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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72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1:5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선과 악이 함께 있으며

성공과 실패, 평등과 불평등, 사랑과 증오,

질서와 혼란, 강함과 부드러움, 노력과 게으름이 함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양면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먼저 선한 것,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선택은 선하지 않은 것을 배척하는 선택이 아닙니다.

단지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통해서 비작용적으로 하는 선택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선한 것에서 조차도 벗어나서 치우침이 없고

원인과 결과가 없는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얻는 지혜는

치우침이 없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法念處]의 다섯 번째는

‘4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알아차림’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교재 대념처경에 있는 55쪽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4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알아차림’입니다.

 

4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사성제(四聖諦)라고 합니다.

사성제의 첫 번째 뜻은 성자들만이 알 수 있는 진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성제를 성스러운 진리, 또는 고귀한 진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인이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한 사람을 말합니다.

성자들이란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7청정과 16단계의 지혜의 과정을 거쳐서

열반에 이른 수행자를 일컫습니다.

 

사성제의 두 번째 뜻은 고귀한 분에 의해 발견되었기 때문에 사성제라고 합니다.

여기서 고귀한 분이란 부처님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누구도 모르는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시고 법을 펴셨습니다.

원래 4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부처님과 상관이 없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역대의 부처님만이 이 진리를 발견하고 인류에게 드러내 보이십니다.

 

4성제라는 진리는 깨달음으로 가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부처님은 이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시어 부처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 법은 부처님의 정법이 계승되는 시기까지 존속되다가 다시 사라집니다.

그러다 새로운 부처가 출현하시면 같은 법을 다시 찾아내시어 부처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사성제라는 법은 겁을 통하여 출현하는 가장 고귀한 진리입니다.

 

사성제의 세 번째 뜻은 사성제가 고귀한 진리로 불리는 것은

이것을 통찰한 수행자가 고귀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로 사성제를 꿰뚫어보면

번뇌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운 성자가 됩니다. 이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통찰한 사람은 성자라는 고귀한 정신세계에 이릅니다.

 

사성제의 네 번째 뜻은 사성제라는 진리가 그것 자체로

가장 성스럽고 고귀한 것이라서 사성제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스럽다는 것은 이것이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믿을 수 있는 실재하는 진실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오온의 실재를 알아차려서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다는 것이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은 이것이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가장 진실한 것입니다.

그것이 선이거나 불선이거나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원인으로 인해서 생긴 결과이기 때문에 하나의 질서입니다.

여기서 실재라는 것은 선과 불선의 문제를 뛰어넘는 본질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좋은 것만 실재고 나쁜 것은 실재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다섯 비구들에게 초전법륜경을 설하실 때에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라고 말씀하시고 이런 것을 전에 들어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다섯 비구는 괴로움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듣는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는 나에 의해서 처음 설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불교는 괴로움뿐인 염세를 말하지 않습니다.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 순간부터 괴로움은 힘을 잃습니다.

괴롭지 않으려고 해서 괴로운 것이지 원래 괴로운 것이라면 견딜만한 것입니다.

그래야 괴롭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를 성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을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움, 괴로움이라고 해서 염세를 말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불교의 사성제는 세속의 윤회가 있는 고성제와 집성제가 있고,

출세간의 윤회가 끝나는 멸성제와 도성제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 있는 것으로 출발하면 궁극에는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안을 찾아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고성제와 집성제는 괴로움이 일어나는 진리이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진리입니다.

이것을 세간과 출세간의 진리라고 말합니다.

 

불교의 괴로움은 모든 생명이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진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성제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사성제로 시작해서 사성제로 끝납니다.

 

사성제의 진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둘, 괴로움의 원인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셋,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넷,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하나,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고성제(苦聖諦)라고 합니다.

고성제의 특성은 괴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괴로움은 생명이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괴로움은 화를 내게 하고 사람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빨리어로 괴로움을 둑카(dukkha)라고 합니다.

이는 하찮은 것이라는 뜻의 두(du)와 비어있다는 뜻의 카(kha)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뜻으로 보면 하찮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별 볼일 없는 것을 대단하게 키워서 큰 것으로 생각하고 고통을 겪습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고(苦)라고 하지만 좀 더 정확한 뜻은 불만족입니다.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 괴로움의 원인이란 성스러운 진리는 갈애입니다.

이것을 집성제(集聖諦)라고 합니다.

갈애는 탐욕으로 집착을 해서 업을 생성합니다.

탐욕은 항상 멈추지 않고 일어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중단도 허락하지 않고 끝없이 계속됩니다.

그래서 갈애는 장애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다른 것들과 결합하여 일어납니다.

갈애와 집착과 업의 생성이 서로 결합하여 괴로움의 원인을 일으킵니다.

이것들은 과거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현재까지 상속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새로 업을 생성해서 미래의 태어남을 만듭니다.

 

셋,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를 멸성제(滅聖諦)라고 합니다.

멸성제는 괴로움이 소멸하여 평화와 평온함을 뜻합니다.

이때의 평온함이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불탄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멸성제는 열반을 의미합니다.

 

열반은 윤회 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입니다.

이 출구에 이르는 길은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몸과 마음의 느낌이 소멸하면

번뇌가 불타서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감옥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열반은 오직 가장 위대한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에 의해서 발견되었으며

이 열반을 통하여 업이 소멸합니다.

그래서 열반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결과이며 이것은 오직 불교의 가르침에만 있습니다.

 

넷,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도성제(道聖諦)라고 합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팔정도입니다.

8가지 바른 방법으로 계율을 지키고 고요함을 얻어 지혜를 계발하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팔정도를 중도라고 하며 위빠사나 수행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대념처경의 4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알아차림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성제 중에서 고성제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알아차림’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은 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첫째,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인가?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늙음은 괴로움이다. 죽음은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은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은 괴로움이다. (怨憎會苦)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은 괴로움이다. (愛別離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求不得苦)

요약하면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가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태어남은 무엇인가?

 

이런저런 생명의 무리가운데서,

이런저런 생명들의 태어남, 출생, 도래함, 생김,

그것들의 수태, 그것들이 존재로 들어옴,

다섯 가지 무더기의 나타남, 감각 장소의 획득,

이것을 일러 태어남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늙음인가?

 

이런저런 생명의 무리가운데서,

이런저런 생명들의 늙음, 노쇠함, 부서진 이빨, 희어진 머리카락,

주름진 피부, 활력의 감소, 감각기능의 쇠약,

이것을 일러 늙음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죽음인가?

 

이런저런 생명의 무리가운데서,

이런저런 생명의 종말, 제거됨, 부서짐, 사라짐, 사망, 죽음,

서거, 오온의 해체, 몸을 버림, 생명기능의 파괴,

이것을 일러 죽음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슬픔인가?

 

이런저런 손실로 괴롭고,

이런저런 고통스런 일로 상처받은 사람의 슬픔, 슬퍼하는 것,

마음의 슬픈 상태, 내면의 근심, 내면의 깊은 슬픔,

이것을 일러 슬픔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비탄이란 무엇인가?

 

이런저런 손실로 괴롭고,

이런저런 고통스런 느낌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의 울부짖음,

한탄, 비탄, 울부짖고 비탄하는 상태,

이것을 일러 비탄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육체적 고통이란 무엇인가?

 

몸의 아픔과 몸의 불편함,

몸의 접촉으로 일어나는 고통스럽고 불쾌한 느낌,

이것을 일러 육체적 고통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정신적 고통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아픔과 마음의 불쾌함,

마음의 접촉으로 일어나는 고통스럽고 불쾌한 느낌,

이것을 일러 정신적 고통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절망이란 무엇인가?

 

이런저런 손실로 괴롭고,

이런저런 불행으로 상처받은 사람의 실망, 절망,

절망의 상태, 심한 절망의 상태, 이것을 일러 절망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만나면 바람직하지 않고, 싫고, 불쾌한 대상이 있다.

또 나의 손실, 손상, 불안을 원하고,

굴레에서 해방되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대상들과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그들과 함께 오는 것, 그들과 사귀는 것, 그들과 함께 섞이는 것,

이것을 일러 싫어하는 것들과 만나는 괴로움이라고 한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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