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26칙 백장의 드높은 봉우리〔百丈大雄〕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8:47
 

 

 

제26칙 백장의 드높은 봉우리〔百丈大雄〕


(본칙)  

어떤 스님이 백장(749~814)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기특한 일입니까?”

-말속에 자취가 있고 구절 속에 기틀이 드러났다. 놀라게 하는구나. 눈은 있어도 일찍이 보질 못했군.


백장스님이 말하였다.

“(그대야말로) 홀로 대웅봉(大雄峰)에 앉아 있구려.”

-4백 고을에 위풍이 늠름하다. 앉아 있는 놈이나 서 있는 놈이나 둘 다 당했다.


스님이 절을 올리자,

-영리한 납승이네, 하긴 이러한 사람이라야 이 소식을 알아차리지.


백장스님이 대뜸 후려쳤다.

-작가종사가 무엇 때문에 오는 말이 부드럽지 못한다? 법령을 헛되이 집행하지는 않았군.


(평창)

기틀마다 안목을 갖추고서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호랑이를 잡겠느냐”고 하였다. 백장스님은 평소에 날개 돋친 호랑이와 같았었는데 이 스님도 죽음을 피하지 않고서 감히 호랑이 수염을 뽑으려고, “무엇이 기특한 일입니까?”하고 물은 것이다. 이 스님 또한 안목을 갖췄기에 백장은 그를 거들어 “(그대야말로) 홀로 대웅봉에 앉아 있다”고 하였는데, 그 스님이 대뜸 절을 올렸다. 납승이라면 묻기 이전의 소식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이 스님이 절을 한 것은 평소에 절 한 것과는 다르다. 반드시 안목을 갖추어야만 이처럼 할 수 있다. 평소의 속마음을 남에게 털어놓지 말라. 서로 아는 사이일지라도 도리어 서로 모르는 듯이 해야 한다.

스님이 “무엇이 기특한 일입니까?”하고 묻자, 백장스님이  “(그대야말로) 홀로 대웅봉 아래에 앉아 있다”고 말하니, 스님은 절을 올렸는데 백장스님은 대뜸 후려쳤다. 그들을 살펴보니, 놓아버리면 일시에 모두 옳고, 모두 거둬들이면 발자취마저 깡그리 사라져버린다. 말해보라, 스님이 문득 절을 올렸던 뜻이 무엇인가를. 가령 “(절을 올린 것이) 잘한 짓”이라면 무엇 때문에 백장스님이 대뜸 후려쳤으며, “잘못한 짓”이라면 스님이 절을 올린 것은 무슨 잘못일까?

여기에 이르러서는 길흉을 구별하고 흑백을 구별하여 일천봉우리의 정상에 올라서야만 된다. 이 스님이 얼른 적을 오렸는데 이는 호랑이의 수염을 뽑는 것과 같았으나, 그것도 그저 조금 몸을 돌린 경지일 뿐이다. 다행히도 백장스님에게는 정수리〔頂門〕에 안목이 있고, 팔꿈치 뒤에 호신부(護身符)가 있어서, 사방을 비춰 보아 찾아오는 상대의 풍모를 깊이 분별하였기에 대뜸 후려친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를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스님은 기틀로써 기틀에 투합하고 생각으로 생각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절을 올린 것이다.

남전스님이 말하기를,

“문수․보현보살이 어젯밤 삼경에 부처의 견해〔佛見〕, 법의 견해〔法見〕를 일으켰기에 각각 이십 방망이씩을 쳐서 두 철위산(鐵圍山)으로 귀양 보내버렸다”고 하자, 그때 조주스님이 대중 가운데에서 나와 말하였다.

“스님을 누구더러 한방 먹이라 할까요?”

남전스님이 “나한테 무슨 허물이 있느냐?”고 하자, 조주스님이 절을 올렸다.

종사들은 무심했기〔等閑〕 때문에 상대방의 근기에 맞춰주는 방편을 베풀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의 근기에 맞도록 설명을 붙일 경우에는 당연히 생생한 경지가 있었다.

오조선사(五祖先師)는 항상 말씀하셨다.

“이는 마치 전쟁터에서 승부를 내는 것과 갔다. 그대는 항상 보고 들음〔見聞〕, 소리와 색깔〔聲色〕을 일시에 틀어막아, 꽉 움켜들어 주인이 되어야 비로소 백장(百丈)스님을 이해하게 되리라.” 말해보라, 이를 놓아버렸을 때는 어떠할까? 설두스님이 송한 것을 보아라.


(송)

조사(祖師)의 경지를 달리는 하늘말〔天馬〕이여!

-5백년에 한 번 태어난다. 천만 사람 가운데 한 명은커녕 반 명도 없다. 자식이 아비의 가업을 계승했구나.


남을 지도할 적에 용서와 처벌이 적절하네.

-말 이전에 있다. 그는 자유를 얻었다. 그에게 작가의 솜씨를 발휘하게 하라.


전광석화 속에서도 상황에 딱 맞게 대처했으나

-(예리하게도) 정면으로 다가왔군. 좌우로 종횡무진 하는구나. 백장스님이 학인을 제접하는 뜻을 알았느냐?


가소롭다. 호랑이 수염을 뽑으러 오다니.

-삼십 방망이를 때려야 하리라. 큰 상(賞)이 걸려 있으면 용감한 병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없구나. (설두)스님을 한 번 용서해준다.


(평창)

설두스님은 견해가 투철하여 이처럼 송을 할 수 있었다.

천마(天馬)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리며, 종횡으로 날 듯이 치달리므로 하늘말이라 한다. 설두스님은, 백장스님이 조사의 경지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종횡무진하며 조금도 걸리적거림이 없음이 마치 하늘의 말이 훌륭하게 달려 드디어 자유로운 곳을 볼 수 있었음과 같음을 송(頌)한 것이다. 이는 참으로 마조(馬祖)스님의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을 얻은 것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어느 스님이 마조스님에게 물은 것을.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마조스님은 대뜸 몽둥이로 치면서 말했다.

“내가 그대를 치지 않는다면 천하 사람들이 나늘 비웃을 것이다.”

다시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너에게 말해주리라.”

스님이 앞으로 다가오자, 마조스님은 그의 뺨따귀를 후려치면서 말하였다.

“(중요한 일은) 세 사람이 함께 모의할 수 없느니라.”

그가 이처럼 완전히 자재한 것을 봐라. 남을 지도할 적에 때로는 용서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처벌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용서는 하되 처벌은 하지 않고, 또 어떤 때는 처벌은 하되 용서는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같은 길을 가지만 발자국은 다르다”고 하였다. 이는 백장스님에게 이러한 솜씨가 있었음을 노래한 것이다.

설두스님의 “전광석화 속에서도 상황에 딱 맞게 대처했다”는 말은 그 (질문한) 스님에게 전광석화처럼 상황에 딱 맞는 대처가 약간 있었음을 노래한 것이다.

암두스님은 이르기를 “사물을 물리치는 것이 으뜸이요, 사물을 따르는 것은 하급이다. 전쟁으로 말한다면 곳곳에 몸을 비낄 만한 곳이 있는 것과 같다”하였다. 설두스님은 “상황에 딱 맞게 대처한 적이 없다. 상황에 딱 맞게 대처하면 반드시 양쪽으로 향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상황에 딱 맞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대장부라면 반드시 조금은 상황에 딱 맞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 사람은 오로지 다 고백하여 그에게 급소를 다 드러내 주기만 할 뿐이니, 언제 끝마칠 기약이 있겠는가?

이 스님은 전광석화 속에서도 상황에 딱 맞게 대처할 줄 알았기 때문에 대뜸 절을 올렸다. 이에 설두스님은 “가소롭다, 호랑이의 수염을 뽑으러 오다니”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백장스님은 범과 같으므로, 스님이 호랑이의 수염을 뽑으러 간 것이 가소롭다고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