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6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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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 6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3) 유심유사 등 3지 ③
  
  다음에1) 무엇을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의 시설건립(施設建立)이라 하는가?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한다.
  
  인(因)에 과(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드러남[顯了]와 가고 옴[去來]이 있음과
  나[我]와 항상함[常]과 숙작인(宿作因)과
  자재(自在) 등과 해침을 법으로 삼는 것[害法]과
  執因中有果  顯了有去來
  我常宿作因  自在等害法
  
  변(邊) 무변(無邊)과 교란(矯亂)과
  원인이 없다고 계탁하는 것[計無因]과 단견[斷]과 공견[空]과
  최승(最勝)과 청정[淨]과 길상(吉祥)의
  
1)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 등의 3지(地)를 간략히 5문(門)으로 시설(施說)하여 건립(建立)하는 가운데에 이하는 네 번째로 불여리작의를 시설하여 건립[不如理作意施說建立]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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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가지 이론(異論)에 의하네.
  邊無邊矯亂  計無因斷空
  最勝淨吉祥  由十六異論
  
  16가지 이론(異論)의 차별에 의해서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를 드러냄을 알아야 한다.
  무엇을 16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원인 가운데에 결과가 있다는 론[因中有果論]이며, 둘째는 연에 따라서 드러난다는 론[從緣顯了論]이며, 셋째는 가고 옴이 실재로 있다는 론[去來實有論]이며, 넷째는 나를 계탁하는 론[計我論]이며, 다섯째는 항상함을 계탁하는 론[計常論]이며, 여섯째는 숙작인론(宿作因論)이며, 일곱째는 자재(自在) 등이 작자(作者)라고 계탁하는 론(論)이며, 여덟째는 해침을 정법으로 삼는 이론[害爲正法論]이며, 아홉째는 유변무변론(有邊無邊論)이며, 열째는 불사교란론(不死矯亂論)이며, 열 한째는 무인견론(無因見論)이며, 열 둘째는 단견론(斷見論)이며, 열 셋째는 공견론(空見論)이며, 열 넷째는 헛되이 최승을 계탁하는 론[妄計最勝論]이며, 열 다섯째는 헛되이 청정을 계탁하는 론[妄計淸淨論]이며, 열 여섯째는 헛되이 길상을 계탁하는 론[妄計吉祥論]이다.
  인 가운데에 과가 있다는 론[因中有果論]2)이란 말하자면,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 중에 어떤 한 사람이 항상 어느 때이거나 모든 원인 중에 결과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이와 같은 견해[見]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니, 즉 우중외도(雨衆外道)3)가 이러한 계탁[計]을 한다.
   무슨 인연 때문에 저 외도(外道)들은 위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위와 같은 이론을 세워서 원인에 결과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고 드러내 보이는가?
  
2) 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에 대해서 기술한다. 이하는 먼저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의 삿된 주장에 대하여 기술한다.
3) 수론사(數論師 Sa khya)들을 말한다. 이들은 25제(諦)를 세우는데, 신아(神我 Puru a)의 제(諦)를 제외한 23제(諦)를 과(果)라고 하고 자성(自性 Prak ti)의 제(諦)를 인(因)이라고 하며, 과(果)는 인(因) 가운데 존재하고 인(因) 과(果)의 별체(別體)는 없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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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르침[敎]과 이치[理]에 의하기 때문이다. 가르침[敎]이란 말하자면 그들의 먼저 스승이 지었던 교장(敎藏)4)을 들은 대로 계속 전수하여 지금에 이르르면서, 원인 중에 먼저 결과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치[理]란 마치 그 사문이나 바라문이 성품[性]을 심사(尋思)하고 성품을 관찰하여 심사지(尋思地)에 머무르고 스스로 성취한 지위[自辦地]에 머무르고 이생지(異生地)에 머무르며 사유에 따라 행을 관찰하는 지위[隨思惟觀察行地]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들은 '만약 저 성품으로부터 이 성품이 생기게 되면 일체의 세간(世間)은 모두 알고 모두 세우니, 그것이 이 원인이 되며 다른 것은 아니며, 또한 결과를 구하는 것은 오직 이 원인을 취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며, 또한 그것에 공영(功營)을 가하여 여러 가지 구하는 대상[事]을 구축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며, 또한 그 결과가 있으면 곧 그것5)으로부터 생겨나며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결과는 원인 속에 이미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세워야만 한다. 하나의 결과를 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취해야 하며, 모든 것에 공영(功營)을 가하여 구축해야 하며, 모든 것에 따라 모든 결과가 생겨나야만 한다'고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시설(施設)하기 때문에, 구하여 취하기[求取] 때문에, 소작(所作)을 결정하기 때문에, 생겨나기 때문에 그들은 원인 중에 항상 결과의 성품이 있다고 본다.
  자세하게 그들에게 물어야겠다6).
  그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인상(因相)이며, 무엇이 과상(果相)인가? 인(因) 과(果)의 두 상(相)이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은 것인가?
  만약 상(相)이 다르지 않다면 곧 인(因) 과(果)의 두 가지의 결정이 없어야 한다. 인(因) 과(果)의 두 가지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인(因)에 과(果)가 있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4) 가르침의 내용을 수록한 장경(藏經)을 의미한다.
5) 원인[因]을 의미한다.
6) 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에 대해서 기술하는 중, 그 두 번째로 이치로써 그들의 삿된 주장을 논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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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상(相)에 다름이 있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원인 중에 결과의 성품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相)인가, 이미 생겨난 상(相)인가?
  만약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相)이라고 하면, 곧 원인 중에 결과가 오히려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이미 생겨난 상(相)이라고 하면, 곧 결과의 체(體)가 이미 생겨났거늘 다시 원인으로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에 먼저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원인에 연(緣)을 기다려서 결과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또한 상이 있는 법[有相法}은 상이 있는 법[有相法]에 다섯 가지 상(相)이 있기 때문에, 결국에 훤히 알 수[了知] 있다. 첫째는 처소(處所)에서 얻을 수 있으니 독 속의 물과 같으며, 둘째는 소의(所依)에서 얻을 수 있으니 눈의 안식(眼識)과 같으며, 셋째는 자상(自相)에 의하여 얻을 수 있으니 헤아림[比度}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체(自體)7)에서 비롯하는 것과 같으며, 넷째는 곧 자체(自體)의 작업(作業)에 의해서 얻을 수 있으며, 다섯째는 원인의 달라짐[變異]에 의해서 결과가 달라지게 되며 혹은 연(緣)이 달라짐에 의해서 결과가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항상 어느 때나 원인 중에 결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런 인연에 의해서 그들이 세운 이론은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위와 같이 다르지 않은 상[不異相]에 의해서, 다른 상[異相]에 의해서,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未生相]에 의해서, 이미 생긴 상[已生相]에 의해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연에 따라서 드러난다는 론[從緣顯了論]8)이란 어떤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 중에 어떤 한 사람이 일체 제 법(法)의 성품은 본래 있어서 뭇 연[衆緣]을 따라서 드러나는 것이지, 연(緣)을 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이와 같은 견해[見]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 것이다. 즉 원인
  
7) 그 고유의 특징을 가진 본질을 의미한다.
8) 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종연현료론(從緣顯了論)에 대해서 기술한다. 이하는 먼저 종연현료론(從緣顯了論)의 삿된 주장[邪執]을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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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에 결과가 있다는 논자[因中有果論者]와 성상론자(聲相論者)가 이와 같은 계탁[計]을 한다.
   무슨 인연 때문에 원인 가운데에 결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논[因中有果論者]는 모든 원인 중에 먼저 결과의 성품이 있어서 연(緣)에 따라서 드러난다고 하는가?
   가르침[敎]과 이치[理]에 의하기 때문이다. 가르침[敎]이란 앞서 말한 것과 같으며, 이치[理]란 마치 어떤 사람이 성품을 심사(尋思)하고 성품을 관찰(觀察)하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앞과 같다. 그들은 '결과는 먼저 있는 것이므로 다시 원인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공(功)을 들이지 않고 결과를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시 무엇을 연(緣)하여 공용(功用)을 짓는가? 어찌 결과만을 드러내기[顯了]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이와 같은 허망된 분별을 짓고서 현료론(顯了論)을 세운다.
  자세하게 그들에게 물어야겠다9).
  그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장애하는 연(緣)이 없는 데도 장애가 있다는 것인가, 장애하는 연이 있다는 것인가?
  장애하는 연(緣)이 없는데도 장애가 있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장애하는 연(緣)이 있다고 한다면, 결과에 붙어 있는 원인인데 무슨 까닭에 장애하지 않는가?
  똑같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캄캄한 어둠이 독 안의 물을 가리고 또한 독도 가릴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장애의 연(緣)이 역시 장애의 원인이라고 말한다면 다시 원인을 드러내야만 한다. 다같이 장애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원인 속에 먼저의 결과의 성품이 있다고 드러내면서 원인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9) 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종연현료론(從緣顯了論)에 대해서 기술하는 중, 그 두 번째로 이치로써 그들의 삿된 주장을 논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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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그대들에게 물어야겠다.
  유성(有性)은 바로 장애의 연(緣)인 것인가, 결과의 성품인 것인가?
  만약 유성(有性)이 바로 장애의 연(緣)이라면 이는 곧 유성(有性)이 항상 현료(顯了)하지 않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원인 또한 있는 것인데 어떻게 장애되지 않는가?
  만약 결과의 성품이 장애의 연(緣)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하나의 법이 원인이면서 결과가 된다. 마치 싹이 종자가 되고 열매가 줄기가 되는 것과 같다. 원인이 곧 하나의 법인데도 또한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게 되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이제 그대들에게 묻겠다. 그대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본래의 법은 드러나는 것과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은 것인가?
  만약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법은 언제나 나타나야 하는데, 나타난 뒤에 다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다르다고 한다면 그 나타나는 것은 원인이 없는 것인가, 원인이 있는 것인가?
  만약 원인이 없다고 한다면 원인이 없이 나타남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만약 원인이 있다면 결과의 성품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원인의 성품이 아니고, 원인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과를 나타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위와 같이 장애의 연(緣)이 없기 때문에, 또한 장애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유상(有相) 때문에, 과상(果相) 때문에, 드러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한 '만약 법의 성품이 없으면 곧 상(相)이 없으며 만약 법의 성품이 있으면 상(相)이 있으며, 성품이 만약 없으면 현료(顯了)할 수 없고 성품이 만약 있으면 비로소 현료(顯了)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내가 이제 설명하겠다.
  비록 다시 있다고 하더라도 상(相)을 취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말하자면 멀리 있기 때문에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취할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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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네 가지 장애에 의하여 장애하기 때문에 취할 수 없으니,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취할 수 없으며, 혹은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에 취할 수 없으며, 혹은 감각기관[根]을 손상하고 잃었기 때문에 취할 수 없으며, 혹은 저것과 상응하는 지혜를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에 취할 수 없다.
  인과현료론(因果顯了論)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처럼 성상론자(聲相論者) 또한 도리에 맞지 않음을 알아야만 한다.
  이 가운데에 차별이 있다면 외도(外道)의 성론사(聲論師)는 '성상(聲相)은 상주(常住)하여 생기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으나 내뱉음[宣吐]으로 인해서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는 이와 같은 견해[見]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운다. 그러므로 이 이론도 현료론(顯了論)과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가고 옴이 실재로 있다는 론[去來實有論]10)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이나 이 법에 머무르는 사람 중에 바르지 못한 사유(思惟)에 의해서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어서 그 상(相)을 성취하는 것이 마치 현재와 같이 실재로 있는 것이요, 거짓이 아니다'라는 이와 같은 견해[見]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운다.
   무슨 인연 때문에 그들은 위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위와 같은 이론을 세우는가?
   가르침[敎]과 이치[理]에 의하기 때문이다. 가르침[敎]이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한 이 법에 머무르는 사람은 여래(如來)의 경전에 대하여 이치에 맞지 않게 분별하기 때문이다. 즉 경전에서 '일체가 있다는 것은 곧 12처(處)이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12처는 실상(實相)으로 곧 있는 것이다.
  또한 박가범(薄伽梵)께서 과거(過去)의 업(業)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또한 과거의 색(色)이 있고 미래(未來)의 색(色)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다고 자세히 말씀하셨다.
  
10) 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거래실유론(去來實有論)에 대해서 기술한다. 이하는 먼저 거래실유론(去來實有論)의 삿된 주장[邪執]을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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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치[理]란 어떤 하나의 성품을 심사(尋思)하고 관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그들은 '만약 법의 자상(自相)이 이 법에 안주하면 진실로 있는 것이며, 이것에 만약 미래가 없다면 그 때 상(相)을 받지 않아야 하고, 이것에 만약 과거가 없다면 그 때에 자상(自相)을 잃게 된다. 만약 이와 같이 되면 모든 법의 자상(自相)은 성취되지 않게 된다'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러한 도리에 의하기 때문에 또한 진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의 성상(聲相)은 실재로 있다'는 이와 같은 사유에 의해서 위와 같은 견해[見]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 것이다.
  자세하게 그들에게 물어야겠다11).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와 미래의 두 가지 상(相)은 현재의 상(相)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 같은 상(相)이라고 한다면 3세(世)의 상(相)을 세우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다른 상(相)이라고 한다면 성(性)과 상(相)이 실유(實有)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자신들의 뜻에서 바라는 내용을 말해야 한다.
  3세(世)에 떨어지는 법은 항상[恒]한 상(相)인가, 무상(無常)한 상(相)인가?
  만약 항상한 상(相)이라고 한다면 3세(世)에 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무상한 상(相)이라고 한다면 3세(世) 중에 항상 실유(實有)한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지금 그대들에게 묻겠으니, 그대들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미래의 법이 현재세(現在世)에 이른다고 여기는가? 거기서12) 죽은 후에 여기에13) 생기는 것인가? 곧 미래에 머무름을 연(緣)으로 하여 현재를 사는 것인가? 본래는 업(業)이 없는데 지금 업(業)이 있는 것인가? 본래의 상(相)은
  
11) 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거래실유론(去來實有論)에 대해서 기술하는 중, 그 두 번째로 이치로써 그들의 삿된 주장을 논파한다.
12) 미래세(未來世)를 의미한다.
13) 현재세(現在世)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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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만(圓滿)하지 않는데 지금 상[異相]이 원만한 것인가? 본래의 다른 상[異相]이 지금 다른 상[異相]으로 되는 것인가? 미래에 현재의 부분[現在分]이 있는 것인가?
  만약 미래의 법이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면 이는 곧 방소(方所)가 있고 다시 현재와 차별이 없어야 하며 다시 항상해야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미래에 죽고 나서 현재에 생긴다고 한다면 이는 곧 금생에 사는 것이 아닌 미래여서 현재세(現在世)의 법에서는 본래 지금 사는 것이 없으며 또한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를 죽여 없앴다고 말하는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법이 미래에 머무르므로 그것을 연(緣)으로 하여 현재를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항상해야 만 하고 또 본래가 지금 사는 것이 없어야 하므로 미래의 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어야 하니,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본래의 업(業)의 작용이 없는데도 이제 업의 작용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본래 없는 것이 지금 있는 것으로서 곧 앞에서 설명한 과실(過失)과 같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업의 작용[業用]과 저 본래의 법[本法]은 다른 상[異相]인 것인가, 다른 상[異相]이 아닌 것인가?
  만약 다른 상[異相]이 있다고 한다면 이 업의 작용의 상(相)은 미래에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다른 상[異相]이 아니라고 한다면 본래의 업의 작용이 없는데 이제 업의 작용이 있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업의 작용이 없음에 이와 같은 과실이 있는 것과 같이 상(相)의 원만(圓滿)과 다른 상[異相]과 미래의 부분[未來分]의 상(相) 또한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에 차이가 나는 것을 말하면 다시 자성(自性)이 뒤섞이는[雜亂] 과실이 있기14)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미래가 현재를 향하는 것처럼 위와 같이, 현재가 과거로 가는 것도 그 상응하는 바와 같이 과실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앞에서 헤아린 여러
  
14) 묘음존자(妙音尊者)의 설은 3세(世)에 모두 3세(世)의 상(相)이 있기 때문에 3세(世)가 뒤섞이는 과실(過失)이 있다고 논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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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과 설파(說破)된 도리(道理)와 같다.
  위와 같이 자상(自相) 때문에, 공상(共相) 때문에, 왔기[來] 때문에, 죽기[死] 때문에, 연(緣)으로 하여 생기기[生] 때문에, 업(業) 때문에, 상(相)의 원만(圓滿) 때문에, 상(相)이 다르기 때문에, 미래에 부분이 있는 것 때문에, 과거와 미래의 본체[體]가 실유(實有)한다는 이론을 주장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위와 같이 말하고 나면, 다시 어떤 사람이 '만약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어떻게 없는 것을 연(緣)하여 깨달음의 구름[覺轉]이 있으며, 만약 없는 것을 연(緣)하여 깨달음의 구름이 있다고 한다면 어찌 마치 일체 존재하는 것[有]은 12처(處)라고 설한 것과 같이 가르침과 달라지는 과실이 있지 않는가?'라고 비난한다.
  나는 이제 그대에게 묻겠으니, 그대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세간에서 없음[無]을 취하는 깨달음[覺]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일어날 수 없는 것인가?
  만약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능히 무아(無我)와 토끼의 뿔과 석녀(石女)의 아이 등을 취하는 깨달음[覺]은 모두 없어야만 하므로 이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박가범(薄伽梵)께서 '나는 모든 아첨할 줄 모르는 성문(聲聞)들이 내가 설한 것을 그대로 바르게 닦고 행할 때 있는 것은 있다고 알고 없는 것은 없다고 아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이러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없음[無]을 취하는 깨달음[覺]은 있음의 행(行)을 짓는 것인가, 없음의 행(行)을 짓는 것인가?
  만약 있음의 행(行)을 짓는다고 한다면 없음을 취하는 깨달음이면서 있음의 행(行)을 짓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없음의 행(行)을 짓는다면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없음의 행(行)의 깨달음은 있음의 현상[有事]을 연(緣)하여 일어나는가, 없음의 현상[無事]을 연(緣)하여 일어나는가?
  만약 있음의 현상을 연(緣)하여 일어난다고 한다면 없음의 행(行)의 깨달음이 있음의 현상을 연(緣)하여 일어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없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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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상을 연(緣)하여 일어난다면 연(緣)할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비록 일체 존재하는 것[有]은 12처라고 말씀하셨을지라도 그러나 유법(有法)의 밀의(密意)로 유상(有相)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며, 무법(無法)의 밀의(密意)로 무상(無相)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 하면 만약 유상법(有相法)이면 유상(有相)을 지닐 수 있고, 무상법(無相法)이면 무상(無相)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 법이라고 하는 것이며 모두 있음[有]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과 다르다고 한다면 모든 수행자(修行者)는 유(有)에 대해서만 알뿐이고 무(無)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소지법(所知法)을 관(觀)하는 것이 아니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비록 과거의 업(業)이 있다'고 하고 '이 업 때문에 모든 유정(有情)은 손해(損害) 있는 느낌[受]과 손해 없는 느낌[受]을 받는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그 습기(習氣)에 의해서 밀의(密意)로 짐짓 있다[有]고 말하는 것이다. 제 행(行) 중에 일찍이 청정[淨]과 청정하지 않음[不淨]의 업이 있어서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며, 이 인연에 의해서 그 행(行)은 매우 달라지고[勝異] 상속(相續)하여 구르는 것을 습기(習氣)라고 하며, 이 상속에 포함되는 습기로 인해서 애(愛)와 불애(不愛)의 과(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허물이 없고 그대들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다시 비록 과거의 색(色)이 있고 미래의 색(色)이 있으며 현재의 색(色)이 있으며 위와 같이 하여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 역시 이와 같다고 말할지라도 이것 역시 3가지 행상(行相), 즉 인상(因相)과 자상(自相)과 과상(果相)에 의지하여 밀의(密意)로써 말한 것이다. 그 인상(因相)에 의지하여 밀의(密意)로 미래가 있다고 설한 것이며, 그 자상(自相)에 의지하여 밀의(密意)로 현재가 있다고 설한 것이며, 그 과상(果相)에 의지하여 밀의(密意)로 과거가 있다고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과실이 없다.
  또한 과거와 미래는 실유상(實有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미래(未來)에 12가지 상(相)이 있는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인이 드러난 바의 상[因所顯相]이고, 둘째는 본체가 아직 생기지 않은 상[體未生相]이며, 셋째는 뭇 연을 기다리는 상[待衆緣相]이며, 넷째는 이미 생겨난 종류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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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已生種類相]이며, 다섯째는 생겨날 수 있는 법의 상[可生法相]이며, 여섯째는 생겨날 수 없는 법의 상[不可生法相]이며, 일곱째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잡염의 상[未生雜染相]이며, 여덟째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청정의 상[未生淸淨相]이며, 아홉째는 응당 구할 수 있는 상[應可求相]이며, 열째는 응당 구할 수 없는 상[不應求相)이며, 열 한째는 관찰에 상응하는 상[應觀察相]이며, 열 둘째는 관찰에 상응하지 않는 상[不應觀察相]이다.
  현재(現在)에도 12가지 상(相)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과가 드러난 바의 상[果所顯相]이고, 둘째는 체가 이미 생겨난 상[體已生相]이며, 셋째는 뭇 연이 모인 상[衆緣會相]이며, 넷째는 이미 생겨난 종류의 상[已生種類相]이며, 다섯째는 한 찰나의 상[一刹那相]이며, 여섯째는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 법의 상[不復生法相]이며, 일곱째는 현재의 잡염의 상[現雜染相]이며, 여덟째는 현재의 청정의 상[現淸淨相]이며, 아홉째는 희락할 수 있는 상[可憙樂相]이며, 열째는 희락할 수 없는 상[不可憙樂相]이며, 열 한째는 관찰에 상응하는 상[應觀察相]이며, 열 둘째는 관찰에 상응하지 않는 상[不應觀察相]이다.
  과거(過去)에도 또한 12가지 상(相)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이도인상(已度因相)이고, 둘째는 이도연상(已度緣相)이며, 셋째는 이도과상(已度果相)이며, 넷째는 체가 이미 무너진 상[體已壞相]이며, 다섯째는 이미 멸한 종류의 상[已滅種類相]이며, 여섯째는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 법의 상[不復生法相]이며, 일곱째는 잡염을 그친 상[靜息雜染相]이며, 여덟째는 청정을 그친 상[靜息淸淨相]이며, 아홉째는 돌이켜 연연해하는 것과 상응하는 상[應顧戀處相]이며, 열째는 돌이켜 연연해하는 것과 상응하지 않는 상[不應顧戀處相]이며, 열 한째는 관찰에 상응하는 상[應觀察相]이며, 열 둘째는 관찰에 상응하지 않는 상[不應觀察相]이다.
  나를 계탁하는 론[計我論]15)이란 어떤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이 말하자면 '나[我] 살타(薩)16) 명자(命者)는 있으며, 양육자(養育者) 삭
  
15) 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계아론(計我論)에 대해서 기술한다. 이하는 먼저 계아론(計我論)의 삿된 주장[邪執]을 기술한다.
16) 범어 Sattva의 음사어로서 유정(有情)으로 의역(意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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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취자(數取趣者)17)는 있으며, 이와 같은 등의 진리[諦]는 실재로 상주(常住)18)한다'라는 이와 같은 견해[見]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외도(外道) 등이 이와 같은 계탁[計]을 한다.
   무엇 때문에 저 외도(外道)들은 위와 같은 견해[見]을 일으키고 위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가?
   가르침[敎]과 이치[理] 때문이다. 가르침이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이치란 어느 하나의 성품[性]을 심사(尋思)하고 성품[性]을 관찰하는 것과 같으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두 가지의 원인 때문이니, 첫째는 먼저 사량하여 느끼지[思覺] 못했는데, 갑자기[率爾] 살타(薩)가 있어서 느끼기 때문이요, 둘째는 먼저 이미 사량하여 느꼈던 것을 작용하는 것[作]이 있어서 얻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我]가 없다면 다섯 가지 대상[事]을 보면서 다섯 가지 대상에 대하여 내가 있다는 느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첫째는 색(色)의 형상[形]을 보고 나서 색의 형상에 대한 지각[覺]만을 일으켜야 하고 살타(薩)의 지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둘째는 고 락을 따르는 행[順苦樂行]을 보고 나서 수(受)의 지각만을 일으켜야 하고 뛰어나고 열등하다는 살타(薩)의 지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셋째는 이미 이름이 만들어진 사람의 이름과 상응(相應)하는 행(行)을 보고 나서 상(想)의 지각[覺]만을 일으키고 찰제리(刹帝利) 바라문(婆羅門) 폐사(吠舍) 술타라(戌陀羅) 불수(佛授) 덕우(德友) 등의 살타(薩)의 지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넷째 청정[淨]과 청정하지 않음[不淨]과 상응하는 행(行)을 짓는 것을 보고 나서 행(行)의 지각만을 일으켜야 하고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라는 살타의 지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는 경계(境界)에 대해서 식(識)이 따라 구르는 것[隨轉]을 보고 나서 마음의 지각[心覺]만을 일으켜야 하고 '나에 대해
  
17) 삭취취(數取趣)는 범어 Pudgala의 의역(意譯)으로서 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 음사되기도 한다. 이는 곧 유정범부(有情凡夫)라는 뜻으로서 범부(凡夫)는 수시로 5취(趣)에 태어남을 취하고 윤회(輪廻)하기 때문에 삭취취(數取趣)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18)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은 상주(常住)를 당주(當住)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상주(常住)의 오기(誤記)인 듯 하여 바로 잡아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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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볼 수 있다'고 하는 등의 살타(薩)의 지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먼저 사량으로 지각하지 못한 다섯 가지의 대상[事]에 대하여 다섯 가지의 살타만이 지각하기 때문에 제 행(行)이 지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먼저 사량하여 지각하는 것이 아니다. 보고 나서 갑자기 살타(薩)가 있어서 지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결정코 실아(實我)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만약 아(我)가 없다고 한다면 응당 제 행(行)에 대해서 먼저 사량으로 지각[思覺]을 일으켜서 소작(所作)이 있게 된다'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나는 눈으로써 모든 색(色)을 볼 것이다, 지금 색들을 본다, 색들을 보았다'고 하고 혹은 다시 마음을 일으켜서 '나는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작용은 모두 나라는 지각이 작용해서 먼저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서 보는 것이 이와 같듯이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에서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선업(善業)을 조작(造作)하고 선업(善業)을 그만두며, 불선업(不善業)을 조작하고 불선업(不善業)을 그만두는 이와 같은 등의 현상[事]은 모두 사량의 지각[思覺]을 먼저로 해야 비로소 작용(作用)할 수 있는 것이며, 제 행(行)에서만 이와 같은 작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량[思]에 의하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나는19) 그대들에게 묻겠으니, 그대의 뜻에 따라서 대답하라.
  본 대상[所見事]에 상즉[卽]하여 살타(薩)의 지각이 일어나는 것인가, 본 대상과는 다르게 살타(薩)의 지각이 일어나는 것인가?
  만약 본 대상과 상즉하여 살타의 지각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너희들은 색(色) 등에 상즉하여 살타(薩)가 있다고 계탁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있다고 계탁하는 것은 전도(顚倒)의 지각이다. 만약 보는 대상[所見事]과 다르게 살타(薩)를 일으킨다고 한다면 나에게 형량(形量)이 있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19) 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계아론(計我論)에 대하여 기술하는 중, 그 두 번째로 그들의 삿된 주장[邪執]을 열 가지로 타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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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은 뛰어나고 열등함이 있는 것,20) 혹은 찰제리(刹帝利) 등이 있는 것,21) 혹은 어리석음이 있는 것, 혹은 지혜로움이 있는 것,22) 혹은 그 색(色) 등의 경계를 취할 수 있기도 하는 것23)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법 자체(自體)에 의해서만 이러한 지각을 일으키는 것인가? 또는 다른 자체(自體)에 의해서 이러한 지각을 일으키는 것인가?
  만약 이 법의 자체에 의해서만 이러한 지각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보는 것[所見]에 상즉하여 그 '나'라는 지각을 일으키는 것은 전도(顚倒)의 지각이라고 설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다른 자체에 의해서 이러한 지각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곧 일체의 경계는 각기 일체의 경계의 지각이 원인이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정수(無情數)에서 유정(有情)이라는 지각과 유정수(有情數)에서 무정(無情)이라는 지각과 그 밖의 유정수(有情數)에서 그 밖의 유정의 지각이 일어나는 것인가,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만약 일어난다고 한다면 이는 곧 무정(無情)이 유정(有情)이어야만 하고, 유정(有情)이 무정(無情)이어야만 하며, 그 밖의 유정이 그 밖의 유정이어야 하므로 이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곧 현량(現量)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살타(薩)의 지각은 현량(現量)의 뜻을 취하는 것인가, 비량(比量)의 뜻을 취하는 것인가?
  만약 현량(現量)의 뜻을 취한다고 한다면 오직 색(色) 등의 온(蘊)만이 현량(現量)의 뜻이고 '나'라는 것은 현량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비량(比量)의 뜻을 취한다고 한다면 어리석고 어린아이와 같이
  
20) 이것은 수(受)의 심소(心所)이며, 수과(修果)의 뛰어남과 열등함을 말하는 것이다.
21) 이는 상(想)의 심소(心所)를 말하는 것이다.
22) 이는 행온(行蘊)을 말하는 것이다.
23) 이는 식온(識蘊)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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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갑자기 '나'라는 지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또한 나는 지금 그대에게 묻겠으니, 그대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세간(世間)의 소작(所作)과 같은 것을 지각으로써 원인을 삼는다고 하는 것인가, '나'로써 원인을 삼는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지각으로써 원인을 삼는다고 한다면 나의 소작[我所作]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나'로써 원인을 삼는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사량으로 지각해서[思覺] 소작(所作)을 얻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소작사(所作事)의 원인은 항상[恒]한 것인가, 무상(無常)한 것인가?
  만약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 소작(所作)의 원인의 본체[體]가 달라지는데 나에게 소작(所作)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항상[恒]한 것이라고 한다면 달라짐이 없는데 달라짐이 없는데서 소작이 있으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동작(動作)하는 내가 있어서 소작(所作)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동작(動作)하는 내가 없는데도 소작(所作)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동작(動作)하는 내가 있어서 소작(所作)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항상 짓는 것이 있으므로 다시 짓지 않아야만 하고, 만약 동작(動作)하는 내가 없는데도 소작(所作)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동작(動作)하는 성품이 없으면서도 소작(所作)이 있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원인이 있기 때문에 나의 소작(所作)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원인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이 나는 다른 원인을 일으켜서[策發] 비로소 소작(所作)이 있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원인이 없다고 한다면 어느 때나 모든 일[一切事]을 지어야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나'는 스스로를 의지하기 때문에 소작(所作)이 있는 것인가, 다른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소작(所作)이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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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스스로를 의지한다고 한다면 이 '나'가 스스로 늙고 병들고 죽고 여러 가지 물드는 따위의 일들을 짓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다른 것을 의지한다고 한다면 나의 소작(所作)이라고 계탁[計]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나는 지금 그대에게 묻겠으니, 그대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온(蘊)에 상즉[卽]하여 내가 있다고 시설(施設)한다고 하는 것인가,24) 여러 가지 온[諸蘊]에서 시설한다고 하는 것인가? 온(蘊) 외의 그 밖의 처소라고 하는 것인가, 온(蘊)에 속해 있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온(蘊)에 상즉[卽]해서 나를 시설한다고 한다면 이는 나와 온(蘊)의 차별이 없는데도 내가 있다는 진리[諦實]가 상주(常住)함을 계탁하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여러 가지 온[諸蘊]에서라고 한다면 이때의 나는 항상[恒]한 것인가, 무상(無常)한 것인가?
  만약 항상[恒]한 것이라고 한다면 상주하는 내가 여러 가지 괴로움과 즐거움에 손익(損益)을 받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손익(損益)이 없는데도 법(法)과 비법(非法)을 일으키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법(法)과 비법(非法)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온[諸蘊]의 몸은 필경에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또한 공용(功用)에 의하지 않고도 나는 항상 해탈해야만 한다.
  만약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한다면 온(蘊)의 체(體)를 떠나서 밖의 생(生) 멸(滅)이 있어서 상속유전(相續流轉)하는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여기에서 없어진 후에 다른 곳에서 짓지 않아도 얻는다고 한다면 큰 과실이 있어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온(蘊) 외의 그 밖의 다른 처소라고 한다면 그대가 계탁하는 바 '나'는 무위(無爲)이어야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온(蘊)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는 어느 때나 염오(染汚)함이 없어야만 하고 나와 몸은 서로
  
24) 여기에서 온(蘊)이란 5온(蘊)을 말하며, 아체(我體;靈魂)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에 상즉(相卽)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즉온(卽蘊)의 아(我)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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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한 것이 아니어야 하므로 이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계탁하는 바[所計]의 '나'는 보는 것 등의 상(相)과 상즉[卽]한다고 하는 것인가, 보는 것 등의 상(相)을 떠났다고 하는 것인가?
  보는 것 등의 상(相)과 상즉[卽]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보는 등에 상즉하여 짐짓 보는 것 등의 상(相)을 세운다고 하는 것인가, 보는 등을 떠나서 별도의 보는 것 등의 상(相)을 세운다고 하는 것인가?
  보는 등에 상즉해서 짐짓 보는 것 등의 상(相)을 세운다고 한다면 보는 등은 바로 보는 것 등이어야만 하는데 그대는 '나'를 세워서 보는 것 등이라고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 하면 보는 것 등과 보는 상(相)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보는 등을 떠나서 별도의 보는 것 등의 상(相)을 세운다고 한다면 그 보는 등의 법은 내가 만들게 되는 업(業)인 것인가, 내가 가지게 되는 도구[具]인 것인가?
  만약 내가 만들게 된 업(業)이라고 한다면 마치 종자(種子)가 무상(無常)과 같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도공[陶師]이 거짓으로 만든 장부(丈夫)와 같다고 한다면 이러한 '나'는 무상(無常)한 것이 되어야 하고 거짓으로 세운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대가 '항상[常] 실재[實]이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신통(神通)을 갖춘 거짓으로 세운 장부(丈夫)와 같다고 한다면 이러한 '나'는 또한 무상(無常)한 것이 되어야 하고 거짓으로 세운 것이 여러 가지의 소작(所作)에 대하여 뜻에 따라 자재(自在)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이 또한 앞의 경우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땅[地]과 같다고 한다면 이는 무상(無常)한 것이 되어야 하며, 또한 계탁하는 대상[所計]의 '나'는 지대(地大)와 같이 드러난[顯了] 작업(作業)이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 하면 세간(世間)의 지대(地大)는 소작(所作)의 업(業)의 작용이 드러나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만물을 부지하여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데, '나'라는 것은 이와 같은 업(業)이 드러난 것을 얻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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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허공과 같이 된다고 한다면 실유(實有)가 아니어야 하니, 색(色)이 없는데도 짐짓 허공을 세웠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허공은 비록 가유(假有)일지라도 업(業)의 작용이 있음을 분명하게 얻을 수 있지만 계탁한 바[所計]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세간(世間)의 허공의 소작(所作)의 업(業)의 작용을 분명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허공에 의해서 가고 오고 굽히고 펴는 등의 작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는 등은 내가 만들게 되는 업(業)이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내가 가지게 되는 도구[具]라고 하고 낫[鎌]과 같다고 말한다면 낫을 떠나서 그 밖의 물건으로도 역시 끊을 수 있는 작용이 있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보는 등을 떠나서 그 밖의 다른 물건 위에서 보는 등의 업(業)의 작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불[火]과 같다고 한다면 멋대로 나에 대해서 계탁[計]하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 하면 세간의 불은 능히 불태우는 것을 떠나서도 역시 스스로 불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보는 것 등의 상(相)을 떠나서 별도의 나가 있다고 한다면 계탁하는 바[所計]의 아상(我相)은 모든 양(量)에 어긋나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나는 지금 그대들에게 묻겠으니, 그대들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그대들이 계탁하는 바[所計]의 '나'는 염(染) 정(淨)과 상응하면서 염(染) 정(淨)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염(染) 정(淨)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염(染) 정(淨)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염(染) 정(淨)과 상응하면서 염(染) 정(淨)이 있다고 한다면 제 행(行) 가운데에 질병과 여러 가지 횡액[橫]과 그것의 멈춤과 더욱 증가함을 얻을 수 있나니, 곧 그 제 행(行)은 비록 '내'가 없더라도 염(染) 정(淨)과 상응함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바깥의 물질과 같이 안의 몸[內身]도 또한 그러하며 비록 내가 있지 않더라도 염(染) 정(淨)의 뜻은 성립되기 때문에 그대가 '나'라고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염(染) 정(淨)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염(染) 정(淨)이 있다고 한다면 염(染) 정(淨)의 상(相)을 떠나서 나에게 염(染) 정(淨)이 있게 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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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나는 그대들에게 묻겠으니, 그대들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그대들이 계탁하는 바[所計]로서의 '나'는 유전상(流轉相)과 상응하면서 유전(流轉)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유전상(流轉相)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유전(流轉)하고 멈추는 것[止息]이라고 하는 것인가?
  만약 유전상(流轉相)과 상응하면서 유전(流轉)하고 멈추는 것이라면 제 행(行)에서 다섯 가지 유전상(流轉相)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첫째는 원인이 있어야 하며, 둘째는 생길 수 있어야 하고, 셋째는 멸할 수 있어야 하며, 넷째는 전전상속(展轉相續)하여 일어나야 하며, 다섯째는 달라짐[變異]이 있어야 한다.
  만약 제 행(行)에서 이 유전상(流轉相)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마치 몸 싹 시내 등불 탈 것 등과 같은 유전(流轉)의 작용 속에서 비록 '나'라고 하는 것은 없을지라도 곧 그 제 행(行)에 유전(流轉)과 그리고 멈춤이 있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나를 계탁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그 상(相)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유전(流轉)하고 멈추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계탁하는 바[所計]로서의 '나'는 유전상(流轉相)이 없으면서도 유전(流轉)과 멈춤[止息]이 있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묻겠으니, 그대들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그대들이 계탁하는 바[所計]로서의 '나'라는 것은 경계에 의해서 생긴다고 하는 것인가, 고(苦) 낙(樂) 그리고 사업(思業)에 의해서 아울러 번뇌(煩惱)와 수번뇌(隨煩惱) 등의 달라지는 것에 의해서 설명하여 수자(受者) 작자(作者) 해탈자(解脫者)라고 하는 것인가, 그러한 달라짐에 의하지 않고 설명하여 수자(受者) 등이라고 설하는 것인가?
  만약 그 달라지는 것에 의해서라고 한다면 이는 곧 제 행(行)이 수자(受者)가 되고 작자(作者)가 되고 그리고 해탈자(解脫者)가 되는데, 어찌 '나'를 헤아릴 필요가 있겠는가? 가령 이것이 '나'라면 나는 무상(無常)한 것이어야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그 달라지는 것에 의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는 달라지는 것이 없으면서도 수자(受者)요, 작자(作者)요 해탈자(解脫者)라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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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만 작자(作者)가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또한 다른 법(法)에 대해서 작자(作者)가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만약 나에게 있어서만 이라고 한다면 세간(世間)에서 불을 타는 것이라고 하거나 빛을 비추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다른 법(法)에 대해서라고 한다면 곧 보는 등의 제 근(根)에 대해서 작자(作者)라고 말하며 헛되이 나를 분별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그대들의 뜻에서 바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나에 있어서만 나를 세운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다른 법(法)에서도 나를 세운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나에 있어서만 이라고 한다면 세간에서 그 가설(假說)의 사부(士夫)의 몸을 덕우(德友) 또는 불수(佛授) 등이라고 부르지 않아야 한다.
  만약 또한 다른 법(法)에 대해서라고 한다면 이는 곧 제 행(行) 중에 가설(假說)로 '나'라고 이름할 뿐인데, 어찌하여 별도의 내가 있다고 집착할 필요가 있겠는가? 왜냐 하면 세간(世間)의 사람들은 오직 가설(假說)의 사부(士夫)의 몸에 대해서 유정(有情)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유정의 이름을 세우고 자(自) 타(他)의 차별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라고 계탁하는 견해[見]는 선(善)이라고 하는 것인가, 불선(不善)이라고 하는 것인가?
  만약 선(善)이라고 한다면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 깊이 아견(我見)을 일으키고, 방편(方便)에 의하지 않고도 갑자기 일으키어 여러 중생들에게 해탈(解脫)을 두렵게 여기게 하는 것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또한 여러 가지 악(惡)과 과실(過失)을 증장(增長)할 수 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불선(不善)이라고 한다면 올바름[正]과 전도하지 않음[非顚倒]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삿된 전도[邪倒]로 계탁하는 바[所計]로서의 나의 본체[我體]는 실유(實有)라고 하면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아(無我)의 견해[見]는 선(善)이라고 하는 것인가, 불선(不善)이라고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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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선(善)이라고 한다면 그 상주(常住)하며 실유(實有)인 나 위에서 내가 있지 않음을 보면서도 선성(善性)이요, 전도(顚倒)의 계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불선(不善)이라고 한다면 일체지자(一切智者)가 선설(宣說)할 경우와 정근(精勤)의 방편(方便)을 일으킬 경우에 중생들로 하여금 해탈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빨리 청정한[白淨] 결과를 증득할 수 있게 하여 모든 악(惡)의 과실(過失)을 여실(如實)하게 대치(對治)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곧 아성(我性) 자체가 '나'라고 계탁하는 것인가, 아견(我見)에 의한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아성(我性) 자체가 '나'라고 계탁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느 때나 무아(無我)의 깨달음이 없어야만 한다. 만약 아견(我見)에 의해서라고 한다면 비록 실아(實我)는 없을지라도 아견(我見)의 힘에 의해서 제 행(行) 가운데에 헛되이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반드시 내가 실유(實有)한다고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위와 같이 지각하지 않음[不覺]을 먼저로 하여 그 지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리고 사량의 지각[思覺]을 먼저로 하여 소작(所作)이 있음을 보기 때문에, 그리고 제 온(蘊) 가운데에 거짓으로 시설(施設)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상(相)에 대해서 안립(安立)하여 있다고 하기 때문에, 그리고 잡염(雜染)과 청정(淸淨)을 건립(建立)하기 때문에, 그리고 유전(流轉)과 멈춤[止息]을 세우기 때문에, 그리고 수자(受者) 작자(作者) 해탈자(解脫者)를 짐짓 세우기 때문에, 그리고 작자(作者)가 있음을 시설(施設)하기 때문에, 그리고 언설(言說)을 시설(施設)하기 때문에, 그리고 견해[見]를 시설(施設)하기 때문에 실아(實我)가 있다고 계탁하는 것은 모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나는 이제 제일의(第一義)의 아상(我相)에 대하여 말하겠다25). 즉 '나'란 제 온(蘊)에서 짐짓 세워서 있다고 하는 것 뿐이요, 실유(實有)의 내가 있는
  
25) 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계아론(計我論)에 대한 기술중, 그 세 번 째로 정의(正義)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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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 아니다. 더욱이 이 가아(假我)가 저 제 온(蘊)과 다르고 다르지 않은 성품이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 '나'는 실유(實有)의 체(體)라고 혹은 그 제 온(蘊)이 나의 성상(性相)이라고 말하지 말라.
  또한 이 가아(假我)는 무상(無常)한 상(相)이면서 항상[恒]하는 상(相)이 아니며, 안보(安保)의 상(相)도 아니고 달라지는 상(相)이며, 생기하는 법의 상(相)이며, 늙고 병들고 죽는 상(相)이다. 오직 제 법(法)의 상(相)일 뿐이며, 오직 고뇌(苦惱)의 상(相)일 뿐이므로 박가범(薄伽梵)께서 '비구(比丘)들이여, 마땅히 알라. 제 법(法) 가운데에서 짐짓 내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 나는 무상(無常)하여 항상함[恒)]이 없으며 안보(安保)할 수 없으며 변하고 무너지는 법[變壞法]이다'고 이와 같이 자세히 말씀하셨다.
  4인(因)에 의하기 때문에 제 행(行) 가운데에서 짐짓 내가 있다고 시설한 것이다. 첫째는 세간(世間)의 언설(言說)로서 쉽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여러 가지 세간(世間)을 수순(隨順)하고자 하기 위함이요, 셋째는 결정코 무아(無我)를 말하여 여러 가지 두려움들을 끊어 없애기 위함이요, 넷째는 자타(自他)가 성취한 공덕(功德)과 성취한 과실(過失)을 선설(宣說)하여 결정적인 신해심(信解心)을 일으키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論]은 도리에 맞는 설명이 아니다.
  항상함을 계탁하는 론[計常論]26)이란 어떤 사문(沙門)이나 바라문(婆羅門)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 세간(世間)은 모두 다 실재로 상주(常住)한다. 직(作)의 소작(所作)이 아니며27), 화(化)28)의 소작(所作)이 아니며, 손해(損害)할 수도 없고 적집(積集)하여 머무르는 것이 마치 이사가(伊師伽)29)와 같다'
  
26) 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다섯 번째로 계상론(計常論)에 대해서 기술한다. 이하는 먼저 계상론(計常論)의 삿된 주장을 기술한다.
27) 지음[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작(自作)으로서 숙작인(宿作因)을 말하며 둘째는 타작(他作)으로서 공(空) 시(時) 방(方) 아(我) 본제(本際) 등의 지음[作]을 말한다. 그런데 수론사(數論師)들은 이 두 가지가 작자(作者)가 짓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28) 화(化)란 모든 사물을 변화시키는 자재천(自在天) 및 범왕(梵王) 등을 말한다.
29) 이사가(伊師伽)란 범어(梵語) ka의 음사어로서 인도[西方]에는 이에 대한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왕사성(王舍城) 부근의 이사가산(伊師伽山)이 있어서 크고도 견고하므로 이를 높고 상주(常住)하며 견고한 나[我]에 비유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사가(伊師伽) 풀이 있어서 정실(貞實)하여 일찍이 쇠락한 적이 없다고 하므로 이를 항상한 나에 비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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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見]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제(前際)30)를 계탁하여 일체(一切)는 항상[常]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일부분만 항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후제(後際)31)를 계탁하여 상(相)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상(相)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상도 아니고 상아님도 아니다[非想非非想]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다시 극미(極微)는 상주(常住)한다고 계탁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와 같은 계탁[計]을 한다.
   무엇 때문에 그 외도(外道)들은 '나와 세간(世間)은 상주(常住)한다'고 하는 이와 같은 견해[見]을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는가?
   그들이 계탁하는 인연(因緣)은 경전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과 같으니, 그 상응하는 것에 따라서 모두 다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전제(前際)를 계탁한다란 상(上) 중(中) 하(下)의 정려(靜慮)에 의하여 숙주수념(宿主隨念)을 일으키되, 불선(不善)의 인연[緣]을 일으켰기 때문에 과거(過去)의 제 행(行)에 대해서 단지 기억[憶念]할 뿐 여실(如實)히 알지 못하며, 과거세(過去世)를 계탁하여 전제(前際)로 삼기 때문에 상견(常見)을 일으키는 것이다. 혹은 천안(天眼)에 의해서 현재세(現在世)를 계탁하여 전제(前際)로 삼기 때문에 제 행(行)이 찰나(刹那)로 생멸(生滅)하고 유전(流轉)하는 것을 여실(如實)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제 식(識)이 유전상속(流轉相續)하면서 끊임없이 이 세간으로부터 저 세간으로 이르는 것을 보기 때문에 상견(常見)을 일으키는 것이다. 혹은 범왕(梵王)의 뜻에 따라 성립한다고 보기도 하고 혹은 4대종(大種)으로 달라지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 것이며, 혹은 제 식(識)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 것이다.
  후제(後際)를 계탁한다란 상(想)과 수(受)에 있어서 차별을 본다할지라도 자상(自相)의 차별을 보지 않아서 이 때문에 상견(常見)을 일으켜서 '나와 세간은 모두 다 상주(常住)한다'고 하는 것이다.
  
30) 전세(前世)를 말한다.
31) 후세(後世)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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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극미(極微)는 상주(常住)한다고 계탁한다란 세간정려(世間靜慮)에 의지해서 여실(如實)하게 연기(緣起)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견해[見]를 일으키는 것이다. '유(有)를 먼저로 하여 결과의 모이고 일어남[集起]이 있으며, 떨어지고 흩어짐을 먼저로 하여 결과의 무너지고 멸함[壞滅]이 있다'고 계탁한다. 이 인연에 의해서 그들은 '여러 미세한 성품[衆微性]으로부터 거친 물건의 결과[麤物果]가 생기고 점차로 거친 물건을 쪼개어 이에 작은 것으로 머물게 되나니, 그러므로 거친 물건은 무상(無常)하지만 극미(極微)는 항상하다'고 말한다.
  이 가운데 전제(前際)와 후제(後際)에 상주(常住)한다고 계탁하는 이론[論]은 아집론(我執論)의 차별상(差別相)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라는 이론에서 이미 타파[破]되었으며, 나의 차별상(差別相)에 대한 이론 또한 이미 타파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32)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묻겠으니, 그대들의 뜻에 따라 대답하라.
  숙주수념[宿主之念]은 제 온(蘊)을 취한다고 하는 것인가, 나를 취한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제 온(蘊)을 취한다고 한다면 나와 세간이 항상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나를 취한다고 한다면 과거(過去)의 이와 같고 이와 같은 이름 등을 갖고 있는 유정(有情)의 종류들에 대해서 나는 일찍이 이와 같은 이름과 이와 같은 성(姓) …… 이었다고 기억[憶念]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현전(現前)에 화합(和合)하는 색경(色境)을 연(緣)하여 안식(眼識)이 일어날 때 나머지 현전(現前)하지 않고 화합하지 않는 색경[境]에 대해서 그 밖의 식(識)들은 멸(滅)한다고 하는 것인가, 구른다[轉]고 하는 것인가?
  만약 멸(滅)한다고 한다면 멸하여 무너지는[滅壞] 식(識)을 항상하다고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구른다고 한다면 하나의 경계에 일체
  
32) 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계상론(計常論)에 대해서 기술하는 중, 그 두 번째로 계상론(計常論)의 삿된 주장을 논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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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一切時)에 의지하여 일체의 식(識)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집착하는 바[所執]로서의 '나'는 상(想)의 소작((所作)과 수(受)의 소작(所作)에 의해서 달라짐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달라짐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 세간(世間)과 내가 상주(常住)한다고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없다고 한다면 하나의 상(想)이 있은 뒤에 다시 갖가지 상(想)이 있고 다시 작은 상[小想]과 무량상(無量想)이 있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순수한[純] 즐거움이 있고 뒤에 순수한[純] 괴로움이 있으며, 다시 괴로움도 있고 즐거움도 있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 있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목숨[命]이 곧 몸[身]이라고 계탁한다면 그것은 '내'가 색(色)이라고 계탁하는 것이요, 만약 목숨[命]과 몸[身]이 다르다고 계탁한다면 그것은 '내'가 색이 아니다[非色]고 계탁하는 것이요, 만약 '내'가 갖추어 두루 하고 둘도 없고 결함도 없다고 계탁한다면 그것은 '나' 또한 색(色)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기[非色]도 하다고 계탁하는 것이다. 만약 이를 대치(對治)하기 위해서 곧 이 뜻[義]에서 다른 구(句)와 문(文)으로 주장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나'는 색(色)도 아니고 색이 아닌 것[非色]도 아닌 것을 계탁하는 것이다.
  만약 적은 색[少色]과 적지 않은 색[少非色]을 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끝[邊]이 있다고 계탁하는 것이요, 만약 그것의 무량(無量)함을 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끝이 없다고[無邊] 계탁하는 것이요, 만약 다시 두루 하게 보아서 색(色)의 부분은 적고 색이 아닌 부분은 무량(無量)하며 혹은 색(色)의 부분은 무량(無量)하고 색이 아닌 부분은 적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끝이 있으면서[有邊] 또한 끝이 없는 것[無邊]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다. 만약 이를 대치(對治)하기 위해서 단지 문구[文]만이 다를 뿐이고 뜻[義]은 다르지 않는 것에 의해서 주장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邊非無邊]고 계탁하는 것이요, 혹은 해탈(解脫)의 '나'는 두 가지를 멀리 떠났다고 계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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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극미(極微)의 상주론(常住論)을 계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제 묻겠으니, 그대들의 뜻에 따라서 대답하라.
  그대들은 관찰(觀察)하고서 극미(極微)의 상주[常]를 계탁하는 것인가, 관찰하지 않고서 극미(極微)의 상주[常]를 계탁하는 것인가?
  만약 관찰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지혜로써 관찰하는 것을 떠나서 반드시 상주한다고 계탁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관찰했다고 한다면 모든 양(量)33)을 어겼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미진(微塵)의 성품은 미세함에 의하기 때문에 그것이 상주한다고 계탁하는 것인가, 거친 결과의 물질[麤物果]과 그 상(相)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상주한다고 계탁하는 것인가?
  만약 미세함에 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떨어져 흩어지고 줄어 없어지며 계속 다시 쇠하여 약해지는 것이 되는데도 이것이 상주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상(相)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극미(極微)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상(相)을 뛰어넘어서 같은 종류의 상(相)이 아니면서도 능히 저 종류의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 극미(極微)는 다른 상(相)으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극미(極微)로부터 일어나게 되는 거친 물질[麤物]은 달라진 상[異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달라진 상[異相]이라고 하는 것인가?
  만약 달라진 상[異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원인과 차별이 없기 때문에 역시 상주하는 것이어야 하고 이는 곧 인과(因果)의 결정이 없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달라진 상[異相]이라고 한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흩어지는[離散] 극미(極微)로부터 거친 물질[麤物]이 생긴다고 하는 것인가, 모인 것[積集]으로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인가?
  
33) 3량(量)을 말한다. 양(量)이란 척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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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흩어진 것[離散]으로부터라고 한다면 일체시(一切時)에 일체의 결과가 생겨야만 하니, 이는 곧 인과(因果)의 결정이 없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무인 것[積集]으로부터라고 한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거친 결과의 물질[麤物果]이 극미(極微)로부터 생길 때 그 형질(形質)의 양(量)을 초과[過]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저 형질(形質)의 양(量)을 초과한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그 형질(形質)의 양(量)보다 초과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형질(形質)의 부분이 있는 물질[物]로부터 형질(形質)의 부분이 있는 물질[物]이 생기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초과한다고 한다면 모든 극미(極微)의 본체[體]는 세분(細分)이 없기 때문에 분석할 수 없으며, 소생(所生)의 거친 물질[麤物] 또한 항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역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다시 모든 극미(極微)는 본래는 없으나 지금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극미(極微)의 상주를 계탁하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극미가 만들어 낸 거친 물질[麤物]은 종자[種] 등과 같다고 하는 것인가, 도공[陶師]들과 같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종자(種子) 등과 같다고 한다면 체(體)는 무상(無常)이어야만 하고, 만약 도공 등과 같다고 한다면 그 극미들은 도공들과 같이 생각[思慮]이 있어야만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종자와 도공 등과 같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곧 같은 비유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든 바깥의 물질[外物]의 일어남은 유정(有情)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유정(有情)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바깥의 거친 물질은 유정(有情)에 의해서 생기게 되는데, 소의(所依)의 미세한 물질은 유정(有情)에 의하지 않게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무엇이 다시 그것들에 대해서 그 공능(功能)을 짓는 것[制]인가?
  만약 유정(有情)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곧 작용이 없이 바깥의 물질이 생기게 되는 것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다.
  위와 같이 제 온(蘊)과 유정(有情)을 수념(隨念)하기 때문에, 그리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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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경계에 의해서 모든 식(識)이 유전[流]하면서 단절(斷絶)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상(想)과 수(受)로 변하고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전제(前際)를 계탁하고 후제(後際)를 계탁하여 상주한다고 하는 논[常住論]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또한 관찰하고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공상(共相) 때문에, 그리고 자상(自相) 때문에, 일으켜 만들기[起造] 때문에, 근본(根本)이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미(極微)의 상주론[常論]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34) 상주를 계탁하는 이론[計常論]은 도리에 맞는 설명이 아니다. 나는 이제 상주의 상[恒相]은 일체시(一切時)에 달라지는 상[變異相]이 없으며, 일체종(一切種)에 달라지는 상[變異相]이 없으며, 자연으로 달라지는 상[變異相]이 없으며, 다른 것에 의해서 달라지는 상[變異相]이 없으며, 또한 무상상(無常相)이 상주의 상[常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34) 16가지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가운데 계상론(計常論)에 대해서 기술하는 중, 그 세 번째로 정의(正義)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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