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를 타파하여 깨치게 되면 꿈에서 깨어난 것과 같고 하늘에 백천 개의 해가 비치는 것과 같다. 그 세계는 허공과 같이 무한히 넓어 한정이 없다.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평등해서 우열이 없고, 귀천도 없고, 친소도 없고, 시비도 없다.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또 모든 존재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기에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는 것이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 된다.
깨달으면 자주적이고 자율적이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내게도 남에게도 한없이 자애로우며, 모든 순역 경계에 자유자재하는 대자유인이 된다. 이 역동적인 현상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글로도 표현할 수 없다. 본인 스스로 물을 마셔보아야 차고 더운 것을 아는 이치와도 같다.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이 어떤 별천지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역력하게 살아 있는 삶의 모습일 뿐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새삼 일러 준다는 것조차 맨살에 상처를 내는 꼴이 된다. 이것은 조주 선사가 말했듯이 차나 한 잔 마시는 일이다. 더 이상 다시 보태고 얻을 바가 없다. 이미 그 자체로 완전히 갖추어져 있기에 불가득不可得이요 불가설不可說이다.
조사어록이나 경전 속에는 깨달음에 대하여 언급해 놓은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다. 대혜 선사는『서장』에서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확철대오하면 가슴 속이 환히 밝음이 마치 백천의 해와 달 같아
시방세계를 한 생각에 밝게 요달하며 가는 털끝만큼의 다른 생각도 없으니,
비로소 구경과 상응하게 된다. …… 모름지기 당사자가 스스로 볼 수 있고
깨칠 수 있다면 자연히 옛 사람의 언구에 휘둘리지 않고
도리어 옛 사람의 언구를 굴릴 수 있다.
廓徹大悟 胸中皎然 如百千日月 十方世界 一念明了 無一絲毫頭異想 始得與究竟相應. …
須是當人 自見得自悟得 自然不被古人言句轉 而能轉得古人言句. - 『書狀』
이렇듯 깨치면 환하게 밝아진다. 추호의 의심도 없으며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갈 길이 정확하고 또렷이 보인다. 그래서 불안해 하거나 방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고 앉는 자리 자리마다 완성된 삶의 모습을 환히 드러내 보인다. 또한 홀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다. 이것을 독탈무위獨脫無爲라고 한다. 그는 의존할 바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므로 정신적으로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옛 사람의 언구에 휘둘리지 않고 옛 사람의 언구를 굴릴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깨달은 이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다.
대혜 선사의 스승인 원오 극근 선사는 무심무념無心無念의 본래면목을 철저하게 증득해야 바른 깨달음이며 이 무심무념의 경지가 바로 견성성불이라 하였다. 그는 깨달은 사람을 대요사인大了事人이라고 했다. 대요사인이란 모든 일과 현상을 남김없이 요달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원오 선사는 이 대요사인의 경지를 이렇게 말한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곳에 이르러 근원을 사무쳐 꿰뚫으면 흘연히 본체가 허공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지라 삼라만상도 그것을 가두지 못하고 성인과 범부도 그것을 어찌하지 못한다. 언제나 남김없이 드러나고 어디서나 숨김없이 드러나니 본래면목이 바로 이것이며 본지풍광이 바로 이것이다.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는 것이니, 오는 시간이 다하도록 깨달은 이를 얽어 멜 생사윤회가 어떻게 있겠는가? 이와 같은 무심한 경계와 무념의 참된 가르침은 참으로 날카로운 사람이라야 거뜬히 실증하게 된다. 본래의 현묘한 마음을 바로 꿰뚫으면 옛과 지금을 꿰뚫어 담연히 움직이지 않으니 만 년이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만 년이다. 영원히 세어나감이 없이 한 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 뒤바뀌는 일이 없으니, 이것을 ‘마음을 가리킴에 자성을 보고 바로 부처를 이룬다’고 한다.
대도를 체득한 이는 무심을 철저히 증득한 이다. 그러니 만 가지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더라도 어찌 그의 정신을 흔들어 생각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다만 한가롭고 한가로운 경지만을 지키는 것이 마치 바보 같고 천치 같으나, 문득 일에 부딪치면 회오리바람 돌고 번개치듯 하여 깨달음의 기틀에 합당치 않음이 없다.
到一念不生處 透徹淵源 忽然自得 體若虛空. 莫窮邊量 亘古亘今 萬像羅籠不住 凡聖拘碍不得 淨裸裸赤灑灑 謂之本來面目 本地風光. 一得永得 盡未來際 更有甚生死 可爲滯碍. 此箇無心境界 無念眞宗 要猛利人 方能著實. 直透本來妙心 亘古亘今 湛然不動 萬年一念 一念萬年. 永無?漏 一得永得 無有變易 乃謂之直指人心 見性成佛. 得道之士 徹證無心 雖萬機頓赴 豈撓其神干其慮哉. 只守閑閑地 如痴似兀 及至臨事 風旋電轉 靡不當機. - 『圓悟心要』
깨달은 이는 허공과 같아 어떤 사물도 그를 가두지 못한다. 깨달은 이는 범부에도 성인에도 구속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다. 이렇게 깨달음은 크나큰 자유로 어떤 경계에도 구속 받지 않는다. 깨달은 이는 마음이 쉬고 무심한 일 없는 도인인지라 만 가지 일들이 함께 닥친다 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인은 일이 없는 세상 밖에서 노니는 한가한 신선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깨달은 이는 그 한가한 마음, 일 없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빈틈없이 바르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깨달으면 자주적이고 자율적이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내게도 남에게도 한없이 자애로우며, 모든 순역 경계에 자유자재하는 대자유인이 된다. 이 역동적인 현상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글로도 표현할 수 없다. 본인 스스로 물을 마셔보아야 차고 더운 것을 아는 이치와도 같다.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이 어떤 별천지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역력하게 살아 있는 삶의 모습일 뿐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새삼 일러 준다는 것조차 맨살에 상처를 내는 꼴이 된다. 이것은 조주 선사가 말했듯이 차나 한 잔 마시는 일이다. 더 이상 다시 보태고 얻을 바가 없다. 이미 그 자체로 완전히 갖추어져 있기에 불가득不可得이요 불가설不可說이다.
조사어록이나 경전 속에는 깨달음에 대하여 언급해 놓은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다. 대혜 선사는『서장』에서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확철대오하면 가슴 속이 환히 밝음이 마치 백천의 해와 달 같아
시방세계를 한 생각에 밝게 요달하며 가는 털끝만큼의 다른 생각도 없으니,
비로소 구경과 상응하게 된다. …… 모름지기 당사자가 스스로 볼 수 있고
깨칠 수 있다면 자연히 옛 사람의 언구에 휘둘리지 않고
도리어 옛 사람의 언구를 굴릴 수 있다.
廓徹大悟 胸中皎然 如百千日月 十方世界 一念明了 無一絲毫頭異想 始得與究竟相應. …
須是當人 自見得自悟得 自然不被古人言句轉 而能轉得古人言句. - 『書狀』
이렇듯 깨치면 환하게 밝아진다. 추호의 의심도 없으며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갈 길이 정확하고 또렷이 보인다. 그래서 불안해 하거나 방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고 앉는 자리 자리마다 완성된 삶의 모습을 환히 드러내 보인다. 또한 홀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다. 이것을 독탈무위獨脫無爲라고 한다. 그는 의존할 바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므로 정신적으로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옛 사람의 언구에 휘둘리지 않고 옛 사람의 언구를 굴릴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깨달은 이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다.
대혜 선사의 스승인 원오 극근 선사는 무심무념無心無念의 본래면목을 철저하게 증득해야 바른 깨달음이며 이 무심무념의 경지가 바로 견성성불이라 하였다. 그는 깨달은 사람을 대요사인大了事人이라고 했다. 대요사인이란 모든 일과 현상을 남김없이 요달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원오 선사는 이 대요사인의 경지를 이렇게 말한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곳에 이르러 근원을 사무쳐 꿰뚫으면 흘연히 본체가 허공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지라 삼라만상도 그것을 가두지 못하고 성인과 범부도 그것을 어찌하지 못한다. 언제나 남김없이 드러나고 어디서나 숨김없이 드러나니 본래면목이 바로 이것이며 본지풍광이 바로 이것이다.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는 것이니, 오는 시간이 다하도록 깨달은 이를 얽어 멜 생사윤회가 어떻게 있겠는가? 이와 같은 무심한 경계와 무념의 참된 가르침은 참으로 날카로운 사람이라야 거뜬히 실증하게 된다. 본래의 현묘한 마음을 바로 꿰뚫으면 옛과 지금을 꿰뚫어 담연히 움직이지 않으니 만 년이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만 년이다. 영원히 세어나감이 없이 한 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 뒤바뀌는 일이 없으니, 이것을 ‘마음을 가리킴에 자성을 보고 바로 부처를 이룬다’고 한다.
대도를 체득한 이는 무심을 철저히 증득한 이다. 그러니 만 가지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더라도 어찌 그의 정신을 흔들어 생각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다만 한가롭고 한가로운 경지만을 지키는 것이 마치 바보 같고 천치 같으나, 문득 일에 부딪치면 회오리바람 돌고 번개치듯 하여 깨달음의 기틀에 합당치 않음이 없다.
到一念不生處 透徹淵源 忽然自得 體若虛空. 莫窮邊量 亘古亘今 萬像羅籠不住 凡聖拘碍不得 淨裸裸赤灑灑 謂之本來面目 本地風光. 一得永得 盡未來際 更有甚生死 可爲滯碍. 此箇無心境界 無念眞宗 要猛利人 方能著實. 直透本來妙心 亘古亘今 湛然不動 萬年一念 一念萬年. 永無?漏 一得永得 無有變易 乃謂之直指人心 見性成佛. 得道之士 徹證無心 雖萬機頓赴 豈撓其神干其慮哉. 只守閑閑地 如痴似兀 及至臨事 風旋電轉 靡不當機. - 『圓悟心要』
깨달은 이는 허공과 같아 어떤 사물도 그를 가두지 못한다. 깨달은 이는 범부에도 성인에도 구속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다. 이렇게 깨달음은 크나큰 자유로 어떤 경계에도 구속 받지 않는다. 깨달은 이는 마음이 쉬고 무심한 일 없는 도인인지라 만 가지 일들이 함께 닥친다 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인은 일이 없는 세상 밖에서 노니는 한가한 신선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깨달은 이는 그 한가한 마음, 일 없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빈틈없이 바르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話頭·參禪'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화선] 간화선의 사회적 가치와 역할 (0) | 2007.12.10 |
---|---|
[간화선] 재가자도 깨달을 수 있는가? (0) | 2007.12.10 |
[간화선] 스스로 공부를 점검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0) | 2007.12.10 |
[간화선] 간화선에서 말하는 삼매란 무엇인가? (0) | 2007.12.10 |
[간화선] 재가자가 일을 하면서도 화두를 들 수 있는가? (0) | 2007.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