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

임제록강설/시중16/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8. 29. 21:55

시중  16

 


13-5 본래 일이 없다.

道流 大丈夫兒 今日方知本來無事로다 祇爲儞信不及일새 念念馳求하야 捨頭覓頭하야 自不能歇하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대장부라면 본래 아무런 일이 없는 줄을 오늘에야 알 것이다.

다만 그대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생각생각 내달려 구하면서 자기 머리는 놔두고 다른 머리를 찾느라 스스로 쉬지를 못하는 것이다.”


강의 ; 불교에서 대장부란 출가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영웅호걸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뜻한다.

인생에 대한 올바른 견해란 편견이나 변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다.

흑백논리에 집착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아주 없다거나 영원히 존재한다거나 하는 단견(短見)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다.

유·무 단·상(斷常)의 삿된 견해에서 시원스레 벗어난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본래로 할 일이 없음을 안다.

닦을 것도 깨달을 것도 처음부터 없음을 안다.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열심히 자신을 두고 밖을 향해서 찾는다.

마치 자신의 머리를 두고 다른 머리를 찾는 격이다.

설사 3아승지겁 동안 6바라밀을 닦고 참선을 하고 고행을 하여 머리를 찾았다 하더라도

이미 머리가 있는데 그 머리를 어디에다 쓸 것인가.

쉬어라, 쉬어. 본래로 아무런 일이 없느니라.

이렇게 하여 아무런 일이 없는 사람이 대장부니라.

본래무사(本來無事). 사두멱두 자불능헐(捨頭覓頭 自不能歇)은 이 단락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다.

한번 더 되새겨야 한다.


如圓頓菩薩 入法界現身하야 向淨土中하야 厭凡忻聖이라 如此之流 取捨未忘하고 染淨心在 如禪宗見解 又且不然하야 直是現今이요 更無時節이니라 山僧說處 皆是一期藥病相治 總無實法이니 若如是見得하면 是眞出家 日消萬兩黃金하나니라

“저 원교보살 돈교보살[圓頓菩薩]은 법계에 들어가 몸을 나타내어 정토에 있으며 범부를 싫어하고 성인을 좋아한다.

이런 무리는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

더럽다, 깨끗하다 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종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지 달리 다른 시절이 없다.

산승이 말하는 것은 모두가 병에 따라 그때그때 약을 쓰는 일회적인 치료일 뿐이다.

실다운 법이라고 전혀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만 있다면 참된 출가인이다.

하루에 만 냥의 황금을 쓸 수 있느니라.”


강의 ; 교리에서 말하고 있는 원교(圓敎)나 돈교(頓敎)의 대승보살들은 진리의 세계에서 몸을 나타내고,

청정한 국토에 살면서 범부는 싫어하고 성인들만 좋아한다고 한다.

설사 그런 경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은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리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유·무·단·상(有無斷常)에서 벗어난 참되고 바른 견해가 아니다.

중도정견(中道正見)이 아니다.

중도정견이 못되면 부처고 보살이고 아무 것도 아니다. 모두 가설이다.

이왕 중도란 말이 나왔으니 좀 더 부연하겠다.

흔히 일체법이 공(空)이기 때문에 연기(緣起)다.

어떤 작은 물질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계를 맺을 때에만 존재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다.

연기는 곧 여래(如來), 여래는 곧 공이다.

연기이면서 공이요 공이면서 연기인 모든 존재의 원리가 곧 중도라고 한다.

쌍차 쌍조(雙遮雙照), 쌍민 쌍존(雙泯雙存)이다.

즉 유무 선악의 상대적 견해를 함께 부정하고 상대적 견해를 함께 긍정하며,

상대적 양면을 함께 수용하고, 긍정과 부정을 함께 받아드리는 것이 곧 중도다.

모든 경전과 어록들이 이 중도의 공식으로 설해졌다.

중도를 설명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까지만 말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경전의 말씀과 어록의 글들을 이끌어 불조가 모두 중도를 말했다고 증거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쩐지 좀 부족하고 구체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선사의 말씀은 매우 구체적이다.

불교인들의 일상 덕목인 육바라밀이나 불공하는 일이나,

불사를 짓는 일이나 예불을 드리는 일 등등을 열거하며 그 일의 중도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자비를 행하되 나와 상대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라.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라.

보시는 베푸는 바 없이 베풀라.

가지는 바 없이 계행을 가지라.

우리들의 육신은 없는 줄을 알고 모양을 잘 갖추라.

법은 본래 설할 것이 없음을 알고 설법하라.

절이란 물에 비친 달빛과 같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절을 세우고 도량을 건립하라.

텅 빈 세계지만 잘 장엄하라.

환영이요 헛것인 공양구를 부처님께 정성 다해 올려라.

그림자요 메아리인 여래에게 공양을 올리라.

마음의 극락인 줄 알고 왕생을 발원하라.

꿈속의 불사인줄 알고 크게 일으켜라.

모두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알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중도의 원리로 존재하므로 중도적 원리대로 살라는 것이다.

세속적 논리로 보면 모두가 모순된 말이지만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철저히 중도적 길을 제시하고 있다.  

산승의 설법은 모두가 병에 따라 약을 쓰는 것과 같다.

즉 방편이다.

실다운 법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알아야 진정한 출가자의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하루에 만 냥의 황금을 소비하더라도 상관없다.

빚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말을 �아가서 말 속에 대단한 법이라도 있는 것으로 알면 한 방울의 물도 녹이기 어렵다.

직시현금 갱무시절(直是現今 更無時節)이 오늘의 공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