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록(楊岐錄)

양기록 해제(楊岐錄 解題)

通達無我法者 2008. 3. 17. 09:31
 

 

양기록 해제(楊岐錄 解題)

 

양기록 은 양기파의 개조인 양기방회(楊岐方會 : 993-1046)스님의 어

록이다.스님은 원주(袁州:江西省) 의춘현(宜春縣)에서 태어났으며,속성

은 냉씨(冷氏)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였는데, 서주(瑞州

: 江西省) 구봉사(九峰寺)에 놀러갔다가 마침내 출가하여 담주(潭州)

유양(劉陽)의 도오산(道吾山)에서 삭발하였다.

제방(諸方)을 행각하다가 석상 초원(石霜楚圓)스님을 참례하고서는 오랫

동안 시봉하였고, 초원스님이 도오산, 석상산으로 옮김에 따라갔었다.

그러나 초원스님께 법을 물을 때면 "창고 일[庫司事]이 번거로우니 가보

라" 하거나 또는 "감사(監寺)는 나중에 자손이 천하에 퍼질 것인데 어찌

서두르는가" 할 뿐이였다.

하루는 초원스님이 산에 나갔다가 비를 맞은 것을 보고서 "이 늙은이

야, 오늘은 내게 꼭 말해라. 말하지 않으면 때리겠다"고 하자 초원스님이

말했다. "감사도 이일을 알지. 그만두어라." 이 한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

에 크게 깨치고는 진흙길에 엎드려 절하였다.

그 후 초원스님이 담주(潭州:湖南省) 광화사(光化寺)로 옮김에 하직하

고서 구봉사로 돌아갔다. 그 후 승속의 청에 의해 원주 양기산 보통선원

(普通禪院)에 계시다가 경력6년(慶歷 6年:1046) 담주 운개산(雲蓋山) 해

회사(海會寺)로 옮겼다. 법석을 펴다가 얼마 후 입적하셨으니 세수 54세

이다.

스님의 어록으로는 「원주양기방회화상어록(袁州楊岐方會和尙語錄)」1권

동 「후록(後錄)」1권, 동「어요(語要)」1권이 남아 있다.

법제자로서는 백운 수단(白雲守端), 비부 손거사(比部孫居士), 보녕 인용

(保寧仁勇)스님 등 10여 명이 있으며, 운거산에 수탑(樹塔)이 있다.

「양기화상어록」은 일찍이 양기파의 네 스님〔慈明石霜楚圓, 楊岐方會,

白雲守端, 五祖法演〕의 어록을 모은「자명4가록(慈明四家錄)」에 수록되었

을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으로는 「고존숙어요(古尊宿語要)」3에 수록

된 것이 가장 오랜된 것이며, 여기에는 황우(皇祐) 2년(1050) 문정(文政)의

서(序)와 원우(元祐) 3년(1088) 양걸(楊傑)의 서가 붙어 있으며, 여기에 수

록된 법어는 다음과 같다.

원주양기산보통선원회화상어록(袁州楊岐山普通禪院會和尙語錄,保寧仁勇編)

후주담주운개산해회사어록 (後住潭州雲蓋山海會寺語錄, 白雲守端編)

감변(勘辯)

게송(偈頌)

명장본(明藏本)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19에는 이것이 그대로 수록되

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문정과 양걸의 서가 권말, 즉 담주(潭州)「도오오진

선사오요(道吾悟眞禪師語要)」의 뒤에 붙어 있다.

「양기방회선사후록」은 그 편자(編者)를 알 수 없으며, 그 내용은「양기

록」에 수록되지 않은 상당·시중과 자찬(自讚)을 수록하였다. 그 외에도

「선학 대계(禪學大系)」에는 양기운개어록(楊岐雲蓋語錄)의 유보(遺補)로

서 선종정맥(禪宗正脈), 대광명장(大光明藏)에서의 발초어(拔抄語) 약간을

수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