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75칙 정주의 법도〔定州法道〕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1:17
 

 

 

제75칙 정주의 법도〔定州法道〕


(수시)

신령한 창과 값진 칼이 항상 눈앞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저기에도 있고 여기에도 있으며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혹 말하고자 하면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만약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말해보라, 빈(賓)․주(主)에 떨어지지 않고 회호(回互)에 구애되지 않을 땐 어떠할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어느 스님이 정주(定州)스님의 회하에 있다가 오구(烏臼)스님을 찾아오자, 오구스님이 물었다.

“정주스님의 가르침은 이곳과 무엇이 같으냐?”

-말씀이 심금을 울리네. 경지의 깊고 얕음을 알아야 한다. 탐간영초(探竿影草 : 물고기를  잡기 위해 유인하는 도구)이다. 참으로 사람을 속이는구나.


“다르지 않습니다.”

-죽음 속에서 살아나는 녀석이군. 이런 녀석이 하나는커녕 반 명도 없다.

쇠말뚝과 같다. 실다운 경지를 밟았다.

“다르지 않다면 그에게로 가거라” 하고서 대뜸 후려치자,

-분명하군. 올바른 법령을 시행했군.


“방망이 끝에 눈이 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작가이어야 할 수 있다. 이놈이 사자로구나.


“오늘은 (쓸 만한 놈) 한 놈만 친다”고 말하고서, 또다시 세차례를 후려치자,

-뭐, 한 놈이라고 말하느냐, (쓸 만한 녀석이) 천 놈 만 놈이다.


스님이 나가버리니,

-참으로 이 집안 사람이군. 굴욕을 당했을 뿐이다. 상황을 보고서 움직였구나.


“억울한 방망이를 얻어맞는 놈이 있기는 있었구나.”

-벙어리가 쓴 외를 먹고도 아무 말도 못 하는 것과 같군. 풀어줬다가 또다시 잡아들이는군. 다시 되돌아온들 또한 무엇하랴!


스님이 몸을 돌리면서 말하였다.

“국자 자루가 스님의 손아귀에 있는데야 어떡합니까?”

-여전히 3백6십일 (한결같군). 참으로 영리한 납승이다.


“그대가 필요하다면 그대에게 돌려주겠다.”

-누가 임금이며 누가 신하인가? 감히 호랑이 입 속에 누웠다. 좋고 싫은 것도 제대로 구별 못하다니.

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오구스님의 손에 있던 방망이를 빼앗아 세 차례 후려치니,

-아직도 작가 선객이어야 할 수 있다. 빈(賓)․주(主)가 서로 바뀌었다. 놓아주고 빼앗기를 적절하게 하는구나.

오구스님은 말하였다.

“억울한 매로군, 억울한 매야.”

-요점을 밝혔군. 이 늙은이가 뭣 때문에 이처럼 허둥거리는가?

“누가 맞고 있습니까?”

-껄껄. 몇 개의 국자 자루가 이 스님의 손아귀에 있었구나.


“경솔하게 (어른을) 치는 놈이군.”

-양쪽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를 아는 자는 누구일까?


스님이 문득 절을 올리자,

-아무리 위험해도 변하지 않아야 대장부이다.


오구스님이 말하였다.

“그럼 그렇지.”

-요점을 밝혔군.


스님이 큰 소리로 웃고 밖으로 나가자,

-작가 선객이 여전히 있었구나. 사나운 호랑이라야 맑은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처음도 잘하였고 끝에도 잘했음을 알 수 있다. 천하인이 (이를) 찾지 못하는구나.


오구스님은 말하였다.

“이처럼 할 수 있다니, 이처럼 할 수 있다니.”

-아깝게도 놓아줘버렸구나. 왜 등줄기를 후려치지 않느냐. 어느 곳으로 달아나리라고 생각하느냐?


(평창)

이 스님이 정주스님의 회하에 있다가 오구스님을 찾아왔는데 오구스님 또한 작가였다. 그대들이 여기에서 이 두 스님이 한 번은 나오고 한 번은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면 천 개 만 개가 모두 똑같다는 것을 알 것이다.

주인이 되는 것도 이러하며 손님이 되는 것도 이와 같아 두 스님이 결국은 한 식구가 되었다. 한 차례 감파하고 분별한 빈․주의 문답이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다웠다.

오구스님이 스님에게 “정주스님의 말씀은 이곳과 같으냐?”라고 하니, 스님은 대뜸 “다르지 않다”고 말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당시 오구스님이 아니었다면 이 스님을 어떻게 해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오구스님은 “다르지 않다면 다시 그에게로 가거라”고 하고 문득 후려쳤지만 스님 또한 작가인데야 이를 어찌하랴. 그러므로 바로 “방망이 끝에 눈이 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오구스님은 한결같이 법령을 집행하면서 “오늘은 (제대로 된 놈) 한 놈만 친다”하고서 또다시 세 차례를 치자. 스님은 바로 가버렸다.

두 사람의 매끄럽게 주고받는 경지를 살펴보면 모두가 작가답게 ‘이 일’을 해결했다. 이는 반드시 흑백을 분별하고 길흉을 알아야 한다. 스님이 나가기는 하였지만 이 공안을 완전히 터득하지는 못했다. 오구스님은 시종일관 그의 실다운 경지를 시험하고자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살펴보았고, 이 스님은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때문에 그를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구스님이 대뜸 “억울한 방망이를 얻어맞는 놈이 있기는 있었구나”라고 하자 스님은 몸을 돌리면서 말을 하려다가 도리어 그와 다투지 않고 가벼이 돌려서 말하였다.

“국자 자루가 화상의 손아귀에 있는데야 어떡합니까?”

오구스님은 정수리에 외알눈을 갖춘 종사였다. 그러므로 감히 사나운 호랑이 입 속으로 몸을 눕히면서 말하였다.

“그대가 필요하다면 그대에게 돌려주겠다.”

스님은 팔꿈치 밑에 호신부(護身符)가 있는 (용감무쌍한) 사람이다. 이른바 의로움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용기가 없다. 그는 다시는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서 오구스님의 손아귀에 있는 방망이를 빼앗아 세 차례 후려치자, 오구스님이 말하였다.

“억울한 매로군, 억울한 매야.”

그대들은 말해보라, 이 뜻이 무엇이었는가를.

처음엔 “억울한 방망이를 얻어맞는 놈이 있기는 있었구나”하시더니만, 이 스님이 치자    “”억울한 매로군. 억울한 매야”라고 말하였다.

스님이 “누가 맞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오구스님은 “경솔하게 치는 놈이군”하고 말하였다. 처음에는 “경솔하게 한 대를 친다”하고서 끝에 가서는 스스로 방망이를 맞으면서 무엇 때문에 “경솔하게 (어른을) 치는 놈”이라고 말하였을까? 당시 이 스님이 영리하지 않았더라면 오구스님을 어떻게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스님이 문득 절을 올렸는데, 이 절은 가장 독살스러운 것으로 좋은 마음씨는 아니었다. 이는 오구스님이 아니었다면 그를 알아서 타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구스님의 “이렇게 되고 말았군”하는 말에, 스님이 큰 소리로 웃으면서 나가버리자, 다시 오구스님이 말하였다.

“이처럼 할 수 있다니, 이처럼 할 수 있다니.”

두 작가들이 서로를 알아본 곳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빈․주가 분명하며, 끊겼다가 또 이어지곤 했다. 실로 이는 기봉을 서로 주고받은 것이다. 그는 여기에 이르러서도 서로 주고받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어른들은 정진(情塵)과 의상(意想)이 끊겨 둘 다 모두 작가로서,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를 말할 수 없다. 이는 비록 한 기간에 한 말이긴 하나 두 분 다 활기찬 경지가 있고, 모두가 혈맥과 면밀함이 있었다. 만일 여기에서 알 수 있다면 하루종일 분명할 것이다.

스님이 문득 나가버린 것은 빈․주를 모두 놓아준 것이며, 그 이하는 빈․주를 모두 잡아들인 것이다. 이를 일러 “서로가 주고 받았다”고 한다. 설두스님은 바로 이와 같은 경지에서 송을 한 것이다.

(송)

부르기는 쉬워도

-천하 사람이 모두 의심한다. 냄새나는 살코기가 파리떼를 부른다. 천하의 납승이 모두  의도를 몰랐다.


보내기는 어렵다.

-아예 싹 끊어버렸구나. 바다 위의 신기루로다.


서로 주고받은 기봉을 자세히 보라.

-한 번 나오고 한 번 들어가니 둘 다 작가였다. 한 개의 주장자를 두 사람이 잡았다. 말해보라, 누구 것인가?


견고한 겁석(劫石)도 오히려 부서지고

-소매 속의 황금 철추를 어떻게 알까? 이는 많은 성인도 전수하지 못 하였다.

푸른 바다 깊은 물도 디디자마자 곧 마른다.

-어찌 망설일 수가 있으리요! 방망이 끝에 눈이 있다. 그 스님 혼자만이 몸소 얻었다고  인정하리라.


오구 늙은이여, 오구 늙은이여.

-애석하다. 이 늙은이가 좋고 싫은 것도 알지 못하다니.


몇번이나 이와 같았을까?

-그도 두서없는 놈이다. (설두스님이 한 이 송의 깊은 뜻이) 백․천․만 겹이다.


그에게 준 국자 자루가 너무나 두서없었네.

-이미 말 이전에 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30대를 때려야 하리라. 말해보라, 어느 곳에 잘못이 있는가를.


(평창)

“부르기는 쉬워도 보내기는 어렵다”는 것은 한결같이 모두 단계를 낮추어 한 말로서 설두스님의 각별한 자비심을 볼 수 있다. 흔히 말하기를 “뱀을 부르기는 쉬워도 보내기는 어렵다”고 한다. 요즈음 휘파람을 불어 뱀을 부르기는 쉽지만 뱀을 보낼 때가 더욱 어려운 것과 같으니, 이는 방망이를 가지고 때리기는 쉬워도 다시 방망이를 빼앗고 보내기는 어렵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반드시 본분의 솜씨가 있어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오구스님은 작가였다. 뱀을 부르는 솜씨도 있었고, 뱀을 보내는 수단도 있었으며, 스님 또한 눈감고 조는 놈이 아니었다. 오구스님이 “정주스님의 말씀은 이곳과 무엇이 같더냐”고 물은 것은 그를 부른 것이며, 오구스님이 대뜸 후려친 것은 그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스님이 “방망이 끝에 눈이 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 스님에게로 다가가서 부른 것이며, 오구스님이 “그대가 필요하다면 그대에게 돌려주겠다”고 말하자, 스님이 앞으로 다가가서 방망이를 빼앗아 세차례 친 것은 스님을 보낸 것이며, 스님이 큰소리로 웃으며 나가버리자, 오구스님이 “이처럼 할 수 있다니, 이처럼 할 수 있다니”라고 한 것은 분명 그를 보낸 것이다.

두 스님을 살펴보면, 기봉을 서로 주고받음이 베틀 위에 실낱이 오고 가듯이 하나를 이루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빈․주가 또렷하였으며, 때로는 주인이 손님으로 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손님이 주인으로 되기도 하였다. 설두스님은 이를 이루 다 찬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서로 주고받은 기봉을 자세히 보라”고 말한 것이다.

“견고한 겁석(劫石)도 오히려 부서졌다”는 말에서 겁석은 길이가 40리, 너비가 8만4천 유순(由旬), 두께 또한 8만 4천 유순이다. 5백 년에 한 번 하늘나라 사람이 내려와서 여섯 푼〔六銖〕짜리 가벼운 소맷자락으로 한 번 스치고, 또 5백 년이 되면 다시 이처럼 스친다. 이처럼 바위를 스쳐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기간을 일겁(一劫)이라 하는데, 이를 “가벼운 옷자락으로 바위를 스치는 겁〔輕衣拂石劫〕”이라고 한다.

설두스님의 “견고한 겁석도 오히려 부서진다”는 것은 겁석이란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닳아서 없어질 수 있지만, 이 두 스님의 기봉은 천고만고에 결코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푸른 바다 깊은 물도 디디자마자 곧 마른다”는 것은 거대한 파도가 아득하고 흰 물결이 하늘까지 넘실거리지만 두 스님이 그곳에 서 있노라면 푸른 바다도 마르게 된다는 것이다.

설두스님은 여기에 이르러 일시에 송을 끝마치고 끝에서 다시 “오구 늙은이여, 오구 늙은이여, 몇 번이나 이와 같았을까?”라고 말하였다. 때로는 사로잡기도 하고 때로는 놓아주기도 하며, 때로는 살리기도 하고 때로는 죽이기도 하였다. 필경 몇 번이나 이처럼 하였을까?

“그에게 준 국자 자루가 너무나 두서없었네”라는 것은, 주장자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사용하고, 역대의 조사들도 사용했으며, 종사가도 사용하면서, 못과 쐐기를 뽑아주었고 끈끈한 결박을 풀어주었는데 이를 어떻게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설두스님의 뜻은, (오구스님이) 홀로 사용하려 했지만 다행히 이 스님 당시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었다가, 홀연히 맑은 하늘에 우레가 일어나면 그가 어떻게 감당하는가를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오구스님이 국자 자루를 남에게 주었다는 그것이 너무나 두서가 없었던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