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대념처경(大念處經)

2-7. 썩으면 버려질 몸에 대한 관찰

通達無我法者 2007. 12. 7. 10:33

2-7. 썩으면 버려질 몸에 대한 관찰

 

다음으로 또한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까마귀에게 쪼아 먹히고, 혹은 매에게 쪼아 먹히고, 혹은 독수리에게 쪼아 먹히고, 혹은 늑대에게 먹히고, 내지는 여러 생류에게 먹히는 것을 관찰하듯이, 이 몸을 직시하여 '이 몸이야말로 이런 법, 이런 것으로서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고 안다.

이와 같이 혹은 안으로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밖으로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안팎으로 모두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여 머문다.

또한 몸에 대하여 생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도한 몸에 대하여 멸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몸에 대하여 생하고 멸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문다.

또한 지식으로 안 것과 잊지 않고 기억되는 것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몸이 있다.'고 생각하여 나타내면 의지함이 없이 머물고, 또한 어떤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여 머문다.

해설
살아 있는 몸을 보면서 죽어서 석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물며 그 썩은 몸을 짐승들이 뜯어먹는 것까지 보기란 더욱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보지 못하면 몸을 관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몸이 영원히 살아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애착에 빠져 헛되이 꾸미며 죄를 짓고 있다. 그 몸이 죽고, 해체되어 썩는 모습까지 보려면 애착 없고, 사물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눈이 생겨야 한다.

우리의 몸은 죽으면 썩는다. 짐승이 그 썩은 고기를 먹으면 '나'라는 존재가 없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은 남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뜻이니, 짐승은 남이다. 모든 것은 나와 남, 이것과 저것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의 몸은 남을 위해서 있고, 남의 몸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나와 남의 관계 속에서 살다가 죽어서도 그대로 돌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붓다가 가르친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진실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기 때문에 나면 죽고, 죽으면 썩는다. 짐승이 내 살을 먹는다. 나와 남의 관계를 충실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시체를 불에 태우거나 물에 띄우는 것은, 엄격히 따지자면 자기 중심적인 욕망의 발로이니, 끝내는 법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불교의 화장(火葬)은 이제가지 쌓아온 무상한 번뇌를 모두 살라 버리고 영혼의 해탈을 얻기 위함이다. 힌두교의 수장은 갠지스 강의 성스러운 물에 정화된 몸이 범천에 다시 태어나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한 종교적인 욕망을 표현한 것이다. 땅에 묻혀 썩지 않기를 바라거나 명당에 묻혀 뼈만이 라고 영구히 남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신은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근대 인도의 성자였던 요가 행자 라마크리슈나Ramakrsna(1836∼1886?)의 제자인 비베카난다Vivekananda(1863∼1902)는 엄격한 수행을 통해 신을 본 사람이다. 그는 인간 속에서 신을 찾고, 인간 속에서 사는 신이 되고자 했다. 그가 수행하며 방황하던 때의 일이다. 굶주림과 피로에 찌든 몸을 이끌고 숲속을 헤매다가 밤이 되어 한 나무기둥에 기대어 앉아 힘 없이 쉬고 있었다. 그때 호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호랑이도 나도 모두 배가 고프다. 이 몸은 인류에게 아무런 봉사도 한 적이 없으니, 이 주린 호랑이에게 내 몸을 바쳐 그를 만족시키자.'라고 생각한 그는 그냥 고요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그를 건드리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다.

삼매의 상태에서는 나와 남의 구별이 없다. 신의 뜻은 평등하다. 비베카난다는 자신의 몸을 호랑이에게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신은 호랑이보다 비베카난다의 도에 더 관심이 많았다.

법은 시체를 썩게 한다. 법은 짐승이 나의 몸을 먹게 할 수도 있다. 짐승에게 먹히는 인연의 주어지면 그대로 먹혀야 한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되어진 그대로 사는 삶의 행위이다. 화장, 수장, 풍장 등에는 모두 개인의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나무에 매달려 까마귀에게 먹게 하거나, 매나 독수리나 개나 늑대에게 먹게 하는 것에는 개인의 욕망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시체가 버려지면 이와 같이 비참하게 되고, 버려지지 않으면 뼈만 남는다.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인연에 따라서 태어나고, 인연이 다하면 죽고, 버려질 인연이 있으면 짐승들의 밥이 되고, 버려질 인연이 없으면 뼈만 남는다. 그러나 그 뼈 역시 나는 아니다. 내 뼈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의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이 몸을 있게 하고 죽게 하는 법뿐이니, 우리의 몸은 이 법을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