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인연(因緣)에 따른 수행

通達無我法者 2007. 12. 7. 14:36

인연(因緣)에 따른 수행

인터넷 불교대학/ 혜거

인수불욕귀산수도(人誰不欲歸山修道)
이위부진(而爲不進) 애욕소전(愛欲所纏)
연이불귀산수수심(然而不歸山藪修心)
수자신력(隨自身力) 불사선행(不捨善行)


“사람 가운데 그 어느 누가 산에 가서 수도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만은 그러지 못하는 것은 애욕에 얽힌 바 때문이니라. 그러나 깊은 산으로 돌아가 마음을 닦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힘에 따라 착한 것을 행하는 일은 버리지 말라.”

원효 대사는 스님이 되기 전에 화랑도도 해보고 요즘말로 상류사회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스님이 됐는데 머리를 깎고 스님 노릇을 해보니까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어릴 때부터 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드셨나 봐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분이 나쁘거나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 머리 깎고 산으로 가야겠다고 말하죠. 기분 좋을 때도 아니고 꼭 기분 나쁠 때 그런 말들을 합니다. 한번쯤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가 수도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만은 못하는 이유는 애욕에 얽혀 있기 때문이죠. 애욕도 수천 가지예요. 부모와 자식간에도 애욕, 형제간에도 애욕,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애욕 등 전부 애욕으로 얽혀 있죠. 마음 하나 돌이키려고 하면 할머니에서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생각나서 못가요. 애욕 때문에 꼼짝도 못한단 말입니다.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요. 옛날에 세상에서 착한 일만 하던 사람이 염라대왕 앞으로 갔어요. 염라대왕은 착한 사람에게 
“세상에서 훌륭하게 살았으니까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 줄테니 원을 말해라.”
이 사람이 원을 말하기를, 
“나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고 다만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초가삼간 지어놓고 아무 근심없 이 책이나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했거든요. 누구나 한번쯤은 경치 좋은 곳에서 걱정없이 초가삼간에서 책읽고 싶은 마음이 들겠죠. 그랬더니 염라대왕이 
“그런 곳이 있으면 내가 가겠다.”
했어요. 염라대왕 안하고 그 자리에 가겠다는 말이에요. 
원효 스님은 산에 들어가서 마음을 닦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힘에 따라서 착한 일 행하는 것은 버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자기 선근(善根)에 따라서 선행만을 찾아서 하라는 말입니다. 

자락능사(自樂能捨) 신경여성(信敬如聖)
난행능행(難行能行) 존중여불(尊重如佛)


“스스로 쾌락을 능히 버릴 수 있으면 성인과 같이 믿음과 공경을 받을 것이며,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할 수 있으면 부처님처럼 존중받을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능히 버릴 수 있다면 믿고 공경하기를 성인같이 할 것이고, 어려운 행을 능히 행하면 존중받기를 부처님과 같이 되리라 하셨어요. 좋아하는 것들은 돈이나 명예 같은 것이겠고, 난행은 세상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이겠죠. 2천년대를 맞이해서 의식부터 바꾸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운동을 비싼 곳에서 할 필요가 있습니까? 집 앞부터 쓸기 하는 거예요. 빗자루 들고 나가 온동네 청소하고 나면 처음엔 몸이 고통스럽지만 한 달, 두 달 지나면 동네사람들한테 인사 받는 재미가 생겨요. 운동되고 대접받고 얼마나 좋아요. 이 세상일을 작은 일부터 돈 안들이고 해보자구요. 온식구 끌고 나가서 해보세요. 인간의 운명을 바꾸려면 적극적으로 식구들을 끌고 나가야 돼요. 소극적으로 움직이면 절대로 업이 바뀌지 않습니다.
절에 찾아오는 신도님 딸인데 중학교 때부터 외박에 술, 담배 못하는게 없었어요. 고등학교 때 도저히 학교를 보낼 수 없어서 부모가 외국으로 도피유학을 시켰죠. 그런데 외국에서 재미가 없었는지 여학생이 귀국해서 저에게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스님, 엄마 아빠가 미워죽겠어요. 중학교 때 저를 때려서라도 잡아줬어야 하잖아요.” 진짜 그 말이 맞아요. 놀랬어요. 그런 녀석이 철이 나니까 더 의젓해요. 그런데 인간으로는 철이 났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때 거쳐야 할 것을 못했잖아요. 이처럼 사람을 바꾸는 일에는 반강제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뀌어져요. 사람들이 왜 타인에게 강제적으로 공부를 못 시키는 줄 아세요? 본인이 발심(發心)이 안됐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정말 발심됐으면 이 좋은 걸 어떻게 놔둡니까? 자기부터 형식으로 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권하지 않는 거예요.

간탐어물(?貪於物) 시마권속(是魔眷屬)
자비보시(慈悲布施) 시법왕자(是法王子)


“물건을 아끼고 탐하는 것은 바로 마구니 권속이요, 자비를 베푸는 자는 바로 법왕의 자식이다.”

저와 함께 스님이 된 사람이 있는데 욕심이 많아요. 처음에는 큰방에서 함께 생활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 탁자 밑에는 모두 그 스님의 짐이 있을 정도로 물건이 많아요.
그렇게 물건을 아끼다 보니 그 스님은 지금도 부자로 살아요. 그런데 그 업이 오십이 넘은 지금도 여전해요. 스님들의 생활이 무소유라는 것 알고 계시죠. 그렇다면 무소유의 개념이 무엇인가요? 물건을 안들고 다니는 게 무소유가 아닙니다. 자기 영역권이 없어야 무소유예요. 스님들은 절에서 결제기간 즉 석 달을 지내면 다른 절로 가야 돼요. 석 달 이상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기둥 뿌리까지 아까워져 버려요. 여러분들도 좋은 집으로 이사간다고 헌집 팔고 새집으로 가는데도 자꾸 뒤돌아 보느라고 못 가죠. 그 동안 사용했던 집이 아까워서 그래요. 그게 인간이에요. 따라서 스님들은 그 집착이 생겨나기 전에 떠나야 해요. 석달 지내고 해제되면 바랑 하나 짊어지고 떠나야 해요.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인연 닿으면 또 그 자리에 머물게 돼죠. 이렇게 영역권이 없어야지 단순히 맨몸으로 다닌다고 무소유가 아닙니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 참으로 기가 막힌 거예요. 간탐심을 못 버리면 사는 이 순간이 지옥인 거예요. 반대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은 법왕자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자비심과 보시하는 마음이에요. 이것은 훈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똑같이 배고플 때 자기 것을 남에게 줄 사람이 몇이나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진짜 법왕자예요. 자비로운 마음, 보시하는 마음 모두 말로 기억하자는 것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 부딪쳤을 때 마음으로, 행동으로 나와야 해요.
자비심과 보시는 우리를 극락세계에 가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을 높은 곳에 끌어 올려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단지 말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와야 하죠. 어떤 상황에 부딪치면 자비심, 보시가 행동으로 나와야 해요. 남에게 아낌없이 주고 먼저 양보하고 해야 합니다.

고악아암(高嶽峨巖) 지인소거(知人所居)
벽송심곡(碧松深谷) 행자소서(行者所棲)
기찬목과(飢찬木果) 위기기장(慰其飢腸)
갈음유수(渴飮流水) 식기갈정(息其渴情)


“높은 산의 험준한 바위는 지혜로운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고 푸른 소나무의 깊은 계곡은 수행하는 자가 머무는 곳이니, 배고프면 나무 열매를 먹어 주린 창자를 달래고 목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셔 갈증나는 마음을 쉴지어다.”

지혜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은 산꼭대기에 집을 짓고,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낮은 곳에 집을 지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은 혼탁하고 낮은 곳에서 돌게 돼 있기 때문이에요. 경제는 낮은 곳에서 돌게 돼 있거든요. 흐릿해야 돌아가는 게 돈입니다. 그것을 맑은 물로 만들어 놓으면 삐걱거리게 돼 있어요. 맑은 물로 만들어 놓겠다는 것이 실명제잖아요. 결국 경제가 안돌아갔죠. 부부끼리도 비상금을 감추고 사는 세상인데 실명제를 해놓으니 경제가 망하죠.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부채가 많다고 알려져 있지만 빚을 좀처럼 통계 내지 않아요. 빚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경제를 꾸려가는 데도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돈은 낮은 곳에 고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지혜있는 사람은 높은 곳을 찾고 현실적인 사람은 낮은 곳을 찾게 돼 있어요. 그리고 푸른 소나무 깊은 계곡은 수행자가 머무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배고플 때는 나무 과일를 먹어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목마를때는 흐르는 물을 마셔 그 갈증을 식힌다는 뜻이죠. 즉 일반사람들은 우물을 파서 공들인 후 물을 길어 먹는 이른바 세속에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먹어야 되지만 수행자는 그런 것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뜻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우물 파서 좋은 물을 먹게 되면 더 좋은 것에 욕심을 내고 안주하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수행자는 생활하는데 있어 얽매임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말입니다. 배고프면 과일을 따먹고 목마르면 시냇물을 먹으면서 별도로 그런 일에 시간을 버리지 말라는 뜻이죠. 

끽감애양(喫甘愛養) 차신정괴(此身定壞)
착유수호(着柔守護) 명필유종(命必有終)

“달디단 음식을 먹고 사랑스럽게 길러도 이 몸은 반드시 무너지고, 부드러운 옷을 입어 극진히 에워싸도 생명은 반드시 끝이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고 내 몸뚱아리를 보호해 줘도 이 몸은 결정코 없어지기 마련이고 부드러운 옷을 입어 몸뚱아리를 보호해도 반드시 허물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옷로비 사건을 기억하시죠. 왜 그렇게 화려한 옷을 입고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조향암혈(助響巖穴) 위염불당(爲念佛堂)
애명압조(哀鳴鴨鳥) 위환심우(爲歡心友)


“메아리가 울리는 바윗굴을 염불하는 불당으로 여기고, 애처로이 우는 기러기 소리를 기쁜 마음의 벗으로 삼으라.“

조향암혈(助響巖穴), 즉 도울 조(助)자, 메아리 향(響)자. 메아리가 울려퍼지는 곳에 염불당을 따로 짓지 말고 굴 속에서 살라는 뜻이죠. 암혈, 즉 동굴 속에서 살면 실제로 법당보다 더 좋은 점이 있어요. 얼마나 소리가 좋은지 자기 염불소리에 스스로 흠뻑 빠지게 좋은 소리가 나와요. 원효 스님께서는 공부하는 경계를 계속해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또한 세상 사람과 친구하려고 하지 말고 날아가는 새들과 오리 등 자연에서 마음의 즐거운 친구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배슬여빙(拜膝如氷) 무연화심(無戀火心)
아장여절(餓腸如切) 무구식염(無求食念)
홀지백년(忽至百年) 운하불학(云何不學)
일생기하(一生幾何) 불수방일(不修放逸)


“절하는 무릎이 얼음장처럼 시리더라도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배고픈 창자가 끊어질 것 같더라도 밥을 구하는 생각을 말지어다.
백년도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않으며, 한 평생이 얼마나 되기에 수행하지 않고 놀기만 할 것인가.”


절하는 무릎이 얼음장 같더라도 마음으로 불을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죠. 생각할 연(戀)자, 즉 그리워하고 연모한다는 말입니다. 산에서 공부하는 수행자의 마음자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 봅시다. 이 정도 되려면 어느 정도 발심이 되어야 할까요? 배가 고파도 밥 생각을 안하고, 무릎이 시려서 얼음장 같아도 불 생각을 안하려면 과연 얼마만큼 발심을 해야 그렇게 되겠는가 말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발심이 전부 마음이라는 겁니다. 기도를 할 때 생각해 보세요. 간절한 마음이 깊은 곳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첫째 어깨가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온몸이 다 아파요. 그럴 때 각오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내면 어떻습니까? 뱃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나와요. 그러면 그 기운으로 어깨결림과 얼음장 같았던 다리저림이 다 풀어져요. 이처럼 뭐든지 뜨거운 기운이 나도록 일을 해야지 하는 둥 마는 둥 하면 발심이 안나와요. 원효 스님은 당신이 했던 그대로를 이렇게 써놓으신 겁니다. 배가 고파도 밥 생각 안하고 추워도 불 생각 안하고 또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산짐승들 모두가 마음의 친구로 여기고, 암굴 속에서 염불당 삼아 공부하고 말이죠. 그런데 요즘 대부분의 스님들은 어느 절에 가서 공부하면 공부가 잘되고 어떤 절에 가니까 공부가 안되더라 그러거든요. 공부하는데 처소가 어디 있어요? 발심만 든든하면 시방세계 곳곳이 공부처 아니겠습니까? 

이심중애(離心中愛) 시명사문(是名沙門)
불연세속(不戀世俗) 시명출가(是名出家)


“마음 속에 애욕을 떨쳐 버린 이를 사문(沙門)이라 하고, 세속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출가(出家)라 한다.”

사람은 마음 쓰는 것이 중요하죠. 껍데기가 문제가 아니거든요. 마음 속으로 애욕이 끊어져야 진정 사문이고, 세속을 흠모하지 않아야 출가예요. 출가하신 분들이 세속사람들하고 똑같이 행동하면 그 마음 쓰는 것이 속된 생각이니까 속인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행자나망(行者羅網) 구피상피(狗被象皮)
도인연회(道人戀懷) 위입서궁(蝟入鼠宮)


“수행자가 비단 옷을 입는 것은 개가 코끼리의 가죽을 덮어 쓴 격이며, 도인이 애욕을 품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간 격이다.”

만약 개에게 코끼리 가죽을 씌웠다고 생각해 보세요. 개는 가죽을 짊어지고는 못 가요. 저도 그렇지만 요즘 우리들의 옷 보통 좋은 것이 아닙니다. 본래는 이렇게 걸치는 것이 아니죠.『발심수행장』을 지으신 원효 스님은 요석공주가 금실로 손수 바느질해서 옷을 갖다 주니까 안입으셨어요. 옷을 당신 상좌에게 주셨어요. 심상이라는 상좌에게 입혔는데 상좌는 그 좋은 옷을 입고 몸이 굳어서 앉지도 서지도 못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대안 대사가 그 모습을 보고 이러셨대요. 
“사람은 어디 가고 옷만 한 벌 서 있느냐.”
그제서야 심상 스님이 주저 앉았습니다. 
또한 도인이 여자를 생각한다면 고슴도치가 쥐의 집에 들어간 것과 같다고 했는데, 고슴도치가 쥐굴 속에 들어가면 못 나온다나 봐요. 빠져 나올 수 없으니 그 안에서 죽고 만다는 뜻이죠.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꺼려야 될 것이 무엇인가? 절대적인 도와 상대적인 도가 있는데 상대적인 도는 실수를 해도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절대적인 도는 실수를 하면 안돼요. 상대적인 도는 아무리 업을 많이 지어도 한생각(一念)에 없앨 수 있어요. 그러나 절대적인 업이 묻혀 쌓이면 꼼짝 못하게 돼 있어요. 제일 무서운 업이 바로 도인이 여인을 생각하는 것으로 절대적인 도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것을 참회하고 녹이자면 비유하건대 몇백 배 뜨거운 용광로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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