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록(黃龍錄)

황룡록 해제(黃龍錄 解題)

通達無我法者 2008. 3. 17. 08:35

 

 

 

황룡록 해제(黃龍錄 解題)

 


 「황룡록(黃龍錄)」은 임제종(臨濟宗) 황룡파의 개조(開祖)인 황룡 혜남(黃龍慧南 : 1002∼1069)스님의 어록이다.
  스님은 신주(信州 : 江西省) 옥산(玉山) 출신으로, 속성은 장씨(章氏)이다. 11세에 정수원(定水院)의 지란(智 )스님에게 출가하여 19세에 삭발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여러 곳을 행각하였는데, 여산(廬山) 귀종사(歸宗寺에서 자보(自寶)노스님을 참례하였고, 삼각산(三角山) 서현사(棲賢寺)에서 회징(懷澄)스님을 참례하여 3년간 시봉하다가 회징스님이 늑담( 潭)으로 옮기자 따라갔다.  이때 법기(法器)를 인정받아 분좌설법(分坐說法)을 하였다.
  그 후 다시 행각하면서 운봉문열(雲峰文悅)스님의 권유로 석상 초원(石霜楚圓:987∼1040)스님을 뵈러 가다가 형악(衡岳)의 복엄사(福嚴寺)에 머물면서 서기(書記)를 맡고 있었는데, 석상스님이 복엄사의 주지로 왔다. 
이에 입실(入室)하여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조주감파(趙州勘破)의 이야기를 듣고 마침내 깨쳤다. 스님의 나이가 35세(宋 明道 2年:1033) 때의 일이다.
  다시 제방(諸方)을 행각하다가 홍주(洪州) 봉서사(鳳棲寺) 동안원(同安院)에서 개당설법을 하였다.  이때 석상스님의 법을 이었음을 밝혔는데, 이것을 전해들은 회징스님은 교분을 끊었다.
  귀종사에 돌아와 주지하던 중, 절에 불이 나서 그 죄로 투옥되었다가 2개월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다시 황벽산(黃檗山)으로 옮겨서 깊은 산에 암자를 엮고 적취암(積翠庵)이라 하였다. 많은 납자들이 모여들어 스님의 지도를 받았는데, 스님의 지도방법 중 3관화(三關話)는 이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후에 융흥부(隆興府)의 황룡산(黃龍山)으로 옮겨 크게 종풍을 날리니, 스님의 종풍은 호남(湖南), 호북(湖北), 강서(江西)를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뒷날 이 일파를 황룡파라 불렀다.
  희녕 2년(熙寧 2年 : 1069) 3월 17일 입적하니 세수 68세이다.
  법제자가 83인이나 되어 마조(馬祖)스님만큼이나 많았다고 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황룡 사심(黃龍死心), 늑담 극문( 潭克文), 동림 상총(東林常聰)스님 등이 뛰어났다.  후에 휘종(徽宗)은 대관 4년(大觀 4年 : 1110)에 보각선사(普覺禪師)라고 시호하였다.
  스님의 어록으로는 「황룡혜남선사 어록(黃龍慧南禪師語錄)」1권, 동 「어요(語要)」1권, 동 「서척집(書尺集)」1권이 있다.
 「황룡혜남선사 어록」은 황룡스님의 4세 법손인 구정 혜천(九頂惠泉)스님이 손으로 쓴 것이다. 혜천스님은 황용과 네 스님〔黃龍慧南, 晦堂祖心, 死心新悟, 超定慧方〕의 어록을 모아서 「황룡4가집(黃龍四家集)」을 편집하였는데, 그 맨 앞에는 소흥 11년(紹興 11년:1141) 전밀(錢密)이 찬(撰)한 황룡4가어록 서(序)를 붙였다.
  황룡혜남선사의 어록에 수록된 것은 다음과 같다.


  동안숭승선원 어요〔同安崇勝禪院語要〕11가지
  귀종사로 옮겨 살면서 남긴 어록〔遷住歸宗語錄〕13가지
  균주 황벽산에서 남긴 법어〔筠州黃蘗山法語〕15가지
  황룡산에서 남긴 어록〔黃龍山語錄〕14가지
  게송(偈頌)41수

 

 


  그 후 경도(京都) 건인사(建仁寺) 양족원(兩足院)의 고봉 동준(高峰東晙:1736∼1801)스님이 「황룡혜남선사어록 속보 (黃龍慧南禪寺語錄續補)」를 새로 편집하였다. 「속전등록(續傳燈錄)」「연등회요(聯燈會要)」「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속고존숙어요(續古尊宿語要)」「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영평광록(永平廣錄)」「무시개심선사어록(無示介諶禪師語錄)」 등에서 50여항을 새로 수집하였고, 또 「오등회원」「임간록」「운와기담」등에서 황룡3관과 그 밖의 게송 12수를 구하여 수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