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스님

화두드는 법

通達無我法者 2008. 4. 14. 09:18
 

 

 

화두드는 법  

  이것이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약방문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니니라.   불이라고 말하여도 입이 타는 것이 아니듯이...     

 

참선과 화두  

  앞장의 <자기를 돌아보는 공부>에서는 지금이 바로 수행할 때라는 것과, 참된 신심 속에 깨달음이 있고 수행을 하면 그 깨달음이 스스로 다가온다는 것, 그리고 가장 좋은 수행법은 자기가 자기를 돌아보는 것임을 밝힌다.

이 장에서는 자기를 돌아보는 가장 요긴한 공부 방법인 참선법, 특히 그 참선법 중에서 화두 드는 법을 중심으로 놓고 살펴보고자 한다.    

관선과 참선   참선법은 '내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을 잡는 방법'이다.   

우리 자신을 자동차에 비유하면, 몸뚱이는 자동차 자체와 마찬가지요 마음자리는 운전수와 같은 것이다.

곧 운전수가 참된 '나'이지, 자동차와 같은 이 몸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자동차를 생각해보라. 공장에서 갓 나올 때는 윤이 나고 성하지만, 몇 달만 굴리면 고물이 되기 시작하고, 오래 사용하여 말을 잘 듣지 않게 되면 폐차를 해야 한다.  

 

  이 몸뚱이도 총각, 처녀 시절에는 잘나고 예쁘다고 큰소리 치고 다니지만, 늙어지면 별수가 없다.

늙고 병들어 수명이 다하면 버려야지,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법이란 무엇인가?

껍데기인 자동차가 아니라 운전수인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 불법이다.

곧 부처님께서 일평생 동안 설하신 것이 모두 이 마음자리를 찾게끔 이끄는

가르침이었다.

이에 비해 참선법은 자기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자리를 직접 찾아나서는 수행법이다.    

참선의 선은 '안정되었다.'는 뜻이다.

조용한 마음, 집중된 마음, 맑은 마음, 바른 마음, 안정되고 고요한 마음을 선이라고 한다.

이 선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부처님의 교법 안에 있는 선을 관선이라 하고 부처님의 교법 밖에 있는 선을 참선이라고 한다.  

관선이라고 할 때의 관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마음으로 지극하게 생각해서 보는 것으로, 달리 관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관법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사념처라는 수행법이 있다.

사념처는 도 닦는 사람이 일체 만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가르친 네 가지 관법이다.    

첫째는 관신부정으로, 이 몸뚱이라는 것이 본래 깨끗하지 못한 것임을 관하는 수행법이다.

아무리 얼굴이 예쁘고 외모가 준수하다 하여도 이 몸은 피와 고름과 오물로 가득 차 있으며, 결국에는 썩고 말 부정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뚤째는 관심무상으로, 이 마음이라는 것은 항상 되지 아니하고 무상한 것임을 관하는 수행법이다.

시시각각 변하고 덧없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관수시고이다. 몸과 마음으로써 내가 받아들이는 모든 것, 내가 그것을 구하여 내 것으로 하는 모든 일은 다 괴로운 것임을 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관법무아로, 일체 만법에는 그 자성이 없음을 관하는 수행법이다.

일체 만법은 어느 한 가지도 고유한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며, 나라고 하는 자성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념처에 의해 나의 몸과 마음을 관하게 되면 그 어떤 사람이나 물질에 대해 집착할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 사념처 등의 관법수행이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다가 시대가 변하고 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수행하는 방법도 조금씩 바뀌어갔다.

특히 중국에서는 참선수행법이 크게 발달하였고, 남방에서는 관선이 유행하였으며, 티벳과 몽고 등에서는 만다라, 다라니수행법에 의존하는 밀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관선에 대비되는 참선은 중국에서 확립된 부처님 설법의 수행법으로, 간화선과 묵조선이라는 두개의 큰 가닥이 있다.

묵조선은 묵묵히 자기 마음자리를 돌아보는 수행법이고, 간화선은 화두에 의지하여 닦는 선법으로, 달리 화두선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간화선법을 채택하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함께 공부해보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화두선법이다.  

화두란?  

그렇다면 화두란 무엇인가?   

화두의 '화'는 '말씀 화'자로서 말이라는 뜻이고, '두'는 '머리 두'자로 앞서간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흔히 책의 머리말을 '서두'라고 하듯이,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이며, 언어 이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방법을 일러 화두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화두는 달리 공안이라고 한다.

공안의 '공'은 '공중', '누구든지'라는 뜻이고, '안'은 곧 '방안'이다. 따라서 공안은 "누구든지 이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불교를 믿든 믿지 않든, 복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누구든지 이 방법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된 도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도는 언어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야 계합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들기 직전에 백만억 대중을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녹야원에서 시작하여 이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바로 평생을 설하신 팔만 사천 법문이 방편이요, 약방문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약방문이 병을 고치는 약은 아니니라. 불이라고 말하여도 입이 타는 것이 아니듯이...

    

  아무리 약방문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 약방문만으로 병을 낫게 할 수는 없다. 약방문을 보고 자기 병에 맞는 약을 지어 먹을 때에만 병은 낫게 되는 것이다. 설혹 팔만대장경을 다 외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약방문을 외운 것일뿐, 약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약방문을 모르더라도 약만 먹으면 병은 나을 수 있다.

그 약이 바로 언어 이전의 화두이며,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수행법이 그 약을 먹는 일인 것이다.  

이제 화두 한 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중국 당나라 때의 조주선사가 동관원에 있을 때의 일이다. 젊은 수행승 문원이 개를 안고 와서 조주선사께 여쭈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무]."      

이것이 화두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개에게는 틀림없이 불성이 있고, 불성이 있기 때문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데 조주선사는 단 한마디 '무'라는 답을 주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조주선사가 엉뚱한 답을 주신 것은 아니다.

조주선사의 깨달은 경지에서 곧바로 말씀하신 것이요, 언어 이전의 참된 답을 일러주신 것이다.

따라서 그 누구라도 조주선사께서 '무'라고 하신 까닭을 확실히 알면 그는 조주선사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곧 조주선사와 하나가 되어 대오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주선사께서 '무'라고 하신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화두법에 의지하여 가장 정확한 답을 얻어야 한다.

머리를 굴려서 얻는 해답으로는 안된다.

철두철미하게 의심하고, 의심의 삼매 속에 들어가 해답을 얻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선사는 어째서 '무'라고 하였는가?"  

  "틀림없이 개에게는 불성이 있는데, 왜 조주선사는 '무'라고 하였는가?"   

"왜 '무'라고 하였는가?"   

"왜 '무'인가?"   

"무?"  

  "?"   

이렇게 의심을 일으켜 끊임없이 해답을 구하여야 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선종에서 최초로 나온 화두, 선종제일공안인 '영산회상거염화'는 우리에게 '염화시중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화두이다.   

   어느날, 부처님께서는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는 네 가지 종류의 꽃을 뿌려 공양하였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 없이 한 송이 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이셨다. 그러나 한자리에 모인 수만 대중들은 부처님께서 무슨 뜻으로 꽃을 들었는지를 알지 못하여 어리둥절해 하였고, 오직 부처님의 큰제자인 대가섭존자만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에 부처님께서 선언하셨다.    

"나에게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 있으니, 마하가섭에게 전하여 주노라."    

이 말씀 중 아래의 정법안장에서 견성성불까지의 선종팔구를 연결시켜 번역하여 보자.      

모든 정법 중의 눈알과 같이    

열반에 들어간는 묘한 마음의 도리는    

실로 모양이 있으면서도 모양이 없는    

미묘한 법문이기에    

언제나 문자로는 설명될 수 없어    

교법 밖에서 따로 전하노니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견성성불케 하노라      

꽃을 들고 미소를 짓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선종팔구의 선법이 부처님으로부터 마하가섭에게로 전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선종제일공안 가운데,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까닭'을 밝히는 것이 바로 화두법이다.   

"어째서 부처님께서는 영산화상에게 꽃을 드셨는고?"   

"어째서 부처님은 꽃을 드셨는고?"   

"어째서 꽃을?"   

"어째서?"  

  "?"   

이와같은 "?", 이와같은 끊임없는 물음 속에서 대의단을 갖는 것, 크나큰 의심을 일으키는 것을 화두라고 한다.   

이 화두는 마치 열쇠와 같은 것이다.  

옛날에는 자식을 장가 보내고 시집 보낼 때 장농을 사주고 집을 사주었지만, 요즘은 아들이나 딸을 시집 보내고 장가 보낼 때 열쇠 하나만 준다고 한다.

열쇠만 가지고 가서 아파트 문을 열면 그 안에 모든 살림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도 하는데, 그처럼 "어째서 부처님께서 꽃을 드셨는고?", "왜 무라고 했는가?" 하는 이 열쇠, 이 물음표(?)라는 열쇠를 가지고 문만 열면, 팔만 사천 법문과 무진장의 보배가 가득 차 있는 마음자리를 되찾아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적당히 알아서 될 일도 아니요, 그냥 재미로 할 수 있는 공부도 아니다.      

 

화두를 드는 요령  

  간절히 참구하라. 그렇다면 이 화두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참선 공부를 하는 사람은 이것을 매우 궁금하게 여긴다. 그

러나 화두 드는 법에는 특별한 요령이 없다.   

'일념으로 간절히 참구하는 것!' 이 방법 외에는 별다른 요령이 없다.

'간절 절!' 이것이야말로 화두법문, 참선법문의 가장 요긴한 방법이다.  

간절한 일념으로 크게 의심을 일으켜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화두법의 가장 요긴한 점이요, 크게 의심하는 가운데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실로 "진흙이 크면 부처가 크고, 물이 높으면 배가 높이 뜬다."는 속담과 같이, 의심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큰 깨달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신라 말 중국으로부터 동방대보살로 추앙받았던 무염대사의 제자 구정조사는 원래 글을 알지 못하였는데, 어느날 무염대사를 찾아가 간절히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즉심이 불이니라[즉심이불]."   워낙 무식한 구정조사였는지라, '즉심이 부처'라는 스승의 말을 '짚신이 불'이라는 말로 알아듣고 말았다.   

"짚신이 불? 짚신이 부처라고?"    

조금은 이상한 듯하였으나 스승을 지극히 존경하고 있었던 구정조사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우리 스님은 부처님 같은 분인데 허튼 말을 하셨을 리 없다.

부처를 물었는데 어째서 짚신이라고 대답을 하셨는고?

짚신이 어째서 부처인고?"   

그날부터 자기 짚신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이 짚신이 어째서 부처인고?", "짚신이 어째서 부처인고?"

하는 생각을 놓아버릴 줄 몰랐다.  

 

  하루는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한 다음, 짚신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짚신아, 어째서 네가 부처냐? 짚신아, 네가 어째서 부처냐?" 하다가 그만 깊은 삼매에 들었다.  

시간 가는 것도 모르고, 앉았는지 서 있는지도 모르고...

그야말로 '산이 산이 아니요, 물이 물이 아닌' 삼매 속에서 사뭇 "짚신아 네가 어째서 부처냐?" 하며 소리를 지르다가, 홀연히 짚신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 확철대오하였다.    

  구정조사의 이와같은 오도연기가 보여주듯이, 화두에는 좋은 화두, 나쁜 화두가 따로 없고, 잘되는 화두, 안되는 화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화두에는 비밀도 없다.  

"내가 하는 화두를 다른 사람이 알면 어떻게 하나?"  

이와같은 생각이야말로 쓸데없는 망상일 뿐이다.

여러 조사어록 속에 있는 1천7백 공안 가운데 어느 화두든지 한 가지만을 택해서, 간절하게 간절하게 의심해 나가는 그것이 참선하는 가장 요긴한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송화두, 염화두, 간화두, 참화두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막상 화두를 잡고 있으면 쉽게 화두에 집중하지 못한다. 마치 놋젓가락을 가지고 계란을 잡으려고 할 때 요리조리 미끄러지고 빠져나가듯이, 화두는 자꾸 달아나고 번뇌망상이 자꾸만 스며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포기해서는 물론 안된다.

오히려 화두가 잘되지 않으면 '송'이라도 해야 한다.

부처님 명호를 외우듯이 속으로 화두를 외우는 송화두를 꾸준히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 염'자의 염화두가 된다.  

우리는 흔히 '염불을 한다.'고 하면 목탁을 두드리며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구불이지 염불이 아니다.

염불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으로 꾸준히 하다보면 '생각 염'자 염불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와같이 마음속으로 송화두를 꾸준히 하다보면, 굳이 입으로 하지 않아도 목구멍 속에서 화두가 저절로 흘러나오게 되고, 그것이 계속되면 마침내는 염화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송화두, 염화두를 놓치지 않고 계속하게 되면, 일을 하면서도 말을 하면서도 화두가 또렷하게 들리는 간화두가 되는 것이다.  

간화두가 되었을 때 거듭 대용맹심을 촉발하면 홀연히 참 의심이 발기되어,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닌 대무심에 들게 되는데 비로소 이를 참선화두라 하는 것이다.

참화두만 되면 깨침은 진정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옛 조사스님들은 이러한 경지에서 도를 깨치지 못한다면 '너희를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고 하셨다.    

 

화두 가운데 의심이 끊어지지 아니하면 이것을 진짜 의심이라 하나니, 진짜 의심이 일어날 때는 점차에도 속하지 않고 앞뒤가 끊어져서, 동과 서를 분별하지 못하고 남과 북을 가리지 못하게 되느니라.  

만약 진짜 참선을 하고자 할진대는 만 길 깊은 물 속에다 돌멩이 하나를 던진 것과 같이 하여, 꼭대기에서부터 바닥까지 털끝만한 간격도 없이 내려가게 할지니라.

능히 이와같이 화두를 들어 만일 7일 안에 확철대오하지 못한다면, 진실로 나는 너희를 대신하여 지옥에 갈 것이다.    

고봉화상의 <선요>에 있는 말씀처럼 진짜 참선은 여러 날 할 필요가 없다.

7일 이상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진짜 참선인가?  

화두가 또렷이 잡혀서 놓아지지 않는 경지, 밤이나 낮이나 잠을 깨나 꿈을 꾸나 항상 참 화두가 되는 경지가 진짜 참선의 경지이다.

그와같은 참 화두의 경지에 이르면 누구나 7일을 넘기지 않고 확철대오하게 된다.      

 

7일간의 용맹정진  

  7일간의 용맹정진! 이렇게 7일의 참선수행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선방에서는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는 가행정진을 여러 차례 행하고 있다.

이때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졸음이다.

망상이 죽 끓듯 하지 않으면 졸음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잠을 이기지 못해 갖가지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꾸벅꾸벅 졸다가 방바닥에 이마를 '꽝' 박는가 하면, 계속해서 옆으로 넘어지는 사람도 있다.

엉엉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졸음을 쫓아주기 위해 장군죽비로 내리치는 입승스님의 멱살을 잡고 "나는 졸지도 않았는데 왜 때리는 것이냐?"

며 괜한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다.   

 

정녕 망상과 졸음이 없다면 도를 깨닫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기만 하겠는가? 참선 수행자는 오로지 망상과 졸음을 이겨내야만 한다.

그런데 외진 곳에서 오래오래 정진하면 망상은 차츰 쉬어지지만, 망상이 없어지고 나면 졸음은 더 자주 찾아온다.  

  번뇌가 없는 고요 속의 졸음. 이 졸음의 맛은 좋다.

깜박 졸은 듯한데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리는 이 졸음은 그렇게 맛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졸음에 맛을 들이면 암흑의 귀신굴에 빠져서 영영 헤어날 수가 없게 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옛날, 인도의 마갈타국에서는 왕궁을 짓기 위해 터를 닦다가 큰 유리독 하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유리독의 그 어느 한 곳도 틔어 있지 않아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왕은 톱으로 켜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박을 타듯이 한쪽 끝을 조심조심 자르도록 하였다.    

 

막상 켜보니 그 속에는 머리카락이 한없이 긴 사람이 앉아 있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유리막은 그 사람의 손톱, 발톱이 자라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왕은 그를 흔들어 깨우도록 하였고, 그때서야 일어난 그는 이상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이곳은 마갈타국의 왕궁을 지을 장소요. 도대체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저는 비바시불을 가까이 모시고 정진하던 승려입니다."   

이 말에 왕은 깜짝 놀랐다.

비바시불은 과거칠불 중 첫번째 부처님으로, 91겁 전에 사셨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왕이 자세한 사정을 더 물어보았으나 그는 '좌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밖에 알지를 못했다.

이에 부처님께 그 연유를 묻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는 비바시불 당시에 선정을 닦다가 무기공의 상태에 들어갔느니라.

이렇게 몇 달 동안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산사태가 일어나 그를 묻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무기공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었으므로 아직까지 죽지 않게 된 것이니라."     

 

이처럼 졸음을 깊이 즐기다보면 개구리나 뱀이 몇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무기공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다.

얼른 보면 무기공이 대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것은 모든 수행의 가장 큰 장애일 따름이다.

흐리멍텅한 상태에 빠져 자기 한 몸조차 구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는 사람은 또렷또렷함을 생명으로 삼아야 한다.

열두 시각 어느 때나 화두에 정신을 집중시켜 또렷또렷하게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을 '성성'이라 한다. 그리고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한결같이 화두삼매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어찌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끊임없이 빛을 돌이켜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집으로 찾아가고 장으로 달아나는 생각을 화두로 다시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이 긴 것인가? 아니다.

수행할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부디 사람의 목숨이 찰나에 있음을 상기하면서 스스로를 경책해보라.

틀림없이 새로운 힘이 솟아날 것이다. 일찍이 야운스님은 <자경문>에서 말씀하셨다.    

  일생을 헛되이 보낼 것 같으면 만 겁이 지나도록 한이 될 것이다.

무상이 찰나 속에 있으니 날마다 놀랍고 두려운 일뿐이요, 사람의 목숨은 잠깐 사이인지라 한때라도 보장되어 있지 않느니라.

만일 조사관을 뚫지 못한다면 어떻게 편안히 잠만 잘 수 있겠는가?     

그렇다.

야운스님의 이 말씀처럼, 참선수행인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뚫어야 한다.    

조사관은 조사선, 곧 조사의 선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선을 닦는 수행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 바로 이 관문을 통과해야만 앞서 들어간 모든 조사들과 함께 깨달음의 세계에서 노닐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 관문은 누가 지키고 있는가?

앞서 도를 깨달은 조사가 지키고 있다.

언어와 문자, 이론과 지식을 초월하여 곧바로 마음자리를 보고 자성불을 확실하게 회복해 가진 조사들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문을 통과하려는 자는 조사들로부터 수행을 점검받게 되고,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확철대오하였음을 인가받으면 그 문을 통과하여 조사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조사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가?

역대 조사들이 던진 화두의 참뜻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조주선사의 무자화두와 염화시중의 화두를 살펴보았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한 이 무자화두는 1천7백 가지 화두 중의 한 가지이며, 조주선사가 '무'라고 하신 까닭을 분명히 알게 되면 조사관을 통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조사관을 통과하게 위해서는 반드시 잠을 이겨야 한다.

옛 스님들은 잠을 이기기 위해 일부러 머리를 길러 솔잎 상투를 만들었고, 그 상투에다 끈을 묶어 천정이나 대들보에 연결하였다.

조금이라도 졸거나 자세를 흐트리게 되면 머리가 잡아당겨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 비수나 송곳을 턱 밑에 놓고 공부하는 스님네도 있었고, 잠들 때마다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던 스님도 있었다.   

우리는 이런 스님들을 본받아 한바탕 용맹심을 일으켜야 한다.  

7일의 용맹정진! 7일 동안 잠을 안자기로 했지만, 물론 졸음 속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7일 동안 등을 바닥에 대고 눕지 않는 것만 해도 큰 효과는 있다.   

"이제 겨우 이틀, 닷세가 남았구나. 이를 악물고라도 버티어 보자."   

"나흘이 지났으니 반은 넘어섰다. 나라고 못할까보냐."  

  "이제 하루 남았지. 주기 아니면 살기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며 7일 동안의 정진을 끝내면 확실히 달라지게 된다.

안 했을 때와 비교하면 정신이 그만큼 단련되어 있다.

이렇게 용맹정진, 용맹스럽게 정진하면 반드시 바뀌기 마련인 것이다.   

모름지기 잠을 이겨라.

진정 참선수행자가 겨울잠을 자는 뱀처럼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화두 타파는 고사하고 동서남북도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정신이 별처럼 또렷또렷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우리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는 취모리검을 꺼내야 한다.

칼 끝에 털을 놓고 훅 불면 털이 끊어지는 최고의 보검, 취모리검을 사용해야 한다.  

  취모리검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 누구나가 갖고 있는 용맹심이 그것이다.

그 용맹심을 잡아 일으킬 때 번뇌의 구름은 스스로 사라지고 마음의 달은 스스로 밝은 빛을 뿜어내는 것이다.

잠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용맹심, 바로 나의 강한 결심뿐이다.

그 결심이 나를 바꾸어 놓는다.

그러므로 대용맹심을 일으켜 목숨을 걸고 정진해보라.

전혀 졸지 않고 7일 동안만 용맹정진하면 틀림없이 도를 이룰 수 있다.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 일타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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