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진여론(眞如論)-3

通達無我法者 2008. 8. 15. 17:25

 

 

 

부처가 될 때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기억하라. 부처란 말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깨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은 사람은 모두가 부처다. 그대 역시 부처다. 거기 차이가 있다면 그대는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대는 결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기에 거기에 부처가 있는지를 모른다. 깨달음은 바로 그대 삶의 근원이다.

달마는 말하고 있다. 부처가 될 때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내면 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알 때에만 지금까지 미혹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다. 진짜 장미꽃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항상 헝겊으로 만들어진 조화 속에 둘러싸여 일생을 보낸다. 그 조화는 죽은 것이다. 거기서 어떤 향기도 맡을 수 없다. 그것들은 자라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진짜 꽃만이 시들 수 있다. 그것은 아침에 존재계로 나와서 비와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태양과 함께 즐거워하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가 버린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에서 나와서 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인간의 삶도 이와 꼭 같다.

우리는 미지에서 나와서 미지로 간다. 우리는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수천 번 왔다. 앞으로도 수천 번 여기로 올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본질은 불멸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죽는다. 우리의 겉모양, 즉 우리의 집, 우리의 육체, 우리의 마음은 모두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오래되면 낡아서 결국에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대의 의식은 영원하다. 달마는 이 말을 '무심'이라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도 역시 같은 말을 썼다. 그것은 마음을 초월한 어떤 것이다. 모든 것을 초월한 어떤 것이다. 무심은 영원하다. 그것은 가끔씩 나타나기도 하지만, 곧 다시 미지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미지에서 앎으로 그리고 앎에서 미지 속으로 옮겨다니는 이 움직임은 영원히 계속된다. 어떤 사람이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말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삶은 마지막 삶이 될 것이다. 그때 그 꽃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안 꽃은 삶으로 다시 나올 필요가 없다. 삶이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우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는 교과 과정을 다 마치고 이제 모든 미혹을 초월할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앎의 세계에서 알 수 없는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앎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면, 그대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대가 앎의 세계에서 알 수 없는 세계, 존재계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대는 우주와 하나가 될 것이다. 거기에는 되돌아가는 일이 다시없다.

진정 지혜로운 자만이 이 무심을 안다. 이 무심은 다르마의 본성으로 불린다. 또한 이 무심은 해탈로 불린다. 삶과 죽음이 이 무심을 제한하지 못한다. 이 무심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변함없는 여래라고 불린다. 그것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신성한 자아이며, 불멸이며, 위대한 성자이다.

이 어록을 편찬한 사람은 마음이 여래가 아님을 알지 못할 정도로 지성적이지 않다. 마음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마음은 신성한 자아라고 불려질 수 없으며 불멸도 아니며 위대한 성자도 아니다. 마음은 매우 일상적이고 세속적이다. 그것은 매일 매일의 작업에만 쓸모가 있다. 그것의 기능은 외부 세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내면의 세계에서는 마음이 절대적인 무용지물이다. 자신의 내면을 알고 싶은 사람은 마음을 넘어서야 한다.

그들은 마음을 뒤에 남겨 놓고 떠나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명상의 전 과정이다. 그대는 '여래(如來)'란 말을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은 영어로 번역할 수가 없는 말이다. 서양의 어떤 언어에도 이 말을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여래란 말은 오직 불교만의 언어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여래의 철학을 역설했다. 여래란 여여(如如)하다란 말에서 나온 것이다. 부처는 말한다. 무엇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사물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즐거워할 필요도 없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생이 일어나고 죽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대는 여여함 속에서, 진여(眞如) 속에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삶이 어떻게 움직여 가는지를 지켜보라.

이것이 삶이 흘러가는 길이다. 그대는 그것에 어떤 반대도 할 수 없다. 바다를 향해 강이 흘러가는 것이 여여이며 진여이다. 불의 본성이 뜨거운 것처럼 진여도 그러하다. 진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진여 속에서 흔들림이 없다. 어떤 사람이 와서 석가모니 부처에게 욕을 하고 꾸짖었다. 그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 사람이 돌아간 후에 제자들이 그에게 와서 물었다.
"왜 아무 말 없이 앉아 계셨습니까?"

부처가 말했다.
"그것은 그의 진여이다. 그것은 그의 행동의 방식이다. 내가 말없이 앉아 있는 것은 나의 진여이다. 나는 그 사람보다 더 거룩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사람보다 더 고상한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의 진여가 나타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여여란 말은 그 뜻이 매우 심오하다. 여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를 흔들 수 없다. 그의 내면은 깊은 바다 속처럼 항상 잔잔하다. 여래란 순간 순간을 여여 속에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그 말은 다른 어떤 언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여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본성만을 따라 살뿐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번은 내가 숲을 지나가는데 나뭇가지 하나가 내 위로 떨어졌다. 그 나뭇가지가 나를 다치게 했으므로 내가 그 나뭇가지를 때려 주어야 하겠는가?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나뭇가지는 나를 헤치겠다는 생각이 없다. 그것은 단지 자연적인 사고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욕한다면 그것도 나뭇가지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나는 단지 거기에 있었고 그는 화가 났을 뿐이다. 만약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그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본성이다. 그는 그의 본성을 따른 것이고 나는 내 본성을 따른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본성과 조화를 이룰 때 그대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평정을 누리게 된다. 그대는 자신 속에서 하나의 결정을 이루었으며 그대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려지지만 그 본질은 변치 않는다. 부처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의 무심을 떠나지 않는다.

이 말은 그대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중요한 뜻이 담겨 있다. 부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이것은 모든 부처가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석가모니 부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마하비라 역시 석가모니 부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마하비라 역시 석가모니 부처와 다른 개성을 갖고 잇다. 크리슈나도 마찬가지이고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인 달마 역시 자신의 개성을 따라서 행동한다. 이런 이유로 세상 사람들은 혼란을 느꼈다.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행동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불교도들은 오직 석가모니 부처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완벽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시대가 변해도 모든 부처는 똑같이 행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계에서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존재가 자신의 고유함을 갖고 있다.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자신만의 개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그는 히말라야의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 있다. 그것은 다른 봉우리들과 그 모습이 다르다. 그는 자신으로서 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토록 많은 깨달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인류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힌두교도들은 크리슈나나 라마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불교도들은 석가모니 부처나 달마에 대해서만 말한다. 기독교인은 예수나 성 프란체스코, 혹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에 대해서 말한다. 또한 이슬람교도들은 마호메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며, 수피들은 잘랄루딘 루미(Jalaluddin Rumi)나 사르마드(Sarmad)나 알 할라지 만수르(Al-Hillaj Mansoor)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종교를 초월해서 모든 깨달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깨달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비록 그들의 행동이 모두 달랐고, 철학이 달랐지만, 여전히 그들은 같은 무심에 대해서 말했다. 그래서 그들의 내면적 핵심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빛이다. 촛불을 보면서 그 초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초는 여러 가지 모양을 갖고 있다. 그 크기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다. 그러나 모든 초에서 나오는 불꽃은 같은 것이다. 촛불을 보는 자는 더 이상 초에 집착하지 않는다. 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촛불에서 나오는 빛이 중요한 것이다. 무심은 모든 깨달은 자에게서 나오는 촛불과 같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심을 따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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