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60

通達無我法者 2011. 1. 8. 22:4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자신의 선한 행위에 대하여 도취되지 말아야 합니다.

선업의 과보가 생겼지만 자만하면 선이 증장되지 못합니다.


남의 선업은 시기하지 말고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의 선업을 자신도 함께 공유하는 것이 됩니다.


선하다는 것은 자신의 문제이지 상대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이 선하지 못하다고 해서 화를 내는 것은 바로 자신이 선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선하지 못한 행위를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은 선한 것 같지만 남을 탓하는 것이 바로 불선업입니다.


자신이 일으킨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관용을 보이듯이,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도 똑같이 관용을 보여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고,

행을 원인으로 식이 일어나는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존재의 시작은 재생연결식입니다.

비록 무명에 속아서 현생을 즐거움으로 착각하고 있을지라도

삶은 단지 괴로움과 불만족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보시나 공덕을 행할 때마다 과연

내생에 보다 나은 존재로 태어나기를 바라고 기원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멈추기 위해서 힘써 노력하라고 수행자들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인이나 범천 혹은 다른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나든,

생은 오직 괴로움 그것 자체일 뿐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최대의 사명은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감각적 욕망을 추구해서는

영원히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만이

비로소 출구가 보이고 그 끝에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재생연결식이라고 하는 것은

행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마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죽기 전의 마음은 몸에 의존하면서 한순간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면서 흐르다가

호흡이 멈춤과 동시에 그 마음도 끝납니다.


그리고 몸은 분해 되지만 마음에 담긴 과보(업력, 에너지)는

다른 세계의 물질로 옮겨가서 새로운 몸과 마음을 만듭니다.


이것은 마치 전기를 끊임없이 공급받는 전구가

지속적으로 빛을 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전구가 나가면 불은 꺼지지만 전기는 계속해서 들어옵니다.

낡은 전구를 새 전구로 갈아 끼우면 빛이 다시 들어옵니다.

여기서 전구, 전기, 빛은 모두 변화하는 물질적 과정이며

우리는 이들의 무상한 성질을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주석서에서는 메아리, 등불, 도장의 인각, 거울에 비친 영상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메아리는 음파가 벽이나 숲 등에 부딪혀서 나오는 소리의 반향입니다.

우리가 소리와 메아리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소리가 먼 곳까지 전달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소리는 그 순간에 일어나서 사라졌지만 메아리에 의해서 소리가 다시 일어나듯이,

우리의 마음은 사라졌지만 과보에 의해서 다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거울을 볼 때 여러분의 얼굴이 거울에 비쳐지는데,

비록 자신의 얼굴과 거울에 비친 영상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두 가지를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거울을 보거나 자기를 찍은 사진을 볼 때

거울 속에 있는 자기나 사진 속에 있는 자기를 마치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거울 속에 비쳐지기 이전의 자신의 모습이 실재이고

사진을 찍을 때 자신의 모습이 실재인데도

사진이나 거울 속에 있는 모습을 마치 자기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불이 붙어 있는 등불은 다른 등불을 켜는데 쓸 수 있습니다.

불을 붙여준 등불이 여전히 타고 있으므로

새로운 등불의 불꽃은 이전의 등불이 분명히 아닙니다.

하지만 이 전의 두 등불과 두 개의 불꽃이 인과적으로 결코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또 돌이켜보면 도장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도장을 종이에 찍습니다.

그러나 실재하는 것은 도장입니다.

그리고 종이에 찍힌 도장은 실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종이에 찍힌 도장을 실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예입니다.

도장은 그 표면과 같은 각인을 남긴 것이지만

실재로는 이것이 도장의 표면이 아니며

또 도장 없이 표면을 찍을 수도 없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이렇듯 하나의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갑니다.

이때 단지 조건에 의해서 옮겨질 뿐이지 전생과 이생이 같은 생이 아니며

지금의 몸과 마음이 지금 이후의 몸과 마음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때 이 영향을 받아서 지속되는 흐름만 있을 뿐이지

실재하는 것은 그 실체가 없습니다.

이 비유는 재생의 성질을 어렴풋이 알게 해줍니다.


사람이 죽어갈 때 자신의 업, 또는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 나타납니다.

죽은 뒤에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는 이들 표상 중에

어느 하나가 조건지어져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이 재생연결식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죽기 전에 일생동안 자기가 한 행위, 또는 자기가 한 행위의 업의 표상,

또는 갈 곳의 표상, 이 세 가지 중에 하나의 표상이 일어났을 때

이 표상의 영향을 받아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반드시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적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지속적으로 흐릅니다.


그러므로 재생은 식의 마지막 단위가

다른 생으로 옮겨감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임종 때의 표상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생은 죽어가는 사람이 보는 표상이 인도하는

무명과 행에 뿌리를 두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재생연결식은 전생과 인과적으로 연관되어있습니다.

두 개의 연속되는 의식의 단위들은 분리되지만

우리는 한 사람을 하루 종일, 일년 내내,

또는 전 생애동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같은 사람이 아니며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이러한 원인과 결과가 지속적으로 흐르는 연속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연기라고도 말하고 윤회라고도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죽을 때의 마지막 마음을

재생연결식과 함께 동일한 사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합니다.

사람이 천인계나 다른 세계에 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전체로서의 정신과 물질의 전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재생은 인과적으로 관련된 정신단위의 흐름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동일한 사람이라고 그냥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관념적인 결과입니다.


여러분!

과보가 전해져서 전생과 금생이 연결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같은 생명으로 이해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동시에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전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는 것이 바로 단견입니다.

이에 따르면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납니다.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은 이러한 단견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견을 잘못된 견해라고 말합니다.


두 개의 연속된 삶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관습적인 용어로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생이란 자아가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겨가는 것을 뜻하는

상견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단견도 잘못된 견해이지만

항상하고 같은 마음이 옮겨간다는 상견도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래서 전생의 나는 현생의 내가 아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단절과 상속을 뛰어넘는 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라는 과보입니다.

이렇게 이해되었을 때만이 전생과 현생이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바른 견해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실재하는 것은 오직 인과응보만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성숙한 위빠사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수행자는

현생의 정신적 단위들의 일어나고 사라짐과

그들의 인과관계를 철저히 알기 때문에

이러한 단견과 상견을 지니지 않습니다.


이렇게 알면 개인이 불멸하거나

단멸한다는 전도된 인식에 휘말릴 소지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재생연결식의 본성은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우리가 괴로움에 고통을 겪고 낙담을 할 때

그 낙담 다음에 기쁨이 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매우 기쁜 상태를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에 그 기쁨으로 인해서 오는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고요한 마음 다음에 짜증이 오고

짜증 다음에 고요한 마음이 연속적으로 반복됩니다.


이러한 재생연결식의 변화는 명확히 그 이질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들이 그 순간의 마음이지 같은 마음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를 들면 밤에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면

그는 꿈속에서도 그 일을 표상으로 떠올릴 것이며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도 그 생각들이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밤에 잠을 자기 전의 마음과 잠을 잘 때의 마음과

아침에 일어나서의 마음은 분명히 다른 마음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먹었던 이런 의식들이 기억 속에 저장되어서 동일하게 흐르고 있는 것은

의식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연속된 의식들 간의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죽음으로만 정의될 뿐 죽음의식과 재생연결식의 두 가지 의식 사이에도

똑같은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존재의 식이 재생연결식과

일생에 거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두 가지의 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재생연결식은 다음 생을 결정하고 잠재의식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하나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이 재생된 뒤에

매순간 새로 일어나는 의식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은 일생에 처음 일어나는 재생연결식이 있고,

재생연결식 뒤에 일어나는 바왕가 찌따라고 하는 매순간의 재생의 마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가 윤회를 한다는 것은

한 생의 윤회가 있고 그리고 매순간의 윤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2연기가 뜻하는 의식은 두 개의 태어남이 있습니다.

과거의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고

과거의 행을 원인으로 현재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생에 한 번 있습니다.


그런 뒤에 그 재생연결식은 매순간 새로 일어나는 선행하는 마음이 되어

죽을 때까지 계속 앞서서 또 우리의 마음을 이끕니다.

그 마음에 의해서 우리의 몸이 또 결정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연기적 구조에서 본 재생연결식은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러한 재생연결식은 오직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할 때만이

비로소 그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관념적으로는 재생연결식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통찰지혜 수행을 해서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만이

원인과 결과로 일어나는 재생연결식의 실체를 우리가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도 재생연결식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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