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頭·參禪

선 입문

通達無我法者 2006. 9. 25. 18:08

1. 참선이란 무엇인가

참선(參禪)은 화두(話頭)를 들고 불도를 수행하는 선정(禪定)의 한 방법입니다. 말하자면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안정시킨 가운데 불법의 대의를 파악하기 위하여 내면적으로 깊이 침잠하는 수련법입니다.
참선은 원래 인도의 선정사상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선은 인도의 옛말로는 선나(禪那)로 조용히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조용히 생각한다는 것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지혜와 안정된 정신상태 즉, 선정을 일치시켜 정혜를 함께 닦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참선수행을 할 때 큰스님의 가르침이나 화두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중심내용을 몇 마디의 말이나 상징적인 게송으로 던져 대중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강한 의심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수행하는 대중들은 진리를 담고 있는 화두의 내용에 끊임없이 정신을 집중하고 불법의 핵심을 직접적으로 파고 들어가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하고 평등한 마음의 경지를 찾게 되는 것이 바로 참선인 것입니다. 참선은 거슬러 올라가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고락의 극단을 피하고 중도의 깨달음을 성취하신 수행방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선을 사선(四禪)으로 나누어 차제적 수행단계로 설명하셨고, 대승불교에 이르면 반야경을 위시하여 여러 경전에서 육바라밀 중에 선바라밀을 넣어 반야바라밀을 얻기 위해 보살이 수행해야 할 덕목으로 중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인도의 사상이 달마대사에 의해 중국으로 넘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중국으로 선사상을 전파하면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선사상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불립문자는 경전이라는 글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으로 깨달음의 요체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후대 중국과 우리 나라의 선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2. 참선의 올바른 자세

참선은 화두를 들고 하는 것이므로 일단 화두를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화두는 갖가지 삿된 생각이 끊긴 경계이므로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경계입니다. 진리로 바로 들어가 언어도 끊어지고 모든 망견이 끊긴 그 자리에서 새롭게 자리잡은 불성,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할 때는 반드시 부처님과 여러 조사스님께서 깨치신 법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선지식에 의지하여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닦아가야 합니다.
문자를 의지하지 않고 마음으로 곧장 들어가는 것이 참선의 수행방법입니다. 글로 쓰여진 교리를 수행법이라 생각하면서 일상생활을 진실하게 행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이정표를 잃게 됩니다. 대개의 화두는 그 내용에서 근본의심을 담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이 근본의심인지, 무엇이 바로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참선수행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도 지관일치(止觀一致)의 수행으로 깨달으신 것이니 만큼 그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마음에 의지하신 것은 아닙니다. 즉 지(止)라는 마음을 항상 평등하게 유지하는 수행과 관(觀)이라는 진리가 무엇인가 아는 지혜를 함께 일치시켜 우주 만유에 흐르는 참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세에서 출발하셨습니다. 달마대사도 불교교학을 모두 통달하시고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사상을 선수행의 목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선수행을 하는 불자들은 가르침의 법인 교학을 함께 하면서 마음을 닦는 선수행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참선수행을 하더라도 부처님과 조사스님들께서 깨달으신 법을 그대로 체현하신 선지식의 지도를 반드시 받아 일심으로 화두를 들고 안정된 좌법과 호흡으로 행해야 합니다.

좌 선 의

좌선을 할때는 그 기초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뿌리가 깊을 수록 나무가 잘 자라듯이 기본적인 좌선의 법 식을 갖추는 것은 꼭 필요한 기초를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한국불교에서 널리 인정되는 좌선 의에 대하여 쓰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제방선원에서는 南宋 휘종(徽宗)때 자각(慈覺)선사가 지은 좌선의를 규범으로 하여 좌선하고 있다. 이 좌선 의는 간략에 치우친 감이 있기는 하나 좌선방식의 골격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아함경 말씀과 천태지관과 백장청규를 토대로 하 여 좌선의 전통적인 격식을 집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자각선사의 좌선의를 기본으로 보고,호흡법에 대하여 부연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자각선사의 좌선의를 분석해 보면 좌선의 기본법식으로 열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큰 원을 발하는 것이고(誓願),둘째는 모 든 인연을 놓는 것이며(捨緣),세째는 음식을 조절하는 것이고(調食),네째는 잠을 조절하는 것이며(調眠),다섯째는 처소를 선택하 는 것이고(擇處),여섯째는 몸을 조정하는 것이며(調身),일곱째는 호흡을 고르는 것이고(調息),여덟째는 마음을 고르는 것이며(調心),아홉째는 마장을 판단하는 것이고(辨魔),열재는 두호하여 지켜나가는 것이다(護持).

*誓願-도를 배우려는 대장부는 무엇보다도 그 뜻이 커야 한다. 불보살의 서원을 자기 서원으로 삼아 수행하는 것이 보살인 것 이다. 그러므로 참선하는 자는 일체중생을 맹세코 건지겠다는 대비심과 대서원을 일으켜야 일으켜야 하니 ,만약 자기 일신만의 해탈을 생각한다면 이는 보살일 수 없고 따라서 바른 도는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捨緣-좌선하는 데는 마음에서 모든 생각과 인연을 다 놓아버려야 한다. 마음 속의 세간 잡사나 세간적 욕망이나 원한이나 구 하는 생각이나 잡념을 가지고 있고서는 그 마음에 밝은 달이 드러날 수 없는 것이다.

*調食-음식을 조정할 일이다. 힘을 낸다고 과식해서는 안된다. 수면을 줄이고 마음을 맑힌다고 음식을 너무 줄여서도 안된다. 선은 망념을 격파하여야 한다고 음식을 함부러 먹고 육단심(肉團心)을 내려하면 안된다. 수도인의 식기(食器)를 응량기라 하듯이 자기 양에 맞추어서 적당히 먹어야 한다. 먹고 싶은 양의 七부를 먹는 것이 선가식의 적량(適量)이다. 좋다고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 거칠다고 덜 먹어서도 안된다. 음식은 이것이 몸을 부지해 가는 약이다. 이 약은 도업(道業)을 이루기 위하여 먹는 것이다 .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중히 대하여야 한다. 오래 씹어 천천히 먹어야 한다. 먹으면서 잡념을 해서도 안된다. 생식(生食)을 하거 나 담식(淡食)을 하는 것은 권할 바가 못된다. 비시식(非時食)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단식은 병을 고치기 위한 이유외는 마땅하지 않다. 참선에서 그 양(量)을 알아서 먹는다고 한 것은 수행하는 정신자세와 환경을 꾸며가는데 중요한 것이므로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일즙(一汁) 일채(一菜)가 선가의 식사지만 이 식사에 무성의하면 안된다. 식사를 고루하지 않으면 필경 마음이 고르지 아니하여 공부가 한결같지 못하게 된다.

*調眠-잠을 고르게 자야 한다. 수면을 즐기는 자는 도에 들 수 없다. 그렇다고 수면을 너무 절제하여도 공부에 지장이 된다. 수면부족은 의식부족과 함께 퇴타 인연이 된다. 대개 처음 선에 드는 사람들이 잠을 줄인다고 애쓰는 것을 본다. 가상한 일이나 그 방법을 알아야 한다. 우선 일정한 시간을 자는 것이다. 그리고 좌선의(坐禪儀)에 따라 정성스러이 공부해야 한다. 좌선의에 따라 좌선을 계속하면 절로 수면시간이 단축되는 법이다. 특히 좌선의 호흡법은 중요하다. 되도록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일이다 . 저녁 참선을 오래하고 늦게 일어날 생각하면 안된다. 저녁 공부시간을 줄이더라도 아침 공부시간을 지키는 것이 좋다. 혹 피 곤하다고 저녁공부를 궐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피곤할 수록 정성들여 좌선하여야 한다. 피곤한 밤의 30분 참선은 다음날 심신을 가볍게 하고 2시간의 수면을 절약시켜 준다. 수면은 망념에서 온다.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수행에 따라 점점 그 시간이 줄어든다. 수면시간을 지키려고 하지말고 오히려 좌선을 성실히 하면 저절로 수면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힘찬 정진을 할 수 있다. 대개 선원에서는 연중 한두 차례는 수면을 전폐하는 용맹정진을 갖는다. 그런 때에 평소부터 좌선자세를 엄격히 한 사람이라면 일주간의 용맹정진은 무난히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수면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을 기억할 일이다. 선객중에서 눕지 아니하 고 마냥 앉아 있는 용맹지사를 흔히 본다. 그리고 좌선 중에는 조는 것도 흔히 본다. 졸면 좌선이 아니다. 졸면서도 좌선코자 하 는 정신은 장하나 그것은 좌면이다. 그러므로 장좌불와(長坐不臥) 한다 하여 좌면하는 것을 권할 수는 없다. 공부는 마땅히 진실 하여야 한다. 잘 만큼 잤거든 오뚜기 처럼 일어나 공부를 잡두리 하는 것이 구도자의 자세인 것이다.

*擇處-장소를 가려야 한다. 자각 선사는 한적하고 고요한 곳을 말하였다. 古來로 좌선은 깊은 산중이나 세간을 떠난 한적한 곳 이나 세속과 경계를 달리한 사찰을 적당한 곳으로 일러왔다. 처음 좌선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소란스런 환경은 좋지 않다. 되도록 조용한 환경이 좋다. 그러나 조금만 좌선에 힘써 본 사람이면 무리하여 고요한 곳을 찾을 것이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 은 간절한 발심과 착실한 좌선기초의 수업이다. 스스로 좌선의가 바로 서고 뜻이 간절하면 웬만한 장소면 다 상관이 없게 된다. 좌선에는 사찰의 선방이 제일 좋다. 모든 환경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깊은 산중 절이나 선원이 아니더라도 좌선하는 데는 서로 환경을 만들어 주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주변에서는 큰소리나 작은 소리를 없이 하여야 한다. 좌선중 부질 없이 출입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좌선자 이외는 출입을 삼가하게 한다. 비록 일정한 시간 만이라도 이렇게 고요한 환경을 가질 수 있다면 좌선장소는 어느 곳이라도 좋다. 상설선원이라면 항상 이런 여건이 보장되어 있다. 그래서 선원에 들어서면 언제나 적 정(寂靜)한 분위기에 젖게 된다. 처음 참선하는 사람은 소수인이 모이는 곳보다 되도록 많은 선중(禪衆)이 법다이 수행하는 곳을 택하여 가는 것이 바람직 하다. 일당에 여러대중이 엄숙하게 공부하는데 참여하면 부지부식간에 많은 힘을 얻게 되고 장난(障難 ) 없이 공부를 몸에 익힐 수 있다. 설사 약간의 힘을 얻었다 하더라도 될 수 있는 한 회중(會衆)에 머물기를 권한다. 토굴이나 기개인의 선원보다는 회중에서 얻는 것이 참으로 많다. 무엇보다 선지식 회하에 있다는 것이 어떠한 훌륭한 환경보다 나은 것이 다. 참선한다고 처소를 찾아 헤매는 사람을 흔히 보지만 처소는 처처에 있는 것이다. 산수경치나 산세지리를 관심에 두고 공부처 를 찾는 자는 진정한 공부인이라 할 수 없다.

*調身-몸을 바르게 고르어야 한다. 좌선할 때에는 우선 두꺼운 방석을 준비하고 허리띠를 늦추어 몸과 호흡을 자유스럽게 한다 . 그 다음에 방석위에 가부좌(跏趺坐)를 한다. 가부좌는 먼저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위에 겹친다. 그리고 왼쪽 발을 오른쪽 무릎 위에 포개는 것이다. 이것이 가부좌이고 또한 반가부좌도 무방하다. 반가부좌는 다만 왼발을 오른쪽발 위에 놓는 것이다. 그 다 음에 바른 손을 왼발 위에 놓고 왼손을 바른 손바닥 위에 겹치며 양쪽 엄지손가락 끝을 서로 둥굴게 맞댄다. 이것이 대삼마야인( 大三摩耶印) 또는 법계정인(法界定印)이다. 그 다음에 몸을 서서히 바로 일으키며 허리를 반듯이 편다. 이때에 몸을 전후로 약간 움직여서 허리를 단정히 세우고 또한 좌우로도 반복 흔들어 몸을 자연스럽게 단정하게 한다. 몸이 기울어지면 안된다. 앞으로 굽거나 뒤로 제쳐도 안된다. 어깨에 힘을 주어도 안된다. 턱은 당기고 눈은 반쯤 떠서 코끝을 보는 상태로 한다. 귀와 어깨가 서 로 대하고 코와 배꼽이 서로 대하도록 반듯이 한다. 혀는 입천정에 대고 입을 가볍게 다문다. 가부좌나 반가부좌일 때 익숙할 때 까지는 다리가 쉬 아프다. 그럴때는 너무 참지 말고 다리를 바꿔가며 앉도록 한다. 혹 다리가 저릴 때가 있다. 이런 때는 몸을 좌우로 약간 흔들면 가벼워 진다. 또한 허리에 힘을 주었을 때는 잠시 힘을 늦춘다. 공부가 순숙하여지면 어느덧 몸이 있는 줄을 모르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혹 다리나 어깨가 아파오더라도 이것은 좌선이 익을 동안 잠시 지나가는 것으로 알면 된다. 정법계인은 등한히 하기 쉬운데 마음을 안정시켜 정신을 집중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니 등한히 여겨서는 안된다. 손에 힘을 주지 말고 자연스럽게 인을 맺어야 한다. 참선 초학자는 눈을 감기 쉽다. 그러나 반드시 떠야 한다. 옛조사는 눈감고 참선 하는 자를 흑산귀굴(黑山鬼窟)이라 하였다. 눈을 감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정신이 집중되는 듯하지만 어느덧 혼침에 떨어지기 쉽 다. 특히 오후나 새벽 좌선시에 눈을 감는다는 것은 잠을 청하는 거와 같다. 그러므로 좌선 중 수면에 시달릴 때는 눈을 크게 뜨 도록 하는 것이 좋다. 특히 심하게 수마가 밀어닥쳐 오거든 어금니를 굳게 물고 두눈을 부릅뜨며 심호흡을 깊고 느리게 십여차례 반복한다. 그리고 들이쉰 호흡을 한참동안 단전부위에 가두고 견디다가 아주 천천히 토해낸다. 이렇게 하면 대개 졸음은 사라진 다. 좌선 중에 결코 졸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앉아서 졸음이 쫓아지지 않거든 일어서서 온 몸에 힘껏 힘을 주고 나서 앞서와 같 이 호흡하여 보라. 사라지지 않는 잠은 없을 것이다. 좌선은 수시 포행과 겸하는 것이 좋다.오늘날 우리 한국선원에서는 50분 좌 선하고 5-10분간 선방내를 포행하는 것이 관례지만 포행시간을 좀더 늘려도 좋다. 포행할 때는 금강권을 하고 두손을 곧게 드리 우고 서서히 걸음을 옮긴다. 이때도 앉았을 때와 같이 호흡을 한다. 걸을 때 발끝과 온 몸에 힘을 반복해 주면서 서서히 걷는 것 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때에 좌우를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오직 뚫어지게 앞만 보고 앉을 때와 같은 자세로 걷는 것이 다.포행은 바로 행선이다. 앉았을 때와 같은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포행은 피로가 풀리고 맑은 정신이 돌며 몸에 활기 를 준다. 따라서 용맹정진 때나 야간좌선시는 더욱 활기있게 포행할 필요가 있다. (금강권은 엄지손가락으로 무명지의 아래 마디 를 누르고 주먹을 쥔 것.)

*調氣(調息)-호흡을 고르게 하여야 한다. 선에는 원래로 좌법도 호흡법도 필요 없지만 좌선하는 데는 반드시 좌선의 기법을 따 라야 한다. 그렇지 아니할 때는 上氣 기타 신체상의 장애가 생겨 공부에 지장을 받을 때가 많다. 먼저 몸을 3,4회 전후 좌우로 흔들어 자세를 바르게 한다. 처음에 호흡을 한번 크게 내쉰다.(깊게), 다시 서서히 호흡을 들이쉰다. 이때 생각으로 호흡이 코에 서 가슴을 거쳐 배로,다시 아랫배(배꼽아래) 단전 부위에 이르는 것 을 관한다. 호흡과 생각과 함께 단전으로 모아지게 한다. 이 때에 너무 단전에로 힘을 모으려고 무리하게 힘쓸 것은 없다. 다만 요긴한 것은 생각과 힘이 호흡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 다. 숨을 들이쉴 때에는 비교적 가볍게 하고 토할 때는 되도록 정밀하게 서서히 하도록 한다. 호흡이 단전에 이르러서는 잠시 멈 춘다. 그리고는 서서히 밖으로 내쉰다. 역시 생각은 빈틈 없이 호흡을 추적하되 단전에서 가슴으로 다시 코로 내쉬는 것을 관하 여야 한다. 이렇게 한번 호흡하였을 때 [하나]하고 생각으로 센다. 한 호흡이 끝나면 다시 반복하여 열까지 세고 그 다음에는 다 시 하나부터 반복한다. 호흡은 들이쉴 때보다 토할 때에 더 정성을 드리도록 한다. 호흡은 항상 코로 한다. 속도는 평상시 보다 천천히 그리고 깊게하되 무리하지 않도록 한다. 호흡이 순숙해지면 자연히 미세하고 깊은 호흡이 되는 법이다. 호흡은 거칠면 안 된다. 서두르면 안된다. 모든 생각을 놓아버리고 하여야 한다. 몸에서 기운을 풀고 바른자세(특히 허리를 펼것)와 편안한 마음으 로 정성스럽게 하여야 한다.이상이 수식관(數息觀)의 기본 요령이다. 수식관이 익숙해지면 수는 헤아리지 않는다. 다만 호흡과정 만을 관하도록 한다. 호흡기초가 다져지면 공부에 큰 조도가 된다. 몸에서 병을 물리치고 수면이 단축되고 심신이 경쾌하여지며 정신집중력이 강해지고 의지에 의한 심신 통제력이 강화된다. 그리고 삼매를 키우는 터전이 굳어진다. 수식관은 반드시 참선한 선각자의 지도하에 행하여야 할 것을 거듭 말해둔다. 좌선기초가 익어지면 반드시 화두를 배워야 하므로 더욱 그렇다.

*調心-마음을 고른다. 이미 몸이 안정되고 호흡이 고르게 되면 저절로 번뇌가 끊어져 맑은 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때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체 생각을 하면 안된다. 도 깨치기를 바란다거나,성인이 감응하기를 기다린다거나,또는 이것이 좋은 공 부다 하는 분별심을 내어서는 안된다. 도무지 일체 생각을 말고 오직 공부를 지어갈 줄만 알아야 한다. 이것이 좌선의에 있어 마 지막 과정이다. 마땅히 선지식의 지시를 받아 공부를 지어가되 결코 그밖에 생각이 있어서는 안된다. 자각선사는 말하기를 {이와 같이 오래오래 지어가 모든 반연을 잊으면 저절로 한쪽(一片)을 이룰 것이니 좌선의 요긴한 기술이다. 생각컨대 좌선은 이것이 안락법문(安樂法門)인데 사람들이 도리어 병을 얻는 것을 흔히 보니 그 원인은 대개가 마음을 잘 못쓰는탓이라} 하였다.

*辨魔-공부하는 데는 마군의 장난이나 공부가 바로 되고 잘못됨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도가 높아지면 魔가 성한다. 마음이 밝아지고 삼매를 이루게 되면 스스로 여러가지 경계가 나타난다. 경계는 대체로 두가지다. 하나는 공부를 방해하고 마음을 흔들 리게 하는 마군의 장난이나 삼매력에 상응하는 기이한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에 구하는 것이 있거나 망념이 잠 복되어 있을 때, 혹은 경계를 대하여 마음에서 희한한 생각을 갖거나 그 경계를 인정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의 나타남이다. 밖으로 마의 장난이 온다든가,정력(定力)에 상응하는 기이하고 수승한 경계가 나타나는데에 관하여는 능엄경에 상세하다. 이러한 경계를 집착하면 공부가 퇴실한다. 경계가 나타나는 이유를 알아야 그에 대한 분명한 대책도 서는 것이니 공부인은 魔를 잘 분 별하고 대책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선경계나 악경계는 그에 대한 마음에 있다. 첫째,마음이 어느정도의 정(定)을 이 루었을 때 그에 상응한 경계가 벌어진다. 정을 이루었을 때의 정의 핵심인 공부가 (예,화두) 분명치 않고 촛점을 잃었을 때 경계 가 벌어지는 것이므로 오로지 공부만 면밀하게 지어가면 일체 경계가 나타날 틈이 없는 것이다. 둘째는 공부인이 마음에 구하는 것이 있거나 망념이 있으면 경계가 벌어진자. 그러므로 공부인은 일체 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도 깨치기를 구하거나 불조 만나기를 바라거나 도가 현저하기를 기다리거나 하는 마음이 마를 부르는 초청장인 줄을 알아야 한다. 세째는 마음이 본래로 형 상이 없는 것을 요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법은 마음에서 일어남이요,일심이 본래 형상이 없거늘 도문(道門)에 어찌 가히 나 타날 경계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이 도리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에 경계가 나타났다는 자는 공부인의 마음자세 에 허점이 있거나 공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일단 알아 두어야 한다. 경계가 벌어지거든 공부가 곁길로 나 간 것을 곧 깨닫고 오직 본참공부를 향하여 마음을 돌려 면밀하게 지어가야 한다. 그러면 온갖 경계는 제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 로 없어지고 공부는 더욱 깊게 나아가게 된다. 공부는 오직 지어갈 줄만 아는 이것이 요긴한 것이다. 대체로 공부를 방해하는 선 악경계는 세 통로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요,둘째는 귀에 들리는 것이요,세째는 마음에 알려오는 것이다. 공부 인이 이런 경계를 만나거든 모두가 다 아니라고 관하여야 한다. 아무리 경계가 수승하고 미묘법문을 설해오더라도 모두가 마경계 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가 벌어지는 원인이 자신의 마음에 샘(漏) 즉 망념의 뿌리가 남아 있어서 그런 줄을 알 고 마음을 크게 돌이켜 오직 공부에만 면밀하고 힘있게 파고 들어야 한다. 이런 때가 가히 지혜와 용맹심을 시험해 볼 만한 호시 절이다.

*護持-좌선 할때의 마음 상태를 어느 때나 끊임이 없도록 잘 지켜야 한다. 좌선에서 일어서 포행할 때와 같이 선실에서 나와 밖을 거닐더라도 항상 좌선하는 마음 상태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좌선에서 일어서 나올 때는 조용히 몸을 움직이도록 하고 갑작 스레 일어서면 안된다. 자각 선사는 [어린아기를 다루듯이 하라]고 하였다. 또 자각선사는 定力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원각 경에도 [걸림이 없는 청정한 지혜는 모두가 禪定에서 생긴다.] 하였다. 그런데 여기 정력이라 한 것에 대하여 한갖 마음을 움직 이지 아니하고 생각을 끊은 상태로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여기의 정력은 좌선시의 고요하고도 말끔하고 또렷한 마음상태를 말하 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상태에서 지혜의 눈이 열리고 자성의 도를 보게 된다. 원래 참선법문은 습정(習定)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 고 견성(見性)을 말하고 철견(徹見)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원래로 습정이나 좌법이나 호흡법이라는 것이 논할 여지가 없다. 다만 말끔한 바른 눈초리에서 비로소 자성을 매(昧)하지 않는 것이므로 초참자에게 바른 눈을 열도록 좌선의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이 다. 선실에서는 공부하다가 선실에서 빠져나오면 곧 망상과 잡사에 내맡기고 또 잠시 좌선하다가 다시 혼침산란에 빠져 든다면 이런 공부로는 횃불을 눈에 들어대도 마침내 불을 못 볼 것이다. 옛 조사가 이르기를 참선은 [닭이 알을 품듯이,고양이가 쥐굴을 노리듯이,늙은 쥐가 궤짝을 썰듯이 하라.]고 하였으니 미루어 護持의 뜻을 알아야 한다.

*호흡하는데 주의할 몇가지---
①호흡하는 속도: 호흡속도를 처음부터 느리게 하려고 힘쓸 것 없다. 처음에는 다만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의식적 호흡을 하 면서 평상시 보다 약간 깊고 느리고 미세하게 하면 된다. 호흡이 익어감에 따라 더욱 미세하여지고 깊어짐에 따라서 속도도 느 려지게 마련이다. 들이쉴 때는 가볍게 내쉴 때는 비교적 느리게 한다. 참선 이외의 호흡에서는 느리고 미세한 호흡을 강조하나 참선에서는 그보다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서서히 의식적 호흡으로 향하도록 하고 성급하게 느린 호흡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속도는 사람따라 다르게 된다.

②호흡을 들이쉬고 머무는 정도 : 호흡을 가볍게 들이쉬고 잠시 머무는데 이 머무는 시간을 오래하려고 힘쓰는 사람이 흔히 있다. 또한 그런 호흡법도 있는 것이다. 이것도 무리하지 않도록 짧은 시간에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서서히 시간이 늘어나게 하는 것이 좋다. 무리하게 긴 시간 머무르면 호흡이 도리어 거칠어지기 쉽다. 오래 머무는 것을 주장하는 호흡법은 좌선에서는 취하 지 않는다.

③무리하게 배에 힘주지 마라.: 호흡을 하복부 단전으로 하려고 하면 저절로 호흡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아랫배에 힘이 들어 가게 마련이다. 생각이 호흡을 추적하면서 단전으로 진행함을 따라 배에 힘도 서서히 더해 간다. 호흡이 단전에 이르러서 호흡을 잠시동안 멈추게 되면 배에 힘이 가중된다. 이와같이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배에 모아지는 힘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호흡을 무 리하게 오래 머물게 하고자 하여 배에 힘을 주거나 또는 단전의 힘을 기른다 하여 의식적으로 과하게 힘을 주면 여러가지 위험이 따르다. 참선에서는 무리하게 배에 힘주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

④호흡은 앉아서만 하는가?: 호흡은 앉아서 시작된다. 앉아서 하여야 힘을 얻기 쉽다. 그러나 차차 익어감에 따라 서서 하기 도 하고 좀 더 익숙해 지면 걸어다니면서도 하고 누워서도 할 수있게 된다. 호흡은 앉아서 시작하여 걷고 눕고 하는 어느 동작에 서도 한결같이 되도록 확충하여 나가는 것이 비람직하다.

⑤삼매가 현전하기를 기다리지 마라.: 좌선에 있어 호흡법은 이것이 선을 하는 데 조도로서 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개중에 는 호흡으로 어떤 삼매의 힘이나 신기한 현상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 삼매에 들고 망념이 끊어져 의식차원이 높아지는 것은 공부 에 따른 자연적 결과이다. 그런데 호흡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기다린다는 것은 도리어 공부의 근본을 망각한 것이 되고 망념을 일 으키거나 속효심을 내고 치구심을 내어 참선하는 기본자세와 어긋나게 된다. 주의할 일이다. 참선에 있어 호흡은 언제까지나 조 도 방편이다. 호흡을 목적으로 삼고 다시 구하는 것이 있다면 외도의 소견이다.

⑥호흡하는 마음 상태: 앞서 말하여 온 바에 따라 여법하게 자세를 바로하고 호흡을 바로하여 나아가면 저절로 마음이 고루 어 진다. 번뇌가 쉬고,마음이 밝고,경쾌하게 된다. 수식관을 하는 중 호흡하는 수효를 세는것을 멈추고 오직 생각으로 호흡을 함 께 하여가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그 마음은 사뭇 맑고 담담해 간다. 이런 때 담담하다는 생각이나,맑다 하는 생각이나, 고요하다 는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바로 망념이다. 오직 호흡을 정밀히 관하여 망념이 쉬게 하여야 한다. 고요하고 말끔한 정신끼 있는 마 음 상태 이것이 좌선하는 마음상태다. 좌선규식이 자리가 잡히면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화두를 들어 마음을 잡두 리해 나아가면 자성을 깨치게 될 것이며,설사 화두가 아니더라도 선지식의 바른 지도를 받아 말끔한 정신끼(惺)와 고요(寂)를 함 께 닦아가면(等持) 대도의 문이 열리게 된다.

⑦좌선에서 일어날 때: 자각선사의 좌선의에 이르기를 [만약 좌선하다가 일어나고자 하면 몸을, 천천히 움직여서 평온하게 일어나라. 결코 갑작스레 움직이지 마라.] 정에서 나온 뒤에는 항상 방편을 지어서 정력을 호지하기를 어린아기를 다루듯이 하라 . 그러면 정력을 쉽게 이룰 것이다.]하였는데 이것을 올바로 행하자면 무엇보다 호흡을 정밀히 하는 기본적 좌법이 몸에 배어야 하는 것이다. 좌선에서 일어날 때는 먼저 수인(手印)을 풀어 무릅 위에 놓고 호흡을 크게 3,4회 토한 다음 몸을 좌우로 서서히 움직인다. 그리고 가부좌한 다리를 일으켜 세워 몸 자세를 편하게 하고 조용히 일어선다.


3. 참선의 올바른 호흡방법

참선을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안정시켜 진리 그 자체를 보는 수행방법입 니다. 법 자체를 직접 보고 자신의 원래의 참모습을 찾는 참선은 일상적으 로 항상 하면서도 의식하지 못하는 호흡을 한결같이 하여 의식의 안정을 취 하는 것이므로 무엇보다고 호흡방법이 중요합니다. 호흡을 하면서 끊임없는 번뇌망상을 잠재우고 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맑고 청정한 깨달음의 성품 을 발견해나가는 것이 참선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호흡방법은 깨달음 의 성품을 보는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좌선입정중중의 호흡에 대해서는 풍(風), 천(喘), 기(氣), 식(息),의 네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식의 호흡방법이 올바를 좌선방법입니다. 즉 숨소리도 없고 거칠지도 않고 숨쉰 다는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하는 호흡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먼저 정신을 아랫배에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호흡을 한두번 토해낸 다음에 이어 서 서히 들이쉽니다. 고르고 깊은 호흡이 되도록 힘쓰며 다 들이쉰 다음에는 잠시 멈추었다 서서히 코로 토해냅니다. 특히 호흡할 때는 무리해서는 안되 며 생각과 힘이 호흡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호홉의 속도는 각자의 편한 속도로 맞추되 처음의 의식적 호흡에서 무의식적 호흡으로 바꾸어가야 합니 다. 숨을 들이쉴 때는 비교적 천천히 하면서 내쉴 때는 단전에서 배로 가슴 으로 향해 코로 토해냅니다. 숨은 단전까지 들이마셔야 하지만 억지로 힘을 주지 말아야 하며 들이쉰 숨도 부자연스럽게 오래 머무르게 하거나 빠르게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호흡방법을 계속하면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다가 점 차로 안정을 찾게 됩니다. 그리하여 호흡에 집중하여 참선을 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 스스로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올바른 호흡이 되므로 정신 이 점차 안정되게 됩니다.


4. 방하착의 의미는

방하착(放下着)은 손을 내려 밑에 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일상적인 단순한 행동을 나타내지만 선가에서 화두로 쓰였습니다. 원래는 <오등회원 (五燈會元)><세존장(世尊章>의 일화에서 방하착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흑 씨범지(黑氏范志)가 합환(合歡)한 오동꽃을 받들어 세존께 공양하자 부처님께 서 범지를 불러 '방하착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석가모니부 처님께서 방하착을 단순히 손을 내려놓으라는 의미에서 범지에게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꽃을 공양했다는 집착된 마음마저 내려놓으라는 말씀 일 것입니다. 이러한 방하착의 의미가 선종에서는 막다른 질문으로 던저져 ㄲ달음으로 직입할 수 있는 실마리인 화두로 쓰였습니다. 조주선사를 찾아 간 한 선사가 묻길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을 때는 어찌합니까' 하니 조주 선사께서는 '방하착하라' 하셨습니다.

선사께서 되물어 '이미 한 물건도 가져 오지 않았는데 또 무엇을 내려놓으란 말입니까' 하자 조주선사께서 '방하하지 말고(내려놓지 말고) 다시 지고 가거라' 하셨습니다. 그때 선사는 크게 깨달 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방하착의 의미는 언어를 떠난 의단이므로 말로 풀 수 없는 것이나 굳이 세속적인 말을 사용하여 풀이한다면 이미 한 물건은 물 건 그 자체에 공성인 법성을 담고 있으므로 내려놓을 것도 가져 갈 것도 없 다는 뜻입니다. 또한 원만하고 원융무애하므로 내려놓을수도 가져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사는 이미 없는 물건을 내려 놓으라고 하고 다시 지고 가 라고 하는 방하와 불방하의 의미 속에서 진정한 한 물건에 대해 깨친 것입니 다. 그러므로 선을 닦는 불자들은 화두를 받아 의단을 낼 때 한 물건이라도 어떠한 한 물건인지 논리적 의단에서 화두를 잡아야 합니다.


5. 참선시 망상은 어떻게 하나

처음 참선을 할 때에는 깨달음을 위한 문제가 주어집니다. 이 문제를 바 로 화두(話頭)라고도 하고 공안(公案)이라고도 합니다. 화두와 공안의 특징 은 깨달음이란 불도수행의 목적이자 진리 자체의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방편 적인 비유나 이것저것을 비교분석하는 분별심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는 것입 니다.

화두나 공안은 탐하고 싶은 탐심과, 탐하려는 대상이 원만히 이루어지 지 않을 때에 화가 끓는 진심과, 어리석은 무지를 낳는 치심을 가라앉히고 원래 갖춘 청량한 불성이 드러나게끔 하는 근본질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할 때에는 화두나 공안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훈습된 나에 대한 집착과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집 착으로 쉽게 번뇌망상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경우에 는 더욱 더 망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처음 참선수행할 때에는 더욱 번 뇌망상이 많이 일어나서 참선공부가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참선수행 은 불도의 참다운 이치인 진여의 세계 속으로 바로 들어가는 길이므로 수행 방법만 옳게 유지한다면 망상 또한 쉽게 가라않습니다. 대개 망상은 탐. 진. 치의 삼독심과 과거에 대한 회상과 집착, 또는 사리에 맞지 않는 환상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계속 망상이 들끓어 수행에 장애를 주면 일단 불교교학적 측면에서 마음과 의식과 분별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먼저 공부 하고 참선공부를 해도 좋은 것 입니다. 중생이 범부로서 깨닫지 못하고 계 속 번뇌를 낳는 미혹에 머무르는 것은 법에 대한 무지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 문입니다. 불법에 대한 공부와 마음을 닦는 참선수행을 함께 한다면 오히려 지혜가 밝아져 사리분별의 망상을 쉽게 잠재울 수 있을 것입니다.


6. 간화선/묵조선의 차이점?

마음을 통일하여 잡념을 일으키지 않아 자기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견성 (見性)이 불교의 궁극목적이므로 선은 자신의 본성에 의지하고 귀의하여 부 처님과 동등한 입장이 되고자 하는 수행인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선가에 서는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子)와 경전의 가르침 외에 달 리 전한다는 교외별전(敎外別傳)과 직접 사람의 마음을 더듬어 들어간다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을 도의 내용으로 표방한 것입니다.

선가의 초조 달마대 사로부터 혜가, 승찬, 도신, 홍인선사를 걸쳐 6조 혜능대사 때에는 선사상의 전성기를 이룹니다. 혜능 이후에 법통은 회양, 마조, 백장, 황백, 다음에 임 제선사로 이어지는데, 임제선사는 처음으로 수선법의 공안을 제자들에게 주 었다고 합니다.

간화선(看話禪)은 수행방법에 있어서 공안(公案)을 참구하는 선수행이며 묵조선(默照禪)은 묵념부동의 좌선을 닦는 선수행입니다. 선의 실천에는 지혜와 수행이 일치해야 하므로 체험을 통하지 않으면 교리적 이해 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임제선사의 공안은 간화선의 초기적 형 태입니다. 간화선은 수행의 철저한 실천을 한결같이 하기 위해 의식활동의 강한 부정을 던지는 의단(疑團)을 줍니다. 밖으로 향애 있던 의식을 안으로 돌려 본질적 본성을 알게 하는 의단을 공안을 통해 선수행으로 연결하는 것 이 간화선의 실천입니다. 이에 반해 묵조선을 강한 정신적 전환동기보다는 오직 마음을 쉬게 하는 수행방법입니다.

마음을 쉬게 하여 끊임없이 집착하 는 기능을 없애게 합니다. 즉 끊임없이 사량분별하여 대상에 경계를 짓는 의식을 맑은 마음으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간화선과 묵조선은 모두 불성을 발견하기 위한 수행방법이며 실천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7. 화두란?

화두(話頭)는 수행자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과제로, 강한 의심에서 정신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의단(疑團)입니다. 화두의 원래 의미는 말머리라는 뜻 이지만, 공문서를 뜻하는 공안(公案)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의단으로 주 어진 화두는 잘못된 인식의 습관으로 생긴 번뇌망집을 깨우치는 작용을 하면 서도 진리의 요체를 담고 있으므로 미혹한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화두는 미혹한 생각도 마음도 표현도 끊긴 자리에 묘하게 드러나는 진 리의 묘유(妙有)를 상징하므로 생각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 다. 진리를 분별하는 생각을 버리고 진리 그 자체의 이치를 알려고 하는 각 성에서 화두는 풀리는 것입니다. 대개 화두의 내용은 언어로 이해하기 어렵 습니다. 몇 마디 말에 핵심적 사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종의 3조 승 찬대사와 2조 혜가대사 사이의 유명한 선문답에서 화두의 예를 볼 수 있습니 다. 승찬선사께서 혜가선사를 찾아가 '혜탈의 법을 가르쳐 주십시요'라고 청 하니 혜가선사는 '누가 너를 구속했는가'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이에 승찬선 사는 '사람은 구속됨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혜가선사께서 '그렇다면 어째 서 다시 해탈을 구하는가' 고 하였습니다. 이 대화 속에서 승찬선사는 깨달 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누가 너를 구속했는가'와 같은 질문이 화두 에 해당됩니다.

승찬선사께서 마음의 구속함이 없는데 해탈법을 물으니 혜 가선사께서는 의식의 전환적 차원에서 '누가 너를 구속하였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렇듯 화두는 불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의구 심을 이끌어내는 질문인 것이비다. 그러므로 화두를 받는 것은 교학과 수행 을 함께 하면서도 알 수 없는 의문을 선지식에게 물어 그 해결책을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8. 화두에는 정답이 있는가?

선수행을 하면서 주어지는 화두는 부처님의 깨달으신 내용이고 우주만유의 이치이며 여러 조사와 선사께서 부처님의 종지를 받은 진리이므로 아무리 언 어로 표현한다 해도 분명한 표현은 불가능합니다.

화두의 내용은 무한의 표 현이며 원만자재한 구경의 경지를 담고 있으므로 범부들의 삿된 소견으로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또한 그 대답을 선각자가 언설로 표현한다고 해도 진 리를 분별하려는 생각을 지닌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석 가모니부처님 당시로 거슬러올라가면 그 정도와 깊이의 차이는 있지만 무수 한 화두가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께 각기 다른 관점에서 각 기 다른 질문을 하면서 진리를 구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이런 다 양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그들의 근기가 각기 달라 질문도 다르다고 인정 하시고 근기에 맞는 대기설법을 하셨습니다. 묻고 대답하는 과정을 서술한 대부분의 경전에서 우리는 화두적 요소를 많이 발견합니다. 특히 후일에 거 염화(거염화)의 화두라 불리는 부처님과 가섭존자 간의 염화미소(염화미소)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설법하실 때 꽃 한 송이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그 뜻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오직 가섭존자 만이 부처님의 뜻을 알아 빙그레 웃음으로써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염화미소의 일화 속에 하늘에서 내린 꽃 한 송이가 화두에 속하며 이 꽃 한 송이가 담은 화두의 뜻을 부처님의 마음에서 가섭존자의 마음으로 이어졌으므로 언 어가 끊어진 이심전심의 전달인 것입니다. 가섭존자의 미소는 꽃 한 송이가 담는 일진법계(一眞法界)의 의미와 진리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 화두의 내용은 미소가 담는 의미만큼 쉽게 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9. 견성성불이란?

자신이 지닌 마음의 불성을 철저하게 보는 것을 견성(見性)이라하며, 마음 의 부처와 같은 성품을 봄으로써 스스로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 견성성 불(見性成佛)입니다.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중생의 성품은 중생과 부처가 둘 이 아닌 성품이며, 일체중생과 일체체불의 본성이며, 근원의 자성입니다. 이 성품은 원래 고요하고 청정하며 보편타당한 진리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마음 을 닦으면 자연스럽게 드러나며 그 자리에서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성취하 게 되는 것입니다.

견성성불을 표방하는 선가에서는 인간의 근원적 정신을 추구해나가는데는 문자나 언설은 한낱 수단에 불과하다고 하여 경전에서 말 하는 교설을 방편 이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즉 부처님의 종지는 경전의 언 어적 표현을 뛰어넘은 절대주체의 자아인 자성청정심의 성품에서만 볼 수 있 는 경지라는 것입니다. 선가에서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을 표방한 것 은 문자를 사리분별하는 차원을 넘어 원래 청정한 성품의 진면목을 보라는 의미이지 부처님 말씀을 서술한 경전 자체를 부정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범 부들은 목전에 진리가 있지만 진리를 진리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번뇌망 상으로 길들여진 훈습에 의해 사리분별하기 때문입니다.

사리분별심은 계속 적으로 연기하고 윤회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므로 선가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마음을 직접 보고 닦는 직지인심의 견성성불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러므로 본래 구족된 진실한 자아를 닦는다 하여도 원래 자아는 없는 것이므 로 부처님의 근본교설 공부도 충실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견성성 불은 지혜가 바르게 서있는가를 끊임없이 경전이나 큰스님을 통해서 묻고 되 묻는 꾸준한 수행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10. 심우도란?

심우도(尋牛圖)란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하며 마음을 닦는 일을 소먹이는 일에 비유한 그림입니다.

십우란
1) 심우(尋牛)
2) 견적(見蹟)
3) 견우(見牛)
4) 득우(得牛)
5) 목우(牧牛)
6) 기우귀가(騎牛歸家)
7) 망우존인(忘牛存人)
8) 인우 구망(人牛俱忘)
9) 반본환원(返本還源)
10) 입전수수(入廛垂手)를 말합니다.
선 종에서 자기의 본심을 발견하여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를 10가지의 비유로 설 명한 것으로, 특히 본심을 소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첫째 심우는 소를 찾는다는 뜻으로 처음 보리심을 내는 것입니다. 소의 자취를 보고난 후 소를 보고 소를 얻어서 소를 길러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을 담은 둘째 견적과 셋째 견우와 넷째 득우와 다섯째 목우와 여섯째 기우귀가는 수행의 과정을 나타냅니다. 일곱 번째 소를 잊고 사람만이 있는 망우존인은 소승불교인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린 후에 보리를 성취하는 단계를 나타냅니다. 여덟 번째 사람과 소를 모두 잊는다는 인우구망은 대승을 따르는 불교인이 자아에 대한 집착과 자아의 대상인 법에 대한 집착을 모두 버린 후에 보리를 성취하는 단계를 나타냅니다.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오는 아홉번째 반본환원은 열반에 들어가는 단계를 나타내며 세속으로 들어가 방편을 베푸는 열번째의 입전수수는 방편구경(方便究경)의 단계를 나타냅니 다.

마음을 수련하는 일을 소 기르는 일에 비유한 것은 선종에만 있었던 것 이 아닙니다. <아함경> 중에서는 목우12법(牧牛十二法)을 설하였고 <대지 도론>에서는 십일사(十一事)를 밝혔습니다. 소를 비유로 하는 설법이나 그 림 또는 공안은 마음을 찾고, 찾은 마음을 닦아 진정한 해탈을 얻고 그 해탈 정신을 다시 대중에게 회향하는 보리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심우도(尋牛圖)’의 의미

사찰에 가면 법당 벽화로 심우도를 볼 수 있다. 낙산사의 고향당, 백담사의극락보전에도 심우도를 찾아볼 수 있다. 사찰을 찾을 때 반드시 이 심우도의 의미를 살려보는 것도 탐방의 의미를 더욱 살릴 수 있다. 심우도의 의미를 설악불교에 실린 글을 통해 살펴본다.
소는 도가에서는 유유자적, 유가에서는 의(義)를 상징했지만 불가에서는 ‘인간의 본래 자리’를 의미했다.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비유한 ‘심우도’가 이같은 의미를 대표적을 보여준다.

그만큼 소는 다른 그 어떤 동물보다 불자와 친숙하다. 대부분의 법당 벽화에 ‘심우도’가 그려져 있고, 불경 곳곳에 소를 비유한 상징들이 들어 있다.

선사들도 이러한 소를 수행의 채찍으로 삼아왔다. 고려때의 보조국사 지눌은 호를 목우자(牧牛子)라 했다. ‘소를 기르는 사람’ 즉 참다운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뜻이다.

만해 한용운 선사도 만년에 서울의 자택을 심우장(尋牛莊)이라 했다.

‘불성을 찾기에 전념하는 곳’이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심우도’는 동자와 소를 등장시켜 참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을 묘사한 그림으로 이때 소는 인간의 진면목인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수행단계를 10단계로 나누어 표현하기 때문에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심우도는 중국 송나라 때 보명(普明)스님의 심우도와 확암스님의 십우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이 두종류의 그림이 함께 그려졌으나 최근에는 확암스님의 십우도가 법당벽화로 주로 그려지고 있다.

심우도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심우(尋牛) 처음에 사람이 들에서 소를 찾는 모습으로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사람에게 본래부터 갖춰진 원성(圓成)인 심우(心牛)를 잃어버린 뒤 그것을 찾는 것.

견적(見跡) 소 발자국을 발견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서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는 것.

견우(見牛) 수행자가 멀리서 소의 모습을 어렴풋이 본 것을 묘사한 그림으로 문법수학(聞法修學)의 공(空)에 의해 마음의 소를 발견한 것을 상징화하는 불화.

득우(得牛)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낀 모습으로 아직 번뇌와 망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므로 더욱더 열심히 수행전진해야 함을 표현한 것.

목우(牧牛) 소에 고삐를 물리고 돌아오는 모습으로 삼독의 때를 지우는 보임(保任)의 단계, 즉 깨딸음 뒤에 오는 방심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경책한 것.

기우귀가(騎牛歸家) 동자가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돌아오는 모습으로 드디어 망상에서 벗어나 본성의 자리에 들었음으로 피안의 세계에 나아가게 된다는 것.

망우존인(忘牛存人) 집에 돌아왔지만 소는 간데없고 오직 자기 혼자만 남아있음을 묘사, 즉 본각무위(本覺無爲)로 들어왔으나 쉬지 않고 수련해야한다는 뜻.

인우구망(人牛俱忘) 자가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텅빈 원만상. 주객분리 이전 상태로 정(情)을 잊고 세상의 물(物)을 버려 공(空)의 세계에 이르렀음을 나타낸 것.

반본환원(返本還源) 티끌 하나도 없는 수록산청(水綠山靑)의 광경으로 사람의 본심은 본래 청정하여 아무 번뇌가 없어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보게 된 것.

입전수수(入전垂手)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 모습. 중생들에게 복과 덕을 베풀어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


11. 0 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선가에서는 깨달음의 도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문제의 실마리를 깊게 읽 는 공안을 줍니다. 공안은 화두라고도 하며 고칙(고칙)이라고도 합니다. 0 은 일원상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공안으로 선을 닦는 사람들에게 공부의 내 용을 주어 심오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도리에 대한 핵심문제입니 다. 또한 0은 불교의 가르침의 내용이자 깨달음을 보인 선지식의 가장 수승 한 준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공안에는 경전에서 취한 것과 조사들의 어록에 서 취한 것, 공안을 설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분별하는 설주적인 것이 있습니 다. 또한 초하룻날이나 보름날, 진산날(주지취임), 퇴산날(주지사직)에 대중 을 법상에 모아놓고 엄숙한 의식 아래 종지를 설법하는 상당공안과 훈계적 설법을 하는 소참공안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글자로 된 공안, 뜻을 담는 공 안, 참구적인 공안 등등 무려 1700개나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공안은 말로 써 설명되거나 이해되는 내용이 아니면서도 일상생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결국 화두는 성품의 원래 편만하고 자유자재하며 맑고 밝은 그곳을 향해 가 므로 생각으로 어림잡을 수 없으면서도 내가 지니고 있는 자성을 표현합니 다. 이런 의미에서 0자 화두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실마리에서 근본을 추구하는 공안인 것입니다.

전일한 마음과 정신집중의 한결같음에서 그 냉 요은 풀릴 것입니다. 다만 참선수행에서 행하는 화두는 본래 있지만 있는 것을 계속 수행하다 보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말과 이론을 떠 난 불가사의의 진리를 담습니다. 0자의 의미를 아는 길은 부처님꼐서 깨달 으신 원융무애한 법을 믿어 여러 선사나 조사께서 득오하신 공안의 진리를 믿고 기필코 알려는 발심을 깨달음의 요체인 0에 의지해 본래모습으로 통일 시키는 것입니다.


12. 참선시 병이 생긴다는데

참선을 할 때에는 좌선작법의 요령에 따라 수행을 해야 합니다. 좌선작법 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올바른 스승 밑에서 공부하는 것이 가 장 중요합니다. 상기병은 흔히 올바른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혼자서 책을 참구하거나, 경험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에게 지도를 받았을 때나, 지도 는 받았으나 실행이 안된 경우 호흡이 고르지 못해 심신의 안정을 잃어 생기 는 병은 말합니다.

호흡을 통해 안정을 취하면서 의정을 내어 문제의 핵심 으로 도달하는 수행이 참선수행인 만큼 호흡을 무리하게 한다거나 자세를 잘 못 취했을 때는 공부하는 화두를 놓치게 됩니다. 참선은 호홉의 리듬과 신 체의 리듬과 화두를 일치시키는 정신통일에서 나오는 무한한 힘과 안정을 근 본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좌선할 때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일치시키는 정신 통일에서 나오는 무한한 힘과 안정을 근본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좌선할 때 자세와 호홉과 화두를 일치시키는 과정을 올바르게 밟게 되면 상기병은 생기 지 않습니다. 상기병이 일단 생기면 머리가 아프거나 몸이 무겁고 끊임없는 망상이 화두를 괴롭히게 됩니다. 이때는 화두를 잠시 놓고 고요히 호흡하면 서 바른 자세를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좌선을 행하지 않을 때에는 몸을 가 볍게 움직이면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특히 상기되었 을 ㄸ는 상기되었다는 집착으로 오히려 더 큰 장애를 자져오는 경우도 있으 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상기병은 한 번 생기면 치유될 수 없는 치명적인 병 은 아닙니다. 처음에 좋은 선지식을 만나 지도를 받고 의정을 내는데도 바 른 이치로 내어 화두를 한결같이 하면 결코 상기병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참선을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도중에 일어나는 일체의 모든 경계에 마음 을 두어서는 안되며 오직 의식이 하나로 흐를 수 있도록 바른 자세와 호흡과 화두에 전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13. 참선과 믿음은

참선수행은 불도수행의 수승한 방법 중에 하나이지반 그렇다고 해서 불교 의 진리가 무엇인가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의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모 르고 하는 수행은 아닙니다.

옛날 인도에서 중국으로 선을 전한 달마대사께 서도 불교의 교리적 수행을 다하셨고 여러 선사들도 대대로 <능가경>이나 <금강경>을 종지로 하여 정법을 전달하였습니다. 다만 교외별전이라 하여 가르침 이외에 달리 마음을 전한다는 선가의 전통적 사상은 문자에 너무 매 달리지 말고 마음을 전한다는 가르침의 요의를 ㅌ찰하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 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잘못 받아들여 일부에서는 교학은 무시하고 다 만 참선만을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하여 불교발달에 엄청난 폐단을 끼쳤습 니다. 깨달음의 실천수행도 진정한 깨달음의 내용을 먼저 듣고 배워야 자신 의 수행과 일치하는데 의심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 달으신 연기의 내용과 공의 논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 무엇고'를 아무 리 찾은들 진정한 의정이 나올 리 없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인 팔만사천 법 문은 하나의 도리를 설명하지만 범부들의 번뇌에 덮힌 어지러운 마음으로는 알기 힘든 것입니다. 불교는 종교입니다. 종지를 세운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보편타당하고 걸림이 없는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보편타당한 진리를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수행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지 아무 근거도 없고 관계도 없는 수행은 아 닌 것입니다. 좌선하고 화두를 들었다면 그 속에는 이미 부처님 가르침의 종지인 청정한 마음에 의지한 것입니다. 경을 읽으며서 마음을 닦아도 참선 이고 염불을 하면서 마음을 닦아도 참선이고 바라밀행을 하면서 일여한 마음 을 닦는 것도 참선인 것입니다.


14. 참선이 강조되는 이유는

참선은 본래 석가모니부처님 당시부터 행해져온 불교의 전통적 수행법 가 운데 하나로서, 불교수행의 기본원리를 계. 정. 혜의 삼학으로 나누어본다면 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즉 계가 일종의 행위규범으로서 올바른 도덕률에 따라 행실을 바르게 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적절히 조율하는 것이고 혜가 올 바른 관찰법에 의해 세계와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의 눈을 기르는 것인데 비 해 정은 말 그대로 자세나 호흡 등의 조절을 통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번뇌망 상을 잠재우는 수행법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승되고 있는 참 선은 이와 같은 부처님 당시부터의 선정수행에 중국에서 발달한 선종의 사상 적 측면이 첨가된 것으로서, 참선수행 그 자체가 마음을 관조하여 곧바로 우 주와 인생에 스며 있는 절대의 진리를 발견하고 부처를 이루는 길이라고 하 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참선수행이 다른 여러 불교의 수행법들 가운데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이유는 특별히 중국에서 선종이 발달한 원인에 서부터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즉 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에 의해 창시 된 이후 인도와 중국을 거치면서 이미 2,0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발달에 발 달을 거듭한 결과 교학사상이라는 측면에서 엄청나게 방대하고 세밀한 것이 되었습니다만, 그와 같은 지식의 축적이 불교 본연의 목적, 다시 말해 진리의 자각과 윤회로부터의 해탈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하는 심각한 고민이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불립문자를 표방하며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참구하여 깨달음의 본질에 접근하는 실제적인 수행이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강조된 것입니다. 아무튼 참된 마음의 여유가 좀처럼 드문 현대사회 를 생각할 때 참선수행의 필요성은 오늘날에도 대단히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15. 참선과 명상의 차이점은?

인도는 먼 옛날부터 인간의 내면세계에 깊이 침잠하여 평소 현실생활에서 체험할 수 없었던 초월적 경지나 진리 등을 탐구하는 요가나 명상의 수련이 널리 행해지던 나라로서, 석가모니부처님이 창시하신 불교도 넓게는 그와 같 은 문화적 토양 위에서 성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러한 인도의 정신문화는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계승되어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크리슈나 무르티나 라즈니쉬, 마하리쉬 등의 성자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을 전파하며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참선수행과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도 유행하고 있는 요가나 명상수련은 그 뿌리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며 유사한 면도 대단히 많이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인도라는 문화적 전통에 기반하여 성장했다고는 할지라도 인도의 전통사상들 과는 분명히 다른 사상과 수행법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이들 인도적 전통에 서 출발한 여러 수행법들이 그대로 불교 고유의 수행방법인 참선과 같은 것 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호흡을 조절하는 방법이나 앉는 자세 등에 흡사한 점들이 많고 정신의 집중을 중요시하는 면 등이 비슷한 것같아도 참선과 요 가수련 사이에는 엄격히 불교와 인도의 다른 사상들 만큼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흔히 불교사상의 독자적 특성이 삼법인(三法印)이라 하여 모든 것 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고 세상만물에는 독자적인 실체랄 것이 없 으며 탐욕과 무지에 뒤덮혀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현실은 괴로 움일 수밖에 없다는데 있는 것처럼 참선수행도 그와 같은 인식을 전제로 하 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과정상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이나 경지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절대시하지 않는 것이 참선의 독특한 면이라 하겠습니다.

'話頭·參禪'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불과 선의 관계  (0) 2007.01.17
만공스님의 나를 찾는 법 - 참선법(參禪法)  (0) 2007.01.15
禪定入門의 방법  (0) 2007.01.15
활 구 참 선 법  (0) 2007.01.15
참선수행의 기초  (0) 2006.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