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록(雲門錄)

십이시가(十二時歌)

通達無我法者 2008. 3. 14. 09:21

 

 

      십이시가(十二時歌)

 


 축시(丑時)에 닭이 우니
 깨어나서 추레한 모습을 근심스레 바라본다
 군자(裙子)도 편삼(編衫)도 하나 없고
 가사(袈裟)는 형체만 겨우 남았네
 속옷에는 허리 없고 바지에는 구멍 없고
 머리에는 푸른 재가 서너말 덮였구나
 도 닦아서 중생 구제하는 이 되렸더니
 형편없이 되어버릴 줄 그 누가 알았으리


 인시(寅時)는 첫새벽이니
 폐허된 마을 부서진 절은 참으로 형언키조차 어려운데
 공양때면 죽 쑤고 밥할 줄 아나 쌀 한 톨 없어서
 무심한 창문, 창틀에 쌓인 먼지만 괜스레 바라본다
 유난히 짹짹대는 참새는 사람과는 친하지 말라 하니
 호젓이 앉아 때때로 떨어지는 낙엽소리 듣는다
 출가인은 애중을 끊으라 그 누가 말했던가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수건을 적신다


 묘시(卯時)에는 해가 뜨니
 청정심이 뒤집혀 번뇌가 되면
 유위공덕(有爲功德)에는 먼지 깃발 덮이고
 무한전지(無限田地)는 소제 한번 안하네
 눈썹 찌푸릴 일만 많고 마음에 맞는 일은 적어
 참기 어려워라, 동촌(東村)의 거무티티한 노인은
 보시 한번 가져온 일 없이 당나귀 풀어놓아
 법당 앞에 풀만 뜯어먹게 하는구나


 진시(辰時)는 공양때이니
 사방 밥짓는 연기만 부질없이 바라본다
 만두와 찐떡은 작년 맛이 아니라
 오늘 생각해보며 공연히 군침만 흘린다
 집념은 줄어들고 탄식은 많아지니
 백 집을 뒤져봐도 좋은 사람 없어라
 찾아오는 사람은 마실 차를 찾는데
 찌꺼기도 먹지 못하고는 가면서 노여워하네


 사시(巳時)는 오전이니
 머리깎고 이 지경에 이를 줄을 그 누가 알았으랴
 까닭없이 청을 받고 마을에 내려가
 굴욕과 굶주림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라
 오랑캐 장씨와 검은 얼굴 이씨는
 조금도 공경심은 내지 않고서
 조금전에 불쑥 문앞에 와서 한다는 말이
 차 좀 주세요 종이 좀 주세요 할 뿐이네


 오시(午時)에는 해가 남쪽에 있으니
 수레바퀴처럼 다반사로 정처없이 돌다가
 남쪽 집도 가보고 북쪽 집도 가본다
 마침내 간 북쪽 집에서는 아무 군말 아니하고
 쓴 모래소금과 보리 초장, 옥수수 밥에
 상치쌈과 양념장 내주면서 당부를 하네
 공양을 등한히 하지마소서
 스님의 도심 부디 견고하소서


 미시(未時)에는 해가 기우니
 이번에는 양지 그늘 나뉜 땅을 밟지 않으리
 한번 배부르면 백번 굶주림을 잊는다고 들었더니
 오늘 이 륵은 중이 바로 그러하구나
 선(禪)도 닦지 않고 경(經)도 논하지 않고
 다 떨어진 자리 깔고 햇볕 속에 낮잠 잔다
 저 위의 도솔천을 생각해봐도
 해볕에 등을 굽는 여기만은 못하리


 신시(申時)에는 해 저무니
 오늘도 향 사르고 예불하는 사람이 있어
 노파 다섯에 혹부리 셋이라
 둘은 거은 얼굴에 주름투성이구나
 기름과 베, 차는 참으로 진귀한 것이니
 금강역사여, 애써 힘줄 세울 필요없다네
 바라건데 누에 잘 되고 보리 잘 익어서
 라훌라 자식놈 돈 한푼 주어 봤으면


 유시(酉時)에는 해가 지니
 쓸쓸함 밖에 무얼 다시 붙들랴
 고상한 운수납자 의지할 곳 하나 없네
 가는 절마다 버티고 선 사미승은
 격식을 벗어난 말 먹히지 않으니
 석가모니를 잘못 잇는 후손이로다
 한가닥 굵다란 가시나무 주장자는
 산에 오를 때 뿐 아니라 개를 때릴 때도 쓴다네


 술시(戌時)는 황혼이니
 컴컴한 빈 방에 홀로 앉아서
 너울대는 등불을 영영 보지 못하고
 눈앞은 온통 깜깜한 금주(金州)의 옷칠일세
 종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럭저럭 날만 보내니
 들리는 소리라곤 늙은쥐 찍찍대는 소리뿐
 어디다가 다시 마음을 붙여볼까나
 생각다 못해 한번 바라밀을 외워본다


 해시(亥時)에는 잠자리에 드니
 문앞의 밝은 달을 누가 사랑하리오
 이때 되면 오로지 누워 잘 생각뿐
 한벌 옷은 입지 말지니 무얼 덮으려는가
 유씨 유나(維那) 조씨 5계(五戒)
 입으로는 덕담하나 정말 이상하구나
 내 결망을 비게 하는 건 그대 맘이거니와
 모든 인연 물어보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자시(子時)면 한밤중이니
 마음경계 잠시라도 그칠 때 있었던가
 생각하니 천하의 출가인 중에
 나같은 주지가 몇이나 있을까
 흙자리 침상 낡은 갈대 돗자리
 늙은 느릅나무 목침에 덮개 하나 없다네
 부처님 존상에는 안식국향 사르지 않고
 잿더미 속에서 맡는 냄새 쇠똥냄새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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