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육조 스님의 구결 서문 해설-1

通達無我法者 2008. 9. 25. 00:02

 

 

나와 그림자 한몸이거늘 그림자만 쫓네
 
앎이 없다고 하지만 알지 못함이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존재하지 않음이 없네
오늘은 학인 들이 선요에서 배우는 ‘실중삼관’과 무문관에 나오는 倩女의 이야기를 먼저 맛보고 육조스님의 구결을 공부하겠습니다.

1) 禪要, 室中三關 其二十九
果日當空 無所不照 因甚 被片雲遮却


아침해가 허공에 걸려 비추지 않는 곳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조각구름에 가리워지는가?
人人 有箇影子 寸步不離 因甚踏不着
사람마다 그림자를 지니고 있어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있지만 무엇 때문에 밟으려해도 밟을 수 없는가?
盡大地 是箇火坑 得何三昧 不被燒却
모든 대지가 낱낱이 불구덩인데 무슨 삼매를 얻어야만 태워지지 않겠는가?

〈보충설명〉 원나라 때 고봉스님은 깨닫기 전 용심처(用心處), 그리고 깨닫고 난 뒤의 용심처와 보임처(保任處)를 위에서처럼 표현했습니다.
선의 세계에서는 해나 구름이나 그 밖의 모든 것이 평등하여 번뇌와 보리, 참과 거짓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것을 이해하려면 삼라만상 차별의 모습들을 철저하게 꿰뚫고 녹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조실스님께서도 “是甚마 화두가 順熟되면 풀리더라”라고 이야기하신 겁니다.

우리 몸에는 항상 그림자가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자는 언제나 우리 몸이 보여주는 행주좌와(行住坐臥)를 따라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도 그 무엇인가(一物)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적 행동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이지만, 보이지도 않고 언어도 끊어진 그 ‘일물’이란 자리에서 그림자로 파생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림자만 따라 다니며 밟으면서 실체를 구할 수는 없겠지요? 그림자는 나와 떨어져 있지 않는 것이니 그림자와 나를 둘로 나누지 않고 한 모습으로 관찰해야 실체가 如法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禪은 자기의 모습을 잊어버렸을 때에 성립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지요?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물이다’, ‘불이다’ 하는 분별심을 떠나 온전히 하나가 된다면 우리 몸이 물에 빠졌다고 젖겠습니까, 불구덩이에 들어갔다고 타겠습니까?


2) 倩女離魂 (無門慧開스님의 無門關 第 35則)
五祖問僧云 倩女離魂 那箇是眞底 無門曰 若向者裡 悟得眞底 便知出殼入殼 如宿旅舍 其或未然 切莫亂走 驀然地水火風一散 如落湯?蟹 七手八脚 那時 莫言不道
頌曰 雲月是同 溪山各異 萬福萬福 是一是二

〈풀이〉 五祖法演께서 어느 스님에게 물었다. (고칙) ‘女는 魂이 떠났는데 어느 쪽이 진짜인가?’ 무문이 말하기를, (평창) 만일 여기서 진짜를 가려내서 깨닫는다면, 껍질에서 나와 껍질로 들어감이 마치 여인숙을 드나듦과 같으리니 만일 그렇지 않으면 간절히 어지럽게 도망가지 말지어다. 지수화풍이 문득 흩어지면 끓는 물에 떨어져 삶아지는 방게가 덜덜 떨어 손이 일곱 개, 발이 여덟 개 되는 것과 같으니, 이 때 깨달음을 일러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頌하여 이르되, 구름과 달은 같고, 계곡과 산은 각기 다르네. 복 많고 복 많음이여! 이 것이 하나인가 둘인가?

〈보충설명〉 위의 글은 1700 공안 중에서 48則을 골라 평창을 붙이고 頌을 지은 무문혜개스님의 무문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장주와의 결혼을 위해 집을 떠나 아기를 낳고 부모를 찾아 온 천녀가 진짜인지, 아니면 결혼을 못해 집에 누워 앓고 있는 천녀가 진짜인지를 찾아내는 공안입니다. 그러나 진짜와 가짜가 한 모습인 것을 보아야 해답을 얻겠지요.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임을 깨닫는다면 몸에 드나드는 마음이나 나고 죽는 일에 깃들은 생명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무문스님의 노래에서처럼 구름과 달도 그 모습 이전으로 돌아가면 절대평등인 한 通身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通身에서 계곡과 산의 차별도 생기는 것입니다. 삼라만상의 근원은 한 모습이지만 현상계로 나오면 각각의 모습으로 나누입니다. 이 차별의 모습을 한 모습으로 觀하면 곧 色卽是空 空卽是色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절대평등의 空과, 차별의 色을 아울러서 하나로 꿰면 그야말로 만복을 갖춤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 女(천녀)는 측천무후 때의 인물이다. 형주(衡州)의 부호 張鑑의 딸인데 언니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부모의 관심이 각별했다. 더군다나 은 아름다운 용모와 고운 마음씨와 총기를 지니고 있었다. 장감에게는 他地로 출가한 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외아들 王宙를 남기고 재난을 당해 남편과 함께 죽었다. 장감은 누이의 가산을 정리하고 甥姪인 왕주를 데려다 길렀다. 왕주 역시 총명하고 준수한 용모를 가진데다 과도 서로 아끼며 의좋게 지냈다. 장감은 딸과 왕주의 그런 모습을 대견해 하면서 성인이 되면 짝을 지어주겠노라 생각했는데 과 왕주는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한 권문세가의 아들 賓僚가 에게 혼사를 청해왔다. 과 왕주는 안타깝기 이를 데 없었으나 장감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왕주는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의 곁을 떠나 촉나라로 향했다. 강 하류를 따라 내려가던 왕주는 한 밤중이 되었을 때 강기슭에 홀로 서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구름이 걷히고 달이 얼굴을 내밀었을 때 왕주는 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왕주는 기뻐서 이와 함께 멀리 떠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렇게 아이도 기르고 재산도 모으며 살던 이는 고향에 두고 온 부모가 생각나서 왕주에게 말했다. ‘여보, 저는 지난 날 당신과 맺은 언약을 저버릴 수 없어서 부모에겐 하나 뿐인 외동딸이지만 불효를 무릅쓰고 당신을 따랐어요.

이제는 두 아들도 낳았으니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 어떻겠어요?’ 왕주도 사랑하는 아내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는 아내와 두 아들과 육로를 지나 배를 타고 형주에 도착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다랐을 때 왕주는 아내와 두 아들을 배에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서 먼저 장감부부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랫동안 문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는 그동안 큰 은혜를 입고 장가들어 아들 둘을 얻었습니다.’ 장감은, ‘그랬었느냐? 반가운 소리로구나. 그런데 어느 규수와 결혼했느냐? 왜 지금 함께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왕주가 이와 결혼했음을 밝히자 장감은 말을 끊고 침통하게 말했다. ‘실은, 네가 이 집을 떠나던 날 너를 뒤쫓아 갈까봐 하인들을 시켜 이의 방문을 단단히 지키라고 일러두었었다. 그런데 그 날 밤부터 넋 나간 사람처럼 꼼작 못하고 앓아 누운지 벌써 삼년째다.’ 이 말을 들은 왕주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그 날 이와 함께 멀리 떠나 결혼하고 살면서 아들 둘을 낳았고 지금 그들은 배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장감이 놀라서 ‘이는 지금 규중에 몸져누웠다고 분명히 일렀는데 그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그 즈음 이는 두 아들과 함께 집에 도착하였고 같은 때에 맞추어서 병으로 누웠던 이가 스르르 일어나 대문을 향해 나갔다. 이윽고 수레에서 내려 고향집 대문 안으로 들어오던 이와, 소리 없이 일어나 마중하듯 대문 앞에 서있던 이는 몸이 서로 만나자마자 가만히 합쳐지더니 한 몸이 되었다.


금강경 오가해 계속

曹溪六祖禪師序

함허당특통선사의 一物序를 마치고 지금부터는 육조스님의 口訣에 대한 序文이 시작됩니다. 육조스님은 금강경 원전에 대해 자상하게 대화하듯 해석을 전개해 나갔으므로 口訣이라 합니다.

夫金剛經者 無相 爲宗 無住 爲體 妙有 爲用 自從達磨西來 爲傳此經之意 令人 悟理見性
대저 금강경이라 하는 것은 모습이 없는 것(無相)으로 종지를 삼고, 머무름이 없는 것(無住)으로 바탕(體)을 삼고, 妙有로 용을 삼는다. 달마가 서쪽에서 도래하여 이 경의 뜻을 전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치를 깨달아 성품을 보게 하시니,

般若靈源 廓然無諸相 曠然無所住 空而無在 湛而無知 今此一經 以此 爲宗爲體 無知而無不知 無在而無不在 無住而無所不住 無相而不諸相 此所以妙有 爲用也 諸佛所證 蓋證此也 諸祖所傳 蓋傳此也 其所以開示人者 亦以此也
반야의 신령스런 근원이 확연히 틔어 모든 모습이 사라지고 광연히 비어 머무를 곳이 없고, 텅 비어있으니 어떤 존재도 없으며 담연하니 앎도 없다. 이제 이 한 經이 이것으로 종을 삼고 체를 삼아서 앎이 없다고 하지만 알지 못함이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음이 없고, 머무름이 없다고 하지만 머무르지 아니 한 곳이 없고, 모습이 없다고 하지만 모든 모습에 장애를 받지 아니하니 이것이 묘유로 용을 삼는 까닭이다. 모든 부처님의 증득한 바가 모두 이것을 증득한 것이며, 모든 조사의 전하는 바가 대개 이것을 전하는 것이니, 사람들에게 열어 보여주는 것 또한 이것으로써 하는 것이다.

〈보충설명1〉 눈에 보이는 모든 모습은 상대적이고 변화하는 것이므로 진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습이란 無常한 것이니 시간적 개념에 속하고, 머무름이란 공간적 개념에 속하는데, 금강경이란 이 시간과 공간에 매이지 않는 것이므로 無相無住라고 합니다. 또, 無相無住를 깨달아 그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꽃피울 때가 바로 묘용(妙用)인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금강의 지혜를 활활 타오르는 불로도 비유합니다. 멋대로 춤추는 객진번뇌와 變轉하는 萬象을 다 태워서 텅 비어 있는 고결한 모습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보충설명2〉 水淸徹底 魚行遲遲 空闊莫涯 飛鳥杳杳(宏智禪師의 坐禪箴에서):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일 만큼 물이 맑아서 물고기의 움직임이 여유롭고, 허공이 끝없이 넓게 툭 틔어 날아가는 새의 자취가 아득한 상태를 표현하는 詩입니다. 물과 물고기, 허공과 새가 자취 없이 하나를 이루는 이런 모습이 바로 廓然하고 曠然하고 湛然한 모습입니다.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