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頭·參禪

선[禪]으로 마음을 닦아 - 무여 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2. 4. 12:19


불교[佛敎]는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발견한 최상最上의 진리眞理입니다.

여러분의 인생人生과 청춘을 송두리째 바쳐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것이 불교[佛敎]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아주 좋은 길이라도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그 길이 빛나고 영광榮光된 길일 수도 있고, 아주 부끄러운 오욕汚辱의 길일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 경전經典이나 어록을 놓지 말고 읽고 또 읽으세요.

어디 다닐 때도 읽으면서 또는 외우면서 다니십시오.

볼 일이 있어 외출할 때는 꼭 경전을 가지고 가십시오.

읽고 읽어서 수십 번, 수백 번이라도 읽으세요.

부처님 말씀은 웬만한 구절은 외우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부터 달달 외울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경전에 푹 빠져 있어야 합니다.


한문漢文에 눈이 열리고, 한문 읽는 소리에 귀가 열려서 문리를 느낄 정도가 되어야 학문하는 진정한 재미가 나고 경전의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늘 경전을 공부하고 부처님을 생각해서 부처님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말할 때도 부처님을 닮고, 행동할 때도 부처님처럼 행동하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부처님 말씀을 인용引用하고, 가급적이면 불교[佛敎]적인 이야기가 아니면 입에 담지도 마세요.


출가 수행자들은 그렇게 경전에 빠지고 늘 머리 속에는 부처님이 떠나지 않고 부처님처럼 말하고 행동해서 ‘중님물’이 물씬하게 배어야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진정한 스님, 똑 떨어진 스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처럼 행동하고 부처님처럼 말하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계행戒行을 청정히 하십시오.

자비慈悲하고 보살행菩薩行을 해야 합니다.



한국불교는 그간 계[戒]를 좀 가볍게 다루었고, 또 여겨 왔습니다.

앞으로는 계를 엄격하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

계는 위없는 깨달음의 관문關門이 됩니다.

천상에 오르는 사닥다리가 된다 했어요.

생사의 바다를 건너는 배나 뗏목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계로 인해서 정[定]이 생기고 정으로 인해 혜[慧]가 나타납니다.

계행이 없이는, 삼매를 닦는다 해도 번뇌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요새 남방불교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계행이 청정하다는 것입니다.

약 30여 년 전 해인사에 돌아가신 지월[指月] 스님이 계셨습니다.

항상 누더기를 입고,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도 조용조용,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이 느리게 걸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고 언제 보아도 하심하고 겸손한 자세였으며, 당신 상좌들에게도 누구 보살님, 아무개 스님하고 불러서 제자들이 부끄러워했지요.



인욕忍辱이 대단해 화내는 것을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스님은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까지 ‘중님’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그 거룩하고 모범적인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고 지금도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포교布敎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 없어도 행동으로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스님이라면 지월指月 스님처럼 지나가는 모습만 봐도 공경심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스님으로서 인격과 덕망을 갖추면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게 되고 주변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게 되지요. 더 대단한 스님은 짐승에게도 느끼게 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선수행禪修行은 하라 말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禪]은 반드시 해야 하고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禪]으로 실참실구[實參實究]해서 마음을 닦지 않으면 불교의 깊은 진리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고귀한 말씀이고 중생들에게 노파심절한 말씀이지만, 조사祖師 스님의 말씀처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합니다.


‘교敎 밖에 별도로 전傳한 문자를 쓰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견성성불의 경지 그 경계를 불교의 근본진리라 하는데, 그 자리는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작용이 멸하는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입니다.

그 경지는 부처님도 말할 수 없고, 어떤 문장가도 표현할 수 없고, 명 웅변가雄辯家도 입을 열 수 없어요.



그 경계는 부처님이 오면 부처님을 치고, 조사祖師가 오면 조사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마셔 보아야 갈증이 해소가 되고, 배고픈 사람은 밥을 먹어야 배고픔을 면하듯이 그 경계는 오직 스스로 체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의 경계를 체험하는 데는 선[禪]이 우선합니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맑게, 밝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닦는 데는 화두참선법[參禪法]이 최상승법입니다.

화두참선에 대하여 비판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최상승법이니, 최고의 법이니 하는 것은 확철대오[確徹大悟]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데는 화두참선을 능가할 수행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간화선看話禪은 현대인에게 알맞은 수행법입니다.

현대인은 근기도 하열하고, 신심도 약하고, 발심도 못한 데다, 간절하고 성실한 마음도 없으니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걷지 못하는 장애인에게는 휠체어가 필요하듯이, 수영 못하는 사람에게는 보트가 필요하듯이 현대인에게 필요한 수단手段이 화두입니다.

한국 불교가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이 간화선입니다.


마음공부는 큰 발심[發心]과 큰 신심[信心]이 필수적입니다.

말만 들어도 설레이는 말이 발심發心입니다.

흔히 발심하라, 발심하지 못하면 이 공부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마음 깨닫는 데는 발심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인은 “화두 안 되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발심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라” 하였지요.

발심이란 발보리심[發菩提心]을 말합니다.



보리菩提란 견성見性하여 성불成佛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의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대단한 마음을 내는 것을 발심이라 합니다.

마음공부는 얼마나 발심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수행은 참으로 발심한 사람에게는 의외로 쉽게 바로 되지만 발심發心하지 못한 사람은 아주 어렵고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 깨쳐 20대에 선지식이 되어 도인행세도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한 평생 고생하였으나 별 이익이 없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마음공부 하는 데는 큰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나도 수행을 하면 깨칠 수 있다, 나도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 참선은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확실하고 바른 길이다, 선[禪]중에서도 화두참선이 최상승법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고 온전히 믿어야 해요.



그래서 이 공부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거나 사량思量하고 분별分別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도道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믿음으로 끝이 나고 진정한 믿음으로써만 불법[佛法]의 대해大海를 건널 수 있습니다.

믿음은 나무의 뿌리에 비유할 수 있어요.

나무의 뿌리가 튼튼할수록 움직임이 없이 높고 크게 자랄 수 있듯이 믿음의 힘이 크고 깊을수록 그 열매가 큽니다.



요즘 사람들은 믿지 못하는 것이 큰 병통인데, 믿지 못하면 천불千佛이 출현해도 어려워요.

종교는 믿는 것만큼 이익이 있습니다.

불교[佛敎]가 인류에게 베풀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바로 선[禪]입니다.

과학이 더 발달하고 경제적인 여건이 더 좋아지면 사람들은 서서히 종교를 멀리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건강이나 장수長壽에는 더 집착을 할 것이며, 불안하고 괴로운 마음을 달래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 행복해질 수 있는 수행 쪽으로는 관심이 더 높아질 것입니다.

미래 학자나 선지자들이 불교[佛敎]의 선[禪]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선원禪院에서 하는 이야기 중에 “화두가 안 되면 밥값도 못한다.”는 말이 있어요.

화두가 된다는 것은 화두話頭에 진의가 나서 일체의 번뇌와 망상이 다 사라지고 마음이 고요하고 맑아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경지, 즉 마음이 그 정도로 닦여지지 않으면 밥값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맑고 또렷또렷한 상태가 되어야 깨어있는 삶이라 합니다.





성철性徹스님께서는 납자衲子가 탁마琢磨하러 가면 대뜸 “너 화두가 몽중일여[夢中一如] 되냐?”고 물었어요.

‘몽중일여’란 화두가 꿈속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들리는 상태를 말하지요.

그런 경계가 되면 상대를 하고, 그 정도가 안 되면 상대도 안 했다고 합니다.

몽중일여는 되어야 겨우 화두話頭를 이야기할 수 있고, 불법[佛法]을 입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예요.


더 나아가 선삼매禪三昧는 꼭 들어보세요.

그래야 불교의 진수眞髓가 뭐다, 불교[佛敎]의 근본진리가 무엇이다 라는 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어요. 옛 어른들은 이 법法을 위하여 몸뚱이를 잊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여러분의 열정과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도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