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간록(林間錄)

93. 명교스님의 저술들 / 명교 계숭(明敎契嵩)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3. 12. 17:29

 

 

 

 명교 계숭(明敎契嵩)스님이 처음 동산(洞山)에서 나와 강산(康山) 지방을 행각하다가 개선사(開先寺)에 머물때,

그 곳 주지가 스님을 학문과 글에 뛰어난 훌륭한 젊은이라 하여 서기(書記)를 맡기자 스님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 어찌 스님을 위하여 한 잔의 강행탕(薑杏湯)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곧 그 곳을 떠나 항주 서호(西湖)에서 30여 년을 사는 동안 문을 굳게 닫고 누구하고도 교류하지 않았다.  

가우(嘉祐) 연간(1061)에 자신이 지은 「보교편(輔敎編)」. 「정조도(定祖圖)」. 「정종기(正宗記)」를 대궐에 올리고자 하니,

그 당시 임시 개봉윤(開封尹)으로 재직하던 한림학사 왕소(王素)가 글을 써 조정에 천거하였다.  

 

인종(仁宗) 황제는 오랫동안 감탄해 마지 않다가 그 책을 중서재상(中書宰相) 한공(韓公 : 韓愈)에게 내려주니,

참정(參政) 구양수(歐陽修)는 읽은 후 깜짝 놀라 조정의 사대부들에게 칭찬하였다.  

이 책은 결국 대장경의 한 편으로 들어가게 되고,

스님의 명성은 마침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만년에는 영은사(靈隱寺)의 북쪽 영안암(永安庵)에 머물면서 이른 아침이면 「금강반야경」을 쉬지 않고 외웠으며,

재(齋)가 끝나면 책을 읽고,

손님이 찾아와도 세상 일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법담을 나누었다.  

언젠가는 이런 게를 읊었다.

 

   길손 떠나가니 법담은 줄고

   나이 들어 흰 머리칼 가득하다.

 

   客去淸談少    年高白髮饒

 

   또 한밤중이 되도록 관세음보살을 십만번 염불한 후에야 잠자리에 드니,

그의 굳은 수행과 맑은 기풍은 종산(鍾山) 용문 청원(龍門淸遠 : 1067~1120)스님과 짝이 되기에 넉넉하다 하겠다.

   지난날 해월(海月)스님에게 보낸 스님의 서간문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었다.

 

   “몇해 전부터 종이 이불 한 장을 마련하여 매서운 추위를 막아보려 하였었는데 이제사 다행히 다 되었습니다.   

멀리서 생각해보니 이 이야기를 들으면 껄껄대고 웃겠죠!”

   임종할 때에는 미소를 머금은 채 편히 앉아 붓을 들어 게를 지었다.

 

   내일 밤 달이 돋으면

   나만이 홀로 떠나가리라

   대매(大梅)스님의 도를 못다 배운 채

   오히려 다람쥐 소리를 탐하는구나.

 

   後夜月初明    子將獨自行

   不學大梅老    猶貪鼯鼠聲

 

   스님은 동산 효총(洞山曉聰)스님에게서 법을 얻었었는데,

「종파도(宗派圖)」에서 그를 덕산 법원(德山法遠)스님의 법제자 계열에 둔 것은 잘못된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