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유가사지론 제 18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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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 18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8) 사소성지 ③
  
  누가 승류(勝類)의 생(生)을 돕고[·]
  그리고 출리(出離)의 도(道)를 엽니까.
  어디에 머무르고 무엇을 배워야
  후세(後世)의 죽음[死]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誰·勝類生  及開出離道
  於何住何學  不懼後世死
  
  계(戒) 혜(慧)를 갖추어 스스로 스며들도록 닦고[薰修]
  정(定) 념(念)의 정직(正直)을 갖추고
  여러 가지의 시름[愁]과 치성[熾然]을 끊고
  정념(正念)으로써 심해탈(心解脫)한다.
  戒慧自薰修  具定念正直
  斷諸愁熾燃  正念心解脫
  
  능히 승류(勝類)의 생(生)을 돕고
  그리고 출리(出離)의 도(道)를 열어서
  이것에 머무르고 이것을 배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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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세(後世)에 죽음[死]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能·勝類生  及開出離道
  住此於此學  不懼後世死
  
  지금 이 게송에서 '승류(勝類)'라고 말하는 것은 즉 네 가지 종류의 뛰어난 종성[勝上姓]의 종류이니, 첫째는 바라문(婆羅門)이고 둘째는 찰제리(刹帝利)이고 셋째는 폐사(吠舍)이고 넷째는 술달라(戌達羅)이다. 법(法)으로써, 바름[正]으로써, 제정[制]으로써, 이끔[導]으로써 뛰어난 종류[勝類]의 생(生)을 가르치기 때문에 '돕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오직 불(佛) 세존(世尊)만이 능히 법(法)으로써, 바름으로써, 제정으로써, 이끔으로써 뛰어난 종류의 생(生)을 가르친다는 것을 현시(顯示)한다. 이 인연(因緣)에 의해서 세존께서는 스스로 '오직 나만이 홀로 진정한 장도자(·導者)이다'라고 하심을 현시한다. 그러므로 그 천(天)을 위해서 '계(戒) 혜((慧)를 갖추어서 스스로 스며들도록 닦고[薰]'라고 이와 같은 설명을 하는 것이다. 또한 오직 세존만이 능히 네 가지 종류의 뛰어난[勝上] 종류의 생(生)을 위해서 일체의 뭇 괴로움[衆苦]을 벗어나는 성스런 8지도(支道)를 선설(宣說)하신다. 여기에서는 세존 역시 스스로 진정한 설자[眞說者]임을 현시(顯示)한다.
  무엇을 '계(戒)를 갖춘다'고 하는 것인가?
  불(佛) 세존(世尊)께서 옛날 보살 시절에 상묘(上妙)한 욕심[欲]을 버리고 집에 있는 것[居家]을 저버리고 몸[身]과 말[語]의 모든 율의(律儀)를 수지(受持)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혜(慧)를 갖춘다'고 하는 것인가?
  즉 그것1)에 대해서 몸[身]과 말[語]의 율의(律儀)를 수지(受持)하여 머무르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상(相)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안으로 정사유(正思惟)하고 깊은 마음으로 헤아리고[籌量] 자세하게 진리[審諦]를 관찰하되, 지금 이 세간에서는 많은 어려운 고통[艱苦], 소위 태어남[生] 또는 늙음[老]을
  
1) 계(戒)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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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난다고 하는 것이다. 경(經)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무엇을 '스스로 스며들도록 닦는다[薰修]'고 하는 것인가?
  옛날 무량(無量)한 여생(餘生)에서 3대겁아승기야(大劫阿僧企耶)를 거쳐 6바라밀(波羅蜜)에 대해서 많이 수습하고 잘 수습한 것을 말한다. 그 인연에 의해서 지금 스승도 없이 자연스러운 마음의 출리에 나아가고 또한 뭇 연에서 생기게 되는[衆緣所生] 제 행(行)에 대해서 미묘(微妙)한 지혜로써 능히 따라 오입(悟入)하는 것이다.
  무엇을 '정(定)을 갖춘다'고 하는 것인가?
  능히 내지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욕(欲)을 여의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염(念)을 갖춘다'고 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소득(所得)의 뛰어난 정[勝定]에 의지하여 견도소단[見斷]의 여러 가지 번뇌를 끊기 위해서 4념주(念住)를 닦는 것을 말한다. 즉 이와 같이 닦게는 염주(念住)를 그것의 안내자[導者]로 삼아서 내지 37종(種)의 보리분법(菩提分法)을 수습하는 것이다.
  무엇을 정직(正直)이라고 하는가?
  그것이 유전을 거스르는[逆流] 정직(正直)한 성스런 8도지(道支)를 일으켜서 능히 견도소단[見斷]의 모든 번뇌를 끊고 유전을 거스르는 도(道)에서 예수류(預隨流)2)를 얻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영원히 여러 가지의 시름[愁憂]과 치성[熾然]을 끊는다'고 하는 것인가?
  진리[諦]의 현관(現觀)에 따라서 갖추어 불환(不還)을 성취하게 되는 것을 말하며 또한 능히 5하분결(下分結)을 끊는 것을 말한다. 진에(瞋恚)는 시름[愁憂]을 따르는 것과 흡사하며, 탐욕(貪欲)은 치성[熾然]에 따르는 것과 흡사하다. 이와 같은 등에 대해서 모두 영원히 끊어버린 것이다.
  무엇을 '정념(正念)'이라고 하는 것인가?
  영원히 상분(上分)의 제 결(結)을 끊기 위해서 또 다시 4념주(念住)를 수
  
2) 예류과(預流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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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하고 내지 37종(種)의 보리분법(菩提分法)을 수습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심해탈(心解脫)한다'고 하는 것인가?
  이미 영원히 상분(上分)의 결(結)을 끊었기 때문에 두 가지 장(障)에 대해서 마음이 잘 해탈한 것을 말하니, 소위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다. 그 마음이 이와 같이 잘 해탈하기 때문에 여래(如來)의 응정등각(應正等覺)을 성취하게 된다. 자세한 설명은 경(經)의 내용과 같다.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능히 뛰어난 종류[勝類]의 생(生)을 돕고 그리고 출리(出離)의 도(道)를 열어서 여러 가지 4종(種)의 뛰어난 부류 중에 어떤 누구라도 이 성교(聖敎)에 대해서 정행(正行)을 애락(愛樂)하고 성스러운 8지도(支道)를 증득하기 위해서 3학(學) 가운데에 부지런히 수학(修學)하는 자는 그는 반드시 성스런 8지도(支道) 및 열반(涅槃)의 과(果)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증득하기 때문에 미래[當來]의 생(生) 로(老) 병(病) 사(死)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이제 간략하게 위에서 설한 뜻을 분별[辦]하겠다. 오직 불(佛) 세존(世尊)만이 능히 네 가지 부류로 하여금 속히 청정하게끔 할 수 있다는 것을 현시(顯示)하는 것이다. 그가 만약 이것에 대해서 능히 바르게 수습한다면 헛되이 훼손하지[唐損]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여래(如來)의 성교(聖敎)를 선설(宣說)한 정법(正法)과 비나야(毘奈耶)를 현시하며, 또한 다시 부처님은 천(天) 인(人)의 위없는[無上] 대사(大師)임을 현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어떻게 해야 명예(名譽)를 드날리고
  어떻게 해야 값진 재물[珍財]를 갖춥니까.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칭호를 획득하며
  어떻게 해야 친한 벗[親友]을 거두겠습니까.
  云何擅名譽  云何具珍財
  云何獲美稱  云何攝親友
  
  지계(持戒)는 명예(名譽)를 드날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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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시(布施)는 값진 재물[珍財]를 갖추고
  제실(諦實)은 아름다운 칭호를 획득하며
  혜사(惠捨)는 친한 벗[親友]을 거둔다.
  持戒擅名譽  布施具珍財
  諦實獲美稱  惠捨攝親友
  
  무엇을 '지계(持戒)는 명예(名譽)를 드날린다'고 하는 것인가?
  남자건 여자건 어떤 사람이 시라(尸羅)와 현선(賢善)의 법을 구족하고 내지 목숨이 끝날 때까지 살생의 죄[殺罪]를 끊어 버리고 살생을 원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경(經)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내지 시방(十方)의 모든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 등에게 항상 칭찬받고 이러한 인연에 의하여 여러 국왕(國王)과 군신(群臣)과 장자(長者)와 내지 성읍(城邑)과 촌락(村落)의 인민(人民)들까지 공경하고 공양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보시(布施)는 값진 재물[珍財]을 갖춘다'고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옛날의 여생(餘生) 동안에 보시의 복된 사업(事業)을 짓고 증장(增長)하는 것과 같으니, 이 인연에 의해서 금생에 거부(巨富)로서 큰 재보가 있는 집에 태어나고 내지 여러 가지 많은 창고에 가득 쌓여진 것을 말한다.
  무엇을 '제실(諦實)은 아름다운 칭호를 획득한다'고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말과 저울과 함(函) 등을 속이거나 아첨하면서 속이고 능멸하고 거짓말 등의 일로써 재산[財寶]을 치부하지 않고 단지 여법(如法)한 작업(作業)과 기능(伎能)만으로써 법(法)에 의지하여 난폭하지 않게 재산[財寶]을 치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하였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은 모두 '어질도다. 선비여. 여법(如法)한 작업(作業)과 기능(伎能)으로써 재산[財寶]을 치부하였구나'라고 부르짖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혜사(惠捨)는 친한 벗[親友]을 거둔다'고 하는 것인가?
  현전(現前)에 갖가지 가산(家産)을 많이 소유한 어떤 사람이 인색한 때[慳垢]를 멀리 여의고 자구(資具)를 아까워하지 않고 바른 안락(安樂)으로써 스스로 즐기고, 벗과 친척과 늙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여러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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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도우면서 재산[財寶]을 치부하고 지키며 불어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말하자면 공경(恭敬)과 이익[利養]의 두 가지 인연을 간략하게 현시한 것이다. '지계(持戒)는 명예(名譽)를 드날리고'란 공경(恭敬)의 인연을 현시한 것이며, 그 나머지 여러 구(句)들은 이익[利養]의 인연을 현시한 것이니, 말하자면 인력(因力) 때문이요, 사용력(士用力) 때문이요, 조반력(助伴力) 때문이다. 이것을 이 가운데의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어디까지가 샘[泉]이 그치는 것이며[止息]
  어떤 길[逕]에 통하지 않습니까.
  세간의 모든 고(苦) 낙(樂)은
  어느 곳에서 남김없이 멸합니까.
  齊何泉止息  於何逕不通
  世間諸苦樂  何處無餘滅
  
  만약 이 처소(處所)에서라면
  눈[眼]과 귀[耳]와 그리고 코[鼻]와
  혀[舌]과 몸[身]과 생각[意]과 명색(名色)이
  영원히 다하여[滅盡] 남김이 없으면
  若於是處所  眼耳及與鼻
  舌身意名色  永滅盡無餘
  
  여기까지가 샘[泉]이 그치는 것이며
  이 길[逕]에 통하지 않는 것이며
  세간의 모든 고(苦) 낙(樂)은
  이곳에서 남김없이 멸하는 것이다.
  齊此泉止息  於斯逕不通
  世間諸苦樂  是處無餘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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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샘[泉]'이라고 하는 것인가?
  6촉처(觸處)를 말한다. 왜냐 하면 비유하자면 샘[泉]과 못[池]은 모든 물을 낼 수 있고 물은 그곳에 묶여서 감임(堪任)하고 접촉하면서 작용할 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남자나 여자나 크고 작은 것을 능히 살려서 길러주고[存養] 아래로는 날짐승과 길짐승에 내지 일체에 이르기까지 마르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이 6내촉처(內觸處) 또한 그러하다. 일체의 어리석은 범부[愚夫]는 여섯 가지 경계의 촉에 접촉되면서 작용할 뿐만 아니라 능히 살려서 길러주고 내지 이 안에서 여러 가지 탐애(貪愛)의 물이 마르지 않게끔 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길[逕]'이라고 하는 것인가?
  길[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번뇌의 길이요, 둘째는 업(業)의 길이다. 이 가운데에 길이라 함은 의인(意因)의 뜻임을 밝힌 것이다.
  무엇을 고(苦) 낙(樂)이라고 하는 것인가?
  혹은 현법(現法)에서 여섯 가지 촉처(觸處)를 연(緣)으로 하여 생기게 되기도 하고, 혹은 편안한 느낌[安受]의 수(受)에 포함되기도 하고, 혹은 편안하지 않은 느낌[不安受]의 수(受)에 포함되기도 하고, 혹은 후법(後法)에서 번뇌를 지닌[攝持] 묘행(妙行)과 악행(惡行)을 연(緣)으로 하여 생기게 되기도 하고, 혹은 편안한 느낌의 수(受)에 포함되기도 하고 혹은 편안하지 않은 느낌의 수(受)에 포함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어떤 처소에서 이와 같은 6처(處)와 명색(名色) 등이 남김없이 멸한다'고 하는 것인가?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에서를 말한다. 만약 이생(異生)들일 경우에는 샘[泉]과 길[逕]과 고(苦) 낙(樂)의 일체를 결여하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는다. 유학(有學)들일 경우에는 결여하면서도 아직은 버리지 못한다. 무학(無學)들일 경우에는 길[逕] 및 미래의 모든 고(苦) 낙(樂)은 결여하면서도 버리기도 하며 다시는 현행(現行)하지 않지만 샘[泉]과 현법(現法)의 모든 고(苦) 낙(樂)은 결여하면서도 또한 버리기도 하나 유여의(有餘依)이기 때문에 아직은 다시 현행한다. 그러므로 무여열반계(無餘涅槃界)에서는 그 일체가 남김없이 멸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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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말하자면 현법(現法) 중의 원인 및 고(苦) 낙(樂)과 후법(後法) 중의 원인 및 고(苦) 낙(樂)은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 중에서 모두 다 영원히 멸함을 간략하게 현시한 것이다. 이것을 이 가운데의 약의(略義)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으로 폭류(暴流)를 건널 수 있으며
  무엇으로 대해(大海)를 뛰어넘을 수 있으며
  무엇으로 뭇 괴로움[衆苦]을 버릴 수 있으며
  무엇으로 청정(淸淨)을 얻을 수 있나이까.
  誰能越暴流  誰能超大海
  誰能捨衆苦  誰能得淸淨
  
  바른 믿음[正信]으로 폭류(暴流)를 건널 수 있으며
  무방일[無逸]로 대해(大海)를 뛰어넘을 수 있으며
  정진(精進)으로 뭇 괴로움을 버릴 수 있으며
  지혜(智慧)로 청정(淸淨)을 얻을 수 있다.
  正信越暴流  無逸超大海
  精進捨衆苦  智慧得淸淨
  
  지금 이 게송에서는 무엇을 '바른 믿음[正信]으로 폭류(暴流)를 건널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모든 탐욕[諸欲]의 과환(過患)을 알고자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과 제자가 설한 모든 정법(正法)을 듣고서 이 법을 듣고 나서 바른 믿음[正信]을 얻고, 곧바로 욕락(欲樂)을 내어서 사욕(事欲)과 번뇌욕(煩惱欲)을 끊기 위하여, 드디어 살던 집[居家]의 사욕(事欲)을 능히 버리고 바른 믿음으로 집을 떠나서 집 아닌 데[非家]로 나아가며, 이미 출가(出家)한 다음에는 번뇌(煩惱)의 여러 욕[諸欲]을 끊으려 하기 때문에 멀리 떠나서[遠離] 머무르려고 하며, 그는 매우 열심히[熾然] 부지런히 정진(精進)하기 때문에 내지 정사유(正思惟)를 수습(修習)하기 때문에, 번뇌의 여러 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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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끊고 이욕(離欲)의 정지(定地)를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위와 같이 바름 믿음[正信]을 의지[依]로 삼고 길잡이[導]로 삼으면, 곧바로 여러 욕[諸欲]의 폭류(暴流)를 건널 수 있다.
  무엇을 '무방일[無逸]로 대해(大海)를 건널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그 정(定)에 대하여 끝내 애미(愛味)하지 않고, 내지 또한 오직 모든 누진지(漏盡智)를 증득하기 위하여 그 마음을 전주(專注)하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굳게 집착[堅著]하여 안주(安住)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에 의하여 정의 마음[定心]은 청정(淸淨)하고 깨끗하게 희며[鮮白] 정직(正直)하고 부드러워지므로[調柔] 4성제(聖諦)에 대하여 현관(現觀)에 들어갈 수 있으며, 모든 번뇌[諸漏]가 영원히 다한 것을 증득(證得)할 수 있다.
  위와 같이 불방일(不放逸)을 의지[依]로 삼고 길잡이[導]로 삼으면, 색(色) 무색계(無色界)의 두 가지 유(有)의 폭류(暴流)를 끊을 수 있으며, 일체의 무명(無明)과 견(見)의 두 가지 폭류(暴流)를 끊을 수 있다. 그러므로 '대해(大海)를 뛰어넘는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정진(精進)으로 뭇 괴로움[衆苦]을 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어떤 한 유학(有學)이 적(迹)을 보고서, '나는 응당(應當) 모든 결(結)이 영원히 다하는 3계(界)의 이욕(離欲)을 증득하겠다'고 이와 같이 사유하고, 곧바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아가서, 그것3)에 대하여 용맹히 정진[精勤]하여 머무르며, 탐욕(貪欲)의 전(纏)의 마음[纏心]에 자주 안주하지 않고 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현재(現在)의 모든 욕탐(欲貪)의 전(纏)에서의 모든 출리(出離)를 능히 여실하게 알아서[了知] 탐욕개(貪欲蓋)에 대한 그 마음을 깨끗이 닦아서, 드디어 모든 탐욕(貪欲)의 전(纏)과 탐욕의 전(纏)이 연(緣)이 되어서 생기게 되는 마음의 모든 우고(憂苦)를 능히 끊어서 없애는 것과 같은 것이다.
  탐욕개(貪欲蓋)처럼 의개(疑蓋)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이 정진(精進)을 의지[依]로 삼고 길잡이[導]로 삼으면, 능히 뭇 괴로움[衆苦]을 버릴 수 있다.
  
3) 모든 결(結)을 영원히 다하는 3계(界)의 이욕(離欲)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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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지혜(智慧)로 청정(淸淨)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그는 능히 마음을 염오(染汚)하고 내지 능히 구경열반(究竟涅槃)을 장애하는 5개[五種蓋]를 제거하고 나서 곧 미지정[未至]에 의지하여 미지정에 안주하면서 먼저 얻었던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여러 무루지(無漏智)와 같이 모든 괴로움[諸苦]에서 진실의 괴로움[眞苦]을 사유(思惟)하며 내지 도(道)에서 진실한 도[眞道]를 사유하여, 곧바로 모든 번뇌[諸漏]를 영원히 다하는 무여(無餘)의 3계(界)의 이욕(離欲)을 얻는 것이다.
  위와 같이 먼저 얻었던 지혜(智慧)를 의지[依]로 삼고 길잡이[導]로 삼으면, 능히 청정(淸淨)을 증득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이 게송에서 이생(異生)은 먼저 이욕(離欲)하고 나서 다음으로 성제(聖諦)의 현관(現觀)이 청정(淸淨)하게 되는 것을 현시한 것이며, 그리고 유학(有學)은 여러 성제(聖諦)에 대한 현관(現觀)을 먼저로 하고 이욕(離欲)하여 청정(淸淨)하게 되는 것을 현시한 것이다. 이것은 이 가운데의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누가 폭류(暴流)를 뛰어넘어서4)
  밤낮으로 혼매(惛昧)가 없으며
  반연[攀]이 없고 머무름[住] 없는 데서
  매우 깊어서[甚深] 줄어듬[減劣]이 없나이까.
  誰超越暴流  晝夜無恚昧
  於無攀無住  甚深無減劣
  
  뭇 시라(尸羅)를 원만히 하고
  지혜[慧]를 갖추어 잘 정(定)에 안주하며
  
4) 이하의 세 게송에서는 구경도(究竟道)를 얻어서 영원히 폭류(暴流)를 초월하는 것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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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으로 사유(思惟)하여 염(念)을 묶어서
  매우 건너기 어려운 것을 건널 수 있다.
  圓滿衆尸羅  具慧善安定
  內思惟繫念  能度極難度
  
  제 욕(欲)의 생각[想]에서 잡염[染]을 여읠 수 있고
  또한 색계(色界)의 결(結)을 뛰어넘으면
  그 곳에 반연[攀]이 없고 머무름[住]이 없어서
  깊고 깊음[甚深] 속에 줄어듬[減劣]이 없다.
  諸欲想離染  亦超色界結
  彼無攀無住  甚深無減劣
  
  이 게송에서는 무엇을 '폭류(暴流)'라고 하는 것인가?
  소위 4류(流)이니, 욕류(欲流) 유류(有流) 견류(見流) 무명류(無明流)이다.
  무엇을 '반연[攀]이 없고 머무름[住]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소위 모든 탐애[愛]를 영원히 다하여 이욕(離欲)한 적멸(寂滅)의 열반(涅槃) 및 멸진정(滅盡定)이다. 왜냐 하면 말한 바 반연[攀]이란 모든 번뇌(煩惱)의 전(纏)이며, 말한 바 머무름[住]이란 번뇌(煩惱)의 수면(隨眠)이기 때문이다. 그 처소(處所)에는 두 가지가 모두 없기 때문에, '반연[攀]이 없고 머무름[住]이 없다고 설하는 것은 반연이 없고 머무름이 없는 열반(涅槃)을 말한다.
  또한 생각[想]을 반연[攀]이라고 이름하며, 느낌[受]를 머무름[住]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이 곳에 두 가지 모두가 없으면 곧 '그 곳에 반연[攀]이 없고 머무름이 없다'고 설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것은 반연[攀]이 없고 머무름 없는 멸상수정(滅想受定)을 현시한 것이다. 지금은 이 의미 가운데에 멸정(滅定)을 취한 것이다.
  무엇을 '뭇 시라(尸羅)를 원만히 한다'고 하는 것인가?
  신(身) 어(語)의 율의(律儀)에 잘 안주(安住)하여 정명(淨命)을 수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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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修治]이다.
  무엇을 '지혜[慧]를 갖춘다'고 하는 것인가?
  고성제(苦聖諦)에 대하여 여실(如實)하게 알고 내지 도성제(道聖諦)에 대해서도 또한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무엇을 '정(定)에 잘 안주한다'고 하는 것인가?
  모든 욕[諸欲]을 멀리 여의고 내지 구족하여 제 4정려(靜慮)에 안주하며 혹은 제일(第一)의 삼마발저(三摩鉢底)가 있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을 '안으로 사유한다'고 하는 것인가?
  22처(處)5)에 대하여 자주 관찰하면서 '나는 이제 용모[容飾]를 항상 고쳐서 속인의 형상[形好]을 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경(經)에서와 같다.
  무엇을 '염(念)을 묶는다'고 하는 것인가?
  22처(處)에 대하여 자주 관찰할 때 사문(沙門)의 상(想)에 의하여 항상 짓고 항상 굴리면서 현재전(現在前)하는 것이다. 이 인연에 의해서 다른 결(結)을 끊기 위하여 4념주(念住)를 닦는다.
  무엇을 '매우 건너기 어려운 것을 건널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모든 결(結)을 남김없이 끊었기 때문에 최고로 건너기 어려운 유정(有頂)까지 건널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어리석은 범부[愚夫] 이생(異生)으로서는 건널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을 '제 욕(欲)의 생각[想]에서 잡염[染]을 여읠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하분(下分)의 결(結)에 대해서 이미 끊고 이미 아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색계(色界)의 모든 결(結)을 뛰어넘는다'고 하는 것인가?
  색계(色繫)의 상분(上分)의 모든 결(結)에 대해서 이미 끊고 이미 아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그 곳에 반연[攀]이 없고 머무름[住]이 없어서 깊고 깊음[甚深] 속에 줄어듬[減劣]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5) 22처(處)에 대해서는 성문지(聲聞地)에서 자세하게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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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색계(無色界)에서는 혹은 이미 이욕(離欲)하였거나 혹은 아직 이욕(離欲)하지 못할지라도 이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얻었는지라 세력이 있어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학(學)과 무학(無學)은 모두 이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무색(無色)의 결(結)을 뛰어넘는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이 게송에서 최고의 구경도(究竟道)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간략하게 현시하였고, 그리고 제 1의 머무름의 도[住道]를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이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탐(貪) 에(恚)는 어떤 인연이며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슬퍼하며[欣 ]
  털이 곤두서는 의(意)의 심사(尋思)6)
  아이가 유모에게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까.
  貪恚何因緣  由何故欣
  毛竪意尋思  如孩依乳母
  
  생기게 된 것[所生]이나 스스로 생긴 것[自生]을 윤택히 하는 것은
  마치 락구타수(諾瞿陀樹)와 같으며
  다른 모든 욕[諸欲]을 결박[縛]함은
  마치 마가(摩迦)가 숲에 있는 것과 같으니라.
  潤所生自生  如諾瞿陀樹
  別縛於諸欲  猶摩迦處林
  
  이것이 탐(貪) 에(恚)의 인연이며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기뻐하고 슬퍼하며
  
6) 이것 저것을 사량분별(思量分別)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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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털이 곤두서는 의(意)의 심사(尋思)는
  아이가 유모에게 의지하는 것과 같으니라.
  是貪恚因緣  由斯故欣
  毛竪意尋思  如孩依乳母
  
  이런 저런 인연을 알아서
  생겨나자마자 곧 제거해 없애면
  예전에 미처 뛰어넘지 못한 바다를 뛰어넘고
  폭류(暴流)를 뛰어넘으니 후유(後有)가 없으리라.
  知彼彼因緣  生已尋除滅
  超昔未超海  暴流無後有
  
  지금 이 게송에서 무엇을 '탐(貪) 에(恚)'라고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집에서 살고 있으면서 뜻에 맞는 경계[可意境]와 뜻에 맞는 유정[可意有情]과 함께 서로가 만나면 탐착을 일으키고 뜻에 맞지 않는 경계[不可意境]와 유정(有情)과 함께 서로가 만나면 진에(瞋恚)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기뻐하고 슬퍼한다[欣 ]'고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증득한 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갑자기[率爾] 수유지간[須臾]7)에 바른 믿음[正信]을 일으키게 되어서, 앞뒤의 득실을 잘 관찰하지도 않고 홀연히 스스로 힘써서 곧바로 가법(家法)을 버리고 집 아닌 데[非家]로 나아가며 출가하고 난 뒤에는 무릇 도인과 속인이 함께 섞여 머무르면서 드디어 재물[貨財]이 오고 가는 것과 친한 벗에 대해서 돌이켜 생각하고[追念] 사모하여 근심하고 슬퍼하여 마음을 얽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다시 어떤 사람이 바른 믿음[正信]에 의한 것도 아니고 또한 스스로 힘써서 집 아닌 데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지만, 혹은 왕에게 쫓겨나게 되었거나 내지 혹은 살아나갈 수 없는 삿된 두려움으로 공포를 느껴서 살던 집[居家]을
  
7) '순간'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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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리고 떠나기도 하는데, 집을 떠난 뒤에는 바른 믿음[正信]의 바라문(婆羅門)과 거사(居士) 등의 곁에서 때때로 많은 이익[利養]과 공경(恭敬)을 획득한지라 깊이 애미(愛味)를 일으켜서 몰래 생각하기를 '나의 이 하나의 방법[一方]이야말로 훌륭하고도 요긴하구나. 농사지을 필요도 없고 장사할 필요도 없다. 조금만 고생하면 생활하는데 넉넉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는 이와 같은 이익[利養]과 공경(恭敬)에 연(緣)하여 곧바로 스스로 기뻐하며 편안하게 머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엇을 '털이 곤두서는 의(意)의 심사(尋思)'라고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스스로 부지런히 함에 의하지도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 살던 집을 버리고 떠난 것도 아니었지만 바른 믿음[正信]에 의해서 가법(家法)을 버리고 집 아닌 데[非家]로 나아가며, 출가(出家)한 뒤에는 도인과 속인이 서로가 함께 섞여 살지도 않고 곧바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아가 적정한 한가한 곳[寂靜閑]에서 살며, 그가 한가한 곳에 살 때에 어떤 경우에는 티끌과 안개에서, 어떤 경우에는 어두운 밤에 큰 구름의 기운을 보거나, 지진과 우레의 소리를 듣거나, 우박과 비 그리고 사자와 범과 표범을 만나거나, 어떤 경우에는 흉악하고 교활한 도적과 노략꾼을 만나거나, 어떤 경우에는 와서 괴롭히는 비인(非人)을 만나면 곧 놀랍고 두려워서 몸에 털이 곤두서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낮이 되어서 그 묘욕(妙欲)이 오고 가는 친한 벗에 대해서 탐기(耽嗜)에 의하여 모든 심사(尋思)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경(經)에서 자세히 설한 욕(欲)의 심사(尋思)와 같으며, 집[家]과 세간[世]에 이르기까지 상응하여 심사(尋思)하는 것을 말한다.
  위와 같이 이미 탐(貪) 에(恚) 등의 현상[事]을 설하였다.
  
  무엇을 '생기게 된 것[所生]이 마치 세간의 락구타수(諾瞿陀樹)8)와 같다'고 하는 것인가?
  '윤택[潤]'이란 애수(愛水)를 이름하며, 이것을 연(緣)으로 삼기 때문에 능
  
8) 범어 Nyagrodha의 음사어로서, 근본이 되는 하나의 나무에서 가지가 생기면 그 각각의 가지에서 다시 각각의 나무가 수많이 생기는 그러한 나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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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 모든 취(取)를 일으키며, 그 탐(貪)과 에(恚) 등의 일체는 모두가 이것을 공동의 연[共緣]으로 삼는 것이다.
  '스스로[自]'란 곧 탐(貪) 에(恚)가 먼저가 되고 심사(尋思)가 나중이 되는 각각 차별적인 종자계(種子界)의 성품이다.
  무엇을 '탐(貪)과 에(恚)로부터 심사(尋思)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모든 욕[諸欲]을 결박[縛]함은 마치 세간의 마로가조(摩魯迦條)9)의 나뭇가지가 숲의 나뭇가지를 얽매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인가?
  소위 간략하게 설하면 여섯 가지의 다른 탐욕[別欲]이 있다. 어떤 경우는 몸의 손의 힘으로 끌어당기게 되는 현재(現在)의 사욕(事欲)이 있으니, 집에 사는 사람의 모든 욕은 이 경계에서 이것을 사용하여 연(緣)으로 삼아서 탐(貪) 에(恚)를 발생시키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는 각기 다른 사람에게서 얻게 되는 갖가지 현재(現在)의 사욕(事欲)이 있으니, 살아가기 위하여 출가한 사람의 모든 욕은 이 경계에서 이것을 연(緣)으로 삼아서 기쁨[欣悅]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는 과거(過去)와 미래(未來)의 사욕(事欲)이 있으니, 갑자기 스스로 힘써서 출가한 사람의 모든 욕은 이 경계에서 이것을 연(緣)으로 삼아서 근심과 슬픔[憂悲 ]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는 그 밖의 모든 번뇌욕(煩惱欲)이 있다.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욕계(欲界)의 자체(自體)와 몸과 목숨[身命]을 돕는 경우를 말한다.
  어떤 경우는 아직 끊지 못한 망분별(妄分別)의 탐(貪)이 있으니, 바른 믿음[正信]에 의하여 출가한 사람이 적정한 한가한 곳에 살 때에 티끌 또는 밤에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로서 이 경계에서 이것을 연(緣)으로 삼아서 곧바로 놀라거나 두려움이 생겨나서 몸에 털이 곤두서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는 아직 끊지 못한 망분별(妄分別)의 탐(貪)이 있으니, 소위 이 뿌드갈라[補特伽羅]10)가 낮이 되면 밖의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의 경계에서 이것을 연(緣)으로 삼아서 의지(意地)의 모든 심사(尋思)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9) 등나무 덩굴과 같은 종류이다.
10) 범어 Pudgala의 음사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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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어떤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은 여실(如實)하게 앞에서 설한 탐(貪)과 에(恚) 등과 그것의 인연을 알며[了知], 또한 뭇 연[衆緣]에서 생겨나는 법은 무상성(無常性)임을 알고 난 뒤에는 그 생겨나게 된 것[所生]을 따라서 탐착을 일으키지 않고 곧 버리고 토해내고 끊어 없애는 것을 말한다.
  색(色) 무색(無色)의 두 세계[界]의 탐(貪)을 여의기 때문에 유(有)의 폭류를 건너고 욕탐(欲貪)을 여의기 때문에 욕(欲)의 폭류를 건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폭류는 예전에는 미처 건너지 못한 것이었지만 이제 건너고 나서 끝내 물러나는 일이 없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이 게송에서 간략하게 3위(位)를 현시하셨으니, 첫째는 재가위(在家位)요, 둘째는 출가위(出家位)요, 셋째는 원리위(遠離位)이다. 또한 함께 함[共]과 함께하지 않음[不共]의 인연에서 생기게 되는[因緣所生] 애(愛) 또는 에(恚)는 모든 욕[諸欲] 중에서 두 가지의 별박(別縛)11)과 단방편(斷方便)12)이며 단승리(斷勝利)13)를 간략하게 현시하셨다. 이것이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이 가운데에 탐(貪) 또는 기뻐함[欣] 또는 탐기(耽嗜)에 의지하는 모든 심사(尋思)는 애품(愛品)인 줄 알아야만 하며, 에(恚) 또는 근심함[] 그리고 놀라고 두려워 함[驚怖]은 에품(恚品)인 줄 알아야만 한다.
  응당 바라문(婆羅門)으로서 지어야 할 것은
  멋대로 방일함[逸]을 끊어 없애고
  영원히 모든 욕[諸欲]을 버리며
  이것에 유(有)를 희망하지 않는 것이다.
  應作婆羅門  謂斷無縱逸
  求棄捨諸欲  不悕望此有
  
11) 각기 다른 종류로서 나눈 것처럼 곧 불공인(不共因)이라고 한다.
12) 무상성(無常性)을 분명히 안[了知] 뒤에 탐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단방편(斷方便)이라고 한다.
13) 폭류를 건넌 뒤에 끝내 물러섬이 없는 것을 단승리(斷勝利)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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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다시 소작(所作)이 있으면
  진실한 바라문[眞婆羅門]이 아닐 것이니
  마땅히 알라. 바라문이라면
  소작(所作)을 이미 마쳤음을.
  若更有所作  非眞婆羅門
  當知婆羅門  於所作已辦
  
  모든 신분(身分)으로 수고하는 것[劬勞]은
  아직 맨 밑바닥까지 다하지 못하고 건너지 못한 것이니,
  이미 건넜다면 뭍[陸]에 머무르다가
  애쓰지 않고도 피안(彼岸)에 이르니라.
  諸身分劬勞  未極底未度
  已得度住陸  無勤到彼岸
  
  천(天)이여, 너는 이제 알아야 하리니
  이는 진실한 범지[眞梵志]에 비유한다는 것을
  말하자면 모든 번뇌[諸漏]를 영원히 다하면
  정려(靜慮)에 상위(常委)14)를 얻는 것이니라.
  天汝今當知  此喩眞梵志
  謂永盡諸漏  得常委靜慮
  
  그는 일체를 영원히 끊되
  시름[愁]과 근심[憂]과 치성[熾然]함을
  항상 정념(正念)에 머무르며
  또한 항상 심해탈(心解脫)하네.
  彼永斷一切  愁憂及熾燃
  
14) 범어 Nipaka의 의역(意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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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恒住於正念  亦常心解脫
  
  지금 이 게송에서는 세속의 바라문(婆羅門)들에게 의지하는 그 천(天)을 위하여 세존(世尊)께서 설하신 것을 현시한다. 말하자면 어떤 종성(種姓)의 바라문(婆羅門)들은 스스로 '나는 맨 마지막으로 나는 진실(眞實)한 범지(梵志)가 되리라'고 소리치면서, 범세간(梵世間)15)을 계탁하여 최고의 구경(究竟)으로 삼고 범세간(梵世間)을 희구(希求)하여 색계[色]에 안주(安住)하며 항상 부지런히 정진(精進)하되 마음에 게으름이 없이 하며 항상 원리(遠離)를 즐겨서 적정한 한가한 곳에 살며 잠을 줄이면서 고요한 정(定)을 수습(修習)하니, 사욕(事欲)과 번뇌욕(煩惱欲)을 끊기 위해서이다.
  그 종성(種姓)의 바라문(婆羅門)들은 범세간(梵世間)을 계탁하여 구경(究竟)으로 삼기 때문에 범세간을 희망하면서 욕유(欲有)16)는 구하지 않는다.
  또한 여래(如來)께서는 제일의(第一義)의 바라문들에 의하여 그 천(天)에게 대답하신 것을 현시한 것이다. 만약 소작(所作)을 이미 지은 바라문이 자주 다시 지어야 하고 다시 보다 으뜸가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바라문이 아닌 줄 알아야만 한다. 바라문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증득한 바라문이 일체의 살가야(薩迦耶)의 언덕을 뛰어 올라서 육지(陸地)에 안주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바라문인 줄 알아야만 한다. 이것에 의하여 학(學)과 무학(無學)의 모두 바라문임을 현시하는 것이다.
  학(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욕계(欲界)에서 아직 탐욕을 여의지 못한 사람[未離欲]과 이미 탐욕을 여읜 사람[已離欲]을 말한다. 아직 탐욕을 여의지 못한 사람[未離欲]은 아직 근본의 밑바닥[源底]을 얻지 못하고 아직 피안(彼岸)에 이르지 못한지라 두 가지 법에서 오히려 구족(具足)하지 못한 것이다. 첫째는 아직 내심(內心)의 뛰어난 사마타(奢摩他)를 얻지 못한 것이고, 둘째는 증상혜법(增上慧法)의 비발사나(毘鉢舍那)를 얻었다할지라도 아직은 매우 청정하지[善淸淨] 못한 것이다. 내심(內心)의 사마타(奢摩他)가 부족하기 때문에 성도(聖道)의 부낭(浮囊)을 탄 것과 같아서 내심(內心)의 사마타(奢
  
15) 범천(梵天)의 세계를 의미한다.
16) 욕(欲)에 사로잡힌 존재를 의미하기도 하고, 욕(欲)의 존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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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摩他)를 증득하기 위해서 운동하는 발과 같이 용맹스럽게 정진(精進)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증상혜법(增上慧法)의 비발사나(毘鉢舍那)가 매우 깨끗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운동하는 손과 같이 용맹스럽게 정진(精進)하는 것이다. 그가 위와 같이 부지런히 정진할 때 욕계(欲界)의 탐욕[欲]을 여의니, 마치 근본의 밑바닥[源底]을 얻는 것과 같으며, 아라한(阿羅漢)을 증득하는 것은 마치 피안(彼岸)에 이르는 것과 같다. 이미 탐욕을 여읜 사람[已離欲]은 내심(內心)의 뛰어난 사마타(奢摩他)를 증득하고 매우 깨끗한 [善淨] 비발사나(毘鉢舍那)도 얻었으므로 나아가 상분(上分)의 모든 결[諸結]을 끊기 위해서만 부지런히 정진(精進)을 일으키는 것이지 모든 신분(身分)17)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이미 뛰어넘었다면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하여 소작(所作)을 다 마쳤으며 부지런한 공용[勤功用]을 여의었으니, 육지(陸地)에 머무르는 피안(彼岸)에 이미 도달했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는 곧 제일의(第一義)에 의지하는 바라문들은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현시한 것이니, 두 가지는 유학(有學)이며 한 가지는 무학(無學)이다.
  만약 이미 구경(究竟)의 피안(彼岸)에 도달한 바라문일 경우에는 번뇌를 영원히 다하였다[永盡漏]고 하며, 만약 아직 탐욕[欲]을 여의지 못하고 일체의 신분(身分)으로서 부지런히 정진(精進)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상위(常委)를 얻는 것이다. 만약 이미 탐욕을 여의고[已離欲] 근본의 밑바닥[源底]을 얻은 사람은 정려(靜慮)를 얻었다고 한다.
  '정려(靜慮)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영원히 일체의 하분결(下分結)을 끊었기 때문에 이미 탐(貪) 에품(恚品)의 모든 일체의 시름[愁]과 근심[憂]과 치성[熾然]함을 끊은 것이다. '영원히 번뇌를 다하였다[永盡漏]'고 하는 것은 영원히 수도소단[修斷]의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었기 때문에 4념주(念住)를 이미 잘 수습하여서 항상 정념(正念)에 머무르고 심해탈(心解脫)한 것이다. 그는 지은 뒤에 자주 자주 다시 짓지 아니하며 또한 더욱 뛰어나게 해야 할 일도 없다. 그러므로 그를 일컬어 제일의(第一義)의 진실한 바라문
  
17) 몸의 신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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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眞婆羅門]이라고 하는 것이다.
  
  필추(苾芻)시여, 필추(苾芻)시여,
  이미 폭류를 건너셨나이까
  대답하기를 그러하느니라, 천(天)이여
  반연[攀]도 없고 머무름[住]도 없이
  이미 폭류를 건너셨나이까.
  대답하기를, 그러하느니라, 천(天)이여.
  苾芻苾芻 已度暴流耶
  告言 如是天
  無攀無住 已度暴流耶
  告言 如是天
  
  필추(苾芻)시여, 그대는 지금
  어떠한 것과 같기에
  반연[攀]도 없고 머무름[住]도 없이
  이미 폭류를 건너셨나이까?
  苾芻汝今 猶如何等
  無攀無住 已度暴流
   
  그렇게 그렇게[如如] 내가 수고[劬勞]했다면18)
  이렇게 이렇게[如是如是] 열등[劣]한 것이며
  그렇게 그렇게 내가 열등했다면
  이렇게 이렇게 머무를 것이며
  그와 같이 그와 같이 내가 머물렀다면
  이와 같이 이와 같이 표류[漂]하리라.
  如如我劬勞  如是如是劣
  
18) 부처님께서 6년간 헛되이 고행(苦行)하신 것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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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如如我劣已  如是如是住
  如如我住已  如是如是漂
  
  천(天)이여, 나는 그렇게 그렇게 수고함[劬勞]을 버렸기에19)
  이렇게 이렇게 열등함이 없느니라[減劣].
  이와 같이 자세하게 선백품(鮮白品)20)을 설하노니
  이 안의 것은 지염송(祇焰頌)21)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天我如如捨劬勞  如是如是無減劣
  如是廣說鮮白品  此中祇焰頌應知
  
  지금 이 게송에서 '반연[攀]도 없고 머무름[住]도 없다'고 하는 것은 열반(涅槃)과 멸진정[滅定]을 말하니, 앞에서 이미 설한 것과 같다.
  세존께서는 옛날에 시현(示現)으로 보살행(菩薩行)을 수습(修習)하실 때, 최고로 심한[最極] 난행(難行)과 고행(苦行)과 비방편(非方便)에 포함되는 용맹정진(勇猛精進)에 의지하고, 또한 시현(示現)으로 보리좌(菩提座)에 앉아서 비방편(非方便)에 포함되는 용맹정진(勇猛精進)의 단변지(斷遍知)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천(天)이여,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내가 옛날에 헛되이 그렇게 그렇게[如如] 수고[劬勞]를 하였다면 이렇게 이렇게[如是如是] 나는 곧 열등[減劣]하였을 것이며, 그렇게 그렇게 열등하였다면 이렇게 이렇게 곧 머물렀을 것이며, 그렇게 그렇게 머물렀다면 이와 같이 이와 같이 표류(漂流)했을 것이다. 이것과 서로 다르다면 백품(白品)인 줄 알아야 한다'고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19)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일체의 방편이 아닌 무익(無益)한 정진(精進)을 버리신 것을 말한다.
20) 청정(淸淨)한 선품(善品)의 수행(修行)을 말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만족하지 않은 닦음[不知足修]에 의하기 때문에 허둥대지 않고 머무르는 것이고 둘째는 그 밖의 외도(外道)의 스승들을 찾지 않고서 자연스럽게 성불(成佛)하기 때문에 표류(漂流)하지 않는 것이다.
21) 지염(祇焰)이란 위에서 설해진 게송은 응송(應頌)의 가타(伽陀)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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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가운데 고행(苦行)할 때에 비방편(非方便)22)에 포함되는 용맹정진(勇猛精進)을 '수고[劬勞]'라고 하며, 삿된 방편을 행하여 선법(善法)을 퇴실(退失)하는 것을 '열등함[減劣]'이라고 하며, 이미 모든 선법(善法)을 퇴실하였음을 알고 나서 삿된 방편을 그치게 함을 '머무름[止住]'이라고 하며, 모든 고행(苦行)을 버리고 다시 다른 스승을 구하여 드디어 올달락가(嗢達洛迦)23) 아라다(阿邏茶)24) 등의 삿되게 집착된 곳에 수순(隨順)하고 관찰(觀察)하기 때문에 '표류[漂]'라고 이름한다고 하는 것을 현시한다.
  다시 후시(後時)에 보리좌(菩提座)에 앉아서 모든 비방편(非方便)에 포함되는 용맹정진(勇猛精進)을 버리고 모든 선법(善法)을 마침내 증장(增長)하게 되고, 그렇게 그렇게[如如] 선법(善法)을 증장(增長)하고 나서, 이렇게 이렇게[如是如是] 여러 선법(善法)에 대해서 만족[知足]을 일으키지 않고, 머무름[止住]에 서두르지 않고,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所修斷]에 대해서 전전(展轉)하여, 승상미묘(勝上微妙)를 심구(尋求)한다. 이미 이와 같은 것에 지족(知足)하지 않기 때문에 드디어 다시 다른 외도(外道)의 스승을 구하지 않고 스승 없이 자연스럽게 37의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닦고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는 것을 대각자(大覺者)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 수고[劬勞]를 버린다25)는 등의 네 가지의 의미[義]26)는 4구(句)의 경문(經文)과 그 차례대로 짝지어 해석하여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다시 의지함 없고 머무름 없는 열반(涅槃)에 의지하여 차별(差別)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인가?
  
22) 부처님께서 니건타(尼健陀)의 처소에서 날마다 마맥(麻麥)을 드시고 삿된 고행(苦行)을 하신 것을 말한다.
23) 부처님이 깨닫기 전의 스승이었던 Udraka R maputra의 음사어로서 울두람불(鬱頭藍佛)로도 음사된다.
24) 부처님이 깨닫기 전의 스승이었던 r ak l ma의 음사어로서 아람가람(阿藍加藍)으로도 음사된다.
25) 제 5송(頌)을 가리킨다.
26) 앞의 문장 '다시 후시(後時)에' 이하는 첫 번째 수고[劬勞]를 버린다는 의미이며, '모든 선법(善法) … '이란 두 번째 열등함[減劣]을 버린다는 의미이며, '그렇게 그렇게[如如] 선법(善法)을 … '이란 세 번째 머무름[止住]를 버린다는 의미이며, '만족[知足]하지 않기 때문에 … '란 네 번째 표류[漂]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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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자면 모든 번뇌(煩惱) 전(纏) 수면(隨眠)의 폭류를 건널 수 없다는 것은 간략히 네 가지의 원인에 의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맨 처음 탐기(耽嗜)에 의한 심(尋)이 있는 것이며, 탐기(耽嗜)에 의한 심(尋)을 의지(依止)로 삼기 때문에 곧바로 해태(懈怠)가 있는 것이며, 또한 해태(懈怠)를 의지(依止)로 삼기 때문에 이생분(異生分)에 머무름이 있는 것이며, 이생분(異生分)에 머무름을 의지(依止)로 삼기 때문에 생사류(生死流)에 따르는 탐애(貪愛)의 세력이 5취(取)의 생사(生死)의 강물 속에서 흐름을 따라 표류[漂溺]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서로 같지 않는 네 가지의 원인 때문에 능히 폭류를 건널 수 있으니, 상응하는 바대로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다시 상수멸정(想受滅定)에 의지하여 차별(差別)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상수멸정(想受滅定)을 증득하고 나서 다시 방일(放逸)하여 자주 상(想)과 수(受)에 머물러서 모든 상수멸(想受滅)에 자주 머물지 않기 때문에 이 인연에 의해서 멸진정[滅定]을 잃는 것[退失]과 같다. 잃기 때문에 도로 다시 하지(下地)의 생인(生因)에 머물게 되며[止住] 그 원인에 머물기 때문에 마음은 바로 반드시 그 소득과(所得果)에 나아가게 되는 것과 같다. 이것과 서로 같지 않은 것을 백품(白品)의 4구(句)의 차별(差別)인 줄 알아야만 한다.
  
  홀로 아련야(阿練若)에 이르러서는
  정려(靜慮)로서 값진 재보[珍財]를 버리니
  달리 구할 방도[方求]가 있는 것입니까
  봉읍(封邑)을 엿본다고 하는 것입니까
  獨臻阿練若  靜慮棄珍財
  爲別有方求  爲窮窬封邑
  어떻게 사람과 교류하지 않고
  도반[徒侶]을 끊어 없앱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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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치[義]를 얻어서 마음이 적정(寂靜)하여
  묘색(妙色)의 마군(魔軍)을 꺽으며
  何不與人交  而絶無徒侶
  得義心寂靜  摧妙色魔軍
  
  나는 혼자만의 곳[獨處]에서 사유(思惟)하여
  최승(最勝)의 안락(安樂)을 받나니
  그러므로 사람과 교류하지 않고서
  도반[徒侶]을 끊어 없애는 것이다.
  我獨處思惟  受最勝安樂
  故不與人交  而絶無徒侶
  
  이것은 천녀(天女)의 질문에 따른 가타(伽他)27)이다. '이치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사문과(沙門果)의 이치[義]를 얻었다는 것이며 둘째는 성스러운 신통(神通)의 이치[義]를 증득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이치를 증득함으로써 모든 생사(生死)의 큰 고통[大苦]을 뛰어넘으며 두 번째의 이치를 증득함으로써 8해탈(解脫) 적정사유(寂靜思惟)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증득한다. 또한 첫 번째 이치를 얻음에서는 사랑할만한[可愛] 묘색(妙色)의 마군(魔軍)을 항복하고 두 번째의 이치를 얻음에서는 혼자만의 곳[獨處]에서 사유(思惟)하여 뛰어난 안락(安樂)을 받는다.
  여기서의 의미는 성스런 신통(神通)의 이치[義]를 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성스런 신통의 이치를 성취[成辦]하고자 하기 위해서, 해탈을 청정원만(淸淨圓滿)하게 하기 위해서, 10변처(遍處)에 의해서 방편(方便)을 수행하며 이 인연에 의해서 변처정(遍處定)을 청정(淸淨)하고 원만(圓滿)하게 하고, 또한 해탈을 굴려서 청정(淸淨)하고 원만(圓滿)하게 하고, 매우 희게[鮮白]끔 하는 것과 같다. 또한 능히 성스런 신통의 이치를 성취[成辦]하고 그는 이미 이러한 성취[成辦]를 완전히 알고 나서 곧바로 스스로
  
27) 범어 G th 의 음사어로서 게송(偈頌)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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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달하여 '나는 이치를 이미 성취[辦]하였고 사문과의 이치 또한 성취하게 되었으니, 진실한 사문[眞沙門]이다'고 하는 것과 같다. 재물을 구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염리[厭毁]를 닦으며 모든 성읍(城邑)의 교유(交遊)하는 등의 처소에 대해서 그 처음[初]28)을 분명히 알고, 과환(過患)29)을 분명히 알고, 출리(出離)30)를 분명히 알며, 또한 출리(出離)에 나아가는 행(行)31)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것을 일으키는 인연을 처음[初]이라고 하며, 무상(無常) 뭇 괴로움[衆苦] 변괴법(變壞法)의 성품을 과환(過患)이라고 하며, 탐욕(貪欲)을 조복(調伏)하고 끊어 없애며[斷除] 뛰어넘는 것[超越]을 출리(出離)라고 하며, 성스런 8도지(道支)의 출리(出離)에 나아가는 것을 행(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에 대해서 그 처음[初]을 보지 못하고 내지 출리(出離)에 나아가는 행(行)을 보지 못한다면 이 인연(因緣)에 의해서 값진 재보[珍財]를 갖춘 유정(有情) 등의 곳[處]에 대해서 염리[厭毁]할 수 없으며, 성읍(城邑)에 들락날락[交遊] 돌면서[周施] 끊지 않았으면서도 '그곳에 마음에 적정(寂靜)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살던 집을 떠나서 8해탈(解脫)을 증득한 정려(靜慮)의 정(定)을 닦은 사람의 내심(內心)의 적정(寂靜)에 대해서 오히려 비방(誹謗)을 일으킨다. 이런 것에 의해서 그는 내심(內心)의 적정에 대해서 곧 잘 보지[善見]32) 못하고 잘 알지[善知]33) 못하고 잘 비추어보지[善鑒]34) 못하며 잘 통달할 수[善達]35) 없게 된다.
  만약 제일의(第一義)로 마음속이 적정(寂靜)하다면 위의 것과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곧 잘 볼 수 있고 내지 잘 통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말하자면 박가
  
28) 집인(集因)을 말한다.
29) 고과(苦果)를 말한다.
30) 멸제(滅諦)를 말한다.
31) 도제(道諦)를 말한다.
32) 집제(集諦)의 지(智)에서 보는 것이다.
33) 고제(苦諦)의 지(智)에서 아는 것이다.
34) 멸제(滅諦)의 지(智)에서 비추어 보는 것이다.
35) 도제(道諦)의 지(智)에서 통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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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薄伽梵)께서는 이에 대해서 모든 탐욕[欲]을 받는 것과 즐겨 잡염(雜染)에 머무르는 것은 제일의(第一義) 내심(內心)의 적정(寂靜)이 아니며, 만약 8해탈(解脫)의 정(定)을 증득하여 모든 애미(愛味)를 여의었다면 제일의(第一義) 내심(內心)의 적정(寂靜)이라고 하는 것을 현시한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제 행(行)은 무상(無常)이며
  생멸(生滅)이 있는 법(法)이며
  생멸(生滅)에 의하기 때문에
  그것의 적정[寂]을 낙(樂)이라고 하네.
  諸行無常  有生滅法
  由生滅故  彼寂爲樂
  
  이제 이 게송에서는 온(蘊)과 취온(取蘊)을 모두 제 행(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의미는 취온(取蘊)이다. 이 5취온(取蘊)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으니, 과거와 미래와 현재이다. '제 행(行)은 무상(無常)이다'란 그 제 행(行)은 본래 없는데서 생겼다가 생기고 난 뒤에 곧 멸(滅)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과거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면 과거의 소득(所得)이므로 여러 자체(自體) 중에 모든 제 온(蘊)은 모두 다 과거이기 때문에, 이미 멸한 것[謝滅]이기 때문에 생긴 다음에 사라졌기 때문에 체(體)는 무상(無常)이다. 만약 미래에 생길 것이라고 한다면 미래의 소득(所得)이므로 여러 자체(自體)의 모든 제 온(蘊)은 모두 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이미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멸하여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겨나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는 '생이 있는 법[有生法]'이다. 만약 현재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면 현재의 소득(所得)이므로 여러 자체(自體) 중에 모든 것은 잠깐동안 머무르고 지탱하면서 살아있는 것을 말한다.
  유정(有情)의 제 온(蘊)은 모두 다 사법(死法)이기 때문에 가히 죽어서 멸하게 되는[殞滅] 멸(滅)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는 '멸이 있는 법[有滅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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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미래에 있어서 소득(所得)의 자체(自體)가 될 제 온(蘊)일 경우에는 생이 있는 법[有生法]으로서 그 속에서 전혀 소득(所得)의 자체(自體)가 없으니, 이는 항상[常]하고 이는 한결[恒]같은 것이며, 내지 즉 이와 같이 하여 바로 머무르게[正住] 될 것이다. 다만 생기자마자 곧바로 멸(滅)하는 것은 제외된다.
  만약 모든 유정(有情)이 현법(現法)에서 미래의 제 온(蘊)의 원인을 영원히 다한다면 모든 미래의 자체(自體]의 모든 온(蘊)은 모두 다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적정[寂]'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이 적정[寂]은 두 가지 인연 때문에 '낙(樂)'이라고 설하는 것이니, 첫째는 일체의 고인(苦因)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리고 일체의 추중(麤重)이 영원히 그치기 때문에, 그리고 현법(現法)에 안락하게 머물기[安樂住] 때문에 '낙(樂)'이라고 설하는 것이며, 둘째는 미래의 생(生) 로(老) 병(病) 등의 모든 뭇 고[一切衆苦]를 영원히 해탈하기 때문에 '낙(樂)'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정견(正見)의 의처(依處)와 정견(正見)의 과(果)를 간략하게 설명하셨다. 또한 다시 차별(差別)이 있다. 말하자면 변지(遍知)의 의처(依處)와 그것의 단멸(斷滅)을 간략하게 현시하였으며, 또한 소변지법(所遍知法)과 변지(遍知)를 간략하게 현시하였으며, 또한 3세(世)의 제 행(行)의 모든 잡염(雜染)과 그것이 적정함으로 인한 모든 청정(淸淨)을 간략하게 현시하였으며, 또한 모든 연기법(緣起法)과 연기(緣起)의 소멸[滅]을 간략하게 현시하였으며, 또한 고제(苦諦)와 멸제(滅諦)를 간략하게 현시하였으며, 또한 공(空)과 무원(無願)의 두 해탈문(解脫門)이 의지하게 되는 처소를 간략하게 현시하였고, 무상(無相)의 하나의 해탈문(解脫門)이 의지하는 처소를 현시하였다. 또한 성제현관(聖諦現觀)과 상위(相違)한 2법(法)을 끊는 의지하는 바의 처소를 간략하게 현시하였다. 2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희론(戲論)을 따르는 것이며 둘째는 무희론(無恚論)을 두려워하는 것[怖]이다. 또한 외도(外道)와 함께하지 않는 두 가지의 대치법(對治法)을 간략하게 현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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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두 가지라고 하는 것인가?
  첫째는 소지(所知)의 전도 없는 성품[無顚倒性]이며 둘째는 소증(所證)의 전도 없는 성품이다.
  
  불방일[無逸]이 사적(死跡)이 아니므로36)
  방일(放逸)은 사적(死跡)이 되며37)
  불방일이 불사(不死)이므로38)
  제멋대로 방일함은 상사(常死)이네.39)
  無逸不死跡  放逸爲死跡
  無逸者不死  縱逸者常死
  
  지금 이 게송에서는 무엇을 '불방일(無放逸)이 사적(死跡)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네 가지 소의(所依)에 의하여 네 가지 수호[四種護]를 세우는 것과 같으니, 목숨의 수호[命護]와 몸의 수호[身護]와 마음을 잡염으로부터의 수호[心雜染護]와 바른 방편의 수호[正方便護]를 말한다. 이를 불방일(不放逸)이라고 이름한다. 이 불방일(不放逸)을 의지(依持)로 삼아서 열반(涅槃)의 자량(資糧)이 아직 원만(圓滿)하지 않는 사람을 속히 원만하게 하고 이미 원만한 사람은 현법(現法)에서 반열반(般涅槃)을 얻게끔 한다.
  무엇을 '방일(放逸)은 사적(死跡)이 된다'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재가[居家]의 백의(白衣)인 어떤 사람이 모든 욕의 경계[欲境]에 탐착(耽著)하고 수용(受用)하여 불선업(不善業)을 지으며, 혹은 어떤 출가한 사람이 네 가지의 수호가 없음[四無護]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목숨의 수호가
  
36) 이 게송의 제 1구(句)에서는 도제(道諦)가 멸제(滅諦)의 인(因)이 되는 것을 밝힌다.
37) 제 2구(句)는 집제(集諦)는 고제(苦諦)의 인적(因跡)으로 되는 것을 밝힌다.
38) 제 3구(句)는 도제(道諦)로 말미암아 멸제(滅諦)를 증득하는 것을 밝힌다.
39) 제 4구(句)는 집제(集諦)로 말미암아 고제(苦諦)를 받는 것[受]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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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고 내지 정방편의 수호가 없는 것까지를 말한다.
  위와 같은 방일(放逸)은 두 가지 품[二品]에 통하니, 재가품(在家品)과 출가품(出家品)을 말한다. 곧 이 방일을 의지(依持)로 삼아서 본행(本行)을 즐겨 일으키고 본업(本業)을 지어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태어나고, 나서 목숨이 끝나며, 태어나고 나서는 요절[夭沒]하는 것이다.
  무엇을 '불방일[無縱逸]은 불사(不死)이므로 제멋대로 방일함은 상사(常死)이다'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죽음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조선사(調善死)이며, 둘째는 불조선사(不調善死)이며, 셋째는 과거사(過去死)이며, 넷째는 현재사(現在死)이며, 다섯째는 미래사(未來死)이다.
  만약 이 무방일[無縱逸]을 잘 수습하는 보특가라(補特伽羅)40)일 경우이면 현재세(現在世)에서 조선사(調善死)에 의하여 바로 죽을 때[正死時]는 과거사(過去死)에 의해서 죽었고 과거세(過去世)에도 불조선사(不調善死)에 의할지라도 현재세(現在世)에는 불조선사(不調善死)에 의하지 않고 죽으며, 미래세(未來世)에도 조선사(調善死)에 의하지도 않고 불조선사(不調善死)에 의하지 않으면서 죽는다. 그러므로 불사(不死)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제멋대로 방일하는 보특가라(補特伽羅)일 경우에는 현재세(現在世)에서 불조선사(不調善死)에 의해서 바로 죽을 때[正死時]는 과거세(過去世)에서도 또한 불조선사(不調善死)에 의해서 이미 죽었으며, 현재세(現在世)에서는 곧 불조선사(不調善死)에 의해서 죽으며, 미래세(未來世)에서도 또한 불조선사(不調善死)에 의해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상사(常死)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불방일인 것[無縱逸者]은 도제(道諦) 멸제(滅諦)이며, 방일하는 것[有放逸者]은 집제(集諦) 고제(苦諦)임을 현시한 것이다. 또한 간략하게 처비처성(處非處性)과 자업작성(自業作性)을 현시하니 전반(前半)은 처비처성(處非處性)을 현시하고 후반(後半)은 자업작성(自
  
40) 아라한(阿羅漢)의 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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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業作性)을 현시한다. 또한 전반(前半)은 스승이 제자에게 응당히 지어야 할 것[所應作]을 짓는 것을 현시하고 후반(後半)은 여러 제자들이 스스로 지어야 할 이치[自所作義]를 현시한다.
  
  중생은 심사(尋思)에 잘려지고 흔들리고[鑽搖]
  맹리(猛利)한 탐욕(貪欲)을 따라 정묘[妙]라고 관(觀)하므로
  갑절로 염애(染愛)를 증장하고 유전(流轉)하니
  곧바로 스스로 견고(堅固)한 계박[縛]을 만드네.
  衆生尋思所鑽搖  猛利貪欲隨觀妙
  倍增染愛而流轉  便能自爲堅固縛
  
  지금 이 게송에서 무엇을 '심사(尋思)에 잘려지고 흔들린다[鑽搖]'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먼저 얻었던 그리고 먼저 수용(受用)했던 모든 욕의 경계[欲境界]에서 바르지 않게 작의(作意)하고 불선(不善)의 탐기(耽嗜)에 의지한 모든 악한 심사(尋思)를 일으키는 것과 같다.
  무엇을 '맹리(猛利)한 탐욕(貪欲)'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옛날 다른 세상[餘生]에서 탐욕을 수습하고 또한 많이 수습했기 때문에 이 인연으로 인하여 이 생[此生]동안에 먼저 얻었던 그리고 먼저 수용(受用)했던 모든 욕의 경계에서 비록 바르게 작의(作意)하더라도 탐욕으로 인하여 그 마음을 흩어 없애는 것과 같다.
  무엇을 '따라 정묘(淨妙)라고 관(觀)한다'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몸을 잘 지키지 않고 제 근(根)을 섭수하지 않고 정념(正念)에 머무르지 않고서 취락(聚落)에 유행(遊行)하고 한창 젊은 나이에 사랑할만한 미색(美色)과 여러 모읍(母邑)을 보게 되면 곧 여리하지 않게[不如理] 정묘상(淨妙相)을 취하고 이 인연에 의해서 몸과 마음이 불타는 것[嬈惱]과 같다.
  무엇을 '갑절로 염애(染愛)를 증장한다'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다섯 가지 상모(相貌)에 의해서 탐애(貪愛)가 증장하는 것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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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비록 하열(下劣)한 모든 탐욕의 경계에 대해서 오히려 맹리(猛利)한 모든 탐욕의 전(纏)을 일으키고 탐착(耽著)하면서 버리지 않는데 어찌 하물며 상묘(上妙)한 것이랴.
  또한 비법(非法)으로 대부분 흉폭하게 값진 재보[珍財]를 적집(積集)하고 정법(正法)을 쓰지 않고 또한 항상 더욱 더 뭇 도구[具]를 섭수하는 것과 같다.
  또한 가볍고 천하며[輕賤] 쓸데없는 물건에 대해서도 오히려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데, 어찌 하물며 귀중(貴重)한 것이랴. 비록 적고 하찮은 재물을 추구하기 위해서도 오히려 여러 가지 신(身) 어(語) 의(意)의 악(惡)을 행하는데, 어찌 하물며 많고 훌륭한 것[多勝]이랴.
  또한 소소(少小)한 묘행(妙行)을 수지(受持)하는 데도 그 마음이 오히려 애락(愛樂)에 취향(趣向)하지 않는데 어찌 하물며 넓고 큰 것[廣大]이랴. 또한 열반(涅槃)에 대해서도 오히려 즐겨 들으려 하지 않는데, 어찌 하물며 얻으려 하겠는가.
  무엇을 '견고(堅固)한 계박[縛]'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세 가지 상(相)에 의해서 견고한 계박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굳고 단단하기[堅牢] 때문이며, 둘째는 괴로움에 접촉되기 때문이며, 셋째는 오랜 시간 동안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현법(現法)에서 악행(惡行)의 뿌리인 탐(貪) 진(瞋) 치(癡)에 의하기 때문에 계박[縛]이 굳고 단단하다는 것을 알며, 미래세[當來世]에서 나락가(那落迦) 방생(傍生) 아귀[鬼]의 취(趣)에 나기 때문에 괴로움에 접촉되는 것을 알며,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에 따라 다니는 것을 안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두 가지의 실괴(失壞)의 인(因)에 의하여 두 가지의 실괴(失壞)가 있다는 것을 간략하게 현시한 것이다.
  무엇을 두 가지의 실괴(失壞)의 인(因)이라고 하는 것인가?
  바르지 않은 사유력(思惟力)과 인력(因力)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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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두 가지의 실괴(失壞)라고 하는 것인가?
  방구(方求)의 실괴(失壞)와 수용(受用)의 실괴(失壞)를 말한다.
  무엇을 바르지 않은 사유력(思惟力)이라고 하는 것인가?
  먼저 수용(受用)했던 경계를 따라 생각하는[隨念] 인연에서 생기게 되는 바르지 않은 사유(思惟)를 말하며 혹은 삿되게 현전(現前)의 경계를 분별(分別)하는 인연에서 생기게 되는 바르지 않은 사유(思惟)를 말하며, 혹은 삿되게 상(相)을 취하면서 생기게 되는 바르지 않은 사유(思惟)를 말하고, 혹은 그것에 머무르거나 가면서 생기게 되는 바르지 않은 사유(思惟)를 말한다.
  무엇을 인력(因力)이라고 하는 것인가?
  사랑할만한 경계[可愛境界]에 대해서 옛날부터 익힌 욕탐[欲貪]을 말한다.
  무엇을 방구(方求)의 실괴(失壞)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두 가지의 실괴(失壞)의 원인을 성취함으로 인하여 정법(正法)이 아닌 것과 혹은 흉폭한 것으로써 모든 삿된 재물을 추구하고 적집(積集)하는 것과 같다.
  무엇을 수용(受用)의 실괴(失壞)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먼저 얻었던 즐거움[樂]이 따르고 괴로움[苦]이 따르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것[非苦樂]이 따르는 모든 경계에 대해서 혹은 어느 하나에 염착(染著)을 일으키고 …… 내지 출리(出離)할 줄 모르면서 이를 수용(受用)하는 것이다. 혹은 어느 한 가지에 증에(憎恚)를 일으키어 증에(憎恚)에 가리워 지기도 하는 것이다. 혹은 어느 한 가지에 우치(愚癡)를 일으키어 우치(愚癡)에 가리워 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탐염(貪染)에 가리워 지고 내지 우치(愚癡)에 가리워 지기 때문에 신(身) 어(語) 의(意)의 갖가지 악행(惡行)을 행하여 탐(貪) 진(瞋) 치(癡)의 세 가지 견고(堅固)한 계박[縛] 때문에 얽히고 묶일[纏縛]뿐 아니라 나락가(那落迦) 방생(傍生) 아귀[鬼] 등의 모든 계박[縛] 때문에 묶이게[所縛] 된다.
  또한 차별(差別)이 있다. 애결(愛結)에도 묶이게 되는 것[繫]을 말한다.
  보특가라(補特伽羅)에는 간략하게 일곱 가지의 잡염(雜染)이 있으니,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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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가 탐애(貪愛)의 소작(所作)인 줄 알아야만 한다. 수념(隨念)의 잡염(雜染)과 부자재(不自在)의 잡염(雜染)과 경계(境界)의 잡염(雜染)과 열뇌(熱惱)의 잡염(雜染)과 선취(善趣)와 상응(相應)하는 잡염(雜染)과 악취(惡趣)와 상응(相應)하는 잡염(雜染)과 제 견(見)의 잡염(雜染)을 말한다.
  무엇을 수념(隨念)의 잡염(雜染)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먼저 수용(受用)했던 사랑할만한 경계[可愛境界]를 수념(隨念)하고 희망하고 추구하면서 마음을 흩어 없어지게끔 하는 것과 같다.
  무엇을 부자재(不自在)의 잡염(雜染)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숙세(宿世)에서 탐욕법(貪欲法)을 자주 익혔기 때문에 금세(今世)에 탐욕(貪欲)이 맹리(猛利)한 성품이 되어서 비록 다시 여리(如理)하게 사랑할만한 경계[可愛境界]에 대해서 수념(隨念)하고 작의(作意)하더라도, 희망하고 추구하는 탐욕이 있어서 그 마음을 흩어 없어지게끔 하므로 그는 탐욕의 매우 맹리함[猛利] 때문에 마음이 자재(自在)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무엇을 경계(境界)의 잡염(雜染)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성읍(城邑) 등을 노닐다가 현전(現前)에 용모가 단정하고 사랑할만한 경계[可愛境界]를 만나면 그 경계가 매우 단엄(端嚴)하기 때문에 미묘(美妙)한 모습[相]에 따라 심(心) 식(識)이 얽혀지게 되니, 이것으로 인하여 희망하고 추구하는 갖가지 탐애(貪愛)를 일으키는 것과 같다.
  무엇을 열뇌(熱惱)의 잡염(雜染)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것의 능히 탐애(貪愛)의 여러 가지 잡염(雜染)을 증장시키기 때문에 이미 탐애(貪愛)가 전전(展轉)하며 왕성하게 되어 과거에 이미 수용(受用)한 경계를 돌이켜 생각하고[追戀] 미래에 수용하게 될 경계를 희구(希求)하며 현재에 바로 수용할 경계를 탐착(耽著)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두루 괴롭게 하는 것[熱惱]과 같다.
  무엇을 선취(善趣)와 상응(相應)하는 잡염(雜染)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곧 그 탐애(貪愛)의 집제(集諦)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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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身) 어(語) 의(意)의 갖가지 묘행(妙行)을 행하여 선취(善趣) 혹은 천(天) 인(人)에 태어나게 되었지만 그는 낙수(樂受)를 탐착(耽著)하여 버리지 않고 술에 취해 혼미[悶]해 있으면서 오로지 방일(放逸)만을 행하는 것이다.
  무엇을 악취(惡趣)와 상응(相應)하는 잡염(雜染)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곧 그 탐애(貪愛)의 집제(集諦)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신(身) 어(語) 의(意)의 갖가지 악행(惡行)을 행하다가 몸이 무너져 목숨을 마치면 여러 악취(惡趣)에 떨어져 나락가(那落迦) 등에 태어나게 되며, 거기에 태어나고 난 뒤에는 바로 갖가지 매우 심한 근심고통[憂苦]과 악심(惡心)과 분심(憤心)으로 인하여 괴로움[憂惱]을 받는 것이다.
  무엇을 제 견(見)의 잡염(雜染)이라고 하는 것인가?
  곧 그 탐애(貪愛)의 집제(集諦)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악한 벗이 설하는 전도법(顚倒法)을 만나서 잡염(雜染)으로부터 해탈을 얻으려고 하기 위해서 그는 비록 잡염(雜染)으로부터의 해탈을 희구(希求)하지만 위와 같은 전도(顚倒)의 설법(說法) 때문에 해탈을 증득하지 못하고 62의 제 견취(見趣) 중의 어느 한 가지 견(見)을 따라서 증장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연기법(緣起法)에 대해서 어리석음[愚癡]을 증장하기 때문에 그는 이와 같은 견결(見結)에 계박[縛]되어 5취(趣) 등의 생사(生死)의 대해(大海)에서 해탈할 수 없는 것이다.
  
  법에 머물러 시라(尸羅)를 갖추고
  부끄러움[慚]을 지니며 말이 진실[諦實]하며
  자신의 몸을 잘 보호하고 사랑하고
  또한 남에게도 사랑 받을 지어라.
  住法具尸羅  有慚言諦實
  能保愛自身  亦令他所愛
  
  지금 이 게송에서 무엇을 '법에 머무른다'고 하는 것인가?
  여래(如來)께서 증득한 선설(善說)의 정법(正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깨끗한 믿음[淨信]을 내어 출가하고 범행(梵行)을 즐겨 닦는 것을 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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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무엇을 '시라(尸羅)를 갖춘다'고 하는 것인가?
  위와 같이 출가하고 위와 같이 애락(愛樂)하기 때문에 계율에 대하여 어기는 일[缺]이 없고 내지 잡염(雜染)이 없어서 상속하며 짓고 상속하며 굴리면서 제 학처(學處)에 대해서 능히 받고[能受] 능히 배우는 것[能學]을 말한다.
  무엇을 '부끄러움[慚]을 지닌다'고 하는 것인가?
  부끄러워할 만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능히 악(惡) 불선법(不善法)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즉 악계(惡戒)41)와 혈계(穴戒)42)를 따르는 인연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말한다. 곧 부정상(不正相)과 부정심사(不正尋思)이며, 제 번뇌(煩惱) 및 수번뇌(隨煩惱)이다.
  무엇을 '말이 진실[諦實]하다'고 하는 것인가?
  모든 악(惡)을 드러내고 모든 악(惡)을 감추지 아니하며 만약 범한 것이 있으면 곧 지혜로운 사람과 범행(梵行)을 같이하는 사람 곁에서 사실대로 스스로 들춰내고 법다이[如法] 대치(對治)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이 게송에서 간략하게 4인(因)에 포함되는 시라(尸羅)의 청정(淸淨)을 현시하였으니, 말하자면 능히 바르게 받았기[正受] 때문이며, 받은 뒤에는 뚫지 않기 때문이며, 뚫는 원인[穴因]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비록 무지(無知)와 방일(放逸) 때문에 새었다 할지라도 곧 법다이 대치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의 악업(惡業)을 볼 경우에는
  능히 자세하게 진리[審諦]를 사유하며
  자신의 몸[自身]으로 끝내 행하지 않으니
  그 업(業)에 의해서 능히 계박[縛]되기 때문이네.
  若見他惡業  能審諦思惟
  
41) 악(惡)한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을 일으켜서 선계(善戒)를 더럽히고 나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계체(戒體)에 악(惡)이 있는 것은 아니다.
42) 모든 선계(善戒)를 범하는 근본을 혈계(穴戒)의 인연(因緣)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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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自身終不爲  由彼業能縛
  
  지금 이 게송에서 무엇을 '다른 악업(惡業)을 볼 경우에 자세하게 진리[審諦]를 사유한다'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하나의 선남자(善男子) 또는 선여인(善女人)이 성품 됨이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여리(如理)하게 진리를 관하는 법인[諦觀法忍]을 성취하여 다른 사람이 현재 행하는 악행(惡行)의 원인 때문에 바로 갖가지 봉변을 당하고 매를 맞으며 또 왕의 사람에게 잡혀서 왕에게 잡혀가며 …… 자세한 설명은 경(經)에서와 같이 내지 목숨이 끊어지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을 보고, 보고 나서 곧바로 '이 사람을 보고 또 보건대 현법(現法)에서 이와 같은 악(惡) 불선업(不善業)을 지었기 때문에 곧 현법(現法)에서 도로 이와 같은 괴롭고 쓰라린 과보(果報)를 받는구나. …… 이와 같은 악(惡) 불선법(不善法)을 막고 막아서 끝내 하지 말아야겠으며, 끝내 짓지 말아야겠으며, 끝내 행하지 말아야겠으며, 끝내 범하지 말아야겠다'라고 이와 같은 사유를 하는 것이다.
  곧 그는 또한 양과 닭과 돼지를 잡는 것을 보고 자세히 설명하면 모든 불율의(不律儀)의 것들을 보고는 이와 같은 작업(作業)과 기능(伎能)과 활명(活命)과 방술(方術)로 인하여 코끼리와 말과 수레와 연여(輦輿)43) 등을 타지 않으며, 또한 이로 인하여 광대(廣大)한 재보(財寶)와 창고[庫藏]가 흩어지지[散失] 않도록 힘쓰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세간에서 가훼(訶毁)받고 무릇 천하고 속된 곳에 있는 사람도 오히려 몸으로써 잠깐이라도 서로 접촉하거나 받지 않고 이를 멀리 피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현철(賢哲)한 사람이랴. 본 뒤에는 곧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나니, 나머지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곧 그는 또한 큰 부자[巨富]로서 넉넉한 큰 재보(財寶)를 가졌음에도 게으름으로 제멋대로 방일하면서 밤낮을 지내다가 세월이 오래 되어서 모든 값진 재보[珍財]와 동복(僮僕)과 여러 선법(善法)을 점차로 쇠퇴시키는 타인(他人)을 보고, 보고 나서는 곧 이와 같은 사유를 하니, 나머지 것은 앞에서
  
43) 수레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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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한 것과 같다.
  곧 그는 또한 갖가지 유정(有情)의 신상(身相)의 차별(差別), 즉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멀거나[生盲], 태어나면서부터 귀가 멀거나[生聾], 태어나면서부터 벙어리이거나[生瘂], 혹은 애꾸눈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혹은 옴에 걸려있거나 나병이거나, 혹은 수명이 짧거나 나쁜 형색(形色)을 갖추었거나 질병이 많거나, 혹은 빈천한 집이거나 지족[支屬]이 적거나, 혹은 폐악(弊惡)한 혜(慧)이거나, 혹은 선택가(扇宅迦)44)이거나 반택가(半宅迦)45)이거나, 혹은 추한 모습을 지닌 종류이면서도 그 밖의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보고 나서는 '이러한 사람을 보고 또 보건대 이전에 갖가지 악(惡) 불선업(不善業)을 지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와 같은 괴롭고 악한 과보를 받는구나 …… 이와 같은 악(惡) 불선업(不善業)을 막으리라'고 이와 같은 사유를 하니,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곧 그는 또한 지혜롭고[黠慧] 나태함이 없으며 능력을 갖춘, 소위 농사와 상업을 능히 잘 하고 배 부리는 일을 잘 하며 그리고 능히 바르게 언론(言論)의 사업을 잘 하고 그는 이러한 능력을 갖추었는데도 하는 사업이 자주 점차 망하다가[衰損] 마침내는 성공하는 일이 없는 타인을 보고, 보고 나서는 바로 이와 같은 사유를 하니,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곧 그는 또한 두 사람이 출가하여 집 아닌 데[非家]로 나아가 함께 범행을 닦을 때에 한 사람은 의복과 음식 등의 이로움[利]에 대해서 부족함이 있고, 또 한 사람은 그렇지 아니한 것을 보고, 보고 나서는 바로 이와 같은 사유를 하니,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곧 그는 또한 국왕이나 왕과 같은 사람이 큰 땅[大地]과 봉한 땅[封疆]을 모두 다 극복(克伏)하여 굳게 집착하고 버리지 않으면서 단지 일신(一身)과 일구(一具)와 해골만을 위하고 단지 현재의 조그마한 안락(安樂)만을 위하여 신(身) 어(語) 의(意)의 문(門)으로 무량(無量)하고 광대(廣大)한 악행
  
44) 범어 a haka의 음사어로서 선천적으로 혹은 손상(損傷)됨으로 인해서 남근(男根)이 전혀 없는 사람을 뜻한다.
45) 범어 Pa aka의 음사어로서 다염오(多染汙)라고 번역된다. 반 달 동안은 남자의 구실을 할 수 있고 반 달 동안은 남자의 구실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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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惡行)을 현행(現行)하고 많은 생(生)과 많은 몸[多身]의 안락을 무너뜨려서[損壞] 많은 생(生)과 많은 몸[多身]의 큰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을 보고, 보고 나서는 '이 왕과 왕과 같은 이들을 보고 또 보건대 매우 어리석구나. 오직 일생(一生)의 일신(一身)만을 보존하고 사랑할 줄만 알고 많은 생(生)과 많은 몸을 보존하고 사랑할 줄은 모르며 현재의 잠깐동안의 작은 즐거움만을 사랑하고 미래의 오랜 시간의 큰 즐거움을 사랑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생(生)의 무거운 괴로움을 사랑하지 않지 않는구나. …… 이와 같은 악(惡) 불선업(不善業)을 막고 막아서 끝내 하지 말아야겠고 끝내 짓지 말아야겠으며 끝내 행하지 말아야겠고 끝내 범하지 말아야겠다'라고 바로 이와 같은 사유를 한다.
  다시 어떤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 성품 됨이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천안(天眼)을 획득하여 이 천안(天眼)으로서 여러 유정의 죽을 때와 태어날 때와 경전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이 대나락가(大那落迦)에 태어나는 것까지를 보고, 보고 나서는 곧바로 '이 사람을 보고 또 보건대 현법(現法)에서 이와 같은 악(惡) 불선업(不善業)을 지었기 때문에 후법(後法)에서는 괴롭고 쓰라린 과보(果報)를 받게 되었구나 …… 이와 같은 악(惡) 불선법(不善法)을 막고 막아야겠다'라고 이와 같은 사유를 하니,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은 다른 사람이 지은 여러 가지 악업(惡業)을 보고 나면 네 가지 행(行)으로 진리[諦]를 잘 사유하고 진리를 잘 관찰한다.
  무엇 등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어기거나 삿된 생활[邪活命]을 하거나 혹은 방일(放逸)하거나 해태(懈怠)함으로 인하여 현법(現法)에서 갖가지 악(惡) 불선법(不善法)을 지었기 때문에 곧 현법(現法)에서 좋지 않은 과보[非愛果報]를 받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둘째는 유정(有情)에는 몸에 의한 차별(差別)이 있기도 하고, 혹은 짓는 것[所作]이 있는데도 과(果)가 뒤따르지 않기도 하며, 혹은 구하는 것이 있는데도 과(果)가 뒤따르지 않기도 한 것은 모두가 이전의 악(惡) 불선업(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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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善業)을 지었기 때문에 현법(現法) 중에서는 저마다 이와 같이 좋지 않은 과보[非愛果報]를 받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셋째는 어떤 국왕 또는 왕과 같은 사람이 현법(現法) 중에서 여러 가지 악업(惡業)을 행하므로 그로 인하여 미래에 반드시 갖가지 좋지 않은 과보[非愛果報]를 받으리라고 견주어 아는 것이다.
  넷째는 모든 유정(有情)의 종류들은 죽을 때와 태어날 때는 현법(現法) 중에서 갖가지 악(惡) 불선법(不善法)을 짓기 때문에 후법(後法) 중에서는 좋지 않은 과보[非愛果報]를 받는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는 위와 같이 여실(如實)하게 알기 때문에 끝내 스스로 짓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업(業)의 계박[縛]'이라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여러 가지 업(業)을 즐기기 때문이며, 업(業)이 무겁기 때문이며, 업(業)의 과보(果報)에서 자재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업(業)을 즐긴다는 것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악(惡)을 자주 익혔기 때문에 모든 악(惡)을 사랑하고 즐기는 것[愛樂]과 같다. 이 인연에 의해서 모든 선법(善法)에 마음을 들일 수 없나니, 이것이 첫 번째의 업(業)의 계박[縛]이다.
  업(業)이 무겁기 때문이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완전히 짓거나 완전히 짓지 않는 무간업(無間業)에 해당하는 것과 같다. 이 인연에 의해서 비록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선설(善說)의 정법(正法)과 비나야(毘奈耶)에서 잠시 출가하기를 흔쾌히 받아들였을지라도[欣樂]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사문과(沙門果)의 증득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것을 두 번째의 업(業)의 계박[縛]이라고 하는 것이다.
  업(業)의 과보(果報)에서 자재롭지 못하다는 것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신(身) 어(語) 의(意)의 악행(惡行)의 인연으로 여러 가지 악취(惡趣)에 태어나고, 그곳에 태어나고 나서는 자재로울 수가 없고 오랜 세월 동안[長夜] 괴로움을 받는 데에 제멋대로 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혹은 변지(邊地)에 태어나는 것과 같으니, 그곳에는 네 가지의 현선[四賢善]46)의 대종(大種)들이 끊어져 없나니, 소위 필추(苾芻) ……오파사가(鄔波斯迦)47)에 이르기까지이
  
46) 4선근(善根)을 말한다.
47) 범어 Up sik 의 음사어로서 재가(在家)의 신녀(信女)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우바이(優婆夷)라고 음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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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이와 같은 것을 세 번째의 업(業)의 계박[縛]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위에서 설한 뜻을 간략하게 분별[辦]하겠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모든 유정(有情)의 업(業)과 업(業)의 과보(果報)에 의하여 여리(如理)하게 사유(思惟)함을 현시하고 여리(如理)하게 사유함을 먼저로 하여 법(法)과 수법행(隨法行)을 현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 가운데에 약의(略義)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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