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24/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4:10
 

서장 대 강좌 6- 2 강



  p. 104

  舟峯(주봉)에게 준 편지에 끝에 杜撰(두찬)하여 註解(주해)한 것을 보고 저는 문득 기가 막혔습니다. 如來禪(여래선)과 祖師禪(조사선)을 여기 주봉이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줬는데, 별별 소리를 다 했더라 이것이지요. 여래선과 조사선을 말한 사람들까지도 한 장의 종이에 죄를 적어 함께 귀양을 보내야 합니다.



  공부에 재미를 좀 붙이고 하다보면 도반들끼리 여래선이 어쩌느니 조사선이 어쩌느니 불교의 취미를 잔뜩 가지고 있으니까 별별 그런 자기가 아는 것을 서로 나누고 자랑삼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지 말라.”



  한 7~8년 전에 유명한 소설가가 경허스님의 일대기를 써서 대 히트를 쳤는데요. 그 분이 사실은 불교인도 아니거든요. 경허스님이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 때부터 불교공부를 한 겁니다. 자기의 친구, 불교인친구를 데리고 조계사 앞에 와서 다니면서 볼만한 불교서적을 빼서 달라 하고는 차에다 막 싣는 겁니다. 200권쯤 책을 빼서 “자, 이것을 네가 다 읽고 경허스님에 대해서 쓰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이렇게 했어요. 그 때부터 불교서적을 보기 시작 했는데 보니까 너무 재미있고 신 나거든요. 그 소설을 보면, 전부 자기 불교 아는 것을 자랑해 놨어요. 전부 불교  아는 것을 자랑했는데 우리 같은 프로가 보면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처음 불교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자랑꺼리입니다. ‘세상에 이런 세계가 있는가?’ 그렇게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4권이나 되는 그것을 열심히 다 읽었습니다. 무슨 책인지 아시겠지요? 허허허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일단은 그렇게 하세요. 일단은 그렇게 빠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지요.



p. 105

  보내온 게송을 자세히 보니 이제 자기 견해를 드러내는 이야기지요. 전번 두 송보다는 낫지만 대혜스님한테 자기 소견을 시로 적어서 자꾸 보내나 봐요. 그런데 이제부터는 그만 두십시오. 하하하하하하하. 그런 글 장난 그만하라 이것이지요. 게송을 지어 가고 지어 옴에 무슨 통달할 기약이 있겠습니까? 참정같이 하십시오. 이참정 처럼 해라. 그 분이 어찌 게송 지을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무슨 이유로 도대체 한 글자도 짓지 않았습니다. 법을 아는 사람이 두려울 뿐입니다. 함부로 못 짓는다 이 겁니다. 우리 같이 겁 없는 사람이나 와서 이렇게 떠들지, 진짜 제대로 아는 사람 같으면 입을 못 댄다고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간혹 조금만 드러내면 저절로 저의 가려운 곳을 긁으니 ‘산을 나서는 게송’에 이르기를 이것은 이참정이 지은 게송인데 [出山相] 산에서 내려가는 모습을 게송으로 지은 겁니다. 이것은 누가 산에서 내려가는 모습인가 하니 부처님이 6년 고행하시고 도를 통하고 산에서 내려가는 모습. 중생 교화를 위해서 산에서 내려가는 모습입니다. 옛날에 안목이 있는 분들은 “부처님이 산에 들어갔다.” 거기에 대해서 자기의 안목으로 피력하고, 또 “부처님이 산에서 내려갔다.” “고행을 한다.” 이런 사건에 대해서 하~ 얼마나 쪼아대기 좋은 꺼리입니까?



  요즘 나타나는 뉴스가 문제가 아니고, 부처님에 대해서 정말 입 댈만한 꺼리거든요. ‘출가?’ ‘그 출가 꼭 해야 되나?’ 석가모니부처님이 출가를 해서 수행을 해서 도통을 했다 하니 이 사건에 대해서 출가했다 이겁니다. 그것을 여러분들 입장에서 ‘글세, 그거 뭐 꼭 해야 되나?’ ‘그것 어쭙잖은 짓 아니야?’ 이 정도라도 말 붙일 수 있잖아요. ‘나는 집에서도 공부 잘 하는데...’ 이렇게  붙일 수도 있잖아요. 간단하게 그렇게 삼행시 정도는 다 할 줄 안다는 말입니다. 대개 入山頌(입산송). 出山頌(출산송). 傳法頌(전법송) 이런 것들이 좀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산에 들어갔다는 것하고, 산에서 나왔다고 하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조사스님들이 많이 입을 댑니다. 입을 댄다는 것이 근사한 게송을 하나를 써서 붙이는 것인데요. 



“이르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 문득 대면하여 속인다.”밑에 원문이 있습니다. 는 말을 총림에서 눈을 열어주는 약으로 삼습니다. 한 거사의 게송인데 이것이 총림에그냥쫙 퍼졌습니다. 쫙 퍼져서 총림에서 참선깨나 한다는 사람들에게 눈을 열어주는. 눈을 열어주는 약으로 삼을 정도다. 이겁니다. 이참정이 거사인데도 그 정도입니다. 거사다. 승려다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어쭙잖은 짓입니다만, 이왕 말이 났으니까 全文(전문)이 밑에 소개 되었으니까 주해를 봅시다. 근사합니다.


      眼皮盖盡三千界(안피개진삼천계)

      鼻孔盛藏百億身(비공성장백억신)

      箇箇丈夫誰是屈(개개장부수시굴)

      靑天白日莫謾人(청천백일막만인) 그렇게 하고

咄(돌). 꾸짖는 겁니다. “틀렸어”

到處逢人驀面欺(도처봉인맥면기) 이르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 문득 대면하여 속인다.



  부처님이 도를 통해서, 진리를 깨달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설파 했는데, 이참정은 “사기 치지 말라”이랬습니다. 아니 부처님보고... 부처님은 어떤 분입니까? 태자의 지위를 다 버렸지요. 그 이쁜 마누라 자식 다 버렸지요. 그리고 피나는 6년 고행을 하고 도를 통해서 중생 제도 하려고 나가서 법문을 하는데, 이참정이 떠~ㄱ 나타나서“야, 사람 속이지 마. 사기 그만치고 다시 들어가.” 이런 식이라고요 이것이. 부처님보고 “사기 그만 쳐~” 그래가지고 법회고 뭐고 찬물 끼얹어서 완전히 버려놓은 것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가 시공을 초월해서 이것을 짜 맞추면 그런 것입니다. 안 그래요? 이런 연극을 한번 해야 되는데... 한참 열나게 법문 하고 있는데 정말 희생을 치러가면서 도를 통해서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거사가 한분 처~ㄱ 나타나서 “야, 그 사기 치지 말고 그만해, 그만해.” 이래가지고 부처님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어쩔 바를 모르는 모습. 근사하잖아요.


  이것이 禪佛敎(선불교)에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어디 다른 종교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 좀 아셔야 됩니다. 우리 불자님들. 제발 이것 좀 알아주십시오. 어느 종교에서, 그 종교의 교주에게, 아무리 시대가 많이 지났다 손치더라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느냐 이겁니다. 여기 보십시오. 왜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眼皮盖盡三千界(안피개진삼천계). 너나 나나 내[我]눈은 삼천대천세계를 다 뒤덮고 있다.

鼻孔盛藏百億身(비공성장백억신). 콧구멍으로는, 눈구멍으로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덮고, 콧구멍으로는 부처님의 천 백억 화신을 다 콧구멍 안에 다 담고 있어요. 盛藏. 다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箇箇丈夫誰是屈(개개장부수시굴) 개개가 丈夫인데 누가 네 앞에 굴복하겠느냐 이겁니다. 네가 장부라면 나도 또한 장부인데 누가 네한테 굴복하겠느냐 이겁니다.

여기에서 눈이 열려야 됩니다.

  靑天白日莫謾人(청천백일막만인)이러라. 이 밝은 대낮에 사람 속이지 말라. 당신이 도통했고 당신이 진리를 깨달았다면 난들 당신이 통한 도가 없겠으며, 당신이 아는 진리가 나한테는 왜 없겠느냐? 箇箇丈夫라. 개개가 다 장부인데 누가 굴복할 것이냐? 당신이 그렇게 설법한다고 산에서 나와서 “아~ 내가 큰 보물 얻어 왔다”고 여러 사람에게 나누느라고 이렇게 설법하는데, 되도 않은 짓 하지 마라. 그 말에 굴복할 사람 아무도 없다.



  靑天白日莫謾人(청천백일막만인)이러라. 참 근사하잖아요. 이런 게송이 총림. 눈 푸른 납자들에게 눈을 열어주는 약이 됐다 이겁니다. 눈을 열어주는 약! 캄캄하게 눈을 감고 있던 사람에게 ‘눈을 환히 열어주는 약이 됐다’이것은 집에다가 써 붙이세요. 크게 써서 벽에다 붙여놓고... 정말 이것은 우리의 안목입니다. 



  咄(돌). 이 “돌”하는 것은 자기의 앞의 이야기를 전부 부정하는 소리입니다. 부정하고,

  到處逢人驀面欺(도처봉인맥면기)로다. 석가모니도 그렇지만, 나도 가는 곳마다 대면해서 사람에게 사람을 속인다. 사람을 속인다. 이것은 한 번 더 확인 사살하는 식입니다. 靑天白日에 莫謾人하라 했는데 到處逢人驀面欺라. 만나는 곳마다 사람에게 얼굴을 대면해서까지 속이고 있다. 사기치고 있다고 했으니까 완전히 이것은 확인 사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죽여야 여러분들이 사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를 죽여야 중생이 삽니다. 중생이 전부 부처가 돼버려요. 이것은 석가모니를 부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잖아요. 그러므로 해서 모든 중생이 다 긍정됩니다. 다 긍정이 돼요. 다 살아나 버려요. 선불교는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깊이 이해해들어가면 이것이 완전히 마취가 되어서 옴짝달싹 못합니다. 세세생생 이것만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당신이 다른 날에 스스로 볼 것이니, 제가 반드시 說破(설파)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설파 다 해버렸는데요 뭘. 저는 근래에 당신이 문득 바뀌어 이 일을 위하여 매우 힘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편지를 씀에 나도 모르게 장황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겁니다.



p. 107

    13. 부추밀 계신에게 답함 (1)



  이것은 알음알이의 문제라고 하는데, 알음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사량 분별하고, 그 동안 지식이라든지 자기의 경험이라든지 자기 나름의 어떤 조그마한 깨달음이라든지 이런 것이 축적이 되어서 뭔가 아는 것이 너무 많아요. 특히 현대인들은 더 그래요. 현대인들은 아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절 문에 들어서면 神光不昧(신광불매) 萬古徽猷(만고휘유) 入此門來(입차문래) 莫存知解(막존지해). 이런 말이 있습니다.



  神光不昧(신광불매): 신령스러운 광명이 어둡지 아니해요. 신령스러운 광명이 항상 그 광명을 발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등을 밀다가 “참, 법당은 좋은데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하니까 고개 척 돌아보면서 放光(방광)을 하지요. 그것이 신광입니다. 신령스러운 광명이 어둡지 아니하니까 돌아볼 줄 아는 겁니다. 방광을 할 줄 아는 겁니다.



  萬古徽猷(만고휘유)라: 만고에 환히 빛나고 있다. 우리의 안이비설신의는 다 쉬는데, 이놈의 물건은 잠들어도 안 쉬어요. 잠들어도 안 쉬고 꼼짝꼼짝 거리고 있어요. 어디 천리만리 돌아다니기도 하고요.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어떤 깊은 이해와 확신을 가져라. 그 밖의 것은 안이비설신의 가지고는 아무리 노닥거려 봤자 그야말로 그것은 알음알이다. 사량 분별이다. 사변으로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入此門來(입차문래) 莫存知解(막존지해)하라: 이 문에, 진정한 이 불문에 들어오려면 그런 알음알이. 지식 다 버려 라. 그랬어요.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되었는데 꼭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뒤에 나옵니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버리고남으로 해서, 자기 살림살이가 제대로 되는 길이 있지요.



  편지를 보니 젊은 나이에 이 도를 믿고 향할 줄을 알았으나, 만년에 알음알이의 장에 때문에 깨달아 들어감을 구할 곳이 없어 밤낮으로 도를 체득할 방편을 알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편지에 그렇게 써 놓았더라 이겁니다. 젊은 나이부터 불교에 관심은 많았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제는 하~ 지식이 축적이 되어서, 이놈의 지식 때문에 이리저리 그냥 지식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 말입니다. 알음알이가 앞을 가로막는다.     



  이것은 이미 지극한 정성을 가진 것입니다. 감히 외면하지 못하고 잘못된 견해를 낱낱이 들어 판단하여 갈등의 글을 조금 쓰겠습니다. 보니까 공부인은공부인 입니다. 그런데 뭔가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아 주려고 하는 말입니다. 다만 깨달아 들어가기를 구하는 것이 문득 도를 막는 알음알이입니다. 깨달아 들어가기를 구하는 것.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깨달음이 오면 오는 것이지, 그 깨달아 들어가기를 구하는 것. 언제 깨달을까? 깨달아야 되는데...



  불교 안에는 깨달음을 너무 강조하는 그런 병통이 있습니다. 이 분도 보면 그런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일 마지막 어려운 병이라는 사실입니다. 떼어버리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왜냐? 우리 모두 깨닫기 위해서 공부하거든요. 특히 선방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출발은 했는데, 출발까지는 좋아요.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야~, 이것 참 미묘한 문제지요. 정말 미묘한 문제입니다. 깨달음 때문에 출발은 했는데, 깨달음이라는 그 의식이 결국은 깨달음을 가져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교 공부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대충 짐작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별도로 무슨 알음알이가 그대에게 장애가 되며, 필경 무엇을 일러 알음알이라고 하며 알음알이는 어디로부터 오며, 장애를 입는 사람은 다시 누구입니까? 이것은 앞에서(6-1)말씀드린 청소하는 사람은 누구고, 또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냐? 운전하는 사람은 누구고,화두 드는사람은 누구냐? 알음알이 일으키는 사람과 알음알이가 장애 된다고 하는 사람. 이것이 도대체 누가, 그렇게 당신에게 여러 사람이 있어서 이리저리 나눠지느냐? 이겁니다. 결국은 당신 한 사람 이잖느냐? 도를 천번만번 통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당신 한 사람인데. 그런데 알음알이가 장애가 된다. 그래서 도를 체득할 방편을 따로 알고 싶어 한다.



  대혜스님이 보니까 여기에 얽히고설킨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고, 모순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별도로 무슨 알음알이가 그대에게 장애가 되며, 또 필경엔 무엇을 일러 알음알이라고 하며 알음알이가 도대체 뭐냐? 이 말입니다. 알음알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알음알이는 어디로부터 오느냐? 어디서 생겼느냐? 이겁니다. 장애를 입는 사람은 다시 누구입니까? 그럼 얼마나 또 장애를 입느냐? 잘 파헤치는 겁니다. 분석을 아주, 아주 잘 했습니다. 꼼짝달싹 못하게 한 것입니다. 전부 한 사람입니다. 전부 한 사람이라고요.



  다만 이 구절에 전도된 것이 세 가지나 들어 있습니다. 첫째, 알음알이의 장애를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알음알이의 장애를 받았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 그 다음에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여 달게 미혹한 사람이 되는 것이 또 그 하나라, 못 깨달았다. 나는 미혹한 중생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주 큰 병입니다. 두 번째,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여 달게 미혹한 사람이 되는 것. “나는 아주 미혹한 사람이야” “중생이야” “범부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



  영명연수 선사가 보살계 받기를 권하는 글이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보살계는 아주 근사한 거야”해 놓으니까 사람들이 의문 갖기를 “그렇게 근사하고 차원 높은 것인데, 그것은 문수나 보현보살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 해당되겠느냐?”그렇게 질문을 했어요. 그러니까 영명연수 선사가 있다가 “당신같이 범부가 문수도 아니고, 보현보살도 아니고, 관세음보살도 지장보살도 아니라고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있는 진실한 부처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요.” 이랬다고요. 참 무서운 말이고, 이것이 아주 불교의 결론을 이야기 해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문수 보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부처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만약에 중생이라고 생각한다면,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부처가 아니라고 한다면 모든 부처님, 시방세계의 부처님을 전부 비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 놨습니다. 그러면서 명문을 갖다 증거를 대기를 화엄경에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고 했지 않았느냐? 만약에 이치가 그렇다면 그런 말 아니했을 것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깨닫지 못해서 스스로 미혹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 중생이라고 여기고, 범부라고 여기는 것. 이거는 병중에 가장 큰 병입니다.



  다시 미혹한 가운데 있어서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딱 분류를 했습니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 이미 깨달음은 자기에게 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데 뭘 기다려요? 집에 있는 사람을 스스로 밖에 나갔다고, 문 앞에 나가서 계속 기다리는 것 하고 똑 같지요. 집에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고 식구들 다 있는데, 식구들 밖에 나갔다고 ‘언제 오나?’ ‘언제 오나?’ ‘빨리 안 오나?’하고 이 추운 겨울에 저~ 문 밖에 나가서 기다리는 꼴 하고 똑 같다 이겁니다. 구구 절절이 전부 이것이 다 드러낸 것입니다.



  和盤托出(화반탁출)입니다. 떡을 쪄서 잘라서 주는 것이 아니라 소반 채 다 드러내는 겁니다. 소반 채 다 먹으라고 줘 버리는 식입니다.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은 이렇게 아주 명쾌하지요. 언제 기다렸다가 주고 말고 할 그럴 기회가 올는지요? 누가 보장합니까? 다 줘 버리지, 만난 김에 다 줘 버리지요. 다음에 줄 수 있는 기회가 올지 안 올지 아무도 보장 못하는 겁니다. 아끼고 말고 할 것이 없다고요. 불교는요. 기초가 어떻고 고급이 어떻고 이것이 없습니다. 지금 어쭙잖은 우리들 시대에서 기초반이 어떻고 중급반이 어떻고 고급반이 어떻고 이렇게 해놓지, 그거 없어요. 기초반 나오다가 중급반 못나온 사람 수두룩하지요? 무슨 이유에서든지 간에 그런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는 본래 그런 차원이 없습니다. 우리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깜량으로 그런 것을 만들어서 그렇게 가르쳐서 그렇지요.



  다만 이 세 가지의 전도됨이 곧 생사의 근본입니다. 바로 모름지기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아서 전도된 마음이 끊어져야 바야흐로 미혹함을 타파할 것이며, 깨달음도 기다릴 것이 없으며, 알음알이가 가히 장애될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따뜻한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서 오래 오래하면 저절로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如人(여인)이 飮水(음수)에 冷暖(냉난)을 自知(자지)라. 물을 마시면 그 물이 찬지 더운지 마시는 사람은 다 알지요. 스스로 다 알아요. 그와 똑 같은 격이라고 했습니다.



p. 108

  다만 알음알이를 아는 마음 위에 나아가서 보십시오. 여기까지 봐야 됩니다. 알음알이는 본래 없는 것이다. 알음알이가 곧 지혜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분별하고, 우리 나름대로 이해를 하는 이것이 몇 푼어치나 되겠나? 사과보고 사과라고 하고 먹어보니까 맛있다고 하는. 이 禪文(선문)을 보면서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기껏 그 정도 아니겠나? 그런 생각을 하지요. 그것이 알음알이. 아주 쓰레기 같은, 아주 천박한 지식 내지 알음알이라고 하지마는, 그것이 그대로가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대로가 깨달음의 지혜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과 맛볼 줄 아는 것과 道 맛볼 줄 아는 것과 진리를 맛볼 줄 아는 것과 그것이 둘입니까? 하나입니다.


  사과 맛볼 줄 아는 것과 도를 먹을 줄 아는 것과 똑 같은 겁니다. 도를 먹는다니까 좀 이상합니까? 道도 먹습니다. 도를 먹는 것이 아니면 우리가 뭐 하게요? 허허허 道도 먹는 겁니다. 다만 알음알이를 아는 마음 위에 나아가서 보십시오. “이것이 내가 시원찮은 불교이해의 정도인데 이것, 이것 거기서 한 번 보자.” 이겁니다.



  도리어 장애가 됩니까? 능히 알음알이를 아는 마음 위에 도리어 여러 가지가 있습니까? 옛날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알음알이로 짝을 삼고 알음알이로 방편을 삼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춥고 더운 것을 아는 그 마음 가지고 전부 다 했다 이것이지요.그 마음 가지고요. 알음알이 버리라고 했지만, 거기에 끄달리는 것을 우리가 경계했지 사실은 그 자체. 그 자체의 근본뿌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음알이 위에서 평등한 자비를 행하며, 알음알이 위에서 모든 불사를 짓되, 용이 물을 얻은 것과 같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한 것과 같아서 마침내 이것으로 번뇌를 삼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 생각 돌이키니까 시시비비하고 옳다 그르다 하고,동전 몇 닢 가지고 그저 네 꺼니 내꺼니 싸우던 바로 그 마음이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고, 지혜의마음이고, 큰 道를 이해하고 굴려서 쓸 줄 아는 그 마음이지요.동전 몇 닢 가지고 시시비비하던 그 마음이 그 마음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고요. 그것 빼놓고 또 달리 내[我]가 있습니까? 그 내가 온 우주를 집어삼키는, 아까 뭐라고 했지요?



  眼皮盖盡三千界(안피개진삼천계). 눈은 삼천대천세계를 다 감싸고,

鼻孔盛藏百億身(비공성장백억신). 콧구멍은 천 백억 화신을 다 담는다. 호흡 한 번씩 할 때 천 백억 화신이 다 들어있다. 눈 한번 뜨고 보십시오. 온 세계가 다 내 눈 안에 들어오지요. 호흡 한번 하면, 내가 호흡하는 거기에 천 백억 화신이 계속 들락날락 하는 겁니다. 우리는 기껏 산소만 호흡하는 줄 알지요? 부처님의 천 백억 화신이 다 내 콧구멍으로 들락날락합니다.

이참정 거사가 그런 게송을 지었다니까요. 그것은 사기 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지거든요.



  그는 알음알이가 일어나는 곳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알음알이가 일어나는 그 자리. 空寂靈知(공적영지)한 자리.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추고, 비추면서도 항상 고요한 우리의 근본자리. 바로 그 근본자리에서 작용하는 것이지요. 靈知. 신령스럽게 아는 그 자리.


이미 일어나는 곳을 알았다면, 곧 이 알음알이는 문득 해탈의 장소며 곧 생사를 벗어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무슨사기치고 나쁜 짓하고 온갖 권모술수 부리는 그 일은 잘못이지만 그 능력은, 사기 칠 줄 아는 그 능력. 사기 치는 마음이 일어나는 그 뿌리. 그 근본자리는 텅 비어서 신령스럽게 아는 그 능력이라니까요. 그것을 혹자는 사기도 치고 혹자는 거짓말도 하지만, 혹자는 그것으로 대자비의 보살행을 실천하잖아요.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나 사기 치는 사람이나 그 뿌리는 하나입니다. 같아요. 그 뿌리가 신기한 것입니다.

그뿌리가 그 當體(당체)입니다. 그當體자리가 대단한 자리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이고, 그것은 곧 우리들의 무량공덕 생명으로 하나로 통일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해탈의 장소이며 생사를 벗어난 곳이라면 알음알이의 當處(당처)가 바로 적멸입니다.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별별 마음을 다 쓰지요. 하루에 쓰는 마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찾아 들어가면... ‘이것이 어디서 났나?’하고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쉬는 시간에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생각이 어디서 났나?’ 한 번 생각해 보면 적멸입니다. 當處가 바로 적멸이다하는 이것이 중요합니다.텅 비었다 이겁니다.



  알음알이가 이미 적멸이라면, 알음알이를 아는 사람도 적멸이 아닐 수 없으며, 보리열반과 진여불성도 적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보리니 열반이니 진여니 불성이니, 아주 고급스러운 용어를 갖다 들이대어 봤자 그것이 전부 적멸한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기치고 거짓말하고 나쁜 짓하는 것도 전부 적멸한 자리가 자기 본래의 집입니다. 전부 거기서 나왔어요. 한 놈은 나와서 사기 치러 가고 한 놈은 나와서 보살행 하러가고 그런 것이지요. 때로는 사기 치던 사람이 ‘아, 아니 구나’ 하고는 보살행 하고, 보살행 하던 사람도 재미없어서 혹 딴 짓도 할 수도 있는 것이고요.


  “그러니 그 뿌리가 중요하다.” 여기는 그 얘기입니다. 적멸한 자리. 진여불성도 적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무슨 물건이 있어 장애하며, 다시 어디를 향하여 깨달음을 구해 들어가겠습니까? 그것은 지가 다 가지고 있으면서...

지가 다 가지고 있는데 뭘 어딜 또 따로 깨달음을 구해 들어가는 일을 어쭙잖게 하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겁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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