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36/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3. 5. 11:15
 

 

 

 

 

서장 대 강좌 9 - 2강

 

 

   p.152~153

  이 일은 또한 오래 參究(참구)한 사람이 叢林(총림)을 두루 거친 뒤에 통달하여 얻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선방에 50년. 60년씩 있었다고 해서 꼭 이런 이치를 알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늘 우리가 예로 들지만, 6조 혜능대사 같은 이들은 부처 佛자도 모르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나무꾼이었는데 금강경 소리 한 구절 떡 듣고는 그만 그 순간에 끝났습니다. 마음이 환하게 밝아진 겁니다.

그래 久參衲子(구참납자)라고 뻐길 것이 뭐 있습니까?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생각만 할 줄 알아도 사람이 어지간히 철들 텐데, 그런 생각마저 못하고, 뭐든지 연륜이 쌓이고 오래 됐다고 거기에 相이 붙어서 문제가 많습니다. 인간의 지고한 가치는 결코 초심자나 구참이나 여기에 분별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총림에서 머리가 희고 이가 누렇게 되었으나 통달하여 깨닫지 못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잠깐 총림에 들어와 한번 돌이켜 문득 살아나, 천 가지를 통달하고 백 가지를 승당했습니까?

그렇지요. 6조 스님이 그렇듯이 또 어떤 사람들은 중 되자마자 1년도 안 돼서 그냥 눈이 환히 밝아져서 일 마쳐버린 사람도 있고, 그저 한 철 공부하고는 일 마쳐버린 사람들도 있고,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토요 참선 회에 참석하셔서 하룻저녁 잘하면 재수 있으면 건진다니까요. 사실입니다.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다.이것은 무엇을 쌓아서 얻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오래된 사람일수록 못 깨닫는다는 이 말도 어폐는 있지만, 어쩌면 그 말이 더 가까울지 몰라요.

공부를 그렇게 많이 아니해 보셨지요? 아니해 보셨으면 더 영험이 있습니다. 영험이 더 있어요.

  발심은 선후가 있어도 마음 깨닫는 것은 선후가 없습니다. 불교에 입문한 것이야 인연 따라서 들어오다 보니까 선후가 있지요. 10년 된 사람. 20년 30년 된 사람도 있지만, 마음 깨닫는 것에는 어디 선후가 있겠습니까?

오늘 들어온 사람도 깨닫고, 들어오지 아니하고도 깨닫고요. 심청전 하이라이트 심봉사 눈뜨는 장면. 여러분들 잘 아시지요? 심봉사는 그래도 잔치에 참석이나 해서 눈을 떴지요. 앉아서 뜨는 사람. 서서 뜨는 사람. 누워서 뜨는 사람. 오다가 뜨는 사람. 잔치에 거나하게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뜨는 사람. 잔치가 있다는 소문도 못 듣고 집에 그냥 있는 사람. 저~ 지방에서 그런 소문도 못 듣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동시에 눈을 뜨는 겁니다.

   잔치에 참석하면 참석했다고 해서 눈뜨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참석 못한 사람도 눈을 뜨는 겁니다.

그날 맹인들 눈뜨는 소리가 그냥 따닥따닥, 따닥따닥. 여기서도 따닥. 저기서도 따닥. 눈뜨는 소리 다 들어보셨지요?

그것 아주 참 기가 막힌 소설이지요. 그것이 화엄경 도리입니다.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우리 늘 외우는 그 도리를 그렇게 표현했는데 기가 막히게 표현했잖아요?

구참선달 이라고 해서 잔치에 참석해서 이런 저런 소리 꼭 들어야만 눈뜨는 것이 아닙니다. 잔치에 아니 와도 눈떠요. 그러니까 이런 법문 안 들었고,

괜히 길가다가, 장사하고 싸우다가도 문득 눈 뜨는 수가 있습니다.

  저 앞에 있었지요? 廣額屠兒(광액도아). 소 잡는 백정이 어느 날 소를 잡다가 칼을 척 집어 던지면서 “나도 일천 부처님 수에 들어간다.” 이겁니다.

불교 참 재미있잖아요? 신기하잖아요? 대단하지요. 어디에 이런 이론이 있습니까? 불교. 특히 선불교만이 이런 이론이 가능합니다.

물론 대승불교에도 廣額屠兒이야기는 禪적인 맛이 상당히 가미된 열반경 이야기지만, 대승불교에서부터 그런 경향을 많이 보이지요?

  옛날 李文和(이문화) 都尉(도위)가 石門慈照(석문자조)를 參禮(참례)했을 때 말 한 마디에 承當(승당)해서 승당이라는 말은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말 한 마디에 깨달아서 문득 천 가지를 통달하고 백 가지를 감당하였습니다. 千了百當(천요백당). 옛날부터 깨달았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한 마디에 천 가지를 통달하고 백 가지를 감당하였다. 했으니까 이에 게송을 지어 자조에게 이르기를

“도를 배움에는 모름지기 쇠로 된 사람이어야 공부하여 마음을 판단할 것이니, 저 앞에 있었지요? 쇠로 된 사람. 무쇠로 된 사람이라야, 근기가 그렇게 돼야 된다는 말이지요. 바로 위없는 보리를 얻고자 하면 일체의 시비를 상관하지 말라”  공부인의 자세가 이렇게 돼야 된다 고 하였습니다.

공부인의 자세를 이렇게 표현한 것인데,

석문자조 스님이 이문화 라는 도위벼슬 하는 사람에게 내린 게송이 바로 이겁니다. 공부인의 자세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스님들도 보면 현실문제에 등한시 하면 살아있는 불교가 아니고, 생명력을 잃은 불교다.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된다고 해서...

제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이익을 당하니까 사건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스님이 무슨 사건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아마 다들 짐작 하실 겁니다.

특히 출가인은 그런 데에 시시비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도 좀 뜻있는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이것은 時節因緣(시절인연)이라는 것이 있어요. 시절인연에 따라서 불가항력입니다.

지금 제 방 앞에 매화가 있는데요. 그 놈이 피려고 하다가 추워서 오므라들고, 피려고 하다가 오므라들고, 피려고 하다가 오므라들고 그러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막 터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입니다.

  우리 손으로 이 지구를 설사 파멸을 한다 손치더라도 이것은 때가되면 불가항력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던지, 아니면 외계인이 와서 하던지 이 시절인연을 무시 못 합니다. 우리가 언제 그런 것을 문제 삼고 산 것이 불과 얼마나 됐습니까? 아직은 이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시간 좀 더 흘러봐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래서 여기에 보면 정말 위없는 보리.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일체의 시비를 상관하지 말라 이것이 석문자조 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서두에 제가 말씀드렸지요? 만약 ‘내가 한 시간을 좌선하고자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을 다 깡그리 놓아버리고, 지구가 거꾸로 돌아가든지, 해가 서쪽에서 뜨든지, 뭐 안 뜨든지 까짓 것. 이것마저도 상관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런데 집에다 가스 불 위에다 솥을 올려놓고 왔든지, 내려놓고 왔든지, 비는 오는데 빨래를 밖에다 널어 놨든지, 안에다 널어 놨든지, 이런 것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사를 다 놓아버리세요. 한 시간을 하더라도 만사를 놓아버리고 해야 그것이 소득이 있습니다.

一切是非(일체시비)를 莫管(막관)하라. 이것은 공부인의 철칙입니다.

할 때는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야 무슨 소득이 있지요.

하다못해 세속의 어떤 공부나, 세속의 어떤 일을 하는데도 그렇게 온 정신을 다 동원해서 매진해야 되거든요. 그래야 뭐가 좀 남는 것이 있는데, 하물며 출세간의 공부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다만 바로 그 자리에서 공부해 가서 죽으면 문득 쉴지언정 뒤도 생각하지 말고 앞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 따라가지는 못해도 정말 속 시원하지요? 얼마나 아주 속 시원합니다.

죽으면 쉴지언정. 어떤 사람들은 “죽어도 못 쉰다.”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그런데 죽으면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죽어 버렸는데 그 사람 공부 안 한다고 누가 시비 하겠습니까? 죽으면 문득 쉴지언정 앞뒤 생각하지 말고 밀어붙이라 이겁니다.

  그전에 오대산에 방한암 스님 있잖아요. 우두산에서 공부하실 때 어떤 객스님이, 한암 스님이 거기서 공부하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우두암이라는 토굴에 가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요.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까 스님 한분이 미동도 안 하고 딱 앉아 있는 겁니다.

‘아, 저 스님이 한암 스님이구나.’ 싶어서 걸망을 내려놓고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옆에 그냥 앉았어요. “오네가네” 인사 없습니다.

愼人事往還(신인사왕환).인사 한다고 왔다 갔다 하는 것 삼가 하라고, 하지 말라고 초발심자경문에 딱 박아놨거든요. 자기가 사는 절에 아니, 자기 방에까지 들어 왔는데도 미동도 아니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쯤 돼야 되는 겁니다.

  이 객스님은 먼 길 와서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한 시간 쯤 앉아있으니까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선정에 들어있는 사람 깨울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나와서 부엌을 더듬어 솥을 열어보니까 싸늘한 겁니다.

‘이 스님이 밥도 안 해먹나?’ 싶어서 (불을 뗐던 아궁이에다 손을 넣어보면 최소한도 한 이틀은 따뜻한 기운이 있거든요.) 아궁이에다 손을 넣어보니 아무 온기가 없는 겁니다. 며칠을 밥을 아니 해 먹었는지 몰라요.

그리고는 앉아 있는 겁니다. 공부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그 정도로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효봉스님 잘 아시지요? 효봉스님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못해도 그런 제대로 공부한 스님들의 이야기. 이 이야기만으로도 뭔가 힘과 용기를 주지 않습니까?

그 스님도 하도 오래 앉아 있어서, 앉아서 버티어서 절구통 수좌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루 이틀 정도가 아닙니다.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그냥 앉아 배기는 겁니다.  그래서 엉덩이가 짓물러서 곪아 터져서 고름이 나와서 며칠 후에 일어나니까 방석이 자기 옷하고 눌러 붙어서 떨어지지 않더라는 겁니다.

짓물러서 고름이 내려앉고 또 내려앉고 마르고, 마르고 내려앉고 마르고 내려앉고 해서 이것이 시멘트 해놓은 것 같이 방석이 안 떨어지더라는 겁니다.

이것은 실지로 본 사람들이 한 소리입니다.

본인들은 그런 소리 아니 하지요. 한암스님 이야기도 본 사람이 와서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인간이 독하려면 그쯤까지 독 해지는가 봐요. 정말 지독하지요.

그것은 근년의 스님들의 이야기니까요.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만두고 근년의 스님들의 이야기니까요.

한암스님은 제가 뵙지 못했어도 효봉스님은 뵙거든요.

불과 한철 정도지만 효봉스님은 동화사에서 같이 공부했거든요.

   “無 라?”

   “無 라?” 하고 고함을 치는데 깜짝깜짝 놀랍니다.

같이 앉아있든 딴 방에 있든 간에, 그러면 자기 자신도 경책하고 다른 사람도 경책하고 노장이 “무 라?” “무 라?” 하고 고함을 치는데 그 소리 듣고, 젊은 수좌들이 어떻게  누워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습니까?

그냥 벌떡 일어나는 겁니다. 벌떡 일어나서 화두가 되 든 안 되든 앉아서 정진 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수행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 또 꼭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야기는 우리가 서서히 서장을 끝낼 시기가 되어가서 이런 이야기도 이런 기회에 들려드려야 되겠다 해서 드리는 말씀이고, 여기는 구참 이라든지 초심자라든지, 또 오래 했다든지 얼마 아니 했다든지, 이런 것에 관계없이 어느 순간 마음의 눈을 문득 뜨기만 하면 끝이라는 생각의 이야기입니다.

여기 생철로 지어 만든 사람.일체의 시비를 상관하지 말라. 고 하는 이런 경책에 좀 부연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만 바로 그 자리에서 공부해 가서 죽으면 문득 쉰다. 참 무서운 이야기 아닙니까?

  p. 155~156

21. 허사리 수원에게 답함(2)

  우리 불가에는 불교에 입문하면 부처님에게 아니, 불교에 적을 두게 되었다는 뜻에서 불명내지 법명을 짓게 됩니다. 여성 불자님은 여성 불자에게 맞게 짓고, 남자들은 남자에게 맞게 지어서 법명. 또는 불명. 법호. 도호. 도 닦는 사람이라고 해서 도호라는 표현을 씁니다. 같은 이야기지요.

여기에 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불자에게 아주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당신은 바른 믿음과 바른 뜻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기본입니다. 그렇지요. 바른 믿음 바른 뜻을 세우는 것은 佛祖가 되는 기본이지요.

제가 그 때문에 湛然(담연)이라고 당신의 道號(도호)를 지어드립니다.

이것이 아마 청을 했을 겁니다. 청을 했으니까 지었겠지요. 청도 아니 했는데 지었으면 대혜스님 답지가 않지요. 湛然이라고지었어요.

옥편에 보면 맑을 잠이라고 표현 했는데, 불가에서는 “담”이라고 읽습니다. “맑다.”이 말입니다. 마음의 본성은 깨끗하다. 겉으로는 온갖 탐 진 치 삼독과 8만4천 번뇌로 오염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그 본성은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설사 오염이 되어 있어도 그 본성은 아주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제가 아까 사람, 사람이 본래 갖추었고, 또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이 석가와 달마로 더불어 다르지 않다 하는 그 구절에 인간의 지고한 기존의 본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 담연이라는 뜻도 사실은 그렇습니다. 그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도호를 지어 준 것이지요.

  물이 맑아 움직이지 않으면 비고 밝아서 스스로 비추는 것과 같아서 마음 쓰는 수고를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湛然이라는 자기 법호 하나만 잘 챙겨도 공부 끝입니다.

세간과 출세간의 법이 湛然을 떠나지 않아서 털끝만큼도 새지 않습니다. 세상사 모든 것이 뭐라고요?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결국은 우리 한마음자리 가리키는 소리가 湛然이니까 모든 세간사나 출 세간사나 전부 우리 한마음이 만든 것이고, 우리 한마음이 운영해 가는 것이니까 湛然을 떠나지 않다고 그런 것입니다.

  다만 이 도장[印]으로 一切處(일체처)에 찍어 정하면 옳은 것도 없고 옳지 않은 것도 없을 것입니다. 낱낱이 해탈이며, 낱낱이 밝고 묘한 것이며, 낱낱이 실제가 되어, 작용할 때에도 또한 맑으며, 작용하지 않을 때에도 또한 맑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실 하나! 사실은 이 사실 하나 밝혀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소승불교나 다른 어떤 잡다한 가르침에는 이것을 그대로 드러내서 이야기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빙글빙글 돌고, 또 수많은 근기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 근기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까 별별 가르침이 많게 된 입니다.

  잎을 다 떨쳐버리고, 온갖 가지 다 쳐버리고 최종적으로 남은 것이 선불교입니다. 선불교는 이렇게 직설적인 표현이 많습니다. 거의 다 그렇지요.

부처님도 때로는 꽃 한 송이 들어서 표현하기도 하고, 또 자리를 반 나누어서 표현하기도 하고, 그것이 다 그야말로 이 한 물건.

여기서 湛然(담연)이라고 표현한 이 사실을 드러내 보인 것이고,

湛然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인 것이 꽃을 들어 보인 것이고 손가락을 들어 보인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얼른 가슴에 와 닿지 않으니까 우리는 계속 밖을 헤매면서 맴돌고 있을 뿐이지요.

  조사가 이르기를 “다만 마음으로 分別(분별)하고 計較(계교)하면 자기 마음으로 보고 헤아리는 것이 다 꿈이다.

만약 마음이 寂滅(적멸)하여 하나도 생각을 움직임이 없으면 이것을 正覺(정각)이라 이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心中無有事. 우리 마음가운데 아무 일도 없는 것. 그러면 그것이 고요한 자리입니다. 고요하면 세상에 어떤 경계도 어떤 일도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어떻게 하려해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돌아가는데 내가 어떻게 되지 아니해도 나[我]는 아무 손해 없습니다. 전부 손해 볼까봐 두려워서 뉴스보고 신문보고, 이렇게 생각해 보고 저렇게 생각해 보고, 연구 많이 했다고 언제 무슨 연구원으로 불러간 적도 없는데, 세상연구 했다고 연구원으로 한 번도 데려간 적이 없어요.

앞으로도 데려가지도 아니해요. 그런데 혼자 그렇게 연구 하고 앉아 있는 겁니다. 그날 뉴스 안 보면 세상에 뒤떨어진 사람이 될까봐 염려하고 두려하고 있는 겁니다. 전혀 그럴 일이 없으니까 寂滅한 자리. 이것이 불교가 터득한 경지이고,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이 제시한 아주 좋은 공양입니다.

적멸한 자리를 우리가 한 번씩 맛보는 것. 만사 다 놓아버리고, 정말 放下着해버리고 한 순간이라도 철저히 어떤 여백을 가져보는 그것이 선불교를 만난 다행함이 아닐까? ←이런 생각입니다.

  다른 교학상의 불교는 외울 것도 많고, 이리저리 짜 맞춰야 할 것도 많고 그래요. 앞뒤가 맞아야 되고 그런데, 이 선불교는 그런 모든 것을 철저히 비울 수 있으면 잘 비우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입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동양화의 餘白(여백)이 있음으로 해서 그 그림이 살아나지 여백이 없으면 그림이 안 살거든요.

여백을 어떻게 적절하게 안배하느냐? 여기에 동양화의 승패가 걸렸거든요.

그와 같이 우리 삶에 있어서도, 인생사에 있어서도 이 선불교라는 것.

간화선이라는 것을 통해서...

  여백은 연하게도 칠하면 안 됩니다. 철저히 붓을 대지 말아야 됩니다.

그와 같이 우리 삶의 여백도 어떤 티끌도 거기에 남겨두지 말고 철저히 비워버리는 것. 그래야 다른 어떤 활동상의 내 시간이, 활동하는 내 시간이 아주 돋보일 것입니다. 아주 빛날 겁니다. 참 꿀맛 같고 소중할 것입니다.

마음에 잘 새겨보시길 바랍니다.

  깨달음이 이미 바르게 되면, 날로 쓰는 하루 가운데 색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냄새를 맡고 맛을 분간하며, 촉감을 느끼고 법을 알아 行住坐臥(행주좌와)와 語黙動靜(어묵동정)이 고요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잘못된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생각이 있고 없음에 다 맑고 깨끗할 것입니다. 여백이 있음으로 해서 다른 그림이 살아나듯이 우리 삶에도 여백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작용하고 활동하는 그것이 아주 빛을 발한다.

그것도 역시 아주 깨끗한 삶이 될 것입니다. 깨끗한 우리의 어떤 여백이 있음으로 해서... 잠 하고는 달라요. 잠자는 것도 여백이 아니냐? 

그것도 여백은 여백이지만, 그런 것 하고는 다르지요.

  잠이라는 것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아마 깜깜한 여백일 것입니다.

깜깜한 여백.“惺惺寂寂(성성적적)”이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지요?

성성적적한 그런 餘白. 우리 정신에서 그런 空間. 그런 사간을 가지면 이것이 무슨, 여기도 그런 것을 많이 지적 했어요. 그러면 이것이 잘못 된 것이 아닌가? 空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 이런 염려를 합니다.

설사 공이라 하더라도 空에 한 번 떨어져 보세요. 괜찮으니까요.

  이미 맑으면 움직일 때에는 맑음의 작용이 드러나고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맑음의 本體(본체)로 돌아갈 것입니다.

체용이 비록 다르나 맑은 것은 하나입니다. 栴檀香(전단향)을 쪼갬에 조각 조각이 다 전단향인 것과 같습니다.

불상을 조성하거나 탱화를 그려놓고 점안할 때 의례히 하는 법문. 아주 최상의 법문이지요.

栴檀木做衆生像(전단목주중생상)

      及與比丘菩薩形(급여비구보살형)

      萬面千頭雖各異(만면천두수각이)

      若聞薰氣一般香(약문훈기일반향)

전단 나무로 중생의 모습. 중생이라는 것이 모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구모습. 보통사람의 모습. 보살의 모습. 나한의 모습. 불상의 모습. 생선의 모습. 코끼리의 모습. 말. 소. 돼지. 닭. 이런 모든 모습을 다 조각을 했다.

  萬面千頭雖各異. 만 가지 머리와 천 가지 얼굴이 각각 다 다르지만, 그 향기를 맡아보면 전부 전단향기가 납니다. 생선을 조각해 놔도 생선 냄새가 안 나고 전단향기가납니다. 여기의 이야기가 그대로 아닙니까?

전단향을 쪼갬에 조각 조각이 다 전단향인 것과 같습니다.

이런 법문으로 불상을 점안해놓고 딱 점안 서두에  이 법문을 합니다.

자세히 들어보면 염불이 그것입니다.

엉터리 화가가 그림을 형편없이 그렸든, 무당집에 있는 아주 희한하게 생긴 불상도, 저기 시장에 가서 돈 만원주고 산 불상도 불상입니다.

부처님이라고요. 그 뜻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점안을 딱 했을 때, 거기에 생명을 갖는 부처님이고 우리가 존경해야할 존경의 대상으로서의 부처님이라는 뜻으로 서두에 이런 염불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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