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교외별전의 유래

通達無我法者 2007. 12. 10. 11:33

“지혜의 바탕은 자비심”

 

 

부처님 ‘가섭의 청정안목’인가

후대 ‘삼처전심’일화로 정형화

 

한 승이 물었다. “교외별전의 법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답하기를 “미래의 중생은 단지 경문의 언설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본래 뜻을 알지 못한다. 마치 가난한 사람이 남의 보배만 헤아리는 것으로는 끝내 아무런 이익도 없는 것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세존께서는 청정한 눈으로 가섭을 돌아보고는 대중을 앞에 두고 은밀하게 부촉하였다.

 

선종에서는 그 어떤 교학불교보다도 특히 깨침을 중시한다. 그 깨침이란 부분적으로 말하자면 제법에 대한 청정과 평등을 터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도리를 자신이 직접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 깨침은 궁극적으로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올바른 지혜를 터득하는 것은 반드시 자비심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자비는 반드시 지혜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혜가 없는 자비는 눈이 먼 사람이 남을 앞에서 인도하는 바와 같다.

 

이런 점에서 자비의 충족은 불만이 없다. 불만이 없으므로 화를 내지 않는다. 그와 같은 자비의 모습은 늘상 부처님의 모습에 잘 나타나 있다. 부처님의 눈은 달리 청련목(靑蓮目)이라고도 한다. 청련의 의미는 집착을 벗어나 청정하고 온화한 이미지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때문에 제법의 삼매에조차 집착이 없이 청정한 실상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곧 부처님께서는 가섭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청정한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곳에서 가섭은 이미 청정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었다. 그곳에 모인 대중도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부처님께서는 대중을 상대하여 구체적으로 가섭에게 집착을 벗어난 청정한 안목을 인가하였던 것이다. 이 청정한 안목은 연꽃으로 묘사되어 분타리의 백련꽃과 우발라의 청련꽃과 발특마의 홍련꽃과 구물투의 황련꽃으로 등장하였다. 이것은 구시나가라의 입멸에 즈음하여 관의 네 모퉁이에 네 종류의 연꽃이 피어나 교외별전의 모습으로 상징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교외별전의 모습은 후대에 부처님과 마하가섭 사이에 삼처전심(三處傳心)의 일화로 정형화되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마음으로부터 마음에 전한다는 의미이다. 곧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 서로 그 도리를 인정하고 수긍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마치 물건처럼 스승이 자기의 마음을 제자에게 전해준다는 의미가 아니고 제자도 스승의 마음을 받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마음을 전해주고 전해받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하나의 촛대에 붙은 불꽃을 다른 촛대에 불을 댕겨주듯이 자체의 불은 여전히 그대로 있건만 상대방의 촛대에 불을 댕겨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런 도리를 심심상인(心心相印)이라 하였다. 미래세의 말법시대는 탑사견고의 시대요 투쟁견고의 시대로서 외형적인 모습과 오탁악세로 표현되듯이 중생들의 견해는 탐착으로 가득차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말법중생의 깜냥으로는 깨침을 인가하고 정법을 부촉한다고 하면 마음을 건네주고 경전을 전해주는 것처럼 착각을 한다. 이에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정법안장의 전승은 말법중생이 생각하는 바와 같은 유형의 모습도 아니고 언설과 문자를 동원하여 이러쿵저러쿵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통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마하가섭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으면서 마하가섭에게조차 전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처님은 그와 같은 마하가섭의 눈을 청련목으로 흘깃 쳐다보는 것으로 족했다. 때문에 마하가섭도 더 이상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느끼고 수긍하는 것 뿐이었다. 아는 자는 알고 모르는 자는 모른다. 아는 사람에게는 산하대지와 장벽와력의 일체가 깨침의 모습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삼세제불의 설법조차 혀끝의 희롱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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