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22칙 설봉의 자라 코처럼 생긴 독사〔雪峰鼈鼻〕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8:42
 

 

제22칙 설봉의 자라 코처럼 생긴 독사〔雪峰鼈鼻〕


(수시)

아주 넓어서 밖이 없고 미세하기로는 티끌과 같다. 잡고 놓아주는 것이 남에게 달려 있지 않으며 말고 펴는 것이 나에게 있다. 끈끈한 속박을 풀어버리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문자의) 자취를 없애고 말을 말고 각자가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방편의) 나루터를 콱 닫아버려서 각자가 스스로 천 길 벼랑처럼 우뚝 서야 한다. 말해보라, 이는 어떤 사람의 경계인가? 거량해보리라.

(본칙)

설봉(雪峰 : 822~908)스님이 대중 법문을 하였다.

“남산(南山)에 코가 자라처럼 생긴 독사가 있다.

-괴이한 것을 보고서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괴이함은 저절로 없어진다. 대단히 괴이한 일로 사람을 의심하게 만든다.


너희들은 조심하거라.”

-핫! 한바탕 잘못을 저질렀군.


장경 혜릉(長慶慧稜)스님이 말하였다.

“오늘 대중들 중에 반드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으리라.”

-진주 땅 사람(도둑의 별명)이 도둑을 매웅 보내네.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남을 말하네.

어떤 스님이 이를 현사(玄沙)스님에게 말하자

-그놈이 그놈이지, 같은 구덩이의 흙이 다를 리 있나? 남자종이 계집종에게 친절히 하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다.


현사스님은 말하였다.

“능사형(稜師兄)이므로 이처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우 같은 견해를 면하지 못하였군. 이 무슨 소식일까?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독(毒)이네.


어떤 스님이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놈을 보기 좋게 한 방 내질렀구먼.


“‘남산’이라는 말조차 뭐 할 거 있나?”

-고깃배 위의 사(謝)씨의 셋째 아들(현사스님)이군. 불여우 같은 놈, 아직도 멀었다. 목숨을 잃고서도 모르다니.


운문스님은 (은사인) 설봉스님 앞에 주장자를 던지면서 겁주는 시늉을 하였다.

-그에게 겁을 주어서 무엇 하려고 이 아들만이 (아비의 뜻을) 제대로 알았구나. 한결같이 이는 망상분별을 희롱한 것이다. 여러분들이 판별해보시오.


(평창)

그대들이 꾸밈없이 전개하려면 한결같이 꾸밈없이 전개하고, 그대들이 타파하려면 한결같이 타파하라. 설봉스님이 암두(巖頭)․흠산(欽山)스님과 함께 행각을 하면서 세 차례나 투자(投子)스님한테 가고 아홉 차례나 동산(洞山)스님을 뵈었으나, 뒷날 덕산(德山)스님을 참방한 뒤에야 (미혹의) 칠통(漆桶)을 타파할 수 있었다. 하루는 암두스님과 함께 흠산스님의 방문하는 길에 오산(鰲山)에 있는 주막에 이르러 폭설로 깊이 막히게 되었다. 암두스님은 매일같이 잠을 자고 설봉스님은 한결같이 좌선을 하였다. 암두스님이 꾸짖기를,

“잠이나 자거라. 매일같이 선상에 앉아 있는 꼴이 일곱 마을에서 흙을 채집하여 만든 영험있는 토지신과 꼭 닮았구나. 훗날 남의 집 젊은이를 흘리겠구나”라고 하니, 설봉스님은 스스로 가슴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제가 이 속이 편치 못합니다. 감히 스스로 속이지 못합니다.”

암두스님은 말하였다.

“나는 그대가 훗날 고봉정상(孤峰頂上)에서 암자를 짓고 가르침을 크게 드날리리라 여겼는데, 오히려 이런 말을 하다니.”

설봉스님이 말했다. “제가 실제로 편치가 못합니다.”

“그대가 실로 그와 같다면 그대의 견처에 대하여 낱낱이 털어놔봐라. 옳은 곳은 내가 그대에게 증명해주고, 옳지 못한 곳은 고쳐주겠다.”

설봉스님이 마침내 털어놓기를, “염관(鹽官)스님이 상당(上堂) 법문에서 색(色)과 공(空)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보고서 깨치는 바가 있었습니다”라 했다.

암두스님이 이르기를, “30년까지는 절대로 말을 삼가하라”고 했다.

설봉스님은 다시 말하기를 “동산(洞山)스님의 ‘과수송(過水頌)’을 보고서 깨치는 바가 있었습니다”라 하자, 암두스님이 이르기를

“그같이 했다간 자신마저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다.

설봉스님이 털어놓기를, “그후 덕산에 이르러, ‘대대로 내려오는 부처님의 종지를 저도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덕산스님이 한 차례 방망이를 내리치면서 ‘무슨 말을 하느냐?’하였는데, 나는 그때 마치 통 밑바닥이 빠진 것과 같았습니다”라 했다.

암두스님은 마침내 큰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듣지도 못했는가? ‘밖에서 갖고 들어온 것은 가문의 보배가 아니라’고 하는 말을.”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훗날 큰 가르침을 드날리려고 한다면 낱낱이 자신의 가슴속에서 흘러나온 것을 가지고, 그대 자신을 하늘 끝, 땅 끝까지 뒤덮도록 하라!‘

설봉스님이 그 말에 크게 깨치고 예배를 올린 후 연거푸 외쳤다.

“오늘 비로소 오산(鰲山)에서 도를 이루었다. 오늘 비로소 오산에서 도를 이루었다.”

그후 민(閩 : 복건성) 땅으로 돌아와 상골산(象骨山)에 머물면서 몸소 송을 지었다.

인생은 잠깐 사이 빠르기도 한데

뜬 세상에 어찌 오래 살 수 있으랴.

서른두 살 나이로 비원령(飛猿嶺 : 복주)을 넘어

민 땅에 들어서니 어느덧 마흔 남짓.

다른 이의 허물일랑 자주 말하지 말고

자신의 잘못을 어서어서 없애야지.

조정에 가득한 고관대작에게 아뢰노니

염라대왕은 높은 벼슬도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언제나 상당법문에서

“낱낱이 하늘과 땅을 뒤덮도록 하라!”고 했다. 결코 현묘를 말하지 않으며, 또한 마음을 논하거나 성품을 말하지도 않았다. (본래의 면목을)그대로 드러내니 마치 큰 불덩이와 같아 가까이 하면 얼굴을 데고, 또한 태아(太阿) 보검과도 같아 머뭇거리면 목숨을 잃는다. 생각하거나 방편에 걸려서는 영판 틀려버린다.

한편 백장(百丈)스님의 황벽(黃檗)스님에게 “어디로 갔다왔느냐”고 하자, 황벽스님은 말하였다. “대웅산에 버섯 따러 갔다 왔습니다.” 백장스님이 묻기를, “범을 보았느냐?”고 하자, 황벽스님이 갑자기 호랑이 우는 시늉을 했다. 백장스님이 도끼를 들어 찍는 시늉을 했다. 백장스님이 도끼를 들어 찍는 시늉을 하였다. 황벽스님이 느닷없이 백장스님의 뺨을 후려갈기니, 백장스님이 히쭉히쭉 웃으면서 바로 법좌(法座)에 올라, 대중에게 말했다. “대웅산에 범 한 마리가 있으니 그대들은 조심하라. 나도 오늘 한 차례 물렸다”

조주스님은 으레 스님만 보면 “전에 여기 온 적이 있느냐”고 물었으며 “네, 왔었습니다”라고 말하든지, “아닙니다. 와 보지 못했다”라고 대답하든지, 조주스님은 항상 “차나 마시고 정신 차려라!”고 말하였는데 원주(院主)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평소스님들에게 물은 후 왔다고 하거나 안 왔다고 하거나 모두 ‘차나 마시고 정신 차려라!’하시니 그 뜻은 무엇입니까?” 이에 조주스님은 “원주야!”하고 부르자, 원주가 “네!”하고 대답하니, 조주스님은 또다시 “차나 마시고 정신 차려라”라고 하였다.

자호(紫胡)스님은 절 문에다 패(牌)를 세워두고 그 팻말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놓았다.

<자호에 한 마리 개가 있다. 이 개는 위로는 머리를, 가운데로는 허리를, 아래로는 다리를 문다. 사량분별하면 목숨을 잃으리라.>

어떤 스님이 여기에 도착하자 스님은 그를 보자마자 큰 소리를 지르고 “개를 보아라”고 하고서는, 그 스님이 머리를 돌리자마자 자호스님은 바로 방장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이것들은 바로 설봉스님이 “남산에 코가 자라처럼 생긴 독사가 한 마리 있으니, 그대들은 잘 살펴보도록 하여라”라는 말과 같다. 이같은 경우에 그대들은 어떻게 하려는가? 옛사람이 한 말을 답습하지 말고 말해보아라.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틀 밖의 구절〔格外句〕을 알아야만 한다. 일체의 공안과 언어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귀결점을 알아야 한다. 그가 이처럼 대중 법문했던 것을 살펴보라. 그대들에게 수행을 말한 것도 알음알이를 설한 것이 아닌데, 어찌 정식(情識)으로 이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 집안의 자손들은 천연스럽게 잘들 말하였다. 그러므로 옛사람(石頭希遷)이 말하기를 “말을 듣고서는 모름지기 종지를 알아차려야 하며, 제멋대로 기준을 세우지 말라”고 하였다. 말이란 반드시 틀밖에 있어야 하고 구절은 (조사의) 관문을 꿰뚫어야 한다. 만약 말이 소굴을 여의지 못했다면 독 바다〔毒海〕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설봉스님이 이와 같이 대중에게 보인 것은 아무 맛이 아닌 말로 학인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라 하겠다.

장경(長慶)스님과 현사(玄沙)스님은 모두가 그 집안의 사람들이므로, 이처럼 말한 그의 말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설봉스님이 “남산에 코가 자라처럼 생긴 독사가 한 마리 있다”고 말하였는데, 여러분은 그 요지를 알았느냐?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팔방으로 통하는 안목을 갖추어야만 한다. 듣지 못하였느냐? 진정(眞淨 : 1025~1102)스님이 읊은 다음의 게송을.

북 두드리고 비파를 타며

두 명수(名手)가 서로 만났네.

운문은 노래할 줄 알았고

장경은 삿된 곡조에 맞출 줄을 알았네.

옛 곡조에 가락이 없으니

남산의 코가 자라처럼 생긴 독사여.

어느 누가 이 뜻을 알는지

분명 그건 현사뿐이다.

장경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는데, 말해보아라! 어떠한 의미일까? 여기에 이르러서는 전광석화와 같아야만이 비로소 (장경스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터럭 끝만큼이라도 (사량분별을) 다 없애지 못한다면 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애석하다. 많은 사람들이 장경스님의 말을 알음알이로 이해하고서 “승당에서 (말을) 듣자마자 바로 목숨을 잃는다”하고, 어떤 사람은 “원래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멀쩡하게 이러한 말을 하여 사람을 의혹케 한다. 사람들은 그가 한 ‘남산에 코가 자라처럼 생긴 한 마리 독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문득 의심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만일 이렇게 알았다면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이다. 이는 그의 말에서 천착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훗날 어떤 스님이 이를 현사스님에게 말하자 현사스님은 “혜릉사형이므로 이처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어떤 스님이 “스님이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하고 묻자, 현사스님은 “‘남산’이란 말조차 뭐 할 거 있나?”라고 하였다. 현사스님의 말을 살펴보면 몸을 벗어날 곳이 있다. “‘남산’이란 말조차 뭐 할 거 있나?”라고 하였는데, 현사스님이 아니었다면 매우 대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남산에 코가 자라처럼 생긴 독사가 한 마리 있다”하였으니, 말해보라, 뱀이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향상인(向上人)만이 이 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옛사람(설두스님)이 말하기를 “고깃배 위의 사씨의 셋째 아들(현사스님)은 남산의 코가 자라처럼 생긴 독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운문스님은 도리어 주장자를 설봉스님의 앞에 던지면서 겁을 주는 시늉을 하였다. 운문스님은 뱀을 주무를 만한 솜씨가 있기에 위험을 당하지 않고, 언어로 명백히 드러난 경우에도 계합하고, 명백히 드러나기 이전의 경우에도 부합했다. 그는 평소에 교화의 방법이 마치 태아 보검을 휘두르는 듯 능란하였다. 그러므로 때로는 사람의 눈썹과 속눈썹 위로 날기도 하고, 때로는 삼천리 바깥으로 날아가 사람의 머리를 베어오기도 하였다. 운문스님이 주장자를 던지면서 겁을 주는 시늉을 했는데, 이것은 망상분별을 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도 목숨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작가종사(作家宗師)라면 언구를 천착하지 않는다. 설두스님은 운문스님이 설봉스님의 뜻에 계합하여 깨친 것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송을 하였다.


(송)

상골암(象骨巖) 드높아 오르는 이 없다.

-천 사람 만 사람이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그대가 넘볼 경계는 아니다.


올라가는 자라면 뱀을 희롱하는 솜씨꾼이지.

-들여우가 들여우를 알고 도적이 도적을 알아보는 법. 이런 사람이 한 무리를 이룬들 무엇할까? 한솥밥 먹어본 놈이라야 알 수 있다.


능(稜)스님․비(備)스님도 어찌하지 못했으니,

-(저들의 죄를) 한 건에 처리해버려라! 한 수 봐주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까!

-죄를 거듭 판결하지 말라. 괜한 사람까지 연루시키네.


소양(韶陽 : 雲門)스님은 알고서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군. 이 늙은이가 진리를 보는 눈〔一隻眼〕만은 갖추었군. 이 늙은이가 재주부리는구나.


거듭 풀을 헤쳐보았지만

-제이의제에 떨어진 놈〔落草漢〕이니 어찌 쓸모가 있겠는가. 그럼 그렇지. (독사가) 어디에 있느냐? (원오스님은) 내려쳤다.


동서남북 어디에도 찾을 곳 없었다.

-있느냐, 있느냐? (설두)스님은 장님이다.


갑자기 주장자를 불쑥 내밀어

-보아라! 눈을 높이 들어라! (원오스님은) 내려쳤다.


설봉스님에게 내던지며 큰 소리 내지르네.

-자업자득이네. 천사람 만사람을 삼켜서 무슨 일을 하려는가? 천하 사람이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내지른 큰 소리, 번갯불 같아

-두 겹으로 된 공안이다. 그럼 그렇지. 말 후구가 있었기 망정이지.


눈썹을 치켜세워도 보이질 않고

-빗나갔군. 온 천하에서 이러한 사람을 찾아보아도 찾기 어렵다.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이제는 유봉(乳峰 : 雪竇山) 앞에 숨어 있으니

-어느 곳으로 갔을까? 설두스님(처럼 훌륭한 이)도 이처럼 행동하는군. 산승은 오늘도 한입 물렸다.


찾아오는 사람들아! 낱낱이 방편을 살펴보라.

-봉사다. (설두스님의) 발밑을 보지 말고 그대 자신의 발밑을 보라. 봉사다. (설두스님은) 정곡을 쏘았다.


설두스님은 크게 소리질러 말한다. “발밑을 보라!”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기는구나. (제일의제가 아니라) 제이의제, 제삼의제이다. 한 말 또 하게 하지 말라!


(평창)

“상골암 드높아 오르는 이 없다. 올라가는 자라면 뱀을 희롱하는 솜씨꾼이지”라 하였는데, 설봉산(雪峰山) 아래에는 상골암이 있다. 설봉의 선풍은 기봉(機鋒)이 고준(高峻)하여 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설두스님은 그 집안의 사람으로, 겉모습이 서로 닮고 같은 소리로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으로 서로 구하였다. 이는 모름지기 온 사방에 통달한 작가 선지식이어야만이 함께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코가 자라처럼 생긴 독사는 다루기가 참으로 어렵다. 이를 다룰 줄 알아야 이처럼 할 수 있으나, 다룰 줄 모른다면 도리어 뱀에게 물리게된다.

오조 법연(五祖法演)스님은 말하기를, “코가 자라처럼 생긴 독사를 독뱀을 다치지 않고 잡을 수 있는 솜씨를 갖추어야 비로소 그 뱀의 (머리부터) 7촌(寸) 떨어져 있는 급소를 꽉 누를 수 있다. 그리하여 노승과 함께 손을 잡고 갈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장경스님과 현사스님에겐 그러한 솜씨가 있었다.

설두스님이 “능스님․비스님도 어찌하지 못했네”라고 하자, 사람들이 흔히 “장경스님과 현사스님도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설두스님이 운문스님만을 찬미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전혀 맞지 않는다. 이는 세 사람의 솜씨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가깝고 멈〔親疎〕이 있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묻노니, 장경스님과 현사스님도 어찌 할 수 없었던 곳은 어디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까?”하였는데, 이는 장경스님이 “오늘 대중들 중에 반드시 목숨을 잃을 사람이 있겠다”고 말한 것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뱀을 다루는 솜씨를 갖추어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설두스님은 저 운문스님의 계통에서 나왔기 때문에 일시에 (두 사람은) 제쳐버리고 운문스님만을 두고 말하기를 “소양스님은 알고서, 거듭 풀을 헤쳐보았지만”이라고 말한 것일 것이다. 설두스님이 한 여기까지의 송을 음미해보면 참으로 오묘한 곳이 있다.

“동서남북 어디에도 찾을 곳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여러분은 말해보라, 어디에 있는가를. “갑자기 주장자를 불쑥 내밀어”라고 하였지만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그대들은 주장자를 가지고 천착해서는 안 된다. 운문스님이 주장자로 설봉스님의 앞에 던지며 겁주는 시늉을 하였는데, 이는 운문스님이 주장자로써 코가 자라처럼 생긴 독사의 흉내를 낸 것이다. 어떤 때는 “주장자가 용으로 변신하여 천지를 삼켜버렸으니 산하대지를 어디서 찾을까?”라고 말하였다. 이 주장자가 어느 때는 용이 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뱀이 되기도 하는데,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을까? 여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옛사람이 말한 “마음이 모든 경계를 따라서 전변하지만, 전변하는 그 자체가 실로 그윽한 경계이다”라는 뜻을 알게 될 것이다.

송(頌)에서 “설봉스님에게 내던지며 큰 소리 내지르네. 내지를 큰 소리 번갯불 같아”라고 하였다. 설두스님은 남은 재주가 있는 고로, 운문스님의 독사 이야기를 들어 송하기를 “내지른 큰소리 번갯불 같아”라고 하였다. 그대들이 만일 머뭇거리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눈썹을 치켜세워도 보이지 않고”라고 하였는데, 어디로 가버렸을까?

설두스님은 이렇게 송을 끝마치고, 다시 (이 공안의) 활용방안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설봉스님의 독사를 가지고 몸소 거량하여 희롱하면서, 참으로 따라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였다. 이를 보고저 하는가? “이제는 쌍유봉 앞에 감춰뒀으니”라고 하였는데, 유봉은 설두산의 이름이다. 설두스님의 송(祖英集)이 있는데 거기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돌 창문을 사방으로 둘러보면 바다도 비좁아

쓸쓸하고 고요하여 흰 구름의 흰 것마저 용납하지 않는다.

장경스님․형사스님․운문스님이 비록 능란한 솜씨는 있었지만 결국 알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쌍유봉 앞에 숨어있으니, 찾아오는 사람들아! 낱낱이 방편을 살펴보라”고 말하였다. 설두스님은 그래도 치밀한 면이 있어 말하지 않고 있다가 곧바로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른 후 “발밑을 보라!”고 말하였다. 예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써먹었는가? 말해보라. 일찍이 사람을 상하게 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원오)스님이 갑자기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