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록(懶翁錄)

通達無我法者 2008. 3. 19. 14:21

普濟尊者語錄 序

현릉(玄陵:공민왕)의 스승 보제존자는 서천 指空 스님과 절강(江) 서쪽의 平山 스님에게서 법을 이어받아 宗風을 크게 펼쳤다. 그러므로 스님의 한두 마디 말이나 짤막한 글귀라도 세상에서 소중히 여길 만하기에 어록을 펴내는 것이다. 스승의 도가 세상에 행해지느냐 행해지지 않느냐는 오로지 뒷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런데 뒷사람들이 스승의 도를 알려면 그 분의 어록을 통하지 않고는 길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제자들로서는 어록 출판에 힘쓰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변변찮은 재주에 왕명을 받들어 銘을 짓고 또 그 어록을 추천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나의 행인가 불행인가는 뒷사람이나 알 것이다.
스님의 제자 각우(覺) · 覺然 · 覺卞 등이 옛 본을 교정하여 출판하려고 내
게 서문을 청하므로 여기에 간단히 쓰는 바이다.

蒼龍 기미년(1379) 8월 16일에 韓山君 李穡 씀.

행촌공(杏村空:李 . 고려말의 문신, 문하시중)이 나옹스님에 관한 기록을 내게 보이면서, 나옹스님은 연도(燕都)에 가서 유학하고 또 江南으로 들어가 指空 스님과 平山 스님을 찾아뵙고 공부하고는 法衣와 拂子를 받는 등, 오랫동안 불법에 힘써 왔다고 하였다.
元帝는 더욱 칭찬하고 격려하며 廣濟禪寺에 머물게 하고, 金聆袈裟와 불자를 내려 그의 법을 크게 드날렸으며, 또 평소에도 스님의 게송을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 주었다고 한다.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山水 속에 자취를 감추었는데, 왕이 스님의 이름을 듣고 사자를 보내 와주십사 하여 만나보고는 공경하여 神光寺에 머무시게 하였다. 나는 가서 뵈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던 차에, 하루는 스님의 문도가 스님의 어록을 가지고 와서 내게 서문을 청하였다.
그때 나는 "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는 법이오. 나는 유학 (儒學) 하는 사람이라 불교를 모르는데 어찌 서문을 쓰겠소"라고 하였다. 그러나 옛날 증자고 (曾子固) 는 "글로써 불교를 도우면 반드시 비방이 따른다. 그러나 아는 사이에는 거절할 수가 없다" 하였다.
지금 스님의 어록을 보니 거기에 `부처란 한 줄기 풀이니, 풀이 바로 장육신 (丈六身:佛身) 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면 부처님 은혜를 갚기에 족하다.
나도 스님에 대해 말한다.
나기 전의 면목을 이미 보았다면 한결같이 향상 (向上) 해 갈 것이지 무엇하러 오늘날 사람들에게 글을 보이는가. 기어코 한 덩이 화기 (和氣) 를 얻고자 하는가. 그것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나도 이로써 은혜 갚았다고 생각하는데,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님은 지난날 지공스님과 평산스님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지공스님과 평산스님도 각각 글을 써서 법을 보였다.
소암 우공 (邵艤虞公) 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천지가 하나로 순수히 융합하니
한가한 몸이 온종일 한결같다
왔다갔다하다가 어디서 머물까
서른 여섯의 봄 궁전이다.
地天一醇融 閑身盡日同
往來何所缺 三十六春宮

 대개 이치에는 상 (象) 이 있고 상에는 수 (數) 가 있는데, 36은 바로 천지의 수다. 천지가 합하고 만물이 자라는 것이 다 봄바람의 화기에 있듯이, 이른바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달라진다는 것도 다 이 마음이 움직일 수 있고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나옹스님의 한마디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부디 지공스님이나 평산스님의 전하지 않은 이치를 전해 받아 자기의 법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정 (至正)  23년 (1363)  가을 7월 어느날,
충겸찬화공신 중대광문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치사 직산담암 백문보 화보 (忠謙贊化功臣重大翠門下贊成事進賢?大提學知春秋?事致仕稷山淡艤白文寶和父) 는 삼가 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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