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17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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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 17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8) 사소성지 ②
  
  '부지런한 정진(精進)에 나아가면서 항상 견고(堅固)하고 용맹(勇猛)하면서 항상 불방일(不放逸)을 닦고 5지(支)를 잘 안주하게 해야 한다'라는 이 게송은 피갑(被甲) 방편(方便) 물러나지 않음[無退]의 정진에 의하기 때문에 '5지(支)의 불방일(不放逸)을 수습하기 때문에 닦아야 할 학[所修學]으로 하여금 청정하고 수승하게끔 하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5지(支)의 불방일(不放逸)이란 과거 미래 현재와 앞선 시(時)의 소작(所作)과 갖춘 소행(所行)을 말한다.
  '항상 자신의 제 선(善)을 숨기고 또한 뭇 악(惡)을 들추어내며[發露], 여러 의복(衣服) 등을 얻었을 때는 거칠거나 아름답거나 다 환희(歡喜)해야 한다. 세상 일[世務]에 적게 따르면 거칠고 해진 것[麤蔽]에도 따라서 구르며[隨轉], 두타[杜多]의 공덕(功德)을 수지[受]하라. 번뇌를 고요히 여의기[寂離] 위하여'라는 이 두 게송에서는 권속(眷屬)의 탐욕(貪欲)과 많은 탐욕[多欲]을 원리(遠離)하는 것이다. 만족[足]을 알지 못하는 인(因)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탐욕으로 만족을 알지 못하는 인(因)을 원리(遠離)하는 것이다. 정학(淨學)을 장애하는 인(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學)이 청정해지는 것을 현시(顯示)하는 것이다.
  '위의(威儀)를 구족(具足)해야 하며 양(量)에 알맞게 섭수(攝受)해야 하며, 끝내 하는 일[所爲]을 속이면서[詐] 위의상(威儀相)을 나타내는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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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어야 한다'라는 이 게송은 위의(威儀)를 구족(具足)하기 때문에 남 앞에서 속여서 상(相)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무릇 섭수(攝受)해야 할 양(量)을 잘 알기 때문에 범행(梵行)을 닦는 것이며, 수명(壽命)을 지탱하기 위해서 받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학(學)이 청정해지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실덕(實德)을 스스로 말하지 말며 또한 남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하며, 마침내 구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상(異相)을 나타내지 아니한다. 다른 편[他邊]으로부터 빌며 구하면서[乞求]끝내 억지로 위협[威逼]하지 않으며, 법(法)으로써 획득(獲得)하되, 얻은 뒤에는 가벼이 훼손하지 않는다'라는 이 두 게송에서는 언설(言說)을 치장하는 것과, 속여서 상(相)을 나타내는 것과, 억지로 위협하는 것과 소득(所得)의 이익을 굴려서 (더 많은) 이익을 부르는 것을 원리(遠離)하기 때문에 닦아야 할 학(學)으로 하여금 청정하고 수승하게 하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이익[利養]과 모든 공경(恭敬)에 탐착(耽著)하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 견해[見]의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에도 집착[執]하지 아니한다'라는 이 게송은 이익[利養]과 공경(恭敬)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다섯 가지 악견(惡見)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닦아야 할 학(學)으로 하여금 청정하고 수승하게 하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세간(世間)에 따르는 도리에 맞지 않는 글구[無義文]와 주술(呪術)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도리에 맞지 않는[無義] 가외의 옷과 바리[長衣鉢]를 축적(畜積)하길 좋아하지 아니한다'라는 이 게송은 제 악견(惡見)의 인(因)인 외도(外道)의 삿된 이론[邪論]에 집착하지 않고 능히 취온(取蘊)이 해탈을 장애하기 때문에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을 '세간(世間)에 따르는 것'이라고 이름하고, 그리고 이익[利養]과 공경(恭敬)에 탐착하는 데에 인(因)이 되는 가외의 옷과 바루 등을 원리(遠離)하여 인(因)이 청정하게 되기 때문에 학(學)이 청정해지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번뇌들이 늘어날까 두려워하며 집에서 살길[居家] 익히지 않으며, 깨끗한 지혜(智慧)를 닦기 위하여 현성(賢聖)을 가까이[親近] 해야 한다'라는 이 게송은 소치(所治)의 인(因)을 원리(遠離)하고 능치(能治)의 인(因)을 가까이 하기 때문에 학(學)이 청정해지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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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우(朋友)의 집[家]을 축척하지 말라. 걱정[憂]과 슬픔[悲]의 어지러움이 일어나서, 능히 괴로운 번뇌가 일어날까 두렵나니 일어나면 곧 바로 원리(遠離)하라'라는 이 게송은 집에 있는 것을 가까이 하면 우비(憂悲)의 산란(散亂)을 낳으므로, 제 번뇌(煩惱)를 증장(增長)하여 능히 중고(衆苦)의 인(因)이 되고, 그것을 가까이 하기 때문에 능히 중고(衆苦)를 낳으므로 번뇌가 일어나자마자 찾아서 곧바로 없애야 한다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위와 같은 것은 대치(對治)의 인(因)을 현시(顯示)하는 것이다.
  '믿음의 보시[信施]를 받지 말라. 해침[害]과 종기[瘡 ]가 더할까 두렵나니, 여래의 정법(正法)에서는 일찍이 버릴 것이 있던 적이 없다'라는 이 게송은 이익[利養]과 공경(恭敬)을 탐착하지 않고 제 악(惡)의 사견(邪見)을 굳게 집착하지 않으며, 헛되이 믿음의 보시[信施]를 수용(受用)하지 않으며, 정법(正法)을 훼방하지 않고 또한 능히 후세(後世)의 제 욕(欲)을 탐착하고 능히 제 악견(惡見)을 일으키는 인(因)을 원리(遠離)하는 이와 같은 데에서 학(學)이 청정하고 수승하게 되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남이 잘못하여 범하는 데에도 공용을 짓지 않고[無功用] 안락(安樂)하며, 항상 자신의 허물을 살피다가 알고 나면 속히 드러내야 한다'라는 이 게송은 의도를 내어[作意] 타인(他人)이 갖고 있는 과실(過失)을 보는 것을 원리(遠離)하고 자신의 선품(善品)에 산란함이 있지 않는 데에 항상 환희를 내며,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 여실(如實)히 알고[了知] 드러내어[發露] 뉘우쳐서 증상만(增上慢)을 여의는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학(學)이 청정해지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만약 범한 것[所犯]을 범하면 여법(如法)하게 출리(出離)해야 하며, 응당 경영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용맹하게 힘써서 스스로 짓는다'라는 이 게송은 위범을 출리(出離)하고 타인(他人)에게 공경받고 시중받는 것을 원리(遠離)하는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학(學)이 청정해지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부처님과 제자들의 위덕(威德)과 언교(言敎)에 대하여, 일체를 모두 믿어 받들며[信受] 대죄(大罪)를 보아도 비방하지 않는다'라는 이 게송은 믿음이 원만하기 때문에 비방하는 것에 대해서 대죄(大罪)를 보기 때문에 학(學)이 청정해지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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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깊고 깊은 법[極甚深法]으로서 사량할 수 없는 것[不可思度處]에서는, 옛 스승의 종지[宗]를 버리고 자신의 견해[自見]도 굳게 집착하지 않는다'라는 이 게송은 자신의 견취(見取)에 안주하는 것을 원리하기 때문에 청정하고 수승해지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항상 원리(遠離)에 있음과 맨 마지막 남은 와구(臥具)를 즐기며, 항상 선법(善法)을 즐기되굳게 정진(精進)하며 용맹히 하라'라는 이 게송은 몸과 마음이 모두 원리(遠離)하기 때문에, 정(定)에 수순하는 여러 와구(臥具)들을 즐겨 가까이[習近]하기 때문에, 일체의 불선(不善)의 심사(尋思)를 원리하고 순수하게 백정(白淨)의 제 선법(善法)들을 닦기 때문에, 도거(掉擧) 등의 여러 수번뇌(隨煩惱)로 꺾여 가려지지[摧蔽] 않기 때문에, 능히 바른 가행(加行)을 원만(圓滿)하게 하기 때문에, 증상심학(增上心學)의 방편(方便)이 수승하게 되는 것을 현시한다.
  '욕심이 있지 않은 데에서 욕심을 내며 증오(憎惡)하지 않으면서 증오(憎惡)하며, 잠[睡眠]을 여의고서 잠을 자며 때로는 적정(寂靜)에 머무르지 않는다. 악작(惡作)을 여의고서 악작(惡作)하며 희망함[希慮]이 없으면서 희망을 내며, 일체종(一切種)에 항시(恒時)에 바른 방편(方便)을 성취(成就)한다'라는 이 두 게송에서는 탐욕(貪欲) 진에(瞋恚) 혼침(惛沈) 수면(睡眠) 도거(掉擧) 악작(惡作) 의(疑)의 개(蓋)를 원리하기 때문에 제 선법(善法)에 대한 의욕[欲]을 일으키기 때문에, 제 욕(欲)에 대하여 극히 싫어하기[憎厭] 때문에 선품(善品)의 가행(加行)의 방편(方便)을 닦는 데에 감인(堪忍)하는 것이 있게 되며, 마음의 안정(安靜)을 위하여 시시때때로 수면(睡眠)을 익히기 때문에 마음이 침몰(沈沒)하거나 혹은 생기려 하는 것을 생각하거나 간에 정묘상(淨妙相)에 대하여 사유(思惟)하고 작의(作意)하며, 유행(遊行)할 때에 고요함[靜]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먼저 범한 것에 대하여 곧 바로 우회(憂悔)를 일으키며, 범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우회(憂悔)가 없기 때문에 다음 다음의 수승(殊勝)하게 희려(希慮)를 일으키기 때문에 은중(殷重)과 무간(無間)의 정방편(正方便) 때문에, 증상심학(增上心學)이 구르면서 청정해지는 것을 현시한다.
  '끌어 일으킴[引發]과 깨달음[覺悟]과 화합하여 맺는 것[和合所結]과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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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有相)과 친함[親昵]과 또한 여러 가지의 희락(喜樂)과 침핍(侵逼)과 매우 친함[極親昵]을 허망분별(虛妄分別)이라고 이름하여, 능히 탐욕(貪欲)을 내게 하니 지자(智者)는 원리(遠離)해야만 한다.'라는 이 두 게송은 여덟 가지 허망분별(虛妄分別)은 능히 음욕( 欲)의 소유(所有)의 탐애(貪愛)를 일으키는데, 처음의 방편(方便)으로부터 차례로 일어나서 구경(究竟)에 이르기까지 원리(遠離)하기 때문에 닦게 되는 학(學)들이 청정하고 수승해지는 것을 현시한다.
  끌어 일으킴[引發]의 분별(分別)이란 가애(可愛)의 대상[事]에 대하여 부정사유(不正思惟)와 상응하는 마음을 끌어 일으키는 모든 분별을 말한다. 깨달음[覺悟]의 분별(分別)이란, 즉 그 가애의 현상[事]에 대하여 깨닫는 탐(貪)의 전(纏)과 상응하는 분별을 말한다. 화합하여 맺는 것[和合所結]의 분별(分別)이란 즉 가애(可愛)의 대상에 대한 모든 분별을 말한다. 유상(有相)의 분별(分別)이란 즉 그 가애의 대상에 대하여 갖가지 정묘(淨妙)의 상(相) 상(狀)을 집취(執取)하는 모든 분별을 말한다. 매우 친함[極親昵]의 분별(分別)이란 이미 얻은 소애(所愛)의 대상에 대하여 용감하게 상응하는 모든 분별을 말한다. 희락(喜樂)의 분별(分別)이란 즉 소득(所得)의 현상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수용(受用)하고 갈망[悕慕]하고 애락(愛樂)하며 갖가지 문(門)에 구르는 모든 분별을 말한다. 침핍(侵逼)의 분별(分別)이란 두[兩] 근(根)이 모일 때의 모든 분별을 말한다. 매우 친함[極親昵]의 분별(分別)이란 부정(不淨)에서 나올 때의 모든 분별을 말한다.
  '모든 탐욕[欲]은 만족[飽]이 없게끔 하여 여러 가지를 공유(共有)하는 것인데, 이는 비법(非法)의 인연(因緣)으로서 능히 탐욕(貪欲)을 증장한다. 현성(賢聖)은 마땅히 여의어야 할 것이니, 속히 괴멸(壞滅)에 나아가라. 중연(衆緣)에 의탁하고 있는 것은 위험과 방일[危逸]의 소의지(所依地)이니라'는 이 두 게송은 여덟 가지는 현법(現法)과 후법(後法)의 그 상응하는 바대로 제 욕(欲)의 과환(過患)이라는 것을 현시한다. 만약 능히 본다면[觀見], 즉 이는 욕애(欲愛)를 끊어버리는[斷除] 방편이다.
  '모든 탐욕은 마치 마른 뼈와 같고 또한 연한 고기 덩어리와 같으며, 풀의 횃불과 상사(相似)하며 마치 큰 불구덩이와 같으니라. 비유하면 이무기와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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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毒蛇)와 같고 또한 꿈에서 본 것과 같으며, 빌린 장엄구(莊嚴具)와 같으며 또한 나무 끝에 익은 열매 같다. 이와 같이 모든 탐욕을 알아서 모두 빠지거나 즐겨서는[耽樂] 안된다'라는 여기에서는 자세하게 앞에서 설해진 '만족[飽]이 없게 하여' 등과 같이 제 욕(欲)의 여덟 가지 과환(過患)에 대하여 일체세간(一切世間)의 공동[共成]의 비유(譬喩)를 인용하여, 제 욕(欲)의 과환(過患)이 깊고 무겁다는 것[沈重]을 현시한다. 또한 제 욕(欲)에 위와 같은 많은 과환(過患)을 갖추고 있다는 것[具有]을 분명히 알면[了知] '어떤 지자(智者)가 그 즐거움[樂]에 빠지겠는가'라고 하는 것을 현시하는 것이다.
  또한 그 제 욕(欲)은 마치 마른 뼈와 같기 때문에 포만감[飽滿]이 없게끔 하며, 고기 덩어리와 같기 때문에 많은 것이 함께 있으며, 마치 풀의 횃불과 같아서 곧바로 붙이면 눈앞에서 매우 치성하기 때문에 비법(非法)의 인연(因緣)이며, 마치 큰 불구덩이와 같아서 갈애(渴愛)를 일으키기 때문에 탐애(貪愛)를 증장하며, 이무기와 독사와 같기 때문에 현성(賢聖)이 원리(遠離)하는 것이며, 꿈에 본 것과 같기 때문에 속히 괴멸(壞滅)에 나아가며, 마치 빌린 장엄구와 같기 때문에 중연(衆緣)에 의지하고 있으며, 마치 나무 끝에 익은 열매와 같기 때문에 위험[危亡]과 방일(放逸)의 소의지(所依地)가 된다.
  '마땅히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항상 사유(思惟)하고 수습하라. 먼저 추정(麤靜)을 보고[觀見] 다음으로 닦음을 한결 같이 하며[一向], 번뇌의 추중(麤重)을 버려서 끊음[斷]에서 흔락(欣樂)을 낸다. 제 상(相)에 대하여 관찰하여 가행(加行)의 구경(究竟)을 얻으며, 능히 욕계(欲界)의 욕(欲)을 여의고, 그리고 색계(色界)의 욕(欲)을 여의어라. 진제현관(眞諦現觀)에 들어가서 일체(一切)의 욕(欲)을 능히 여의며, 현법열반(現法涅槃)을 증득하고 유여의[餘依]를 영원히 다한다'라는 여기에서는 요상(了相) 등의 7종(種)의 작의(作意)와 세간과 출세간의 도(道)가 모두 청정해지기 때문에 유여(有餘)와 무여의(無餘依)의 두 열반(涅槃)의 과(果)를 증득하고 증상혜학(增上慧學)이 끝내[究竟] 청정해지는 것을 현시한다.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항상 사유(思惟)하고'라는 말은 요상작의(了相作意)를 현시한다. '항상 수습하라'라는 말은 승해작의(勝解作意)를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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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하니, 승해(勝解)를 일으켜서 수습하기 때문이다. '먼저 추정(麤靜)을 보고[觀見]'라는 말은 원리작의(遠離作意)를 현시한다. '닦음을 한결 같이 하며'라는 말은 섭락작의(攝樂作意)를 현시한다. '제 상(相)에 대하여 관찰하여'라는 말은 관찰작의(觀察作意)를 현시하며, '가행(加行)의 구경(究竟)'이라는 말은 가행구경작의(加行究竟作意)을 현시한다. '능히 욕계(欲界)의 욕(欲)을 여의고 그리고 색계(色界)의 욕(欲)을 여의어라. 진제현관(眞諦現觀)에 들어가서 일체(一切)의 탐욕(貪欲)을 능히 여의며' 등의 말은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의 가행구경과작의(加行究竟果作意)를 현시한다.
  이미 의취의(意趣義)의 성교(聖敎)의 가타(伽他)를 해석하였다. 지금부터 체의(體義)의 가타(伽他)를 건립하겠다.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신(身) 어(語) 의(意)의 여러 모든 것에서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악(惡)을 짓지 말라,
  염(念)의 정지(正知)에 의하여 제 욕(欲)을 여의고
  능히 무의(無義)를 이끄는 괴로움[苦]을 가까이 하지 말라.
  於身語意諸所有  一切世間惡莫作
  由念正知離諸欲  勿親能引無義苦
  
  지금 이 게송에서 말한 바 '악(惡)'이란 여러 악행(惡行)을 말한다. 일체종(一切種) 일체인연(一切因緣) 일체처소(一切處所)에 있어서 모든 악행(惡行)은 다 짓지 않아야 한다.
  어째서 일체종(一切種)에 있어서 악행(惡行)을 짓지 않는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신(身) 어(語) 의(意)에 의해서 뭇 악(惡)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일체인연(一切因緣)에 악(惡)을 짓지 않는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탐(貪) 진(瞋) 치(癡)에 의해서 생기게 되는 제 악(惡)을 끝내 조작(造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일체처소(一切處所)에 있어서 악(惡)을 짓지 않는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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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자면 유정사(有情事)의 처소와 비유정사(非有情事)의 처소에 의지하여 뭇 악(惡)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염(念)의 정지(正知)에 의하여 제 욕(欲)을 여읜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사욕(事欲)을 끊고 번뇌욕(煩惱欲)을 끊기 때문이다.
  무엇을 사(事)의 욕(欲)을 끊는 것이라고 하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증득한 정법(正法)과 비나야(毘奈耶)에서 청정한 믿음[信]을 얻고 집에 있는 것[居家]이 죄는 것[迫 ]이라서 마치 감옥[牢獄]과 같다고 훤히 알고[了知] 출리(出離)를 생각하여 구하는 것과 같다. …… 바른 신심(信心)에 의하여 가법(家法)을 버리고 비가(非家)에 들어가나[趣入] 욕탐(欲貪)에 대하여 아직은 영원히 여의지 못한 것이다.
  위와 같은 것을 사욕(事欲)을 끊어버렸다[斷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번뇌욕(煩惱欲)을 끊는 것이라고 하는가?
  그가 이미 출가하고 나서 탐욕(貪欲)을 남김없이 끊어 없애기 위하여 광야(曠野)나 산림(山林)에 나아가서 변제(邊際)의 와구(臥具)1)에 안거(安居)하거나 혹은 아련야처(阿練若處)에 나아가거나 내지 혹은 공한정실(空閑靜室)에 거주하며, 여러 가지 사욕(事欲)에서 일어나게 되는 일체의 번뇌욕(煩惱欲)에 포함되는 망분별(妄分別)의 탐(貪)을 대치하기 위하기 때문에 4념주(念住)를 닦는 것이다. 혹은 다시 도로 나와서 취락(聚落)에 가까운 촌읍(村邑)에 의지하여 머무르되 그 몸을 잘 수호하고 제 근(根)을 잘 수호하며 정념(正念)에 잘 머무르면서 취락(聚落)에 들어가며, 혹은 다시 촌읍(村邑)을 유행(遊行)하면서 베풀고 받음[施反]과 가고 옴[去來]와 나아가고 멈춤[進止]에서 항상 정념(正念)에 머무르는 것이다. 수면(睡眠)과 여러 피곤[勞倦]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는 곧 이 4념주(念住) 가운데에서 정념(正念)에 잘 안주하는 것을 의지(依止)로 삼기 때문에 영원히 욕탐(欲貪)의 수면(隨眠)을 끊으려고 하여 대치(對治)를 수습한다. 또한 곧 그는 정지(正知)에 머무르는 것을 의지(依止)로 삼기 때문에 제 개(蓋)를 원리(遠離)하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1) 변제(邊際)의 와구(臥具)란 다 헤지고 낡아서 더 이상 쓸 수 없는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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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러서[調暢] 감능(堪能)하게 되며 치성[熾然]한 방편(方便)으로 단(斷)의 적정(寂靜)을 수습한다. 그는 이와 같이 염(念)과 정지(正知)를 의지(依止)로 삼기 때문에 곧바로 능히 증득하여 번뇌욕(煩惱欲)을 끊고 제 욕(欲)을 원리하고 내지 초정려(初靜慮)를 구족하여 머무른다.
  위와 같이 능히 욕락행(欲樂行)을 수용하는 변(邊)에 처해 있는 열등하고 비루하고 더러운 성품의 여러 이생법(異生法)을 끊거나 아는 것이다.
  무엇을 무의(無義)의 괴로움을 이끄는 것이라고 하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사문(沙門)이거나 바라문(婆羅門)이건 간에 스스로 고행(苦行)을 행하고 현법(現法)에서 갖가지 고(苦)로서 스스로 핍박하고 스스로 절제하며 두루 고뇌[惱]를 불태우면서 스스로 말하길 '나는 지금 현법(現法)의 괴로움[苦]을 받고 시달림을 당함으로써 미래의 괴로움[當苦]에서 해탈하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일을 추구하여 스스로 핍박할지라도 그는 이러한 일[事]에서 끝내 얻을 수 없고 더군다나 다시 큰 괴롭힘[大損惱]의 일[事]을 부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을 무의(無義)의 괴로움을 이끄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 성제자(聖弟子)들은 능히 이와 같이 스스로 고행(苦行)을 수용(受用)하는 변(邊)에 있어서 능히 성스럽지 않은 무의(無義)의 괴로움을 이끄는 법(法)을 잘 알고[了知] 나서 멀리 이를 피하여 친하지도 가까이 하지도 않으며, 또한 받들어 모시지도 않는다.
  다음에 위에서 설한 뜻을 분별[辯]하겠다.
  무엇을 간략하게 분별[辯]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제 유정(有情)에게는 두 가지의 만(滿)이 있으니, 첫째는 증상생만(增上生滿)이며,둘째는 결정승만(決定勝滿)이다. 증상생만(增上生滿)이란 선취(善趣)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며, 결정승만(決定勝滿)이란 애(愛)가 다하여 욕(欲)을 여읜 적정열반(寂靜涅槃)을 말한다. 이 두 가지의 만(滿)과 장애(障礙)를 능히 끊고 능히 증득하는 이러한 것을 약의(略義)라고 이름한다. 만약 일체종(一切種) 일체인연(一切因緣) 일체처소(一切處所)에 대하여 악행(惡行)을 짓지 않는다. 그는 곧바로 능히 증상생만(增上生滿)의 모든 장애를 끊고 또한 능히 증상생만(增上生滿)을 증득한다. 만약 욕락행(欲樂行)을 수용(受用)하는 변(邊)에 대해서 그리고 스스로 고행(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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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을 수용(受用)하는 변(邊)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원리(遠離)한다. 그는 곧바로 능히 결정승만(決定勝滿)의 모든 장애를 끊고 또한 능히 결정승만(決定勝滿)을 증득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의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응설상(應說想)의 중생(衆生)은
  응설에 의지하여 안주(安住)하며
  응설을 훤히 알지[了知] 않아서
  생사(生死)를 불러모은다[招集]
  應說想衆生  依應說安住
  不了知應說  而招集生死
  
  만약 응설(應說)을 훤히 안다면
  설자(說者)에 대해서 사량하지 않고
  이것이 있지 않기 때문에
  남의 기론(譏論)에 응하지 않는다.
  若了知應說  於說者無慮
  由無有此故  他不應譏論
  
  만약 동등함과 우월함과 열등함을 계탁한다면
  그는 드디어 쟁론(諍論)을 일으키지만
  세 가지에 움직임이 없으면
  동등하고 우월하며 열등함이 모두 없다.
  若計等勝劣  彼遂興諍論
  於三種無動  等勝劣皆無
  
  명색(名色)과 애만(愛慢)을 끊고
  집착이 없어 연기[煙]가 적정(寂靜)해지며
  괴로움과 희망[惱悕]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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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저런 천인(天人)의 세간을 보지 않는다
  斷名色愛慢  無著煙寂靜
  無惱怖不見  此彼天人世
  
  이 네 게송 가운데에 처음에 '응설(應說)'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을 말한다. 왜냐 하면 제 유위법(有爲法)은 모두 세 가지의 언사(言事)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 뜻에서는 묘오욕(妙五欲)을 설하여 응설(應說)이라고 한다. 또한 묘오욕(妙五欲)을 그 밖의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들은 시주(施主)의 변(邊)으로부터 말로써 찾아 구하기 때문에 응설(應說)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군주(君主)들은 묘오욕(妙五欲)에 대해서 종과 시중들로부터 말로써 불러서 이를 수용(受用)하는데, 이러한 인연(因緣) 때문에 또한 응설(應說)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욕(欲)을 수용(受用)하는 자는 묘오욕(妙五欲)에 대해서 자연스러운 과환(過患)을 잘 알지 못한다. 오직 제 불(佛)과 불제자(佛弟子)만이 제외되니, 그들을 위해서 그2) 과환(過患)을 선설(宣說)하고 나서 이에 능히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因緣)에 의해서 또한 응설(應說)이라고 이름한다.
  욕(欲)을 수용하는 자들은 제 욕(欲)에 대하여 바르지 않게 사유하여 그 상(相)을 취하고 또한 수호(隨好)를 취하고 곧 그 욕(欲)에 대해서 곧바로 애염(愛染)을 내어서 수용(受用)하고 탐기(耽嗜)하고 내지 굳게 집착[堅著]한다.
  또한 제 욕(欲)에 대해서 여실하게 뭇 과환이 있다는 것을, 즉 제 욕(欲)은 무상(無常) 허위(虛僞)이며, 공(空)이어서 실로 있는 것이 아닌 무너지는 법(法)이며 마치 환사(幻事)가 우부(愚夫)를 속이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심히 애미(愛味)는 적은 데도 여러 과환(過患)은 많으며, 또한 여실하게 이와 같은 애미(愛味)가 적고 과환(過患)이 많은 제 욕(欲)에 대한 출리(出離)를 알지 못한다. 소위 그 탐욕에 대해서 조복(調伏)하고 내지 초월(超越)하는 것이 바로 그것의 출리(出離)이다. 그는 이미 이와 같이 과환(過
  
2) 묘오욕(妙五欲)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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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患)을 보지 못하고 출리(出離)를 알지 못해서 제 욕(欲)을 수용(受用)하며 이러한 인연(因緣)에 의해서 곧바로 욕계(欲界)의 생(生)을 근본으로 삼는 모든 제 행(行)에 대해서 깊게 락착(樂著)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다시 생(生)의 근본이 되는 모든 업(業)을 조작하고 나서 욕계(欲界)의 생(生)을 받고 태어나고 나서 죽어서 멸(滅)하고, 태어나고 나서 사라져 간다. 이와 같기 때문에 '응설상(應說想)의 중생(衆生)은 응설(應說)에 의지하여 안주(安住)하며 응설(應說)을 훤히 알지[了知] 않아서 생사(生死)를 불러 모은다[招集]'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선사(善士)를 만나서 정법(正法)을 듣게 되고 이치에 맞게 작의[如理作意]한다. 곧 제 욕(欲)에 대해서 여실하게 과환(過患)의 출리(出離)를 훤히 안다. 즉 제 욕(欲)은 무상(無常) 허위(虛僞)이며 …… 탐욕을 초월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여래(如來)께서 증득한 정법(正法)과 비나야(毘奈耶)에서 청정한 믿음을 얻고 곧바로 제 욕(欲)에 대해서 깊이 과환(過患)을 보아서 돌려서 다시 더욱 더 뛰어나게 하며, 드디어 능히 적거나 많은 재보(財寶)와 창고[庫藏]와 권속(眷屬)과 유종(遊從)을 버리고, 바른 신심(信心)으로서 가법(家法)을 버리고 비가(非家)에, 즉 일체의 생(生) 로(老) 병(病) 사(死)가 모두 영원히 멸하는 데에 나아간다. 이와 같이 출가하여 원하여 구하는 바가 없이 범행(梵行)을 수행한다.
  '나는 이 지계(持戒)를 정진하고 범행(梵行)을 닦기 때문에 천(天) 혹은 다른 천처(天處)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와 같은 삿된 기원(祈願)이 없기 때문에 그는 자기에 대해서 남이 기론(譏論)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걱정하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의 이와 같은 기론(譏論)에 대해서 응하지 않는 것이다.
  원수가 더욱이 가책(訶責)하여 구하여 말하길, '현수(賢首)여, 어째서 너는 지금 나이가 꽉 찼는데도 현전의 묘욕(妙欲)을 버리고 친척(親戚)이 원락(願樂)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다시 때를 기다려서 제 욕(欲)을 희구(希求)하지 않고, 서원(誓願)하여 범행(梵行)을 닦는 것인가?'라고 한다. 이와 같기 때문에 '만약 응설(應說)을 훤히 안다면 설자(說者)에 대해서 사량하지 않고 이것이 있지 않기 때문에 남의 기론(譏論)에 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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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 이것은 곧 청정의 시라(尸羅)와 청정의 견(見)을 성취한다. 왜냐 하면 견전도(見顚倒)에 의하여 만(慢)을 일으키고 만(慢)을 지니기 때문에 다른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과 더불어 쟁론(諍論)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因緣)에 의해서 이와 같은 견(見)을 쟁론의 근본이 된다고 설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문(沙門) 혹은 바라문(婆羅門)이 동등함과 우월함과 열등함의 쟁론에 근본이 되는 견(見)에 의하여 마음에 고거(高擧)를 나타내면 이 인연(因緣)에 의해서 드디어 다른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 등과 서로 쟁론하는 것이다. '내가 우월하다. 나와 동등하다. 나보다 열등하다'라는 세 가지 만(慢)의 종류에 의지하여 자기를 세워서 우월하다고 하고 혹은 동등하다고 하고 혹은 열등하다고 한다.
  또한 성제자(聖弟子)의 경우는 아(我)와 아소(我所)와 아만(我慢)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고 내지 또한 '나는 마땅히 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想非無想]'고 말하는 데에 흔들리지 않는다. 제 행(行)은 모두 뭇 연(緣)으로부터 생긴다고 훤히 알고 제 행(行)에 대해서 오직 법성(法性)만을 보아서 오히려 자기로써 남을 교량(校量)하여 우월하다, 동등하다, 열등하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아만(我慢)을 일으켜 쟁론을 일으키겠는가? 그 성제자(聖弟子)는 남한테 자종(自宗)을 현양(顯揚)하고 다른 논(論)을 꺽을지라도 제 법(法)에 대해서 오직 법성(法性)만을 위하여 자비(慈悲)를 연(緣)한다. 말하자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내가 설한 묘의(妙義)에 대하여 한 구(句)라도 이해하여 받아들임에 따라서 그렇게 바르게 수행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대의(大義)와 이익(利益)과 안락(安樂)을 획득하게끔 하며 또한 여래(如來)의 정법(正法)을 오래 머물도록 하리라'고 한다. 견만(見慢)에 의지하여 이익[利養]과 공경(恭敬)의 인연(因緣) 때문에 쟁론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이 현법(現法)의 여러 가지 묘욕(妙欲)을 희구하지 않기 때문에 서원하여 범행(梵行)을 닦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범행(梵行)을 닦기 때문에 삿된 원(願)과 여러 가지 사견(邪見)을 원리(遠離)하고 이익[利養]과 공경(恭敬)을 탐구(貪求)하는 것을 버리고, 일체종(一切種)에 대하여 모두 청정해지며 밝은 빛이 찬란하여[暉光熾然] 두루 닿지 않는 곳이 없으며, 여러 천(天)과 세상 사람[世人]이 마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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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讚美)하니, 기론(譏論)에 응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능히 생(生) 로(老) 병(病) 사(死)를 뛰어넘는다. 이와 같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동등하다고, 열등하다고 계탁하여, 그가 드디어 쟁론(諍論)을 일으키면 '세 가지에 대해서 흔들림 없이 동등함과 우월함과 열등함이 모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명색(名色)'이라고 말하는 것은 5취온(取蘊)을 말한다. 만약 그것에 대하여 관찰하여 보고[觀見] 괴로움[苦]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진리[諦]를 현견(現見)하게 될 것이고 5취온(取蘊)에 대하여 모두 괴로움[苦]을 볼 때에는 5취온(取蘊)에 있는 모든 탐애(貪愛)는 의요(意樂)에 의하기 때문에 모두 단(斷)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수면(隨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곧 자기가 얻은 도(道)와 같이 굴려서 다시 수습(修習)한다. 그 아만(我慢)에 대해서 남김없이 끊어 없애서 아라한(阿羅漢)을 이루고 제 루(漏)를 영원히 다한다. 이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기 때문에 마음이 잘 해탈(解脫)하고 곧바로 자신(自身)과 자신(自身)의 중구(衆具)에 있는 전(纏)과 수면(隨眠)을 모두 다 영원히 끊고 애(愛)를 여의고 교(憍)를 여의고 여러 가지 방일(放逸)을 여읜다. 그는 위와 같이 애(愛)를 여의고 교(憍)를 여의고 방일(放逸)을 여의기 때문에 '연기[煙]가 적정해진다'고 하는 것이며, 시달릴 것[燒惱]도 없고 또한 희망(悕望)도 없는 것이다.
  무엇을 '연기[煙]가 적정해진다'고 하는 것인가?
  연기[煙]를 애(愛)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세간의 연기[煙]는 불의 전조[前相]이므로 능히 안근(眼根)을 훼손하고 바로 어지러움이 되어서 안주(安住)하지 못하게끔 하는 것과 같이 애(愛) 또한 이와 같아서 탐(貪) 진(瞋) 치(癡)라는 불의 전조[前相]로서 능히 혜안(慧眼)을 훼손하고 마음을 어지럽히면서 상속(相續)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능히 무의(無義)의 심사(尋思)를 끌어 일으키는 것이다. 그는 이 애(愛)에 대해서 이미 끊었고 이미 알았으며 내지 그로 하여금 미래세에 불생법(不生法)을 성취하게 하는 것을 '연기[煙]가 적정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미 이와 같이 연기[煙]가 적정해져서 집착을 여의고, 다시 명연(命緣)의 중구(衆具)를 추구하고 추구하지 않지 아닐지라도 능히 탐애(貪愛)의 추구(追求)에서 벗어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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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하는 것[所求]에 염착[染]이 없다.
  무엇을 '괴로움이 없는 것[無惱]'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그는 이와 같이 바로[現] 추구할 때,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 보시하거나 혹은 다른이가 권해서 보시하거나 간에 보시할 때에, 은중(殷重)히 하며 은중하지 않지 아니하며 세밀하고 거칠지 아니하며 많이 하고 적지 않게 하며 빠르게 하고 느슨하게 하지 아니하면서도 애미(愛味)하지 않고 소득(所得)의 물건에 대하여 염오하는 것이 없이[無染] 수용(受用)하고 탐린(耽吝) 내지 굳은 집착[堅著]을 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명(命)의 자구(資具)를 수용할 때, 탐뇌(貪惱) 때문에 괴롭지[燒惱] 않는 것이다. 만약 그 시주(施主)가 스스로 보시하지 않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보시를 장애하고, 설사 보시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은중(殷重)하지 않는 것을 나타내고 은중(殷重)을 나타내지 않으며 내지 느슨하게 하고 빠르게 하지 않더라도 염한( 恨)하지 않고 이 인연(因緣)에 의하여 에뇌(恚惱)를 일으키지 않는다. 또한 소득(所得)의 물건을 보시할 때에는 근심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아서 손해(損害)의 마음과 진에(瞋恚)의 마음이 없어서 위와 같이 진뇌(瞋惱) 때문에 괴롭게 되지 않는다. 또한 세밀하거나 거친 소득(所得)를 수용(受用)할 때에, 깊이 과환(過患)을 보고 잘 출리(出離)를 알아서 정념(正念)에 안주(安住)하고 우치(愚癡)를 원리(遠離)하니, 위와 같이 치뇌(癡惱) 때문에 괴롭지 않는다.
  무엇을 '희망이 없다[無恚]'고 하는 것인가?
  희(悕)는 희망(悕望)을 이름하는 것이며, 마음에 묶여서 있는 것이다. 그는 코를 들어올리고 안으로 탐욕의 원[貪願]을 품고 거가(居家)에 즉 찰제리(刹帝利)의 대종엽가(大宗葉家) 혹은 바라문(婆羅門) 장자(長者) 거사(居士)의 대종엽가(大宗葉家)에 나아가지 않는다. '나는 마땅히 그보다 뛰어난[上妙] 처소[應所] 음식[噉食] 내지 재보(財寶) 의복(衣服) 반찬[餚膳] 여러 가지 앉는 와구(臥具) 병에 대한 의약[病緣醫藥] 공신(供身)의 집물(什物)을 획득해야 한다.'라고 위와 같이 추구(追求)하고 수용(受用)하는 이 재물(財物)에 대하여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항상(恒常) 사상(死想)에 안주하여 밤[夜分]을 지나쳐서 낮[晝分]에 들며, 다시 낮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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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쳐서 다시 밤에 드는데 그 중간에 '나는 한없이 마땅히 죽어야할 인연(因緣)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경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소위 바람을 일으키고 내지 비인(非人)에게 공포(恐怖)를 받는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추구하게 되고 수용하게 된 모든 재물(財物)과 이 목숨에 대해서도 희망이 없다. 이와 같이 '집착이 없어 연기[煙]가 적정(寂靜)해지며 괴로움과 희망(悕望)이 없기' 때문에 이 천인(天人) 제석(帝釋) 자재(自在) 세주(世主)의 천(天) 등의 모든 인(因)에 대하여 모두 보지 않으며, 또한 그 천인(天人)의 제 인과(因果)에 대해서도 또한 보지 않으며, 또한 이 4주(洲)와 천(天)과 인(人)의 세간과 그 밖의 다른 곳에 대해서도 모두 보지 않으며, 또한 이 세간과 천(天)과 인(人)의 세간과 그 밖의 것에 대해서도 모두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명색(名色)과 애만(愛慢)을 끊고 집착이 없어 연기[煙]가 적정(寂靜)해지며 괴로움과 희망[悕望]이 없어 이런 저런 천인(天人)의 세간을 보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음, 처음 게송은 때를 기다리는[待時] 제 욕(欲)과 욕(欲)에 있어서의 사행(邪行)과 사행(邪行)의 과(果)를 현시한다. 두 번째 게송에서는 욕(欲)을 버리는 것은 바른 도리(道理)에 응한다는 것과 범행(梵行)을 깨끗하게 닦음으로 인하여 기론(譏論)을 당하면 도리(道理)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과 때를 기다리는[待時] 욕(欲)을 현시한다. 두 번째의 게송과 같이 세 번째의 게송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네 번째의 게송은 세존께서 현전[現]에 증득한 법[所證法]은 영원히 치성함[熾然]3)을 여의고 내지 지자(智者)가 안으로 스스로 증득한 것[內自所證]임을 현시한다.
  또한 처음 게송에서는 제 욕(欲)이 바로 응설상(應說相)4)임을 선설하여 때를 기다리는[待時] 욕(欲)을 현시한다. 그 제 욕(欲)은 때[時]를 기다리자마자 곧 바로 명칭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언설(言說)을 먼저[先]로 한 연후에 추구(追求)하고 수용(受用)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에 대하여 상(想)에 의하여 안주(安住)하고 훤히 알지[了知] 않기 때문에, 사행(邪行)을 일으키고
  
3) 번뇌(煩惱)의 치성함[熾然]을 말한다.
4) 게송에서는 응설상(應說想)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전후 문맥 상 응설상(應說想) 보다는 응설상(應說相)으로 보아야 타당하리라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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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사(生死)라는 사행(邪行)의 과보(果報)를 부름을 현시한다.
  두 번째의 게송에서는 제 욕(欲)에 대하여 능히 알기 때문에, 삿된 원[邪願]을 여의기 때문에, 범행(梵行)을 닦기 때문에, 사견(邪見)을 여의기 때문에, 견(見)의 근본(根本)인 아만(我慢)의 종류를 여의기 때문에, 탐착(耽著)과 이익[利養]과 공경(恭敬)을 원리(遠離)하기 때문에, 제 욕(欲)을 버리는 것은 바른 도리(道理)에 응하는 것이고, 이러한 인연에 의하여 여타의 기론(譏論)하는 것은 도리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시한다. 또한 제 욕(欲)은 때를 기다리는[待時] 성품[性]임을 현시한다. 왜냐 하면 만약 선세(先世)에 복을 짓지 않은 사람이면 지금 공을 들일지라도 락욕(樂欲)하는 것에 과(果)가 따를 수 없고, 혹 오직 금세(今世)에만 복(福)을 지은 사람은 곧 이 시기에 그 락욕(樂欲)하는 것을 또한 우연히 만나지는 않지만 이 인연에 의하여 후에 비로소 이루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제 욕(欲)을 때를 기다리는 것[待時]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네 번째 게송은 견도[見]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끊기 때문에, 즉 현재에서 처음의 사문(沙門) 및 사문과(沙門果)를 증득하고, 또한 수도[修]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끊기 때문에, 즉 현재에서 뒤의 사문과 사문과를 증득함을 현시한다. 탐애(貪愛)를 끊기 때문에, 아만(我慢)을 끊기 때문에, 이와 같이 현재의 소증법(所證法)을 현시한다. 또한 집착을 여의기 때문에, 연기[煙]가 적정해지기 때문에 영원히 치성함[熾然]을 여의고 내지 지혜 있는 자[智者]가 스스로 안으로 증득한 것[自內所證]임을 현시한다.
  그는 위와 같이 안으로 증득한 법을 얻고,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훤히 알게 하는 것인가?
  괴로움[燒惱]이 없고 희망(悕望)하는 것이 없는 상(相)이 드러나는 것을 현양(顯揚)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에 앞의 세 게송은 세존이 제 천(天)을 위하여 설하시길 '필추(苾芻)는 여래의 성교(聖敎)의 대의(大義)를 현양(顯揚)할 수 없고, 나 혼자만이 가능하다'고 이렇게 말할 때, 필추는 능멸(陵蔑)의 마음을 내고 그리고 자신(自身)에게 교만(憍慢)한 마음을 내는 것을 모두 제거[除滅]하게 될 것임을 그는 이미 알았다는 것[領悟]을 현시한다. 네 번째의 게송에서는 자세하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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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래의 성교(聖敎)의 대의(大義)를 현시한다.
  
  욕탐(欲貪)으로 막혀 가려지고
  나의 마음은 불타오르니[燒然]
  대선인[大仙]이여 애민(哀愍)하사
  적정(寂靜)하도록 설해 주소서.
  欲貪所摧蔽  我心遍燒然
  惟大仙哀愍  爲說令寂靜
  
  너의 생각[想]이 전도(顚倒)됨으로 인하여5)
  마음을 두루 불타오르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항상 원리(遠離)해야 한다.
  탐(貪)을 이끄는 정묘상(淨妙相)을
  由汝想顚倒  令心遍燒燃
  是故常遠離  引貪淨妙相
  
  너는 마땅히 부정(不淨)을 닦아서6)
  항상 일경(一境)에 일정하게
  탐욕의 불을 빨리 끄기 위하여
  자주자주 물을 뿌려야 한다
  汝當修不淨  常定於一境
  爲貪火速滅  數數應澆灌
  
  묘하지 않는[非妙] 모든 행(行)을 살펴서7)
  고(苦)라고 하고 무아(無我)라고 하며
  
5) 이 한 게송은 방편관(方便觀) 가운데 제 1의 염경관(厭境觀)을 밝히는 것이다.
6) 이 한 게송은 방편관(方便觀) 가운데 제 2의 부정관(不淨觀)을 밝히는 것이다.
7) 이 한 게송은 방편관(方便觀) 가운데 고관(苦觀) 무아관(無我觀) 신념주(身念住)의 제 3의 관(觀)을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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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몸에 염(念)을 묶어서
  염리(厭離)를 많이 수습해야 한다.
  觀非妙諸行  爲苦爲無我
  亦繫念於身  多修習厭離
  
  무상(無相)을 수습하여8)
  만(慢)과 수면(隨眠)을 무너뜨리며
  만(慢)의 현관(現觀)에 의하여
  고(苦)의 변제(邊際)를 증득해야 한다.
  修習於無相  壞慢及隨眠
  由於慢現觀  當證苦邊際
  
  무엇을 '상(想)의 전도(顚倒)'라고 하는가?
  부정(不淨)의 경(境)에 대하여 부정상(不淨相)을 버리고 바르지 않게 사유하며[不正思惟], 정묘상(淨妙相)을 취하고 수호(隨好)를 취하는 것이다.
  무엇을 '탐(貪)을 이끄는 정상(淨相)을 원리(遠離)한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소성(少盛) 색(色)인 응당 애락(愛樂)할 만한 여러 가지의 모읍(母邑)9)을 보고 나서 곧바로 제 근(根)을 거두어 수념(隨念)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항상 일경(一境)에 일정하게 부정(不淨)을 수습(修習)한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방편(方便)으로써 우선 현선(賢善)의 삼마지(三摩地)의 상(相)을 취하는 것이다. 소위 청어(靑瘀) 내지 백골(白骨) 혹은 골쇄(骨瑣)의 상(相)의 이 상(相)으로써 현재 얻은 가애(可愛)의 경계(境界)에 대하여 염(念)을 묶어서 사유하고 앞의 소취(所取)와 같이 뒤도 또한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또한 내신(內身)에 자신이거나 타인이거나 간에 갖가지로 부정한 것, 즉 이 몸 속에 터럭[髮]과 깍지[爪] 내지 똥 오줌[便利]이 가득 차 있는 것
  
8) 이 한 게송은 근관(根觀)을 밝히는 것이다.
9) 성적인 욕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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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充滿]을 관찰하는 것이다.
  무엇을 '묘하지 않는 모든 행(行)을 살펴서[觀察] 이를 고(苦)라고 한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소성(少盛) 색(色)인 응당 애락(愛樂)할 만한 여러 가지의 모읍(母邑)을 보고 나서 탐애(貪愛)와 수용(受用)과 희망(悕望)이 생기게 되면 곧 '집제(集諦)이며 중고(衆苦)의 원인[因]이 되고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생(生)이 있고 생(生)이 있고 나서 노사(老死) 수탄(愁歎) 우고(憂苦)의 갖가지 우뇌(憂惱)가 이것으로부터 생긴다'고 이와 같은 사유(思惟)를 하는 것이다.
  무엇을 '묘하지 않는 모든 행(行)을 살펴서[觀察] 이를 무아(無我)라고 한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내 몸의 형상[身形]과 여자 몸의 형상에는 전혀 아(我)와 유정(有情) 등이 있을 수 없는데, 누가 능히 수용(受用)할 수 있으며, 누가 능히 수용될 수 있는가? 오직 제 행(行)과 제 법(法) 만이 뭇 연(緣)으로부터 생긴다.'라고 이와 같은 사유(思惟)를 하는 것이다.
   무엇을 '몸에 염(念)을 묶어서 염리(厭離)를 많이 수습해야 한다.'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성(性)은 맹렬한[猛盛] 탐욕(貪欲)의 종류이며, 이는 맹렬한 탐욕의 종류이기 때문에, 비록 제 근(根)을 섭수(攝受)하더라도 탐욕(貪欲)에 그 마음을 무너뜨리며[損壞], 다시 고(苦)이며 무아(無我)이라고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할지라도 또한 탐욕(貪欲)에 그 마음을 무너뜨리며, 이 인연(因緣) 때문에 그 부정(不淨)에 의하여 혹은 고(苦) 또는 무아(無我)라고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여 권시(權時)에 싫어하고[厭毁] 거스르며[違逆] 따르지 않고 신념주(身念住)에 염(念)을 묶어 앞에 두고 가까이[親近] 하고 자주 수습하는 것과 같다. 그는 자주 이와 같은 행(行)에 머무르기 때문에, 곧바로 맹렬한 탐욕(貪欲)을 끊는 것이다. 만약 제 근(根)을 섭수하면 탐욕(貪欲)으로 인하여 그 마음을 무너뜨리지 못하며, 다시 오직 부정(不淨)이며 고(苦) 무아(無我)를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면 탐욕(貪欲)이 그 마음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그는 위와 같은 행(行)을 수습(修習)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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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때문에 여러 가지 탐욕(貪欲)의 전(纏)을 현행하자마자 끊지만, 수면(隨眠)을 끊지는 않는다.
  이 탐욕(貪欲)의 전(纏)과 수면(隨眠)은 간략하게 두 가지의 보특가라(補特伽羅)의 상속(相續)에서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이생(異生)의 상속에서 얻을 수 있으며, 둘째는 유학(有學)의 상속(相續)에서 얻을 수 있다. 일 부분의 유학(有學)의 몸에 있어서는 얻을 수 없으니 하지[下;下地]의 탐욕에 대해서는 영원히 끊기 때문에 이미 안온(安穩)을 얻지만, 상지[上;上地]의 탐욕에 대해서는 아직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안온(安穩)을 얻지 못한다.
  무학(無學)의 몸에서는 중계(中界)와 묘계(妙界)의 모든 탐욕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열계(劣界)이랴. 무학자(無學者)는 상지[上]와 하지[下]의 탐욕을 끊음으로써 일체의 부분에 있어서 이미 안온(安穩)을 얻었으며, 이를 훤히 알고 나서도 아직 탐욕을 여의지 못한 일부분의 유학자(有學者)는 뒤에 무학(無學)에서 마음에 원락(願樂)을 일으켜서 반열반(般涅槃)의 적정(寂靜)의 공덕(功德)을 보고서, 다시 일체(一切)의 상(相)을 사유하기 때문에, 항상 바르게 무상계(無相界)를 사유(思惟)하기 때문에, 무상정(無相定)에 대하여 부지런히 수학(修學)하기 때문에, 또한 이것에 대하여 자주 수습(修習)하기 때문에, 영원히 수도에서 끊어지는[修斷] 아만(我慢)을 끊는다. 이러한 끊음[斷]에 의하기 때문에 무학(無學)은 3계(界)의 탐욕[欲]을 끊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상지와 하지의 탐욕을 끊고 나서 안온(安穩)을 얻고 일체의 고(苦)의 원인[因]을 모두 버리기[捨離] 때문에 일체중고(一切衆苦)의 변제(邊際)를 증득하는 것이다. 이와 같기 때문에 무상(無相)을 수습(修習)하여 아만(我慢)과 수면(隨眠)을 무너뜨리니, '만(慢)의 현관(現觀)에 의하여 고(苦)의 변제(邊際)를 증득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지금부터 간략하게 위에서 설한 뜻[義]을 분별[辨]해야겠다. 탐욕(貪欲)은 이것에 의하여 생기고 이것이 적정해지는 것[寂靜]에 의하여 저것이 적정해지는 것을 현시(顯示)하는 것이니, 이를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탐욕(貪欲)은 이것에 의하여 생긴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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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자면 5인(因) 때문이니, 첫째는 정묘상(淨妙想)에 의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흔락(欣樂)의 즐거움에 의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유정상(有情想)에 의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맹렬한 상[猛盛想]에 의하기 때문이고, 다섯째는 남음이 있음[有餘]의 아직 다하지 못한 수면(隨眠)에 의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탐욕이 생기고 나서 이것에 의하여 적정해진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5인(因) 때문이니, 첫째는 부정(不淨)을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고(苦)를 작의하고 사유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무아(無我)를 작의하고 사유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염(念)을 묶어서 자주 염리(厭離)를 수습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수면(隨眠)을 남김없이 영원히 다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적정(寂靜)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이 적정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현행적정(現行寂靜)이며, 둘째는 수면(隨眠)을 영원히 멸하여 미래[當來]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앞10)의 네 가지의 적정(寂靜)의 인연(因緣)에 의하여 비로소 정려(靜慮)를 성취하며, 다섯 번째의 인(因)에 의하여 두 번째를 성취한다.
  무엇이 필추가 자주 머무르는 것[所住]으로서
  다섯 가지의 폭류11)를 초월하고 여섯째12)를 마땅히 제도한다고 하는가?
  어떻게 정자(定者)는 능히 넓은 욕애(欲愛)를 제도하는데
  아직 요주(腰舟)13)를 얻지 못한다고 하는가?
  云何苾芻多所住  越五暴流當度六
  云何定者能度廣  欲愛而未得腰舟
  
  몸[身]이 경안(輕安)하고 마음[心]이 잘 해탈(解脫)하며
  
10) 앞에서 기술한 적정(寂靜)의 5인(因)가운데 처음의 네 가지 인(因)을가리킨다.
11) 5근(根)의 폭류(暴流)를 의미한다.
12) 제 6 의근(意根)의 폭류(暴流)를 의미한다.
13) 무학과(無學果)를 비유하는 것이다. 요주(腰舟)란 바다를 건너갈 때 쓰는 여러 가지 기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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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용이 없고[無作] 염을 묶으며[繫念] 흔들림[傾動] 없으며
  법(法)을 알아서 무심정(無尋定)을 수습(修習)하며
  분애(憤愛)와 혼침(惛沈)의 과실[過]에서 해탈한다.
  身輕安心善解脫  無作繫念不傾動
  了法修習無尋定  憤愛惛沈過解脫
  
  이와 같이 필추(苾芻)가 자주 머무르는 것으로서
  다섯 가지의 폭류(暴流)를 초월하고 마땅히 여섯째를 마땅히 제도하며
  이와 같이 정자(定者)는 능히 넓은 욕애(欲愛)를 제도하여도
  아직은 요주(腰舟)를 얻지 못한 것이다
  如是苾芻多所住  越五暴流當度六
  如是定者能度廣  欲愛而未得腰舟
  
  이것은 천녀(天女)가 묻는 것[所問]에 인한 가타(伽他)이다. '폭류(暴流)'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능히 여러 가지의 색(色)을 보는 안(眼)의 폭류(暴流)와 …… 능히 여러 가지의 법을 아는 의(意)의 폭류(暴流)를 말한다. 부처님의 성제자(聖第子)와 유학(有學)은 적(迹)을 보고서 희(喜)에 수순(隨順)하는 눈으로 인식되는[所識] 색(色)에 대하여 탐애[愛]에 머무르지 않으며, 우(憂)에 수순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색(色)에 대하여 탐에[恚]에 머무르지 않으며, 사(捨)에 수순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색(色)에 대하여 자주 자주 사택(思擇)하여 사(捨)에 안주(安住)한다. 그는 설령 이미 생긴 욕탐(欲貪)의 전(纏)이나 진에(瞋恚)의 전(纏)이나 우치(愚癡)의 전(纏)에 3신(身) 소위 희신(喜身)과 우신(憂身)과 사신(捨身)을 연(緣)으로 삼을지라도, 굳게 잡착[堅著]하지 않고 내지 토해낸다[變吐]. 이러한 인연에 의하여 3신(身)과 접촉하는 여러 가지 번뇌의 전(纏)을 현행하지 않게 되며, 경안(輕安)에 머무른다. 이와 같은 것을 '몸[身]이 경안(輕安)에 머무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마음이 잘 해탈함[心善解脫]을 얻지 못하였으니, 그 수면(隨眠)이 아직 영원히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후시(後時)에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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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히 그것에 속한 수면(隨眠)을 영원히 끊는다. 즉 그것에 속한 모든 번뇌(煩惱)의 수박(隨縛)을 멀리 여읜다[遠離]. 이와 같은 것을 이에 곧 3신(身)의 탐(貪) 진(瞋) 치(癡)한테서 '마음이 잘 해탈한다[心善解脫]'고 이름하는 것이다. 안소식색(眼所識色)에 있어서와 같이 내지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身所識觸]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이 이미 5하분결(下分結)14)를 끊고 나서 다섯 가지의 폭류(暴流)를 초월하니, 말하자면 능히 여러 가지의 색을 보는 눈의 폭류[眼暴流]를 초월하고 내지 능히 여러 가지 감촉[觸]을 느끼는 몸의 폭류[身暴流]를 초월한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의 폭류(暴流)를 초월[超度]하고 나서도 나머지 제6 의(意)의 폭류가 있게 되므로 다시 작용이 없고[無作] 흔들림이 없고[無動] 염을 묶는 것[繫念]을 수습하는 것이다.
  무엇을 '작용이 없음[無作]'이라고 하는가?
  열반(涅槃)에 대하여 마음으로 원락(願樂)15)을 일으키고 아만(我慢)으로 인하여 흔들리지[傾動] 않으며 사유하는 것도 없고 또한 조작(造作)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아(我)와 아소(我所)가 미래[當來]에 있게 될 것이며, 내지 나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이를 것이다.'라는 계탁 때문에 흔들림[傾動]이 없으며 사유(思惟)하는 것이 없으며 또한 조작(造作)도 없는 것이다.
  무엇을 '흔들림이 없다[無動]'고 하는가?
  그는 상분(上分)의 여러 결(結)16)로 인하여 그 마음을 얽지 않아서 흔들리지 않고 변화하지 않으며 또한 다르게 바뀌어지지[改轉] 않는 것이다. 또한 어떤 적정(寂靜)한 여러 가지의 정(定)에 따라서 애미(愛味) 연모(戀慕)
  
14) 신견(身見)과 계금취견(戒禁取見)과 의(疑)의 세 가지는 견혹(見惑)이며, 욕계(欲界)의 탐(貪)과 욕계(欲界)의 진(瞋)의 이 두 가지는 수혹(修惑)인데,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을 합하여 5라고 한다. 앞의 세 가지는 수도(修道)의 하위(下位)의 번뇌이며, 뒤에 두 가지에 의하여 욕계(欲界)를 벗어난다. 『구사론(俱舍論)』 21권을 참조하라.
15) 알고자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16) 5하분결(下分結), 즉 색탐(色貪) 무색탐(無色貪) 도거(掉擧) 만(慢) 무명(無明)을 말한다. 『구사론(俱舍論)』 21권(卷)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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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은 집착[堅著]을 내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염을 묶는 것[繫念]'이라고 하는가?
  '그는 상분(上分)의 여러 가지의 결(結)을 끊기 위하여 그 내신(內身)에 대하여 순신관(循身觀)에 머무르며'라고 이와 같이 …… 염주(念住)를 자세히 설하는 것이다. 그는 위와 같이 작용이 없음[無作]을 닦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생애(生愛)를 끊고, 흔들림이 없음[無動]을 닦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정애(定愛)17)를 끊는다. 이것의 현행(現行)을 여의는 것을 설명하여 끊음[斷]이라고 이름한다. 염을 묶음[繫念]을 닦기 때문에, 모든 상분(上分)의 여러 가지 결(結)을 남김 없이 영원히 끊게 하기 위하여 대치(對治)를 수습(修習)한다.
  이와 같이 작용이 없음[無作]과 염을 묶음[繫念]과 흔들리지 않음[不傾動]을 수습하기 때문에, 능히 모든 상분(上分)의 여러 가지 결(結)을 남김 없이 영원히 끊게 하는 것이다. 이를 즉 제 법(法)을 아는 의폭류(意暴流)인 제6의 폭류(暴流)를 초월[超度]한다고 이름한다.
  다시 차별(差別)이 있다.
  무엇을 '흔들림이 없다[無動]'고 하는가?
  흔들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慈)의 선근(善根)으로서 진에[瞋]의 성품[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 인연(因緣) 때문에 여러 성제자(聖第子)는 살가야(薩迦耶)에 대하여 삿된 원[邪願]을 끊어버리고[斷除]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를 닦는다. 그는 자(慈)에 의하기 때문에 사마타(奢摩他)를 닦으며, 염주(念住)에 의하기 때문에 비발사나(毘鉢舍那)를 닦는다. 이와 같이 바르게 수행(修行)하는 사람은 능히 상분결(上分結)을 끊는 3심(心)의 수습(修習)에 능히 수순하여 속히 원만(圓滿)을 얻는다. 말하자면 위로 몸[身]에 대하여 탐착에 물든 마음이 없고 아래로 유정(有情)에 대하여 분에(憤恚)의 마음이 없다. 방일(放逸)하지 않는 것은 상(上) 하(下)의 경계[境]에 대하여 염오(染汚)의 마음이 없으며, 나머지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을 '다섯 가지의 폭류(暴流)를 초월하고 여섯째를 마땅히 제도[度]한다'고 한다.
  
17) 선정(禪定)에서 생기는 자기의 정(定)을 집착하는 탐애(貪愛)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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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법(法)을 안다'고 하는가?
  고법(苦法)에 대하여 능히 알고 능히 관찰하며, 집(集) 멸(滅) 도법(道法)에 대하여 능히 알고 능히 관찰하는 것이다.
  무엇을 '무심정(無尋定)을 수습(修習)한다'고 하는가?
  능히 위와 같은 법(法)을 훤히 알고 나서 또 다시 집에 사는[居家] 제 욕(欲)의 의지(依持)를 단멸(斷滅)하고 출가[棄出]하여 안주(安住)하는 것이다. 아련야처(阿練若處)나 나무 아래의 공한처[空閑]에서 희(喜)에 수순(隨順)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색[眼所識色]에 대한 모든 희신(喜身)과 우(憂)에 수순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색에 대한 모든 우신(憂身)과 사(捨)에 수순하는 눈으로 인식되는 색에 대한 모든 사신(捨身)은 이것의 소연(所緣)에 대하여 욕심(欲尋)의 전(纏)이 없어서 마음이 자주 안주하는 것이며, 내지 또한 가세(家世)에 상응하는 심(尋)의 전(纏)이 생겨나지 않아서 마음이 자주 안주하는 것이다. 설령 욕심(欲尋) 내지 가세(家世)에 상응하는 심(尋) 등을 일으킬지라도 곧 여실하게 알고 출리(出離)하고 욕심(欲尋) 때문에 장애(障礙)되지 않으며 내지 가세(家世)에 상응하는 심(尋) 때문에 장애되지 않아서 능히 정려(靜慮)하고 심려(審慮)하고 제려(諦慮)한다.
  이러한 방편(方便)에 의하여 이 도(道)의 닦음에 의하여 능히 희신(喜身) 염애(染愛)의 과실(過失)을 끊고 능히 우신(憂身) 분에(憤恚)의 과실(過失)을 끊고 능히 사신(捨身) 혼침(惛沈)의 과실(過失)을 끊는다. 여러 가지 전(纏)을 끊기 때문에 몸의 경안(輕安)을 얻으며, 수면(隨眠)을 멸하기 때문에 욕계계(欲界繫)의 3신(身)의 염오(染汚)에서 마음이 잘 해탈한다. 그는 이 때에 넓고 큰[廣大] 욕애(欲愛), 즉 여러 색과 여러 촉(觸)에 대하여 두루 유행(流行)하는 애(愛) 화합(和合)하는 애(愛) 증장하는 애(愛) 분리되지 않는 애(愛) 합하지 않는 애(愛) 물러나 줄어드는[退減] 애(愛) 떨어지는[別離]의 애(愛) 및 혹은 욕계(欲界)에서 다시 생(生)을 받는 애(愛)를 이미 초월[超度]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차별(差別)이 있다.
  무엇을 '무심정(無尋定)을 수습(修習)한다'고 하는 것인가?
  이미 무심무사(無尋無伺)의 정려(靜慮)를 얻은 것을 말하니, 나머지는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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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 설한 것과 같다.
  다음으로 지금부터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하겠다.
  저 천녀(天女)가 세존(世尊)에게 간략하게 세 가지의 요의(要義)를 물었으니, 즉 첫째는 하분결(下分結)을 끊는 것과 둘째는 상분결(上分結)을 끊는 방편(方便)과 셋째는 곧 그 하분결(下分結)을 끊는 방편과 그와 같이 잘 끊는 것[如彼善斷]이다. 이와 같이 묻고 나자, 이 때 세존께서는 그에 응하여 대답하셨다. '몸이 경안(輕安)하고 마음이 잘 해탈(解脫)하며'에 의하여 그녀가 물은 하분결(下分結)을 끊음과 끊지 않은[非斷] 방편을 대답하신 것이며, '작용이 없고[無作] 염을 묶어서[繫念] 흔들림 없으며[非傾動]'에 의하여 그녀가 물은 상분결(上分結)을 끊는 방편과 끊지 않음을 대답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끊음[斷]에 대해서는 천녀들은 하분결(下分結)의 끊는[斷] 방편과 그와 같이 잘 끊는 것만 제외하고는 앞에서 곧 이해하여 받아들인다[領解].
  이 때 세존(世尊)께서는 먼저 무심정(無尋定)을 닦는 것으로써 자세하게 차별(差別)을 설하시고, 끊는 방편(方便), 즉 능단(能斷)과 여단(如斷)과 소단(所斷)을 대답하셨다.
  이 가운데에 법을 아는 것을[了法]을 능단(能斷)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무심정(無尋定)을 닦는 것을 설하여 여단(如斷)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소단(所斷)의 분(憤)의 과실[過]은 진에품(瞋恚品)을 말하고, 소단(所斷)의 애(愛)의 과실은 탐욕품(貪欲品)을 말하고, 소단(所斷)의 혼침(惛沈)의 과실은 우치품(愚癡品)을 말하는데, 위와 같은 것을 능단[能 : 能斷] 여[如;如斷] 소단(所斷)이라고 이름한다. 그 밖의 그대로 잘 끊은 것[如善斷]으로 있는 것만을 제외하고 이와 같이 자세하게 단(斷)의 방편(方便)을 대답하셨다.
  다시 제 2의 무심정(無尋定)을 닦는 차별(差別)의 인연(因緣)에 의하여 그 잘 끊음[善斷]을 대답하신다.
  잘 끊음[善斷]이라고 말하는 것은 필경의 끊음[畢竟斷]과 먼 부분의 끊음[遠分斷]과 일체 잡염의 끊음[一切雜染斷]을 말한다. 법(法)을 앎에 의하여 필경의 끊음[畢竟斷]을 해석하는 것이며, 무심정(無尋定)을 수습함에 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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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먼 부분의 끊음[遠分斷]을 해석하는 것이며, '탐(貪) 진(瞋) 치(癡)의 전(纏)과 수면(隨眠)의 일체를 끊음에 의하여 일체의 잡염의 끊음[一切雜染斷]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그 천녀(天女)는 아직 승의(勝意)를 얻지는 못했지만 이미 욕탐(欲貪)을 여의고 아직 상탐(上貪)을 여의지 못한 유학(有學)에 의거하여 청문(請問)을 일으키는 것이다.
  의(意)를 요주(腰舟)라고 이름하며, 경(經)에서는 참축(慚軸)과 의요주(意腰舟)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이 요주(腰舟)에 대하여 아직 얻지 못했다면 그것을 설명하여 '아직 요주(腰舟)를 얻지 못했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엇을 '요주(腰舟)'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제 결(結)에 대하여 잘 해탈한 마음[善解脫心]을 말한다.
  
  항상 두려움[怖]이 있는 세간(世間)의
  중생(衆生)이 늘 싫어하는 것[所厭]은
  아직 생기지 않은[未生]의 중고(衆苦)나
  혹은 다시 이미 생긴 것[已生]에서
  조금이라도 두려움 없게[無怖] 되는 것을
  지금 청하오니 나를 위하여 설해주소서.
  常有怖世間  衆生恒所厭
  於未生衆苦  或復已生中
  若有少無怖  今請爲我說
  
  천(天)이여 내가 해탈(解脫)을 관찰[觀]하노니
  지혜의 정진[智精進]을 여의지 않고
  제 근(根)의 섭수[攝]을 여의지 않고
  일체의 사(捨)를 여의지 않는다.
  天我觀解脫  不離智精進
  不離攝諸根  不離一切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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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매우 먼 것[極久遠]을 관찰하노니
  범지(梵志)의 반열반(般涅槃)은
  이미 제 공포(恐怖)를 지나쳤고
  세간(世間)의 탐착(貪著)을 뛰어넘으셨다.
  我觀極久遠  梵志般涅槃
  已過諸恐怖  超世間貪著
  
  지금 이 게송에서는 처음의 욕계(欲界)로부터 유정(有頂)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살가야(薩迦耶)를 모두 세간(世間)이라고 이름한다. 여기에서의 의미[意]는 욕계(欲界)의 즐거움이 있고[有樂] 괴로움이 있는[有苦] 유정세간(有情世間)에 있다. 만약 제 유정(有情)이 열 가지의 몸을 돕는 도구[十資身具]로 거두어져서[所攝養] 부족한 것[匱乏]도 없고, 몸이 건강하여 병(病)이 없고 나이가 아직 노쇠[衰老] 않는 것을 즐거움이 있는[有樂] 유정세간(有情世間)이라고 이름한다. 이것과 상위(相違)하는 것을 괴로움이 있는[有苦]의 유정세간(有情世間)이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세간의 중생에게는 적은 부분[少分]의 즐거움[樂]이 있고 많은 부분[多分]의 괴로움[苦]가 있다.
  여러 유(有)의 즐거움이 있는[有樂]의 유정세간(有情世間)은 항상 공포(恐怖)를 품고 '나의 재보(財寶)가 왕에게 빼앗기지나 않을까. …… 이러한 연(緣)에 의하여 여러 가지 고난(苦難)을 만나지나 않을까. 바람과 열[風熱]이 안에 발동(發動)하고 내지 혹은 인(人)이나 비인(非人) 등이 나를 해치지나 않을까'라고 이와 같이 미래에 재보(財寶)가 변하고 무너지는[變壞] 괴로움과 몸이 변하고 무너지는 괴로움[身壞苦]을 두려워하여[懼慮] 마음이 항상 포외(怖畏)한다.
  여러 존재[有]의 괴로움이 있는[有苦] 유정세간(有情世間)은 현재의 중고(衆苦) 때문에 몸과 마음을 핍절(逼切)당하고 괴로움[苦]가 있고 근심[憂]이 있고 시름[愁]이 있고 화살[箭]이 있고 여러 가지의 요뇌(擾惱)가 있어서 항상 안주(安住)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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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기 때문에 '항상 두려움[怖]이 있는 세간(世間)의 중생(衆生)이 늘 싫어하는 것[所厭]은 아직 생기지 않은[未生] 중고(衆苦)나 혹은 다시 이미 생긴 것[已生]에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인연에 의하여 저 천(天)은 현재의 여러 유(有)의 즐거움이 있는 유정세간의 즐거움[樂]은 결정(決定)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 여래께 결정된 즐거움[樂]이 있고 포외(怖畏)가 없는 곳[處]을 청문(請問)한다.
  이 때 세존께서는 곧 저 천(天)을 위하여 방편(方便)을 시현(示現)하시어 "오직 성교(聖敎)에만 이와 같은 곳[處]이 있고, 여러 외도들은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정법(正法) 밖에 머무르는 모든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은 현법(現法)과 그리고 미래세[當來世]의 제 욕(欲)의 과환(過患)에 대하여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의 제 욕(欲)의 차별(差別)을 희구(希求)하고 현법(現法)을 욕(欲)을 버려서 후법(後法)의 욕(欲)을 구하며 모든 금계(禁戒)를 정근(精勤)하고 수학(受學)하는 어떤 사람의 경우와 같다"고 하신다.
  "다시 이와 같이 금계(禁戒)에 안주할지라도 그러나 지혜(智慧)가 없고 근문(根門)을 보호하지 못하고 정념(正念)을 지키지 못하며 항상 위념(委念)이 없다. 내지 …… "라고 하신다.
  그는 근문(根門)을 조절하여 거두지[調攝] 못하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은혜 받은 소소(少小)한 이익[利養]과 공경(恭敬)에 대해서 오히려 애미(愛味)를 내고 따라서 연연한 집착[戀著]을 일으키는데, 어찌 하물며 광대(廣大)한 것이랴. 이와 같이 정근(精勤)하여 금계(禁戒)를 받는 자는 지혜(智慧)를 원리(遠離)하고, 비밀리에 근문(根門)을 보호하여 현법(現法)의 욕(欲)을 오히려 끊을 수 없는데, 하물며 후법(後法)의 욕(欲)이랴.
  또한 즉 그것에 대하여 어떤 한 사문과 바라문이 욕(欲)의 과환(過患)에 대하여 거친 것임을 훤히 알기[了知] 때문에, 능히 현법과 후법의 제 욕(欲)을 초월하고서 다시 위의 이욕지(離欲地)를 흔쾌히 구하고[欣求] 해탈하지 않은 것[非解脫]에 대하여 해탈(解脫)의 상(想)은 일으키며, 제 욕(欲)을 끊어버리고[斷棄] 곧바로 원리(遠離)에 이르러서는 그는 정근(精勤)하고 자주 정사유(正思惟)를 수습하기 때문에, 욕계(欲界)를 이욕(離欲)하고 내지 무소유처(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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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所有處)를 이욕한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아래[下]의 자체(自體)18)를 버리고 위[上]의 자체(自體)를 사랑한다.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미래세[當來世]에서 오히려 하지(下地)의 자체(自體)를 해탈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상지(上地)이랴.
  이와 같이 재보(財寶)와 자체(自體)를 버려도 도(道)를 잃는 자는 다시 용맹스런 정근(精勤)에 안주할지라도 한결같이 쾌락하면서 포외(怖畏)가 없는 곳[處]을 얻을 수 없다. 왜냐 하면 그 외도(外道)의 스승도 이 곳[是處]에 대하여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자세하게 개시(開示)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외도의 스승과 제자가 지은 논(論)에서는 결정적으로 뭇 고(苦)의 변제(邊際)가 있을 수 없다. 이것과 상위(相違)한 선설(善說)의 정법(正法)과 비나야(毘奈耶)에서는 일체의 이익[利養]을 구족하고 내지 반드시 중고(衆苦)의 변제(邊際)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러한 밀의(密意)에 의하여 부처님께서는 저 천(天)을 위하여 '천(天)이여 내가 해탈(解脫)을 관찰[觀]하노니 지혜의 정진[智精進]을 여의지 않고 제 근(根)의 섭수[攝]을 여의지 않고 일체의 사(捨)를 여의지 않는다'라는 이와 같은 말씀을 설하신 것이다.
  다음으로 지금부터 간략하게 위에서 설한 뜻을 분별[辯]하겠다.
  말하자면 악설(惡說)의 사법(邪法)과 비나야(毘奈耶)의 스승과 제자는 모두 쇠손(衰損)이 있고, 선설(善說)의 정법(正法)과 비나야(毘奈耶)에는 모두 길상(吉祥)을 갖추고 일체의 괴로움에서 능히 변제(邊際)를 증득함을 현시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이 가운데의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이 때 저 천(天)은 청문(請問)한 것에 대한 대답을 불(佛) 세존(世尊)께 듣고서 뛸 듯이 기뻐하며[歡喜踊躍] 곧 네 가지의 무상(無上)의 공덕으로써 여래를 찬탄한다. 말하자면 불(佛) 세존(世尊)께서 출현(出現)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출현하시고 나서 능히 이타(利他)의 행(行)을 성취하시기 때문이
  
18) 하계(下界)에 존재하는 몸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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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또한 능히 자리(自利)의 덕(德)을 건립하시기 때문이며, 자타(自他)의 이익[利]에 대하여 염심(染心)을 여의기 때문이다.
  '내가 매우 먼 것[極久遠]을 관찰하노니 범지(梵志)의 반열반(般涅槃)은'이란 이것은 세존의 출현하기 어려운 덕(德)을 찬탄하는 것이다. '이미 제 공포[怨]19)를 지나쳤고'란 이것은 세존의 이타(利他)의 행(行)의 덕을 찬탄한 것이다. '이미 제 공포[怖]를 지나쳤고'란 이것은 세존의 자리(自利)의 덕(德)을 건립하심을 찬탄하는 것이다. '세간(世間)의 탐착(貪著)을 뛰어넘으셨다'란 이것은 세존께서 자타(自他)의 이익[利]에 대하여 염심(染心)을 여읜 덕(德)을 찬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 공덕의 차별을 알아야만 한다.
  다시 세 가지의 차별이 있다. 말하자면 출현(出現)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히 보기 어렵기 때문에,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행(行)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보는 자는 곧 능히 대의(大義)를 성취한다. 대의(大義)를 성취한다란 염심(染心)을 여의기 때문에 일체의 생(生)에 두루하여도 뭇 죄(罪)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뭇 덕(德)의 제 불(佛) 세존(世尊)도 수승(殊勝)하기 때문에 이 상(相)으로써 여래를 찬탄하는 것이다.
  
19) 신수대장경에는 '원(怨)'으로 되어 있으나 앞의 본송(本頌)에는 '공(恐)'으로 되어 있으므로 본송(本頌)에 따라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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