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97

通達無我法者 2011. 2. 4. 21:5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가 있고 현재의 원인으로 미래가 있습니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으므로 원인을 모르면 결과도 모릅니다,

원인은 가까운 원인이 있으며 무명과 갈애라는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생각으로는 원인을 알 수가 없고, 지혜가 나야 근본 원인을 알게 됩니다.

생각으로 원인을 알면 불선업으로 대처하여 악순환이 거듭됩니다.

그러나 지혜로 원인을 알면 선업으로 대처하여 악순환의 고리를 끊게 됩니다.


지혜가 없으면 원인과 결과를 몰라 불확실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알아차리면 지혜가 나서 원인을 알아 결과를 예측할 수가 있습니다.

지혜란 원인과 결과를 알아 나쁜 원인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모르면 나고 죽는 끝없는 윤회의 세계에서 불확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지은대로 받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생명을 죽이고 다치게 하거나 자비롭지 못하면

다시 태어나서 살생의 과보를 받게 되어 빨리 죽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죽이지 않거나 살생을 하는 도구를 멀리 하거나

자비롭고 동정심을 가졌으면 다시 태어나서 장수를 하게 됩니다.


사람이 다른 생명을 괴롭히기 위해서 주먹이나 돌로 치거나

해치는 습관이 있으면, 다시 태어나서 질병으로 고생을 합니다.

사람이 다른 생명을 해치는 습관이 없으며 모든 생명들을 존중해 주면,

다시 태어나서 건강한 생활을 누리게 됩니다.


사람이 성질을 잘 내고 난폭하며 사소한 것에서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고

악의를 가지고 분개하면, 못생긴 얼굴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사람이 분노하지 않고 난폭하지 않으며,

모욕적인 말에도 화를 내지 않고 참고 견디면,

온화한 마음으로 인해 아름답게 태어납니다.


사람이 질투심이 많고 남이 가진 것과 존경을 받거나 명예를 얻는 것을 부러워해서

질투를 하게 되면, 사회적인 지위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질투심이 없고 남이 가진 것과 존경을 받거나 명예를 얻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으면, 그 과보로 인하여 사회적인 지위를 얻습니다.


사람이 남에게 베푸는 마음이 전혀 없고 자신의 이익만 알아서 인색하면,

탐욕의 과보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사람이 남에게 베푸는 마음이 있어서 남을 돕고 베풀게 되면,

자비로운 마음의 과보로 인하여 부유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사람이 고집이 세고 거만하며,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하지 않게 되면,

그 거만함과 불공손함의 과보로 인해 비천하게 태어납니다.

사람이 고집이 세지 않고 존경해야 할 사람을 마땅히 존경하게 되면,

그 존경심의 공손한 마음의 과보로 인해 좋은 가문에 태어납니다.


사람이 학문을 배우고 덕망이 있는 자에게 물어서 옳고 그름을 알고,

자기행복을 찾아 실천하려고 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자로 태어납니다.

하지만 사람이 학문을 배우고 덕망이 있는 자에게 물어서 옳고 그름을 알고,

자기행복을 찾으려고 실천을 하게 되면, 지혜로운 자로 태어나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 9장을 계속해서 공부해 보시겠습니다.


자! 우리의 일상생활을 한 번 살펴봅시다.

누가 어떤 것을 봅니다. 그리고 즉시 욕망을 느낍니다.

그 순간에 가지고 싶은 욕망에 압도 됩니다.

그리하여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결국 그는 무엇인가를 얻게 되며

그것은 바로 연기에 따르자면 새로운 태어남입니다.


태어남이 있으면 다시 무명과 갈애에 지배받고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렇듯 태어남은 한 일생의 태어남뿐만 아니라 매 순간의 태어남도 있는 것입니다.

매순간의 태어남이란 조금 전의 마음과 조금 후의 마음이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기 다른 사건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한 생명의 윤회가 매순간 일어나며,

이런 매순간의 윤회가 모여서 한 일생의 윤회로 이어집니다.

윤회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정신과 물질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어난 즉시 사라집니다.


그래서 연기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연기가 이 법문 속에 있지도 않습니다.

연기는 지금 이 순간의 우리의 삶 속에 항상 함께 있습니다.


연기는 이렇게 부분 1은 부분 2를 연결하고, 부분 2는 다시 부분 3을 연결합니다.

부분 3으로부터 다시 부분 4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연기의 회전은 끝없이 영원토록 계속됩니다.

하나의 완전한 회전 뒤에 또 다시 새로운 회전이 일어나고,

이렇듯 끝없는 과정이 무한히 반복됩니다.


우리 모두는 이 길을 벗어나려고 하는 단 한 번의 시도도 하지 않은 채로

이러한 인과 관계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시도를 했었더라면 지금 이 모습으로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연기를 회전시키기 위해서 살고 있었는지,

아니면 연기를 회전시키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었는지,

했다면 과연 무엇을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좋습니다. 우리는 몰라서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알았으니 해야 하겠습니다.

연기를 회전시키지 않는 방법은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다시 교재 8쪽의 12연기의 도표를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행자 여러분은 현재 자신이 어느 부분에 속해 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답은 부분 2의 식, 명색, 육입, 접촉, 느낌인 오온이자

고제에 해당하는 부분 2일 것입니다.


과거 연속의 원인인 무명, 행, 갈애, 집착, 업의 생성으로 인하여

현재의 결과의 연속인 오온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부분 1은 집제인 반면, 부분 2는 고제이며,

단지 이 두 개의 성제만이 계속됩니다.


12연기의 표면에는 집제와 고제밖에 없습니다.

한편 도제와 멸제는 보이지 않게 가려져 있습니다.


드러나 있지 않은 이 두 성제는

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믿을만한 스승에게 가까이 가려고

스스로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집제와 고제는 세속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어나는 연기입니다.

여기에는 사라지는 연기가 없습니다.


우리가 집제와 고제를 말할 때는 불교가 염세적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괴로움만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멸제와 도제를 찾아내시어 괴로움으로부터의 탈출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멸제와 도제는 출세간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어나는 연기가 아니고 소멸하는 연기입니다.


소멸하는 연기가 출현함으로서 인간이 비로소 지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멸제와 도제가 있음으로서 불교가 염세가 아니고

행복을 얻는 가장 균형된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하겠습니다.


이제 수행자 여러분들은 이들 도제와 멸제의

두 출세간의 진리를 얻고자 하는 결심을 다지시기 바랍니다.

고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 하신 법문 속에

우리는 이런 결심을 다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올바른 길에 의한 청정인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도제와 멸제를 깨달아 연기의 바퀴살, 바퀴테, 테두리,

축과 바퀴통을 부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수행자 여러분들은 이 9장을 반복적으로 읽어서

연기법을 완전히 숙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행자 여러분! 연기는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이렇듯이 연기를 회전시키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같은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12연기를 말할 때 계속 같은 이야기들이 되풀이 되는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들어도 그것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관념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듣고 또 듣고를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 그것이 실천적 수행을 통해서 지혜로 바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곳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곳에 태어나고 불행합니다.


오늘 12연기를 말함에 있어 다시 한 번 살생의 과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행위에 대한 원인에 의해 결과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도 그에 따른 과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살생을 하는 것에도 여러 가지 상황이 참작됩니다.

어떤 조건하에서 살생을 하였느냐에 따라서 과보도 다릅니다.


살생이란 마음과 몸이 있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일 때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마음이 없는 식물을 해치는 것은 살생이 아닙니다.


예외적으로 비구의 계율을 받은 경우에는 식물에게 조차도 위해를 가하는 것이

계율에 어긋나지만 일반적으로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살생의 과보는 일정하게 악업을 형성하는 조건들이 충족되었을 때

그에 따른 과보가 나타나며 그렇지 않으면 악업의 과보가 없습니다.


살생의 악업을 행하여서 과보를 받게 되는 다섯 가지 조건들은

첫째, 살아있는 존재가 있는 것,

둘째, 살아있는 존재라고 분명하게 아는 것,

셋째, 살아있는 생명에게 살생을 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

넷째, 그리고 살생을 시도하는 행위를 하는 것,

다섯째, 결과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이 죽는 것, 이상 다섯 가지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만이 악업의 과보를 받기 때문에,

모르고 살생을 한 경우에는 악업의 과보가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게 되는 모든 행위는 대상이 있는 것을 아는 것과

대상에 대한 의도와 행위와 결과까지 포함되어야 과보가 생깁니다.


살생을 할 경우에 악한 행위에 따른 과보는 대상에 따라서 다릅니다.

성스러운 사람을 죽이면 그만큼 더 큰 악업의 과보를 받습니다.

의식이 고양된 성스러운 수행자를 살생하는 것과

의식이 낮은 모기나 파리를 죽이는 것에 따른 과보는 당연히 다른 것입니다.

몸집이 큰 생명을 죽이는 것과 작은 생명의 살생의 과보가 다르며,

지혜가 있는 것과 지혜가 없고 본능만 있는 것에 따른 살생의 과보가 다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은혜를 입은 부모나 스승에 대한 살생은 일반적인 대상에 대한 과보와 크게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그 과보는 매우 크고 고통스럽습니다.

살생을 한 과보는 상대가 겪는 고통과 현실을 그대로 받게 되어

단명, 질병,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항상 슬프고 두렵게 삽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살생을 금하고 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한 선하지 못한 행위는 온전히 자기가 받게 되며,

뿐만 아니라 다음 생까지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유념하셔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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