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이야기·이규행

4. 왕궁으로 돌아오다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5:23

 

“28대 佛祖 누군가 해야 될 일이 아니겠어”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은
有我로부터 無我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보리다라는 막의의 전송을 받으며 산문(山門)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변의 풍광(風光)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것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흐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드디어 산문 앞에 이르렀다. 보리다라는 걸음을 멈추고 막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사매, 이쯤에서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막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리다라의 마음 속 호수에도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러나

 

그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옷소매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나 막의의 눈가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보리다라는 배낭에서 한 조각 비단 천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그것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귀중한 물건을 다루듯 두손으로 살며시 접었다. 그녀의 물기 어린 눈이 어느덧 미소로 반짝였다.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조금만 더 바래다 드릴게요. 조금만 더….”
그러나 보리다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형! 우리가 헤어지지 않고 함께 공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보리다라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사매, 인생에서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은 커다란 고통이지…. 하지만 이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어. 그리고 속세란 그렇게 미련을 둘만한 곳이 못돼…. 만일 내가 언젠가 출가하여 중이 된다면….”막의는 성급하게 말을 막았다.

 

“사형!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무엇이 아쉬워 늘 출가하여 스님이 될 생각을 하는지….”보리다라는 큰 소리로 웃어댔다.

 

“사매, 그것은 나의 확고한 결심이야. 불조 석가모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이미 27대나 내려왔어…. 부처께서 전하신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은 일찍부터 존숭되어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천축의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어. 한데 내가 생각하기론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모르고는 불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지. 내가 공(空)해지면 일체의 번뇌가 공해지고 법(法)이 공해지면 일체의 장애가 모두 없어지는 법이지.”“그러면 사형께서는….”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믿어.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은 유아(有我)로부터 무아(無我)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면 그는 권력을 다투고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요,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부패하고 음탕한 삶을 영위하지도 않게 되지. 그렇게 하는 것이 진실한 신앙의 길이라고 믿어.”“사형, 그럼 출가 결심은…?”
“그래!”


보리다라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나의 정신과 육체로 체찰(體察)하고 닦으려고 결심했어. 천축의 제27대에 이은 제28대 불조(佛祖)! 결국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 아니겠어”“예엣?”


막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의 마음엔 가벼운 진동이 왔다. 그녀는 그의 마음과 성격을 알만치 안다고 자부한 터였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생각을 굳혔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셈이다. 그녀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갑자기 절벽 앞에 서 있는 듯 느껴졌다. 그래도 침묵을 깬 것은 막의였다.

 

“사형!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보리다라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막의를 그윽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는 다시 만날 수 있다거나, 만날 수 없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직 미지수에 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막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마음의 고통을 참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재회(再會)의 물음이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담담하게 미소짓는 그의 태도에 그녀는 새삼 놀라움을 느꼈다. 놀라움은 순간적으로 가슴을 찢어 놓았다.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보리다라의 손을 꼬옥 잡았다. 수정같은 눈물이 소리없이 보리다라의 손등 위에 떨어졌다. 그는 그녀의 손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을 뿐이었다.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보리다라가 막의의 손을 떼면서 말했다.

“사매도 불문에 귀의(歸依)하는 것이 좋겠어.”


막의는 그 말에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당연한 소리이고 지금으로선 가장 좋은 결론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사매! 나를 이해해 주리라고 믿소…. 그럼, 이만!”


보리다라는 말을 마치자 산문 밖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막의는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를 위해 합장했다. 마음 속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는 한편 또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그녀는 보리다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보리다라는 실로 오랜만에 왕궁으로 돌아왔다. 향지국 왕과 왕비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우선 보리다라를 환영하기 위한 연회를 베풀게 했다. 왕궁 안의 대소신료들은 정성을 다해서 준비했다. 모처럼 왕궁 안은 화기로 가득 찼다. 만나는 사람마다 눈가의 주름살을 활짝 펴고 셋째 왕자의 덕을 기리느라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보리다라는 특히 아버님의 마음쓰심을 알 수 있었다. 소리없이 왕궁을 떠났던 자기의 마음을 다시 붙잡아 놓기 위한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보리다라는 그런 호사스런 분위기를 가장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것을 꾹 참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후 부왕과 모후 그리고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를 뒤따라 여러 관료가 계속해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연회의 자리에선 의례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돌아온 셋째 왕자를 칭송하는 시와 글들이 낭독되었다. 국왕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흡족해 했다. 그러나 보리다라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무표정했다.

 

왕후가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네가 밖에 나가 경전을 공부하고 무술을 익히고 온 것을 나도 대견하게 생각한다…. 이미 경륜도 쌓은 터에 혼신의 노력으로 수련까지 하였으니 이젠 부왕을 도와야 할 게 아니냐…. 백성을 제도하고 나라를 편안케 하는 일처럼 중요한 게 또 어디 있겠느냐?”왕도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나는 앞으로 정사(政事)를 너희 형제들에게 분담케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셋째야, 주저할 것 없이 짐과 모후 그리고 두 형들 앞에서 솔직하게 너의 생각을 말해 보거라.”부왕의 말을 받아 첫째 왕자 월정다라(月淨多羅)와 둘째 왕자 공덕다라(功德多羅)가 이구동성으로 보리다라를 재촉했다.

 

“아우야, 우리도 네가 학문이 깊고 무술의 경지도 높다는 것을 잘 안다. 치국안민(治國安民)의 도(道)에 대해서도 너는 분명 많은 방책을 갖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어서 아버님께 말씀드려라.”보리다라는 자세를 바로하고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형님들께서 말씀하신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도를 어찌 제가 감히 못 들은 척 하겠습니까? 제가 침묵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까닭은 하나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무슨 문젠데?”
국왕과 왕후가 동시에 물었다.

 

“저는 한 사람의 능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다만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게 고작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한모퉁이의 행복일 뿐입니다. 나라란 한 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나라 밖에도 많은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또한 천축 이외의 세계도 있지 않습니까.”“무엇이라고?”
국왕은 보리다라의 대답에 다소 엉뚱함을 느꼈다. 그러나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사회의 부패상과 백성의 고통에 대해서 비분과 불만을 갖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러니 나라의 정치에 직접 참여하라는 것이 아니냐. 현실을 마주쳐 보면 알 것이다.”“아버님!”
보리다라는 부왕에게 그의 생각이 그런 것이 아님을 말하려고 했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널리 중생을 구하고 만백성을 제도하려는 결심을 확실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왕은 마치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알고 있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끊었다.

 

“그래, 그래. 우리가 이 나라를 잘 다스린 후에는 당연히 다른 나라까지 세를 넓혀 그쪽도 다스릴 수 있도록 해야지…. 그렇고 말고.”국왕의 이 몇 마디는 보리다라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부왕이 자기의 말을 그토록 잘못 이해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도를 벗어나 남의 나라로 십만 팔천 리를 넓힌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고작 죄를 짓는 일에 불과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부왕의 말을 되받아 확실하게 진정한 도와 법의 길을 천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의 상황에선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됐어, 됐어!”
국왕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오늘은 셋째가 돌아온 것을 환영하는 모임이니 더 이상 국사와 정치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나중에 다시 의논하기로 하고…, 연회를 시작하라!”연회가 전행되는 동안 보리다라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부왕과 모후 그리고 두 형들이 연회장을 떠난 다음 그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동(侍童)들에 둘러싸여 거실로 돌아왔다. 실내의 은촛대엔 이미 환하게 불이 밝혀 있었다. 한쪽 구석의 책상엔 예전에 놓아 둔 대로 경서가 겹겹이 쌓여 있고 문방사우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꽃으로 수놓은 단향목 침대에선 비단이불이 담박한 향기를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