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오심요(圓悟心要)

112.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通達無我法者 2008. 2. 21. 15:38
 





112.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일반적으로 생사의 흐름을 끊고 무위의 언덕을 건너는 데에는 다른 특별한 것이 없다. 그저 당사자가 맹렬한 근기로써 자기의 흉금을 내걸고 일체의 유위(有爲)?유루(有漏)는 헛꽃과 같아 원래 참다운 성품이 없는 줄 확실히 아는 것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확실하게 비춰보는 마음으로 스스로 돌이켜 관찰하고 확 뒤집어보아서 붙잡고 자세히 살펴서 오래하다 보면, 분명히 깨달아 들어갈 곳이 있으리라.



이것은 결코 다른 물건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힘을 들여 나를 깨닫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천 근의 짐을 걸머지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역량이 있어야만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기력이 약하면 그 짐에 깔려버린다. 그 때문에 큰 사람이 큰 견해를 갖추고 큰 지혜를 가진 자가 큰 작용을 얻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대장부라면 정신을 차려야지 어찌 산(山) 귀신의 굴 속에서 살 궁리를 하겠는가. 언제 나와서 깨달을 기약이 있으랴. 헤아릴 수도 없는 큰 일을 걸머지고 망정과 견해를 초월하여 높고 뛰어난 뜻을 발현해야 한다면, 단박에 투철히 벗어나 시작없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망상, 윤회, 피아, 득실, 시비, 영욕, 더럽고 탁함 등등의 마음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더럽고 깨끗한 두 쪽을 모두 의지하지 말게 해야 한다. 단박에 오롯이 벗어나면 한 물건에도 의지하지 않으니, 모든 성인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때, 중생과 부처 또는 세간과 출세간이 드러난 적이 없는 곳에서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기게 된다.



본지풍광을 밟고 본래면목을 분명하게 보아 깨치니, 단박에 견고해져서 털끝만큼도 견해의 가시가 없고 안팎이 융통하여 호호탕탕하게 큰 편안함을 얻는다. 여기에서 몸을 돌려 숨을 토하고 이쪽 편으로 오면, 자연히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행위를 할 때 낱낱이 근본으로 돌아가니, 어찌 이것이 분수 밖의 일이겠느냐.



밥 먹고 옷 입으면서 세간법을 닦는다 해도 여여 하지 않음이 없고, 확연하게 꿰뚫지 못함이 없으며 깨달은 그 당체와 상응하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다시 무슨 고저와 향배를 따지겠느냐. 잠깐이라도 견해의 가시가 생기면 바로 목숨[命根]을 찔린다.



조사와 옛날 큰 스님들이 방, 할을 행하는 등 백 천억 가지 작용이 딴 뜻에서가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에게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스스로 투철히 벗어나 스스로 쉬게 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어찌 자기만 깨닫고 세상을 제도하는 것은 전혀 쉬어버렸는가. 애쓰는 가운데 여가가 있으면 비원(悲願)을 잊지 말 것이니, 이것을 밀어서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을 일깨워주고, 인간 세상에 살되 매이지 않은 배처럼 떠다니면 무심한 도인이라 부른다.



지금 아직 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밝히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우선 몸과 마음을 놓아버려 텅 비게 해야 한다. 오래도록 텅 비어 고요하다 보면 갑자기 칠통을 타파하고 통 밑이 빠진 듯한 곳에 이르는 것도 어려울 것 없다. 그러니 더구나 스스로 몹시 영리한 근성을 갖추고 불사(佛事)를 걸머져 수승하고 기특한 인연을 짓는 일임에랴. 이것이 어찌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서 되는 것이겠느냐.



그러므로 옛분이 말하기를 “도를 배우려면 반드시 무쇠로 된 높이어야 하니, 착수하는 마음에서 결판내라”고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