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불교적 지혜의 한 복판에 들어와 있습니다.
초기불교가 가르치는 ‘오온(五蘊)’의 법(法)은,
‘나’에 속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남의 것이었다는 것,
아니 세계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핸드백이나 엠피쓰리, 자동차나 아파트,
명예나 지위 같은 외적 소유물뿐만이 아니라,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욕망하고, 행동하는 것들까지 ‘나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다들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의 점착으로부터,
아니 자신의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해탈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 저기,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시는 분이 있군요.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이 다르고,
지식과 지혜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불교는 그래서 체화되지 않은,
몸으로 경험하지 않은 지식을 ‘알음알이’라 하여 불충분하고 불완전하게 여깁니다.
이런 ‘마른 지혜(乾慧)’는 자칫 수행자의 자만을 부풀리게 하는 심각한 해독을 끼칠 수도 있으니,
깊이 유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계정혜 삼학 전부를 동원해야
각설하고,
이 법(法)을 온몸으로 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제가 저번에 건너뛴 팔정도(八正道),
즉 삼학(三學) 전부를 동원해야 합니다.
올바른 의지(正思惟)는 더 말할 것도 없는데,
하나 덧붙이자면 올바른 이해에서만이 올바른 의지가 나옵니다.
행동을 선택하는 것은 의지이고,
그 의지는 다름 아닌 생각에서 나오니까 말입니다.
남의 험담을 즐기고 행동은 엉망이더라도,
문득 가부좌를 틀고 좌선에 몰입하면 깊은 선정에 들 수 있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까.
이는 그야말로 ‘사상누각’이요,
선가의 어법으로 하면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격’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삼학과 팔정도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를 도와주면서 상승해 나갑니다.
위빠사나는 팔정도의 하나?
위의 항목에서 다른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게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한국불교가 팔정도와 삼학의 전통이라기보다 화두법과 간화법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위빠사나는 팔정도의 일곱 번째 항 정념을 현대적으로 수정 개발한 것입니다.
왜 그런지 볼까요.
7) 정념은 내 몸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행과정을 차갑게 주시하고 관찰하는 일입니다.
2)는 감각적 자극에 대한 감정의 유쾌하고 불쾌한 반응을,
거기 내맡기지 말고 주시하는 것인데,
이게 정말 어렵습니다.
느닷없이 끼어드는 차에 대고 바로 욕이 튀어나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그것을 회광반조,
“아하, 내가 지금 마음속에 화의 불길을 일으키고 있구나”하기는 어렵지요.
더구나 그것이 일어나고 축적되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생주이멸의 과정을,
‘남의 일처럼’ 차갑게 관찰해 나가기는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3)의 관찰은 탐욕이나 증오,
선망과 질투 등의 충동과 정념의 실제를 자기기만과 정당화 없이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4)는 그 밖에 마음을 떠도는 수많은 생각들이, 먼지처럼 뿌옇게,
생겼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집중하여 관찰하는 일입니다.
이런 설명으로 제가 왜 7)정념을 ‘올바른 관찰’로 명명했는지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여러 대안이 있겠지만,
‘마음 챙김’은 너무 억지 한글식같은데 순전히 제 편견인가요.
주자학의 경(敬)공부와 불교의 정념
아 참, 이 정념은 나중 수출도 하게 됩니다.
주자학이 불교를 그토록 배척했다는 것,
조선조에는 승려들을 도성에 출입도 안 시켰다는 소리는 익히 들었을 것입니다.
주자학이 불교 형이상학과 심리학에 빚진 것은 나중을 기약하고,
우선 그 수련법에 있어 정념(正念)을 핵심적으로 채택했다는 것만 말씀드려 둡니다.
‘경(敬)’이 바로 그것인데,
동사를 살려 ‘거경(居敬)’이라고도 합니다.
주자학은 경 혹은 거경의 방법으로 몇 가지를 들고 있는데,
거기 아예 서암 화상의 성성(惺惺)도 들어 있습니다.
“아무개야!”
“네.”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해(惺惺著)!”
“네.”
“차후로는 누구에게도 속아서는 안돼!”
“네, 네.”
주자학에서의 경(敬)은 마음의 자각과 각성 상태를 유지하고,
자기 안팎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있는 경지를 말합니다.
주자학 또한 불교처럼,
우리가 죄를 짓거나,
악에 빠져드는 것은,
사물에 마음이 빼앗겨,
마음의 본래적 각성상태를 잃고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에 빠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출처 : 붓다뉴스 http://news.buddhap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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