진 똥에 의지하여 별도의 벌레가 생겨나듯이 [업은 정혈에 근거하여] 별도의 대종을 낳으니, 부정(不淨)의 취(聚,곧 정액) 중에서 갈라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 '부모의 부정
  
  
  
20) 이는 정액(精血)과 육체(즉 신근)의 소의가 되는 대종의 관계에 대한 논의이다. 즉 정액(즉 精血)이 바로 신근의 소의처가 되는 대종이 되는 것인가, 정액 이외에 별도의 대종이 있는 것인가?
21) 전찰나의 무근의 대종이란 부모가 교회(交會)하여 누설할 때(바로 중유의 최후찰나)의 한방울의 정혈 을 말하며, 다음 찰나의 정혈을 유근의 대종이라 하였다. 따라서 유근의 대종은 속생의 첫 순간으로, 응결(凝 結) 혹은 응활(凝滑)을 뜻하는 갈라람(kalala , 수태 후 일주간의 상태)이라 한다는 것이다.
22) 갈타사(ka asi)는 탐애 혹은 혈확(血?)으로 한역된다. 그래서 구역에서는 '탐애를 증장하여 혈적을 섭취한다'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칭우에 의하면 이는 묘지의 뜻으로, '묘지를 증가시킨다'고 함은 곧 생사 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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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갈라람을 낳는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그 경의 문구와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바야흐로 태생과 난생 두 가지의 결생에 대해 논설하였다.
  다음으로 이제 마땅히 그 밖의 생에 대하여 상응하는 바에 따라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습생의 중유라면 향을 애염(愛染)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되니, 이를테면 멀리 떨어져 있는 태어날 곳의 향기를 냄새맡고서 문득 애염을 낳아 그곳으로 가 생을 받는데, 지은 업에 따라 그 향기가 청정하기도 하고 더럽기도 하다.
  만약 화생의 경우라면 다만 [태어날] 처소를 애염(愛染)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되니, 이를테면 당래에 태어날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관지(觀知)하고서 문득 애염을 낳아 그곳으로 가 생을 받는데, 지은 업에 따라 그 처소가 청정하기도 하고 더럽기도 하다.
  어찌 지옥의 처소에 대해서도 역시 애염을 낳는다고 하겠는가?
  마음이 전도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애염을 일으킨다 해도 아무런 과실이 없다. 즉 지옥의 중유는 혹 어떤 경우 자신의 몸이 차가운 비바람에 핍박받는 것을 보다가 열(熱) 지옥의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을 보게 되면 따뜻한 감촉을 희구하여 거기로 몸을 던지며, 혹 어떤 경우 자신의 몸이 뜨거운 바람과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에 핍박받는 것을 보다가 한(寒) 지옥을 보게 되면 시원한 것을 원하여 거기로 몸을 던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옛논사[舊師]들은 이와 같이 설하였다. "일찍이 그곳(지옥)을 초래하는 업을 지을 때의 자기 자신의 도반의 무리[伴類]를 보았기 때문에 그곳으로 치달아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중유가 어떠한 취로 나아갈 때 어떠한 모습으로 생처에 이르게 되는 것인가? 하면] 천(天)의 중유는 머리를 바로 하여 상승하니, 마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과 같다. 인간·아귀·방생의 중유는 그 행상이 역시 사람 따위와 같다.23) 그리고 지옥의 중유는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하여 거기로 거꾸로 떨어지니, 그래서 가타(伽他)에서도 이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
  
  
23) 즉 아래나 위로 가는 것이 아니라 횡으로 치달아 그곳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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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지옥으로 떨어질 때에는
  발을 위로하고 머리를 밑으로 돌리니,
  온갖 선인과 적정을 즐기는 이(즉 獨覺)와
  고행을 닦는 이(즉 보살)를 헐뜯고 비방하였기 때문이라네.
  
  앞에서 중유는 전도된 마음으로써 어머니의 탯집에 들어간다고 논설하였다. 결정코 일체의 중유가 모두 그러한 것인가?
  그렇지가 않으니, 계경에서 "입태(入胎)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24)
  그러한 네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첫 번째는 들어가는 것[入胎]에 대해 올바로 아는 것이며
  둘째와 셋째는 머물고 나오는 것에 대해 아울러 아는 것이며
  넷째는 그 모든 상태[位]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며
  그리고 난생은 항상 알지 못한다.
  一於入正知 二三兼住出
  四於一切位 及卵恒無知
  
  앞의 세 가지 종류의 입태는
  이를테면 전륜왕과 두 부처(獨覺과 無上覺)를 말함이니
  업과 지혜와 두 가지 모두가 뛰어나기 때문에
  순서대로 그러하며, 넷째는 그 밖의 생(태생)이 그러하다.
  前三種入胎 謂輪王二佛
  業智俱勝故 如次四餘生
  
  
  
24) 『장아함경』 권제12 『자환희경(自歡喜經)』(대정장1, p. 77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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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어떤 온갖 유정들은 많은 복업을 쌓고 염혜(念慧)를 부지런히 닦았기 때문에, 죽고 태어날 때 그 같은 염력(念力)에 의해 지니게 된 정지(正知)에 산란됨이 없다. 바로 그러한 유정 가운데 혹 어떤 이는 입태(入胎)에 대해 올바로 알며, 혹 어떤 이는 입태와 아울러 주태(住胎)에 대해 올바로 알며, 혹 어떤 이는 입태와 주태와 아울러 출태(出胎)에 대해 올바로 안다. 여기서 '아울러[兼]'라고 말한 것은, 뒤의 것은 반드시 앞의 것에 동반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온갖 유정으로서 복업과 염혜가 적은 이는 입태·주태·출태의 상태에 대해 모두 올바로 알지 못하니, 입태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할 것 같으면 주태와 출태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는 게송을 짓는 법에 따랐기 때문에 네 가지를 거꾸로 설하게 된 것이다.25)
  온갖 난생은 입태 등의 모든 상태에 대해 항상 무지할 따름이다.
  난생은 알로부터 나오는 것임에도 어찌하여 '입태' 즉 탯집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인가?
  난생은 반드시 먼저 탯집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당래(當來)에 근거하여 난생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유위를 조작한다'고 설하며, 세간에서도 역시 '밥을 찐다'라 하고, '보리가루를 빻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26) 그렇기 때문에 난생에 대해 입태라고 설해도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
  어떠한 이를 일컬어 세 가지 상태, 즉 입태와 주태와 출태에 대해 바로 알고[正知] 혹은 바로 알지 못하는[不正知] 자라고 하는 것인가?
  바야흐로 온갖 유정으로서 만약 복이 지극히 적은 자일 경우, 모태에 들어갈 때 큰 바람과 비, 지독한 더위와 추위, 혹은 대군의 무리가 외치는 요란하
  
  
  
25) 즉 계경에서는 열등한 것에서 뛰어난 것의 순서로 네 가지 입태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의 상태에 대해 무지한 입태가 첫 번째이지만(다른 세 가지의 순서는 게송과 동일함), 게송에서는 송문의 구성상 그것을 네 번째 입태로 설하였다는 뜻.
26) 난생은 먼저 입태한 후 미래세 알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태생이지만 두 번째 사실에 근거하여 난생이라 불리는 것으로, 이는 마치 '밥을 찐다'(엄밀히 말해 쌀이 쪄진 것이 밥이다), '보리가루를 빻는다'(엄밀히 말해 보리가 빻아진 것이 보리가루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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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도 위협적인 소리에 핍박받는 것을 보고서 [이를 피하기 위해] 마침내 자기가 우거진 덤불이나 밀림, 혹은 초막이나 띠 집에 들어 나무담장 아래로 몸을 숨긴다고 보며, 머무를 때에도 자기가 그 가운데 머문다고 보며, 나올 때에도 자신의 몸이 이로부터 나온다는 등의 전도된 생각을 일으킨다. 만약 복이 많은 자라면 모태에 들어갈 때 자기의 몸이 미묘한 정원에 들고 호화로운 전각이나 정자에 오르며 뛰어난 침상 등에 있다고 보며, 모태에 머무를 때에도 거기서 나올 때에도 역시 앞에서와 같은 곳에 머물고 그곳에서 나온다는 등의 전도된 생각을 일으킨다. 즉 이러한 이를 세 가지 상태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 가지 상태에 대해 바로 아는 자라고 한다면 모태에 들어갈 때 등에 대해 전도된 생각이 없으니, 이를테면 입태할 때에는 스스로 입태하는 것이라고 알며, 모태에 머물거나 거기서 나올 때에도 스스로 거기에 머물고 거기서 나온다는 것을 안다. [즉 이러한 이를 세 가지 상태에 대해 바로 아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네 가지 입태에 대해 달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앞의 세 가지 종류의 입태는 이를테면 그 순서대로 전륜왕(轉輪王)과 독각(獨覺)과 대각(大覺)의 그것이다. 즉 첫 번째의 입태란 말하자면 전륜왕의 그것으로, 들어가는 상태에 대해서는 올바로 알지만 머무는 상태에 대해서는 올바로 알지 못하며, 나오는 상태에 대해서도 올바로 알지 못한다. 두 번째의 입태란 말하자면 독승각(獨勝覺)의 그것으로, 들어가는 상태와 머무는 상태에 대해서는 올바로 알지만 나오는 상태에 대해서는 올바로 알지 못한다. 세 번째의 입태란 말하자면 무상각(無上覺)의 그것으로, 들어가고 머물고 나오는 상태에 대해 모두 능히 올바로 안다. 그리고 이러한 앞의 세 가지 입태의 인간은 당래의 명칭으로써 드러나는 인간이다.27)
  어떠한 이유에서 이와 같은 세 품류의 입태가 동일하지 않은 것인가?
  업과 지혜와 두 가지 모두의 세 가지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즉 첫 번째는 업이 뛰어나니, 이를테면 전륜왕은 숙세에 일찍이 광대한 복업을 닦았기 때
  
  
  
27) 즉 전륜왕이라 하고, 독각이라 하며, 무상각의 불 세존이라 하지만, 그것은 중유로서의 명칭이 아니라 당래 본유의 상태에서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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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이다. 두 번째는 지혜가 뛰어나니, 이를테면 독승각은 오랫동안 다문(多聞)을 익혀 뛰어난 사택(思擇)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두 가지 모두가 뛰어나니, 이를테면 무상각은 광겁(曠劫 : 3아승기겁 100겁을 말함)에 걸쳐 뛰어난 복업과 지혜를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의 세 가지 종류의 입태를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 태생과 난생은 복업과 지혜가 모두 열등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네 번째 입태가 된다.
  
  여기서 '아(我)'를 주장하는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유정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아를 주장하는 유아론이 된다"고 하였다.28) 이제 이 같은 주장을 막기 위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아로서, 오로지 온갖 온(蘊)만이
  번뇌와 업에 의해 조작되어
  중유의 상속으로 말미암아
  입태하는 것이니, 마치 등불과도 같다.
  無我唯諸蘊 煩惱業所爲
  由中有相續 入胎如燈焰
  
  [업이] 인기한 순서대로 증장(增長)하여
  상속하고, 다시 번뇌[惑]와 업에 의해
  다른 세간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따라서 존재의 수레바퀴에 시작은 없다.
  如引次第增 相續由惑業
  更趣於餘世 故有輪無初
  
  
  
  
28) 불교의 경우처럼 무아(無我)를 주장한다면 누가 이 세간으로부터 중유의 온을 타고 저 세간으로 가 입 태·주태·출태한다고 설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즉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내적으로 작용하는 자아(atman) 내지 사부(士夫, puru a)가 있어 그것이 이 세간으로부터 저 세간으로 가 입태·주태·출태해야 하는 것이다. 이하 바로 이 같은 무아와 중유의 윤회상속에 대해 논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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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그대들이 주장하는 자아의 상은 어떠한가?
  능히 이 같은 온(蘊)을 버리고서 능히 그 밖의 다른 온을 상속하는 내적으로 작용하는 사부(士夫, puru a)이다.
  이와 같은 내적으로 작용하는 사부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으니, 색(色)이나 안(眼)처럼 [그 자성이나 작용이]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29) 세존께서도 역시 "업도 있고 이숙도 있지만, 그 작자는 인식될 수 없다. 이를테면 능히 이러한 온을 버리고 아울러 능히 그 밖의 다른 온을 상속하는 것이니, 오로지 법가(法假)만은 제외된다"고 말씀하였던 것이다.30)
  법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31)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는 것이니, 널리 설하면 연기(緣起)를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아(我)가 부정되지 않는 것인가?32)
  오로지 제온(諸蘊)만이 존재할 뿐이니, 이를테면 온에 대해 일시 '아'라는 명칭을 설정하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제온이 능히 이 세간(현세)으로부터 다른 세간(후세)으로 전지(轉至)하는 것은 인정하는가?
  온은 찰나에 소멸하여 [다른 세간으로] 전지하는 공능이 없을지라도,33)
  
  
29) 색 등의 감각적 대상은 지각[現量]에 의해 구체적으로 알려지며, 안 등의 감관은 작용을 통해 그 존재 가 추리[比量]되지만, 푸루샤와 같은 내적인 자아는 지식획득의 직접적인 수단[量]인 지각과 추리에 의해 알 려지지 않기 때문에 비유(非有)이다.
30) 『잡아함경』 권제13 제355경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대정장2, p. 92하),"諸比丘, 眼生是無有來 處, 滅是無有去處. 如是眼不實而生, 生已盡滅. 有業報而無作者. 此陰滅已 異陰相續, 除俗數法. 耳鼻舌身意亦 如是說, 除俗數法. 俗數法者 謂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如無明緣行 行緣識 廣說乃至 純大苦聚集集起.."
31) 여기서 법가(dharma sa keta, 또는 俗數法. 구역에서는 法數)란 인과로서 상속하는 법에 일시 설정된 작자를 말한다. 즉 12연기에 있어 작자는 일시 가정될 뿐이지 그것이 내적으로 작용하는 개별적 실재로서 존 재하는 것은 아니다.
32) 이 물음의 보다 구체적인 뜻은 이러하다. 만약 그렇다면 외도는 무엇을 소연(所緣)으로 삼아 '아'에 대한 주장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인가? 비록 온갖 온을 떠나 별도의 '아'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그 같은 소연 은 존재한다고 주장해야 하는가?(『현종론』 권제13, 한글대장경200, p. 356)
33) 즉 제온은 찰나에 소멸하기 때문에 후세에 이를 수 없고, 찰나찰나에 각각의 제온이 상속하여 전지(轉 至)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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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익힌 번뇌와 업으로 말미암아 중유의 온이 상속하고 입태하게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등불의 불꽃은 비록 찰나에 소멸할지라도 [다른 불꽃이] 능히 상속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제온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전지한다'고 말해도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 따라서 비록 자아가 없다고 할지라도 번뇌[惑]와 업에 의해 제온은 상속하고 입태한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제온은 업이 인기(引起)한 순서대로 더욱 증장(增長)하여 상속하며, 다시 번뇌와 업의 힘에 의해 다른 세간으로 나아가게 된다.'34) 이를테면 인기된 일체 제온의 증장과 상속에 길고 짧음[修促]이 있어 그 양이 같지 않은 것은 목숨[壽]을 인기하는 업인(業因)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35) 즉 능히 인기하는 업의 세력이 증장하거나 미약해짐에 따라 [인기된 수명이나 신근 등은] 다 같이 그러한 때에 순서대로 증장하게 되는 것이다.
  순서가 어떠한가?
  성교(聖敎)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최초에는 갈라람(?邏藍)이고
  다음은 알부담(?部曇)이며
  이로부터 폐시(閉尸)가 생겨나고
  폐시에서 건남(鍵南)이 생겨난다.
  
  다음이 발라사가(鉢羅奢?)이며
  그 후 머리카락과 터럭과 손톱 등과
  아울러 색의 근(根)과 형상이
  점차로 더욱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36)
  
  
34) 이는 현장의 가필(加筆)로서, 앞의 본송을 거듭하여 언급한 것이다. 이하 번뇌와 업이 인(因)이 되어 생이 낳아지고, 그러한 생에서 다시 번뇌와 업이 낳아져 또 다른 생을 인기한다는 삼세유전을 밝힌다.
35) 수명의 과보가 길고 짧은 것은 인업(引業)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36) 『잡아함경』 권제49 제1300경(대정장2, p. 377하). 갈라람(kalala, 혹은 柯羅邏. 凝滑로 의역)은 탁 태 이후 첫 7일간. 알부담(arbuda, 胞)은 두 번째의 7일간. 폐시(p si, 血肉, 또는 肉段)는 세 번째 7일간. 건남(ghana, 堅肉 또는 堅厚)는 네 번째 7일간. 발라사거(pra kh , 支節)는 다섯 번째 7일 이후부터 출산 때인 34번째 7일까지. 이상 태내 5위(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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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모태 중에서 다섯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말하니, 첫 번째는 갈라람의 상태이며, 두 번째는 알부담의 상태이며, 세 번째는 폐시의 상태이며, 네 번째는 건남의 상태이며, 다섯 번째는 발라사거의 상태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태 중의 화살[箭, 아이를 말함]은 점차로 증장하여 이윽고 유색(有色)의 근과 형상이 원만하게 된 상태에서 업에 의해 일어난 이숙의 풍력(風力)으로 말미암아 모태 중의 화살은 산문(産門)으로 나아가게 된다.37) 그리고 마치 딱딱하게 굳어진 변을 양에 넘치게 볼 때처럼 속이 답답하고도 껄끄럽게[悶澁] 산문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니, 그 때의 극심한 고통은 참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혹 어느 때 몸가짐[威儀]과 음식을 분수에 넘치게 취하거나38) 혹은 그 아이가 지은 숙세의 죄업의 힘으로 말미암아 태내에서 죽기도 한다. 그 때 해산의 법도[産法]에 대해 매우 능통하고 애기를 잘 받을 줄 아는 여인이나 혹은 의사가 있으면 따뜻하게 소유(?油)나 섬말리(?末梨)나무의 즙을 손에 바르고 작고 예리한 칼을 잡고 [탯집의 아이를 끄집어내게 된다.] 그러나 그 속은 항문[糞坑] 속처럼 악취가 지독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찼으며, 어두컴컴한 곳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천의 벌레들이 우글거린다. 또한 항상 나쁜 액체가 흘러나와 반드시 잘 대처해야 한다. 즉 정혈과 기름 때로 썩어 문드러져 부정(不淨)이 흘러 넘치며 비루하고 더러워 차마 보기 어려운데, 구멍이 뚫려 누설되는 얇은 거죽[皮]이 그 위를 덮고 있다. 즉 숙업에 의해 인기된 [이와 같은] 몸(어머니의 몸)의 창공(瘡孔,産門 즉 자궁을 말함) 속으로 [손을 넣어 태아의] 지절(支節)을 분해하여 밖으로 끄집어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태아는 숙세에 지은 순후수업(順後受業)을 받게 되는데,39) 그가 나아가는 취(趣)에 대해서는 참으로 알기 어렵다.
  
  
37) 광기에 의하면 모태 중의 아이가 탯집에 처할 때 마치 화살이 몸에 들어가 꼽히듯이 그 어머니를 해손 (害損)하기 때문에 태아를 '모태 중의 화살'이라 하였다.
38) 여기서 위의(威儀) 즉 몸가짐이란 행(行)·주(住)·좌(坐)·와(臥)의 일상의 행동거지를 말하는 것으 로, 몸가짐과 음식을 분수에 넘게 취한다는 것은 안혜(安慧)에 의하면 뛰거나 수영하는 것, 강렬하거나 뜨거 운 음식을 먹는 것이다.
39) 정상적으로 태어나는 경우 순차업(順次業, 전생에 업을 짓고 이생에 과보를 받는 업)의 과를 받게 되 지만, 모태 내에서 죽을 경우 순후수업(전생에 업을 짓고 다음생에 과보를 받는 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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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은 또한 어떠한 어려움도 없이 편안하게 생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몸은 마치 부스럼이 막 돋아난 것과 같으며 가늘고 연약하여 다루기 어려운데, 어떨 때는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혹 어떨 때는 다른 여인(유모)이 칼과 같고 재와 같은 거칠고 투박한 두 손으로 아이를 잡고서는 씻기고 닦아 그를 편안한 곳에 눕힌다. 그런 다음 맑은 소유(?油)를 먹이고 모유를 먹이며, 점차 부드러운 음식과 거친 음식을 섭취시켜 익숙하게 한다. 그리하여 점차 순서대로 증장하여 근(根, 여근·남근)이 성숙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다시 번뇌를 일으켜 온갖 업을 쌓으며, 나아가 이 같은 [현세의] 몸이 괴멸하고서 다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중유가 상속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다른 세간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혹(惑, 즉 번뇌)과 업을 원인으로 삼아 생(生)이 있는 것이며, 생이 다시 원인이 되어 혹과 업을 일으키며, 이러한 혹과 업으로부터 다시 생이 있게 된다. 따라서 존재의 수레바퀴[有輪 : 즉 생사를 윤회하는 4有의 轉生]는 돌고 도는 것으로 시작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시작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시작에는 마땅히 그 원인이 없어야 할 것이며, 시작에 이미 원인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밖의 다른 것도 [원인이 없이] 마땅히 스스로 생겨나야 한다. 그러나 지금 싹 등을 보건대 그것은 씨앗 등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났으니, 생겨나는 장소와 시간이 모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40) 또한 불 등에 의해 숙변(熟變) 등이 생겨나니,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원인 없이 일어나는 법은 결정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상주(常主)하는 원인을 설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앞(본론 권제7)에서 이미 비판한 바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생사에는 결정코 시초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생사의 끝[後邊]은 있으니, 그 원인이 다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즉 생은 원인(즉 惑과 業)에 의지하기 때문에 원인이 멸하여 허물어질 때 생이라는 결과도 반드시 없어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종자가 멸하여 허물
  
  
  
40) 만약 무인생이라고 한다면 특정의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고 생겨나야 하며, 그것을 제약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무인생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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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질 때 싹은 필시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치상 결정코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은 온(蘊)의 상속은 세 가지 생을 분위(分位,단계)로 한다고 설하니,41)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와 같은 온갖의 연기는
  12지(支)로서, 3제(際)이니
  전제와 후제는 각기 두 가지이며
  중제는 원만한 자에 따를 경우 여덟 가지이다.
  如是諸緣起 十二支三際
  前後際各二 中八據圓滿
  
  논하여 말하겠다. 12지(支)란 첫 번째는 무명(無明)이며, 두 번째는 행(行)이며, 세 번째는 식(識)이며, 네 번째는 명색(名色)이며, 다섯 번째는 6처(處)이며, 여섯 번째는 촉(觸)이며, 일곱 번째는 수(受)이며, 여덟 번째는 애(愛)이며, 아홉 번째는 취(取)이며, 열 번째는 유(有)이며, 열한 번째는 생(生)이며, 열두 번째는 노사(老死)이다.42) 그리고 3제(際)라고 하는 말은 첫 번째는 전제(前際)이며, 두 번째는 후제(後際)이며, 세 번째는 중제(中際)이니, 바로 과거·미래와 아울러 현재의 세 가지 생을 말한다.
  12지를 3제에 건립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41) 즉 온의 상속은 전제(前際, p rv nta, 과거생)·후제(後際, ap rv nta, 미래생)·중제(中際, madhy nta, 현재생)에 걸쳐 일어난다.
42) 연기에는 오로지 12지(支)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품류족론』 권제6에서는 '일체의 유위를 일컬어 연기라고 한다'고 하였으며, 계경 중에서는 12지·11지·10지·9지·8지로 연기를 분별하고 있다. 즉 아비달마론에서는 법의 자성[法性]에 의거하여 12지를 설하였지만, 계경 중에서는 교화될 자의 근기[化宜]에 따랐기 때문이다. 혹은 아비달마에서는 요의(了義)로서 유정과 무정 모두에 의거하여 설하였지만, 계경은 불 요의로서 다만 유정수에 의거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염오와 청정은 유정에 의거하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는 유정을 위해 이 두 가지를 개현(開顯)하고자 세간에 출현하였던 것이다.(『현종론』 권제14, 한글대장경200, p.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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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테면 전제와 후제에 각기 두 가지 지를 설정하고, 중제에 여덟 지를 설정하였기 때문에 12지가 되는 것이다. 즉 무명과 행은 전제에 있으며, 생과 노사는 후제에 있으며, 그 밖의 나머지 여덟 가지 지는 중제에 있다.43)
  이러한 중제의 여덟 지는 일체의 유정의 일생 중에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모두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여덟 지가 있다고 설한 것인가?
  원만한 자에 근거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말하려는 뜻은, 보특가라로서 모든 단계[位]를 거친 이를 '원만한 자'라고 일컬은 것으로, 중간에 요절한 이[中夭]나 색계·무색계의 온갖 보특가라는 '원만한 자'가 아니다. 다만 욕계의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여덟 지가 있다고 설한 것으로], 『대연기경(大緣起經)』에서 '모두 갖추고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44) 즉 그 경에서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아난타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식(識)이 만약 입태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증성 광대해 질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증성 광대해질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그러나 어떤 때에는 다만 전제에 포섭되거나 후제에 포섭된다고 하는 두 단계의 연기를 설한 경우도 있다. 즉 앞의 일곱 지는 전제에 포섭되니, 이를테면 무명 내지 수(受)가 그것이며, 뒤의 다섯 지는 후제에 포섭되니, 이를테면 애(愛)로부터 노사까지가 그것이다. [이는 바로 12지를] 전제와 후제, 원인과 결과의 두 단계로 나누어 포섭하였기 때문이다.45)
  
  
43) 이는 바로 12지를 삼세(三世) 양중(兩重)의 인과관계로 해명한 것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명- 행(과거세 2인)-식-명색-육처-촉-수(현재세 5과)-애-취-유(현제세 3인)-생-노사(미래세 2과). 그렇다고 과거 2인과 미래 2과 역시 무인무과(無因無果)의 원인과 결과는 아니다.(후술)
44) 『중아함경』 권제24 『대인경(大因經)』(대정장1, p. 579하).
45) 이는 12지를 이세(二世) 양중(兩重)의 인과로 설한 것으로, 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의 7지 를 전제로, 애·취·유·생·노사의 5지를 후제로 이해하여, 이 중 전제의 앞의 두 지(무명·행)와 후제의 앞 의 세 지(애·취·유)를 과거·현재의 인(因)으로 삼고, 나머지 다섯 가지 지와 두 가지 지를 현재·미래의 과(果)로 삼은 것이다. 이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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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 등의 지(支)는 어떠한 법을 본질로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숙생에서의 번뇌의 상태[惑位]가 '무명'이며
  숙세의 온갖 업을 '행'이라 이름한다.
  '식'은 바로 결생(結生)의 온이며
  6처가 생겨나기 이전이 '명색'이다.
  宿惑位無明 宿諸業名行
  識正結生蘊 六處前名色
  
  안(眼) 등의 근이 생겨나면서부터
  세 가지의 화합 이전이 '6처'이며,
  3수(受)의 원인이 다름에 대해
  아직 요지(了知)하지 못한 것을 '촉'이라 이름한다.
  從生眼等根 三和前六處
  於三受因異 未了知名觸
  
  음애(愛)가 생겨나기 이전이 '수'이며
  물건[資具]이나 음욕을 탐하는 것이 '애'이며
  온갖 경계를 획득하기 위하여
  두루 추구하는 것을 '취'라고 이름한다.
  在愛前受 貪資具
  爲得諸境界 遍馳求名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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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란 말하자면 바로 당유(當有)의 과를
  능히 견인하는 업을 짓는 것이고
  당유를 맺는 것을 '생'이라 이름하며
  당래 수(受)에 이르기까지가 '노사'이다.
  有謂正能造 牽當有果業
  結當有名生 至當受老死
  
  논하여 말하겠다. 숙생(宿生) 중의 온갖 번뇌의 상태로부터 지금 그 결과가 익을 때까지의 상태[의 오온]을 총칭하여 '무명(無明, avidy )'이라고 하니, 그것(오온)은 무명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이며, 무명의 힘에 의해 그것이 현행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왕이 행차한다'고 할 때, 그를 선도하고 뒤따르는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왕이 뛰어나기 때문에 총칭하여 '왕이 행차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숙생(宿生) 중의 복(福) 등의 업의 상태로부터 지금 그 결과가 익을 때까지의 상태[의 오온]을 총칭하여 '행(行, sa sk ra)'이라고 하는데, 게송 첫 구에서의 '상태'라고 하는 말은 노사에 이르기까지를 말한 것이다.46)
  모태 등에서 바로 결생(結生)하는 순간의 일찰나 상태의 오온을 '식(識, vij~ na)'이라고 이름한다.47)
  결생의 식 이후와 6처가 생겨나기 이전의 중간의 온갖 상태[의 오온]을 총칭하여 '명색(名色, n ma r pa)'이라고 한다.48) 그리고 본송 중에서 마땅히 '4처가 생겨나기 이전'이라고 설해야 함에도 6처라고 말한 것은 원만함에 근거하여 설정하였기 때문이다.49)
  
  
46) 즉 앞서 언급한 본송 제1구 '숙생에서의 번뇌의 상태[惑位]가 무명이다'에서, 상태[位]라고 하는 말 은 12지 전체에 대한 것이라는 뜻. 그러나 여기(行支)서의 상태는 오로지 번뇌에 의해 선·불선 등의 업을 발 동하는 상태로, 이러한 상태로부터 현재 그 결과가 익을 때까지의 오온을 총칭하여 '행'이라고 한다.
47) 결생하는 찰나 중에서는 오온 중에 '식'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일시 '식지(識支)'라 고 이름한 것으로, 이 때의 식은 전5식을 낳게 하는 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의식이다.
48) 즉 결생 이후 갈라람·알부담·폐시·건남과, 발라사거의 일부(신근과 의근이 생겨난 상태)인 태내 5위의 상태를 말한다.
49) 즉 명색의 단계에서 이미 신처와 의처는 생겨나 있으므로 4처가 생겨나기 이전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러한 두 처는 명색의 상태에서는 그 공능 이 감소하여 저열[減劣]하지만, 6처의 상태에서 비로소 원만하고 뛰어나며, 완전한 상태[全分]로 획득되어 현행하기 때문에(이를테면 남·여의 근이나 온 갖 識身이 모두 現起하는 것은 이 때이다) 6처가 생겨나기 이전을 '명색'의 상태라고 설한 것이다.(『현종론』 권제14, 앞의 책,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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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眼) 등의 근이 이미 생겨나서 근(根)·경(境)·식(識)이 아직 화합하지 않은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오온]을 '6처(處, ad- yatana)'라고 이름한다.
  [근·경·식] 세 가지가 이미 화합하였을지라도 아직 3수(苦受·樂受·捨受)의 원인의 차별을 능히 요별할 수 없는 상태[의 오온]을 모두 일컬어 '촉(觸, spar a)'이라고 한다.
  3수의 원인의 차별상을 이미 요별하였을지라도 아직 음탐(貪)을 일으키지 않은 이러한 상태[의 오온]을 '수(受, vedan )'라고 이름한다.
  좋은 물건[資具]을 탐하거나 음애가 현행하였을지라도 아직 널리 추구하지 않는 이 같은 상태[의 오온]을 '애(愛, t a)'라고 이름한다.
  여러 가지 좋은 물건을 획득하기 위해 주변을 마구 치달아 추구하는 이러한 상태[의 오온]을 '취(取, up d na)'라고 이름한다.50)
  [온갖 경계로] 마구 치달아 추구하였기 때문에 미래의 존재 즉 당유(當有)의 과보를 견인할 업을 쌓게 되니, 이러한 상태[의 오온]을 '유(有, bh va)'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업력에 의해 지금 생의 목숨을 버리는 때로부터 바로 당유(當有) 즉 미래 존재를 맺게되는 이러한 상태[의 오온]을 '생(生, j ti)'이라고 이름한다. 즉 미래존재로서의 '생지(生支)'는 바로 현재생에서의 식지(識支)와도 같다.51)
  
  
50) '애'가 초기(初起)의 탐이라면, 이러한 탐이 상속·치성하여 강력[堅猛]하게 된 것을 '취'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욕취(欲取)·견취(見取)·계금취 (戒禁取)·아어취(我語取) 네 가지가 있다.
51) 현재생의 결생위가 식지라면 미래생의 결생위는 생지이다. 즉 '생'이라고 하는 명칭은 당래를 과보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를테면 현세에 있어서는 식의 작용이 분명하며, 미래세 중에서는 생의 작용이 가장 현저하기 때문에 자신의 작용 중 현저한 것에 따라 지(支)의 명칭을 설정하였다.(『현종론』 권제14, 앞의 책, p.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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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래]생의 찰나 이후 점차 증장하여 당래 '수'의 상태까지[의 오온]을 총칭하여 '노사(老死, jar -mara a)'라고 이름한다.52) 즉 이와 같은 노사는 바로 현재생의 명색과 6처와 촉과 수의 4지와도 같다.
  12지의 차별을 분별해 보면 이상과 같다.53)
  또한 온갖 연기는 차별되어 네 가지로 설해지는데, 첫 번째는 찰나(刹那) 연기이며, 둘째는 원속(遠續) 연기이며, 셋째는 연박(蓮縛) 연기이며, 넷째는 분위(分位) 연기이다.
  무엇을 일컬어 찰나연기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탐으로 말미암아 살생을 행할 때 찰나에 12지가 모두 갖추져 있는 것을 말하니, [업을 발동시키는] 어리석음[癡]은 '무명'이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사[思]는 '행'이며, 온갖 대상에 대해 요별하는 것을 '식'이라 이름하며, 식과 구생하는 세 가지 온을 총칭하여 '명색'이라 하며,54) 명색이 머무는 근을 설하여 '6처'라 하며, 6처가 그 밖의 다른 것(즉 경·식)에 대해 화합하는 것을 '촉'이라 하며, 촉을 영납(領納)하는 것을 '수'라고 이름하며, [수에 대해] 탐하는 것이 바로 '애'이며, 이것과 상응하는 온갖 전(纏)을 '취'라고 이
  
  
52) 다만 이를 노사라고 칭명한 것은 미래존재의 과환(過患)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그것에 대해 흔락(欣樂)하는 마음을 염사(厭捨)하도록 하기 위 해서였다.(앞의 논)
53) 이상의 3세 양중(兩重)의 연기설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54) 상온과 행온과 색온. 이 경우 상온은 전부이지만, 색온은 표·무표업과 5처를 제외한 성·향·미·촉의 4경(境), 행온은 무명·사(思, 이는 행)· 촉·탐과 무참·무괴·혼침·도거 등(이는 纏으로, 바로 '취'임)과 생·이(異, 이는 老)·멸(死)을 제외한 작의 등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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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름하며,55) [이것에 의해] 일어난 신·어의 두 업을 '유'라고 이름하며, 이와 같은 제법의 생기를 바로 '생'이라 이름하며, 원숙하여 변화하는 것[熟變]을 '노'라고 이름하며, 괴멸하는 것은 '사'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찰나와 연박은 『품류족론』에서 설하고 있듯이 다 같이 유루에 두루하는 것이다"고 하였다.56)
  12지의 상태[位]로 존재하는 오온은 모두 분위(分位) 연기에 포섭되며,57) 이것(12지)이 멀리 떨어져 상속하는 것으로 시작이 없는 것을 설하여 원속(遠續) 연기라고 한다.58)
  이 가운데 세존의 뜻을 설한 것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전설에 따르면 분위에 의거하여 설한 것으로 인정되니,
  두드러진 것에 따라 각 지의 명칭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傳許約位說 從勝立支名
  
  
  
  
55) 전(纏, paryavasthana)이란 근본번뇌로부터 파생된 수번뇌(隨煩惱, upakle a)로서, 무참·무괴·악작·수면(睡眠)·도거·혼침·분(忿)·부(覆) ·질(嫉)·색(?) 등 열 가지. 본론 권제21(p.953) 참조.
56) 앞의 찰나연기가 오로지 유정과 유루에 통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라면, 어떤 이는 『품류족론』 권제6(대정장26, p. 71하)에서 '연기법이란 무엇 인가? 이를테면 유위법이다'고 하는 논설을 논거로 삼아 찰나와 연박의 그것을 유정와 비유정, 유루와 무루에 통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연박 연기란 말하자면 12지가 무간에 상속하여 일어나는 것으로서, 후술하듯이 논주 세친이 취하는 설과 동일하기 때문에 따로이 논설하지 않고 있다.
57) 분위연기란 이러한 12지는 3생에 걸쳐 오온이 무간에 상속한 것이다. 다시 말해 12지 각각의 상태[位]는 오온을 갖추고 있지만 두드러진 것에 대 해 각지의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이를테면 무명이 가장 두드러진 오온의 상태를 '무명'이라 하고, 노사가 가장 두드러진 오온의 상태를 '노사'라고 이름 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유부의 설로서, 앞의 12지의 해석은 이에 따른 것이다.
58) 원속연기란 이러한 12지는 여러 생에 걸쳐 시간을 건너뛰어 상속한다는 것으로, 아득히 먼 과거의 무명과 행에 의해 현생의 식 등의 결과가 초래 되며, 현생의 '유'에 의해 아득히 먼 미래세의 생과 노사를 초래한다는 순후수업(順後受業)의 연기이다. 이에 반해 연박연기란 12찰나에 걸친 동류와 이 류의 인과로서 무간에 상속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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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전설(傳說)에 따르면 세존께서는 오로지 분위에 근거하여 연기에 12지가 있다고 설하신 것으로 인정된다.59)
  만약 각각의 지 가운데 모두 오온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단지 무명 등의 명칭만으로 설정한 것인가?
  온갖 상태[位] 중에서 무명 등이 두드러지기 때문으로, 두드러진 것에 근거하여 무명 등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다. 이를테면 만약 어떤 지의 상태 중에서 무명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라면 이러한 상태의 오온을 총칭하여 무명이라 이름하며, 내지는 어떠한 지의 상태 중에서 노사가 가장 두드러진 것이라면 이러한 상태의 오온을 총칭하여 노사라고 이름하였다. 따라서 12지는 비록 오온 모두[總]를 본질로 삼을지라도 그 명칭이 각기 다르니,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경에서 설한 이러한 12지와 『품류족론』에서 설한 그것 사이에 다른 점이 있는 것인가? 즉 그 논에서는 설하기를, "무엇을 연기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일체의 유위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다.60)
  소달람(素?纜, s tra, 즉 경)의 말씀은 별도의 뜻에 의한 것이다.61) 그러나 아비달마는 법상에 의거하여 설하였기에 이와 같이 널리 설하게 된 것이니, "이를테면 분위와 찰나와 원속과 연박은 오로지 유정수에만 통하기도 하고 유정과 비유정 등과 통하기도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62)
  
  
59) 논주 세친은 12연기를 분위연기설로 해석하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의 '전설'로 논설하고 있다. 이를테면 경량부에서는 '12연기의 각 지가 오온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면 오온에서 오온으로 변이하는 것이 되어 인과의 차별은 허물어지고 만다'고 하여 유부의 분위연기설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 다.(후술)
60) 즉 경에서는 12지연기를 유정의 인과상속으로 설하고 있는데 반해 아비달마논에서는 일체 유위법의 상속으로 논설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61) 경은 오로지 단혹(斷惑)을 목적으로 하여 설해졌기 때문에 유정에 한정시킨 반면, 논은 법상 즉 객관적 이치를 위주로 하여 설하였기 때문에 분위 내지 유정·비유정과 통하는 것으로 설하였다.
62) 여기서 아비달마는 『대비바사론』 권제23(한글대장경118, p. 516). 즉 분위와 원속은 오로지 유정에 국한되는 연기이고, 찰나와 연박은 비유정에 도 통하는 연기이다. 나아가 찰나와 연박은 유루 무루 모두와 통하고 분위와 원속은 오로지 유루에 국한되기 때문에 '등'이라고 하였다. 참고로 중현은 경에서는 개별적 사실의 원인[別因]만을 관찰하여 다만 그 일부만을 표기하고 해석하였을 뿐이기 때문에 요의설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컨대 "비록 탐 등 도 역시 행(行)의 연(緣)이 되고, 또한 12처는 모두 '촉'의 연이 되지만 개별적 사실의 원인으로 관찰함에 따라 다만 6처라고 표기하였을 뿐이다. 또한 상(想) 등도 역시 촉을 연으로 삼지만 개별적 사실의 원인으로 관찰하여 단지 '촉'을 연으로하여 '수'가 있다고 표기하였을 뿐이다."(『현종론』 권제14, 앞의 책, p.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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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을 [경과 논의] 차별이라 한다.
  
  그렇다면 계경에서는 어째서 오로지 유정에 대해서만 설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전제와 후제와 중제에 걸친
  다른 이의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於前後中際 爲遣他愚惑
  
  논하여 말하겠다. 3제(際)에 대한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愚惑]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으니, 오로지 유정들만이 3제를 차별하기 때문이다.
  유정이 전제(前際)에 대해 어리석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전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과거세에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나는 어떠한 존재[何等]로서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인가? 나는 어떠한 방식[云何]으로서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인가?'63)
  유정이 후제(後際)에 대해 어리석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후제에 다음과 같이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미래세에 마땅히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어떠한 존재로서 마땅히 존재할 것인가?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서 마땅히 존재할 것인가?'
  
  
  
63) 첫 번째는 자아의 존재에 관한 의심이고, 두 번째는 자아가 존재한다면 자아는 바로 온[卽蘊]인가, 온과는 별도의 다른 존재[離蘊]인가, 온이면 색인가, 내지 식인가 하는 자아의 자성에 관한 의심이며, 세 번째는 존재양태에 관한 의심이다. 즉 3세에 걸친 이러한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3세에 걸친 유정의 연기로서 12지를 설하였다는 것이다.
[434 / 1397] 쪽
  유정이 중제(中際)에 대해 어리석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중제에 다음과 같이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 바로 지금의 나인가? 지금의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나는 누구의 소유이며, 나는 당래 무엇이 될 것인가?'
  바로 이와 같은 3제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 경에서는 오로지 유정만의 연기를 설하였으니, 그(전제·후제·중제) 순서대로 무명과 행, 생과 노사, 그리고 '식'에서부터 '수'에 이르기까지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3제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 오로지 유정만의 연기를 설하였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계경에서 "필추(苾芻)들이여! 잘 들으라. 만약 어떤 필추가 있어 온갖 연기(緣起)와 연이생(緣已生)의 법에 대해 참답고 올바른 지혜로써 능히 관찰하였다면, 그는 반드시 3제에 대해 어리석고 미혹하지 않을 것이니, 이를테면 '나는 과거세에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등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64)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애(愛)·취(取)·유(有)의 세 지는 역시 또한 다른 이의 후제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설한 것이니, 이 세 지는 모두 후제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65)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연기문을 설하면서 12지(支)가 있다고 하였을지라도 세 가지와 두 가지를 본질[性]로 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세 가지란 이를테면 혹(惑, klesa)·업(業, karma)·사(事, vastu)를 말하고, 두 가지란 이를테면 인(因)과 과(果)를 말한다.
  그 뜻은 어떠한가?
  
  
  
64) 『잡아함경』 권제12 제296경(대정장2, p. 84중하). 본문 중에서 연기(prat tyasamutp da)가 원인이 되는 능생(能生)의 법이라면, 연이생(prat tyasamupanna)은 결과가 되는 소생(所生)의 법이다. 두 개념에 대해서는 주77) 이하를 참조 바람.
65) 즉 앞에서 '식'에서부터 '유'에 이르는 8지(支)는 중제 즉 현재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 설하였다고 하였는데, 애 등의 지는 그것이 존 재하는 중제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후제의 어리석음도 역시 제거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칭우(稱友)에 의하면 이러한 세 지는 중제가 아니 라 오로지 후제의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 설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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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 가지는 번뇌이고, 두 가지는 업이며
  일곱 가지는 사(事)이나 역시 결과로도 일컬어지는데
  [전제·후제에서] 결과를 생략하고 아울러 원인을 생략한 것은
  중제에 의해 그 두 가지를 추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三煩惱二業 七事亦名果
  略果及略因 由中可比二
  
  논하여 말하겠다. 무명(無明)과 애(愛)와 취(取)는 번뇌를 본질로 하고, 행(行)과 유(有)는 업을 본질로 한다. 그 밖의 식(識) 등의 일곱 가지는 사(事)를 본질로 하니, 이것들은 번뇌와 업의 소의사(事)가 되기 때문이다.66)
  이와 같은 일곱 가지의 '사'는 또한 역시 결과라고도 일컬어지며, 이에 준하여 볼 때 나머지 다섯 가지 또한 원인으로 일컬어지니, 번뇌와 업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중제에서만 결과와 원인을 널리 설한 것인가? 즉 [어떠한 이유에서 중제에서는] '사'에 다섯 가지를, '혹'에 두 가지를 포함시켰으며, 후제에서는 결과(즉 노사의 결과)를 생략하고 '사'에 오로지 두 가지만이 있다고 하였으며, 전제에서는 원인(즉 무명의 원인)을 생략하고 '혹'에 오로지 한 가지만 있다고 한 것인가?67)
  중제를 널리 설함으로써 전·후의 두 제를 추리하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중제에 의해 전제와 후제의 인과는] 이미 널리 이루어진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이니, 설해 보았자 번거롭기만 할 뿐 아무
  
  
  
66) 여기서 사(事, vastu,vatthu)란 혹(惑), 즉 번뇌와 업의 이숙과로서 드러나는 현행과 미래의 괴로움을 말함. 즉 그 같은 괴로움은 바로 다시 제 번뇌와 업의 소의처(所依處)가 되기 때문에 실체로서의 의미인 '사'로 일컫게 된 것이다.
67) 중제(즉 현재)의 8지 중 식·명색·6처·촉·수는 전제(과거)의 결과로서 '사(事)'이며, 수·취와 유는 후제(미래)의 원인으로 혹과 업이다. 그러 나 전제의 무명·행은 중제의 원인으로 혹과 업일 뿐이고, 후제의 생·노사는 중제의 결과로서 '사'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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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68)
  만약 이러한 연기의 지(支)에 오로지 열두 가지뿐이어서 더 이상 노사의 결과를 설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생사에 끝이 있어야 할 것이며, 무명의 원인을 설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생사에 시작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혹 그렇지 않을 경우, [다시 말해 무시무종이라 할 경우] 마땅히 별도의 다른 연기의 지를 세워야 할 것이며, 별도의 다른 연기의 지에 다시 또 다른 연기의 지를 세워야 할 것이니, 그럴 경우 무한소급[無窮]의 허물을 범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연기의 지를] 세울 필요가 없으니, 그렇더라도 앞에서와 같은 허물은 없다. 즉 세존께서는 뜻에 따라 이미 이에 대해 밝히셨기 때문이다.
  이미 어떻게 밝히셨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혹(惑)'으로부터 '혹'과 '업'이 생겨나고
  '업'으로부터 '사'(事)가 생겨나며
  '사'로부터 '사'와 '혹'이 생겨나니
  존재하는 지(支)의 이치는 오로지 이것뿐이다.
  從惑生惑業 從業生於事
  從事事惑生 有支理唯此
  
  논하여 말하겠다. '혹(惑)으로부터 혹이 생겨난다'고 함은 '애'로부터 '취'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혹으로부터 업이 생겨난다'고 함은 '취'로부터 '유'가 생겨나고, '무명'으로부터 '행'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68) 즉 과거세의 혹인 무명은 현재세의 혹(애·취)과 동일하므로 그 이전에도 식·명색 등의 5지의 결과가 있음을 현재의 8지를 통해 알 수 있다. 또 한 미래세의 '사'인 생·노사는 현재세의 사(식·명색·6처·촉·수)와 동일하여 5지에 애·취·유의 원인이 있는 것처럼 생·노사에도 역시 이에 상응하 는 무명·행의 원인이 일어난다. 이처럼 현재세의 혹·업·사의 관계를 통해 혹(무명)·업(행)의 과거세와 사(생·노사)의 미래세에도 각기 그 원인과 결 과를 추리해 볼 수 있기 때문에, 12지연기에서 그 시작에서는 과거세의 원인만을 설하고 끝에서는 미래세의 결과만을 설한 것이다. 주53) 도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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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業)으로부터 사가 생겨난다'고 함은 '행'으로부터 '식'이 생겨나고, 아울러 '유'로부터 '생'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사(事)로부터 사가 생겨난다'고 함은 '식'으로부터 '명색'이 생겨나고, 내지는 '촉'으로부터 '수'가 생겨나며, 아울러 '생'으로부터 '노사'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로부터 혹이 생겨난다'고 함은 '수'로부터 '애'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존재하는 지(支)를 설정하는 이치는 오로지 이 같은 사실에 따른 것으로, 노사(즉 事)가 '사'와 '혹'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이미 밝혀졌고, 아울러 무명(즉 혹)이 '사'와 '혹'의 결과가 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즉 무명과 노사는 '사'와 '혹'을 자성으로 하기 때문이니, 어찌 다시 또 다른 연기의 지를 일시 설정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69)
  그래서 경에서는 "이와 같이 순대고온(純大苦蘊)이 집기(集起)하였다"고 설하고 있으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 경의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70)
  그러나 다른 어떤 논사는 이같이 해석하여 말하고 있다. "또 다른 계경에서는 '비리작의(非理作意)가 무명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으며, '무명은 다시 비리작의를 낳는다'고 하였다. 비리작의 역시 또한 취(取)의 갈래[支]에 포섭되기 때문에 이 계경 중에서도 역시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71)
  
  
69) 따라서 노사(미래세 事)는 바로 현재세의 '사'인 명색·6처·촉·수의 네 지와 동일하며, 아울러 무명(과거세 惑)은 바로 현재세의 혹인 애·취의 경우와 동일하기 때문에, 노사는 무명을 결과로 하며, 무명은 노사를 원인으로 하는 것이다. 각 지의 상응관계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70) 즉 『아함경』에서는 일반적으로 12연기지를 순역(順逆)으로 설한 다음 반드시 순대고취(純大苦聚)의 집멸(集滅)을 설하고 있는데, 만약 '사(事)' 인 노사는 '사'와 '혹'의 원인이 되고, '혹(惑)'인 무명은 '혹'과 '사'의 결과가 되어 12연기가 유정의 끊임없는 전전유전의 존재형식으로 체계화된 것이 아니라면, 단지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는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다고만 설하고 '……내지 순대고취의 집이 있다'고는 설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며 , 그럴 경우 앞에서의 힐난처럼 유시유종(有始有終)이 되는 과실을 범하게 된다.
71) 여기서 어떤 논사는 광기에 의하면 고(古)세친(칭우에 의하면 如意아차르야 親敎師 장로 세친). 즉 경(『잡아함경』 권제13 제334경(이른바 『有 因有緣有縛法經』)에서 비리작의(不正思惟)는 무명의 '인'이고 '연'이고 '사(縛)'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12연기에는 무궁(無窮)의 과실이 없으며, 그것 은 또한 취에 포섭되는 것으로 12지와는 별도의 갈래가 아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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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비리작의가 어떻게 취의 갈래에 포섭되는 것인가? 만약 이것(비리작의)이 그것(취)과 상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애와 무명도 역시 마땅히 그것에 포섭되어야 할 것이다.72) 설혹 그것에 포섭된다고 인정할지라도, 비리작의가 무명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능히 논증할 것인가? 만약 그것(취)에 포섭된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무명의] 원인과 결과가 된다고 한다면 애와 무명도 역시 그것에 포섭되기 때문에 마땅히 그것을 별도의 연기지로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73)
  또 다른 어떤 논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말하고 있다. "또 다른 계경에서는 '비리작의(非理作意)가 무명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으며, '무명은 다시 비리작의를 낳는다'고도 하였다. 나아가 비리작의는 촉(觸)의 순간 존재하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경에서는 '안(眼)과 색(色)이 연(緣)이 되어 우치[癡]에서 생겨나는 염촉(染觸)의 작의(作意)를 낳는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염촉작의)은 수(受)의 상태에서 반드시 무명을 인기한다. 그래서 또 다른 경에서 '무명과 촉에 의해 생겨난 온갖 수를 연으로 하여 애를 낳는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촉의 순간에 존재하는 비리작의는 수와 함께 전전(展轉)하여 무명의 연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무명에는 원인이 없다는 과실이 없으며, 또한 역시 [그러한 원인을 제시하기 위해] 또 다른 연기의 지분을 세울 필요도 없으며, 또한 그에 따라 끊임없이 연기의 지분을 세워나가야 하는 무한소급[無窮]의 과실도 없게 된다. 왜냐 하면 계경에서 '안과 색이 연이 되어 치(癡)에서 생겨나는 염촉의 작의를 낳는다'고 설한 것처럼 비리작의는 치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74)
  
  
72) 즉 비리작의가 취 중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애와 무명도 역시 취 중에 포섭되기 때문에 별도로 설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힐난.
73) 만약 비리작의가 취 중에 포섭된다는 사실 자체가 무명의 원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애와 무명에 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뜻.
74) 이 논설은 보광과 칭우 모두 경부사(經部師) 실리라다(室利羅多, r l ta)의 설로 전하고 있으며, 『순정리론』 (권제28)에서는 상좌(上座) 설 로 언급되고 있다. 그는 제 계경을 논거로 삼아 무명과 비리작의의 상호인과로써 유부의 혹·업·사의 3도설을 대신하고 있다. 즉 비리작의는 근·경·식 삼사화합하여 촉이 성립할 때 무명을 근거[因]로 하여 함께 생겨나며, 촉의 순간 비리작의는 다시 촉에 의해 낳아진 온갖 수(受)를 조건(緣)으로 하여 애 (愛)를 산출함으로써 무명을 낳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무명을 떠난 촉(즉 비리작의를 여윈 촉)은 전도된 것이 아니며, 전도되지 않은 촉은 능히 염수 (染受)의 연이 되지 않으며, 나아가 그것(무명을 떠난 수)은 더 이상 애의 연이 되지 않는다. 곧 이 같은 이증(理證)에 따라 무명을 인(因)으로 하는 비 리작의는 촉(觸)·수(受)를 통하여 무명의 연이 됨을 안다'는 것이 본 논설의 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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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의 다른 경에서 비록 이와 같은 진실된 말씀(비리작의에 의해 무명이 생겨나고, 무명은 다시 비리작의를 낳는다)을 설하고 있을지라도 이 경 중에서 설해진 내용에 대해서도 마땅히 반드시 다시 설해보아야 할 것이다.75)
  더 이상 [경증을] 설할 필요가 없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이증(理證)에 따라 그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이증이라 한 것인가?
  무명을 떠난 수(受)는 능히 애(愛)의 연이 되지 않으니, 아라한의 '수'는 더 이상 애를 낳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전도됨이 없는 촉은 능히 염수(染受)의 연이 되지 않으며, 또한 역시 무명을 떠난 '촉'을 전도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니, 아라한의 '촉'은 더 이상 전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이치를 증거로 삼았기 때문에 그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7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크나큰 과실을 범하게 될 것이니, 온갖 정리(正理)에 의해 획득된 일체의 앎[證知]은 모두 더 이상 [경증을] 설할 필요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설한 바는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하였던 경에서 '노사에 결과가 있고 무명에 원인이 있다'고 별도로 설하지 않았다고 해서 생사에는 바로 끝과 시작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힐난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경의 뜻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75) '그 밖의 다른 경'은 다른 어떤 논사가 인용한 '비리작의에 의해 무명이 생겨나고, 무명은 다시 비리작의를 낳는다'는 경문. '이 경에서 설해진 내용'이란 앞서 『대연기경』에서 혹·업·사의 윤환적 관계로 노사와 무명의 관계를 해석한 것.
76) 무명을 인(因)으로 하는 비리작의는 촉·수를 통하여 무명의 연이 된다. 이를테면 무명이 배제된 아라한의 촉·수는 애를 낳지 않지만 이미 '수는 애의 연이 된다'고 하였을 때 수의 배후에 무명을 예상해야 하며, 따라서 비리작의는 다시 애를 낳는 촉·수를 통해 무명의 연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당연 한 이치라는 뜻. 이는 앞서 논설한 경부사 실리라다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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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설한 이치가 원만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러한 경들은 다만 교화될 자의 3제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고자 하여 설한 것일 뿐이다. 즉 교화될 자들은 오로지 '유정은 어떻게 3세에 걸쳐 연속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어떻게 전세로부터 금세에 태어날 수 있으며, 어떻게 금세로부터 다시 능히 후세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이 같은 의심 만을 낳기 때문에 여래는 다만 그들의 의심을 제거해 주기 위해 이미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은 12지의 연기를 설한 것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전제와 후제와 중제에 대한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세존께서는 여러 필추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연기법(緣起法)과 연이생법(緣已生法)에 대해 설하리라"고 하였다.77) 이 두 가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바야흐로 본론(本論)의 문구상에서는 이 두 가지의 차별이 없으니, 다 같이 일체법을 포섭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78)
  어떻게 미래의 아직 생기하지 않은 법을 과거나 현재의 법과 마찬가지로 '연이생'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미래의 아직 조작되지 않은 법을 과거나 현재의 법과 마찬가지로 '유위'라고 이름하여 설할 수 있는 것인가?
  능히 [이숙과를] 조작하려는 의지의 힘[思力]이 이미 조작하였기 때문이다.7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미래의] 무루는 어떻게 유위가 되는 것인가?80)
  그것도 역시 선한 의지력에 의해 이미 조작되었기 때문이다.
  
  
  
77) 『잡아함경』 권제12 제298경(대정장2, p. 85상).
78) 여기서 본론은 『품류족론』 권제6(대정장26,p,715하)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유위법이다……연이생법도 역시 그러하다.'
79) 미래의 이숙법은 이미 '조작된 것(sa skrita, 즉 유위)'은 아니지만 능히 이숙을 조작하려는 의지[思, cetan ]가 조작되었기 때문에 유위라고 이름할 수 있다는 뜻.
80) 만약 의지의 힘이 조작되었기 때문에 유위라고 이름한다면, 미래의 무루는 그렇게 조작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유위라고 일컬을 수 있는가 하는 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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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열반을 획득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81)
  이치상 실로 마땅히 종류에 의거하여 설하였다고 말해야 한다. 이를테면 아직 변괴(變壞)되지 않는 것도 역시 '색'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과 같으니,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렇게 설하더라도 어떠한 과실이 없는 것이다.82)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 경의 뜻을 바로 해석하여 게송으로 말하겠다.
  
  [계경의] 뜻을 바로 설할 것 같으면, 이(12지) 가운데
  원인의 상태가 연기이고, 결과의 상태가 연이생이다.
  此中意正說 因起果已生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지(支) 중에서 원인으로서의 상태[因分]를 설하여 '연기'라고 이름하니, 이것을 연(緣)으로 하여 능히 결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갖 지 중에서 결과로서의 상태[果分]를 설하여 '연이생'이라고 이름하니, 이것은 모두 연에 따라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지(支)는 두 가지 뜻(연기와 연이생)을 함께 성취하니, 온갖 지는 모두 원인과 결과로서의 성질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들을 설정함에 있어 마땅히 두 가지 모두를 성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83)
  그렇지 않다. 보는 관점에 따라 차별이 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만약 이것을 보고서 '연이생'이라고 이름할 때에는 그것을 또한 '연기'라고는 이름하지 않으니, 마치 원인과 결과의 관계와 같고 아버지와 아들 등의 관계와 같다.
  
  
  
81) 만약 무루법에 대해서도 획득 가능성으로서 이미 조작된 것이라고 해석하는다면, 열반도 역시 획득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이미 조작된 것' 즉 유위라고 해야 할 것이다는 힐난.
82) 이는 '변괴하는 것'을 색이라 이름하지만, 아직 변괴하지 않아도 색이라 이름할 수 있듯이 삼세에 걸쳐 동일한 종류로서 상속하는 것이라면 아직 조작되지 않았을지라도 유위라고 이름할 수 있다는 논주 세친의 정석(正釋)이다.
83) 즉 열두 가지의 각각의 지는 원인(연기)과 결과(연이생)로서의 성질을 함께 지닌다고 한다면, 인이 될 때에는 과가 되지 않으며, 과가 될 때에는 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인과의 두 가지 뜻은 함께 성립할 수 없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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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존자 망만(望滿, P r a)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제법으로서 연기이면서 연이생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는 말하자면 미래법이다. 제2구는 말하자면 아라한의 최후심의 상태에서의 과거·현재의 제법이다. 제3구는 말하자면 그 밖의 과거·현재의 제법이다. 제4구는 말하자면 온갖 무위법이다."84)
  그러나 경부(經部)의 여러 논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논설한 바(유부의 분위연기설과 존자 망만의 4구분별)는 자기 자신의 정리(情理)에 따라 기술한 것인가, 경의 뜻을 기술한 것인가? 만약 바로 경의 뜻에 따라 기술된 것이라고 한다면 경의 뜻은 그렇지가 않다.
  어떻게 하여 그러한가?
  바야흐로 앞에서 설한 '분위연기의 열두 가지 지분은 오온을 12지[의 본질]로 삼는다'고 한 사실은 계경에 위배하니, 경에서는 이와 다르게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설하기를, '무엇을 일러 무명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전제에 대한 무지(無智)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85) 이는 요의설(了義說)이니, 이를 억지로 불요의라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앞에서 설한 분위의 연기는 경의 뜻과 상위하는 것이다."86)
  
  
84) 존자 망만의 뜻은 원인에 의해 이미 생겨난 것을 연이생법이라 하고, 다른 것에 대해 원인이 되는 것을 연기법이라 한다는 것이다. 곧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의 유위법도 능히 원인이 되어 후법을 낳기 때문에 연기법이라 할 수 있으며(제1구), 아라한 최후심의 온은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연이생법이지만 더 이상 후법을 낳지 않기 때문에 연기법이 아니다.(제2구) 그 밖의 과거·현재의 유위법은 이미 생겨난 것이면서 능히 후법을 낳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연기이면서 인연생이다.(제3구) 그리고 무위법은 생겨난 것도 아니고 능히 다른 법을 낳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연기도 아니고 인연생도 아니다.(제4구) 이러한 존자 망만의 설은 범본에서는 전설(傳說, kila)로 언급되고 있는데, 『대비바사론』 권제23, 한글대장경118, p. 519)에 다른 다수의 해석과 함께 논설되고 있다.
85) 『잡아함경』 권제12 제298경(대정장2, p. 85상)."云何無明? 若不知前際, 不知後際, 不知前後際, 不知於內. 不知於外, 不知於內外, 不知業, 不知報, 不知業報…… 是名無明."
86) 즉 무명을 무지(無知)라고 설한 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명백한 사실[요의설]인데, 여기에 경에 나타나지 않는 또 다른 말(즉 오온)을 보충하여 그 뜻을 취하는 것은 요의의 경을 불요의로 간주하는 것이라는 뜻. 즉 유부에서는 12연기의 각 지분은 모두 오온을 본질로 하지만 두드러진 상태에 따라 그 명칭을 얻게 되었다는 분위연기설을 채택하는 한편, 그것들은 보는 관점에 따라 원인이 되기도 하고[연기] 결과가 되기도 한다[연이생]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경설에 따르지 않은 자의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경증에 의 분위연기설을 비판하고 있지만 『순정리론』 권제27(대정장29, p. 494중하)에서는 상좌( r l ta)의 설로서 여섯 가지 이증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 개요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전위(前位)의 오온을 연으로하여 후위(後位)의 오온을 인생(引生)한다' 함은 무간생이지 연기의 도리는 아니다. 왜냐 하면 첫 번째, 분위연기는 최초의 결생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즉 경에서는 다만 식이 입태한다고 하였다). 둘째 분위연기일 경우 6처에 의해 촉·수 등 제번뇌가 일어나고, 번뇌에 의해 업이, 업에 의해 생이 나타난다고 하는 차제(次第) 계기의 이치가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선행한 것이 반드시 원인이 된다는 원인의 차별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오온에서 오온으로 변이한 것이 되어 인과의 차별은 허물어지고 만다. 넷째, 만약 애위(愛位)나 취위(取位)에서 아라한을 얻게되면 애를 연으로 하는 취위와 취를 연으로하는 유가 없어야 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다섯째, 수를 연으로 하여 애가, 애를 연으로 하여 취가 생겨나지만 분위연기로 해석할 경우 그러한 상태는 이미 과거하여 거듭 생겨나지 않게 될 것이다. 여섯째, 연기를 계기상속으로 설하는 『연기경』(중아함 『大因經』)은 바로 요의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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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체의 경은 모두 요의설이 아니며, 역시 또한 두드러진 사실에 따라 설한 것도 있으니, 예컨대 『상적유경(象跡喩經)』에서 "무엇을 내(內)의 지계(地界)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모발이나 손톱 등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87) 즉 그 경에서는 그 밖의 다른 색 등의 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두드러진 것에 대해 설하였을 뿐으로 [그대가 언급한] 이 경에서도 역시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
  [그대가] 인용한 경은 예증이 되지 않는다. 즉 그 경(『상적유경』)에서는 지계(地界)로써 모발 등으로 분별하려는 것이 아니니, 그럴 경우 모두 갖추어 설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그 경에서는 모발 등으로써 지계를 분별하려는 것으로, 모발 따위를 벗어나는 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계경은 모두를 갖추어 설한 것이라 할 수 있다.88) 이 경(앞서 인용한 『잡아함』 제298경)에서 설한 무명 등의 지분도 역시 마땅히 그 경(『상적유경』)과 같은 구족설이라 할 수 있으니, 거기서 설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그 밖에 달리 다른
  
  
87) 『상적유경』은 『중아함경』 권제7(대정장1, p. 464)에 실린 경으로, 여기서 내(內) 지계(외 지계는 대지)로 언급한 머리털이나 손톱 등은 하나 의 특징적 사례일 뿐 완전한 진술은 아니다는 뜻.
88) 즉 『상적유경』에서의 모발의 예를 협의(즉 1요소)의 지계에 의해 광의(즉 4대소조)의 모발 등을 분별하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한, 모발 뿐 아 니라 지계를 포함하는 내적 존재(육체) 모두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구족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이는 모발로써 지계를 분별하려는 것이기 때 문에 구족설 즉 완전설이라 할 수 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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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89)
  어찌 모발 따위 이외의 콧물이나 눈물 따위 중에도 지계의 본질이 역시 존재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 경에서는 역시 콧물이나 눈물 등에 대해서도 모두 설하고 있으니, 예컨대 '또한 신체 중에 [모발이나 손톱 이외] 다른 것도 있다'고 설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설령 그 경[을 해석한 것]과 마찬가지로, [즉 모발 따위 이외에도 지대가 있듯이 전제에 대한 무지를 떠나] 또 다른 무명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마땅히 드러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러한 무지와는] 다른 존재[異類, 즉 오온]를 도출하여 무명지라고 한다면 여기에 어떠한 이익이 있을 것인가? 비록 [12지의] 온갖 상태에 모두 오온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러나 '이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 저것도 결정적으로 있고 없다'고 하는 경우 이러한 법만을 저러한 법(즉 결과)의 지(支)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90) 혹은 [아라한의 경우] 오온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행'도, 복(福, 선)과 비복(非福, 불선)과 부동(不動, 무기)의 행에 따른 '식'도, 나아가 '애' 등도 존재하지 않는다.91) 그렇기 때문에 경(앞서 인용한 『잡아함』 제298경)의 뜻은 바로 참답게 설해진 것이다.
  나아가 앞에서 설한 4구의 이치도 역시 그렇지 않다. 만약 미래의 제법이 연이생이 아니라고 한다면 바로 계경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 경에서 설하기를, "무엇이 연이생법인가? 이를테면 무명·행 내지 생·노사가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92) 혹 [생·노사의] 두 가지 법은 미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이는 바로 앞에서 설정한 3제(際)의 연기설을 허물어버리
  
  
89) 모발 이외에 따로이 내적 지계가 존재하지 않듯이, 무명은 전제에 대해 무지한 것 이외 별도의 오온 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90) 예컨대 무명의 상태에 색 등의 온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행은 오로지 무명에 의한 것으로, 무명이 있기 때문에 행이 있으며 무명이 없으면 행도 없다. 그럴 때 무명 만을 행의 연기(즉 원인) 지(支)로 설정할 뿐인데, 그 밖의 오온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힐난.
91) 즉 아라한에게 비록 오온이 존재할지라도 번뇌가 없기 때문에 행(行)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에 따른 결생의 식(識)도, 나아가 애·취·유도 존재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온을 본질로하는 연기의 12지를 세울 수 없다.
92) 『잡아함경』 권제12 제296경(대정장2, p. 84중). 즉 생과 노사는 미래법이지만 본 경에서는 그것을 연이생법(연생법)이라 하였으므로 앞의 인용 한 존자 망만의 설(제법으로서 연기이면서 연이생이 아닌 것은 미래법이다)은 오류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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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것이 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연기는 바로 무위법이니, 계경에서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시던 혹은 세간에 출현하지 않으시던 이와 같은 연기의 법성(法性)은 상주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93)
  이와 같은 뜻에 의할 것 같으면 이치상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와는 다른 뜻에 의거할 경우 이치상 그렇지 않다.
  무엇을 일컬어 '이와 같은 뜻'이라 하고, 무엇을 일컬어 '이와는 다른 뜻'이라고 한 것인가? 또한 '그럴 수 있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함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이를테면 만약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시던 혹은 세간에 출현하지 않으시던 행(行) 등은 항상 무명 등을 연으로 하여 일어나고, 그 밖의 다른 법을 연으로 하여서는, 혹은 더 이상 연이 없을 경우에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상주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이와 같은 뜻'으로 [연기를 무위법이라고] 설하였다면 이치상 '그럴 수 있다.'94) 그러나 만약 "연기라고 이름하는 또 다른 법체가 있어 고요히 상주한다고 설하였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이와는 다른 뜻'으로 [연기를 무위법이라고] 설하였다면 이치상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연이생의] '생(生)'이나 [연기의] '기(起)'는 다 같이 유위상(相)이기 때문에, 이와는 별도로 존재하는 영원한 상법(常法, 즉 무위법)이 무상법(즉 유위법)의 상이 된다고 하는 것은 가히 정리(正理)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일어남[起]'은 반드시 '일어나게 하는 것[起者]'에 근거하여 설정되는 것으로, 이러한 상주법과 그러한 무명 등[의 무상법]이 어떻게 서로 관계하여 '이러한 법(무위 상주법)을 그러한 법(유위 무상법)의 근거로 설정하여 그러한 [무명 등의] 연기(즉 원인)가 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95) 또한 연기를
  
  
93) 여기서 어떤 이는 『대비바사론』 권제23(앞의 책, p. 512)에 의하면 분별설부이나, 전통적으로 『이부종륜론』에 따라 대중부로 알려진다. 인용 한 계경은 앞서 인용한 『잡아함경』 권제12 제296경.
94) 이 때 '상주(常主)'는 영속이 아니라 결정적이라는 뜻이다.
95) 사물의 생기는 반드시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원인에 의존해야 하는데, 만약 연기의 본질이 무위라면 무명 등의 무상법은 바로 이 같은 상주법인 연기에 의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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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컬어 그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말할 경우, 이와 같은 말[句]에는 뜻과 상응하는 이치가 없는 것이다.96)
  여기서 '연기(緣起)'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뜻의 말인가?97)
  발랄저(鉢剌底, prati)는 바로 '이르다[至, pr ti]'의 뜻이고, 의지(醫地, iti)의 어근[界, 즉 i]은 '간다[行, gati]'는 뜻인데, 앞의 접두사(즉 prati)의 힘에 의해 어근의 뜻이 전변하였다. 그래서 '간다'가 '이르다'는 뜻에 의해 '연(緣)하여'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삼(參, sam)은 바로 화합의 뜻이고, 올(?, uT>은 상승의 뜻이며, 발지(鉢地, p di)의 어근(즉 p d)은 존재[有, sattv ]의 뜻이다. 즉 존재가 화합과 상승의 뜻과 결합하여 '일어나다[起]'는 뜻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어떤 존재가 연에 이르러 화합 상승하여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98)
  이와 같은 말의 뜻은 이치상 옳지 않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96) 연기는 다음의 어의 해석에서 보듯이 '연에 이르러 집기(集起)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을 상주법이라고 하면 그것은 어법상 모순이다는 뜻.
97) 연기(緣起)는 범어 prat tya samutp da(=prati-itya-sam-ut-p da) 즉 발랄의저삼올발지(鉢剌醫底參?鉢地)의 역어. 이하 이 말의 뜻에 대해 해 석한다.
98) 법보(法寶)에 의하는 이 논설은 경부종의에 근거한 논주 세친의 해석이다. (그러나 보광은 유부 혹은 경부의 해석으로 평석하고 있다.) 즉 이는 정통 유부논사인 중현의 해석과도 다르고, 후술하는 경부의 해석을 세친이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세친의 해석으로 생각된다. 이에 의하는 한 연기란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고 할 때, 행이라고 하는 법이 무명이라고 하는 연에 이르러 생기하는 것이다. 참고로 중현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prati는 현전(現前)의 뜻이고, iti(壹女)의 어근 i는 존재[有]의 뜻으로, 일자(一字)의 어근 중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근 i는 접두사 prati에 의해 연(緣)의 의미가 된다. 어미 ktva(訖, 접두사가 붙을 경우는 tya)는 '이미[已]' 의 뜻으로, '연'이란 이것이 어근과 합하여 변화함으로써 이루어진 말이다. abhisam(獵比參)은 화합의 뜻이고, ut는 상승의 뜻이며, pada의 어근 pad는 존재[有]의 뜻이다. 곧 ut가 앞에 옴에 따라 어근 pad는 '일어난다[起]'는 뜻이 된다. 이상의 뜻을 종합하면 '연(緣)이 현전하거나 이미 화합하여 법이 상승 생기한다'이며, 이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순정리론』 권제25, 대정장29, p. 481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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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작자에 의거하여 두 가지 작용이 있을 경우, 앞의 작용에 대해서는 마땅히 '이미'라는 말을 붙여야 하니,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목욕하고 나서[已] 비로소 식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어떤 법도 일어나기 이전에 존재하다가 먼저 '연에 이르고' 그 다음에 비로소 '일어나는 일'은 없으며, 또한 작자가 없으니 작용('이른다'는 작용)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99) 이를 게송으로 설하면 다음과 같다.
  연(緣)에 이르는 것이 일어나는 것보다 먼저라면
  [작자(일어난 것)가] 있지 않으므로 이치에 맞지 않고
  만약 양자가 동시라고 한다면 바로 허물어질 것이니
  그것을 마땅히 먼저 설해야 하기 때문이다.100)
  이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이제 바야흐로 성론(聲論)의 여러 논사들에 대해 반문하여 힐난해 보아야 할 것이다. 법은 어느 때의 것이 일어나는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설혹 그렇다고 하면 어떠한 과실이 있게 되는가?
  만약 현재의 법이 생기한다면 '이미 생겨난 것[已生]'이 아닌데 어떻게 현재를 성취할 것이며, 현재에 이미 생겨났다고 한다면 [생겨난 법이]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미 생겨난 법이 다시 일어난다고 할
  
  
  
99) 이는 성논사(聲論師, abdika) 즉 문법학자의 힐난이다. 즉 '목욕하고 식사한다(snatva bhunkte)'와 같이 한 작자에 두 작용이 있을 경우, 앞의 작용은 동사의 절대분사(혹은 遊離分司, gerund,absolute)적 용법(전철을 갖지 않은 어근의 경우 어미 tva를, 전철을 갖을 경우 어미 ya를 첨가)에 따라 이미 성취된 것이다. 즉 연기를 '∼에 이르러(pratitya) 생기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이상 '∼에 이르러'는 생기 이전의 작용이며, 따라서 '연'과 '기'는 전후하여 존재하는 작용이 되고 만다. 또한 그럴 경우 생기하기 이전에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데, 연에 이른 것은 무엇이며, 작자 없이 어 떻게 이른다는 작용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뜻.
100) 만약 먼저 연에 이르고 나서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엇이 연에 이를 것이며, 연에 이르는 것과 일어나는 것 이 동시라고 한다면 아직 연에 이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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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우 무한소급[無窮]에 이르게 된다. 또한 만약 미래의 법이 생기한다면 그 때는 아직 존재하지 않을 때인데 어떻게 작자를 성취할 것이며, 작자가 이미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작용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생기하려는 상태에서 역시 또한 바로 연에 이른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생기하려는 상태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미래세의 제행(諸行)이 바로 일어나려고 할 때, 이러한 상태를 역시 '연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성론의 논사들이 망령되게 설정한 작자와 작용도 이치상 실로 이루어질 수 없으니, 그들은 '이 같은 작자가 있어 이 같은 작용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여기에 '작용과는 다른 별도의 작자가 있어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은 진실로 인식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같은 뜻의 말(연에 이르러 생기한다)은 세속적 용법상에 있어서도 아무런 오류가 없는 것이다. 곧 이러한 연기의 뜻은 바로 [경에서] 설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것으로써 연기의 뜻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게송으로 설하면 다음과 같다.
  
  [작자(일어난 것)가] 존재하지 않아도 [작용은] 일어나듯이
  연에 이르는 것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니
  이미 생겨난 것이 일어난다고 하면 무궁(無窮)하게 될 것이며
  혹은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동시라도 역시 '이미'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으니
  '등불이 이르고 나서 어둠이 사라졌다'고 하거나101)
  '입을 벌리고서 잠을 잔다'고 말하기도 하니
  만약 후에 자는 것이라면 마땅히 입을 닫아야 하느니.102)
  
  
101) 원문에서는 '어둠이 이르고 나서 밝음이 사라졌다(暗至已燈滅)'이나 일상의 용례에 따라 그 반대로 번역하였다.
102) 본 송문은 앞서 성론(聲論)의 논사가 지적한 "한 작자에 의거하여 두 가지 작용이 있을 경우, 앞의 작용에 대해서는 마땅히 '이미'라는 말을 붙 여야 한다"는 것에 대한 해명이다. 즉 '등불이 이르는 것'과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나 '입을 벌린 것'과 '잠을 자는 것'은 동시이지만 '이미'라는 말을 붙여 선후를 나타내는 것(이를테면 開口已眠)은 세간의 언어관습에 불과하며, 만약 그것을 계기하는 실제적인 두 작용으로 이해할 경우 '입을 벌린 것'과 '잠을 자는 것'은 개별적 작용이 되어 입을 벌리고 난 다음에 잠을 자는 것이므로 그 때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입을 다물고서 잠을 잔다 '고 할지라도 한 작자에 의거한 두 가지 작용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따라서 작자와 작용을 개별적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논의의 취지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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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다른 뜻으로 이 같은 난문을 해명해야 할 것이니, 발랄저(鉢剌底, prati)는 바로 '여러 가지[種種]'의 뜻이고, 의지(醫地, iti)의 어근[字界, i]은 '지속하지 않는다[不住]'는 뜻이다. 즉 지속하지 않음은 여러 가지 조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 뜻이 변하여 '연(緣)'이 되었다. 그리고 삼(參, sam)은 바로 취집(聚集)의 뜻이고, 올(?, uT>은 상승의 뜻이며, 발지(鉢地, p di)의 어근( p d)은 '간다[行]'는 뜻인데, [접두사] '올'이 앞에 옴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하여 '생기[起]'가 된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연이 화합하여서 [부주(不住)의] 온갖 행법(行法)으로 하여금 취집 상승하여 생기하게 함을 설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103)
  이와 같은 해석은 여기(12연기)에서는 그럴 수 있으나 '안(眼)과 색(色)이 각각 연이 되어 안식을 일으킨다'는 사실 등에 있어서는 어찌 '여러 가지'와 '취집'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104)
  어떠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앞의 두 구절, 이를테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를 설한 것인가?
  [12]연기가 결정적인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 설한 것이니, 이를테면 또 다른 곳에서 '무명이 있음으로 해서 제행이 있을 수 있으며, 무명을 떠나서 제행은 있을 수 없다'고 설한 것과 같다. 또한 온갖 지(支)가 전생(傳生) 즉 상호의존하며 생겨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설한 것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103) 여기서 어떤 이는 경부(經部)의 상좌(上座) 실리라다(室利羅多, r lata)로서, 이는 바로 앞서 논설한 성론 즉 문법학파의 비판을 벗어나기 위 한 해석법이다. 즉 실리라다에 있어 연기란 '연에 이르러 생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연이 취집 화합하여 무상의 행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오온을 본질로 하는 분위연기설과 달리 각 지(支)는 철저하게 차별적이고 계시적이다. 곧 연기에 대한 유부와 경량부의 해석차이는 구시(俱時)와 이시(異 時)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후술)
104) 즉 안근은 단일하기 때문에, 연기를 '여러 가지 인연의 취집'이라 말하기 어렵다는 논주 세친의 비평 힐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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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가 있으므로 저러한 지가 있을 수 있고, 저러한 지가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그 밖의 다른 지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3제(際)가 전생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설한 것이니, 이를테면 전제가 있으므로 중제가 있을 수 있고, 중제가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후제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친연(親緣, 직접적 관계)과 전연(傳緣, 간접적 관계)을 나타내기 위해 설한 것이니, 이를테면 무명은 무간에 행을 낳기도 하지만 혹은 전전 상속하는 힘에 의해 비로소 제행(諸行)을 낳는 것이다.105)
  그러나 유여사는 해석하기를, "이와 같은 두 구절은 '원인이 없다[無因]'거나 반대로 '영속하는 원인[常因]이 있다'고 하는 두 가지 주장을 깨트리기 위해 설한 것이다. 즉 원인이 없이 제행은 있을 수 없으며, 항상하는 자성(自性)이나 자아는 생인(生因)이 없기 때문에 제행을 낳을 수 없는 것이다.10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바로 앞의 구절은 무용하게 될 것으로, 다만 뒤의 구절 '이것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겨난다'만으로도 능히 두 가지(無因論과 常因論) 모두를 깨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혹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자아가 있어야 그것을 소의처로 삼아 행(行) 등이 있을 수 있으며, 나아가 무명 등의 원인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행 등이 생겨날 수 있다"고 하였다.107)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그 같은 주장을 제거하기 위해 '[행 등의] 결과는 그것을 낳는 원인(즉 무명)에 의한 것
  
  
105) 즉 무명은 행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전전 상속하는 힘에 의해 식(識) 등의 제행을 낳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 같 은 사실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는 2구를 설하였다는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설은 논주의 해석으로, 결론적으로 앞의 2구는 12연기의 각 지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설한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106) 즉 첫 구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무인론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고, 제2구 '이것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겨난다'는 더 이상 원 인을 갖지 않는 자기존재인 상캬학파의 자성(prakriti)이나 바이세시카학파의 자아( tman)론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 이 주장은 보광에 의하면 경 부이사(經部異師) 세조(世曹). 중현의 『순정리론』에서는 상좌(上座)의 도당(徒黨), 칭우에 의하면 상좌 세개(世鎧, sthav- ira Vasuvarman)의 설이다.
107) 여기서 어떤 이는 베단타학파처럼 행위의 주체로서 자아를 설정하는 이를 말한다. 즉 자아가 행위의 생기원인은 아닐지라도(그것은 무명이다) 행 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작자가 선재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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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 [자아에 의한 것이 아니다]'고 판결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는 바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로서, 결과가 [자성과 같은] 별도로 다른 원인에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를테면 무명은 행에 연이 되고 나아가 마침내 이와 같은 순대고온(純大苦蘊)이 집기(集起)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궤범(軌範)의 여러 논사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은 인과의 부단(不斷)과 생기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즉 무명이 끊어지지 않음에 의해 제행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며, 무명이 생겨나므로 말미암아 제행도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이 전전 상속함을 마땅히 널리 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108)
  또한 어떤 이는 해석하기를, "[이러한 두 구절은] 인과의 지속[住]과 생기[生]를 밝히기 위해 설한 것이니, 이를테면 원인의 상속이 있으면 결과의 상속도 있으며, 아울러 원인이 생기함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생겨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고 하였다.
  이것(즉 연기)은 생기에 대해 분별하고자 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지속을 설하였겠는가? 또한 부처님은 어떠한 까닭에서 [생·주·이·멸의 4상을] 차례대로 설한 것을 허물고 먼저 지속[住]을 설하고 난 뒤에 생기[生]를 설하였겠는가?
  다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말하고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함은 결과가 있음으로 원인에 소멸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겨난다'고 설한 것은 [원인에 소멸이 있다고 할 경우] 결과가 원인 없이 생겨난다고 의심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인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비로소 일어날 수 있다'고 다시 말하게 된 것으로, 원인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109)
  경의 뜻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없게 된
  
  
  
108)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첫 구절의 뜻을 나타내고, '생기한다'는 것은 제2구의 뜻을 나타낸다. 여기서 궤범제사는 경부 궤범사( c rya).
109) 여기서 어떤 이는 경부의 상좌 실리라다(室利羅多). 즉 '결과가 생기할 때 원인은 이미 소멸하였다'고 하는 이 같은 논설은 바로 계시(繼時) 상 속을 주장하는 경량부 설에 기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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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고 설해야 하였을 것이다. 또한 마땅히 먼저 '원인이 생겨났기 때문에 결과가 생겨난다'고 말하고 나서 그 후에 '결과가 있으므로 원인이 없게 된다'고 말했어야 하였을 것이고, [그대가 해석한 대로라면] 이와 같은 순서가 선설(善說)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연기를 분별하고자 하면서 어떠한 순서에 의거하였기에 원인의 소멸을 먼저 설하는 것인가? 따라서 이는 경의 뜻이 아니다.
  
  다음으로 무엇을 일컬어 무명(無明)은 행(行)의 연(緣)이 되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생은 노사의 연이 된다고 함인가?
  나(세친)는 여기서 경에 따라 그 뜻을 간략히 밝히고자 한다. 이를테면 온갖 어리석은 이들은 연생(緣生)의 법이 오로지 행(行)임을 알지 못하고110) 그릇되이 아견(我見)과 아만(我慢)의 집착을 일으켜 스스로 낙(樂)이나 비고비락(非苦非樂, 즉 무기)을 향수하기 위해 신(身) 등의 각기 세 종류의 업을 조작한다. 즉 자신이 당래 낙을 받기 위해 온갖 복업을 짓고, 당래 낙과 비고비락을 받기 위해 부동업(不動業, 즉 선정의 업)을 지으며, 현세의 낙을 받기 위해 비복업(非福業)을 지으니,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무명이 행의 연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마치 화염이 치솟아 가듯이 인업(引業)의 힘에 의해 식(識)의 상속이 유전하여 각각의 취(趣)로 가니, 중유에 의탁하여서 태어날 곳으로 치달아 생유의 몸과 결합하는 것을 '행이 식의 연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이같이 해석할 경우 '식지(識支)는 6식과 통한다'고 분별한 계경에 잘 따르는 것이 된다.111)
  '식'이 선행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취(趣) 중에 오온을 구족하여 명색이 낳아진다. 즉 [명색은] 한 생애[一期生] 동안 두루 전전 상속하는 것으로, 『대
  
  
  
110) 인연에 의해 생겨난 일체의 법은 모두 무상 천류하는 오온일 뿐으로 그것을 '[유위]행'이라고 하였다. 즉 이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무명이 다.
111) 생유는 비록 오로지 제6의식일 뿐이지만 중유의 상태에서는 6식을 일으키기 때문에 세친은 여기서 식지를 중유와 생유에 통하는 것이라고 해석하 여 경설과 부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경에서는 항상 식지를 해석하면서, '식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6식신이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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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경(大因緣經)』이나 연기를 분별하는 여러 경에서 이와 같이 분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명색이 점차 성숙할 때 안(眼) 등의 근을 갖추게 되니, 이를 설하여 6처라고 한다.
  다음으로 [6처가] 경(境)과 화합하여 식을 낳을 경우,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순락수(順樂受) 등의 촉(觸)이 있으며, 이것에 의해 바로 낙(樂) 등의 3수(受)를 낳게 된다.
  이러한 3수에 의해 3애(愛)를 인기하여 낳으니, 이를테면 괴로움이 핍박함으로 말미암아 낙수(樂受)에 대해 욕애을 발생하기도 하며, 혹은 낙수와 비고비락수에 대해 색애를 발생하기도 하며, 혹은 오로지 비고비락수에 대해 무색애를 낳기도 하는 것이다.
  수(受)를 좋아하는 애(愛)로부터 욕(欲) 등의 취(取)가 일어난다. 여기서 욕취란 이를테면 5묘욕(妙欲)을 말하고,112) 견취(見取)란 『범망경(梵網經)』에서 널리 설하고 있는 62견과 같은 것이다.113) [계금취(戒禁取)에서] '계'란 이를테면 악을 멀리 떠나는 계를 말하며, '금'이란 이를테면 개나 소 따위가 금하는 것을 말하니, 예컨대 온갖 이계(離繫)와 바라문, 파수발다(播輸鉢多), 반리벌라작가(般利伐羅勺迦) 등 다른 종류의 외도가 나체로 다니거나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막대기나 새나 사슴의 가죽을 들고 다니고, 상투를 틀고 몸에 재를 칠하고, 삼장(三仗)을 들고 다니며 수염이나 머리털을 깎는 등 무의미한 고행을 지니는 것과 같은 것이다.114) 아어취(我語取)란 이를테면 내적인
  
  
112) 색·성·향·미·촉의 5경에 대한 집착.
113) 여기서 『범망경』이란 『장아함경』 권제14 『범동경(梵動經)』. 62견은 전제의 18견과 후제의 44견을 말하는 것으로, 전제의 18견은 4종의 상 론(常論), 4종의 일분상론(一分常論), 4종의 변무변론(邊無邊論), 4종의 불사교란론(不死?亂論), 2종의 무인론(無因論)이며, 후제의 44견이란 16종의 유 상론(有想論), 8종의 무상론(無想論), 8종의 비유상비무상론(非有想非無想論), 7종의 단멸론(斷滅論), 5종의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을 말한다.
114) 이계(離繫)는 니건자(尼乾子, N rgrantha) 즉 자이나교도를 말하는 것으로, 그들은 나행(裸行)을 추구한다. 광기에 의하면 바라문의 외도는 손 에 막대기를 들고 다니며, 새나 사슴가죽을 걸치는 금계를 수지한다. 파수발다(P up ta, 獸主 또는 牛主, '주'는 天主 Mahe vara)는 시바파의 일파 로서, 이들은 상투를 틀고 몸에 재를 칠한다. 반리벌라작가(Parivr jaka)는 출가자, 혹은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편력자로서 삼장(三仗)을 들고 다니며 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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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內身]을 말하니, 그것에 의해 '아(我)'를 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아견(我見)과 아만(我慢)을 일컬어 '아어'라고 한다"고 설하였다.
  무엇 때문에 유독 이러한 두 가지만을 아어취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이 두 가지 종류에 의해 자아가 존재한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어'라고 일컬은 것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필추들이여! 우매하고 들은 일이 없는 무문(無聞)의 온갖 이생류는 일시적 언설에 따라 아집(我執)을 일으키지만 거기에 실로 아(我)와 아소(我所)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115)
  앞서 언급한 네 종류의 '취'는 이를테면 욕탐(欲貪)을 말하니,116) 그래서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러 경에서 "무엇을 일컬어 '취'라고 하는가? 이른바 욕탐이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취'를 연으로 삼아 여러 가지 후유(後有)를 초래하는 업을 적집하게 되니, 이것을 설하여 '유(有)'라고 이름한다. 즉 세존께서 아난타에게 고하시기를, "후유를 초래하는 업을 설하여 '유'라고 이름한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유'를 연으로 하기 때문에 식이 상속 유전하여 미래의 생으로 나아가 앞에서의 도리와 마찬가지로 오온을 구족하니, 이것을 설하여 '생'이라 이름한다.
  '생'을 연으로 삼아 '노사'가 있으니, 그 상의 차별을 널리 설하자면 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117)
  이와 같은 [연기를] '순(純)'이라고 말한 것은 오로지 행(行)만이 존재할
  
  
115) 『중아함경』 권제11 『빈비사라왕영불경(頻娑羅王迎佛經)』(대정장1, p. 498중) 참조 .
116) '취'에는 이처럼 네 종류가 있지만 그 본질은 오로지 욕탐(chanda-r ga)이다. 여기서 '욕'이란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경계대상을 희구하는 것이고 , '탐'은 이미 획득한 대상을 희구하는 것이다.
117) 이를테면 『잡아함경』 권제12(대정장2, p. 85중), "무엇이 노(老)인가? 머리털이 희어지고 정수리가 드러나며 피부는 늘어나고 근(根)은 무루 익어 약해지고, 사지는 힘이 없고 등은 굽으며, 머리를 떨구고 신음하며, 숨길이 짧아 헐떡이며, 지팡이에 의지하여 걸으며 몸에는 검은 반점이 생겨나고 정신은 희미하고 업을 짓고 행하기도 어려우며 쇠약한 것을 늙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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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뿐, 아와 아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고취온(苦聚蘊)'이라고 말한 것은 괴로움의 집적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집(集)'이라고 말한 것은 온갖 고온(苦蘊)이 생겨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종의는 앞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다.118)
118) 이상 12연기의 의설(義說)은 논주 세친의 해석으로, 유부 비바사사의 종의는 앞에서 설한 대로 다만 '오온의 분위(分位) 차별이 12지(支)이다'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