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결(禪敎訣)

선교결(禪敎訣)

通達無我法者 2008. 2. 18. 11:29
 

선교결(禪敎訣)

 

 

유정대사에게 보임(示 惟政大師)

서산대사(西山大師)

                         성철스님 評釋

요즈음 선(禪)을 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 스승의 법이 

다'하고 교(敎)를 하는 사람도 '이것이 우리 스승의 법이다'라고 말하 

면서 한 법을 가지고 서로 같다느니 다르다느니 하여 손가락과 말로 

서로 다투고 있으니[손가락과 말[指馬]... <장자>제물편에서 쓸데없 

는 논쟁을 비유한 말] 슬프도다, 그 누가 능히 결단하겠는가! 

그러나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교는 말 

이 있는 곳으로부터 말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요, 선은 말 없는 곳 

으로부터 말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다. 말 없는 곳으로부터 말 없는 

곳에 이르면 그것은 누구도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없어 억지로 이름 

하여 마음이라고 한다. 세상 사람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배워서 

알고 생각하여 얻는다고 하니, 이는 실로 가엾은 일이다. 

교를 하는 사람으로서 '교 가운데도 또한 선이 있다'고 말하는 자 

가 있으니 이는 성문승도 아니며 연각승도 아니고 보살승도 아니며 

불승도 아니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선가(禪家) 입문 

의 첫 구절이요 선의 뜻은 아니며, 세존께서 한평생 말슴하신 가르 

침[敎]인 것이다. 비유컨대 세 종류의 자비의 그물을 가지고 과거, 

현재, 미래의 나고 죽음의 바다에 펴서 작은 그물로는 새우와 조개 

를 건지고[인천소승교와 같음] 중간 그물로는 방어와 송어를 건지고 

[연각의 중승교와 같음], 큰 그물로는 고래와 큰 자라를 건져서[대승 

원돈교와 같음] 함께 열반의 언덕에 두는 것과 같으니, 이는 가르침 

의 순서이다. 그 가운데 한 물건이 있어서, 갈기는 시뻘건 불과 같고 

발톱은 무쇠 창날과 같으며, 눈은 햇빛을 쏘고 입으로는 바람과 우 

뢰를 내뿜는다. 몸을 뒤쳐 한 번 구르면 흰 물결이 하늘에 닿고 산 

과 강이 진동하며, 해와 달이 어두워진다. 세 가지 그물을 뛰어넘어 

바로 구름 위로 올라가서 감로수를 퍼부어 뭇 생명들에게 이로움을 

주니[바로 조사문 중의 교외별전의 기틀임], 이는 선이 교와 다른 점 

이다. 

 

今禪者曰 此吾師之法也 今敎者曰 此吾師之法也 一法上 同於 

同異於異 而指馬交諍 嗚呼 其孰能訣之 然 禪是佛心 敎是佛 

語也 敎也者 自有言至於無言者也 禪也者 自無言至於無言者 

也 自無言至於無言 則人莫得而名焉 强名曰心 世人 不知其由 

謂學而知思而得 是可 愍也 敎者曰 敎中 亦有禪也云者 出於 

非聲聞乘 非緣覺乘 非菩薩乘 亦非佛乘之語也 然 此 禪家入 

門之初句 非禪旨也 世尊一代所說之敎也 譬如將三種慈悲之網 

張三界生死之海 以小網 蝦 (如人天小乘敎) 以中網 

(如緣覺中乘敎) 以大網 鯨鱉(如大乘圓頓敎) 俱置於涅槃 

之岸焉 此敎之序也 其中 有一物 如朱火 瓜如鐵戟 眼射 

(293)日光 口吐風雷者 蒜身一轉 白浪 滔天 山河震動 日月 

晦瞑 超出乎三網之外 直上乎靑雲之端 注甘露而益群生焉(正 

如祖門敎外別傳之機) 此 禪之別於敎者也(294) 

*믿기 어려운 비유 같기는 하지만, 선의 뛰어남을 이 말로써 능히 

짐작할 것이다. 이 비유는 서산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선, 교의 우열을 가리는 데 쓰인 말이다. 

그리고 화엄사상에 철저한 보조(普照)도 '교외별전은 교승보다 한 

층 더 뛰어나다[敎外別傳은 逈出敎乘이라一看話決疑論]'고 하였고 또한 

'교외별전이란 교학자만이 믿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 아니 

라, 선종에서도 근기가 낮은 이도 또 얕게 아는 이도 망연하여 알지 

못한다[敎外別傳은 非但敎學者難信難入이요赤乃富宗下根淺識도茫然不知 

矣니다一看話決疑論]'고 하였으며, 또한 서산은 그의 <선교석(禪敎 

釋)>에서 말하기를 "화엄소[청량 지음]에 이르기를 '원돈 위에 따로 

한 종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선문을 일컫는 것이다(華嚴疏一淸凉 

一에 云, 圓頓之上에別有一種이라하니此는禪門之謂也라]"고 하였다. 

이로서 선과 교의 차이가 이같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선과 교의 

차이가 이같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이 선의 법은 우리 부처님 세존도 또한 진귀조사에게서 따로이 

전해받은 것이며, 옛부처의 케케묵은 말이 아니다. 요즈음 선의 뜻을 

그릇 이어받은 자는 더러는 돈, 점의 문으로써 정맥을 삼으며, 더러 

는 원돈의 교로써 종승을 삼고, 더러는 외도의 글을 인용하여 비밀 

한 뜻을 설하며, 더러는 업식을 희롱함으로써 본분을 삼고, 또 더러 

는 그림자를 인정하여 자신으로 삼는다. 심지어는 눈멀고 귀먹은 방 

할(棒喝)을 함부로 행하여 부끄러움도 없으니 이는 참으로 무슨 마 

음들인가? 법을 비방하는 그 허물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 

 

此禪之法 吾佛世尊 亦別傳乎眞歸祖師者也 非古佛之陳言也 

今錯承禪旨者 或以頓漸之門 爲正脈 或以圓(297)頓之敎 作宗 

乘 或引外道書 說密旨 或以弄業識 爲本分 或以認光影 爲自 

己者 至於恣行盲聾棒喝 無 無愧者 是誠何心哉 其謗法之愆 

余何敢言(298) 

*돈오점수를 <수심결>에서 '돈, 점의 양문[頓漸兩門)', '돈, 점의 

두 뜻[頓漸二義]'이라고 하였으니, 돈, 점의 문은 돈오점수를 말한 것 

이다. 

돈오점수는 하택(荷澤)과 규봉(圭峰)이 먼저 주장하고 보조가 힘 

써 퍼뜨린 것으로서, 보조는 처음에는 돈오점수를 '달마의 법을 바로 

이은 것[達磨正傳]'이라고 하다가 입적하기 한해 전의 겨울에 출판된 

<절요(節要)>의 첫머리에서 '하택은 지해종사라, 조계의 적자가 아 

니다[荷澤은是知解宗師니非曹溪嫡子라]'고 하여 종전의 주장과는 달리 

돈오점수는 지해(知解)이며 조계의 정통이 아니요 교가의 행상[敎家 

行相]이라고 하였다. 이는 사상의 큰 변환이며 진전(進展)이라고 볼 

수 있다. 

원교의 극치(圓敎極致]는 화엄연기(華嚴緣起)로서, <간화결의론> 

에서 보조는 원돈신해(圓頓信解)인 여실언교(如實言敎)는 사구(死句) 

라고 단정하고 무애연기(無碍緣起)를 불법 지해의 병[知解之病]이라 

고 지적하여 평생 받들던 화엄사상을 원돈사구(圓頓死句)이며 지해 

지병(知解之病)이라는 대담한 발언을 하였으니, 그의 사상에 커다란 

진전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돈오점수와 원돈신해는 같은 내용이지 

만 서산(西山)은, 선의 뜻을 잘못 알고 돈, 점의 문을 정맥으로 삼거 

나 원돈의 교를 종승(宗乘)으로 삼는 것은 큰 법을 비방하는 것이라 

고 확실히 말함으로써, 돈오점수와 원돈신해가 선의 정통이 아님을 

잘 밝혀 주었다. 그러나 요즘의 선계(禪界)에는 아직도 돈오점수와 

원돈신해를 선(禪)으로 오해하는 이가 많으니, 참으로 통탄하고도 남 

을 일이다. 

*교외별전은 팔만장경과는 달리 가섭, 아난으로 이심전심(以心傳 

心)하여 내려온 것이니, 선의 특색이다. 진귀조사설(眞歸祖師設)은 

한국에만 있는 전설로서, 서산이 이를 인용하였으나 <선교결>의 본 

지(本旨)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교외별전이란 배워서 알며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마음 길이 다하여 끊긴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 알아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세존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 

시니 가섭이 얼굴 가득히 미소한 뒤로부터, 나아가서는 후세에 전한, 

이른바 달마의 '툭 트이어 성(聖)이랄 것도 없다'한 것과 육조대사의 

'선, 악을 생각하지 말라'한 것과, 회양의 '수레가 멈추니 소를 채찍 

질한다'고 한 것과 행사의 '여능의 쌀값'과 마조의 '서쪽 강물을 다 

마심'과 석두의 '불법을 모른다'함과 운문의 '호떡'과 조주의 '차 마 

심'과 투자의 '기름 팜'과 현사의 '흰 종이'와 설봉의 '공굴림'과 화산 

의 '북 두드림'과 신산의 '바라 두드림'과 도오의 '춤을 춤'에 이르기 

까지, 이들은 모두 옛 부처와 옛 조사들이 같이 교외별전의 곡조를 

노래한 것이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머뭇거릴 수 있겠는 

가? 이는 모기가 무쇠 소를 물어뜯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이제 말세에 이르러 낮은 근기는 많으나 이들이 교외별전의 근기 

가 아니므로 다만 원돈문의 이치의 길, 뜻의 길, 마음의 길, 말의 길 

로써 보고 듣고 믿고 아는 것[見聞信解]을 귀하게 여길 뿐으로 이치 

와 뜻과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져 자미(滋味)가 없고 만지지 못하는 

곳에서 칠통을 두드려 부수는 경절문(徑截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제 그대가 팔방의 납자 무리 

들을 접대할 때 칼을 쓰되 긴밀히 하여(사량복탁으로) 억지로 이치 

에 닿지 않는 말을 하지 말 것이요, 바로 본분인 경절문의 활구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쳐 스스로 얻게 하여야만 할 것이니 그것이 

바야흐로 종사의 사람을 위하는 됨됨이니라. 

만일에 배우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함을 보고 문득 뻘밭으로 이끌 

어 교리를 말하면 사람의 눈을 멀게 함이 적지 않을 것이다. 만일에 

종사가 이 법을 어기면, 비록 설법하매 하늘에서 꽃비가 어지러이 

쏟아져 내릴지라도 이는 모두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내닫는 것이 

될 뿐이다. 

 

吾所謂敎外別傳者 非學而知思而得者也 須窮心路絶然後 始可 

知也 須經自肯點頭然後 始可得也 始不聞乎 自釋尊 拈花示衆 

迦葉 破顔微笑 乃至出於口而傳之於後一 達磨廓然無聖 六祖 

善惡不思 讓師車滯鞭牛 思師廬陵米價 馬祖吸盡西江 石頭不 

會佛法 至於雲門胡餠 趙州喫茶 投子沽油 玄沙白紙 雪峰 毬 

禾山打鼓 神山敲羅 道吾作舞 斯等 皆先佛先祖 同唱敎會別傳 

之曲也 思量得? 擬議得? 可謂蚊子之上鐵牛也 今當末世 多 

(301)是劣機 非別傳之機也 故 只貴圓頓門 以理路義路 心路 

語路 生見聞信解者也 不貴徑截門 沒理路沒義路 沒心路沒語 

路 沒꾹ベ蠶멕莘솬?打破漆桶者也 然則如之何而可也 今師 

對八方衲子之輩 下刃要緊 不得穿鑿 直以分分徑截門活句 敎 

伊自吾自得 方是宗師 爲人體裁也 若見學人 不薦 便與拖泥說 

敎 人眼不少 若宗師違此法 則雖說法 天花亂墜 總是癡狂外 

邊走也(302) 

*설교(說敎)의 교(敎)는 <선가귀감>에서 '교라 함은 돈오점수이다 

[敎也者는頓悟漸修라]'고 한 그것이다. 근기가 낮다고 하여 사구(死句) 

인 원돈신해, 돈오점수로써 사람을 가르치면 배우는 사람의 눈을 다 

멀게 하며, 아무리 설법을 잘 하여도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내닫 

는다[痴狂外邊走]'고 하였으니, 무서운 경책이다. 

서산도 <선가귀감>을 지은 시절 -44세 때- 에는, 돈오점수의 교 

의(敎義)를 먼저 배워 익힌 뒤에 교의 뜻을 놓아 버리고[放下敎義] 

참선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묘향산 금선대(金仙臺) 

시절에 이르러서는 공부가 익어가면서 사상도 바뀌어, 원돈, 점수는 

사구이며 지해의 병[知解之病]이니 '사람의 눈을 멀게 함이 적지 않 

다[ 人眼不少]'고 하여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고, 만일에 그를 따르 

지 않으면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내닫는다'고 심히 나무랬으며, 

또 한편으로 그의 <선교석(禪敎釋)> 끝부분에서 '교를 중히 여기고 

마음[선]을 가벼이 여기면 비록 많은 겁을 거쳐 닦더라도 모두 천마, 

외도가 된다[重敎輕心[禪]하면雖歷多劫하여도盡作天魔外道라]'고까지 

극단적으로 말하였다. 

보조는 서산과는 달리 원돈신해는 사구이며 불법 지해의 병이라 

고 배척하여 놓고도, <간화결의론> 끝부분에서는 '증지가 현전(現 

前)한 사람은 오늘날 보기도 드물고 듣기도 드물기 때문에, 다만 화 

두참의문[사구]에 의지하여 바른 지견을 밝히는 것이 귀할 따름이다 

[證智現前者는 今時에 罕見罕聞故로 今時에 但貴依話頭參意門[死句] 

하야發明正知見耳라]'고 하였으니, 보조는 이만큼 선종의 안목에 

혼란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낮고 열등한 근기라 하여도 활구(活句)만으로 지도하여야 

하거늘, 자기가 지적한 사구인 지해의 병을 거듭 권장하였으니, 결국 

<간화결의론>도 용두사미가 되어 버렸다. 끝부분에서 '활구를 잘 참 

구하라[參詳活句]'고 말하였지만 활구를 잘 참구하는 것이 그의 진의 

일진대 '참의사구(參意死句)'를 어째서 거론했는지 모르겠다. 만일에 

선종의 바른 법안을 가진 스승[正眼宗師]이라면 오직 활구로써 나아 

갈 뿐 '참의사구'는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 다행히도 서산은 보조와 

는 달리 경절활구(徑截活句)로써 일관하였으니 후세의 명훈(明訓)이 

되었다. 

 

만일에 배우는 사람이 이 법을 믿으면 비록 금생에 철저한 깨침 

을 얻지 못하여도 목숨을 마칠 때에 악한 업에 끌리지 않고 바로 깨 

달음의 바른 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옛날 마조가 한 번 소리치자 

백장이 귀먹었고 황벽이 혀를 내둘렀으니, 이는 임제종의 연원이다. 

그대는 반드시 정맥을 가려서 종안이 분명할 것이므로 이렇게 누누 

히 말하는 것이니, 뒷날 이 노승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만일에 노승 

의 말을 저버리면 반드시 부처님과 조사의 깊은 은혜를 저버리는 것 

이 될 것이니,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살펴야 한다. 

 

若學人信此法則 雖今生 未得鐵悟 臨命終時 不被惡(307)業所 

牽 直入菩提正路也 昔馬祖一喝也 百丈 耳聾 黃檗 吐舌 此 

臨濟宗之淵源也 師必擇正脈 宗眼分明故 如許縷縷 後日 莫辜 

負老僧也 若辜負老僧 則必辜負佛祖深恩也 詳悉詳悉(308) 

*이 <선교결>은 서산 만년의 명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위의 글 

과 같이 선(禪), 교(敎)가 엄연히 구별되어 있으므로, 선교일치(禪敎 

一致) 운운하면서 혼동하지 말 것이며, 말세의 낮은 근기라고 하여 

원돈사구, 지해의 병으로 그릇 들어가게 하지 말고 오직 종문정전 

(宗門正傳 선종의 법을 바로 전함)의 활구를 내세워야 한다. 

선문의 가장 큰 병은 원돈지해에서 오는 점수사상이니, 오직 육조 

의 '유전돈법(唯傳頓法 오직 돈법만을 전함)'의 유법(遺法)을 지켜서 

참구하는 화두[所參話頭]에 마음과 힘을 다할 것이며, 공부하는 가운 

데 나타나는 경계와 지해(知解)에 병들지 말고 오매일여(寤寐一如 

자나 깨나 한결같음)와 내외명철(內外明徹 안팎이 사무쳐 밝음)을 

참으로 깨달음으로서 불성을 밝게 보아 본분납승(本分衲僧)으로서 

불조(佛祖 부처님과 조사)의 정법을 계승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