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22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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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22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6. 분별현성품(分別賢聖品) ①
  
  이와 같이 번뇌 따위의 끊어짐은 아홉 가지 뛰어난 상태[勝位]에 따라 변지(遍知)라는 명칭을 획득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런데 번뇌의 끊어짐은 반드시 도(道)의 힘으로 말미암아 획득된다.
  끊어짐의 근거가 되는 도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앞에서 이미 번뇌의 끊어짐은
  견도와 수도에 의한다고 설하였거니와
  견도는 오로지 무루이며,
  수도는 두 종류(유루·무루) 모두와 통한다.1)
  已說煩惱斷 由見諦修故
  
  
1) 중현은 본송의 후반구를 '견도는 성제(聖諦)를 관찰하는 것이고, 수도는 9품(品)을 닦는 것이다(見道見聖諦 修道修九品)'로 고쳐 짓고 있다. 즉 앞(권제19, p.865)에서 유정지(有頂地)의 견소단과 수소단의 수면은 오로지 성자만이 끊는 번뇌이고, 하 8지에 포섭되는 수면 중에서 견소단의 수면은 성자만이, 수소단의 수면은 성자와 범부 모두가 끊는 번뇌라고 하였다. 따라서 견도는 성자가 의지하는 도이기 때문에 오로지 무루이고(견도는 3계의 견혹을 단박에 끊기 때문에 무루도이지 않으면 안 된다), 수도는 범부와 성자가 다 같이 의지하는 도이기 때문에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한다는 사실은 이미 설명되었으므로 그것을 구태여 본송에서 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중현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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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見道唯無漏 修道通二種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번뇌는 견제도(見諦道, satyadarsana marga)와 수도(修道, bhavana marga)에 의해 끊어진다고 앞(권제19와 21)에서 이미 널리 논설하였다.
  도는 오로지 무루일 뿐인가, 역시 또한 유루이기도 한 것인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견도는 오로지 무루이지만, 수도는 두 가지와 통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견도는 3계의 견혹을 능히 신속하게 대치하기 때문에, 9품의 견소단을 단박에 끊기 때문으로,2) 세간도(즉 유루도)는 능히 이러한 견혹을 감당할 만한 능력을 갖지 않기 때문에 견도위 중의 도는 오로지 무루인 것이다.
  그러나 수도는 이와는 다르기 때문에 두 가지 종류와 통하는 것이다.
  
  앞에서 '온갖 번뇌는 견제(見諦)에 의해 끊어진다'고 말하였는데, 그렇다면 이같이 관찰되는 제(諦) 즉 진리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제(諦)는 네 가지로서, 그 명칭은
  이미 설한 대로 고·집·멸·도이며
  그 자체의 본질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그 순서는 현관(現觀)에 따른 것이다.
  
  
  
2) 여기서 9품의 견혹이란 수혹을 상상품 내지 하하품의 9품으로 나누는 것처럼 견혹도 9품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보고 이같이 설한 것이다. 그러나 견혹은 3계 4부(고·집·멸·도)의 진리성의 인가[忍]와 인식[智]에 의해 단멸 이계된다. 즉 욕계 고법지인(苦法智忍)과 고법지(苦法智)에 의해 욕계 견고소단의 번뇌가, 고류지인(苦類智忍)과 고류지(苦類智)에 의해 상 2계의 견고소단의 번뇌가 단멸 이계되고, 나아가 도법지인(道法智忍)과 도법지(道法智)에 의해 욕계 견도소단의 번뇌가, 도류지인(道類智忍)과 도류지(道類智)에 의해 상 2계의 견도소단의 번뇌가 단멸 이계되어 도합 16찰나가 소요되지만, 거의 단박[頓]에 끊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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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諦四先已說 謂苦集滅道
  彼自體亦然 次第隨現觀
  
  논하여 말하겠다. '제(satya)' 즉 진리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그 명칭은 앞(권제1)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어디에서 논설한 것인가?
  이를테면 첫 번째 품(「분별계품」) 중의 유루법과 무루법을 분별하였던 곳에서 논설하였다.
  그곳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는가?
  이를테면 그곳의 본송에서 '무루란 말하자면 성도(聖道)이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도제(道諦)를 논설한 것이며, '택멸이란 말하자면 이계(離繫)이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멸제(滅諦)를 논설한 것이며, '아울러 고(苦)·집(集) ·세간(世間)이라 한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를 논설한 것이다.
  4제의 순서는 그곳에서 설한 것과 같은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떠한가?
  지금 여기서 열거한 것처럼, 첫 번째는 고(苦, duhkha)이며, 두 번째는 집(集, samudaya)이며, 세 번째는 멸(滅, nrodha)이며, 네 번째는 도(道, marga)이다.
  4제 자체의 본질에도 역시 다른 점이 있는 것인가?3)
  다르지 않다.
  그러면 어떠한가?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으니, [여기서 분별하는 4제] 자체의 본질이 그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본송에서] '역시 그러하다'는 말을 설한 것이다.
  4제는 어떠한 연유에서 이와 같은 순서로 설하게 된 것인가?4)
  
  
3) 즉 본론 권제1 「분별계품」 첫머리(p.6·7·12)에서 설한 성도와 이계와 고·집과, 지금 설한 4제는 순서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의미도 다른 것인가 하는 물음.
4) 이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원인이 선행하고 결과가 뒤에 오기 때문에 고제는 집제 뒤에 설해야 할 것이고, 도제는 멸제 앞에 설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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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관(現觀)하는 단계의 선후(先後)에 따라 설한 것이니, 말하자면 현관하는 중에 먼저 관찰한 것을 앞에 설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원인을 먼저 설해야 할 것이고, 그 후 비로소 결과를 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혹 어떤 법은 생겨나는 순서에 따라 설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를테면 염주(念住) 등과 같은 법이 그러하다.5) 혹은 다시 어떤 법은 편의에 따른 순서로 설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정승(正勝) 등과 같은 법이 그러하다.6) 즉 이 같은 4정승 중에는 이와 같은 바람을 일으켜 이미 생겨난 것(즉 악)을 먼저 끊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나중에 끊어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취(理趣)는 없으며, 다만 말하는 편의에 따라 그렇게 설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설하고 있는 4제는 유가사(瑜伽師)들이 현관하는 단계의 선후의 순서에 따른 것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현관하는 순서가 반드시 그러한 것인가?
  가행위(加行位, 견도의 준비단계) 중에서 이와 같이 관찰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가행위 중에서 반드시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만약 애착하는 곳에서 능히 핍박하고 괴롭히는 어떤 법이 있다고 한다면, 해탈의 원인을 구하기 위해 이치상 이러한 법을 마땅히 가장 먼저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가행위 중에서 가장 먼저 괴로움[苦]을 관찰하는 것이니, 괴로움이 바로 고제(苦諦)이다. 그 다음으로 다시 괴로움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는가를 관찰하니, 바로 괴로움의 원인[因]을 관찰하는 것으로, 원인이 바로 집제(集諦)이다. 다음으로 다시 괴로움은 무엇을 소멸해야
  
  
  
5) 염주란 3현위에서 5정심관 다음에 닦는 네 가지 관법으로(후술), 몸은 사대소조이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은 것이며[身念住], 지각되어 알려진 소여의 생기는 반드시 소멸할 것이므로 괴로운 것이며[受念住], 소의·소연에 따라 끊임없이 부침하는 마음은 무상한 것이며[心念住], 그 밖의 모든 존재는 실체성이 없는 것이다[法念住]고 관찰하는 것. 이는 생겨나는 순서대로 설한 것이다.
6) 4정승(또는 正斷)이란 이미 생겨난 악을 끊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을 생겨나지 않게 하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을 생겨나게 하고, 이미 생겨난 선을 증장시키는 것으로, 이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편의상의 순서이다. 즉 악이 선보다, 이미 생겨난 것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보다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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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는가를 관찰하니, 바로 괴로움의 소멸[滅]을 관찰하는 것으로, 소멸이 바로 멸제(滅諦)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괴로움의 소멸은 어떠한 방법으로 추구하는 것인가를 관찰하니, 바로 소멸의 방법[道]을 관찰하는 것으로, 방법이 바로 도제(道諦)이다. 이는 마치 병을 관찰하고 난 다음에 병의 원인을 찾으며, 계속하여 병의 쾌유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좋은 약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도 역시 4제의 순서를 이 같은 비유로 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계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양의경(良醫經)』에서 설하고 있으니, 그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저 의왕(醫王)이란 말하자면 네 가지 덕을 갖추고서 능히 독화살을 뽑는 자이니, 첫째는 병의 상태를 잘 알며, 둘째는 병의 원인을 잘 알며, 셋째는 병의 치유를 잘 알며, 넷째 좋은 약을 잘 안다. 여래도 역시 그러하여 위대한 의왕으로서 고·집·멸·도를 참답게 안다."7) 따라서 가행위에서는 이와 같은 순서로 4제를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관위(現觀位) 중에서 관찰하는 순서도 역시 그러하니, 그것은 가행의 힘에 의해 인발(引發)된 것이기 때문으로, 마치 땅을 관찰하고 나서 말을 쫓아 치달려 가는 것과 같다.8)
  이러한 '현관(現觀, abhisamaya)'이란 말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이것은 '현전에서 평등하게 깨닫는 것[現等覺, abhisambodha]'이라는 뜻에 근거한 것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이것은 오로지 무루일 뿐이다'고 설한 것인가?9)
  열반에 대향(對向, abhi)하여 경계를 올바로 깨닫는 것[正覺, sambod-ha]이기 때문으로, 이러한 깨달음은 참되고 청정[眞淨]한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4제 중에서 결과적 존재[果性]로
  
  
  
7) 『잡아함경』 권제15 제389경(대정장2, p.105상).
8) 여기서 '땅을 관하는 것'은 가행위(煖·頂·忍·世第一法의 4善根)에서의 4제의 관찰을 비유한 말이고, '말을 쫓아 치달려 가는 것'은 견도위에서의 4제 현관을 비유한 말이다.
9) 현관 16심(心)의 견도는 오로지 무루일 뿐이라고 앞의 본송에서 논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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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의 5취온을 일컬어 고제라고 하며, 원인적 존재[因性]로서의 5취온을 일컬어 집제라고 하니, [결과는] 이것이 능히 집기(集起)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고제와 집제는 원인과 결과로서의 존재로, 비록 그 명칭은 다를지라도 존재 자체[物]에 다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멸·도의 2제는 명칭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에도 역시 다름이 있다.10)
  그렇다면 경에서는 어떠한 뜻에서 '성제'라고 설한 것인가?
  이는 바로 성자의 진리[諦]이기 때문에 '성'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11)
  그렇다고 이것이 어찌 성자가 아닌 자에게 있어서는 거짓된 것이라고 하겠는가? 일체의 유정에게 있어 이 같은 진리의 존재[諦性]는 전도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성자들만이 진실로 관찰할 수 있으며, 성자가 아닌 자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경에서도 이것을 다만 '성자의 진리[聖諦]'라고만 말하였을 뿐 성자 아닌 자의 진리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전도되어 관찰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자가 즐거움이라고 설하는 것을
  성자가 아닌 자는 괴로움이라고 설하고
  성자가 괴로움이라고 설하는 것을
  성자가 아닌 자는 즐거움이라고 설한다.12)
  
  
  
10) 멸제란 택멸로서 무루의 무위이며, 도제는 유위이면서 무루이다. 즉 도제는 아직 열반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위이지만 이미 번뇌를 떠나 있는 도정이기 때문에 무루인 것이다.
11) 이를테면 오로지 성자만이 이러한 4제에 대해 능히 성행(聖行)·성지(聖智)로써 진실되게 관찰할 수 있으며, 이생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성제라고 이름한 것이다.
12) 『잡아함경』 권제13 제308경(대정장2, p.88하), '현성(賢聖)이 괴로움이라고 여기는 것을 세간에서는 즐거움이라고 여기며, 세간에서의 괴로운 것은 성자에게는 즐거운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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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두 가지(멸제·도제)는 오로지 성자의 진리이고, 그 밖의 두 가지(고제·집제)는 성자와 성자 아닌 자의 진리이다"고 하였다.13)
  오로지 수(受)의 일부만이 바로 괴로움 그 자체이며, 그 밖의 다른 것은 괴로움이 아니다.14) 그런데 어떻게 온갖 유루의 행(行)을 모두 고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세 가지 괴로움과 부합하기에 '고'이니,
  일체의 유루행법으로서
  마음에 드는 것이나 들지 않는 것이나
  그 밖의 것이나 각기 상응하는 바와 같다.
  苦由三苦合 如所應一切
  可意非可意 餘有漏行法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이 있으니, 첫째는 고고성(苦苦性)이며, 둘째는 행고성(行苦性)이며, 셋째는 괴고성(壞苦性)이다.15) 즉 모든 유루행법은 그것이 상응하는 바대로 이 같은 세 가지 종류의 괴로움과 부합하기 때문에 모두 다 고제(苦諦)라고 하여도 역시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
  
  
13) 보광에 의하면 여기서 유여사는 경부이다. 즉 경량부에서는 멸제·도제는 번뇌를 능히 끊는 성자만이 성취하고, 번뇌를 감출 뿐인 범부는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제이지만, 고제·집제는 범성(凡聖)이 모두 함께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제·비성제 모두에 통한다. 혹은 멸제·도제는 무루로서 성자만이 관찰하기 때문에 성제이나 고제·집제는 유루로서 범성이 다 같이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제·비성제 모두에 통한다고 하였다.(『구사론기』 권제22, 대정장41, p.333하)
14) 고·낙·불고불락(즉 捨)의 3수(受) 중 고수만이 괴로움 그 자체(즉 고제)이며, 낙·불고불락수의 경우 그 자체로서는 괴로움이 아니라는 뜻.
15) 고고성(duhkha duhkhata)이란 그 자체가 괴로운 존재로서 바로 고수(苦受)를 말하고, 행고성(samskara duhkhata)이란 무상[行]하기 때문에 괴로운 존재로서 사수(捨受)를 말하며, 괴고성(viparinama duhkhata)이란 지금은 즐거운 것일지라도 마침내 괴멸하기 때문에 괴로운 존재로서 낙수(樂受)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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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마음에 드는[可意] 유루행법은 괴고성과 부합하기 때문에 '고'라고 일컬은 것이며, 마음에 들지 않는[非可意] 온갖 유루행법은 고고성과 부합하기 때문에 '고'라고 일컬은 것이며, 이를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유루행법은 행고성과 부합하기 때문에 '고'라고 일컬은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마음에 드는 것',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그 밖의 것'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낙(樂) 등의 3수와, 그 순서대로 3수의 힘으로 말미암아 낙수 등에 따르게 되는 온갖 유루행법을 '마음에 드는 것' 등이라고 이름한다.16)
  [그렇다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라고 일컬은] 까닭은 무엇인가?
   온갖 낙수는 허물어짐으로 말미암아 괴로운 성질이 되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온갖 낙수는 생겨날 때에는 즐거움이며, 지속할 때에도 즐거움이지만, 허물어질 때에는 괴로움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17) 또한 온갖 고수는 그 자체로서 괴로운 성질이 되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온갖 고수는 생겨날 때도 괴로움이고, 지속할 때에도 괴로움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 그리고 불고불락수는 행(行, 즉 변천의 무상)으로 말미암아 괴로운 성질이 되니, 온갖 연(緣)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만약 항상하지 않는 것[非常]이라면 그것은 바로 괴로운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18)
  그리고 수(受)와 마찬가지로 '수'에 따르는 제행(諸行)도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고(苦)는 바로 괴로운 성질이기 때문에 고고성이라 이름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행(行)도 바로 괴로운 성질이기 때문에 행고성이라 이름한다. 그러나 여기서 '마음에 드는 것'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괴고성과 고고성이라고 설한 것은 공통되지 않은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며, 이치상으로 볼 때 일체의 유루행법은 행고성이기 때문에 괴로운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19)
  
  
16) 낙수 자체와 그것의 자구(資具)가 되는 유루행법을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 한다.
17) 『중아함경』 권제58 「법락비구니경(法樂比丘尼經)」(대정장1, p.789하). 여기서는 3수의 구역어인 낙각(樂覺)·고각(苦覺)·불고불락각(不苦不樂覺)으로 설하고 있다.
18) 『잡아함경』 권제17 제474경(대정장2, p.121상), '我以一切行無常故, 一切行變異法故, 說諸所有受悉皆是苦…….'
19) 일체의 유루행법은 모두 찰나에 생멸하는 법이기 때문에 행고성(行苦性) 아닌 것이 없지만, 가의(可意)의 유루행법을 괴고성이라 하고 불가의(不可意)의 유루행법을 고고성이라고 하는 것은 별도의 갈래[別門]에 따른 설명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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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오로지 성자들만이 능히 관견(觀見)하는 바이니, 그래서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한올의 속눈썹이
  손바닥 위에 있으면 느낄 수 없지만
  눈동자 위에 있으면
  상처입고 편안하지 못한 것처럼,
  손바닥과 같은 어리석은 자는
  행고(行苦)의 속눈썹을 느끼지 못하지만
  눈동자와 같은 지혜로운 자는
  지극히 싫어하고 두려워하도다.20)
  즉 어리석은 모든 이들은 무간지옥의 극심한 괴로움을 향수하는 온에 대해서는 괴롭고 두려운 마음을 낳지만, 그것은 성자들이 유정(有頂, 무색계의 제4처인 비상비비상처)의 온에 대해 그같이 생각하는 것만도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제(道諦) 역시 응당 마땅히 행고성에 포섭되어야 할 것이니, 유위성이기 때문이다.
  도제는 괴로움이 아니다. 즉 성인의 마음[聖心]에 위배되고 어긋나는 것이 행고(行苦)의 특상이지만, 성도를 일으키는 것은 성인의 마음에 위배되고 어긋나는 것이 아니니, 이로 인해 온갖 괴로움의 멸진(滅盡, 즉 열반)이 능히 인기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만약 온갖 유위와 열반(즉 멸진)을 관찰하면 그것이 바로 적정(寂靜)이다"고 한 것도 역시 먼저 그 같은 법이 바로 괴로운 것임을 관찰하고, 그 후 그것의 소멸을 관찰하는 것을 적정으로 삼았기 때문에 '유위'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유루의 법만을 나타내는 것이다.21)
  
  
20) 보광에 의하면 이는 경부사 구마라다(鳩摩羅多, Kumaralata)의 게송이다.
21) 이는 즉 행고의 유위는 다만 괴로운 것이고 소멸되어야 할 것으로 관찰되기 때문에, 성도는 비록 유위이지만 행고성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하는 경증이다. 즉 '도'는 무루이기 때문에 그 같은 행고성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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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제법 중에는 역시 즐거움도 있다고 인정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다만 괴로움만을 설하여 성제로 삼은 것인가?
  어떤 부류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즐거움이 적기 때문이니, 마치 녹두가 검정콩 무더기 중에 섞여 있을지라도 적은 것은 많은 것에 따르기 때문에 그것을 검정콩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떤 지혜로운 자가 등창을 물로 씻어 조그마한 즐거움이 생겨났다고 해서 등창을 즐거운 것이라고 하겠는가?"22)
  유여사는 이에 대해 게송으로써 해석하여 말하고 있다.
  
  능히 괴로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능히 온갖 괴로움을 산출[集]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어야 그것[樂]을 희구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또한 괴로움이라 이름한 것이다.23)
  이치상으로는 실로 마땅히 '성자는 온갖 존재[有]와 즐거움 자체를 모두 괴로운 것이라고 관찰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행고와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괴로움을 진리[諦]로 설정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낙수(樂受)를 또한 역시 괴로운 것이라고 관찰하겠는가?
  [낙수의] 존재는 항상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성자의 마음에 위배되기 때문
  
  
  
22) 『대비바사론』 권제78(한글대장경121, p.62)에 의하면, 여기서 어떤 부류의 해석은 바로 유부 정설이다.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해야 할 것이니……예컨대 독이 든 병에 한 방울의 꿀을 떨어뜨린다 하더라도 적은 것은 많은 것에 따르기 때문에 다만 독병이라 이름할 뿐으로, 제온도 역시 그러하다."
23) 이 역시 경부사 구마라다의 해석이다. 즉 유부에 의하면 고·낙·불고불락수는 각기 3고성과 부합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고제하에 포섭시켰지만, 마치 색처의 자상인 청·황·적·백 등이 개별적으로 실재하듯이 그것들 각각은 '수'의 자상으로서 개별적 실재이다. 곧 유부의 대법사(對法師)는 낙수는 실재하지만(후술) 다만 그것이 괴고성과 부합하기 때문에 '고'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량부에 의하면 낙수는 실재하지 않으며, 세간의 일체 즐거움은 다만 괴로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고'일 뿐이다. 이 같은 고인론(苦因論)은 이후에 논설하게 될 낙수부정론 즉 무락론(無樂論)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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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로,24) 이를테면 색 등을 괴로움이라고 관찰하는 때와 마찬가지로 그 같은 낙수의 괴로움도 고수와는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25) 만약 어떤 이가 "낙수는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모든 성인들은 그것을 역시 괴로운 것이라고 관찰하였다"고 말하였다면, 이 같은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능히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은 바로 '집(集)'의 행상인데, 어찌 그것을 '고(苦)'라고 하겠는가? 또한 모든 성자가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날 때 그것을 소연으로 삼아 어찌 괴롭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을 것인가?26) 즉 거기서의 제온은 고수의 원인이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경에서 다시 행고(行苦)를 설한 것은 무엇 때문일 것인가?
  그러나 만약 항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낙수를 괴로움으로 관찰해야 한다면, 비상(非常)과 고(苦)를 관찰할 때 그 행상에 어떠한 차별이 있을 것인가?
  [낙수는] 생멸(生滅)의 법이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이 아니라고 관찰해야 하며, 성자의 마음에 위배되기 때문에 그것을 관찰하여 괴로움이라고 해야 한다. 즉 다만 항상하지 않는 것임을 관찰하고서 성자의 마음에 위배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비상(非常)의 행상은 능히 고(苦)의 행상을 인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부(有餘部)의 논사는 이와 같은 주장을 하였다. "실유의 낙수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으며, '수'는 오로지 괴로움일 따름이다."27)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24) '항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함은 무위의 열반과는 구별된다는 말이며, '성자의 마음에 위배된다'고 함은 무루의 성도와 구별된다는 말이다.
25) 즉 색 그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고 하듯이, 낙수 또한 그 자체로서는 고수(예컨대 복통)와 다르지만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즉 行苦)이라는 뜻.
26) 상 2계에는 고수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색계·무색계의 온을 반연하여 괴롭다는 생각을 일으킬 것인가 하는 힐난.
27) 이 유여부에 대해 보광은 경부 대중부 등으로, 법보는 경부의 이사(異師)로, 칭우는 대덕(大德, Bhadhanta) 실리라다(室利羅多, rilata)로 평석하고 있는데, 이 같은 낙수비실재론은 앞의 구마라다의 설을 발전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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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증(敎證)과 이증(理證)에 의한 것이다.
  교증에 의한다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를테면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존재하는 모든 수로서 바로 괴로움이 아닌 것은 없다"고 하였다.28)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그대는 마땅히 괴로움으로써 낙수를 관찰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을 일컬어 전도(顚倒)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증에 의한다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온갖 낙수는 모두 그 원인이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존재하는 온갖 의복이나 음식, 차가움과 따뜻함 등을 모든 유정류들은 즐거움의 원인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때[非時]나 지나치게 많이 수용하게 되면 능히 괴로움을 낳으니, 또한 역시 괴로움의 원인은 되어도 마땅히 즐거움의 원인은 되지 않는 것이다. 즉 지나치게 증가하여 많아진 상태에서나 혹은 비록 평등(적당)하게 수용되었을지라도 다만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때에 수용되었을 경우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 되어 능히 괴로움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복 등은 본래 괴로움의 원인임을 알아야 하는 것으로, 괴로움이 증가하여 많아질 때 그 상은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이증1)
  위의(威儀)가 바뀌어 그 상태에서 벗어날 때의 이치도 역시 그러하다.29) 또한 즐거움의 느낌[樂覺]은 괴로움을 대치할 때 비로소 일어나며, 아울러 괴로움이 바뀌어 벗어나게 되면 즐거움의 느낌이 바로 생겨난다. 이를테면 배고픔이나 목마름, 추위나 더위, 피로, 욕망 등의 괴로움에 핍박되지 않았을 때에는 즐거움의 원인(즉 의복 등)에서 즐거움의 느낌은 생겨나지 않는다. 따라서 극심한 괴로움을 대치하는 원인에 대해 어리석은 이들은 '이것은 능히 즐거움을 낳는다'고 헛되이 생각하지만, 실로 능히 즐거움을 낳는 원인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이증2)
  
  
28) 『잡아함경』 권제17 제474경(대정장2, p.121상), "一切諸行變異法故, 說諸所有受悉皆是苦."
29) 위의란 행(行)·주(住)·좌(坐)·와(臥)의 일상의 행동거지로서, 예컨대 오래 서 있던 자가 앉으면 당장은 즐겁지만 그것도 결국은 역시 괴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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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괴로움이 바뀌어 그 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때 어리석은 이들은 그것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니, 이를테면 무거운 짐을 메고 가다가 잠시 어깨를 바꾸어 메는 경우 따위와 같다.(이증3) 따라서 '수'는 오로지 괴로움일 뿐 진실의 낙수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對法)의 모든 논사들은 말하기를, "낙수는 실로 존재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이치에 맞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바야흐로 낙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자들에게 도리어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니, 무엇을 일컬어 괴로움이라고 한 것인가? 만약 핍박이라고 한다면 이미 적당한 기쁨도 있을 것이므로 낙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30) 만약 손해라고 한다면 이미 이익도 있을 것이므로 낙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만약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것[非愛]이라고 한다면 이미 애호할 만한 것[可愛]도 있을 것이므로 낙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성자가 염오를 떠날 때에는 애호할 만한 것도 더 이상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애호할 만한 것 자체는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으니, 성자가 염오를 떠날 때에는 다른 갈래[異門]로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애호할 만한 것도 그렇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수'로서 그 자상이 애호할 만한 것이라면, 이러한 '수'는 결코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것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성자가 염오를 떠날 때에는 그 밖의 다른 행상으로써 이러한 '수'를 싫어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러한 '수'는 바로 방일처(放逸處)로서, 요컨대 광대한 노력에 의해 [그것의 지속이] 성취되는 변괴(變壞)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관찰하는 것이지, 그것의 자상이 바로 그러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애호할 만한 것) 자체가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마땅히 그것에 대해 애호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애호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염오를 떠날 때에도 성자는 마땅히 그 밖의 다른 행상으로써 낙수를 관찰하여 깊이 싫
  
  
30) 핍박은 그것이 해소된 상태인 기쁨을 예상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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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상으로 말미암아 낙수는 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수로서 바로 괴로움이 아닌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이에 대해 부처님 스스로 해석하여 회통하고 계시니, 계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부처님께서 경희(慶喜, 즉 아난다)에게 고하시기를, 나는 제행이 모두 무상하며 아울러 모든 존재가 다 변괴한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은밀히 '존재하는 모든 수로서 바로 괴로움이 아닌 것은 없다'고 설한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은 고고성(낙수가 바로 괴로움 그 자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와 같이 설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고고성이라는] 자상으로 말미암아 모든 수가 다 괴로움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경희(慶喜)는 이와 같이 물어 말하였던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다른 경에서 3수(受)가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낙(樂)과 고(苦)와 불고불락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밀의(密意)에 의거하여 이 경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수로서 바로 괴로움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즉 [모든 수가 다 괴로움이라고 한다면] 경희는 다만 마땅히 "어떠한 밀의에 의거하여 3수가 존재한다고 설한 것인가?"라고 물었어야 할 것이며, 세존께서도 역시 다만 "나는 이러한 밀의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3수가 존재한다고 설한 것이다"고 마땅히 대답하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경에서는 이미 이와 같은 문답이 없기 때문에, [각각의] 자상으로 말미암아 3수는 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즉 세존께서 이미 "나는 밀의로써 존재하는 모든 수로서 괴로움이 아닌 것은 없다고 설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은, 바로 이것이 설해진 경은 별도의 뜻[別意]에 의거하여 설해진 것으로 진실의 요의경(了義經)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이상 無樂論者의 경증1 해명)
  또한 계경에서 "그대는 마땅히 괴로움으로써 낙수를 관찰해야 할 것이다"고 말하였지만,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 경의 뜻은 낙수에 두 가지 종류의 성질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즉 첫째는 즐거움의 성질로서, 말하자면 이러한 낙수는 그 자체의 의미[自相門]에 근거한 것이니, 바로 참으로 애호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괴로움의 성질로서, 다른 갈래[異門]에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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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것이니, 역시 또한 바로 무상 변괴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성질 중] 즐거움으로 관찰할 때에는 능히 계박하게 되니, 모든 탐욕있는 자는 이러한 맛에 맛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괴로움으로 관찰할 때에는 능히 해탈하게 하니, 이와 같이 관하는 자는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으로 관하면 능히 해탈하게 되기 때문에 유정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관찰하라고 권유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의 자상이 바로 즐거움임을 안 것인가?
  어떤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정변각(正遍覺)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제행(諸行)은 비상(非常)이고
  아울러 유위는 변괴(變壞)임을 아시니,
  그래서 '수'는 모두 괴로움이라 설한 것이다.31)(이상 無樂論者의 경증2 해명)
  또한 계경에서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을 일컬어 전도(顚倒)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다른 뜻으로 설한 것이다. 즉 모든 세간에서는 온갖 낙수와 묘욕(妙欲)과, 온갖 존재[諸有, 즉 3유]가 향수하는 일부분의 즐거움에 대해 한결같이 즐거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도를 성취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온갖 낙수는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닌] 다른 갈래에 근거할 경우 역시 또한 괴로움의 성질도 갖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세간에서는 그것을 오로지 즐거움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전도를 성취하는 것이고, 온갖 묘욕의 대상은 즐거움이 적고 괴로움이 많은 것임에도 오로지 그것을 즐거움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전도를 성취하는 것이며, 온갖 존재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다.(이상 無樂論者의 경증3 해명)
  
  
  
31) 『잡아함경』 권제17 제473경(대정장2, p.121상), "제행은 무상하며, 변이하는 법임을 아시기에 '수'는 모두 괴로움이라 설하신 것이니, 이는 바로 정각의 앎이로다(知諸行無常 皆是變易法 故說受悉苦 正覺之所知)." 이는 곧 낙수의 자상이 괴로움이라면 굳이 그 이유를 설할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낙수의 자상은 즐거움이지만 무상 변이법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설하게 되었다는 뜻의 경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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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이 같은 능증(能證)에 의해 '낙수는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치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수'의 자상이 실로 모두 괴로움이라고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슨 뛰어난 이익이 있어서 3수를 설하신 것인가? 만약 세존께서 세속(世俗)에 따라 설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세존께서는 "나는 밀의로써 '수'로서 괴로움이 아닌 것은 없다"고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32) 또한 5수근(受根)을 관찰하는 것에 대해 [경에서] 참다운 말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모든 낙근과 모든 희근, 이 두 가지는 모두 바로 낙수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만약 이와 같은 5수근을 정혜(正慧)로써 참답게 관찰한다면 3결(結)을 영원히 끊게 될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33)
  또한 ['수'의 자상이 실로 모두 괴로움이라고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어째서 하나의 고수(苦受)에 대해 세속에 따라 세 가지로 분별하여 설하신 것인가? 만약 세간이 하(下)·상(上)·중(中)의 괴로움에 대해 그 순서대로 '낙' 등의 3각(覺)을 일으키므로 부처님께서는 그 같은 사실에 따라 '낙' 등의 3수를 설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럴 경우] '낙'에도 역시 세 가지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하품 등의 세 가지 괴로움에 대해서는 오로지 상품 등의 낙각(樂覺)만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34) 또한 수승한 향·미·촉 등에서 생겨난 즐거움을 향수할 때 어떠한 하품의 괴로움이 있어 세인(世人)들이 그것에 대해 낙수의 감각을 일으키는 것인가? 만약 그 때 [낙수를 일으키는] 하품의 괴로움이 존재한다고 인정한다면, 이와 같은 하품
  
  
32) 즉 이미 일체의 수는 괴로운 것이라는 말을 밀의(密意)로서 한 이상 언설로서 드러난 3수설을 세속에 따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
33) 여기서 5수근이란 우(憂)·희(喜)·고(苦)·낙(樂)·사수(捨受)를 말하며, 3결이란 유신(有身)·계금취·의견(疑見)을 말한다. 즉 낙·희근의 낙수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같이 설할 까닭이 없다는 경증이다.
34) 즉 하품의 고에서 낙각(樂覺, 즉 낙수)을 일으키고, 상품의 고에서 고각(苦覺)을 일으키며, 중품의 고에서 사각(捨覺)을 일으킨다고 할 경우, '낙'에도 역시 세 가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하품의 고에서 상품의 낙각을, 상품의 고에서 하품의 낙각을, 중품의 고에서 중품의 낙각을 일으킨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힐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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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괴로움이 이미 소멸하여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그 때 세인들에게는 마땅히 지극한 낙수의 감각이 존재해야 할 것이니, 이러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괴로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락을 향수할 때의 경우에 대해 따져 물어보아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또한 하품의 [고]수가 현재전할 때는 그 수가 분명하고 맹리하기에 [낙수를] 취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중품의 수가 현재전할 때에는 이와는 서로 반대된다고 인정할 경우, 이 같은 사실이 어떻게 이치에 맞을 것인가?35) 또한 아래 세 선정에서는 낙수가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여기에는 마땅히 하품의 괴로움이 존재해야 할 것이며, 그 이상의 모든 단계(색계 제4정려 이상)에는 사수가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여기에는 마땅히 중품의 괴로움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선정의 단계가 수승할수록 괴로움이 더욱 증가하게 되니, 어찌 그것을 올바른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하품 등의 세 가지 괴로움에 근거하여 순서대로 '낙' 등의 3수를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대명(大名)에서 말씀하시기를, '색은 한결같이 괴로움으로 즐거움이 아니며, 즐거움이 따르는 바도 아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다."36) 따라서 일부 진실의 낙수가 결정코 존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상에서와 같이 바야흐로 그(無樂論者, 즉 경부)가 인용한 교법은 '진실의 낙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분별하였다.
  그가 내세운 이증(理證)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바야흐로 '온갖 낙수는 모두 그 원인이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한 것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원인'이라는 뜻에 미혹하였기 때문이다. 즉 소의신의 상태[分位差別]와 외적인 경계를 관찰하여 비로소 즐거움의 원인이 된다거나 괴로움의 원인이
  
  
  
35) 즉 하품의 고수에서 낙수를, 중품의 고수에서 사수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낙수가 일어날 때에는 분명하고 맹리하기 때문에 능히 알 수 있지만, 중품의 고수인 사수가 일어날 때에는 미열(微劣)하여 능히 알 수 없다. 그럴 경우 중품의 수가 하품의 수보다 미열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만 어찌 중품이 하품보다 미열할 것인가? 따라서 이와 같은 논의는 이치에 맞는 것[應理]이라고 할 수 없다.
36) 『잡아함경』 권제3 제81경(대정장2, p.21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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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된다고 해야 하는 것으로, 오로지 외적인 경계만이 그 같은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러한 외적인 경계가 이러한 소의신의 이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되면 능히 즐거움의 원인이 되겠지만, 아직 이러한 소의신의 상태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는 즐거움의 원인이 되지 않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즐거움의 원인은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37) 이를테면 세간의 불은 [어떤 음식이] 삶겨지고 지져진 상태에 따라 그것을 맛있게 익히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그렇지 않은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오로지 그 같은 불만이 그러한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만약 이러한 불이, 이러한 삶겨지고 지져진 음식의 이와 같은 상태에 이를 때 그것을 맛있게 익히는 원인이 되겠지만, 아직 이와 같은 상태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는 그것을 맛있게 익히는 원인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음식을] 맛있게 익히는 원인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즐거움의 원인도 역시 그러하여 그것이 결정적이라는 이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 정려 중의 낙수는 어찌 그 원인이 결정적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즉 그 같은 낙수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능히 괴로움을 낳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38)(이상 無樂論者의 이증1 비판)
  또한 그가 설하였던 "요컨대 괴로움을 대치할 때 즐거움의 감각, 즉 낙각(樂覺)이 일어난다"는 말은 앞서의 논설에 준하여 볼 때 이미 논파된 셈이다. 이를테면 수승한 향·미·촉 등에서 생겨난 즐거움을 향수할 때 어떠한 괴로움을 대치하였기에 세인(世人)들이 그것에 대해 즐거움의 감각을 일으키는 것인가?39) 만약 그 때에도 [낙수를 일으키는] 거친 괴로움을 대치하였다고 인정한다면, 이같이 능히 대치한 괴로움이 이미 소멸하여 아직 생겨나지
  
  
37) 무락논자(無樂論者)는 의복이나 음식 등은 괴로움의 원인도 되기 때문에 즐거움의 원인은 결정적이지 않다고 하였지만, 추위나 허기 등 소의신이 처한 상태도 즐거움의 한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조건에 근거할 경우 즐거움의 원인은 결정적인 것이라는 뜻.
38) 그러나 색계 이상에는 고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세 정려는 아래 세 정려. 제4정려에는 사수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39) 즉 어떤 괴로움에 핍박되는 바가 없이 오로지 직접적으로 수승한 향·미 등을 수용함에 따라 즐거움이 생겨나는 경우에는 어떠한 괴로움이 대치되어 낙수가 일어났고 해야 할 것인가? 따라서 괴로움의 대치에 관계 없이 낙수는 실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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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았을 경우, 그 때는 마땅히 지극한 낙수의 감각이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40) 또한 정려의 낙수는 무엇을 대치하였기에 생겨난 것인가? 이와 같은 등의 논파에 대해 앞에서의 논설에 준하여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이상 無樂論者의 이증2 비판)
  또한 그가 설하였던 "괴로움이 바뀌어 그 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때 즐거움이 생겨나니, 마치 [무거운 짐을 메고 가다가 잠시] 어깨를 바꾸어 메는 경우 따위와 같다"고 할 경우, 소의신의 상태가 실로 능히 즐거움을 낳는 것이며, 나아가 소의신의 이와 같은 상태가 아직 멸하기 전에는 반드시 즐거움이 생겨나지만 멸하면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러한 상태 이후에는 즐거움은 마땅히 더욱 증가해야 할 것이며, 괴로움은 점차 미약해져야 하기 때문이다.41) 이와 마찬가지로 소의신의 네 가지 위의(威儀, 行·住·坐·臥)가 바뀌어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때 즐거움이 생겨나고 피로가 풀리게 되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전에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최후에 무엇이 괴로움의 감각을 홀연히 낳게 한 것인가?42)
  소의신이 변화하여 바뀐 상태의 차별로 말미암아 낳아지는 것이니, 마치 술 따위에도 그 후에 달고 신맛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는 것과 같다.(이상 無
  
  
  
  
40) 만약 거친 괴로움[麤苦, 즉 앞에서 언급한 하품의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향·미 등에서 생겨난 좀더 덜 거친 미세한 괴로움[微細苦, 즉 상품의 괴로움]이 대치하며, 세상 사람들은 다만 이 같은 미세한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생각할 뿐이기 때문에 낙수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같은 미세한 괴로움이 소멸하여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상태에서는 마땅히 지극한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그 때는 무엇이 대치되어 즐거움이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 따라서 오로지 향·미 등을 수용하여 괴로움을 대치할 때만 즐거움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 것이다.
41) 어깨를 바꾸어 멜 때의 즐거움이 괴로움(즉 상품의 괴로움)에 근거한 상대적 소극적 즐거움(즉 하품의 괴로움)이라고 한다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차 괴로움은 감소하고 즐거움은 증가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따라서 그 때의 즐거움은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적극적 즐거움이라는 뜻.
42) 오래 서 있다가 앉으면 즐겁지만 그것도 오래 지속되면 괴로운데, 앉을 때의 즐거움이 상대적 즐거움이 아니라 절대적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 같은 즐거움은 괴로움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 오래 앉아 있을 때의 괴로움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하는 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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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樂論者의 이증3 비판)
  그렇기 때문에로 '낙수는 실로 존재한다'는 이치는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온갖 유루의 행법(行法)은 3고와 부합하기 때문에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괴로움'(즉 苦苦·壞苦·行苦)이라 일컫는 것임을 결정코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괴로움의 행법 자체를 또한 역시 '집제(集諦)'라고도 이름한다.
  이러한 설은 결정코 계경에 어긋나는 것이니, 계경에서는 오로지 '애(愛)' 만을 설하여 집제라고 하였기 때문이다.43)
  경에서는 수승한 것에 대해서만 설하였기 때문에 '애'를 설하여 집제라고 하였지만, 그 밖의 법(이를테면 업)도 역시 집제이다.
  이와 같은 이치는 무엇에 의해 깨달아 안 것인가?
  다른 계경 중에서 역시 그것과는 다른 사실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박가범(薄伽梵)의 가타(伽陀)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업과 애와 무명을 원인으로 삼아
  후시(後時)의 행(行)을 초래하여
  온갖 존재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보특가라라고 한다.44)
  또한 계경에서 다섯 가지 종류의 종자(種子)를 설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별도의 명칭으로써 유취(有取)의 식(識)을 설한 것이다.45) 또한 그 경에서
  
  
43) 『중아함경』 권제7 「분별성제품」(대정장1, p.468중하), "제현(諸賢)이여, 무엇을 애습고습성제(愛習苦習聖諦)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중생에게는 실로 애(愛)의 내6처가 있으니, 안·이·비·설·신·의처가 그것으로, 이에 대해 애호함이 있고 더러움[膩]이 있고 물듦이 있고 집착함이 있으면 이것을 '습'이라 한다. 제현이여,……이것을 애습고습성제라고 한다."
44) 『잡아함경』 권제13 제307경(대정장2, p.88중), "……이러한 것(중생·나라·마나바 등의 관념)들은 모두 고음(苦陰)에 의해 생겨난 것, 온갖 업과 애와 무명이 원인이 되어 타세(他世)의 음(陰)을 쌓는도다."
45) 『잡아함경』 권제2 제39경(대정장2, p.8하 -p.9상), "다섯 가지 종자가 있으니, 무엇이 다섯인가? 이를테면 뿌리[根] 종자와 줄기[莖] 종자와 마디[節] 종자와 저절로 떨어지는[自落] 종자와 열매[實] 종자가 바로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지는, 종자는 취음(取陰)과 구유하는 식(識)을 비유한 것이고, 지계(地界)는 4식주(識住)에 비유한 것이며, 수계(水界)는 탐(貪)과 희(喜)에 비유한 것이다." 본론에서의 '유취의 식'이란 유루의 식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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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계(地界) 중에 있다'고 설한 것은 바로 별도의 명칭으로써 4식주(識住)를 설한 것이다.46) 따라서 경에서 설한 바는 바로 밀의(密意)의 말씀으로 [참된 요의설이 아니지만], 아비달마(阿毘達磨)에서는 법상에 의거하여 [온갖 유루행법이 모두 집제라고] 설한 것이다.
  그런데 경 중에서 '애'만을 설하여 집제라고 한 것은 다만 일어나게 하는 원인[起因] 한 가지만을 설한 것이고, 가타 중에서 업과 애와 무명이 모두 원인이 된다고 설한 것은 생겨나게 하는 원인[生因]과 일어나게 하는 원인, 그리고 그 같은 원인(즉 起因과 生因)의 원인을 모두 설한 것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업이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애'가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경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47) 또한 그 경에서는 "[무명] 다음의 행 등은 인(因)을 갖고 연(緣)을 갖고 실마리[緖]를 갖는다"고 순서대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48) 또한 [앞에서 논설한 것처럼] 별도의 종자와 밭을 건립하여 유취(有取)의 식과 4식주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애'만이 집제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46) 상동. 이는, 색·수·상·행은 식이 머무는 근거[因]가 되듯이(4식주, 본론 권제8 참조), 종자가 싹의 원인이 되듯이, 업과 애와 무명 등은 원인으로서 바로 집제이지만, 난문자가 인용한 계경은 다만 밀의로서 '애'만을 설하여 집제라 하였다는 경증이다.
47) 『잡아함경』 권제13 제334경(대정장2, p.92중), "이것은 이른바 유인유연유박(有因有緣有縛)의 법에 관한 경이니, 무엇을 일컬어 유인유연유박의 법에 관한 경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안근이 유인유연유박의 법이다. 무엇이 안근을 인으로 하고, 안근을 연과 박으로 삼는 것인가? 이를테면 안근은 업의 인이 되고, 업의 연이 되며, 업의 박이 된다. 무엇이 업을 인으로 하고, 업을 연으로 하며, 업을 박으로 삼는 것인가? 이를테면 업은 애의 인이 되고, 애의 연이 되며, 애의 박이 된다. 무엇이 애를 인으로 하고, 애를 연으로 하며, 애를 박으로 삼는 것인가? 이를테면 애는 무명의 인이 되고, 무명의 연이 되며, 무명의 박이 된다.……"
48) 앞의 경에 따를 경우, 본론에서의 실마리[緖]는 아마도 박(縛)의 오사(誤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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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떠한 법을 일컬어 '생겨나는 것[生]'이라 하고, 어떤 법을 일컬어 '일어나는 것[起]'이라고 한 것인가?
  3계(界)·5취(趣)·4생(生) 등의 품류로 차별되어 그 자체 출현하는 것을 설하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떠한 차별도 없이 후유(後有)로 상속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설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49) 즉 업과 유애(有愛)는 순서대로 그 같은 두 가지 원인이 된다. 비유하자면 종자가 곡식이나 보리 따위와는 다른 종류인 싹에 대해 능히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能生因]이 되고, 물이 일체의 싹에 대해 어떠한 차별 없이 능히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원인[能起因]이 되듯이 업과 유애가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애'가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떠한 이치로 증거를 삼은 것인가?
  '애'를 떠나 후유(後有)는 필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애를 갖은 이와 애를 떠난 이가 다 같이 명종하였을 경우, 오로지 애를 갖은 자에게만 후유가 다시 일어나게 되니, 이러한 이증으로 말미암아 '애'는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한 것이다. 즉 후유가 일어나는 일이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거나 하는 것은 결정코 '애'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애'로 말미암아 상속(相續)이 후유로 나아가게 되니, 현견하건대 만약 여기에 '애'가 존재한다면 마음의 상속은 자꾸만 그곳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의해 '애'가 존재하기 때문에 상속이 능히 후유로 치닫게 되는 것임을 추리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후신(後身)을 취함에 있어 탐애만큼 견고히 집착하는 법이 없으니, 마치 곱게 빻은 콩가루[蓽豆屑]를 목욕할 때 물에 개어 온몸에 바른 후 마르게 되면 몸에 달라붙어 떼어내기 어렵기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밖의 원인이 되는 법으로서 아애(我愛)만큼 후신에 집착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상과 같은 이증에 의해 '애'가 [후유를]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한 것이다.
  
  
  
  
49) 즉 어떤 존재가 욕계 인취(人趣)의 태생(胎生)으로 출현하는 것을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며, 인취로서 찰나찰나 상속 생기하는 것을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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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진리[諦]에 네 가지가 있다"고 설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경에서는 다시 진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첫째는 세속제(世俗諦)이며, 둘째는 승의제(勝義諦)이다.
  이와 같은 2제(諦)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의 지각은 그것이 파괴되면 바로 없어지며
  혜(慧)에 의해 다른 것으로 분석되어도 역시 그러한
  항아리나 물과 같은 것이 세속제라면
  이와는 다른 것을 승의제라고 이름한다.
  彼覺破便無 慧析餘亦爾
  如甁水世俗 異此名勝義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그 같은 존재[物]에 대한 지각이 그것이 파괴될 때 바로 없어지면, 그 같은 존재를 세속제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50) 예컨대 항아리가 깨어져 조각이 되었을 때 항아리에 대한 지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으며, 옷 따위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만약 어떤 존재가 혜(慧)로써 분석되어 제거될 때 그것에 대한 지각이 바로 없어지면 이것도 역시 세속제이니, 마치 물이 관념에 의해 색(色) 등으로 분석될 때 물에 대한 지각이 없어지는 것과 같으며, 불 따위도 역시 그러하다.51)
  
  
  
50) 어떤 사물의 내용이 파괴됨으로서 그것에 대한 지각이 상실되는 법을 세속제(samvrti-satya)라고 한다. 예컨대 숲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나무가 파괴되어 제거되면, 숲이라는 지각도 상실된다.
51) 어떤 화합된 적취물은 파괴되어 다수가 되었을지라도 그것에 대한 지각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예컨대 물 따위와 같은 존재가 바로 그러하다. 물을 분할하면 감각적으로 역시 물이지만, 그것을 혜(즉 판단력)로 더욱 분석하면 색·향·미·촉 등의 요소로 환원되고, 거기에는 더 이상 물이라고 하는 관념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즉 물이라고 하는 것은 색·향·미·촉의 화합물로서 일시 설정된 언설 관념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세간의 언어적 약속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당하고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세속제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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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그러한 존재가 아직 파괴되거나 분석되지 않았을 때에는 세속관념[世想]에 의해 설정된 명칭으로 시설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일시적으로 시설된 존재[施設有]이기 때문에 '세속'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이러한 세속의 이치에 의해 '항아리 따위가 존재한다'고 설하였을 경우, 그것이 진실되고 거짓이 아니라면 이를 '세속제'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존재[物]가 이와는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이를 승의제라고 이름한다. 즉 그러한 존재에 대한 지각은 그것이 파괴되더라도 없어지지 않으며, 아울러 혜에 의해 그 밖의 다른 존재로 분석되어 제거되더라도 그것에 대한 지각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일컬어 승의제라고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색 등의 존재는 파쇄되어 극미에 이를지라도, 혹은 뛰어난 혜에 의해 미(味) 등으로 분석되어 제거될지라도 그 같은 색 등에 대한 지각은 항상 존재하는 것과 같으며,52) 수(受) 등도 역시 그러하다.53) 곧 이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승의'라고 이름한 것으로,54) 이러한 승의의 이치에 의해 '색 등이 존재한다'고 설하였을 경우, 그것이 진실되고 거짓이 아니라면 이를 '승의제'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대의 궤범사(軌範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출세간의 지(智)와 아울러 그 후에 획득한 세간의 정지(正智)에 의해 파악된 제법과 같은 것을 승의제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지에 의해 파악된 제법과 같은 것을 세속제라고 이름한다."55)
  
  
52) 색 등의 법은 뛰어난 혜에 의해 극미로 분석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색이기 때문에 색 등의 법은 궁극적인 승의의 법이다.
53) 수(受)·상(想) 등은 공간을 점유하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쪼개져 극미에 이르게 할 수는 없지만 뛰어난 혜로써 분석하여 일찰나의 그것에 이르게 할 수는 있으며, 그렇더라고 그 같은 수 등에 대한 지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54) 다시 말해 일체의 시간에 걸쳐 그 본질[體]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승의(paramartha)라고 이름한 것이다.(『현종론』 권제29, 한글대장경201, p. 272)
55) 여기서 선대 궤범사는 보광에 의하면 경부(經部) 중의 선대 궤범사이며, 법보에 의하면 경부 이사(異師)이다. 즉 제법분별을 교학의 일차적 과제로 삼는 유부에 있어 승의제란 두말할 것도 없이 더 이상 분석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의 구성요소인 법[勝義有]에 대한 것이지만, 이 같은 유부의 승의유에 반대하는 경량부에서는 다만 무루정에 의해 획득된 지식 즉 무루관지(無漏觀智)와 출정(出定) 후에 획득된 세간정지(世間正智)에 의해 인식된 제법을 승의제라고 하였다. 즉 정지(正智)에 의해 파악된 제법은 전도된 것이 아니므로 승의제이며, 비(非)정지에 의해 파악된 것은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제라고 하여(『구사론소』) 승의·세속에 특정의 교학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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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진리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어떠한 방편을 부지런히 닦아야 견도제(見道諦), 즉 진리를 관찰하는 도로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장차 진리를 관찰하는 도로 나아가려는 이는
  마땅히 계(戒)에 머물면서 문(聞)·사(思)·수(修)로써
  성취되는 바를 부지런히 닦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말과, 말과 뜻과, 뜻이 그것의 경계이다.
  將趣見諦道 應住戒勤修
  聞思修所成 謂名俱義境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유정으로서 발심하여 장차 진리를 관찰하는 도로 나아가려는 자는 마땅히 먼저 청정한 시라(尸羅, 즉 계율)에 안주하고, 그런 연후에 문소성혜(聞所成慧) 등을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이를테면 먼저 진리의 관찰에 수순하는 청문(聽聞)을 섭수하고, 듣고 나서는 들은 법의 뜻[法義]을 부지런히 추구하며, 법의 뜻을 듣고 나서 전도됨이 없이 사유해야 하니, 사유하고 나서야 비로소 능히 선정에 의지하여 수습(修習)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수행자는 이와 같이 계(戒)에 머물면서 부지런히 닦아 문소성혜(聞所成慧)에 의해 사소성혜(思所成慧)를 일으키고, 사소성혜에 의해 수소성혜(修所成慧)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혜(慧)의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 가지 혜의 상은 말[名]과, 말과 뜻[義] 모두와, 뜻을 소연의 대상으로 삼기에 다음과 같은 차별이 있다.56) 문소성혜는 오로지 말의 경계[名境]만을 소연으로 삼으니, 아직은 능히
  
  
56) 『대비바사론』 권제42(한글대장경119, p.397) 참조. 즉 세 가지 혜라고 하는 것은 말 [名, nama]과 뜻[義, artha]에 따른 이해 판단력의 차별로 말미암아 분류된 것으로, 문소성혜는 다만 말만을 대상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며, 사소성혜는 말과 뜻을 대상으로 삼아 어느 때는 말을 통해 뜻을 추구하고, 혹은 뜻을 통해 말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소성혜는 오로지 뜻만을 대상으로 하여 획득된 판단력이다. 이는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수영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부목(浮木)에 의지해야 하고, 일찍이 배웠더라도 익숙하지 못하면 그것을 버리기도 하고 혹은 의지하기도 하지만, 완전히 배운 이는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력으로 건너가는 것과 같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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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文]을 버리고 뜻을 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소성혜는 말과 뜻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으니, 어떤 때에는 말에 의해 뜻을 낳기도 하며, 어떤 때는 뜻에 의해 말을 낳기도 하니, 아직은 완전하게 말을 버리고 뜻을 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소성혜는 오로지 뜻의 경계만을 소연으로 삼으니, 이미 능히 말을 버리고 오로지 뜻만을 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깊고도 빠른 물살에 떠내려갈 때, 일찍이 [수영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는 [부목(浮木)과 같은] 소의처를 버리지 않으며, 일찍이 배웠더라도 아직 성취하지 못한 자는 [그러한 소의처를] 혹은 버리기도 하고 혹은 잡기도 하며, 일찍이 잘 배운 자는 소의처에 의지할 필요 없이 자신의 힘으로 헤엄쳐 건너가는 것과 같으니, 세 가지 혜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사소성혜는 [별도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이미 말을 소연으로 삼고 뜻을 소연으로 삼는 것이므로 이는 마땅히 순서대로 문소성혜와 수소성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자세히 살펴보건대 이러한 세 가지 혜의 상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으니, 이를테면 수행자가 지교(至敎)를 들음에 따라 생겨난 뛰어난 혜를 '문소성(聞所成)'이라 이름하고, 정리(正理)를 생각함에 따라 생겨난 뛰어난 혜를 '사소성(思所成)'이라 이름하며, 등지(等持)를 닦음에 따라 생겨난 뛰어난 혜를 '수소성(修所成)'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논주 세친의 해석) 그리고 여기서 '소성(所成)'이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세 가지 뛰어난 혜는 바로 듣고 생각하는 등의 원인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마치 세간에서 생명[命]과 소[牛] 등에 대해 순서대로 '밥'과 '풀에 의해 성취된 것[食·草所成]'이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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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온갖 유정으로서 수(修, 수소성혜의 '수'로서 等持)에 대해 부지런히 배우기를 원하는 자는 어떻게 신기(身器, 수행의 바탕이 되는 몸과 마음)를 청정히 하여야 '수'를 신속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몸과 마음의 원리(遠離)를 갖추고
  만족하지 않음과 대욕(大欲)이 없어야 하는데,
  이는 이미 획득한 것과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희구함이 '없는 것'을 일컫는 말로서
  具身心遠離 無不足大欲
  謂已得未得 多求名所無
  
  그 대치와 상위하는 것이고, 3계와
  무루에 통하며, 무탐의 성질이다.
  4성종(聖種) 역시 그러하여
  앞의 세 가지는 오로지 희족(喜足)이다.
  治相違界三 無漏無貪性
  四聖種亦爾 前三唯喜足
  
  즉 세 가지는 도를 돕는 생구(生具)이고, 후자는 업으로
  이는 네 가지 애탐의 생기를 대치하기 위한 것이니
  아소(我所)와 아(我)의 개별적인 욕탐을
  잠시 멈추게 하고 영원히 제거하기 때문이다.
  三生具後業 爲治四愛生
  我所我事欲 暫息永除故
  
  논하여 말하겠다. 신기(身器)가 청정하게 되는 것은 대략 세 가지 원인에 의해서이다.
  무엇을 세 가지 원인이라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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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는 신심(身心)을 원리(遠離)하는 것이며, 둘째는 희족(喜足)하고 소욕(少欲)하는 것이며, 셋째는 4성종(聖種)에 머무는 것이다.
  여기서 '신(身)의 원리'란 서로 뒤섞여 머무는 것[相雜住]에서 떠나는 것이며, '심(心)의 원리'란 이를테면 불선의 심(尋)을 떠나는 것이다.57)
  그리고 이 두 가지는 희족과 소욕에 의해 쉽게 성취할 수 있다. 여기서 희족이라고 하는 말은 기쁘게 만족하지 않음[不喜足]이 없는 것이며, 소욕이란 대욕(큰 욕망)이 없는 것을 말한다.58)
  그렇다면 '없는 것'의 두 가지 종류(기쁘게 만족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대욕이 없는 것)의 차별은 어떠한가?
  대법(對法)의 모든 논사들은 다 같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미 획득한 좋은 의복 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을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아직 획득하지 못한 좋은 의복 등에 대해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을 '대욕'이라고 한다."
  어찌 더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도 역시 또한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이 두 가지의 차별은 마땅히 이루어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이같이 설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획득한 것에 대해 좋지도 않고 많지도 않다고 하여 섭섭해하고 기뻐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좋은 것을 희구하고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을 일컬어 '대욕'이라 한다."(논주 세친의 해석) 즉 희족과 소욕은 능히 이 같은 사실(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과 대욕)을 대치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으로, 마땅히 차별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57) 『현종론』에서는 서로 뒤섞여 머무는 것에서 떠나는 것을 나쁜 친구[惡友]를 멀리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권제29, 앞의 책, p.278) 그리고 '심(尋)'은 부정지법의 하나로서, 마음으로 하여금 뭔가 감각적 대상을 추구하게 하는 보다 거친 의식작용, 즉 전5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58) "즉 온갖 유정으로서 생을 자조(資助)하는 도구들을 많이 추구하는 자들은 낮에는 나쁜 패거리들과 가까이하고, 밤에는 산란한 생각[尋思]을 일으키니, 이로 말미암아 마음은 선정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현종론』, 앞의 책,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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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희족과 소욕은 3계와 무루에 통하지만, 그것에 의해 대치되는 두 종류(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과 대욕)는 오로지 욕계에 계속되는 법일 뿐이다. 즉 희족과 소욕의 본질은 바로 무탐(無貪)이며, 그것에 의해 대치되는 두 종류는 욕탐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
  나아가 능히 모든 성자를 낳기 때문에 성종(聖種)이라 이름한 것으로, 4성종의 본질 역시 무탐이다.59) 그런데 이 네 가지 가운데 앞의 세 성종의 본질은 오로지 희족으로, 이를테면 의복과 음식과 와구(臥具)에 대해 획득한 바에 따라 모두 희족을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 번째의 성종은 말하자면 요단수(樂斷修)이다.60)
  이것이 어떻게 역시 또한 무탐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 하겠는가?
  능히 유탐(有貪, 상 2계의 탐)과 욕탐(欲貪, 욕계의 탐)을 버렸기 때문이다.
  어떠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 4성종을 건립한 것인가?
  모든 제자는 세속에서의 생의 도구[生具, 의복 음식 따위]와 세속의 사업을 버리고 해탈을 추구하기 위해 부처님에게 귀의하여 출가하였으므로 법왕(法王)이신 세존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도를 닦는 것을 돕는 두 가지의 사업을 제시하셨으니, 첫 번째가 생의 도구였고, 두 번째가 사업이었다. 즉 [4성종 중의] 앞의 세 가지는 도를 닦는 것을 돕는 생의 도구이고, 뒤의 것(즉 요단수)은 도를 닦는 것을 돕는 사업이니, "그대들이 만약 능히 앞의 생의 도구에 의지하여 뒤의 사업을 행한다면 해탈은 멀지 않으리"라고 하였던 것이다.61)
  어째서 이와 같은 두 가지 사업만을 제시하게 된 것인가?
  
  
  
59) 4성종(arya vamsa)이란, 의복희족성종·음식희족성종·와구(臥具)희족성종·요단수(樂斷修).(후술)
60) 요단수란 번뇌를 끊을 성도를 닦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이러한 능(能)대치가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 역시 무탐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
61) 『중아함경』 권제21 「설처경(說處經)」(대정장1, p.563중하), "……아난이여, ……만약 이러한 4성종을, 젊은 비구들을 위해 그들에게 가르친다면, 그들은 곧 안온을 얻고, 힘을 얻고, 즐거움을 얻을 것이며, 몸과 마음이 번민하지 않고 종신토록 범행을 행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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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가지 종류의 애(愛)가 생겨나는 것을 대치하기 위한 것으로, 그래서 계경에서 "필추들이여, 잘 들어라. '애'는 의복을 원인으로 하여 마땅히 생겨나야 할 때에 생겨나고, 마땅히 머물러야 할 때에 머무르며, 마땅히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음식과 와구와 유(有)·무유(無有)를 원인으로 하는 '애'에 대해서도 모두 이와 같이 설해야 할 것이다"고 말하였던 것이니,62) 바로 이러한 네 가지 '애'를 대치하기 위해 오로지 4성종을 설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뜻에 근거하여 다른 방식[異門]으로 설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부처님께서는 아(我)와 아소(我所, 나의 것)의 사업에 대한 욕망[欲]을 잠시 멈추게 하고,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네 가지 성종을 설하신 것이다. 여기서 아소의 사업이란 의복 따위를 말하고, 아의 사업이란 자신을 말하며, 그것을 대상으로 하는 탐을 일컬어 욕망이라고 하였다. 즉 앞의 세 가지(의복·음식·와구)에 대한 탐을 잠시 멈추게 하기 위해 앞의 세 가지 성종을 설하였으며, 네 가지(앞의 세 가지와 자신)에 대한 탐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네 번째 성종을 설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수(修)'의 소의가 되는 신기(身器)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문(門)에 의해 능히 올바로 '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63)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에 들어가는 문에는 요컨대
  부정관과 지식념의 두 가지가 있으니
  
  
  
62) 여기서 계경이란 『대집법문경(大集法門經)』(대정장1, p.229하)으로, 의복애·음식애·와구애·무유애(無有愛, 비존재에 대한 애착)에 대해 설하고 있다.
63) 신기가 청정하게 되었으면 이제 바야흐로 견도의 본격적인 준비단계, 즉 가행위에 들어갈 수 있다. 가행위에는 3현위(賢位)와 4선근(善根)의 일곱 가지 방편도가 있다. 3현위는 아직 깨달음 밖의 단계이기 때문에 성자와 구별하여 '현위' 혹은 외범위(外凡位)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5정심관(停心觀)과 별상염주와 총상염주 세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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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과 심(尋)이 두드러진 자가
  순서대로 마땅히 닦아야 하는 것이다.
  入修要二門 不淨觀息念
  貪尋增上者 如次第應修
  
  논하여 말하겠다. '수'에 올바르게 들어가는 문에는 요컨대 두 가지의 문이 있으니, 첫째는 부정관(不淨觀)이고, 둘째는 지식념(持息念)이다.64)
  누가 어떠한 문으로 능히 올바로 '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순서대로 탐과 심(尋)이 두드러진 자가 들어가는 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탐이 맹렬히 치성하여 자주 나타나는 이와 같은 유정을 탐행자(貪行者)라고 이름하는데, 그는 부정(不淨)을 관하여 능히 올바로 '수'에 들어갈 수 있으며, 심(尋)이 많아 마음이 산란한 이를 심행자(尋行者)라고 이름하는데, 그는 식념(息念)에 의해 능히 올바로 '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지식념은 다수의 외적 경계를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능히 산란하는 심(尋)을 억지할 수 있지만, 부정관은 다수의 현(顯)·형색(形色)의 차별을 소연으로 삼아 다수의 '심'을 인기하기 때문에 그것('심'의 심소)을 대치하는 공능이 없다."65)
  또 다른 유여사는 말하기를, "이러한 지식념은 내문(內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능히 산란하는 심(尋)을 억지할 수 있지만, 부정관은 마치 안식이 그러한 것처럼 다수의 외문(外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대치하는 공능
  
  
  
64) 즉 수소성혜의 '수'에 들기 위해서는 신기(身器)를 청정히 한 다음, 먼저 부정관(不淨觀)·자비관(慈悲觀)·인연관(因緣觀)·계분별관(界分別觀)·지식념(持息念, 또한 數息觀)의 5정심관을 닦아야 하지만, 세친은 이 중에서 정심위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문[要門]으로 부정관과 지식념만을 언급하고 있다. 참고로 부정관은 자타의 백골을 관찰하여 탐욕심을 정지시키는 관법이고, 자비관은 일체의 중생을 자신의 부모같이 경애상(敬愛想)으로 관하여 진에심을 정지시키는 관법, 연기관은 12연기의 이치를 관하여 우치심을 정지시키는 관법, 계분별관은 자아란 지·수·화·풍·공·식의 6계가 인연에 의해 일시 화합한 것일 뿐이라고 관하여 아·아소에 대한 악견을 정지시키는 관법, 수식관은 들숨과 날숨을 헤아림으로써 산란심을 정지시키는 관법이다.
65) 즉 부정관(asubha-bhavana)이 소의신의 형색과 현색 등의 차별을 관하는 것인 반면 지식념(anapana-smrti)은 다만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관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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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먼저 부정관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관법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가지의 탐(貪)을 모두 대치하기 위한 것으로
  먼저 골쇄를 관하는 것에 대해 분별하리니,
  널리 바다에 이르고 다시 줄여 관찰하는 것을
  '처음으로 업을 익히는 단계'라고 이름한다.
  爲通治四貪 且辯觀骨鎖
  廣至海復略 名初習業位
  
  발의 뼈를 제거하고 머리의 반쪽에 이르는 것을
  일컬어 '이미 익숙하게 닦는 단계'라고 하며
  마음을 미간에 묶어 두는 것을
  '작의(作意)를 초월하는 단계'라고 이름한다.
  除足至頭半 名爲已熟修
  繫心在眉間 名超作意位
  
  논하여 말하겠다. 부정관을 닦는 것은 바로 탐을 대치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탐은 대략 네 가지 종류로 차별되니, 첫째는 현색탐(顯色貪)이며, 둘째는 형색탐(形色貪)이며, 셋째는 묘촉탐(妙觸貪)이며, 넷째는 공봉탐(供奉貪)이다.66)
  
  
66) 현색탐(구역은 色欲)은 청·황·적·백 등의 색상에 대한 탐욕, 형색탐(또는 形貌欲)은 용모에 대한 탐욕, 묘촉탐(또는 觸欲)은 신체상의 좋은 감촉에 대한 탐욕, 공봉탐(또는 威儀欲)은 표업에 따라 일어나는 탐욕으로, 말하자면 행동거지나 신분·지위에 대한 탐욕이다. 즉 이러한 네 가지 탐을 대치하기 위해 내부의 시체[內屍, 자신의 시체, 이근자의 경우]와 외부의 시체(둔근자의 경우)를 관찰하는 것이 부정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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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청어(靑瘀) 등을 소연으로 하여 부정관을 닦으면 첫 번째의 탐을 대치할 수 있으며, [새나 짐승 등에] 먹히는 것[被食] 등을 소연으로 하여 부정관을 닦으면 두 번째 탐을 대치할 수 있으며, 벌레나 파리들이 들끓는 것 등을 소연으로 하여 부정관을 닦으면 세 번째 탐을 대치할 수 있으며, 시신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소연으로 하여 부정관을 닦으면 네 번째 탐을 대치할 수 있다.67)
  그러나 만약 골쇄(骨鎖, 백골이 서로 엉켜 있는 모양)를 소연으로 하여 부정관을 닦을 경우, 이와 같은 네 가지 탐을 능히 모두 대치할 수 있으니, 골쇄 중에는 네 가지 탐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야흐로 골쇄관을 닦는 것에 대해 분별해 보리라.
  이것은 오로지 승해(勝解)의 작의(作意)에 포섭되기 때문에, 적은 부분(5온 중 색온)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번뇌를 끊지 못하고 다만 능히 억제하고 굴복시켜 현행하지 않게 할 따름이다.
  그런데 유가사(瑜伽師)가 이러한 골쇄관을 닦을 때에는 모두 세 단계가 있으니, 첫 번째는 '처음으로 업을 익히는 단계[初習業位]'이며, 두 번째는 '이미 익숙하게 닦는 단계[已熟修位]'이며, 세 번째는 '작의(作意)를 초월하는 단계[超作意位]'이다. 이를테면 관행자(觀行者)가 이와 같은 부정관을 닦고자 할 때에는 마땅히 먼저 마음을 자신의 몸 한 부분에 계속(繫屬)시켜야 하는데, 혹은 발가락에, 혹은 미간에, 혹은 콧등에, 혹은 그 밖의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 마음을 머물게 한다. 그리고 나서 승해의 힘에 의해 자신의 몸 한부분을 '피부와 살이 물러지고 떨어져나가 점차 뼈만이 앙상하게 되는
  
  
  
67) 『현종론』 권제29(앞의 책, p.287)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설하고 있다. "현색탐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청어상(靑瘀想)과 이적상(異赤想)을 닦아야 하며, 형색탐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피식상(被食想)과 분리상(分離想)을 닦아야 하며, 묘촉탐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파괴상(破壞想)과 해골상(骸骨想)을 닦아야 하며, 공양탐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방창상(脹想)과 농란상(膿欄想)을 닦아야 한다." 여기서 '청어상'이란 아무리 미인이라 하더라도 죽으면 피고름이 엉켜 푸르죽죽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적'이란 본래의 색과는 달리 불그죽죽하게 된 것을 말하며, '피식'이란 짐승이나 조류 혹은 구더기에게 뜯어먹히는 것, '분리'란 사지의 뼈마디가 떨어져 나가는 것, '방창'이란 시체가 팅팅 부어 가죽자루처럼 되는 것, '농란'이란 고름이 흐르며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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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을 가상으로 사유하고, 나아가 온몸의 골쇄를 관찰한다. 그리하여 한 몸(자기 몸)을 관찰하고 나서 다시 두 번째의 몸(다른 이의 온몸)을 관찰하며, 이와 같이 점차로 확대하여 하나의 방, 하나의 절[園], 하나의 촌락, 하나의 국토, 나아가 대지로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두루 관찰하여 그 사이가 골쇄로 가득 차 있다고 사유한다. 그리고 다시 승해를 증대시키기 위해 널리 확대시켜 나갔던 것을 점차로 줄여 관찰하여 마침내 오로지 한 몸의 골쇄만을 관찰한다. 이렇게 점차로 줄여 나가면서 부정관을 성취하게 될 때를 유가사가 '처음으로 업을 익히는 단계'라고 이름한다.
  또한 줄여 관찰하는 승해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 한 몸 중에서 먼저 발의 뼈를 제거한 나머지의 뼈를 사유하여 거기에 마음을 묶어 두고, 나아가 점차로 머리의 반쪽 뼈를 제거한 나머지 반쪽의 뼈를 사유하여 거기에 마음을 묶어 둔다. 이렇게 점차로 줄여 나가는 부정관을 성취하게 될 때를 유가사가 '이미 익숙하게 닦는 단계'라고 이름한다.
  또한 줄여 관찰하는 승해를 자유 자재하도록 하기 위해 반쪽의 머리뼈마저 제거하고, 마음을 미간에 두고 오로지 하나의 소연에 집중하여 고요히 머물게 한다. 이같이 지극히 줄여진 부정관을 성취하게 될 때를 유가사가 '작의(作意)를 초월하는 단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부정관은 소연은 적지만 자재(自在)는 적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여기에는 작의가 이미 성숙한 상태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와 이미 성숙한 상태와, 아울러 소연에 자신과 바다에 이르는 [크고 작음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68)
  
  
68) 제1구 : 어떤 부정관은 소연은 적지만 자재는 적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작의가 이미 성숙한 상태에서 자신의 골쇄만을 관찰하는 때가 그러하다. 제2구 : 어떤 부정관은 자재는 적지만 소연은 적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작의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이 때 자재는 적다)에서 소연의 골쇄가 바다에 이르기까지 충만한 것을 관찰하는 때가 그러하다. 제3구 : 어떤 부정관은 소연과 자재가 모두 적은 경우가 있으니, 작의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골쇄만을 관찰하는 때가 그러하다. 제4구 : 어떤 부정관은 소연과 자재가 모두 적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작의가 이미 성숙한 상태에서 골쇄가 바다에 이르기까지 충만한 것을 관찰하는 때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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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부정관의 성질은 어떠하며, 그것이 근거하는 지(地)는 몇 가지인가? 또한 어떠한 경계를 소연으로 삼으며, 어떠한 처소에서 생겨나는 것인가? 그 행상은 어떠하며, 어떠한 시간[世]을 연으로 하는 것인가? 무루라고 해야 할 것인가, 유루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염(離染)에 의해 획득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가행(加行)에 의해 획득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탐의 성질로, 열 가지 지(地)에 의지하며
  욕계 색경(色境)을 소연으로 하고, 인취에서 생겨나며
  부정(不淨)의 행상으로, 자세(自世)를 연으로 하며
  유루이며, 두 가지 득(得) 모두와 통한다.
  無貪性十地 緣欲色人生
  不淨自世緣 有漏通二得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물은 바에 따라 지금 순서대로 대답하리라.
  말하자면 이러한 부정관은 무탐(無貪)을 본질로 한다.69)
  모두 열 가지 지(地)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네 정려와 네 근분정(近分定)과 중간정과 욕계가 바로 그것이다.70)
  오로지 욕계에서 관찰되는 색처의 경계[色境]만을 소연으로 한다.
  욕계에서 관찰되는 바는 무엇인가?
  이를테면 현색(顯色)과 형색(形色)이니, 그 뜻[義]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에 따라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71)
  
  
69) 부정관은 탐욕을 거역하려는 작의[違逆作意]에 의해 인기된 것으로, 탐욕을 능히 직접적으로 대치하기 때문이다. 즉 탐욕은 청정상이라 생각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으로, 그러한 생각은 이 같은 관법에 의해 제거되기 때문이다.
70) 즉 무색계에는 색법이 존재하지 않아 그것을 소연으로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무색정을 제외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의 9지에서 일어난 부정관은 정심(定心)이지만, 오로지 욕계로부터 일어난 부정관만은 산심(散心)이다.
71) 부정관이 욕계 색처, 즉 현·형색을 소연으로 삼는다고 한 이상 말[名, 불상응행법의 하나]과 뜻[義] 중에서 말은 소연의 경계로 삼지 않을지라도 말의 내용이 되는 뜻은 그것의 소연이 된다는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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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로지 인취(人趣)의 3주(洲)에서만 생겨나는 것으로, 북구로주는 제외된다.72)
  이미 부정(不淨)이라고 이름하였기 때문에 오로지 부정의 행상(行相, 지식의 형상)일 뿐이다.
  3세 중 어떠한 시간에 존재하더라도 자신의 시간대[自世]의 경계만을 소연으로 삼는다. 그러나 만약 불생법(不生法)이라면 3세의 경계를 모두 소연으로 삼는다.73)
  이미 오로지 승해의 작의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관법은 이치상 마땅히 오로지 유루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74)
  이염득(離染得)과 가행득(加行得) 모두에 통하는 것으로, 이미 획득하였고 아직 획득하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75)
  부정관의 상의 차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다음으로 지식념(持息念)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의 차별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지식념은 혜(慧)로서 5지(地)에 의지하며
  바람을 연으로 하고, 욕계 신(身)에서 일어나며
  두 가지로 획득되고, 진실로서 외도에게 일어나지 않으며
  여섯 가지의 원인이 있으니, 수(數) 등이 그것이다.
  
  
  
72) 북구로주에는 천취와 마찬가지로 푸르죽죽한 어혈[靑瘀] 등의 부정상이 없기 때문이다.
73) 즉 연이 결여되어 생겨나지 않은 필경불생법으로서의 부정관일 경우, 그 대상은 3세에 걸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74) 즉 부정관은 가상(假想)으로써 부정이라 관하는 유루의 승해작의에 포섭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실지견하는 견도 16행상의 부정[共相作意]과는 달리 오로지 유루일 뿐이다.
75) 일찍이 획득한[曾得] 부정관은 이염득으로서 하지의 염오를 떠나는 단계에서 상지의 부정관을 획득하며,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는[未得] 부정관은 가행득으로서 대가행을 일으켜 그 힘에 의해 낳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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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息念慧五地 緣風依欲身
  二得實外無 有六謂數等
  
  논하여 말하겠다. '지식념'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계경 중에서 설하고 있는 아나아파나념(阿那阿波那念)을 말한다.76) 여기서 '아나(ana)'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숨을 지녀[持息] 들이쉰다는 말로서, 이는 바로 바깥의 바람[外風]을 끌어당겨 몸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파나(apana)'란 이를테면 숨을 지녀 내쉰다는 말로서, 이는 바로 안의 바람[內風]을 끌어당겨 몸 밖으로 나가게 한다는 뜻이니, 혜(慧)가 염(念)의 힘에 의해 이것(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기 때문에 아나아파나념이라고 이름한 것이다.77)
  [이러한 지식념은] 혜를 본질로 한다. 그렇지만 '지식념'이라고 설한 것은 4념주와 마찬가지로 '염(念)'의 힘으로써 대상(출식과 입식)에 대해 해야 할 일(즉 기억하는 것)을 분명하게 성취하기 때문이다.78)
  5지(地)에 통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초·제2·제3정려의 근분과 정려중간과 욕계가 바로 그것이니, 이러한 지식념은 오로지 사수(捨受)와 상응할 뿐이기 때문이다. 즉 [욕계의] 고수와 낙수는 능히 심(尋)에 수순하여 그것을 인기하지만, 이러한 념은 '심'을 대치하기 때문에 [고수·낙수와] 구기(俱起)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색계의] 희수와 낙수는 능히 마음을 쏟는 것[專注]에 위배되지만, 이러한 념은 대상에 대해 마음을 쏟음으로써 성취되니, 이 같
  
  
  
76) 『잡아함경』 권제29 제802경, 제803경(대정장2, p.206상), "세존께서 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을 닦아야 할 것이니, 만약 안나반나념을 수습하기를 많이 수습할 경우, 몸이 지식(止息)되고 마음이 지식되며, 유각유관(有覺有觀, 즉 有尋有伺)이 적멸 순일하여 분명한 상(想)을 수습됨에 만족하게 되리라'고 하셨다."
77) 이러한 들이쉬고 내쉬는 숨(入·出息)을 관찰하는 것은 혜(慧)이지만(후술), 염(念) 심소의 도움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지식념'이라고 하는 것이다.
78) 지식념의 자성이 혜(慧)임에도 (지식)'념'이라고 한 것은, '염(smrti)'의 힘으로 말미암아 들숨과 날숨의 양을 기억하여 지니기 때문이다. 즉 숨을 소연으로 하는 정혜(定慧)의 획득 성취는 염의 공능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그것을 '염'이라고 설한 것으로, 이는 마치 역시 혜를 본질로 하지만 그러한 혜가 염의 힘에 의해 대상에 머물기 때문에 '염주'라고 하는 것과 같다.(4념주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3, p.10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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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상위로 말미암아 [희수·낙수와] 구기하지 않는 것이다.79)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아래 세 근본정려 중에도 역시 사수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는 곧 지식념이 여덟 지(地, 앞에서 언급한 5지와 세 근본정)에 의지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다.
  그리고 위의 정려(제4정려 이상)가 현전하면 숨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념은] 결정코 바람[風]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80)
  욕계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오로지 북구로주를 제외한 인취와 천취에만 존재한다.
  이염득과 가행득 모두에 통한다.81)
  오로지 진실한 작의와 상응할 뿐이다. 즉 이것은 정법을 지닌 유정이라야 비로소 능히 수습할 수 있는 것으로, 외도에게는 존재하지 않으니, 설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며, 스스로는 미세한 법을 능히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82)
  또한 지식념은 여섯 가지의 원인을 갖춤으로 말미암아 그 상이 원만하게 되니, 첫째는 수(數)이며, 둘째는 수(隨)이며, 셋째는 지(止)이며, 넷째는 관(觀)이며, 다섯째는 전(轉)이며, 여섯째는 정(淨)이다.
  '수(數, ganana)'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마음을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
  
  
  
79) 지식념은 이 같은 5지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이러한 염은 사수(捨受)와 상응할 뿐이기 때문에(왜냐 하면 욕계의 고수·낙수는 尋을 인기하고, 색계의 희수·낙수는 專注에 위배되지만, 이러한 지식념은 '심'을 대치하고 경계에 전주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욕계 고·낙수와도, 색계 희·낙수와도 상응 구기하지 않는 것이다) 앞의 세 가지 근본정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제4정려 이상에는 비록 사수만이 존재할지라도 숨[息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80) 그러나 다만 숨쉬는 바람[息風]을 소연의 경계로 삼을 뿐, 말을 인기하려는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발어풍(發語風), 고수를 제거하려고 할 때 이는 제기풍(除棄風), 모공에 따라 일어나는 수전풍(隨轉風), 몸을 격동시켜 표업을 일으키는 동신풍(動身風)을 소연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현종론』 권제29, 앞의 책, p.295)
81) 그러나 중현에 의하면 지식념은 오로지 가행에 의해서만 획득된다. 왜냐 하면 이것은 아직 염오를 떠나지 않은 자의 선정으로, 가행에 의해 현재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는 다만 근분지에 포섭될 뿐 근본정려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미 설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위의 책)
82) 또한 그들 외도에게는 아집(자아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에 아집과는 상반되는 이 같은 지식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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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어떠한 가행도 짓지 않고, 몸과 마음을 편안히 놓아둔 채 오로지 들숨과 날숨만을 생각하고 기억하여 하나에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헤아리는 것[數]을 말하니, 마음이 경계(즉 입식·출식)에 너무 매이거나 흩어지는 것을 염려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세 가지 과실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수를 덜 헤아리는 과실[數減失]로서, 두 숨을 한 숨으로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수를 더 헤아리는 과실[數增失]로서, 두 숨을 한 숨으로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헤아리는 것이 뒤섞이는 과실[雜亂失]로서, 들숨을 날숨이라 하고 날숨을 들숨이라고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은 세 종류의 과실을 떠난 것이라면, 그것을 일컬어 '올바른 수'라고 한다. 그런데 만약 열까지 헤아리는 중간에 마음이 산란해진 자라면 마땅히 다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차례로 그것을 헤아리고, 끝마친 후 다시 시작하여 마침내 선정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83)
  '수(隨, anugama)'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마음을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여 어떠한 가행도 짓지 않고 숨을 따라[隨息] 가는 것으로, 숨이 들고 날 때 그것이 어느 정도 멀리 이르는지를 생각[念]하는 것을 말한다. 즉 숨이 들어올 때 그것이 온몸에 두루 미치는지, 일부분에 미치는지를 생각하며, 그러한 숨이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따라가 목구멍, 심장, 배꼽, 엉덩이, 넓적다리, 무릎, 종아리, 내지는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항상 그것을 따라 쫓으며[隨逐] 생각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숨이 나가는 경우에도 그것이 몸을 떠나 1책(磔)이나 1심(尋)에 이르기까지 항상 그것을 따라 쫓아가며 생각해야 한다.84)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숨이 나갈 때 지극히 멀리 이를 경우, 풍륜(風
  
  
  
83) 참고로 숨을 헤아릴 때에는 들숨부터 먼저 헤아려야 하는데, 그것은 생을 처음 시작하는 단계[初生位]에서는 먼저 들숨을 쉬고, 나아가 죽을 때에는 최후로 날숨을 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죽고 태어나는 상태를 각찰(覺察)하기 때문에 점차로 비상(非常)의 상(想, 다음에 설할 총상념주의 하나)을 능히 수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84) 여기서 1책(vitasti)이란 손을 폈을 때 엄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의 길이를 말하며, 1심(혹은 弓)은 여덟 자 혹은 열 자의 한 길을 말한다. '심'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2 주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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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輪) 혹은 폐람바(吠嵐婆)에까지 이른다"고 하였다.85)
  그러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이러한 지식념은 진실의 작의와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止, sthana)'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마음을 집중하여 오로지 코끝에 두고, 혹은 미간에 두고, 나아가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좋아하는 곳에 두고, 그 마음을 편안히 쉬게 한[安止] 채로 마치 구슬을 꿴 실을 관찰하듯이 숨이 몸에 머물러 있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러한 숨이 몸을 차갑게 하는지, 따뜻하게 하는지, 손해가 되는 것인지, 이익이 되는 것인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관(觀, upalaksana)'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러한 숨의 바람을 관찰하고 나서 다시 숨과 함께 존재하는 대종과 조색(造色), 그리고 이러한 색에 근거하여 머무는 심과 심소를 관찰하는 것이니, 다 같이 5온을 경계로 삼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전(轉, vivartana)'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러한 숨의 바람을 소연으로 한 지각[覺]을 이후에 생겨나는 뛰어난 선근(善根) 중으로 이전(移轉)하거나 내지는 세제일법(世第一法)의 상태로 이전시켜 안치하는 것을 말한다.
  '정(淨, parisuddhi)'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로부터 승진하여 견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86)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염주로부터 시작하여 최후로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이르는 것을 일컬어 '전'이라 하고, 진지(盡智, 3계 9지의 번뇌를 모두 끊는 지) 등을 바야흐로 '정'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곧 [지식념이 원만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여섯 가지 상(相)을 포섭하기 때문으로, 중송(重頌)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85) 풍륜은 세간의 하방의 극점이며, 폐람바(vairambha, 구역에서는 嵐婆風)는 해와 달을 운행하는 바람으로 상방의 극점이다.
86) 지식념의 근거로서 이 같은 '전'과 '정'을 설한 것은, 그것이 다음에 설할 4선근과 견도의 방편(가행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으로, 유부교학 상에서 볼 때 지식념 그 자체로서는 의미 있는 수행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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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념에는 여섯 종류의
  다른 상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수(數)와 수(隨)와 지(止)와 관(觀)과
  전(轉)과 정(淨)의 상에 차별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숨[息]의 차별상은 어떠한지 마땅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들숨과 날숨은 몸에 따르는 것으로
  두 가지[身心] 차별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유정수[情數]이고, 유집수(有執受)가 아니며
  등류성이고, 하지(下地)의 연이 되지 않는다.
  入出息隨身 依二差別轉
  情數非執受 等流非下緣
  
  논하여 말하겠다. 몸이 생겨난 지(地)에 따라 숨도 그러한 지에 포섭되니, 숨은 바로 몸의 일부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들숨과 날숨이 일어나는 것은 몸과 마음의 차별에 의한 것으로, 무색계에 태어난 자와 갈랄람(羯剌藍)과 아울러 무심정과 제4정려 등에 든 자에게는 모두 이러한 숨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요컨대 소의신 중에 온갖 구멍과 틈이 있고, 들숨·날숨과 같은 지(地)의 마음이 바로 현전할 때 비로소 숨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87) 그리고 제4정려 등에서 나올 때와 태어나는 첫 순간에는 숨이 가장 먼저 들어오고, 제4정려 등에 들 때와
  
87) 즉 숨은 그것의 근거가 되는 몸이 있어야 하고, 바람의 길[風道, 이를테면 코나 입]을 통하여야 하고, 모공이 열려야 하고, 들숨·날숨과 동일한 지의 거친 마음이 현전할 때 비로소 일어나는 것으로, 이러한 네 가지 인연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결여될 경우 일어나지 않게 된다.(『대비바사론』 권제26, 한글대장경119, p.10) 따라서 무색계에는 이러한 네 가지 인연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갈랄람 등에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인연이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무심정 등에서는 네 번째 인연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숨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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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죽을 때에는 숨이 가장 나중에 나간다.
  숨은 유정수(有情數, 감정과 의식을 지닌 유정)에 포섭되니, 유정의 몸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88)
  또한 유집수(有執受, 유정의 몸 중에 감각이 있는 부분)가 아니니, 근(根)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숨은 바로 등류성(等流性)으로서, 동류인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이다. 또한 소장양(所長養)이 아니니, 몸이 증장하는 상태에서는 숨이 감소(느슨)하기 때문이다.89) 또한 이숙생이 아니니, 끊어진 이후에도 다시 상속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이숙생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90)
  이러한 숨은 오로지 자지(自地)와 그보다 상지의 마음의 소연이 될 뿐이니, 하지의 위의심(威儀心)과 통과심(通果心)의 경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91)
  
88) 즉 감각이 없는 무정수의 몸에는 숨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는 비록 숨이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라 할지라도 내부에 계속(繫屬)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89) 반대로 몸이 쇠퇴, 소멸할 때에는 숨이 증장하기(가빠지기) 때문에 소장양이 아니다.
90) 여기서 등류성이란 원인과 동류의 성질을 지닌 결과, 즉 등류과를 말하고, 소장양은 이를테면 음식 등에 의해 장양되는 후천적 결과를, 이숙생이란 전생의 업에 의해 초래되는 선천적 결과를 말한다.
91) 이를테면 제2선에 태어나 초선심을 일으키는 것이 위의심·통과심인데, 위의심은 차기식(借起識)으로, 오로지 초선의 색·성·촉을 소연으로 삼아도 식심(息心)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다. 또한 통과심은 천안통의 경우 색·성을, 변화심의 경우 색·성·미·촉을 연으로 삼아도 식심을 소연으로 삼는 일은 없다.