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참선(參禪)의 장애(障碍) - ② 견혹(見或)과 사혹(思惑)

通達無我法者 2008. 3. 19. 11:39

 

 

참선(參禪)의 장애(障碍)


②견혹(見惑)과 사혹(思惑)

이러한 열 가지 번뇌 가운데서, 탐심, 진심, 치심, 아만심, 의심의 다섯가지 번뇌를 오둔사(五鈍使)라, 다섯 가지 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이것은 끊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견성오도(見性悟道)해서, 공부를 애쓰고 해서, 갓 도인(道人)이 된다 하더라도, 이 다섯 가지 번뇌는 다는 못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어려운 것입니다.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 아만심이나 의심 이런 번뇌의 거치러운 것은 끊어버린다 하더라도, 그 뿌리, 번뇌의 종자는 잘못 끊어버립니다. 우리가 도통(道通)한 뒤에도 오랫동안 닦아서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렇게 빨리 몰록해서 못 끊어버리고 둔하게 끊으니까 오둔사(五鈍使)라 이름합니다.

따라서 사혹(思惑)이라, 생각생각에 생각을 많이 하고 관념도 하고 또는 염불도 많이 하고 화두도 많이 둘고 이와 같이 해서 오랫동안 끊어야 하기 때문에 사혹이라는 말도 합니다.

또는 수혹(修惑)이라, 닦고 닦아서 끊으니까 수혹이라고도 이름합니다.

또는 사혹(事惑)이라, 현상계의 모든 것이 그런 번뇌에 걸려 따르는 수가 많으니까 사혹이란 말도 씁니다.

이같이 제가 여러 말씀을 괜히 드리는 것 같습니다마는, 혹시 이것저것 이런 술어가 나오면 서로 혼동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런 다섯 가지 번뇌는 떼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에 오둔사(五鈍使)라, 우리가 오랜 시간을 거쳐서 둔하게 끊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요 또는 사혹(思惑)이라, 생각을 오래 해서 많은 생각 끝에 비로소 끊어진다는 말 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있는 신견(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 이런 것은 빨리 끊어집니다. 우리가 공부해서 견성오도(見性悟道)라, 우리 본성 품인 불성(佛性), 법성(法性)을 볼 때에, 그냥 순간에 다 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견도(見道)와 수도(修道)를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견도(見道)는 우리 본 성품 즉, 진리를 보고서 깨닫는다는 말이고 수도(修道)는 견도한 뒤에 성불까지 가는 과정에서 닦는 것을 수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상식적으로 수도라 하면 곧장 닦아도 수도라고 합니다마는 엄밀히 개념을 구분해 보면, 견성(見性)한 뒤에 닦는 공부가 수도입니다.

그런데, 오둔사(五鈍使)는 번뇌를 끊기가 하도 어려우니까 견도(見道) 할 때, 즉 말하자면 우리가 도통할 때, 그 당시나 또는 성불하기까지 사뭇 애쓰고 끊어야 하지만 그러나 뒤에 든, 내 몸이라는 신견, 또는 내 몸이 항상 있다든가 끊어졌다든가 하는 변견, 또는 인과를 믿지 않는 삿된 견해, 견취견, 계금취견, 이런 것은 이치에 관한 번뇌이기 때문에, 소위 이론적인 번뇌이기 때문에, 견도위(見道位)에서 돈단(頓斷)이라, 견성오도(見性悟道)할 때 문득 다 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빨리 끊을 수 있다고 해서 오리사(五利使)라 합니다. 그야말로 아주 빨리, 별로 힘 안 들고 끊는다고 해서 리사(利使)라는 말을 쓰지요. 그러나 이것은 견성한 사람에 한해서인것이지 일반 사람들이야 어려운 문제가 되겠습니다만 아무튼, 빨리 끊는다고 해서 오리사(五利使)라, 또는 돈단(頓斷)이라, 이런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섯 가지, 이것은 이론적인 견해에 따른 번뇌니까 견혹(見惑)이라는 말도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와 같은 근본번뇌만은 외워 두고서 그때 그때 자기 스스로 행동할 때나 생각할 때에 '이것이 무슨 번뇌구나' 하고 구분하면서 번뇌를 떼어야 하겠습니다.

간추리면, 탐심(貪心)이나 진심(瞋心)이나 어리석은 마음 치심(痴心)은 삼독심(三毒心)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것을 부연시키면, 탐심, 진심, 치심, 아만심(我慢心), 의심(疑心), 또는 자기 몸에 대해서 내가 있다 하는 고집(我見), 또는 내 소유물에 대한 고집(我所見)인 신견(身見), 그 다음에는 내 몸뚱이가 금생과 내생에 있다는 고집(常見)이나 내 몸뚱이가 금생만 있고 끊어져 버린다는 고집(斷見)인 변견(邊見), 그 다음에는 인과를 부정하는 고집인 사견(邪見), 그 다음에는 별로 신통치 않은 견해를 좋다고 고집하는 견취견(見取見), 그 다음에는 해탈이나 또는 천상에 태어나는 원인이 아닌데도 원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것을 지키는 고집인 계금취견(戒禁取見), 이런 것이 근본본뇌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생활하는 가운데 거의 태반이 이와 같은 번뇌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격 완성을 부인하고 또는 영생의 행복을 부인한다면 이런 것이 아무 것도 아니겠습니다만, '기어코 영생한다 기어코 무한의 행복을 맛본다 기어코 최상의 인격이 된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싫으나 좋으나 이 열 가지 번뇌는 항시 기억해 가면서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백 팔 번 뇌 (百 八 煩 惱)

수번뇌(隨煩惱)…백팔번뇌(百八煩惱)

육근(六根)…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
설근(舌根), 신근(身根), 의근(意根) │18
육경(六境)…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 │번
육식(六識)…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뇌
신식(身識), 의식(意識) ┘

이기(已起)…이미 일어난 번뇌 - 18번뇌 ┐
│36번뇌
미기(未起)…아직 안 일어난 번뇌 - 18번뇌 ┘

과거, 현재, 미래<삼세(三世)> × 36번뇌 = 108변뇌

그 다음은 수번뇌(隨煩惱)라,
번뇌는 많다고 해서 무량번뇌(無量煩惱) 아닙니까, 한도 끝도 없는 번뇌입니다. 하여튼 우리 중생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거의가 다 번뇌이니까 무량번뇌가 되겠습니다. 다는 알수 없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 기본적인 것이 열 가지 번뇌인 근본번뇌(根本煩惱)이고, 또 거기에 따르는 수번뇌(隨煩惱)가 백팔번뇌(百八煩惱)입니다.

우리 보살님이나 거사님들이 대체로 많은 분들이 백팔 염주를 걸고 계시지요. 그렇지만 백팔 염주나 백팔번뇌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딱 막혀버리면 좀 답답할 것입니다. 우리가 염주를 거는 정도 같으면 적어도 백팔번뇌는 무엇인가 정도는 알아야만 자기 스스로도 그만치 마음이 흐뭇하고 남이 묻더라도 명쾌히 대답을 할 것입니다.

백팔번뇌는 무엇인고 하면,
백팔번뇌 풀이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외우기 쉽게 한 것을 여기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 이런 말을 씁니다만 불교를 초보적으로 공부 하신다 하더라도 이런 정도의 불교술어는 외워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경(佛經)을 볼 때에 뜻이 알아집니다.

기독교인들 모두 바이블(성경) 외우는 것 보십시요. 불교인들은 참 너무나 불경(佛經)을 소홀히 생각합니다. 적어도, 반야심경(般若心經) 한 편은 죽죽 외우면서 해설을 해야 할텐테 불교를 믿는 분들이 "반야심경 한번 풀이해 보십시요" 하면 할 분들이 참 드물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믿는 분들은 보다 더 공부를 좀 하셔야 합니다.

물론, 마음 닦아서 깨달아버리면 다 이겠습니다만, 그래도 역시 현대 사회가 하도 복잡한 때요 무수한 정보가 이렇게 혼탁(混濁)하니 얼켜 놔서, 우리가 바른 것을 해설 못하면 자칫 혼미(昏迷)를 느낍니다.

저번에 말씀마따나 유치원생도 그때부터 벌써 하느님 부처님을 구분하는 때란 말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적응해서 불교 교리(敎理)도 역시 기본적인 것은 꼭 외워두어야 합니다.

육근(六根)은, 안근(眼根)-우리 눈의 하나의 생리적인 근본 뿌리를 말하는 것과, 이근(耳根)-우리 귀의 뿌리, 비근(鼻根)-코 뿌리, 설근(舌根)-우리 혀 뿌리, 신근(身根)-우리 몸의 촉각의 근본을 말하는 감각기관과, 의근(意根)-우리 뜻의 근본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육근(六根)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람인 한에는 눈, 귀, 코, 혀 또는 몸, 뜻 이것을 다 갖추고 있어야 안되겠습니까.

그 다음은 육경(六境)이라, 이것은 색(色)-우리 눈에 보이는 일체유(有)의 현상계인 색(色)과, 다음 성(聲)-소리와, 다음 향(香)기와, 그 다음 맛(味)과, 그 다음은 촉(觸)감과, 그 다음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별하는 여러 가지 법(法)이라, 이 여섯 가지입니다.

우리가 육근(六根)이 있는 한에는 거기에 상대해서 육경(六境)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말로는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육근이 정화가 되어 버리면 그때는 천지우주가 하나의 부처로 다 환원되어서 부처로만 보이겠지만, 우리 범부는 그렇게 못되어 육근이 있는 한에는 거기에 따르고 상대해서,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또는 향기를 맡고, 또는 맛을 보고, 촉감을 느끼고 또는, 옳다 그르다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육근(六根)이 환경인 이러한, 색이나,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또는 촉감이나, 또는 어떤 법(法)이나, 이런 육경(六境)에 상대해서 분별하고 느끼는 식(識) 활동, 이것이 육식(六識)입니다.

우리 눈이 색을 대하면 안식(眼識)이라, 검다 희다 느끼는 그것이 안식이고, 우리 귀가 소리를 대하면 소리가 곱다 또는 거칠다 하는 그러한 청각을 느끼고(耳識), 또한 우리 코가 냄새를 대하면 냄새를 맡는 후각을 느끼는 것이고(鼻識), 또는 우리 혀가 어떤 음식을 대하면 맛이 쓰다 달다 하는 설식(舌識)을 느낍니다. 또는 우리 몸이 어떠한 무엇에 감촉하면 차다 덥다 하는 촉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신식(身識)인 것이요, 또는 우리 마음이 무슨 이치를 대할 때는 좋다 궂다 하고 분별하는 의식(意識)이 있습니다. 이런 여섯 가지가 육식(六識)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범부계(凡夫界)에서는 모두가 다 번뇌가 되어 버리니까 우리 육근(六根)에 따른 번뇌가 여섯 가지, 육경(六境)에 따른 번뇌가 여섯 가지, 육식(六識)에 따른 번뇌가 여섯 가지로 합하면 열여덟 18번뇌이고, 또 이기(已起) 미기(未起)라, 이기는 이미 일어난 번뇌요, 미기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라는 말입니다. 이미 일어난 번뇌가 18이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잠재한 번뇌가 18이고, 합해서 36번뇌가 됩니다.

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의 번뇌라, 과거 번뇌 36이요, 미래 번뇌 36, 현재 번뇌가 36이라, 합해서 108번뇌를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다른 어려운 108번뇌 풀이도 있습니다만은 이것이 가장 간명하고 외우기가 쉽습니다. 그러니까 108번뇌를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근본본뇌(根本煩惱)와 또 좀 미세한 수번뇌(隨煩惱)에 대한 말씀을 다 드린 셈입니다. 아무튼, 아까 말씀드린 근본번뇌는 꼭 외워서 우리 행동의 지침을 삼아야 합니다. 이중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이것이 다섯 가지 끊기 어려운 번뇌입니다. 번뇌가 있는 사람들은 성자의 법(法)도 자꾸만 의심을 합니다. 남도 의심하고 말입니다.

요즈음, 의심하는 수행법(修行法)을 취하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의심은 이런 번뇌의 의심(疑心)에 안 들어갑니다. '제일의제(第一義諦)' 즉 말하자면 '참다운 하나' 를 참구하고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에이 의심 번뇌에 안 들어갑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계 있게 알아야 합니다 .

그러나, 이런 번뇌 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주목할 점이 무엇인고 하면 여기에 있는 신견(身見)을 두고두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이놈의 '나' 라는 생각 때문에 결국은 모든 번뇌가 일어납니다. '나' 라는 생각, 그놈 못 떼면 우리가 성자의 길은 참으로 맛을 못보고 마는 셈이 됩니다. '나다, 내 소유다' 하는 생각 때문에 말입니다.

번뇌(煩惱)의 팔풍(八風)

팔풍(八風) : 이(利), 쇠(衰), 훼(毁), 예(譽), 칭(稱), 기(譏), 고(苦), 락(樂)

우리는 불경(佛經)을 보면 '팔풍(八風)에 휘둘리지 말라' 는 말씀들이 가끔 나옵니다. 이것은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그런 팔풍이 아니라, 우리 '번뇌의 팔풍(八風)' 을 말한 것입니다.

첫째는 이(利)라, 즉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지요. 가사, 뇌물을 주면 장관들도 이따금 뇌물 때문에 수뢰죄(受賂罪)로 걸리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역시 한 가지 이(利)에 우리 마음이 팔린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끌린 것입니다.

그 다음 둘째는 쇠(衰)라, 이것은 모두가 잘 안되는 경우, 가사, 일이 여의롭게 안되어 사업에 실패한다거나 또는 잘못되는 그런 경우에도 역시 우리 마음이 비관도 하고 타락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쇠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셋째는 훼(毁)라, 헐뜯고 비방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누구나 칭찬하면 다 좋아합니다. 별로 못난이도 칭찬하면 좋아하지만 훼방하면 그냥 싫어합니다. 또, 자기가 분명히 나쁜짓을 했는데도 비방하고 비판하면 싫어합니다. 이것이 훼입니다.

그 다음 넷째는 예(譽)라, 기릴 예자 입니다. 우리를 기리어 찬사를 주고 명예를 받으면 우쭐해가지고서 또 마음에 동요를 느낍니다. 이것이 예입니다.

그 다음 다섯째는 칭(稱)이라, 칭찬한다는 말입니다. 칭찬받는 것도 역시 우리 마음에 동요를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여섯째는 기(譏)라, 기롱할 기자 입니다. 나무라고 꾸짖고 욕도 하고 실없이 희롱하고 비방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때에 역시 동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동요 안해야 비로소 참다운 수행자인 것입니다. 이로울 때, 또는 무엇인가 실패할 때, 자기를 훼방할 때, 또는 자기가 명예로울 때, 자기를 칭찬할 때, 또는 자기를 기롱할 때, 이런 때에 동요하지 않는 것이 수행자이고, 또 도인들은 이런 분이 되겠지요.

그 다음은 고락(苦樂)이라, 우리는 괴로울 때 또 동요하고, 또는 안락할 때 동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팔풍(八風)에 해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