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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70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0:1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남과 자신에게 모두 인색하면서

얻기만 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선하지 못한 행위는 반드시 선하지 못한 과보를 받아서 언젠가 불행해집니다.

그가 설령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해도 불행을 얻은 것이지 결코 행복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남에게 베풀지 못하고 자신에게도 베풀지 못하는 마음은

현재에도 아귀의 마음이고 죽어서도 아귀가 됩니다.

 

남에게 베풀었다고 해도 자신에게 인색하면 똑같은 아귀의 마음입니다.

남과 자신에게 모두 인색하지 않고 베푸는 마음을 가질 때만

비로소 선한 바라밀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이 선한 바라밀 공덕은 바로 자신이 쌓은 대로 온전히 받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중에서

조건에 의해서 때때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을 말씀드렸고

지금도 같은 마음의 작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섯 번째, 사견(邪見)입니다. 사견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사견은 유신견, 상견, 단견이 있습니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와 항상하고 영원하다는 견해와

죽으면 모든 것이 소멸한다는 견해입니다.

 

이 중에 ‘내가 있다’ 고 하는 유신견은 잘못된 견해의 표본입니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자아를 강화하기 위해서 갈애를 일으켜

끝없는 윤회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완두콩알 만한 유신견이 있어도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사견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견 때문에 그르게 본다.

혹은 사견 스스로 그르게 보고,

단지 그르게 보기 때문에 사견이라고 한다.

이것의 특징은 이치에 어긋나는 고집이다.

집착하는 역할을 한다.

그릇된 고집으로 나타난다.

성스러운 제자들을 친견하고자 하지 않음 등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이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이상 주석서에서는 사견을 말씀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모든 것의 근본원인이 어리석음과 탐욕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견입니다.

어리석음을 조정하는 것이 유신견인데

그 유신견이 내가 있다고 하는 잘못된 사견에 속합니다.

 

다음에는 7번 자만입니다.

자만은 자신을 높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만하고 오만하고 교만한 것도 자만에 속합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뛰어나거나, 남과 동등하거나, 남보다 못하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모든 생각이 자만입니다.

 

이 세 가지는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우월감에서 오는 자만,

남과 대등하다고 하는 동등함에서 오는 자만,

남보다 열등함에서 오는 자만이 있습니다.

 

남보다 열등하다고 자책하는 것도 하나의 자만에 속합니다.

이러한 자만은 도과를 성취해야 제거할 수 있으며

아라한이 되어야 완전히 제거하게 됩니다.

 

주석서에서는 자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자만의 특징은 오만함이다.

건방진 역할을 한다.

허영심으로 나타난다.

사견으로부터 분리된 탐욕이 가까운 원인이다.

광기가 이와 같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자만도 잘 쓰면 약이고 못 쓰면 독입니다.

어느 의미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무슨 일을 할 때

이러한 것들이 그대로 잘 반영이 된다면

잘못된 자만이 선한 열의로 바뀔 것입니다.

이상으로 우리가 탐욕에 관계된 마음의 작용들을 살펴봤습니다.

 

다음으로 성냄에 관한 것은

성냄, 질투, 인색, 후회, 이 네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냄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조건이 성숙될 때만 네 가지가 함께 모여서 일어납니다.

 

여덟 번째 성냄입니다.

성냄을 빨리어로 도사(dosa)라고 하는데,

타락, 부패, 결점, 잘못이라는 뜻과 함께

화, 성냄, 분노, 미움, 진심이라는 뜻이 함께 있습니다.

 

여기서 ‘진심’ 이라고 했을 때 한문으로 ‘참 진(眞)’ 을 연상하여

진실한 마음이라고 잘못 이해할 우려가 있어서 여기서는 성냄이라고 말합니다.

한문으로 성냄을 뜻하는 진심은 성낼 진(嗔), 또는 눈 부릅뜰 진(瞋)을 사용합니다.

 

성냄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중에 하나입니다.

성냄은 선하지 못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성냄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탐욕입니다.

다시 탐욕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다시 어리석음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어서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리석음을 선하지 못한 마음의 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어리석음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견인 유신견이라고 아십시오.

유신견의 반대는 무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가 있다’ 고 하는 자아라는 유신견과

‘내가 없다’ 고 하는 무아가 바로 최고의 지혜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주석서에서는 성냄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 중에 그것 때문에 생기거나, 혹은 그것 스스로 성내고

혹은 단지 성내는 것이기 때문에 성냄이라고 한다.

그것은 마치 두드려 맞은 독사처럼 잔인함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마치 한 방울의 독처럼 퍼지는 역할을 한다.

혹은 자기 의지처를 태우는 역할을 한다.

마치 숲 속의 불처럼 성내고 있음으로 나타난다.

마치 기회를 포착한 원숭이처럼 성을 낼 대상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독소가 섞인 오줌과 같다고 알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화를 냅니다.

그러나 자기가 화를 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늘 화를 내는 것은 가장 천박한 행위입니다.

그 천박한 행위를 조종하는 것이 바로 탐욕이고

그 탐욕이 바로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았습니다.

 

다음은 9번 질투입니다.

질투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시샘하고

자신이 잘 된 것을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공적이나 위신, 재물의 풍요로운 번영을 시기하는 성품을 질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질투는 남이 잘 된 것을 시샘하는 것뿐이 아니고,

자기가 잘 된 것조차도 나누어 갖지 않는 편협한 마음작용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질투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질투함이 질투이다.

그것은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역할을 한다.

그것을 혐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인의 성공이 가까운 원인이다.

그것은 족쇄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주석서는 정의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돈이 논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이 아니고

사돈이 논을 사서 기뻐해야 합니다.

사돈이 논을 사서 한 턱 내라고 하지 마시고,

사돈이 논을 사셨으니까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라고 이쪽에서 사돈을 대접해야 합니다.

이것이 질투가 없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그 사돈은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이것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다음에는 10번 인색입니다.

인색은 자신이 가진 것이 다른 사람에게 생기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인색하면 자신의 부귀영화가 다른 사람과 연관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인색하기 때문에 남과 나누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인색하면 살아서도 아귀로 살고 죽어서도 아귀로 태어납니다.

그러니 있는 것을 먹지도 못하는 이 어리석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주석서에서는 인색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인색한 상태가 인색이다.

그것은 이미 얻었거나 얻게 될 자기의 성공을 숨기는 특징이 있다.

다른 사람과 그것을 나누어 갖는 것을 참지 못하는 역할을 한다.

움츠림으로 나타난다. 혹은 쓰디 쓴 상태로서 나타난다.

자기의 성공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추한 꼴로 보아야 한다.’ 라고 정의합니다.

 

그래서 인색해서 얻은 성공은 성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쓰디씀이고 그 자체가 움츠릴 것입니다.

누가 볼까 두려워하는 것은 가진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을 때만이 그것이 진실로 자기 것이 됩니다.

그러나 남과 자기에게 모두 인색하다면 그것은 가진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는 11번 후회입니다.

후회는 질책, 회한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후회는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한 뒤에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한 것을 뉘우치고 질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행한 선하지 못한 대상을 혐오하고,

행하지 않은 선행을 대상으로 혐오하는 것을 후회라고 합니다.

 

후회는 허용된 것을 허용되지 않은 것으로, 범하지 않은 것을 범한 것으로

또 그 반대의 경우로 잘못하는 것,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하여 걱정하거나

이것을 안절부절못하거나, 지나치게 세심하게 생각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그래서 상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후회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에서 후회하는 것입니다.

둘째, 점잖치 못한 가벼운 행동을 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셋째, 계율에 관한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선의 마음의 작용으로 간주되는 후회는 첫 번째입니다.

나머지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불선의 마음의 작용에 속하지 않습니다.

 

가령, 뜻하지 않게 사소한 실수를 하는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불선 마음의 작용이 아닙니다.

그리고 계율을 지켜야 할 때 아직 자기의 지혜가 미치지 못해서

과연 꼭 이 계율을 지켜야 하는가 의문을 갖는 것도 불선마음의 작용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무수한 불선마음의 작용을 모두 불선행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후회는 수행을 하면 나타나는 법념처의 5가지 장애 중에 네 번째에 속합니다.

5가지 장애의 네 번째가 들뜸과 후회입니다.

들뜸과 후회는 알아차리는 마음을 덮어버려 지혜가 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후회는 아무리 해도 개선되지 않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후회가 선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후회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욕망입니다.

그래서 참회하는 것과 다릅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할 것이 아니고 지나간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현재로 돌아와서 후회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현재로 오지 않으면 과거의 회한과 미래의 두려움으로 선한 마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주석서에서는 후회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악한 것을 행하였음이 악행을 했음이다.

그것의 상태가 후회다.

나중에 속을 태우는 특징이 있다.

좋은 일을 행하지 않는 것과 나쁜 일을 행하는 것을 슬퍼하는 역할을 한다.

뉘우침으로 나타난다.

행하고 행하지 않음이 가까운 원인이다.

노예근성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주석서에서는 정의하고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늘 후회하면서 삽니다. 그리고 자탄합니다.

이것이 불선마음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후회한다고 무엇이 개선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욕망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수많은 후회를 했지만

그것은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고 그리고 새로운 것은 오지 않습니다.

 

후회는 단지 후회를 낳을 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자책하고 비하하고 결과적으로 충만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후회를 하면서 살아왔지만 돌이켜보면 후회를 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요?

그래서 후회는 단지 후회로 그칠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후회는 불선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회를 하면 할수록 후회하는 것을 좋아해서 후회하는 것에 그치고 맙니다.

 

이제 후회하는 때가 되었을 때는

‘지금 내가 후회하고 있네!’ 라고

후회하고 있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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