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21/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10. 26. 17:41
 

 

서장 대 강좌 5- 3 강

 

  p. 92

  여기는 소위 깨달음의 사례에 대해서 세 가지가 소개 되겠습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니까 너무 아주 차원이 높은 것으로만 생각을 하는데요.

그렇게 힘들고 어렵고 차원이 높고 많은 세월이 걸려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잘 아시는 대로 육조 혜능스님은 불교라는 글자도 모르는 입장에서 나무 팔러 갔다가 마음을 어디에 꼭 매달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써라 應無所住 而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하니까 그 한 마디에 그만 눈이 번쩍 뜨인 겁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아~! 그래 충효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은 정말 상상하지도 못할 별의별 세계와 길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 아닙니까?

얼마나 시원해졌겠습니까?

정말 자기의 어떤 인생과 자기 가치관에서 그만 둑이 툭 무너져 버린 겁니다.

그 둑이 있을 때는 물이 고이지요.

둑이 무너지고 보니까 물이 지 가고 싶은 대로 막 가는 겁니다.

‘그것이구나!’ 그렇게 아는 겁니다.

 

여기에 한 사례.

옛날 수료 화상이 등나무를 캐는 곳에서 마조 스님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이것은 흔히 하는 말인데, “달마 스님의 법이 뭡니까?” 달마 스님은 서쪽에서 이 동쪽 중국으로 와서 법을 전하려고 했는데 소위 “그 법이라는 것이 뭡니까?”

이 뜻입니다.

 

마조가 이르기를 “가까이 오너라 너에게 말하겠다.” 그랬어요.

수료 화상이 앞으로 나오거늘 마조가 가슴을 막고 한번 차서 넘어뜨리니 넘어졌다가 수료 화상이 곧바로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허허허허”하고 크게 웃었습니다.

달마 스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했던 법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부처님 법하고 뭐가 또 다르겠습니까?” 그러니까

“가까이와 가까이와” 하니까 뭣도 모르고 가까이 갔더니 한쪽 발 걸고는 탁 미니까 팍 넘어져 버린 것이지요.

그렇게 꼭 가슴을 치고 다리를 걸고 넘어뜨려야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동작일 뿐입니다.

좀 과격하고 또 충격적이고, 좀은 상식 밖의 동작일 뿐입니다.

 

  그 점잖은 스님이 깡패들이나 하는 식으로 다리를 탁 걸고 가슴을 팍 치면서 그냥 넘어뜨리니 누군들 안 넘어지겠습니까?

전혀 예상치도 못 하고 있었는데요.

좀 충격적이고 과격하고 상식 밖의 그런 동작을 통해서 잠자고 있는 영혼을 확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무슨 頓悟頓修(돈오돈수)가 있고 頓悟漸修(돈오점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하하하” 웃었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나!’ ‘당신이 그렇게 나에게 충격을 주고, 나는 그 충격을 100% 받아들여서 느끼고 아는 이 사실이 구나!’ 이겁니다.

또 이 세상에 소중한 것이 있고, 또 이 세상에 뭔가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라고요.

 

마조가 말하기를 “네가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웃는가” 하니, 수료가 말하기를 “백 천 가지 모든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오늘 한 털끝 위에서 그 근원을 다 알았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한 털끝” 이란 것이 뭡니까?

아주 작은 동작. 다리를 걸고 가슴을 쳐서 넘어뜨리는 그 아주 미미한 동작.

사실 알고 보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왜냐? “백 천 가지 모든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이 그 작은 동작 하나에 순식간에 일어난, 단 몇 초 동안에 일어난 그 동작 하나에 그 모든 것이 다 그 위에 포함 되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말하고 보고 듣는 이것이 온 우주 전체입니다.

이것이 온 우주 전체라고요.

볼 줄 알고들을 줄 아는 見聞覺知(견문각지)하는 이 사실이 모든 삶입니다.

모든 것이에요.

그래서 마조가 더 이상 그를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또 두 번째사례.

雪峰(설봉) 스님이 鼓山(고산)의 인연이 익었음을 알고 하루는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이것이 무엇인가?”

그냥 가만히 무단히 서 있는 사람의 가슴을 확 잡고 “이것이 뭐야?”

이렇게 했다고요.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니 고산이 분명히 깨달아 통달하고 통달한 마음도 문득 잊고서 오직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흔들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참 좋더라고요.

별의별 깨달음의 사례들이 많은데, 여기 고산 스님의 이 모습.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겁니다.

참 멋있고 전혀 과격하지도 않고 점잖고 그러면서도 멋이 있고요.

부처님이 꽃 든 것보다도 어쩌면 더 멋있어 보여요.

그것이 그것인데...

손가락만 하나 달랑 세우는 것. 그것도 참 재미는 있는데 뭔가 약간 점잖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도 그 것 참... 구지선사의 一指頭禪(일지두선)이라고 그래요.

한 손가락의 선. 천룡화상이 가르쳐 준 것인데, 평생 써 먹고도 남는 손가락 하나 세우는 것입니다.

사실 거기에 팔만사천법문이 다 있지요.

저는 이런 일들이 더욱 분명 해지고 자신 있어지고 더 명확해져요.

흔히 큰 스님들이 주장자 꽝 울리고, 여기에서 일체 법문이 다 끝났느니라.

어릴 때 그런 소리 듣고 ‘저거 뭐 하는 짓인가?’ 그랬어요.

그런데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것이 ‘정말 확실한 것이구나.’

‘저분이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그것은 사실이다.’

‘그 말은 사실이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모르고 흉내를 냈다 하더라도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런 예 많아요. 모르고 흉내 내도 그 말은 진실입니다.

알고 해도 엉터리가 많고요.

엉터리로 알고 하니까 엉터리가 많고요.

모르고 해도 진짜가 많고요.

이 불법은 참 묘해요.

그런 도리가 많으니까요.

 

설봉이 말하기를 “너는 도리를 짓는가?” 어떤 “도리를 짓느냐?” 고산이 다시 손을 흔들며 말하기를 “화상이여,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바로 손 한번 흔드는 도리지 더 이상 무슨도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손 한번 흔들고 당신은 내가 손 흔드는 것을 보는 이것뿐이지 무슨도리가 있겠느냐 이겁니다.

설봉은 문득 그만 두고 가버렸다.

아! 더 이상, 그거 다 서로 아는 입장인데요.

거기다 괜히 먹칠을 하고 군더더기를 하고, 온갖 칠을 해서 버려 놓을 일이 없지요.

삭 이렇게 가 버리면 깨끗하지요.

조사 스님들의 어록들을 읽어보면 거두절미.

그야말로 앞뒤도 없이 그런 어떤 행위만 딱 갖다놓는 것들이 많지요.

 

  그 다음 세 번째.

몽산도명선사가 육조 스님을 쫓아가 대유령에 이르러 衣鉢(의발)을 빼앗으려 하니, 육조 스님이 돌 위에 던져 놓고 말하기를 “이 옷은 믿음을 나타내는 것인데, 힘으로 다룰 수 있겠는가?

그대가 가져가는 대로 맡겨 두겠다.”고 했습니다.

도명이 의발을 들어도 움직이지 않으니, 이에 말하기를 “저는 법을 구하지 의발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행자는 법을 열어 보여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육조단경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사건이라서 중언부언하지 않겠습니다.

 

육조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착한 것도 생각하지 말고 악한 것도 생각하지 말라.

꼭 이러한 때에 무엇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라고 했습니다.

이 말 한 마디 일러 준 겁니다.

의발 뺏으러 오는 오조 스님의 밑에 수백 명이 있었는데 이 도명은 장군 출신입니다.

힘도 세고 걸음도 빨라요.

그러니 제일 먼저 도망간 육조 스님. 옷 하고 발우떼 뺏으러, 가사하고 발우떼 뺏으러 왔는데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벌써 도가 있는 사람에게는 옷 하고 발우떼하고 그것이 바위에 딱 붙었는지 안 붙었는지는 제가 알바 없고요.

도가 있는 행자니까. 비록 떠꺼머리총각 행자이지만 그 위력 앞에 장군 출신인 도명 화상도 어쩌지 못한 겁니다.

감히 그 발우떼를 들 자신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표현이 근사하잖아요?

그런 심리적인 현상을 발우떼가 바위에 붙어서 움쩍달싹 않더라고 표현을 했는데요.

감히 그 어떻게 손을 대겠어요?

벌써 기운이 다른데요.

氣(기)가 그냥. 행자에게서 풍기는 기 가 하늘을 뻗는데 도명존자 지까짓게 장군 출신이 아니라 우 장군 출신이라도 기 앞에서는 어떻게 해볼 길이 없는 겁니다.

기에 딱 질려서는...

그래서 질문한 것이 “내가 발우떼 가지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하고 법문을 청 했는데 바로 그 법문이 不思善(불사선) 不思惡(불사악)하라. 어떤 것이 그대의 本來面目(본래면목). 참 모습이냐?

 

도명이 이때에 크게 깨달아 온몸에 땀을 흘리며, 울고 예를 표하여 말하기를 “위로부터 내려온 은밀한 말과 은밀한 뜻 이외에 도리어 다시 어떤 뜻이 있습니까?”

지금 내가 스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은 것.

이것 이외에 지금 얼른 우리가 헤어지고, 나는 쫓아오는 저 사람들 만나야 될 입장이니까 그 외에 다른 것 또 있습니까?

하고 다그쳐 물은 겁니다.

 

육조가말하기를 “내가 지금 너를 위하여 말하는 것은 곧 은밀한 뜻이 아니다.

네가 만약 자기면목을 돌이켜 비추어 보면, 은밀한 뜻이 너에게 있을 것이다.

내가 만약 말하면 곧 은밀하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야말로 自燈明 法燈明(자등명 법등명)이지요.

은밀한 뜻이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너에게 있다. 너 자신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황벽스님과 임제스님의 관계도 이야기를 얼핏 했습니다만,

별별 사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처님이 꽃 든 이야기로부터 손가락 벤 이야기로부터 아주 유명한 백장스님 밑에 신찬스님이 있는데, 그 스님의 출가 계 받은 스님이 계현 스님입니다.

계현스님은 경전을 많이 봤는데 뭔가 다른 안목이 없어서 제자인 신찬이 백장스님한테 갔잖습니까?

백장스님한테 가서 잠깐 공부 하고는 눈이 밝아져서 되돌아와서 살았어요. 어느 날 은사 스님이 목욕하는데 등을 밀어 주면서 상좌가 은사 스님의 등을 툭툭 치면서 “법당은 참 좋다만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법 앞에는 이런 거예요.

  스승이다 상좌다 어른이다 아이다 이런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 것이 개제 되면 법이 살아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 상식 가지고는 불교 공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불교 공부 좀 하다보면 어떤 때 보면 아주 오만불손해지고, 소위 개차반 같이, 조금 불교 맛보면 사람이 반미치광이 비슷하게 된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실명을 거론을 못해서 그런데...

거론하면 여러분들이 다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열반도 했고 지금도 살아계시는 그런 사람들 있어요.

약간 눈이 좀 뜨이기 시작하면 안하무인이 되는 겁니다.

천하가 다 내 것 같아서 지 멋대로 그냥...

그런데 그것은 한탕주의적 사고에 빠진 사람입니다.

약간 눈이 뜨였다고 지 멋대로 사는 겁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시종일관된 삶이 중요한 것이지, 눈 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사 스님의 등을 치면서 그런 말을 하니까 뒤로 돌아보잖아요.

그러니까 또 한 마디가 “영험도 없는 부처가 어떻게 방광을 할 줄 아는구나.”

그렇게 충격을 주는 겁니다.

상좌가 은사 스님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극약을 쓰는 겁니다.

극약을... 극약 중에는 아주 상 극약이지요.

은사의 등을 툭툭 치면서 “법당은 참 좋은데 어떻게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영험도 없는 부처가 어떻게 방광을 할 줄 아는구나.”

귀는 있다고 어떻게 말은 알아듣고 쳐다볼 줄은 안다.

그런 극약 처방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상좌의 법문 듣고 척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상좌가 스승을 깨닫게 한 예들 더러 있습니다.

 

불교는 역사도 많고, 세상을 상식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온 인생을 그냥 통째로 갖다 바치면서 한 구멍만 파면서 살았기 때문에 별별 기가 막힌 사례들이 참 많습니다 보면...

앞의 세 선지식의 세 가지 인연을 그대의 한번 웃는 가운데 풀린 것과 비교하면 우열이 어떻습니까?

스스로 판단해 보기 바랍니다.

도리어 다시 별도로 기특한 도리가 있습니까?

만약 별도로 있다면 도리어 일찍이 풀지 못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다만 부처 될 줄 알아야지 부처가 말할 줄 모를까 근심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부처 되면 됐지 부처가 말할 줄 모를까봐 근심하는 그런 예들도 있다는 것이지요.

 

옛부터 도를 얻은 선비는 자기를 이미 충족하고 자기의 남은 것을 미루어 어떤 문제에 대응하고 對象(대상)을 만남에 거울이 받침대에 놓이고 밝은 구슬이 손바닥에 있어서, 오랑캐[胡]가 오면 오랑캐를 나타내고 漢人(한인)이 오면 한인을 나타내는 것과 같아서 집착하지 않습니다.

  도를 얻은 사람은 자기를 충족하게하고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어떤 사건 처리.

또 사람관계. 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 온갖 인간의 마음을 유혹하는 명예라든지 부 라든지 일체 이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쓰는 것이 바람직한가?

만약에 도를 제대로 얻은 사람이라면 어떤 마음을 쓰고,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흉내라도 낸다면 어떤 마음을 쓰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이런 문제입니다. 여기 말이 그렇지요.

 

만약 집착하면 실제의 법이 있어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큰 법을 밝혀서 어떤 문제에 대응하여 걸림이 없고자 한다면 다만 그전 그대로 살아야지 반드시 남에게 묻지 말아야 합니다.

오래오래하면 스스로 머리를 끄덕이게 될 것입니다.

이별할 때에 對面(대면)하여 준 말 이것이 아까 그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치로는 몰록 깨달았지만, 생활에 있어서는 제대로 안 돌아간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세월이 가다보면 저절로 풀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 말을 좌우에 기록해 두기 바랍니다.

이 외에 별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비록 말이 있더라도 그대에게 다 쓸데없는 말이 될 것입니다.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쯤 해 두겠습니다.

 

이것이 그전 그대로 살아야 된다.

그리고 깨달음을얻은 선비. 처음에 그랬지요?

도를 얻은 선비는 자기를 이미 충족하고 자기의 남은 것을 미루어서 어떤 문제에 대응하고 대상을 만남에 거울이 받침대에 놓이고 밝은 구슬이 손바닥에 있어서,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를 비추고, 한인이 오면 한인입니다. 누가 오든 김씨가 오면 김씨를 비추고, 박씨가 오면 박씨를 비춥니다.

거울은 그렇거든요.

거울은 도둑놈이 와도 도둑놈 비추고, 개가와도 개 비추고, 사람이 와도 사람 비추고, 누가와도 거울은 다 비춰줘요. 무심해요.

도인의 마음을 우리가 굳이 표현하자면 그와 같은 것이지요.

  안 비추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식이 죽었는데 목석처럼 무심하면 그것은 도인이 아니라 목석이지요.

슬픈 일이니까 누구 못지않게 슬퍼하는 겁니다.

‘아니 도통한 사람이 뭘 저렇게 슬퍼하냐?’

그렇게 보는 그 안목이 잘못입니다.

도통을 한 사람일수록 슬퍼할 줄 알아야 됩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할 줄 알아야 됩니다.

화 낼 일이 있으면 화 낼 줄 알아야 됩니다.

대혜스님은 默照邪禪(묵조사선)을 비판하는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화를 많이 낸 사람입니다. 기를 쓰고 그냥 비판하고, 내가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들을 다 몰아내야 된다고...

이렇게 그냥 들고 일어난 사람입니다.

  그것이 화 안 내고 될 일입니까?

화 낼 자리에 화 낼 줄 아는 겁니다.

슬퍼할 자리에 슬퍼할 줄 아는 겁니다.

기뻐할 일에 기뻐할 줄 아는 겁니다.

哀而不傷(애이불상) 樂而不淫(낙이불음) 이라는 말이 있지요.

슬픈 일이 있을 때 극도로 슬퍼해도 상하지 않아.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슬픈 일이 있으면 그만 상해 버려요. 상한다고요.

 

옛날에 탄허스님 밑에 주역 잘 보는, 천하에 주역 대가라고 하는 백운 선생이라는 이가 늘 찾아 왔어요.

소주 한 병만 사 주면 그 잘 보는 사주 다 봐 줘요.

그런 사람인데 목이 쉬어 있어요.

“스님, 백운 선생은 목이 왜 쉬었습니까?” 스님 보고 물으니까 아들이 죽었는데 그때 아들 잃고 하도 슬퍼해서 울다가 울다가 한 달을 울고 나니까 목이 가 버렸는데 지금까지 저렇다고...

그것이 상하는 겁니다.

  哀而不傷(애이불상). 슬퍼하되 상하지는 않아야 되거든요.

道人(도인)이라는 것. 그 불법공부 좀 했다는 사람. 도인은 그만 둡시다.

 

불교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슬픈 일이 있으면 알맞게 슬퍼하고 말아야 됩니다. 그것도 내 자식의 인연이다. 부모의 인연이다. 그 사람의 인연이다.

‘인연의 도리가 그렇게 됐는데 내가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하고 다시 일어날 줄 알아야지요.

그래서 더 이상 사람이 상하지 말아야지요.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간 것이 얼마나 애통한 일입니까?

그래서 한 달을 울다가 그만 목이 가 버려서 목이 쉬었어요.

그래서 아무 장사도 못해요.

목이 쉬어 놓으니까 그 잘 보는 역학이 그만 아무 쓸모없게 되었더라고요.

  제가 한참 어릴 때, 좀 기백도 있어 보이고 그랬는데 사주 다 대고 제가 물었어요.

한 번 봐달라고 장난삼아 물었더니, “사무라이 사무라이” 자꾸 “사무라이 사무라이” 딱 그 한 마디입니다.

뒤에 또 물어도 또 “사무라이 사무라이”입니다.

제가 무슨 사무라이인가요?

사무라이하게... 그런데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뭔가 보는 것이 있었는지 어쨌든 그 이상은 말을 아니 해요. 그런 분이 있었어요. 그래 상하진 않아야 돼요.

  哀而不傷(애이불상). 슬퍼하되 상하진 않는다.

樂而不淫(낙이불음). 즐거운 일이 있으면 아주 즐거워해요.

좋은 생겼는데 안 즐거워하면 그것은 목석이지 그것이 인간입니까?

그 따위 도인 뭐 쓸모 있겠습니까? 쓸모없는 도인이지요.

不淫이라. 즐거워하되 빠지지 않는다.

도취 하지 않고 빠지지 않는다.

哀而不傷 樂而不淫. 참 좋은 말이지요.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하고 여기는 거울과 같아서 오는 대로 다 비춘다.

그러나 떠나면 없다. 아주 미인이 와서, 그것도 미인이 나체로 와서 비췄다고 거울이 거울 속에 그놈 나체 하루 종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버리면 그걸로 끝입니다.

거울은 누구도 가버리면 그걸로 끝이라고요.

거울의 속성은 그렇다고요.

  불교를 아는 사람의 마음은 그와 같아야 됩니다.

그것이 너무 매정하지 않느냐?

그것은 우리 잣대로 헤아리는 소리지요.

우리 잣대로 헤아리는 소리이고...

간 것은 간 것이지 뭘 어떻게 해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또 떠오르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여기까지 이참정에게 일차 답한 것이 끝났고, 그 다음 이참정이 또 질문하는 편지가 또 하나 있네요.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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