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8

通達無我法者 2010. 12. 31. 00:1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공덕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덕은 착한 일을 많이 한 힘을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을 한 만큼 그에 따른 좋은 공덕이 있습니다.

공덕을 지으면 지은만큼 과보를 받습니다.

그리고 공덕이 없으면 없는 만큼의 과보가 따릅니다.

공덕의 과보는 현생과 다음 생까지 전해지며,

공덕이 없어도 현생과 다음 생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공덕이 없는 것보다는 공덕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공덕의 과보를 바라는 것보다는

공덕의 과보를 바라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 이유는 그 길만이 윤회를 끝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공덕이 없는 행위를 하게 되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4악도에 태어나서 괴로움뿐인 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공덕이 있는 행을 하면서 바람이 있는 욕계 공덕행을 하면

인간이나 욕계 천상에 태어나서 그 과보를 받습니다.


다시 공덕이 있는 행을 하면서 바람이 있는 색계 공덕행을 하면 색계 천상에 태어납니다.

이 색계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선정 수행을 해서 그 선정 수행의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다시 공덕이 있는 행을 하면서 바람이 있는 무색계 공덕행을 하면 바로 무색계에 태어납니다.

무색계는 워낙 오랜 시간 동안 머물러야 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고 안정적이라고 해서 또 다른 말로는 부동행이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같이 욕계 공덕행, 색계 공덕행, 부동행은

모두 바람이 있는 공덕행으로 윤회계에 머무는 공덕입니다.

그러니까 공덕을 지을 때 바람이 있는 것과

바람이 없는 것의 차이가 이렇게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베풀 때 바람이 없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반드시 바라는 마음으로 공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바람이 없는 공덕행을 실현하시고

그 결과로 윤회가 끝나는 위대한 붓다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고자하는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모든 생명은 공덕이 있는 행과 공덕이 없는 행에 따라서

태어나는 세계가 다를 뿐이지 그 과보를 받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공덕의 과보를 바라거나 바라지 않는 행에 따라서

윤회를 하게 되거나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 바로 결정됩니다.


미얀마에 계시는 저희 스승이신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제게 이런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집에 토속신 등 신당을 모셔놓고 꽃과 과일을 올리며 잘되게 해달라고 빈다.

그런데 만일 잘 모시지 않으면 신이 우환이나 병을 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만약 집에 불이 났을 때 그 신당도 같이 불타버릴 것이다. 

정말 그 신들이 보호해줄 것 같으면

집에 불이 나기 전에 미리 알려주어서 막아주어야할 것이 아닌가?


만약 부처님께 꽃을 올렸는데 오래두면 꽃이 시드는 게 당연한데,

그 꽃을 갈지 않고 그냥 두었다고

부처님이 병을 주시거나 우환을 주시겠는가?


바른 법을 믿으면 그런 위험을 당하지 않는데,

바르지 못한 법을 믿으면 그런 병, 우환의 위험을 당한다.

이것은 스스로 만든다는 것을 말한다.


불법승 삼보를 존경하는 뜻에서 공양을 올리지만,

정말로 의지해야할 것은 자신의 계정혜 3학이다.

이것이 바른 견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모두 다 업이 되는 데,

업으로서 업을 갚으려 하면 절대로 다 갚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세세생생 쌓인 업이 10만원이라고 할 때,

그 빚을 복을 짓는 것으로 다 갚으려한다면 도저히 다 갚을 수가 없고,

어느 세월에 다 갚을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로 갚아야한다.

앙굴리 말라는 999명의 목숨을 빼앗았는데도

그 크나큰 업을 바로 지혜로 갚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생에 바로 아라한이 되어서 윤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손님이 와서 염소를 잡아 대접한다면,

그 과보로 그 사람은 죽어서 바로 지옥에 떨어진다.

그 다음에 축생으로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수없이 죽임을 당하고 난 뒤라야

비로소 손님을 대접한 복을 받게 되는데 언제 그 빚을 다 갚을 것인가?


위빠사나의 지혜로서 빚을 갚게 되면 완전하게 빨리 갚을 수가 있다.

그렇게 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지계, 보시, 수행을 하고 있다.

그런데 수행을 한다는 것은 집에서 음식을 을 할 때도 알아차림을 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꼭 수행처에 오지 않고 집에 있어도 수행자가 될 수 있다.

알아차림으로써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림으로써 해야 한다.


보시 또한 지혜로써 해야 되는데,

만일 10만원으로 열 분의 대중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려고 할 때

반찬 몇 가지만 하면 3번을 나누어서 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저 더 잘 해드리려고 그것을 한 번에 다 써버린다.

이것은 욕망이 있는 것이다.


나누어서 공양을 하게 되면 복도 여러 번 짓게 되고,

공양을 받는 스님들도 공양이 없는 날은 잘못 드시는데

못 드신 날이 없이 공양을 할 수 있으니 그 공덕 또한 크지 않겠는가?


여기 미얀마의 어느 마을 사람들은 미얀마 신들과 그들이 타고 올 백마 상까지 모셔놓고   

제단위에 제물을 올린다고 매년 잔치를 벌인다.

나중에는 미얀마 사람들이 모시는 신들로 모자라서 한국의 신들까지도 웰컴이라고 환영할 것이다."


이렇게 스승께서는 보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보시는 단지 베푸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베푸느냐에 따라서 그 과보는 다릅니다.


여러분들!

보시를 우리는 해야 됩니다.

반드시 보시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시가 윤회를 계속하게 하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희 스승께서는 이렇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선업을 지으면 어떤 선업이든 나쁜 허물과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한 그릇된 허물들과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에

선업의 보시는 알아차림과 집중의 밑거름이 된다.


이런 보시의 공덕으로 마음이 청정해지고,

마음이 청정해지므로 계가 청정해지고,

계가 청정해지므로 정이 청정해지고,

정이 청정해지므로 혜가 청정해지고,

혜가 청정해지므로 도와 과의 지혜가 청정해진다.


각종교마다 그 종교의 가르침이 있는데

불교에서는 계정혜 3학이다.

모두들 이 3학을 갖추도록 노력해야한다.


이렇게 각 종교마다, 나라마다, 종족마다 따르고 있는 가르침들이 다 다른데,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4악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3학은 4악도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다른 종교에서 하는 것은 꼭 4악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실히 말할 수가 없다.


계학과 정학은 좋은 세계에 나게 하지만, 혜학을 닦아서 지혜가 나야만,

늙고 병들고 죽음에서 벗어나는 열반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는 것은 정학에 해당하는 것이고,

8계를 지키는 계학에 해당하는 것이며,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은 혜학에 해당된다.


자, 수행이 잘 되는가?


그러자 수행자들이 잘 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스승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수행이 안 되느냐?

항상 노력해야한다.

지금 지키고 있는 것은 계학에 해당하고,

내가 무엇을 할 때마다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정학과 혜학에 해당된다.

항상 알아차림을 하고 있으면 3학이 다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 있을 때나 한국에 가 있을 때나

항상 알아차리면서 생활 할 수 있도록 하라.

그러면 3학을 다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 보시를 했으니 공양보시의 가르침에 해당되고,

지금 계를 지키고 있으니 그것은 계학에 해당되고,

지금 내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다 알면서 하기 때문에

이것은 정학과 혜학에 해당되어 3학을 다 갖추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모두 자기가 지은 보시의 공덕과 지키고 있는 계의 공덕과

수행을 하고 있는 수행의 공덕으로 인해

내가 모든 허물과 위험에서 벗어나서 행복을 얻는 것처럼

그 행복을 모든 이들이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스승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보시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보시냐에 따라서 우리들이 이렇게 갈 길이 확연히 구별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보시는 관용입니다.

세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투쟁입니다.

투쟁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면 방관합니다.


그러나 출세간의 삶은 투쟁이 아닌 관용입니다.

이 관용은 반드시 보시를 수반합니다.

관용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함께 위하고,

또 자신과 남을 모두 사랑하게 합니다.


투쟁을 하면 상처와 고통만 남지만,

관용을 보이면 행복과 평화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용이 바로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가장 처절한 싸움은 남과 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가장 첨예한 이해가 걸린 것이 사실은 가족과의 싸움입니다.

먼저 자신과의 싸움이 있고, 그리고 가족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싸웁니다.

그러나 싸워서 졌다고 해서 결코 진 것이 아닙니다.

선하기 때문에 졌다면 사실은 지고도 이긴 것입니다.

오히려 지고도 선한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싸워서 이겼다고 해서 결코 이긴 것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불선으로 이겼다면 이기고도 진 것입니다.

오히려 이기고도 불선의 과보를 받습니다.


이기고 지는 삶에서는 윤회가 계속되고,

이기는 것도 없고 지는 것도 없는 삶에서는

나고 죽는 생사의 괴로움이 끊어집니다.


우리가 바른 보시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보시를 하지 않는 마음은 탐욕이며 인색한 마음입니다.


인색은 자신이나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빈곤한 마음이며,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과 함께 일어납니다.

인색은 선하지 못한 마음으로 이기적이고, 혐오와 함께 있으며,

남과 아무 것도 나누려하지 않기 때문에 고립된 채로 살아가야합니다.


남에게 베풀어도 자신에게 베풀지 않으면 사실은 똑같이 인색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베풀어도 남에게 베풀지 않으면 역시 똑같이 인색한 것입니다.


인색한 사람은 인색한 것을 좋아하면서 살기 때문에

살아서도 굶주리며 죽어서도 굶주리는 아귀가 됩니다.


인색은 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자애로우면 인색하지 않고, 인색하면 자애롭지 못합니다.



여러분들!

우리들의 삶은 이제 우리들 스스로가 선택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받아들여야합니다.

관용은 자신과 무관한 일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피해를 입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받아들인다고 해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잘못도 자애로 포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하다고 잘못 된 것을 비판하지 말고, 그가 단지 몰라서 그랬다고 알아차려야합니다.

받아들여야 자신이 변하며, 받아들여야 상대가 변화됩니다.


우리는 먼저 받아들이는 관용을 배워야합니다.

이 관용의 정신을 존중할 때 우리는 다음 단계의 보시의 베푸는 마음이 따르게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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