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12-25. 八正道의 안과 밖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21:01

12-25. 八正道의 안과 밖

 

여덟 가지 행에는 안과 밖이 있다. 몸이 살인과 도둑질과 음행이 되고, 말소리가 양설과 악구와 망언과 기어가 되고, 마음이 질투와 어리석음이 된다. 이의 주축은 세 가지 법이고, 열 가지 일은 밖에 있으며, 다섯 가지 길은 안에 있다. 진리에 따라서 진리를 지키면 신족을 지키게 됨을 따른다. 곧 법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

해설
팔정도의 여덟 가지 올바른 행을 살펴볼진대, 이는 안과 밖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몸이나 말로 행하면 밖이고 마음으로 행하면 안이다. 신, 구, 의 삼업으로 행하면 팔정도인데, 몸으로 행하는 것으로는 살생이나 도둑질, 음행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게 되고, 말로써 행하면 고자질이나 욕, 망령된 거짓이나 꾸민 말 등을 하지 않게 된다. 마음으로 행하는 것에는 탐진치가 대표적이다. 탐진치를 떠나야 마음으로 행하는 올바른 행이 된다.

이들은 교법과 행법과 증법(證法)의 세 가지 법을 보인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십이분교(十二分敎)에 지나지 않고, 그에 따라서 수행하는 사성제나 십이인연이나 육도 등은 행법이다. 그러므로 《삼십칠품경》의 내용은 불타의 교법이요 행법이며 증법이다. 이들 삼법을 위주(上頭)로 하여 열 가지가 설해진다. 살생, 투도, 음행, 양설, 악구, 망언, 기어, 질투, 진에, 우치 등 열 가지를 없앤다. 이들 열 가지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인해서 겉에 나타난다. 또한 이들 열 가지에 떨어지면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인도, 천도 등 오도로 떨어진다. 중생이 밖으로 열 가지를 떠나 안으로 오도에 떨어지지 않고 깨달음을 얻어서 열반에 들어가려면 사성제에 따라 진리를 지켜서 뛰어난 마음의 능력을 지켜야 한다. 깨달음이란 우리의 마음이 올바른 모습을 지키는 일이다. 이것이 호각의(護覺意)다.

불도를 수행하여 일곱 가지가 이루어져서 악을 멸하고 선을 행하게 된다. 이것이 칠각의다. 칠각의는 팔정도로서 표시된다. 이로 보아 삼십칠도품은 불타가 설하신 모든 교법이요, 모든 행법이요, 증득한 증법이다. 《대지도론》에서 용수는 이렇게 말했다.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일체의 선법과 도를 배워야 한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모두 일체의 도를 배운다. 곧 건혜지(乾慧地) 내지 불지(佛地)다.' 하신 바와 같다. 

이 구지(九地)는 마땅히 배워야 할 바로서 증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지는 또한 배우고 증득할지니라. 또한 삼십칠품은 오직 성문, 벽지불의 법으로서 보살의 도가 아니라고 설하셨다. 이 반야바라밀다의 마하연품 중에서 부처님은 사념처 내지 팔성도분을 설하시고, 이 마하연삼장 중에도 또한 삼십칠품은 소승의 법이라고 설하지 않으셨다. 부처님은 대자(大慈)를 지니셨기 때문에 삼십칠품을 열반의 길이라고 하셨다. 중생의 바람과 인연에 따라서 각각 그 길을 얻을 수 있다. 성문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성문의 길을 얻고, 벽지불의 선근을 심는 사람은 벽지불도를 얻고, 불도를 구하는 자는 불도를 얻는다. 그의 본원은 제근의 이둔에 따라서 대비(大悲)가 있다. 혹은 대비가 없다. 비유하면 용왕이 비를 내릴 때는 천하에 두루 내려서 차별이 없으나, 큰 나무와 큰 풀은 뿌리가 크기 때문에 많이 받고, 작은 나무나 작은 풀은 뿌리가 작기 때문에 적게 받는 이치와 같다."

이와 같이 삼십칠도품은 보살의 길이 되고 부처의 길로 가는 수행이다. 용수는 또한 《중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열반은 세간과 다르지 않다. 세간도 열반과 다르지 않다. 열반의 세계와 세간의 세계는 같은 것이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은 이런 실상을 얻었기 때문에 세간을 싫어하지 않고 열반을 즐기지 않는다. 이것이 곧 삼십칠품의 실다운 지혜의 지(止)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이 삼십칠도품을 소승의 도라고 얕게 보거나 안반념법이 대승의 돈오의 명상법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둔근의 소지자로서 벽지불이나 성문의 길을 바라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